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의 말
   ‘공동(체)’ 코너에서는 지난 10년 간 작가들이 사회적 사건에 연대하거나 함께한 경험을 되돌아보는 연속 기획 ‘연결’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번 ‘연결’에서는 #문단_내_성폭력 고발 사건 이후 변화된 문학계 전반의 상황이 문학을 하고 있는 당사자들에게 미친 영향과 제기된 질문들에 대해 자유롭게 듣고자 합니다. 우리는 2010년대 중반 sns를 중심으로 일어난 #문단_내_성폭력 고발과 이에 연대하는 움직임이 불러온 사회 변화를 겪었고, 이로 인해 문학을 바라보는 시각을 비롯해, 여러 측면에서의 질문들에 봉착했습니다. 건강한 문학 생태계란 어떠해야 하는가와 같은 의문에서부터 독자와 매체, 출판 환경의 변화에 관한 사유에 이르기까지 말입니다.
   지금 현재 우리가 겪고 있고 고민하고 있는 바로 그 문제들과 경험에 대해 묻고자 하는 이번 기획은, 문학이 ‘공동(체)’라는 단어를 ‘지금-여기’에서 어떻게 사유해야 하는지에 대한 중요한 단초가 되어줄 것입니다.


   동그라미 그리려다 무심코 그린 그 얼굴처럼, 일상의 어느 조각들을 마주칠 때면 내가 만났던 글 쓰는 얼굴들이 떠오른다. 이따금 산책하는 도심의 한 공원에서 혼자 농구 하는 사람을 볼 때, 늘 같은 시간에 그곳을 지나는 것이 아님에도 세 번에 두 번 비율로 골 그물이 사라진 농구대 아래에서 슬리퍼를 끌며 퉁퉁퉁 고무공을 튕기는 그 사람을 마주칠 때. 재미 삼아, 하지만 성실하게, 혼자서, 반복적으로 끈질기게.
   멈춰서서 구경하는 게 실례가 될까봐 나는 내 걸음의 속도 그대로 코트를 지나치면서도 공으로 포물선을 그리는 동작과 그 동작이 만드는 리드미컬한 소리를 감상한다. 그러면 문득 ‘그때 그분은 아직 소설을 쓰실까’ 하는 건네지 못한 안부들이 찾아온다. 어느 날엔가 책을 읽다 묵독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을 때처럼. 이국의 어느 항만 노동자가 점심시간이면 점심을 거르고 부두의 공터에서 나비나 나방을 관찰해 기록한다는 어떤 책의 구절을 읽는 순간, 야근을 앞두고 짬을 내 회사 근처 카페로 나와 내가 진행하는 소설쓰기 온라인 클래스에 접속했던 그분의 얼굴이 동그랗게 동그랗게 겹친다. 시베리아로 날아가다 길을 잃은 검은목두루미의 소식을 듣고서 두루미가 있는 곳으로 달려간다는 그 부둣가 사람의 얼굴은 내가 보낸 조언을 참고해 주말 동안 조금이라도 고쳐서 원고를 다시 보내겠다는 어느 직장인의 차분한 이메일과 함께 놓인다. 나는 그 좋아하는 마음에 기대어 살고 있다. 쓰는 사람이기 전에 나는 언제나 읽는 자리에 있었고, 그 읽는 시간이 만들어내는 물살이 내 어깨를 넘어 목까지 차오를 때면 나 역시 슬리퍼라도 꿰어 신고 나가 혼자 허공에 포물선을 그려야 했다.
   누가 보든 안 보든
   하지만 누구 한 사람이라도 가만히 잘 들여다봐주었으면 하는 심정으로.
   그렸다가 지우기를 반복해 거뭇해진 스케치북을 한쪽 팔로 감추고서 또 한 번 연필을 바로 쥐고 시도하는 순간들.

