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첫사랑 2020
승민이 고백한 것은 4학년 종업식 날이었다. 하굣길, 서연이 사는 401동에 도착했을 때 승민은 주뼛주뼛 서연의 앞을 가로막았다.
“왜?”
“따라와 봐.”
승민은 401동과 402동 사이의 화단으로 서연을 데려갔다. 서연은 승민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대충 짐작하고 있었다.
둘은 4학년 내내 친했는데, 여자애들은 동성 단짝을 만들고 남자애들은 자기들끼리 무리 지어 다니는 시기라 종종 놀림을 받았다. 너네 사귀냐? 썸이냐? 쟤 좋아하냐? 하는 말들을 서연은 무시했고 승민은 유치하다고 응수했다. 사실 승민은 신경이 쓰였는데 아니라고 정색해서 서연을 무안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고민 끝에 생각해낸 최선의 대답이었다. 그렇게 1년을 보냈다.
담임이 성적표를 나눠주기 전부터 절대 돌려보지 말라고 여러 번 당부했지만 첫 페이지의 반 배정 정보는 빠르게 공유되었다. 승민과 서연은 같은 ‘가’반이었다. 서연은 손뼉을 마구 치며 좋아했는데 승민은 잠시 멍해졌다. 이런 게 운명인가. 그때 승민은 서연에게 고백하기로 마음먹었다.
승민은 운동화 앞코로 화단의 흙을 찍으며, 마스크를 만지작거리며 한참을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어, 서연아, 있잖아. 애들이 우리 사귀냐고, 좋아하냐고 자꾸 그러잖아. 근데, 나는, 진짜로 너가 쫌 좋아.”
“쫌?”
“아니, 아니. 쫌 많이.”
“그렇구나.”
승민이 손톱 아래의 거스러미를 뜯으며 물었다.
“우리, 사귈까?”
서연은 승민을 빤히 볼 뿐 대답하지 않았다. 서연도 승민이 좋다. 좋긴 한데 사귀는 게 어떤 건지 잘 모르겠다. 지금도 쉬는 시간에 자주 놀고 집에 같이 걸어온다. 사귀면 뭐가 달라지나. 서연이 고민하는 동안 승민이 거스러미 하나를 쭉 잡아당겼는데 살점이 제법 길게 뜯겨 나가며 순식간에 몽글 핏방울이 맺혔다. 서연의 눈이 동그래졌다.
“너, 피……”
“응. 나 피 봤어.”
서연은 웃음이 났다.
“그래, 사귀자.”
“응. 그래. 이따 문자 할게.”
승민은 귀까지 새빨개진 채로 먼저 뛰어갔고 서연은 화단에서 천천히 걸어나왔다.
학원 일정표를 만들어 공유했다. 월, 수요일에는 서연의 영어학원 시간과 승민의 수학학원 시간이 겹치니까 집에서 조금 일찍 나와 놀이터에서 잠깐 얼굴을 보기로 했다. 목요일에는 서연의 수학학원 끝나는 시간이 승민의 논술학원 가는 시간이라 걸으면서 전화 통화를 하기로 했다. 그리고 틈틈이 문자를 하면 된다. 아쉽지만 봄방학 2주만 지나면 개학이니까. 그때 매일 보자고, 4학년 때처럼 같이 하교하자고 약속했다. 그리고 둘이 사귀는 걸 공개하지는 않기로 했다. 괜한 말들에 시달리고 싶지 않았다.
설렘과 행복의 시간은 일주일 만에 끝났다. 2월 말, 코로나 확진자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며 개학이 2주 연기됐다. 인근의 학원들도 휴원에 들어갔다. 학교에서도, 학원 가는 길에도 만날 수 없게 됐고 통화도 어려워졌다.
서연은 방문을 닫아놓고 통화하면 됐는데 승민은 엄마가 절대 문을 닫지 못하게 했다. 승민의 엄마는 누군지 묻지 않겠다고, 신경 쓰지 말라고 말은 해놓고 승민이 전화를 하는 것 같으면 갑자기 하던 일을 멈추었다. 청소기 소리가 멈추고, 개수대의 물소리가 약해지고, 라디오 볼륨이 줄었다. 승민은 도저히 집에서 통화할 수가 없었다.
대신 문자를 엄청나게 주고받았다. 모해? 밥 먹었음? 심심하다. 엄마 때문에 짜증나. 언니가 자꾸 말 시킨다. 티비 보고 있었어. 늦잠 잤다. 게임 중. 엄마가 밥 먹으래. 폰 그만 보라고 혼났다. 양치하고 올게…… 평범한 일상의 중계가 이어지는 가운데 서연이 먼저 ‘보고 싶다’고 보냈다.
서연은 두 손으로 휴대폰을 붙들고 화면을 뚫을 듯 들여다봤다. 답장이 오지 않았다. 계속 문자가 오가는 중이었으니 승민이 못 보았을 리는 없다. 뭐지. 고장 났나. 서연은 폴더를 닫았다가 다시 열고 문자 메시지 함으로 들어갔다. 승민과의 마지막 메시지는 여전히 서연이 보낸 ‘보고 싶다’였다. 괜히 보냈나. 부담스러웠나. 메시지 발송을 취소해보려고 버튼을 이것저것 누르는데 부르르 휴대폰이 진동했다. 승민이었다. ‘서연이 넘 귀여워.’
