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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끄러운 접근성과 비장애중심주의 사이

접근성, 공연의 창작/제작 과정 다시 쓰기

김원영

제214호

2022.02.24

웹진 연극in에서는 현재 공연예술계에서 논의되고 있는 배리어프리의 개념을 공연의 창작/제작 과정 전반에서의 접근성 문제로 확장해보고자 합니다. 전체 기획은 장애예술인들의 에세이를 연재하는 방식으로 구성되며, 필자들께는 공연의 창작/제작과 관련한 몇 가지 키워드를 제안드렸습니다. 이를 통해 연극in은 기존의 공연예술 창작/제작 관행이 비장애를 규범으로 삼고 있지는 않았는지, 모두에게 안전한 작업 환경을 어떻게 만들 수 있을지, 나아가 접근성이 어떠한 창조적 상상력과 만나고 있는지를 함께 이야기해나가고자 합니다. - 편집자 주

2011년 학교를 기반으로 프로젝트 극단을 결성했고 공연 접근성에 관해 고민했다. 휠체어 관람석을 이용하는 입장에서 늘 겪는 불편을 의식했고, 모두에게 개방된 시공간을 연극을 계기로 창출해보고 싶었다. 제임스 셔면의 희곡 「매직타임」을 재구성한 공연을 올리면서 장애가 있는 지인을 여럿 초대했다. 양평과 분당으로 휠체어탑승이 가능한 차량을 보내 이동이 어려운 친구 둘을 관객으로 불렀다. 스마트폰 사용자가 늘고 있었기에 메신저 앱을 통해 청각장애인 관객에게 대사를 전달하고, 시각장애인 관객에게는 그 메시지를 TTS(텍스트를 소리로 바꿔주는 기능)로 접근하도록 안내했다. 초보적인 수준이었지만 드문 시도였다.
관객만큼이나 창작과정에 배우로 참여한 장애인 구성원들에 대한 접근성 확보가 중요한 화두였다. 우선 휠체어 등이 접근하기 쉬운 연습실 환경과 연습과정에서의 의사소통 보장을 떠올릴 수 있겠다. 각기 다른 몸을 가진 배우를 비롯해 프로덕션 전체 구성원의 신체조건을 고려한 연습 진행방식을 고민하는 일도 포함된다. 각자의 차이를 존중하는 제작문화도 중요하다. 2011년 우리는 대체로 충분히 알고 지낸 학생들로 이뤄진 팀이어서 어려움이 크지는 않았다. 학교 내 편의시설이 갖춰진 공간에서 연습을 했고, 서로의 차이에 얼마간 익숙했다.
그럼에도 쉽지 않은 장벽이 남아 있었다. 극 중 극으로 <햄릿>의 전투신을 만들 때였다. 시각장애인 배우와 전동휠체어를 타는 장애인 배우가 각각 비장애인 배우와 칼을 휘두르며 대결하는 장면이었다. 결과적으로 연출의 고민과 배우의 좋은 연기가 만났고, 상징성을 살려 이 장면을 긴장감 있게 표현했다고 기억한다. 하지만 (제작자로서) 나는 망령 같은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러니까 중증의 신체 장애를 가진 고전 비극의 주인공이 정말로 칼을 휘두르며 상대와 맞붙는 생생함을, 바로 그 신체로서, 더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싶다는 집착이었다. 상징적인 장치 말고, 정말로 우리의 이 몸으로 직접 해낼 수는 없을까?
자연인인 우리는 모두 어떠한 인간적 영역에 대해 닫혀있다. 내 경우 축구, 발레, 피겨스케이팅(이론물리학) 등에 대해 그렇다. 피겨스케이팅에서 나의 접근성을 보장할 수도 있을까? 빙상장에 휠체어 관람석을 설치하는 것 말고, 공중 4회전을 하는 러시아 선수들 사이로 내가 나란히 등장하는 일이 가능하도록 할 수 있느냐는 뜻이다. 김연아 선수가 후원하는 장애인의 날 특집 이벤트가 아니라면 나는 빙상장에 접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공연무대는 퍼포머로서 얼마든지 ‘접근 가능’해질 수 있다고 믿는 걸까?
당연하게도 공연은 체계적이고 엄격한 범례와 규칙에 지배되는 스포츠와 다르다. <햄릿>은 반드시 백인 비장애인 남성이 거대한 칼을 휘두르며 비극적인 전투신을 연기하지 않아도 여전히 연극 <햄릿>일 수 있다. 피겨가 스포츠가 아니라면(스포츠인지 논쟁이 있다) 우리는 현대 연극이나 현대 무용이 지닌 다양한 상징적인 기술들, 안무와 연출로 장애인 배우가 안나 쉐르바코바의 좋은 연기와 춤을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리라 기대할 수 있다. 2011년의 나는 이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그 ‘접근성’을 만드는 과정에서 나는 생각했다. ‘장애인 배우가 무대 위에 오르는 모습을 보고 싶다. 장애가 없는 배우의 신체가 연기할 때와 같은 방식으로, 그와 같은 ‘범례’를 크게 초월하지 않고서, 그와 유사한 스펙터클을 구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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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영 X 프로젝트 이인 <무용수-되기>(2021) 리플렛 (새 창으로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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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장애를 가진 배우/무용수가 비장애인(그들 중에서도 일부) 배우/무용수가 하는 것과 유사한 스펙터클을 보여야만 하는가? 