기획의 말
   2014년 9월, 세월호에서 돌아오지 못한 304명을 기억하기 위해 시작한 ‘304 낭독회’가 2022년 12월에 100회째를 맞습니다. 작가들과 시민들이 함께 만들어가는 304 낭독회는 떠난 이와 떠난 이를 잇고, 떠난 이와 남은 이를 잇고, 남은 이와 남은 이를 잇는 ‘연결’이 되고자 합니다. 《비유》에서는 문학으로 잇는 이 연결이 더 멀리 더 오래 기억될 수 있도록, 304 낭독회 100회 특집 기획에 함께하는 지면을 제공합니다. 304 낭독회에서 마련한 이 기획은, 304 낭독회의 매회 제목으로 사용된 96개의 문장을 토대로 한 시와 304 낭독회의 그때와 지금 그리고 내일에 관한 이야기를 담은 에세이를 4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특별 원고 1]
  사람의 시1)
  조용우

   너에게
   줄 수 있을까

   세상 모든 파도를
   아주 작은 너의 질문들을

   꽃들이 길을 잃고 멀리, 아주 멀리 별 하나가
   잘 가, 잘 가, 우리 믿음을 놓아주는 하늘 아래

   너의 다정한 한 아이를 오직 한 아이를
   너의 어른을

   나의 손을 꼭꼭 잡고 있는
   너의 손을

   모두의 비눗방울
   빛나는 얼음 흩어진 날씨들을

   조금만 더
   너에게 줄 수 있을까

   그가 너를 집으로 데려다주고 다시
   네가 그를 집으로 데려다주는 길을

   서로서로
   멈추지 않는 밤과 밤을

   빛은
   없어

   없는 나라에서
   나는 없는 곳에서

   줄 수 있을까
   나는

   약속하지 않을게 다시
   다짐하지 않을게

   우리가 얼마나 힘껏 가까이 있는지
   왜 아직도 여기 마주하는지

   사람이 되어가는 건
   왜 이렇게 조용할까

   답하지 않아
   묻지 않고

   아름다운 것,
   아름다운 것 짝을 맞추지 않고

   믿음을 두지 않고도
   너에게

   봄은
   사람의 시를 읽어주고 있어

   초록이 너무 푸른 초록이
   자꾸 솟아나고 있어

   동박꽃 여적 ㄷㆍㄹ앚시난,
   동백꽃 여태 펴 있으니, 그러니,

   나는 오랜 사람의 시를
   곁에 두고

   너의 시를 여기
   곁에 너에게


  우리가 그날을 기억하는 방법
  선우은실

   1. 4월 16일을 떠올리기
   2016년부터 304 낭독회에 일꾼으로, 관객으로, 낭독자로 참여하고 있다. 우연히 신춘문예 당선 소식을 들었던 시점부터 304 낭독회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으니, 나는 이 낭독회와 ‘글 쓰는 사람’으로 자신을 정체화하는 시간을 꼭 함께 보내는 셈이다.
   낭독회에 오는 사람 대다수에게는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한 가지 특이점이 있었다. 많은 이들은 그날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 떠올려 말했다. 낭독 원고에 썼거나, 원고엔 적지 않았으나 낭독하기 전에 잠시나마 언급했다. 또는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어도 그러한 낭독을 들으면서 그날 나는 뭘 했고 또 어땠는지 내심 떠올려보는 사람도 있었는데 내가 그랬다.
   사실 그날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를 떠올리는 것과 그날이 어땠는지 떠올리는 것은 좀 다른 일이다. 전자가 당시 자신의 행방에 대한 사실의 나열이라면, 후자는 그날 있었던 별개의 사실이 자신의 일로 개입되었음을 인지함으로써 구성되는 해석적 기억이다. 따라서 ‘그날의 나’와 ‘그날의 어떠했음’이 304 낭독회에서 변별 없이 소환되었다면 그건 그날 존재했던 저마다의 생활이 세월호 참사와 유관함을 고백하는 일일 것이다.
   사람들은 어째서 낭독회에서 그날 자신의 이야기를 할까. 모두의 삶의 무게로 주어진 세월호라는 공통 경험은 모두에게 ‘저마다의 고립’을 겪게 했다고 생각한다. 그날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든 또는 하지 않았든 정확히 그런 이유로 개인은 무기력함을 경험했다. 그리고 그런 자신에 대해 고백하는 일이란 (설령 아무리 여러 차례 말했다 할지라도) 어떤 것에 대해서는 결코 말하지 않았거나 말하지 못했다는 책임감으로 이어지며 절망을 자기 안에 가두는 일로 연결된다.
   그날에 대한 사람들의 기억을 들음으로써 그날을 떠올리는 일이 나는 매번 낯설었다. 그날이 어떠했다고 착착 접어 정리해버린 내 방식대로의 고착이, 더는 개인의 몫으로 남지 않고 우리의 경험으로 확장되는 쪽으로 변화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같은 방향으로의 의지를 가진 사람들이 조금씩 용기를 내어 그날의 자기에 대해서 말하는 일이 애도라는 행위와 관련될 수밖에 없는 까닭이기도 하다. 저마다의 일을 우리의 일로 환원하고 수용하는 것. 그럼으로써 나의 것을 나눌 뿐만 아니라 저이의 일 또한 나의 것으로 가져오는 것. 내가 304 낭독회에 참여하며 발견한 ‘특이점’의 정체는 이 중 하나가 아니라 이 모든 것이다. 나의 그날에서 우리의 오늘로 삶을 지속하는 일, 그리고 그 일의 무게를 지고 또 나누는 것을 나는 304를 통해서 겪는다.