서연은 고백을 받았을 때보다 더 심장이 쿵쾅거리며 얼굴이 달아올랐다. 큭. 귀엽대. 나보고 귀엽대. 휴대폰을 끌어안고 방바닥을 데굴데굴 구르고 있는데 방문이 벌컥 열렸다. 언니였다.
“최서연 뭐 하냐? 돌았냐?”
“노크 좀 해! 짜증 나, 최주연.”
“이게 진짜 돌았나. 엄마가 밥 먹으라잖아. 안 들려?”
“그래! 안 들렸다!”
“너 코로나냐?”
“왜 아무 데나 코로나를 갖다 붙여? 무식하게.”
“밥이나 먹어.”
언니는 다시 문을 쾅 닫고 나갔고 서연은 승민에게 밥 먹고 오겠다고 문자를 보냈다. 곧바로 새 메시지가 도착했는데 승민이 아니었다. ‘[Web발신] [LG U+] LTE 링 19의 기본링 (20200개)을 모두 이용하셨습니다.’ 서연은 풀썩 주저앉으며 중얼거렸다. 망했다.
서연은 낡은 폴더폰을 쓰고 있다. 요즘은 폴더형이라도 간단한 인터넷 검색이나 카카오톡 정도는 되는데 서연의 휴대폰은 모바일데이터도 와이파이도 전혀 되지 않는다. 2학년까지 목에 걸고 다니는 키즈폰을 쓰다가 3학년이 되면서 언니가 쓰던 폰을 물려받았다. 그때 언니는 스마트폰을 샀다. 서연은 자기도 스마트폰을 사준다면 공부를 열심히 하겠다, 회장이 되겠다, 언니와 안 싸우겠다, 밥을 안 남기겠다, 고 여러 약속을 남발했지만 소용없었다.
서연에게는 그 폴더폰이 전부다. 카톡도 SNS도 이메일도 없는데 링을 다 써버린 것이다. 이번 달은 이제 전화와 문자를 받는 것만 가능하다. 스마트폰이었으면 마음 편하게 카톡으로 얘기했을 텐데.
서연은 숟가락 가득 밥을 떠서 입에 넣고 국은 그릇째 들고 후룩후룩 마셨다. 엄마가 서연이 오늘 잘 먹네, 하면서 계란말이 하나를 서연의 밥그릇 위에 올려놓았다. 서연은 그 계란말이도 덥석 베어 물었다. 입 짧은 막내딸을 잘 먹이는 것이 엄마의 최대 고민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서연이 잘 알았다. 엄마가 싱긋 웃는 그 순간 서연이 마주 웃으며 엄마아, 했다.
“3월이면 나 5학년 되는 거 알지?”
“그러게. 서연이 벌써 5학년이네. 근데 개학을 안 해서 어쩌니. 언니 중학교 입학식은 할 수 있으려나 몰라.”
“5학년 되면 나 스마트폰 사주기로 했던 것도 알지?”
엄마는 완전히 잊고 있었다는 듯 우뚝 젓가락질을 멈추었고, 서연이 엄마의 표정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며칠 남지도 않았는데 우리 그냥 오늘 사러 갈까?”
엄마는 계란말이를 하나 더 서연의 밥그릇에 옮겨놓으며 달래듯 말했다.
“코로나 때문에 학교도 쉬고 학원도 쉬는데 폰 사러 다니면 위험하지.”
“그럼 인터넷으로 주문하자.”
“서연아, 좀 천천히. 어차피 지금 급한 거 아니잖아. 너 게임이랑 유튜브랑 엄마 폰으로 다 하면서 그래. 코로나 잠잠해지면 그때 알아보자. 응?”
혹시 돈이 없나. 서연의 아빠는 일본패키지 여행을 전문으로 하는 작은 여행사를 운영하고 있다. 일본 불매운동 때 어려워지기 시작해 코로나까지 터지며 완전 최악이라고 했다. 엄마 아빠가 뉴스 보며 말하는 것을 얼핏 들었다. 게다가 서연의 엄마도 당장 주말부터 일이 없다. 엄마는 초등학생들을 대상으로 박물관이나 미술관 등을 다니며 역사 교육을 하는 역사체험 강사다. 인기 강사라 그동안 주말에 하루도 쉬어본 적이 없었는데 코로나로 인해 모든 스케줄이 취소됐다.
그럼 링이라도 좀 충전해달라고 할까, 고민하다가 결국 말하지 못했다. 승민은 뭐해? 바빠? 왜 대답 안 해? 라고 몇 번 문자를 보내다가 늦은 오후에 전화를 걸어왔다. 내내 폰을 들고 있던 서연은 진동이 채 한 번 울리기도 전에 전화를 받았다.
“미안. 나 링이 다 떨어져서 받는 거밖에 못 해. 3월에는 다시 보낼 수 있어.”
“너도 카톡하면 좋을 텐데. PC로라도 하면 안 돼?”
“나 엄마 노트북 같이 써.”
“그렇구나.”
“근데 너 어떻게 전화했어? 엄마 때문에 불편하다며.”
“우리 엄마 지금 음쓰 버리러. 아, 엄마 왔다. 끊어!”
전화기 너머 멀리서 삑삑삑 기계음이 들리다가 전화가 끊겼다. 서연은 쭈그려 앉아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었다.
문자 횟수가 조금씩 줄었다. 일상은 매일 똑같고 더이상 할 말이 없었다. 3월이 되면서 서연이 다니던 영어학원에서는 줌을 이용한 온라인 수업을 시작했고 수학학원에서는 연산문제지를 이메일로 보내주었다. 서연은 엄마 폰으로 게임하는 시간이 길어졌고 언니와 자주 싸웠다.
