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유-뷰view 함께 읽는 법
 ○ 본 좌담 연재 1편에서는 아래의 소설 3편을 다룹니다. 하단의 작품 제목을 클릭하면, 각 작품에 대한 대화(리뷰)를 곧바로 살피실 수 있습니다.
 ○ 각 리뷰 첫머리에서 작품 제목을 클릭하면, 해당 작품의 전문이 게재된 페이지로 이동합니다.

 소설
 윤성희, 「오늘은 예쁜 것만」
 ─ 《비유》 49호(2022. 1)
 이주란, 「변함없는 풍경」
 ─ 《비유》 52호(2022. 4)
 박서영, 「매달리는 인간」
 ─ 《비유》 51호(2022. 3)

이종산(사회, 본지 편집위원) : 저를 포함한 2기 편집위원이 《비유》를 맡은 지 이제 2년차인데요. 본지에 실린 소설 작품을 리뷰하는 좌담이 처음이에요. 그래서 좀 설레는 마음으로 이 자리에 왔어요.

소영현(본지 편집위원) : 오늘 이야기를 위해 김나영, 이소 선생님을 특별히 모셨지요. 근황부터 한번 여쭤볼까요?

이소 : 근황을 답하는 게 제일 어려운 것 같아요.(웃음) 그냥 원고 청탁이 들어오면 글 쓰면서 일상을 보내요. 뭔가 하나쯤은 특별한 걸 말하고 싶었는데 딱히 없네요.

김나영 : 여름방학이었고 그동안은 더더욱 5세 아이의 일과에 맞춰 지냈어요. 정신을 차려보니 내일모레 개강을 앞두어 부랴부랴 개강 준비도 좀 하고 있고요.(웃음) 평론가로서는 등단한 지 14년 만에 첫 평론집을 묶어보려고 하는데 이 작업 역시 방학 중에 다 해야지 했지만 못했고요.(웃음) 그래도 요 며칠은 수업 준비며 평론집에 묶을 원고를 읽으면서 간만에 문학에 대한 진지한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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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산 : 《비유》는 등단 여부에 구애받지 않고 좋은 작품을 쓰는 작가를 발굴하고 소개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편집위원으로서 저는 아직 경험이 부족하다보니 내가 잘하고 있나 스스로를 의심하기도 해요. 《비유》에 대한 전반적인 평이나, 《비유》가 소개하는 작품들을 어떻게 보고 계시는지 이야기해주시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김나영 : 이 계절에 가장 좋았던 작품을 뽑는 지면이 최근에 여기저기 많아졌는데요. 그런 데에서 《비유》에 수록된 작품이 자주 거론되는 걸 보면, 개성 있고 좋은 작품들이 《비유》에 많이 실리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어요. 저도 매달 《비유》에 실리는 작품들을 주목해보는데요. 확실히 《비유》만의 색깔이 있는 것 같아요. 시인, 작가들도 《비유》에 실리는 작품은 주제적인 면이든 형식적인 면이든 조금 더 참신한 시도를 해볼 수 있다고 생각하는 듯하고요. 독자의 입장에서도 그런 측면에서 더 기대를 갖고 보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앞으로도 계속 새로움을 발굴하고 응원하는 잡지로 남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습니다.

이소 : 저도 《비유》에 글을 쓸 때는 비평 톤으로 쓰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 들어서 좋아요. 비평 톤이라고 해야 하나, 비평 체라고 해야 하나, 저에게는 살짝 스트레스거든요. 좀 지루하기도 하고요. 아무래도 글을 쓸 때마다 그 글을 수록할 매체에 톤을 맞추게 되는데, 《비유》에서 청탁이 오면 조금은 더 자유롭게 써도 되지 않을까, 내가 쓰고 싶은 대로 써봐도 되지 않을까, 그런 마음에 기대가 되요. 그런데 《비유》에 실린 소설들도 그런 면이 있는 것 같아요. 뚜렷한 경향성이 없는 게 좋아요.(웃음) 아, 그리고 작가 소개가 독특한 방식으로 들어가는 점도 좋아요. 얼마 전 김현의 소설이 실렸잖아요. 저는 그게 시인 김현인지 모르고, 신인 소설가인 줄 알고 읽었거든요. 그런 흥미로운 경험이 종종 생기더라구요.

이종산 : 그럴 수가 있군요. 너무 재밌는데요.

소영현 : 김나영 선생님은 《비유》 1기 편집위원 중 한 분으로, 창간호부터 37호(2021. 1)까지 운영을 맡으셨지요. 전과 비교해 《비유》의 나아진 점과 아쉬운 점을 여쭙고 싶어요.

