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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림의 시간, 부드러움의 공간 만들기

접근성, 공연의 창작/제작 과정 다시 쓰기

문영민

218호

2022.05.12

웹진 연극in에서는 현재 공연예술계에서 논의되고 있는 배리어프리의 개념을 공연의 창작/제작 과정 전반에서의 접근성 문제로 확장해보고자 합니다. 전체 기획은 장애예술인들의 에세이를 연재하는 방식으로 구성되며, 필자들께는 공연의 창작/제작과 관련한 몇 가지 키워드를 제안드렸습니다. 이를 통해 연극in은 기존의 공연예술 창작/제작 관행이 비장애를 규범으로 삼고 있지는 않았는지, 모두에게 안전한 작업 환경을 어떻게 만들 수 있을지, 나아가 접근성이 어떠한 창조적 상상력과 만나고 있는지를 함께 이야기해나가고자 합니다. - 편집자 주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열 명의 장애를 가진 예술가들과 조력자의 언어로 공연예술의 창작/제작 관행을 톺아볼 수 있는 기획이 구성되었다는 점을 몹시 반갑고 기쁘게 생각한다. 장애예술가들이 창작을 지속해나가기 위해서는 접근가능한 예술공간이나 기예를 쌓을 수 있는 기회들만큼이나, 장애예술의 담론을 당사자의 언어로 축적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당사자의 언어로 축적된 담론이 부재할 때 몸과 예술에 대한 언어도 빈곤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장애인들이 무대의 주인공에서 나아가 장애예술 담론의 주인공으로 등장한 시기에, 배리어프리 공연의 수혜자나 대상이 되기보다 담론의 생산자가 되기를, 장애예술가들의 경험과 기예를 언어로 축적하는 기회들이 앞으로 활발히 만들어지기를 기대한다.
열 명의 장애인 창작자들의 에세이를 읽으며, 서로가 존재하고 다가가는 시공간을 조정하는 경험과 지혜들을 만날 수 있었다. 느림의 시간을 기획한다는 점, 그리고 부드러운 공간을 위한 규칙을 마련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경험들이 장애인 창작자들의 작업에만 조용히 머물지 않고, 공연예술 창작자들이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는 공연제작 환경을 만드는 자원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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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림의 시간을 기획하기

장애예술은 몸, 예술, 세계를 이해하는 방법들에 도전하며, 그것들을 변화시킨다. 그중 가장 급진적으로 관례를 변화시키는 영역은 바로 시간성이다. 정확하게는 서로가 서로에게 느림의 시간을 기꺼이 기다리고 감내하도록 한다. ‘바쁘디바쁜 현대사회’에서 ‘느리다’라는 형용사는 좋은 의미로 사용되지 않는다. 자폐 스펙트럼 작가들의 문학작품을 분석한 연구자 바버-스탯슨(Claire Barber-Statson)1)은 ‘느림’이 ‘지체’ 혹은 ‘지연’과 동일한 의미로 사용된다는 점을 지적한다. 우리 사회가 ‘정상이라고 간주하는’ 속도보다 물리적으로, 인지적으로 빠르게 움직이지 못할 때 우리는 그를 ‘느리다’라고 말한다.
장애인 당사자이거나 장애인 창작자와 시간을 보내본 사람이라면 ‘정상이라고 간주하는’ 속도가 얼마나 억압적인 개념인지 분명히 이해할 것이다. 콜타임까지 장애인 콜택시가 도착하지 않아, 하필이면 혜화역 2번 출구 엘리베이터가 고장 나 배우들과 스태프들이 한참을 기다린다. 문자통역과 수어통역이 전달되고 다시 문자와 수어를 통해 메시지를 전달받기까지 기다린다. 무대 위에서 언어장애인이 대사를 던질 때까지 우리는 다시 기다린다. 사회에서 정상으로 간주하는 속도가 아니라 서로의 몸과 언어의 속도를 받아들이기로 약속했기 때문이다.
극단 애인의 김지수 대표가 쓴 에세이에서 서로의 속도의 결을 섬세하게 조정하는 현장을 관찰한다. 배우의 몸과 언어에 맞추어 대본을 각색하거나 수정하는 것, 서로의 호흡과 속도로 대본을 읽을 수 있는 시간을 가지는 것, 서로에게 필요한 시간을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힘을 기르는 것. 느림을 규범으로 받아들인 시간 속에서 장애예술가들은 서두르지 않고, 자신이 움직이고 말하는 방식을 받아들인다. 강보람 배우는 극단 애인의 작업에서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작업한 경험을 통해 속도에 대한 해방감”을 느끼게 되었다고 언급했다. 사회에서 장애인의 느린 속도는 쉽게 정상으로 간주되지 않기 때문에 느린 속도를 기꺼이 감내하는 공간에서 존재가 인정된다는 감각을 느낀다.
문제는 연습실 내에서 공유되었던, 서로의 느림을 감내하는 약속들이 무용지물이 되는 순간들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연습실을 벗어나 극장에 들어간 시간이 그렇다. 소품들이 여기저기로 옮겨지고, 스태프들이 바쁘게 뛰어다니는 와중에 문자통역과 수어통역을 요청할 수 있을까. 공연을 앞두고 배우와 스태프들이 모두 뾰족하게 날이 서 있는 와중에 나의 느린 대사를 기다려달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안정우 배우는 에세이에서 공연일이 다가올수록 배리어프리의 의미가 희석된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성수 배우 역시 이와 같은 예외적인 순간을 “분주하고 빠르게 움직이는 사람들 속에서 내 시간만 느리게 흐르는 기분”이라고 표현했다. 마음의 여유가 있을 때 서로의 속도를 기다리는 일은 어렵지 않은 일일 수 있다. (사실은 어렵다.) 그러나 리허설이나 공연을 앞두었을 때, 서로를 감내할 마음의 공간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을 때, 가장 효율적인 방법으로 시간을 운용해야 하는 때를 맞닥뜨렸을 때는, 서로의 속도를 어떻게 기다릴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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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드러움의 공간을 위한 규칙 세우기