학교 개학은 또 2주 연기되었지만 언니가 다니던 학원들은 일제히 개강을 강행했다. 마스크는 약국에서 일주일에 두 개씩 살 수 있는데 학원은 매일 나가야 해서 언니는 마스크 하나를 사흘씩 썼다. 삼일째 되는 날은 마스크에서 쉰 냄새가 나서 학원에 가기 싫다고 했다. 서연이 냅킨과 고무줄로 마스크 만드는 법을 유튜브에서 보고 알려주었지만 언니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승민도 다시 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서연이네 학원들은 아직 온라인 수업 중이라고 했더니 승민이 부러워했다.
‘숙제가 완전 많아졌어.’
‘어제는 테스트 통과 못해서 학원에 거의 2시간 있었음.’
승민은 3학년 때 수학 선행을 시작해 이제 중학교 1학년 과정에 들어갔다. 승민이 다니는 수학학원은 매 수업이 끝날 때마다 시험을 치러서 통과해야만 집에 보내주는 것으로 유명하다. 처음 등록할 때부터 언제 끝날지 모르니 수학학원 이후로 다른 스케줄은 잡지 말라고 했단다.
힘들겠다, 승민이 파이팅, 같은 문자를 보내긴 했지만 서연은 왜 저렇게까지 하나 싶었다. 서연은 4학년 2학기부터 수학학원에 다녔다. 전에는 문제집만 풀었다. 엄마가 채점하고 틀린 문제를 설명해 주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엄마의 설명만으로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엄마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언니가 학원을 권했다.
“엄마, 쟤 학원 보내. 분수는 안돼. 분수부터는 가족끼리 공부하는 거 아니야.”
서연은 일주일에 두 번, 한 시간씩 수학학원에 가서 학교 진도의 문제들을 풀었다. 그래도 수업을 잘 따라갔고, 단원평가도 늘 90점 이상 받아서 2학기 수학 성적표는 모두 ‘매우 잘함’이었다. 이 정도 하면 별로 부족하지 않은 것 같은데. 서연은 의아하기도 불안하기도 했다.
4월이 되면서 서연의 영어학원도 등원 수업을 시작했고 16일부터는 학교도 온라인 개학을 했다. 서연은 이제 노는 건 끝이구나 싶어 아쉽기도, 왠지 불안했는데 다행이기도, 다른 친구들은 공부 많이 했나 궁금하고 뒤처지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4월 1일 수요일, 서연은 영어학원 가기 전에 놀이터에서 잠깐 승민을 만났다. 한 달 만이었다. 마스크 위 승민의 눈이 초승달처럼 휘어 있었다. 승민은 웃을 때면 눈이 아예 감기다시피 한다. 앞에서 손가락을 흔들며 이거 몇 개게? 하고 놀리듯 말했지만 서연은 그 착한 눈이 좋았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얼마나 불안하고 또 답답했는지 폭풍처럼 감정을 쏟아냈다. 서연이 친구들하고 같이 놀고 싶다며 수빈이, 다경이, 연수, 지유, 하고 한 명씩 이름을 부르는데 갑자기 울컥 감정이 올라왔다. 더 말하다가는 진짜 눈물이 날 것 같아 입술을 꽉 깨물었다. 마스크를 써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승민이 서연의 마음을 읽었는지 숙제도 없고 단원평가도 없고 독서록도 일기도 쓰지 않는 건 좋지 않으냐고 과장해 웃었다. 서연은 승민의 의도를 다 알면서도 괜히 으이그, 하고 승민을 타박했다.
서연이 이제 월요일에 보겠네, 하고 말을 돌리자 승민이 그제야 생각난 듯 월요일은 안 된다고 대답했다.
“나 이번 달부터 월요일마다 과학 다녀. 수학 전에.”
“아, 그렇구나.”
“너도 같이 다니자.”
“엄마한테 물어보고.”
“너 수학 옮길 거랬지? 그럼 우리 학원 와라. 현행반 생겨서 그것만 다니는 애들이 더 많아. 준수도 인재수학 다니면서 우리 학원 현행반 또 다녀.”
학교 수업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자 학원들은 열심히 보완책을 내놓았다. 보충 수업을 해주거나 정기 테스트를 치러 성취도를 파악할 수 있게 돕기도 했고, 학교 진도를 나가는 특별 클래스를 운영하기도 했다. 승민이 다니는 수학학원에도 그런 현행반이 생긴 것이다. 승민은 하던대로 중1 수학을 배우면서 현행반에서 5학년 과정도 듣고 있다. 승민뿐 아니라 선행반 친구들 모두 현행반까지 다닌다고 한다.
“코로나 지나가고 나면 성적 차이가 엄청날 거래. 절대 못 따라올 거래. 우리 원장 선생님이 그랬어.”
서연은 이번에도 엄마한테 물어보겠다고만 대답했다. 사실 서연은 수학학원을 옮길 계획이 없다. 그냥 그만두었다.