   2. 그날 낭독된 것의 진실: 2016년 12월 스물여덟번째 낭독회
   2016년 12월 홍대 두리반에서 열렸던 스물여덟번째 304 낭독회에서 이장욱 시인이 시를 낭독했다. 그날의 낭독을 이 글에서 소개하려니 약간의 사실 확인이 필요했다. 요점은 이것이었다. ‘그날 낭독회에 대한 내 기억이 과연 맞는가.’ 그날의 낭독에는 특이점이 있었다. 이장욱 시인은 그날 두 편의 시를 낭독했다. 그중 한 편의 시를 읽을 때 낭독 책자에 적혀 있지 않은 표현이 덧붙었다. 당시 나는 책자를 거듭 들췄다. 편집 과정에서 놓쳤나? 인쇄 사고인가? 내 책자만 이상한가 해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알고 보니 인쇄 문제는 아니었다. 책자에 실린 시는 낭독자가 보낸 원고 그대로가 맞았고 낭독자가 현장에서 비워진 문장을 채워 읽었던 것이었다. 낭독자는 당시에 이러한 읽기에 대해 무어라 설명을 덧붙였는데 그 내용까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아무튼 내가 기억하는 게 맞다면 그렇게 채워 읽은 시는 두 편 중 다음의 것이었다.


   네가 없는 듯하다가 거기/ 처음부터 있었다고 느끼지./ 보이다가 무수히/ 보이지 않는// 너는 골목 모퉁이를 돌아서 깜빡/ 사라졌구나./ 내가 없는 곳에서 문득/ 태어났구나./ 다른 사람이 되었다./ 그건 방금 일어난 일.//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는 중이지. 어둠이었다가/ 순식간에 동이 트는 세계./ 잠깐 뒷모습을 놓쳤다가 다시 만나지 못하는./ 갑자기 시들어버린 공기를 이해하고/ 죽은 이의 목소리를 듣는.// 밤이 오면 천천히 눈을 감았다./ 여기서 네가 살고 있구나./ 깜빡임도 없이./ 내 인생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이장욱, 「깜빡임」 전문

   이 시의 문장들은 대체로 완전한 문장 형태로 쓰였다. 문장구조상 서술어가 생략된 채 행갈이가 되어 있어 불완전한 문장처럼 보이는 부분이 더러 있지만, 적어도 시 언어의 관점에서 봤을 때 미완성된 문장이라고 해서 시적으로도 미완인 것은 아니므로 감수해 읽을 수 있을 정도다. 이렇듯, ‘이미 완성된 것처럼 보이는 시구의 행간’이 정말로 ‘공백’으로 남아 있었고 그것을 채워 읽음으로써 ‘내가 본(읽은) 게 전부가 아니었군!’ 하는 깨달음을 얻었기에 그날의 낭독이 기억에 남는 것이라면, 그때 문장을 채워 읽은 시는 「깜빡임」이 맞을 것이다. 그런데 사실 처음에는 채워 읽기를 한 시가 이다음에 연달아 수록되어 있는 「움직이는 바다」였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깜빡임」을 다시 읽었고 이 시였던가 싶었는데, 이 글을 쓰다보니 또 아닌 것 같다. 역시 아닌가? 처음 생각대로 「움직이는 바다」였나?