   많은 문단 내 성폭력이 그 간절함의 틈에서 일어났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 지면에 글을 써달라는 제안을 받은 후 쓰려고 자리에 앉으면 단어 하나, 문장 한 줄에 너무나 긴장한 나머지 밤이면 몽둥이찜질을 당한 것처럼 심한 근육통과 위경련을 앓았다. 그렇게 쓰고 고친 원고지 40매 분량의 미니 픽션은 결국 발표하지 않기로 했다. 애써 꾸민 위악의 포즈나 말의 위트로 이어가는 가상의 미래 이야기로는 내가 마주했던 그 얼굴들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했다.
   공동체.
   나는 다시 밖으로 나가 가까운 공원과 먼 강변을 하염없이 걸었다. 어디서 울고 있는지 보이지 않지만 숲길을 걸을 때면 언제나 새소리가 가득했다. 어느 날엔 새똥을 머리에 가득 얹은 오래된 동상 앞으로 가방을 멘 아이들이 땅에 떨어진 가랑잎을 발로 헤치며 지나갔다. 그러면 나는 십대 주인공이 집을 떠나 먼 도시로 여행하는 누군가의 소설이 떠올랐다. 여행에서 돌아왔을 때 그 아이의 고민이 조금이라도 덜어지면 좋겠다던 그분은 꼭 쓰고 싶다던 청소년소설을 완성하셨을까. 하굣길에서 가족을 마주친 복잡한 주인공의 마음을 묘사하는 것만큼이나 다른 참여자의 글을 열심히 읽고 세심하게 소감을 말해주던 사람.
   어떻게 하면 더 좋은 글을 쓸 수 있을까요.
   우리는 공처럼 튕겨 오르는 그 질문을 누르고 던지며 글쓰기의 주변을 맴돌았고, 의도와는 다른 방향으로 굴러가는 소설의 흐름을 쫓아가느라 끙끙 땀을 흘렸다. 왜 써야 하는지는 더 말하지 않아도 충분히 느끼고 있었다. 학교나 직장, 그리고 가정이란 틀 안에서 어떻게 해서든 글을 쓰고 읽는 시간을 자신에게 만들어주고 싶어하던 사람들이었으니까. 손가락 다섯 개를 접으면 다 헤아릴 수 있을 만큼의 수, 그 수의 사람들이 온라인으로 모여 서로의 글을 읽고 목소리를 들었다. 처음 소설쓰기 수업을 시작했을 때 나는 신청자 수가 적어 강의가 폐강되면 어쩌나 고민했지만 다섯 손가락 남짓의 수가 나에게 적당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저 아이들은 꼭 다섯 손가락 같네.
   공원을 산책할 때면 엄지와 검지, 약지처럼 키가 제각각인 여자아이들이 농구공을 가운데 두고 편을 나누는 것을 본다. 그러면 나는 그 계절 동안 내가 문지기로서 여닫았던 글쓰기의 문이 떠오른다. 어떤 영화를 보고 난 후 그 영화에서 받은 느낌을 좀더 이어가고 싶어 처음으로 소설이란 걸 써봤다던 그분은 요즘엔 어떤 영화의 장면으로 글쓰기를 시작하실까. 정해진 분량보다 너무 많은 원고를 보내 미안하다는 말과 고민하고 노력해봤지만, 이 인물에게 어떤 결말이 좋을지 도저히 떠오르지 않아 이번엔 원고를 보내지 못했다는 사과의 말. 최선을 다해 설명하고 그렇게 건넨 서로의 말이 쉽게 이어질 수 없는 귀한 연결 고리임을 알던 사람들.