연초부터 서연의 아빠는 직원들을 한 사람씩 내보내고 이제 혼자 일한다. 출근해서 하는 일이라고는 취소와 환불뿐이지만 폐업만은 하지 않으려 애쓰고 있다. 안 그래도 변화가 필요했다. 갈수록 패키지여행 선호가 낮아져 온천 위주의 효도 관광도 부부나 가족 단위로 움직이려는 고객들이 많았다. 아빠는 이 위기를 새 상품 개발의 기회로 삼으려고 한다. 매출은 전혀 없지만 소상공인과 관광업을 대상으로 하는 각종 코로나 특별 지원금 덕분에 오히려 작년보다는 상황이 나았다. 그리고 아빠는 요즘 택배 상하차 일도 한다.
모두 언니에게 들었다. 엄마가 수학학원은 학생 수가 너무 많으니 당분간 쉬라고 하길래 코로나 때문인 줄 알았다. 언니가 수학과 미술학원을 가지 않는 것도 코로나 때문인 줄 알았다. 아빠가 늦게 오는 것은 여행사 야근인 줄 알았고, 엄마가 지역돌봄센터 방역 봉사 가는 것은 말 그대로 봉사인 줄 알았다. 엄마가 차려놓고 나간 식어버린 점심을 먹으면서 모르는 아이들에게 갓 지은 따뜻한 밥을 먹이고 있을 엄마를 조금 원망하기도 했다. 그게 시급을 받는 아르바이트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서연은 아무것도 모르고 스마트폰을 사달라고 했다가 엄마가 나간 사이 언니에게 꿀밤을 맞았다.
“아빠 회사 망하게 생겨서 우리 학원도 못 다니는데 너는 스마트폰 소리가 나오냐?”
언니에게 집안 사정을 모두 전해 듣고 서연은 엉엉 울었다. 무섭기도 했고 서럽기도 했고 엄마 아빠가 불쌍하기도 미안하기도 했다.
“근데 언니, 우리 영어학원은 계속 다녀도 괜찮을까?”
“괜찮아. 내가 미술 그만뒀잖아. 미술 안 할 거야. 예고 안 갈 거야.”
잘못한 것도 없는데 죄책감이 무겁게 서연의 어깨를 짓눌렀다. 가족들과 도망 다니는 꿈을 며칠 연달아 꾸었다. 잠을 잘 못 자니 기운이 없고 그래서 언니와도 싸우지 않게 되었는데, 둘이 데면데면 있는 것을 본 엄마가 차라리 싸울 때가 낫다고 했다. 불안한 마음을 승민에게 털어놓고 위로받고 싶었지만 짧은 문자 메시지로 나눌 수 있는 대화에는 한계가 있었다.
학원 시간이 다 되어 서연이 벤치에서 일어나려는데 승민이 가방에서 종이봉투를 하나 꺼내 내밀었다.
“뭐야?”
“선물.”
“여기서 열어봐도 돼?”
“응.”
마스크였다. KF94 중형 마스크 다섯 개. 서연은 청혼 반지라도 받은 듯 손이 떨렸다.
“이걸, 어디서 났어?”
“마스크 한 개 며칠씩 쓰면서 모았지. 우리 엄마는 몰라.”
목이 메어서 서연은 겨우 고맙다고 말할 수 있었다. 손을 잡고 아무도 없는 놀이터를 가로질러 나와서 손을 놓고 각자의 방향으로 걸어갔다.
대화다운 대화는 그날이 마지막이었다. 승민은 월요일에는 과학학원에 가야 해서, 수요일에는 숙제가 남았거나 테스트가 있거나 보강이 있어서 늘 바빴다. 처음의 약속은 자연스럽게 없던 게 되었고 마스크로 가린 반쪽의 얼굴마저 보지 못하고 지냈다. 가끔 문자를 주고받을 때면 승민이 너도 우리 학원 다니면 좋겠다, 너도 카카오톡 되면 좋겠다, 고 말하곤 했는데 서연은 그 말들이 부담스러웠다.
한 번은 서연이 영어 보강을 듣고 평소보다 한 시간쯤 늦게 집으로 돌아오다가 편의점 앞에서 승민과 마주쳤다. 반가운데 어색했다. 서연이 먼저 손을 흔들며 안녕, 하자 승민도 손을 흔들었다. 서연은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승민을 지나쳐 걸었는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마스크에 가려져 표정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을 것 같았다. 혹시 오해를 할까 걱정되거나 아쉽지는 않았다.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6월 5일에야 처음으로 학교에 갔다. 5월 중순, 고등학교 3학년부터 순차적으로 등교 수업을 시작해 초등학교 5, 6학년과 중학교 1학년이 6월 1일에 마지막으로 등교했다. 매일 등교가 아닌 반별로 일주일에 한 번 등교라 5반인 서연은 금요일마다 학교에 가면 됐다.
평소였으면 학교 사물함에 두고 다녔을 교과서와 공책, 독서록, 사인펜, 색연필, 가위, 풀, 테이프에 화장지, 물티슈, 손 소독제, 실내화까지 챙겼더니 가방 지퍼가 겨우 잠겼다. 어깨가 끊어질 것 같아서 학교 가는 내내 손으로 가방끈을 들어올리면서 걸었다. 교문에는 ‘반가워 친구들아! 보고 싶었어!’라고 적힌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서연은 열화상카메라가 설치된 중앙 현관으로 건물에 들어가 교실 입구에서 실내화로 갈아신고 앞문을 통해 교실에 들어갔다. 구글 미트 화면으로만 보았던 담임 선생님이 앉아계셨다. 신기했다. 연예인을 직접 보면 이런 기분일까. 서연이 이름을 말하자 담임은 반가워 서연아, 하며 체온을 재서 출석부에 기록한 후 손바닥에 손 소독제를 짜주었다.