김나영 :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제가 《비유》에서 일할 때는 새로움에 대한 강박이 없지 않았던 것 같아요. 새로운 작가들을 많이 소개하자거나, 기존의 등단제도라는 것을 반성하는 입장에서 그걸 통하지 않은 작가들에게도 기회를 많이 주자는 이야기를 늘 나누며 《비유》를 꾸렸는데요. 여전히 《비유》가 그런 역할을 충분히 해주고 있는 것 같아서 내심 반가워요. 《비유》가 웹진이기 때문에 지면의 한계 같은 건 덜하잖아요. 가독성을 고려해서 작품 한 편의 분량은 제한할 수 있어도 웹진의 장점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서 가능한 한 많은 작품이 실릴 수 있기를 기대하게 돼요. 신인 작가와 기성 작가의 많은 작품이 여기서 만나면 그 사이에서 생겨나는 시너지 효과가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해요. 쓺을 통해서만 확장되는 인식이나 감각이 분명히 있잖아요. 《비유》라는 지면이 더 많은 사람에게 쓰는 자리가 되어주고 더 많은 이야기가 오가는 자리가 됐으면 좋겠어요.

이종산 : 편집위원회의 기수가 바뀌면서 2기만의 새로운 기획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고민이 많았어요. 새로운 기획에 대한 고민을 하는 과정에서 그 부분(작품 편수를 늘리는 것)에 있어서는 신경을 덜 쓴 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김나영 : 처음 잡지를 꾸리는 일원으로서는 새로운 걸 해보자, 쓰기와 읽기 밖으로 문학의 외연을 확장해보자며 ‘!’(하다) 코너에 많은 에너지를 투자했었어요. 요즘은 ‘!’(하다) 코너의 비중이 비교적 줄어든 느낌이 있더라구요. 최근 독자의 입장에서 다시 보니 글 밖의 다양한 활동으로 문학이 무엇인가를 질문하는 것도 좋지만 결국 문학잡지라는 정체성은 현재 한국문학 작품을 많이 소개하는 자리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할 때 바깥으로부터 혹은 독자로부터 저절로 만들어지는 게 아닐까 싶기도 했어요.

소영현 : 말씀하신 것처럼 창작의 장이 넓어져야 한다고 생각은 하는데, 신인과 기성 작가에게 두루 열려 있어야 말씀하신 효과를 얻을 수 있을 듯해요. 추가적으로 비평 장을 만들고 있어요. 문학잡지에서 비평 지면이 줄어들고 리뷰가 늘어가는 한편 자유롭게 쓰는 비평을 위한 지면은 거의 없잖아요. 기성 평론가와 신진 평론가 모두한테 열린 공간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는 있는데, 이런 뜻이 잘 전달이 되고 있는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덧붙여 《비유》 소설의 분량이 종이잡지들보다는 짧은 편인데, 독서 감각에서 차이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이소 : 《비유》가 달마다 나오잖아요. 여기서 더 작품 수가 많아진다면 중간에 한 번씩 몇 편 선정하여 묶어두는 기획이 있으면 어떨까, 반년 단위로라도 몇 편의 작품들을 다시 보는 코너를 할 수 없을까, 그런 생각을 해봤어요. 지금으로서는 수록된 작품들에 대한 피드백을 하기 어려운 구조라 그렇게 묶인 작품들에 한해서라도 짧은 코멘트를 달면 어떨까 싶었습니다. 본격 비평이나 심도 있는 인터뷰 수준은 아니더라도요. 그리고 저는 소설 분량이 지금 정도가 적절한 것 같아요. 매체 특성상 더 늘어지면 집중력이 떨어지는 것 같고요. 어차피 더 긴 분량을 요구하는 지면은 이미 있으니, 매체마다 특성을 살려 분량 차이를 두는 건 좋은 것 같습니다. 작가들 이야기도 들어보니 《비유》에 쓸 때는 그에 맞춰 쓴다고 하더라구요.

이종산 : 김나영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김나영 : 처음에 《비유》를 만들 때 웹진에 실린 글이 화면에 어떻게 보일지를 중요하게 고려하면서 좋은 디자이너와 편집자분들께서 애를 많이 쓰셨던 기억이 나요. 글자와 이미지들을 새로 디자인하고 움직이는 화면에 보기 좋게 배치하는 게 정말 고도의 기술이 필요한 일이라는 것을 배웠어요. 그분들의 덕으로 다른 웹진에 비해서도 《비유》만의 쾌적함이 있는 것 같아요. 게다가 요즘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화면에 더 익숙해진 상황이라 종이잡지도 실물보다는 PDF 파일로 다운받아서 보는 경우가 더 잦아진 듯해요. 이런 기술적인 이유에 의해서인지 《비유》에 실린 소설을 보면서 형식적인 측면에서는 별로 불편하거나 어색한 감을 가진 적은 없었던 것 같아요. 아마도 작가분들이 내용과 형식의 조화를 웹진에 맞게 적절히 고려해주신 게 아닐까 싶어요. 웹진을 꾸리시면서 수많은 고민을 하실 텐데 그중 단편 분량에 대한 고민은 덜하셔도 될 것 같아요.