   우리는 아무도 뜨거운 물속에서 타오르지 않// 래서 잘 지냈어요? 요즘은 날씨가 침묵이 꿈속의 사람들이 무서// 그런 걸 사랑이라고 말하지 마 기분 나// 가 있는 곳과 해류의 방향이 겹쳐 있다면, 겹치고 겹쳐서 천천히 내쪽으로 밀// 랜만이에요. 그냥 전화했어요. 이름을 불러보고 싶어서. 홍대 앞인데요. 자꾸 물속 같// 르는 불과 당신의 가장 선호하는 메뉴가// 영혼에 가까운 형태로 증류하는 것을 보라. 알코올은 타오르는 물이어서, 젖은 불이어서, 어떻게 쏟아지는지// 통령도 시에 나옵니다. 시에, 죽음의 시에 드디어// 먼 친구들이다 의외의 구름들이다 급류다 야 야 잠깐,// 다에 떠오르는,/끔찍한 모양으로 변해가는, 저 저 저// 를 보세요. 파도처럼 타오르는, 무너지는, 문득 멈추어서, 멈추어서, 멈춘 채//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움직이는 바다」 전문

   채워 읽은 시가 「깜빡임」이었으리라고 제멋대로 추론한 것과 비슷한 이유로, 이 시 또한 같은 방식으로 낭독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보다시피 이 시의 언어는 분절돼 있다. 하다 만 말 또는 듣다 만 말 같다. 거의 모든 문장이 그렇게 쓰여 있으므로 이것은 의도된 것으로 보는 게 적당하다. 만약 낭독자가 현장에서 즉흥적으로 채워 읽은 시가 이것이었다면 나는 이렇게 반응했을 것 같다. 일부러 불완전한 방식으로 쓴 시 같았는데 완전한 문장으로 낭독되고 있네. 인쇄 사고인가? 내 것만 이렇게 쓰였나? 요컨대 「깜빡임」이 채워 읽기 되었다고 상정했을 때와 그다지 다르지 않은 반응이었을 것이다. 「깜빡임」과 비교할 때 「움직이는 바다」는 우선 정반대의 형태, 즉 애당초 불완전한 문장이 의도되어 쓰여 있다. 그러나 빈 자리가 채워져 읽힘으로써 내가 ‘보고 있는 공백’ 그러나 ‘더는 공백이 아닌 것’이 낭독되고 있었다고 본다면, 내가 기억하는 낭독의 특이점은 두 시 중 어느 것이었어도 궁극적으로 다르지는 않았으리란 의미가 된다.
   그런데 애초에 내 기억이 정말 맞나? 다른 사람도 나와 같이 기억하고 있을까? 벌써 햇수로 6년 전인 이 낭독회에 있었을 법한 사람들에게 연락해봤다. 2016년 12월 두리반에서 있었던 304 낭독회에 참석했었나요? 그때 이장욱 시인이 낭독 원고에는 없는 부분을 채워 낭독한 일이 있었고 그게 아마 이 시였던 것 같은데(이때 나는 「움직이는 바다」를 보여주었다) 그게 기억나십니까? 재미있게도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A는 그날 거기에 간 건 확실한데 그와 관련해서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고, B는 그날이 기억나지만 그런 방식으로 낭독되지 않았던 것 같다고 했고, C는 그날 다른 낭독자가 너무 슬프게 울었으며 비인지 눈인지가 내렸고 사람이 많이 와서 가게 바깥까지 무리지어 있었다고 말하면서 다만 내가 물어본 것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고 했다. D는 두리반에 갔었기는 한데…… 하다가 내 설명을 듣고는 맞다고 그날 조금 특이한 방식으로 읽었던 기억이 난다고 했다. F 역시 그날 그렇게 낭독된 일이 있었다고 했는데 뒤이어 내가 「움직이는 바다」가 아니라 「깜빡임」이었을지도 모르겠다고 했더니 자신의 기억에는 「움직이는 바다」가 그렇게 읽혔다고 했다.
   나는 마지막으로 낭독자였던 이장욱 시인에게 메일을 보냈다. 304 낭독회 100회 특집으로 글을 집필하게 되었고 그날의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두 가지를 확인해주실 수 있겠느냐 물었다. 하나는 그런 방식의 낭독이 정말로 있었는지, 다른 하나는 그게 둘 중 어떤 시인지였다. 감사하게도 낭독자는 금방 답변해주었다. 그렇기는 한데, 낭독자의 답변을 이 글에서 밝히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낭독자의 증언이 그날 어떤 시가 어떻게 낭독되었는가를 증명하는 유일한 정답이 되지 않고 또 그런 목적으로 질문한 것이 아니었던 데다 그 진위 여부를 확인하는 것이 이미 중요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저마다 그날에 대한 기억이 다르며 그 기억 중 어떤 것은 실제로 그날 있었던 사실일 것이나(가령 그날 낭독 원고 이외의 내용이 즉흥적으로 낭독되었단 것은 낭독자도 기억하고 있었다) 오늘에 와서 그날을 되돌이킬 때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것이 사실인가 아닌가를 따지는 게 그렇게 결정적일 수는 없다.
   이것은 그날에 대한 기록, 정확히는 그날을 떠올리는 오늘의 기억(이자 기록)이다. 우리가 같은 것을 겪었어도 저마다 다른 것을 보고 있었을지도 모르고 그렇게 구성된 각각의 기억의 모양은 단순한 착오가 아니라 이렇게 모여 입체성을 이룬다. 약간의 기억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공유하는 최소한의 사실은 그날 나와 타인이 세월호를 기억하기 위해 그 자리에 모였다는 것이다. 누군가는 거기에서 어긋나는 언어를 보고 들었고 누군가의 슬픔이 터져나오는 것을 목격했으며 2016년 12월 시점의 사회 분위기와 책무 같은 것을 새삼 다시 떠올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니 그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중 무엇 하나 거짓된 것은 없다. 304 낭독회에서는 마지막 순서로 참여자 모두가 ‘함께 읽는 글’을 읽는다. 그 글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사회자
   이렇게 모여 우리는 사람의 말을 이어갑니다.