책상이 한 팔 길이만큼 간격을 두고 하나하나 떨어져 놓여 있었다. 책상의 양옆과 정면에 투명 파일로 가림막을 세우고 정면 가림막 하단에는 이름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서연은 자신의 이름이 붙은 자리로 가 앉아 교실을 둘러보았다. 모두 마스크를 했지만 친했던 친구들은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지유만 못 알아볼 뻔했다. 지유는 겨울방학 때 머리를 짧은 단발로 잘랐는데 그새 어깨 한참 아래까지 길어 있었다. 아이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손을 뻗어 흔들며 인사를 나누었다.
서연이 가방에서 필통과 배움 공책, 국어 교과서를 꺼내는데 누가 가림막을 두 번 톡톡 치고 지나갔다. 까만색 나이키 가방. 승민이었다. 인사는 그게 전부였다. 쉬는 시간은 너무 짧고 화장실 가는 게 아니라면 자리에 앉아 있어야 했다. 하교할 때는 간격을 두고 일렬로 줄을 서서 교문을 빠져나갔다. 승민과는 내내 3미터쯤 떨어져 있었다.
등교 셋째 주 아침이었다. 옆자리의 친구가 가방을 열어 교과서들을 서랍에 옮겨 담다 말고 가방 안의 내용물들을 잔뜩 책상 위에 쏟아놓기 시작했다. 빠르게 뒤적거리는 모습이 중요한 것을 가져오지 않은 듯했다.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어쩔 줄 몰라하는 친구에게 서연이 물었다.
“뭐 안 가져왔어?”
한 팔 길이만큼 떨어져 앉은, 가림막 속, 마스크를 쓴 친구가 답했다.
“물 있어.”
“응?”
“물 있다고.”
“뭐, 안, 가, 져, 왔, 냐, 고!”
“아, 필통. 필통 안 가져왔나 봐.”
서연은 잠시 고민하다가 자신의 필통에서 꽁지에 지우개가 달린 연필을 하나 꺼내 친구에게 건넸다. 친구는 물끄러미 보기만 할 뿐 선뜻 받지 못했다. 서연은 다시 가방에서 물티슈를 꺼내 연필을 꼼꼼히 닦고 끝부분만 물티슈로 감싼 후 그 부분을 살짝 쥐고 친구에게 연필을 건넸다. 그제야 친구는 연필을 받아들고 고마워, 했다.
교실은 대체로 무사했다. 아무도 뛰지 않았고 다치지 않았고 싸우지 않았다. 쉬는 시간이면 가까운 친구끼리 소곤소곤 수다를 떨었고, 수업 중 누군가 엉뚱한 대답을 하면 다들 웃었고, 운동장을 뛰지는 못해도 스피드 컵이나 풍선 배구 같은 간단한 체육 활동도 했다. 그리고 하교 시간이 되면 서연은 숨이 막혔다. 학원이나 마트에서도 몇 시간씩 마스크를 써봤고 견딜 만했는데 이상하게 한 줄로 서서 교문을 향해 걷고 있으면 마스크가 너무 갑갑했다.
언니와 서연의 몫으로 김치와 채소들이 가득 담긴 학교 식자재 꾸러미가 두 박스 배달되었다. 엄마는 쌀도 8kg씩 16kg이나 왔고 농협몰 포인트로는 과일을 사면 되니까 당분간 먹을거리는 걱정 없다고 좋아했다. 우엉조림과 팽이버섯 부침이 끼니마다 식탁에 올라오는 것은 좀 지겨웠지만 엄마가 딸들 덕분에 잘 먹는다고 말해주어서 서연은 왠지 뿌듯했다.
우엉조림이 떨어질 즈음 엄마는 시래기를 삶았다. 외할머니가 다 삶아서 소분해서 냉동해 보내주면 먹어만 봤지 직접 삶는 것은 엄마도 처음이란다. 서연도 그런 냄새는 처음이었다. 불린 시래기가 끓으며 나는 냄새는 꼭 장마철의 수건 냄새 같았다. 최근 한 번씩 이런 꿉꿉한 냄새가 창으로 날아와 서연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다들 식자재 꾸러미의 시래기를 삶고 있었던 모양이다.
서연은 냄새를 피해 줄넘기를 들고 동 앞에 나갔다가 수빈을 마주쳤다. 같은 반이었던 작년에는 꽤 친했는데 올해 들어서는 처음 만났다. 수빈은 4월부터 승민과 같은 수학학원에 다니게 되었다며 서연에게 물었다.
“너네 올해도 같은 반이지?”
“응.”
수빈이 뭔가 생각난 듯 피식 웃으며 말했다.
“김승민 되게 착하더라.”
“그래?”
“나 김승민하고 영어랑 수학 다 같은 학원이라 매일 보거든. 요즘 카톡도 자주 하는데, 너가 왜 좋아하는지 알겠어.”
“나 김승민 안 좋아해.”
“너네 사귀지 않아?”
“아니! 김승민하고 사귀냐는 소리 이제 지겹다.”
사귀는 사실을 비밀로 하기로 이미 승민과 약속했다. 하지만 좋아하지도, 사귀지도 않는다고 말하고 나니 서연은 마음이 좋지 않았다. 게다가 요즘은 정말 사귀고 있는 것 같지도 않다. 서연은 집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에서 승민에게 학원에는 잘 갔다 왔냐고 문자를 보냈다. 승민에게서 곧바로 ‘응’하고 답이 왔고 그게 전부였다. 대화는 언제나처럼 쉽게 끝났다.