소영현 : 네, 고민이라기보다는 궁금해서 여쭤봤어요. 분량이라는 형식이 글의 성격을 결정하거나 바꾸는 면도 있고. 좀더 다양해졌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소설이 점차 짧아지는 추세이기도 하잖아요. 이런 점들을 둘러싼 얘기 제대로 한 적이 없어서.(웃음)

김나영 : 그런데 그런 것도 있지 않을까요. 50매를 쓰든 100매를 쓰든 단편 하나를 쓸 때 작가들이 들이는 에너지는 거의 같을 텐데 매당 원고료를 받게 되니까요. 같은 단편소설이라면 50매든 100매든 분량에 상관없이 같은 원고료를 드릴 수 있으면 가장 좋겠지요.


2

이종산 : 그러면 이제 소설 얘기로 넘어갈까요.

소영현 : 윤성희의 「오늘은 예쁜 것만」, 이주란의 「변함없는 풍경」, 박서영의 「매달리는 인간」을 얘기해보려고 합니다.


윤성희, 「오늘은 예쁜 것만」click

김나영 : 역시 윤성희 작가, 정말 잘 쓰시는구나 감탄하면서 읽었습니다. 남다른 위트로 재미있게 쭉 읽히지만 결코 가벼운 이야기는 아니고요. 한국 사회와 여성의 삶, 개별과 보편의 삶, 개인과 공동체의 삶 등 읽을수록 나눌 이야기가 풍성해지는 소설이었어요. 다들 「오늘은 예쁜 것만」을 어떻게 읽으셨는지 너무 궁금했습니다.

소영현 : 저도 좋습니다.(웃음)

이종산 : 처음에는 소소한 이야기처럼 읽히는데, 따라가다보면 많은 게 응축이 되어 있어요.

김나영 : 도입부에 언니와 나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서, 이게 서사의 중심이겠구나 짐작했는데, 이 소설을 끌고 가는 중요한 한 축은 나와 무관해 보이는 바깥의 일들이잖아요. 지하철이나 거리에서 만난 사람들. 표면적으로 보면 불우한 가정사로부터 비롯된 나의 내밀한 고통과 그 바깥의 풍경은 대비되는 것 같아요. 누군가에게 나는 아무렇지 않아 보이겠지만 실은 내심 불안을 품고 있고, 반대로 나에게 바깥은 나와 다르게 별일 없이 무탈해 보여요. 이런 상대성이 ‘나’가 속한 지극히 일상적 장면들에서 이상한 유쾌함을 발생시키는 것도 같고요. 좀더 들여다보면 그 안팎의 사정이라는 게 서로 연관하면서 한 인간의 근심과 불안, 내적 갈등이 어떻게 보편적인 혹은 공유 가능한 이야기로 쓰일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방식으로 이 소설을 읽을 수도 있지 않을까 싶어요. 윤성희 소설의 미덕은 언제나 그랬듯 굉장히 중요한 주제를 별로 심각하지 않게 다루면서도 예리하게 독자의 감각에 각인하는 데 있는 것 같아요. 가령 지하철에서 만난 할머니들이 나를 사이에 두고 서로 자기 이야기를 나누듯이요.
한국 사회에서 여성으로 사는 일이 그들에게는 죽을 고비를 넘기는 일이었다는 게 선명한 상처의 흔적과 함께 공유되는데, 그 사이에서 ‘염병’이라는 말을 따라하면서 나는 한국 여성이라는 특수한 정체성에 자연스레 합류하게 되는 것 같아요. ‘나’가 비속어를 되새기듯 주문처럼 반복하는 그 장면이 특별히 슬프고도 유쾌했던 이유가 그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이 양가적인 느낌이 제목의 ‘은’ ‘만’ 같은 한정이나 유한성을 의미하는 조사에도 들어 있는 것 같고요.
또 잘 안 보이는데 딱 거기에만 끼어 있는 살얼음 같은 것도 인상적이었어요. 예측하지 못한 지점에서 미끄러지는 경험을 누구나 한 번쯤은 하게 되잖아요. 곁에 있는 누군가를 위해 손을 잡아주고 넘어지면 일으켜주라는 여타의 이야기들과 달리 이 소설은 넘어질 때를 대비해서 손을 놓아주라고 말하면서 더 오래된 배려의 태도나 마음을 생각해보게도 해요.

