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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 앞에서

접근성, 공연의 창작/제작 과정 다시 쓰기

이성수

216호

2022.04.14

웹진 연극in에서는 현재 공연예술계에서 논의되고 있는 배리어프리의 개념을 공연의 창작/제작 과정 전반에서의 접근성 문제로 확장해보고자 합니다. 전체 기획은 장애예술인들의 에세이를 연재하는 방식으로 구성되며, 필자들께는 공연의 창작/제작과 관련한 몇 가지 키워드를 제안드렸습니다. 이를 통해 연극in은 기존의 공연예술 창작/제작 관행이 비장애를 규범으로 삼고 있지는 않았는지, 모두에게 안전한 작업 환경을 어떻게 만들 수 있을지, 나아가 접근성이 어떠한 창조적 상상력과 만나고 있는지를 함께 이야기해나가고자 합니다. - 편집자 주

야야, 미안. 의상 갈아입고 정리하느라 좀 늦었어. 오래 기다렸지? 이야, 근데 진짜 오랜만이다! 이게 몇 년 만이지? 깜짝 놀랐어! 어떻게, 어떻게 왔어? 응? SNS 보고 왔다고? 아니, 그럼 온다고 말을 하지. 평소 ‘좋아요’ 한번 안 누르고, 댓글 한번 안 달길래 난 니가 내 SNS 볼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어. 공연 소식 올린 보람이 있네. 하하. 아무튼 정말 반갑고 고맙다. 니가 드디어 내 공연을 보러 오다니, 살다보니 이런 날도 다 있구나! 하하. 어떻게, 공연은 잘 봤어? 아, 그으래? 고맙다 고마워. 하하하. 참, 애기는? 몇 살이지? 많이 컸겠다. 학교 들어갔다고? 벌써? 우와, 벌써 그렇게 됐나? 맞다. 그러고 보니 내가 처음 연극 시작할 무렵, 니 딸이 태어났지? 정말 시간 빠르다. 많이 컸겠네. 보고 싶다야, 응? 갑자기 사라지더니 연극을 하고 있냐고? 그랬나? 난 내가 사라졌다고는 생각 안 해봤는데, 니가 보기엔 그래 보였을 수도 있겠네. 하하. 그냥 뭐, 전문적인 배우가 될 것도 아니고, 심오한 예술인이 될 것도 아니고, 그냥, 눈 나빠지고 나서 방황하다가 내가 살아있다는 걸 스스로 증명하고 싶어서 연극을 하게 됐어. 물론 다른 걸 할 수도 있었겠지만, 우연인지 운명인지 모르겠어. 중요한 건 내가 지금 연극을 하고 있다는 거겠지. 뭐? 배우? 아이, 야, 배우는 무슨 내가? 하하하. 아니 뭐, 나는 연기 전공한 사람도 아니고, 타고난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나이만 많고, 눈도 잘 안보이고… 아니, 뭐 그렇다기보다는, 노력. 노력이지 뭐.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배우들은 진짜 엄청 열심히 해. 평소 자기 관리도 잘하고, 운동, 발성, 화술, 공부 등등 정말 노력 많이들 하더라구. 근데 나는 과연 배우가 되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말야. 부끄럽지, 그들만큼 노력 안 하는 게 분명하니까. 그런데도 누가 배우라고 불러주면 그게 또 그렇게 좋더라. 염치가 없는 거지 뭐. 하하하. 에이, 아니야. 자꾸 그러지 마라. 쑥스럽다. 그냥 좋아서 하는 거야. 응? 뭐가 그렇게 좋냐고? 음… 좋은 게 정말 많은데, 그중에 하나 말하자면, 극장에 들어가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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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이나 무용 등등 공연을 하는 사람들은 그런 말을 해. 극장에 들어간다. 관객으로서 관람하기 위해 들어가는 거 말고. 피, 땀, 눈물 흘린 연습실의 시간이 끝나고, 극장에 무대가 만들어지고, 연출부와 스태프들과 배우들을 비롯한 모든 창작진이 극장으로 들어가거든. 그건 곧 공연이 임박했다는 뜻이야. 근데 그때, 그때 말야,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아. 긴장감, 기대감, 두려움 등등 여러 감정들이 뭉쳐져서 묘한 설렘이 오거든.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가장 강렬하게 느끼는 순간 중에 하나야. 연극 하다 보면 별일 다 있거든? 이런저런 고초를 겪으면서도 계속하는 이유 중에 하나야. 극장에 들어가는 그 순간이 너무 좋아. 떨려서 좋아. 근데 또 남들한텐 떠는 모습 안 보이려고 애쓰고. 하하하. 맞다, 그리고 나는 텅 빈 극장에 혼자 있는 걸 특히 좋아해. 그래서 콜타임보다 훨씬 이른 시간에 도착하는 경우가 많아. 응? 혼자 일찍 와서 뭐하냐고? 우선 극장에 혼자 있다는 그 자체로 좋고. 그리고 뭐, 몸도 풀고, 발성 연습도 하고, 객석에 멍하니 앉아 있기도 하고, 이것저것 만져보면서 무대도 새로 익히고. 내 세상이지 뭐. 