등교 수업 날인 금요일, 3교시 영어 교과 수업이 일찍 끝났다. 서연은 눈짓으로 승민을 불러냈다. 다른 반 학생들이 아무도 등교하지 않아 텅 빈 복도를 지나 도서관 쪽 계단으로 올라갔다. 반 층 올라간 계단참에 서서 서연이 말했다.
“우리 헤어지자.”
“서연아……”
“전화나 문자 말고 얼굴 보고 얘기하고 싶었어. 지금 아니면 말할 시간이 없을 것 같아서. 헤어져.”
서연이 계단을 내려가려는데 승민이 서연의 손목을 붙잡았다.
“갑자기 왜 그래?”
“쉬는 시간 끝나겠다. 들어가자.”
서연이 승민의 손을 뿌리치고 계단을 내려가버리자 승민이 서연을 다급하게 부르며 따라왔다. 서연아, 잠깐만! 야, 최서연! 마침 연구실에 있다가 교실로 돌아오던 담임이 그 모습을 보았다. 오싹할 만큼 싸늘한 눈을 하고 앞서 걷는 여자아이와 어쩔 줄 모르고 매달리듯 따라오는 남자아이. 그리고 다음 수업 시간 내내 남자아이는 가림막에 숨어 어깨를 들썩였다. 5학년 남학생이 학교에서 우는 경우는 흔치 않다. 담임은 뭔가 심상치 않다고 느꼈다. 괴롭힘, 따돌림, 뭐 그런 건가. 그렇다면 누가 피해자이고 누가 가해자일까.
담임은 수업이 끝나고 둘을 교실에 남게 했다.
“화장실 가는 거 아니면 쉬는 시간에도 자리에 앉아 있는 거야. 알지?”
서연은 네, 하고 대답했는데 승민은 답이 없었다. 대신 고개를 푹 숙이고 또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하, 김승민. 마음이 여린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울어버릴 줄은 몰랐다. 서연은 한숨이 나왔다. 담임이 승민에게 괜찮은지 물었는데 승민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담임이 둘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
“너희 싸웠어? 무슨 일이야?”
승민이 이렇게 울고 있는데 아무 일도 아니라고, 싸우지 않았다고 하면 오히려 더 이상할 것 같아 서연이 싸웠다고 대답했다.
“조금 싸우긴 했는데 별거 아니에요. 잘 화해할게요.”
그때 승민이 불쑥 끼어들었다.
“얘가 헤어지재요!”
“야!”
서연이 눈이 동그래져서 승민을 향해 소리쳤지만 승민은 아랑곳 않고 말했다.
“코로나 때문에 몇 번 만나지도 못했는데, 제가 뭐 잘못한 것도 없는데, 얘가 갑자기 헤어지재요!”
담임은 조금 당황하긴 했지만 차분하게 아이들을 진정시켰다.
“그래. 너희가 사귀고 헤어지고 하는 자세한 사정은 선생님이 알 수 없으니까 뭐라고 말은 못하겠는데, 어, 그래도 지금은 방역수칙을 잘 지켜야……”
아이들의 귀에는 담임의 말이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서연은 승민을 노려보며 맞받아쳤다.
“네 말대로 코로나 때문에 만나지도 못하잖아. 근데 사귀어서 뭐 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뭔데?”
“그게 나 때문이야? 너가 우리 학원 안 왔잖아! 너가 카톡도 안 되잖아!”
“나도 너네 학원 다니고 싶어. 카톡도 하고 싶어. 근데 안 되는 걸 어떡해? 그러니까 헤어지자고 하잖아.”
“그럼 내가 준 마스크 도로 내놔!”
“하, 김승민 인성 진짜…… 알았어. 다음 주에 갖다줄게. 대신 우리 사귀기로 했던 거 취소야. 사귀다가 헤어진 게 아니라 사귄 게 아예 취소야. 없던 일이야.”
서연은 담임에게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교실에서 뛰어나가버렸다. 곧 승민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줄줄 흘러내려 마스크를 적셨다. 담임은 서랍을 열어 여분의 마스크를 꺼내 승민에게 건넸다.
“승민아. 너희들이 사귀고 헤어지는 일까지 선생님이 방법을 가르쳐주고 틀린 부분을 고쳐주고 할 수는 없어. 그런데, 음, 마스크 도로 내놓으라고 그런 건, 좀 아닌 것 같아.”
승민은 말이 없고 담임이 덧붙였다.
“코로나 때문에 이렇게 된 건 선생님도 안타깝다. 미안해.”
“선생님이 뭐가 미안해요?”
“글쎄. 미안한 마음이 드네.”
교실 창 너머로 교문을 나서는 서연의 뒷모습이 보였다. 작은 몸집에 비해 가방이 너무 커다랗고 무거워 보였다. 승민은 콧물을 훌쩍이고 눈물을 훔치며 서연이 건물에 가려 사라질 때까지 계속 지켜보고 있었다.
“왜?”
“따라와 봐.”
승민은 401동과 402동 사이의 화단으로 서연을 데려갔다. 서연은 승민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대충 짐작하고 있었다.