   하루는 공원의 농구 코트에서 대여섯 명의 성인 여자들이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를 하고 있었다. 술래는 농구대에 서서 눈을 가리고, 친구들은 코트 끝에 서서 술래가 꽃이 피었다고 외치는 동안 조촘조촘 움직였다. 멈춰야 할 순간에 몸의 균형이 흐트러진 누군가는 농구대로 걸어가 술래와 새끼손가락을 마주 걸었고, 또다른 친구가 구해주기를 바라며 멀리 팔을 뻗었다. 나는 코트의 가장자리를 따라 걸으며 손가락 고리가 하나둘 늘어나는 걸 잠시나마 지켜봤다.
   그때 우리를 묶어주던 것은 좋은 글을 읽은 후의 마음이었다. 좋아하는 작가나 작품을 말할 때 사람들의 눈은 빛났고 수줍어하면서도 그걸 말할 수 있어 기뻐했다. 마치 현미경으로 봐야만 볼 수 있는 어느 미생물의 독특한 포자 무늬를 발견한 것처럼. 그들은 보고 느낀 것에 그치지 않고 그 경험을 자기의 언어로 표현하고 싶어 했고, 나는 그 열망의 물결에 떠 있는 게 자랑스러웠다. 정성 들여 열쇠의 홈과 돌출부를 깎고 다듬어 마침내 문고리와 딱 들어맞는 키를 손에 쥐었을 때의 환희처럼. 비록 문 너머에 무엇이 있을지 알 수 없다 할지라도 쓰고 읽는 사람이라면, 그 방 안에서 인내심으로 만들어진 누군가의 글 한 편이 얼마나 깊은 파문으로 한 사람에게 와닿는지 알고 있었다.

   시간이 흐른 후 나는 온라인으로만 보던 그때의 얼굴을 어느 행사장에서 직접 만나기도 했다. 절 기억하시냐는 조심스러운 인사에 먼저 알아보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로 답하며 우리는 그 짧은 시간 동안 또 ‘쓰는 얘기’를 나누었다. 직장생활이 자리잡으면 꼭 다시 쓸 거라는 애틋한 다짐이 나의 소설을 잘 읽었다는 소감만큼이나 반갑고 고마웠다. 첫 소설집이 나왔을 때 잘 인쇄된 활자에 내 서명이 담기는 게 과연 옳은 걸까 하며 망설이던 소설가로서의 나의 태도는 어느새 사인을 원하는 독자분께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하고 묻는 여유가 생겼다. 그러다 어느 독자분께는 긴 손 편지와 함께 그분이 좋아하는 책을 선물로 받기도 했다. 바로 그 사람이 아니라면 내가 결코 보지 못했을 책.
   공동체.
   동그라미 그리려다 나도 모르게 자꾸 어떤 얼굴을 그리는 것은, 그 사람으로 기억되는 문장과 그 목소리와 연결된 책이 있기 때문이다. 당신이 아니었더라면 내가 보지 못했을 세상의 얼굴들. 당신이 글로 써주고 목소리로 말해주었기에 비로소 내가 보고 느낄 수 있었던 쓰는 사람과 읽는 사람의 이어짐.

   어느 나뭇가지에서 지저귀고 있는지 눈으로 볼 수 없지만 숲을 지날 때마다 새소리가 들리면 나는 그 존재들이 그 자리에 있다는 것에 안심한다. 숲길을 지나 농구대 앞으로 가면 느릅나무 낙엽이 쌓인 농구 코트가 보인다. 군데군데 바닥 칠이 벗겨진 그 코트가 만약 우리의 공동체라면, 내가 그곳을 지나는 사람이고, 나에게도 주어진 역할이 있다면, 나는 어느 이른 아침에 긴 빗자루 하나 들고 그곳을 쓸어놓고 싶다. 혼자 묵묵히 공을 튕기고, 다섯 손가락처럼 서로 다른 키를 가진 아이들이 모여 팀을 나누고, 술래가 안 보는 사이 재빠르게 팔다리를 뻗는 사람들을 위해. 쓸다가 구석에 모아놓은 가랑잎 더미에 철퍼덕 앉기도 하고, 슉슉슉 입으로 드리블하는 소리를 내면서 허공에 슛을 쏘고 싶다. 그러면 또 누군가 나의 그런 모습을 보며 어떤 얼굴을 떠올리고 그 얼굴이 이끌어준 책 한 권을 생각하지 않을까.

김멜라

이 코너를 만들어내고 이어간 모든 목소리에 빚을 진 사람.

2022/11/29
60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