이종산 : 남자친구가 46초만 세라고 해서 화냈다는 장면 있잖아요. 이것도 그냥 아무렇지 않게 앞쪽에 깔려 있는데 뒤에 보면 다시 그 이야기를 하면서 끝나요. 거기서 ‘아, 이게 이렇게 연결되는 거였구나’ 하고 감탄했어요. 주인공에게 중요한 날(언니가 수술받는 날)에 모르는 사람들을 계속 마주치는데 이 사람들이 다 연결, 연결, 연결이 되잖아요. 모르는 사람들과 따로 떨어져서 상관없이 살아가고 있는 게 아니라, 사실은 사람들이 서로 다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짚어주는 풍경들이 나열되고, 그 풍경들이 또 주인공의 마음으로 연결되다가 마지막에 46초의 순환으로 끝맺어지는 것이 감동적이었어요. 이소 선생님은 어떻게 보셨나요?

이소 : 사실은 제가 미신을 좀 좋아하거든요.(웃음) 예전에는 할머니가 ‘모양이 예쁜 귤을 먹어야 된다’거나 ‘그런 말 함부로 하는 거 아니다’ 같은 말씀을 하시면. 어른들은 참 비합리적인 걸 믿는다고 생각했는데, 요즘은 그렇게 생각되지 않아요. 미신이라는 게 마치 천동설처럼 세계가 나의 말과 행위를 중심으로 돌고 있다고 가정하고 조심하는 건데, 실은 아무리 미신을 강하게 믿고 지키는 사람이라 해도 세상이 그렇게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쯤은 알고 있잖아요. 이미 진실은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최대치의 정성을 기울이고 위안을 기대하는 게 요즘은 싫지 않더라고요. 사람 마음이라는 게 그런 것 같고.

이종산 : 문지방을 잘 안 밟는다든지.(웃음)

이소 : 네, 잘 안 밟게 돼요.(웃음) 누군가 계몽적인 사람이 나타나서 ‘그건 미신이야’라고 말하면, ‘나도 알아. 하지만 이런 사소한 것 하나쯤은 가지고 싶어’라고 대꾸하는 그런 마음이라고 해야 할까요. 우리가 아무리 간절해도 그 간절함은 무능할 텐데, 그 무능한 간절함을 버리고 싶지 않은 마음이 윤성희 소설의 마음 같아요. 그런 게 좋아요.

이종산 : 맞아요. 붕어빵도 예쁜 거 달라고 하잖아요. 근데 또 그 아주머니가 비늘 하나하나 살아 있게 예쁘게 해준다고 하잖아요. 그런 디테일들이 항상 너무 좋은 것 같아요.

소영현 : 그것도 좋은데, ‘염병’ 같은 욕도 좋다는……(웃음) ‘염병’이라는 말을 주고받는 할머니들의 살아온 얘기가 좋았어요.

이종산 : 할머니들이 막 ‘염병’ 하면서 얘기를 하니까 주인공이 사이에서 고개를 흔들잖아요. 나 이 사람들 모른다고.(웃음)

소영현 : 맞아요. 이주란의 「변함없는 풍경」도, 박서영의 「매달리는 인간」도, 그리고 윤성희의 이 소설도, 불운의 연속인 현실을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잖아요. 예를 들면 언니가 어린 자신을 두고 떠났고, 아버지로부터 제대로 된 돌봄을 받지 못했고, 그래서 내내 혼자 모든 걸 해내면서 성장해야 했던 인물이잖아요. 아버지와 동생을 돌보는 일을 그만두고 떠난 언니는 자신의 아이를 돌보고 있고. 소설이 다루는 하루, 언니가 수술하는 날인 오늘도 불운의 연속이고요. 칫솔이 부러졌고, 엉덩방아를 찧었고. 미신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주인공의 관점에서 봤을 때 왠지 그리 좋은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예감을 전하고 있어요. 슬픈 이야기인데 그럼에도 소설은 따뜻하고 유머러스해요. 그게 윤성희 소설의 힘이고 매력이죠.