둘은 4학년 내내 친했는데, 여자애들은 동성 단짝을 만들고 남자애들은 자기들끼리 무리 지어 다니는 시기라 종종 놀림을 받았다. 너네 사귀냐? 썸이냐? 쟤 좋아하냐? 하는 말들을 서연은 무시했고 승민은 유치하다고 응수했다. 사실 승민은 신경이 쓰였는데 아니라고 정색해서 서연을 무안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고민 끝에 생각해낸 최선의 대답이었다. 그렇게 1년을 보냈다.
담임이 성적표를 나눠주기 전부터 절대 돌려보지 말라고 여러 번 당부했지만 첫 페이지의 반 배정 정보는 빠르게 공유되었다. 승민과 서연은 같은 ‘가’반이었다. 서연은 손뼉을 마구 치며 좋아했는데 승민은 잠시 멍해졌다. 이런 게 운명인가. 그때 승민은 서연에게 고백하기로 마음먹었다.
승민은 운동화 앞코로 화단의 흙을 찍으며, 마스크를 만지작거리며 한참을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어, 서연아, 있잖아. 애들이 우리 사귀냐고, 좋아하냐고 자꾸 그러잖아. 근데, 나는, 진짜로 너가 쫌 좋아.”
“쫌?”
“아니, 아니. 쫌 많이.”
“그렇구나.”
승민이 손톱 아래의 거스러미를 뜯으며 물었다.
“우리, 사귈까?”
서연은 승민을 빤히 볼 뿐 대답하지 않았다. 서연도 승민이 좋다. 좋긴 한데 사귀는 게 어떤 건지 잘 모르겠다. 지금도 쉬는 시간에 자주 놀고 집에 같이 걸어온다. 사귀면 뭐가 달라지나. 서연이 고민하는 동안 승민이 거스러미 하나를 쭉 잡아당겼는데 살점이 제법 길게 뜯겨 나가며 순식간에 몽글 핏방울이 맺혔다. 서연의 눈이 동그래졌다.
“너, 피……”
“응. 나 피 봤어.”
서연은 웃음이 났다.
“그래, 사귀자.”
“응. 그래. 이따 문자 할게.”
승민은 귀까지 새빨개진 채로 먼저 뛰어갔고 서연은 화단에서 천천히 걸어나왔다.
학원 일정표를 만들어 공유했다. 월, 수요일에는 서연의 영어학원 시간과 승민의 수학학원 시간이 겹치니까 집에서 조금 일찍 나와 놀이터에서 잠깐 얼굴을 보기로 했다. 목요일에는 서연의 수학학원 끝나는 시간이 승민의 논술학원 가는 시간이라 걸으면서 전화 통화를 하기로 했다. 그리고 틈틈이 문자를 하면 된다. 아쉽지만 봄방학 2주만 지나면 개학이니까. 그때 매일 보자고, 4학년 때처럼 같이 하교하자고 약속했다. 그리고 둘이 사귀는 걸 공개하지는 않기로 했다. 괜한 말들에 시달리고 싶지 않았다.
설렘과 행복의 시간은 일주일 만에 끝났다. 2월 말, 코로나 확진자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며 개학이 2주 연기됐다. 인근의 학원들도 휴원에 들어갔다. 학교에서도, 학원 가는 길에도 만날 수 없게 됐고 통화도 어려워졌다.
서연은 방문을 닫아놓고 통화하면 됐는데 승민은 엄마가 절대 문을 닫지 못하게 했다. 승민의 엄마는 누군지 묻지 않겠다고, 신경 쓰지 말라고 말은 해놓고 승민이 전화를 하는 것 같으면 갑자기 하던 일을 멈추었다. 청소기 소리가 멈추고, 개수대의 물소리가 약해지고, 라디오 볼륨이 줄었다. 승민은 도저히 집에서 통화할 수가 없었다.
대신 문자를 엄청나게 주고받았다. 모해? 밥 먹었음? 심심하다. 엄마 때문에 짜증나. 언니가 자꾸 말 시킨다. 티비 보고 있었어. 늦잠 잤다. 게임 중. 엄마가 밥 먹으래. 폰 그만 보라고 혼났다. 양치하고 올게…… 평범한 일상의 중계가 이어지는 가운데 서연이 먼저 ‘보고 싶다’고 보냈다.
서연은 두 손으로 휴대폰을 붙들고 화면을 뚫을 듯 들여다봤다. 답장이 오지 않았다. 계속 문자가 오가는 중이었으니 승민이 못 보았을 리는 없다. 뭐지. 고장 났나. 서연은 폴더를 닫았다가 다시 열고 문자 메시지 함으로 들어갔다. 승민과의 마지막 메시지는 여전히 서연이 보낸 ‘보고 싶다’였다. 괜히 보냈나. 부담스러웠나. 메시지 발송을 취소해보려고 버튼을 이것저것 누르는데 부르르 휴대폰이 진동했다. 승민이었다. ‘서연이 넘 귀여워.’
서연은 고백을 받았을 때보다 더 심장이 쿵쾅거리며 얼굴이 달아올랐다. 큭. 귀엽대. 나보고 귀엽대. 휴대폰을 끌어안고 방바닥을 데굴데굴 구르고 있는데 방문이 벌컥 열렸다. 언니였다.
“최서연 뭐 하냐? 돌았냐?”
“노크 좀 해! 짜증 나, 최주연.”
“이게 진짜 돌았나. 엄마가 밥 먹으라잖아. 안 들려?”
“그래! 안 들렸다!”
“너 코로나냐?”
“왜 아무 데나 코로나를 갖다 붙여? 무식하게.”
“밥이나 먹어.”
