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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이기는 시간 – 극단 애인에서의 대본 쓰기, 읽기

접근성, 공연의 창작/제작 과정 다시 쓰기

김지수

제215호

2022.03.24

웹진 연극in에서는 현재 공연예술계에서 논의되고 있는 배리어프리의 개념을 공연의 창작/제작 과정 전반에서의 접근성 문제로 확장해보고자 합니다. 전체 기획은 장애예술인들의 에세이를 연재하는 방식으로 구성되며, 필자들께는 공연의 창작/제작과 관련한 몇 가지 키워드를 제안드렸습니다. 이를 통해 연극in은 기존의 공연예술 창작/제작 관행이 비장애를 규범으로 삼고 있지는 않았는지, 모두에게 안전한 작업 환경을 어떻게 만들 수 있을지, 나아가 접근성이 어떠한 창조적 상상력과 만나고 있는지를 함께 이야기해나가고자 합니다. - 편집자 주

극단에서 활동하면서 부족하지만 창작 대본 쓰기와 소설 각색을 몇 번 하게 되었다. 그리고 자립생활센터나 평생교육센터에서 센터를 이용하는 분들과 연극 발표를 준비하면서 대본을 구성할 기회가 가끔 있었다. 그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작품 선정과 대본 쓰기, 리딩할 때의 공통적인 과정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극단 애인의 경우 어떤 작품을 선택해도 항상 대본을 수정했다. 배우들의 신체조건이 다르기 때문에 어찌 됐든 대본은 배우에게 맞게 바꾼다는 것이 당연한 전제였다. 애인에는 창단 초창기부터 단원들이 함께 정한 몇 가지 약속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작품을 올릴 때 장애의 경중으로 주·조연 등의 역할을 정하지 않는다는 것과 모두가 같은 금액의 출연료를 받기로 한 것이다. 장애의 경중에 대해서는 보행 여부나 수동, 전동, 와상 휠체어 등의 보장구 사용 여부, 언어장애의 경중도 포함해 생각했었다. 어떤 보장구를 사용하느냐는 연습과 공연 과정 전반에 걸쳐 공간과 시간을 정하는 데 중요한 조건이 되지만, 경제적인 부분을 먼저 고려하지 말자는 의미이기도 했고, 최중증 장애인 배우의 연기를 함께 고민하는 것이 장애인 극단만의 무대를 만들 수 있는 하나의 가능성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무대에서는 언어의 권력이 없었으면 했다. 애인 초기에 배우를 공개 모집해서 캐스팅을 시도한 적이 있었는데, 중증 장애인이 연락을 해오면 무척 반가웠고 대본을 어떻게 바꾸면 좋을지 고민하면서 함께 하고자 많은 시도를 했었다. 하지만 중증 장애인의 경우 장시간의 연습에 어려움이 있었고 넉넉하지 못한 활동지원 시간 때문에 중도에 그만둘 수밖에 없는 안타까운 일도 여러 번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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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스팅을 하고 나면 본격적으로 대본을 각색하거나 수정하게 되는데, 역할을 맡은 배우에게 맞춰 상황과 대사를 바꿀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일어선다’, ‘뛰어간다’ 등의 동사를 공통적인 움직임의 표현으로 대체하거나, 길고 어려운 대사를 쉬운 말로 바꾸거나 줄이는 식이다. 필자 또한 초기에는 긴 문장의 대사를 쓰기도 했었는데, 연습을 하면서 배우들의 입말로 바꾸고 줄이다 보니 언제부턴가 두세 줄이 넘어가는 대사를 쓰면 스스로 마음에 걸려서 꼭 이렇게 써야 하는지, 조금 더 간결한 표현은 없을지 고민하거나 대사를 나누는 등 여러 가지 방법을 찾게 되었다. 하지만 대사를 나눌 때 비언어장애 배우가 언어장애 배우의 말을 설명하거나 같은 말을 반복해서 묻는 식으로 전달하는 대사는 절대로 쓰지 않는다.
그렇게 극단의 배우들과 여러 번 작업을 하다 보니 창작극을 쓸 때면 역할을 맡은, 혹은 맡게 될 배우의 말투와 호흡이 먼저 떠오른다. 어떤 방식으로 말할 때 가장 편안하게 발화하는지 생각하고, 말과 함께 움직임이 그려지는가 하면 배우의 고유성이 그대로 대본화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과정이 단점이 될 수도 있다. 대본을 쓰는 사람에게는 창조하는 인물이 단순해질 수 있고, 배우는 새로운 표현의 가능성을 확장할 기회를 갖지 못하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일을 방지하기 위해서 창작극과 기존의 희곡 공연을 병행하는 것이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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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극단 애인 전국순회공연 <극단 애인의 3인 3색 이야기> 당시 첫 리딩