김나영 : 소설에 아이가 뽀로로 밴드를 붙이고 싶어서 아프지도 않은데 엄살을 부린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실제로 저희 집 아이도 그렇고 아이가 다니는 어린이집 아이들도 대부분 그렇다고 하더라고요. 저에게는 그게 일종의 미신처럼 보이기도 했는데요. 거의 보이지도 않는 상처에 밴드를 덕지덕지 붙이려 하는 아이들의 마음이라는 것에 대해 이 소설을 읽으며 다시 생각해보게 됐어요.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은 사람들이 살면서 안 좋은 일을 겪고 아프게 됐을 때 그것을 어떻게 치유하고 서로 돌보는가를 말하고 생각해보도록 독려하는 이야기이기도 한 것 같아요. 뽀로로 밴드를 붙이듯 너무 사소하고 때로는 터무니없는 믿음이라 하더라도 그렇게 하도록 배려하는 일이 각자 살고 서로 돌보는 삶에서 중요하다는 거겠지요. 돌봄의 측면에서나 자발적인 삶에 있어서도 중요한 것은 중대한 계기나 극적인 구원이 아니고 굉장히 일상적이고 사소한 것이라는 이야기를 유쾌하고 다정하게 전해주는 소설이에요. 꼭 뽀로로 밴드처럼요.

소영현 : 국수 싫어하는데 평생 국수를 만들어야 했던 할머니의 이야기도 계속 생각나요.

김나영 : 다들 밥 짓다가 다치고.

소영현 : 순환하는 지하철 안에서 주인공이 만난 할머니들의 삶이 쉽게 잊히지 않아요. 너무 무거워서. 노동과 돌봄으로 채워진 삶을 산 할머니들 사이의 대화에는 서로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고통과 그것에 대한 공감이 너무 잘 드러나 있어요.

이종산 : 하지만 작가는 (자신의 소설을) 읽는 사람들한테 항상 웃는 얼굴을 보여주고 싶어 하는 것 같아요. 여러 고통에도 불구하고 웃는 얼굴들. 처음 시작 부분에 치약으로 웃는 얼굴을 그린 것도 그렇고, 거의 끝부분에 넘어진 사람을 보고 “나는 안 넘어지지. 메롱.” 이랬는데 바로 엉덩방아 찧잖아요. 그런 대목을 보면서 읽는 사람도 웃는 얼굴이 돼버리는 것 같아요. 소영현 선생님이 말씀하신 대목처럼 아픈 부분이 마음속에 남으면서도 그래도 결국은 웃는 얼굴로 끝날 수 있게 된다고 해야 할지…… 이제 이주란의 「변함없는 풍경」 얘기를 해볼까요?


이주란, 「변함없는 풍경」click

소영현 : 이주란의 「변함없는 풍경」은 조용하고 조심스럽고 외로운 외로운 느낌이 있어요. 비교하자면, 유머를 걷어낸 윤성희 소설과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김나영 : 「변함없는 풍경」에서 계속 해석이 안 되는 지점이 있었어요. 축구공이 나무에 걸려 있는 장면이 두 번 나오잖아요. 한 번은 그냥 쳐다보고 가고 또 한 번은 친구랑 같이 가서 걸려 있는 것을 빼내는데요. 이 부분을 다들 어떻게 읽으셨는지 궁금했어요.

이소 : 저에게 이주란 소설은 마치 린넨처럼 얇고 밝은 천 위에 문득 실밥 하나가 튀어나와 있는 그런 느낌이에요. 눈이 밝지 않다면 보이지도 않겠지만, 눈 밝은 사람에게는 실밥의 존재가 굉장히 신경 쓰이겠지요. 함정도 칼날도 아니고 고작 실밥이니까 그게 우리를 찌르거나 공격하진 않지만, 그래도 자꾸 실밥이 눈에 밟히고 그러다 어느 순간 그걸 어떻게 해야 할지 골똘히 생각하게 돼요. 만약 윤성희 소설이라면 그 실밥을 목격한 사람이 애써 웃는 표정을 지어 보일 것 같은데, 이주란 소설은 실밥을 발견한 그 순간 아주 희미하고 미묘하게 바뀌는 표정을 보여주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나무에 걸린 축구공이 실밥처럼 느껴졌어요. 이미 보았으니 이제 실밥을 떼어주어야 하는 것처럼, 축구공도 내려줄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어요.

소영현 : 축구공이 거기 걸려 있으나 걸려 있지 않으나 사실 별로 별다르지 않은 거잖아요. 저는 마지막에 축구공을 내려주고 나서 아이들이 그 공을 가지고 차고 나가는 장면이 전하는 어떤 마음이 좋았어요. 이주란 소설에 담겨 있는 돌봄의 마음 같은 게 느껴져서요. 사실 이 소설의 인물들의 삶은 굉장히 위태로워요. ‘작년에 너무 죽을 뻔한 일밖에 없었어, 아니면 크게 사기당한 일밖에 없었어, 나쁜 일은 그런 것밖에 없었어’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는데, 벼랑에 내몰린 삶을 살고 있다고도 할 수 있고, 변함없지 않은 게 아니라 엄청나게 변함 있는 삶일 텐데 변함없는 풍경인 것처럼 얘기해요. 이런 쓰기 방식에서 이주란 소설의 매력이 나오는 것 같아요. 따뜻하지만은 않은 결기 같은 게 느껴져요.