나의 집착에는 분명, 소위 ‘비장애인중심주의(ableism)’라고 불리는 어떤 태도가 그 바탕에 있었을 것이다. 창작에서의 접근성 보장은 장애가 있는 창작자를, 장애가 없는 몸인 것처럼 재현하기 위한 테크닉과 규칙의 설계가 아니다. 그렇지만, 그게 아니라면 ‘창작에서의 접근성’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이를테면 ‘대학로예술극장’에 대한 접근성은 구체적인 실체가 있다. 우리는 존재하는 ‘대학로예술극장’을 어떻게 재설계해야 하는지를 상상함으로써 공연장 접근성이란 무엇인지에 관해 이야기한다. 발레나 피겨스케이팅, 고전적인 버전의 <햄릿> 같이 비교적 명료한 범례를 가진 분야에 대한 접근성도, ‘공연장 접근성’처럼 우리의 상상에 얼마간 실체를 부여한다. 반면 ‘창작에의 접근성’이라는 말에는 접근성의 실체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이 없다. 우리는 연습실과 무대의 장애인 편의시설을, 수어통역 정도를 생각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 내용을, 그저 장애를 가진 창작자가 프로덕션 전 과정에서 배제되지 않고 온전히 참여하는 문화적, 제도적 실천 정도라고 막연하게 정의할 수 있을 뿐이다.
2022년에 ‘창작에서의 접근성’이라는 말로 추구하고자 하는 일은 시각장애인 배우가 출연하는 <햄릿>이나 다리가 없는 무용수가 춤추는 <지젤>을 만드는 법 따위에 그치지 않을 것이다. 동시에 ‘창작과정 전반에서 장애인이 배제되지 않는 문화 만들기’보다는 더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목표일 것이다. 내게 그것은 이를테면, 애초부터 뇌병변 장애인 배우의 몸이, 다리가 없는 무용수의 몸이 바로 그 몸이기 때문에 가능한 창작물을 만들어내는 것과 같은 일이다. 시각장애를 가진 음향감독이, 청각장애를 가진 조명감독이 바로 그 감각적 특성 때문에 발휘하는 역량이 제작현장에 온전히 통합되는 어떤 순간의 도래다. 다른 (비)장애인 창작자들의 생각이 궁금한데, 이는 아마 이번 기획을 통해 점차 그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창작에서의 접근성을 보장하는 일이란, 남녀노소, 장애유무, 장애유형을 막론하고 모두가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는 유니버설 디자인 화장실을 만드는 일과는 관련이 적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고유한 힘을 지니는 창작자, 창작의 과정, 창작의 결과물은 완전히 민주적이고 무해한 실체일 수 없다. 시각적 자극을 배제하지 않는 음악이란 덜 선명할 것이다. 누구에게나 일상적으로 존재하는 움직임을 다듬어내지 않은 춤이란 그저 동작에 그칠 것이다(그 평범한 ‘동작’이 가진 춤으로서의 가능성을 탐구하는 작업조차 ‘평범함’을 예리하게 추출한 조형적 결과물을 들고 무대에 오른다. 이본 라이너의 <트리오 에이(Trio A)>를 떠올려보라). 다른 충동과 정서를 ‘접근 불가능하게’ 만들지 않은 희곡은 잡다한 정념의 덩어리에 그칠 것이다. 말하자면, 모든 신체적, 정신적 특질이 접근 가능한 창작물이란 실제로는 민주주의적 참여의 장이 될 수 있을지언정 창작물로서는 아무런 실체도 없을 것이다.
결국, 창작에서 접근성을 보장한다는 말은 ‘비장애인중심주의’적인 태도로 빙상장에서 공중 4회전을 하지 못해서 한이 맺힌, ‘걷지 못하는’ 창작자의 집착과는 관련이 없지만, 그렇다고 무해하고 민주적인 매끄러운 이념의 철저한 구현도 아닌 셈이다. 다양한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참여하는 무대를 제작하는 과정이란, 무엇을 접근 가능하게 하고 무엇을 접근 불가능하게 할지에 관한 계속된 협상의 장이다. 때로 원하는 장면을 위해 고집을 부리고(“네가 휠체어를 타고 있는 건 잘 알지만 여기서 더 높게 칼을 휘두르며 들이받아 보라고”), 과감히 어떤 장면을 포기하고(“꼭 발끝으로 서서 회전할 필요는 없지…”), 누군가를 잠시 배제하면서 더 오랜 기간 철저히 배제되어 온 사람을 포함시키기로 결정하는 과정이다(“여기서는 완전히 암전된 가운데 오로지 말로써 무용수의 움직임을 묘사할 겁니다”). 창작과정에서의 접근성이란 다종다양하게 ‘유해한’ 차별성을 전제로 공연을 풍요롭게 만드는, 미적이고 정치적인 결단의 과정이라고, 2022년의 나는 생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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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영

김원영
공연, 법, 장애에 관심이 있다. 국가인권위원회 등에서 일했고, <사랑 및 우정에서의 차별금지법>, <인정투쟁; 예술가 편>, <무용수-되기>, <현실원칙> 등의 연극 및 무용 공연을 만들고 출연했다.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등의 책을 썼다. greece815@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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