장애인이 어떤 공간에 접근한다는 것은, 그 공간에 물리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지에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장애인이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규칙을 가지고 있는지에도 달려 있다. 규칙은 우리가 어떻게 감각을 사용하고 움직임을 만드는지를 규정한다. ‘규칙’이라는 용어는 딱딱하고 까끌까끌할 것만 같지만, 사실 서로 다른 몸과 시간성을 가진 사람들이 한 공간에서 마주쳤을 때의 갈등을 완충하는 역할을 한다. 장애연극 기획자인 맥어스킬(Ashley McAskill)은 ‘규칙’이 존재하는 장애예술 창작 공간을, 사람과 사물이 존재하는 방식에 융통성을 부여한다는 점에서 ‘부드러움(tenderness)’의 공간으로 묘사한다2). 부드러움의 공간은 서로를 단단하게 규정하는 공간이 아니라 서로에 대한 이해가 복잡하게 변화할 수 있는 공간을 의미하는 것이다.
장애예술가들은 창작 공간 내에서 서로의 갈등을 완충하기 위한 각자의 규칙을 두고 있었다. 부드러운 공간은 특히 발달장애나 정신장애를 가진 창작자들의 작업 환경에서 더 큰 힘을 발휘한다. 박경인 배우와 고주영 프로듀서는 함께 작업했던 공연 <내 얘기 좀 들어봐> 제작과정에서 공유했던 규칙들을 소개하였다. 규칙은 무엇을 반드시 해야 하거나 하지 말아야 한다는 명령의 형태가 아니라 ‘서로의 이름을 부르기’,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잘 듣기’처럼 서로를 더 잘 이해하고, 존중하여,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공연을 만들기 위한 다짐으로 구성되어 있다. 손성연 작가가 에세이에서 이야기한 규칙들은, 정신적 어려움을 가진 배우들이 공연 제작과정에서 맞닥뜨리는 예측 불가능한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서 더욱 부드러운 모양을 갖는다. 고통을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서로를 돕고 돌본다는 규칙이다. 이 보드라운 규칙들은 갈등의 상황에서 구체적인 매뉴얼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상호신뢰를 통하여 상황에 지혜롭게 대처할 수 있도록 한다.
장애예술가들이 ‘규칙’을 만들고 지켜내려고 노력하는 과정이 윤리적이면서도 몹시 미학적인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몸이 시간적으로, 그리고 공간적으로 서로에게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이해로부터 시작해, 아주 부드러운 방식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세상을 변화시키며, 몸과 예술, 세계에 대한 경계를 해체하기 때문이다.
다시 고민으로 돌아가, 서로의 속도를 인내하지 못하는 갈등의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대처할 수 있을까. “어떠한 상황에서도 반드시 장애인 창작자들의 속도를 기다린다”라는 견고한 규칙을 만들어두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단단한 규칙도 아주 예외적인 상황에서 무용지물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서로가 이해하고, 이 가능성 위에서 서로의 속도와 언어에 익숙해진다는 부드러운 공간의 규칙을 세울 필요가 있다. 이는 서로에게 강제될 수는 없으며, 창작 공간 내에서 서로의 이야기를 듣고 서로를 돕고 돌보며 자연스럽게 만들어지는 신뢰관계를 통해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신뢰관계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예외가 없는 상황에서 서로의 속도를 기다리는 노력, 이를 지원하기 위해 접근성의 장치들을 구성하려는 노력을 함께 단단하게 이어나가야 함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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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arber-Stetson, C. (2014). “Slow processing: A new minor literature by autists and modernists”. Journal of Modern Literature, 38(1): 147-165.
  2. McAskill, A. (2019). The Atypique Approach: Disability Aesthetics and Theatre-Making in Montréal, Québec and Vancouver, British Columbia(Doctoral dissertation, Concordia Univers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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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영민

문영민 장애예술연구자
서울대학교 사회복지연구소에서 장애인 공연예술, 장애정체성, 장애인의 건강 불평등을 연구한다. 프로젝트 극단 0set의 공연 <연극의 3요소>, <불편한 입장들>에 참여하였고, 공연으로 장애인 접근성 문제를 알리는 활동에 관심이 있다. 현재 『이음온라인』 기획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saojungym@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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