이소 : 네, 그런 것 같아요. 혹시 얼마 전에 나온 이주란의 장편 『수면 아래』 읽으셨어요? 주인공 한 명의 이름이 「변함없는 풍경」이랑 같은데, 다른 설정은 비슷하기도 하고 다르기도 해서, 장편을 쓰는 과정 중 조금씩 달라지는 순간을 몰래 엿본 듯도 하고 재미있었어요. 『수면 아래』에서도 주인공이 중고 물건을 파는 가게에서 일하는데 그 앞 공터에서 동네 아이들이 공놀이를 하거든요. 그럴 때 그 가게를 오가는 어른들이 아이들을 위해 하는 건 아주 사소한 배려예요. 예를 들면 아이스크림을 냉장고에 채워둔다든지 하는 식의 따뜻함인데, 그런 게 좋았어요. 나를 해치지도 못할 실밥쯤은 풀려도 그만이고 묶여도 그만일 텐데, 그래도 잘 다독여주고 싶어하는 그런 마음이 좋더라구요.

이종산 : 「변함없는 풍경」은 우리가 생각했을 때 꽉 막혀 있다고 생각했던 현실에서 그냥 다른 길을 가버려요. 전 그게 되게 좋거든요. 이주란의 소설에는 ‘세상이 뭐라고 하든 나는 그냥 내가 보낼 수 있는 일상을 보낼 거야’라는 무심한 태도 같은 게 있는데, 그게 오히려 출구가 되어 주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세상이 ‘이게 정답이야’라고 하는 그 길에 무심하고, ‘나는 그냥 오늘의 나의 일상을 살아갈 거야’ 하는 태도에서 오는 환한 빛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소 : 실은 저는 그런 점에서 양가적인 감정도 들어요. 이게 이주란의 장점이자 단점인 것 같은데, 소설들의 톤과 색채가 엇비슷해서 이 인물이 어떤 소설에 나온 인물인지 헷갈릴 정도예요. 이주란의 모든 소설이 특유의 반투명한 막으로 둘러싸여 있는 느낌이에요. 아마도 그런 점이 한 편씩 볼 때 연약했던 소설들이 소설집으로 묶어두면 굉장한 힘을 발휘하게 되는 이유일 거라고 생각해요. 저는 그런 이주란의 힘을 좋아하지만, 그게 반투명한 막이 처져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양가적인 감정이 들어요.

김나영 : 오늘 함께 읽고 이야기 나눌, 올해 《비유》에 실린 소설들뿐만 아니라 최근 한국 소설의 경향에서 주목할 만한 부분이라고 생각한 것은 현실과 비현실, 구체적인 이야기와 추상적인 이야기라는 극단이 공존하고 있다는 지점이었어요. 문학에서 현실을 부정적으로 보고 그걸 좀 극복해보려는 상상력은 모든 시기에 있었고 자연스러워 보이는 현상인데 요즘에는 비현실적인 것을 그리는 소설에서도 현실을 초월하려는 상상력보다는 오히려 현실에 무심하려는 태도, 어차피 나로서는 어쩌지 못한다는 자조와 체념이 짙게 깔려 있다는 생각을 했어요. 이주란 소설에도 지극히 일상적인 장면을 묘사하는 데에서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지점이 있어요. 나는 머물지 않고 어디론가 가는 중, 그 길에서 내가 만나는 사람들, 그 사람들과 나누는 대화, 다음에는 어디에서 만날지를 기약하는 것. 소설 속 인물은 딱 거기까지만 생각하고 마는 듯이 보이는데 이게 어찌 보면 현실을 비판하고 부정하는 새로운 태도가 아닐까 싶었어요.

소영현 : 보이지 않거나 볼 수 없는 현실을 그리지 않는 방식으로, 현실 그 자체에 다가가려는 게 아닐까, 저는 그렇게 생각되는데요. 그 현실을 최선을 다해 살고 있다는 생각도 들고요. 예전에 비해 이주란의 인물들이 강해졌다고 생각돼요. 어느 순간에 그것까지는 용납할 수 없다는 식으로 딱 잘라내는 모습을 보여줘요. 중심을 갖고 삶을 살고 현실을 살죠. 그런데 폭력적인 방식은 아니고 언제나 너무 자연스럽게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다른 자리로, 다른 공간으로 넘어가요.

김나영 : 매달리지 않는 인간.

소영현 : 그래서 비현실적이라고 말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돼요. 근데 우리의 현실에 비춰보자면 이런 식의 결기를 갖는 건 굉장히 어려운 일인 것 같아요.