너도 알다시피 내가 눈이 잘 안 보이다 보니까 공간 익히는 데 남들보다 오래 걸리거든. 어디에 뭐가 있는지, 위험한 것은 없는지, 하나부터 열까지 세세하게 숙지하고 있어야 안전하게 공연할 수 있어. 다치면 안 되잖아. 근데 그렇게 혼자 있다 보면, 각종 무대장치나 소품들이 마치 숨이라도 쉬듯 특유의 냄새를 풍긴다? 근데 사람들이 하나, 둘 오기 시작하면 그 냄새는 금세 사라져버려. 나만 느낄 수 있는 은밀한 냄새라고 할 수 있지. 그게 또 그렇게 좋더라구.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말구 임마. 하하하. 아, 이거 또 얘기 하다 보니까 나도 모르게 업됐네. 오랜만에 만났는데 나만 너무 말이 많았지? 미안. 뭐? 괜찮다구? 야, 너 학부모 되더니 많이 관대해졌네? 응? 힘든 거? 당연히 있지. 왜 없겠냐? 사람이 하는 일에 안 힘든 게 어딨겠냐. 암만, 좋아서 하는 일이어도 힘든 건 다 있더라. 글쎄, 하두 많아서 어떤 얘기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맞다. 이 얘기부터 해볼까? 니가 물어본 거니까 쫌만 더 들어 봐 그럼. 짧게 할게. 하하. 왜 그 있잖아,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쓸모있는 사람이고 싶어 하잖아? 근데 그건 장애인도 마찬가지야. 난 눈이 나빠지고 장애인이 되고 나서부터 가장 큰 고민 중에 하나가 그거거든. 내가 과연 어딘가에 쓸모있는 사람이긴 한 걸까? 장애인이 되기 전엔 그런 고민 별로 안 해봤어. 당연한 거라고 생각했었나 봐. 근데 장애인 된 후로는 그게 그렇게 고민되고, 무섭더라. 만약 내가 잉여인간일까 봐. 그게 겁이 나. 근데 연극을 할 때도 순간순간 그런 기분이 들 때가 있어. 특히 강하게 들 때가 언제냐면, 극장에 들어갈 때야. 웃기지? 아깐 극장에 들어갈 때가 좋다고 했는데. 근데 그게 참 묘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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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에 들어가면 다들 엄청 바빠지거든? 연출부는 연출부대로 스태프들은 스태프들대로 엄청 바빠. 체크하고 점검할 게 진짜 많거든. 그럼 다들 예민해지기도 해. 마음들은 바쁘지, 자칫 작은 실수 하나가 큰 사고로 이어질 수도 있지. 근데 그 와중에 나만 혼자 어리둥절해지는 순간들이 있어. 눈이 잘 안 보이니까 공간 파악도 안 되고, 상황 파악도 잘 안 되고. 처음 가보는 극장은 말할 것도 없고, 처음이 아닌 극장도 공연에 따라 무대나 객석 컨셉이 다 달라지거든.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 속에 혼자 우두커니 있게 되는 때가 있어. 분주하고 빠르게 움직이는 사람들 속에서 내 시간만 느리게 흐르는 기분이야. 뭐가 뭔지 모르겠는데, 하는 것도 없이 정신만 쏙 빠지고, 괜히 다른 사람들한테 미안해지고 그래. 멀뚱히 서 있다가 바쁜 사람들한테 진로 방해가 되기도 하거든. 내가 어디에 있어야 할지, 뭘 해야 할지 모르겠는 그 시간이 괴로워. 잠깐이어도 엄청 길게 느껴져. 이런 마음 아무도 몰라. 바쁜 사람들한테 앓는 소리 할 수도 없고. 누구 한 사람 붙잡고 뭘 물어보기도 어렵고. 소극장에서 공연하다 보면 다들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그러거든? 배우라고 연기만 하는 게 아니고, 조명도 달고, 음향도 점검하고, 소품도 챙기고, 청소도 하고 기타 등등 동시에 여러 가지를 해. 근데 나만 그냥 배우야. 다들 고생하는데, 나만 예외야. 이게 좋은 걸까? 순간적으로 내가 불필요한 존재가 되는 기분인데? 나한테도 뭐라도 좀 시켜달라고 용기 내서 말 한 적도 있어. 근데 뭐라는 줄 알아?
“구분할 건 좀 구분하자.”
“작업하는 동안 장애인 배우들은 근처에서 산책을 좀 하던가, 놀다 오면 좋겠어요.”
나 그때 멘붕 왔잖아. 하하하. 물론, 그들의 입장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니지만… 좀 그렇더라. 함께 있지만, 공존하지 못하는 기분이랄까. 능률이나 효율만 중시하지 말고 좀 느리더라도 함께 갈 수 있으면 좋겠는데, 다들 말은 그렇게 하지만, 잘 안돼. 직접적으로 뭘 하지 않더라도 최소한 내가 있는 공간에서 무슨 일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정도는 알고 싶어. 근데 그것조차 때로는 무리한 바람이나 욕심처럼 비치기도 해. 소외감과 서운함을 넘어서 비참하기도 하고 서럽기도 하고 그래. 알아. 피해의식일지도 모르지. 근데 피해의식이든 소외감이든 뭐든, 그런 감정 좀 안 느끼고 살 수 없나? 왜 자꾸 반복적으로 그래야만 하는 건지 모르겠어.