대본을 쓰고 나면 큰 글씨를 원하는 사람의 대본을 따로 편집하기도 하고, 왼쪽으로 넘기는 것이 편한지 오른쪽으로 넘기는 것이 편한지에 따라 스테이플러로 고정하거나 스프링 제본, 낱장 출력 등 개인에게 알맞은 대본을 준비한다. 그리고 드디어 첫, 리딩!
대본 리딩은 가장 많은 시간을 들이는 과정이다. 특히 첫 리딩은 언제나 떨리고 긴장되는 순간인데, 장애인 극단에서의 첫 리딩에는 공연 시간의 두세 배 이상의 시간이 소요되기도 한다. 긴장하면 대사를 읽는 속도가 빨라지는 배우도 있지만, 언어장애가 있는 배우의 경우 긴장했을 때 발화나 발음에 드는 시간이 길어지는 경우도 많다. 어쩌다 대사를 잘 못 읽거나 대사와 다른 말이 먼저 나올 때도 있는데, 그런 순간에도 가능하면 배우 스스로 틀린 부분을 찾아서 다시 읽을 때까지 기다린다. 어떤 배우든 오롯이 그만의 호흡과 속도로 대본을 읽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언어장애가 있는 배우들이 긴장해서 진땀을 흘리기도 하고 스스로 조급해질 때도 있지만, 자신에게 필요한 시간을 당당하게 사용하는 힘을 기르는 것과 그 시간을 편안한 마음으로 기다리는 것은 누구도 드러내놓고 정한 적 없는 우리들의 약속이다. (자신의 속도로 읽고 말할 때 대본에 대한 이해도 훨씬 빨라진다는 게 경험에서 얻은 나의 깨달음이기도 하다).
대본을 쓴 작가로서는 본인이 쓴 대사와 배우의 말이 어떻게 잘 맞는지 혹은 다른지를 점검하는 시간이다. 배우가 발음하기 어려운 문장은 어떻게 바꾸면 좋을지 생각하고, 바꾸지 않고 연습을 하면 가능한 표현일지 가늠해보기도 한다. 이 글을 쓰면서 다른 단원들에게도 리딩의 시간에 대해서 물어 보니, 연출은 연출대로 배우의 대사를 들으며 무대를 그리기도 하고, 배우들은 배우들 나름으로 자신과 상대방의 연기나 호흡에 대한 생각을 주로 한다고 했다. 리딩의 시간은 배우들 사이는 물론이고 연출과 작가를 포함한 공연팀 전체가 호흡을 맞추게 되는 가장 첫 번째 단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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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본 리딩이 어느 정도 익숙해지면 곧 대본 분석을 시작한다. 대본의 전체적인 내용이나 의미를 파악하고, 인물의 정보를 찾고, 전사를 써보기도 하고, 말투나 습관, 태도를 연구하기도 하는 그 시간들이 힘들지만 재미있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힘든 첫 번째 이유는 오직 대본 안에 나와 있는 정보만으로 인물을 구축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데다, 생각하다 보면 어느새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 보았던 유사한 인물이 떠올라서 캐릭터가 왜곡되기도 하고 특정 단면의 모습에만 빠져들기 쉽기 때문이다. 두 번째 이유는 대부분의 장애인들이 학교나 직장, 모임에서 발표나 토론을 할 기회가 많지 않아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서 말하는 걸 어려워하기 때문이다.
필자 역시 대본 분석 시간에 가장 많은 부족함을 느낀다. 대본을 쓴 작가일 때는 머릿속에 있는 것들을 대본에 잘 담아내지 못해서 ‘이걸 대본이라고 썼나?’ 창피하고, 작가보다 더 많은 생각을 하고 있는 배우를 만날 때면 한없이 부끄럽기도 하다. 한편 배우일 때는 빈곤한 상상력과 표현력 때문에 두더지가 되고 싶기도 하지만, 결국 작가, 연출, 배우가 생각을 주고받고 정리하는 과정으로서 대본 분석은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대본 분석을 하지 않고 연출이 시키는 대로만 인물을 연기하는 팀이 있다고 들은 적이 있는데, 필자는 이해하기조차 힘들고 잘하지 못해도 어렵다는 말을 하는 것, 모르는 것에 대해 알려달라고 말을 하는 것만으로도 대본 분석 시간이 의미가 있다고 믿는다.

글을 쓰면서 돌이켜 보니 극단 애인에서의 대본 쓰기와 리딩, 분석의 과정은 그야말로 공동으로 작품을 만들어가는 시간인 것 같다. 물론, 대본을 쓰고, 읽고, 분석하면서 답답할 때도 있고, 누군가 미워질 때도 있고 서로 싸우기도 하지만 작가, 연출, 배우 모두 각자의 역할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시간을 보낸다. 서로를 어떻게 보완해야 하는지를 몸으로 배우는 과정이자 인문학을 실천하는 시간 같은. 그래서 나는 연극이 좋은가 보다.

[사진: 필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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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수

김지수
극단 애인 대표. 재미있는 연극하고 싶은 휠체어 탄 사람. auleala@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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