이소 : 맞아요. 하지만 현실에 대응하는 힘을 미학을 통해 얻게 된다는 점은 늘 여러 생각을 하게 만들어요. 저의 개인적인 감수성으로는 참 좋아요. 저도 이런 세계에 속한 사람이니까요. 그리고 어차피 우리에게 이런 방법 외에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이 딱히 있는지도 모르겠고요. 하지만 엄연한 삶의 문제를 여백과 문체로 넘어가는 것 같기도 해서, 이런 방법은 긍정적인 의미에서건 부정적인 의미에서건 오직 소설에서만 가능한, 종이로만 가능한 위안 같은 것 아닐까 싶어져요.

소영현 : 그럼에도, 그래서 덧붙이자면, 윤성희, 박서영 소설에서처럼 소수자, 약자 연대의 면모를 보여주면서도, 소수자 약자를 다루는 방식에서 가장 조심스럽다고 해야 할까요. 이주란 소설에서는 어른이 아이를 돌볼 때조차 함부로 접근하거나 개입하지 않는데, 한국 소설에서 이런 정도의 조심스러움은 찾아보기 어려워요. 그게 너무 소중하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약자와의 연대도. 따져보면 다른 소설과 크게 다르지 않으면서도, 자연스럽게 다른 문단을 제시하거나 하는 방식으로 처리하는데, 그런 자연스러움과 조심스러움이 감동을 주고 그곳에 마음을 오래 머물게 하는 것 같아요.

이소 : 맞아요. 그래서 읽는 과정에서 감동을 줘요. 다른 사람에게는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이주란 소설을 읽는 사람들끼리만 아는 그런 마음, 눈물이 나는 그런 마음이에요.

소영현 : 그러게요. 눈물이 나죠.

이종산 : 이주란 작가의 초기작이랑 지금을 비교해 보면 톤이 바뀌었잖아요. 말씀하신 반투명한 막이 점점 더 강해지는 형태인 것 같아요. 예전에는 좀더 현실적이었다면 지금은 더 막을 씌워서 이 안의 세계를 견고하게 만들고 있는 느낌이 있어요.

소영현 : 점점 동화처럼 돼가는 느낌이 있어요.

이종산 : 맞아요. 그래서 오히려 현실 세계와 점점 분리되면서 이주란 소설을 읽을 때만 느낄 수 있는 세계가 생기고 있는 느낌이 들거든요. 근데 그런 것 때문에 항상 특별한 경험이 되는 것 같아요.

이소 : 네, 읽는 순간 어떤 독특한 경험을 주는 건 확실히 맞아요.


박서영, 「매달리는 인간」click

소영현 : 박서영의 「매달리는 인간」은 좀더 절박하고 절망스러운 느낌을 전하는데요. “내가 틀렸다는 걸 깨닫는 때가 종종 있다.” 그러니까, 나의 삶 전체가 다 잘못된 건가, 틀린 건가 하는 질문을 던지면서 소설이 시작되는데, 바깥을 상상할 수 없는 이십대 청년의 절망적 상황을 좀더 절실하게 전해줘요.

이소 : 흥미로운 건, 이렇게 소설들을 모아 읽으니 소설끼리 어떤 흐름이 생기고 연결되는 것 같아요. 이주란 소설에서는 나무에 축구공이 매달려 있고, 박서영의 소설에서는 안정적으로 ‘정착’하고 싶었던 사람이 실은 삶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을 뿐이라는 걸 알게 돼요. 그런데 원래 정착에 성공한 것과 매달려 있는 상태를 구별하기는 어렵잖아요. 박서영 소설의 주인공도 정착을 원했지만 실은 매달려 있는 상태에 불과했고, 그 사실을 ‘모르는 줄도 몰랐던’ 상태였잖아요. 저는 이 매달려 있는 사람이 「변함없는 풍경」의 나무에 걸린 축구공과 연결되면서, 축구공을 내려주듯 이 사람도 풀어주고 싶은 기분이 들었어요. 실밥을 풀어주듯, 축구공을 내려주듯, 이 사람도 풀어주고 싶었어요.

김나영 : 그렇게 명쾌하게!

이소 : 근데 저는 박서영 소설에서 분식집 아주머니가 ‘모르는 줄도 몰랐다’라고 하는 말이 이주란 소설과 반대편에 있는 것 같아서 인상적이었어요. ‘모르는 줄도 모르는 상태’가 아니라 그냥 ‘모르는 상태’인 게 가능할까요. 그냥 ‘모르는 상태’는 알게 되면 벗어날 수 있는 걸까요. 한참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그리고 좀 슬펐어요. 떡볶이를 똑같은 방법으로 20년 동안 만든 분식집 아주머니가 여전히 자신의 입맛에는 자신의 레시피대로 만든 떡볶이가 맛있는데 손님들은 전문가의 레시피대로 만든 떡볶이를 맛있어 한다는 게.