“생각을 좀 바꿔봐.”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는데, 왜 나만 그래야 하는 건지 모르겠어. 요즘 ‘배리어컨셔스’라는 말이 있거든? 응? 그게 뭐냐고? 그래. 넌 모를 거야. 간단히 말해서 무작정 배리어프리부터 할 게 아니라 먼저 배리어를 서로 정확하게 인지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자는 거야. 근데 배리어가 물리적인 것만 있을까? 난 감수성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해. 응? 그건 또 뭐냐고? 야, 너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말하자면 좀 긴데… 아무튼, 그런 게 있어. 왜 요즘 소통, 소통 하잖아. 소통이 생각보다 어려운 거지. 방금 말한 것들도 서로 조금만 더 소통할 수 있다면, 자연스레 풀릴 것 같기도 하고. 극장에 있다 보면, 마치 그 공간이 이 세상의 축소판 같기도 해. 다 저마다의 입장이 있는 건 알겠는데, 약자의 입장을 조금만 더 생각해주는 여유가 아쉬울 때가 있어. 장애인 배우로서의 숙제 같아. 눈이 나쁘다는 그 자체보다, 그로 인해서 생기는 상황들이 더 어려워.
아이구, 얘기하다 보니 어쩌다 또 심각해져 버렸네. 짧게 한대 놓고 미안 오랜만에 만났는데. 너 알지? 난 항상 단순하고 즐겁게 사는 게 최고라고 생각하는 거. 근데 그게 왜 이렇게 어렵냐? 하하. 괜히 무겁게 만든 것 같아서 미안하다. 야야, 여기서 이러지 말고 어디 들어가서 얘기하자. 너 뭐 먹을래? 여기까지 왔는데, 내가 한 잔 살게. 간만에 술이나 한잔 하러 가자. 뭐? 코로나 땜에 이 시간에 갈 데 없다고? 참, 그렇지… 아니, 야, 그럼 진작 얘기했어야지! 처음부터 어디 들어가서 얘기 했을 거 아냐! 야, 그럼 편의점 가자. 캔커피라도 마시자! 가자, 가자. 아, 진작 말하지 거 참. 일단 가자. 가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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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필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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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수

이성수
저시력 시각장애 연극인 이성수. 2015년 1월 배리어프리 버전 뮤직드라마 <당신만이>를 통해 연극을 시작했다. 이후 장애인 극단 다빈나오와 장애인문화예술판을 거치며 꾸준히 공연 활동을 이어오고 있고, 2016년 안은미컴퍼니와 함께했던 퍼포먼스 공연 <안심댄스>는 이듬해인 2017년 유럽 투어공연을 하기도 했다. 0set프로젝트, 쿵짝프로젝트, 래빗홀씨어터 등과 협업했으며, 최근에는 국립극단 [창작공감: 연출]에서 다큐 연극 <소극장판타지>에 출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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