   다 같이
   떠오르도록, 떠오를 수 있도록, 사람이 사람에게, 사람의 말을 이어갑니다.
―「함께 읽는 글」 일부

   사람의 말에 귀기울여야 한다는 304 낭독회의 매회의 다짐과 전언은 2016년 12월의 낭독회를 기억하는 저마다의 방식과 닮아 있다. 각자의 그날들이 머리를 맞대고 우리의 그날로 다시 이야기되는 일을 이번의 소소한 에피소드를 통해 새삼스레 경험했고, 이는 궁극적으로는 저마다 세월호를 기억하는 방식을 한데 모아 다 함께 “사람의 목소리”를 이어나가려는 304 낭독회의 태도와도 관계되어 있다고 느낀다. 그렇다면 304 낭독 책자에는 “이렇게 모여 우리는 사람의 말을 이어갑니다”라고 쓰여 있지만 실제로 나는 이렇게 읽어왔던 모양이다.
   “(저마다의 조금씩 차이 나는 기억을 각자의 것으로 고립시키지 않고) 이렇게 모여 우리는 사람의 말을 이어갑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그 말을 이어나가겠습니다.)”

조용우, 선우은실

조용우: 다 쓰고 나서 알았어요. 이 시가 내게 필요했다는 사실을.
선우은실: ‘나의 일’이 ‘우리의 일’로 연결되는 과정의 어디 즈음에 ‘타인의 일’이 자리할 수 있을지를 고민해보았습니다.

2022/09/27
5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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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에서 돌아오지 못한 304명을 기억하기 위해 작가와 시민들이 함께 만들어가는 ‘304 낭독회’의 제목으로 사용된 문장들을 토대로 하여 쓴 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