김나영 : 시험에 합격해서 공무원이 되거나 대중적인 맛을 내서 떡볶이를 많이 파는 것을 잘된 일이나 옳은 일이라고 말하는 사회의 기준에서 보면, 나와 최와 분식집 아주머니는 잘못 살아온 인생처럼 보이잖아요. 장사가 좀 안되더라도 내 입맛에 맛있고 내가 계속할 수 있는 일을 계속할 것인가, 아니면 내 수십 년의 삶을 부정당하면서 유명한 분식집을 운영할 것인가의 기로에서 고민을 하게 되는 인물은 그 스스로 틀렸다, 몰랐다고 말하는 것 같지만 실은 소설만 할 수 있는 질문을 독자에게 던지는 거죠. 과연 모두의 인생에 적용이 되는 정답이 있을까 하고요.

소영현 : 사실 둘 다 답이 아닌 게, 매달리느냐 아니면 정상성으로 다가갈 것이냐가 크게 다르지 않아요. 매달리는 것도 정상성에 가까이 가는 거니까요. 최의 경우에 중소기업에서 사람답게 살고 싶어서 나왔지만, 공무원 시험도 아니다 싶어 다시 돌아가요. 답이 아닌 거예요. 왜 답이 아닌 채로 계속 살아, 왜 매달려, 매달리는 거 답이 아니야, 그렇게 돌아가는 거 답이 아니야, 이렇게 얘기하는 것은 쉽지만, 현실에서 어떤 다른 삶이 가능한가를 답하기는 쉽지 않아요. 그런 의미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정말 문학적으로 던질 수 있는 질문을 담은 소설이에요.

이종산 : 「매달리는 인간」에서는 그래서 출구가 없는 느낌이 들거든요. 앞이 꽉 막혀 있는.

소영현 : 그런 의미에서 「매달리는 인간」은 신자유주의형 청년의 전형을 보여주는 소설이에요. 물론 청년뿐만 아니라 중년, 장년인 떡볶이 가게 주인 포함해서 모두가 그렇기도 한데요. 인상 깊은 대목은, 외롭거나 고독하거나 괴로운 상황이 몸의 변화로 포착되는 지점이에요. 매일매일 밥을 먹으면서 친밀성을 나누지만 돌아서서 언제 만났냐는 듯이 연락도 안 하는 관계가 낯설지 않기도 한데, 신자유주의 시대의 친밀성, 관계 등을 여성의 몸의 변화로 포착한 게 재미있기도 하고 의미 있기도 하다는 생각이에요.

김나영 : 어디서 들었는데 인간을 포함한 동물이 스트레스를 받으면 가장 먼저 망가지는 기관이 생식기라고 하더라고요. 물론 소설에서는 다른 이유로 그런 비유를 썼겠지만 여성의 몸, 특히 자궁의 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루면서 궁극에는 아이를 낳지 못하는 상태를 떠올리게도 해요. 여성의 자기 몸에 대한 주체성과 더불어 인간의 재생산성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보게 하는 이야기인 거죠. 젊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돌보지 못하고 가상의 목표에 매달려 살아가는 혹은 죽어가는 일이 개인의 문제에 그치는 게 아니라 결국 우리 사회가 바로 이 문제에 매달려 있다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이런 점에서 저는 「매달리는 인간」과 뒤에 다룰 현호정의 「라즈베리 부루」에 나온, 소설에서는 꽤 오랜만에 만나게 된 이 자궁이 되게 중요한 대상이라고 생각했어요.

소영현 : 하나는 너무나 현실적으로 실제 몸이 망가져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이야기, 그리고 하나는 자궁을 상징하면서 재탄생 신화를 다시 쓰는 이야기로, 자연스럽게 논의를 이어갈 수 있어 흥미롭기도 해요.

(다음 편은 11월 8일에 게재됩니다.)

*본 좌담은 2022년 8월 25일 목요일 오후 2시 연희문학창작촌(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소재)에서 진행했습니다. 좌담 내용을 총 2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김나영, 소영현, 이소, 이종산

김나영: 나의 뾰족한 모서리를 안으로 접어 넣어야 너를 만날 수 있다는 마음으로, 읽고 써보려 합니다.
소영현: 문학을 ‘한다’. 주로 읽는다. 가끔 쓰기도 한다.
이소: 글을 읽고 쓰면서 조금씩 조금씩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집니다.
이종산: 질주하는 소설을 쓰고 싶고 읽고 싶다고 생각하는 요즘입니다.

2022/10/25
59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