언니는 다시 문을 쾅 닫고 나갔고 서연은 승민에게 밥 먹고 오겠다고 문자를 보냈다. 곧바로 새 메시지가 도착했는데 승민이 아니었다. ‘[Web발신] [LG U+] LTE 링 19의 기본링 (20200개)을 모두 이용하셨습니다.’ 서연은 풀썩 주저앉으며 중얼거렸다. 망했다.
서연은 낡은 폴더폰을 쓰고 있다. 요즘은 폴더형이라도 간단한 인터넷 검색이나 카카오톡 정도는 되는데 서연의 휴대폰은 모바일데이터도 와이파이도 전혀 되지 않는다. 2학년까지 목에 걸고 다니는 키즈폰을 쓰다가 3학년이 되면서 언니가 쓰던 폰을 물려받았다. 그때 언니는 스마트폰을 샀다. 서연은 자기도 스마트폰을 사준다면 공부를 열심히 하겠다, 회장이 되겠다, 언니와 안 싸우겠다, 밥을 안 남기겠다, 고 여러 약속을 남발했지만 소용없었다.
서연에게는 그 폴더폰이 전부다. 카톡도 SNS도 이메일도 없는데 링을 다 써버린 것이다. 이번 달은 이제 전화와 문자를 받는 것만 가능하다. 스마트폰이었으면 마음 편하게 카톡으로 얘기했을 텐데.
서연은 숟가락 가득 밥을 떠서 입에 넣고 국은 그릇째 들고 후룩후룩 마셨다. 엄마가 서연이 오늘 잘 먹네, 하면서 계란말이 하나를 서연의 밥그릇 위에 올려놓았다. 서연은 그 계란말이도 덥석 베어 물었다. 입 짧은 막내딸을 잘 먹이는 것이 엄마의 최대 고민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서연이 잘 알았다. 엄마가 싱긋 웃는 그 순간 서연이 마주 웃으며 엄마아, 했다.
“3월이면 나 5학년 되는 거 알지?”
“그러게. 서연이 벌써 5학년이네. 근데 개학을 안 해서 어쩌니. 언니 중학교 입학식은 할 수 있으려나 몰라.”
“5학년 되면 나 스마트폰 사주기로 했던 것도 알지?”
엄마는 완전히 잊고 있었다는 듯 우뚝 젓가락질을 멈추었고, 서연이 엄마의 표정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며칠 남지도 않았는데 우리 그냥 오늘 사러 갈까?”
엄마는 계란말이를 하나 더 서연의 밥그릇에 옮겨놓으며 달래듯 말했다.
“코로나 때문에 학교도 쉬고 학원도 쉬는데 폰 사러 다니면 위험하지.”
“그럼 인터넷으로 주문하자.”
“서연아, 좀 천천히. 어차피 지금 급한 거 아니잖아. 너 게임이랑 유튜브랑 엄마 폰으로 다 하면서 그래. 코로나 잠잠해지면 그때 알아보자. 응?”
혹시 돈이 없나. 서연의 아빠는 일본패키지 여행을 전문으로 하는 작은 여행사를 운영하고 있다. 일본 불매운동 때 어려워지기 시작해 코로나까지 터지며 완전 최악이라고 했다. 엄마 아빠가 뉴스 보며 말하는 것을 얼핏 들었다. 게다가 서연의 엄마도 당장 주말부터 일이 없다. 엄마는 초등학생들을 대상으로 박물관이나 미술관 등을 다니며 역사 교육을 하는 역사체험 강사다. 인기 강사라 그동안 주말에 하루도 쉬어본 적이 없었는데 코로나로 인해 모든 스케줄이 취소됐다.
그럼 링이라도 좀 충전해달라고 할까, 고민하다가 결국 말하지 못했다. 승민은 뭐해? 바빠? 왜 대답 안 해? 라고 몇 번 문자를 보내다가 늦은 오후에 전화를 걸어왔다. 내내 폰을 들고 있던 서연은 진동이 채 한 번 울리기도 전에 전화를 받았다.
“미안. 나 링이 다 떨어져서 받는 거밖에 못 해. 3월에는 다시 보낼 수 있어.”
“너도 카톡하면 좋을 텐데. PC로라도 하면 안 돼?”
“나 엄마 노트북 같이 써.”
“그렇구나.”
“근데 너 어떻게 전화했어? 엄마 때문에 불편하다며.”
“우리 엄마 지금 음쓰 버리러. 아, 엄마 왔다. 끊어!”
전화기 너머 멀리서 삑삑삑 기계음이 들리다가 전화가 끊겼다. 서연은 쭈그려 앉아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었다.
문자 횟수가 조금씩 줄었다. 일상은 매일 똑같고 더이상 할 말이 없었다. 3월이 되면서 서연이 다니던 영어학원에서는 줌을 이용한 온라인 수업을 시작했고 수학학원에서는 연산문제지를 이메일로 보내주었다. 서연은 엄마 폰으로 게임하는 시간이 길어졌고 언니와 자주 싸웠다.
학교 개학은 또 2주 연기되었지만 언니가 다니던 학원들은 일제히 개강을 강행했다. 마스크는 약국에서 일주일에 두 개씩 살 수 있는데 학원은 매일 나가야 해서 언니는 마스크 하나를 사흘씩 썼다. 삼일째 되는 날은 마스크에서 쉰 냄새가 나서 학원에 가기 싫다고 했다. 서연이 냅킨과 고무줄로 마스크 만드는 법을 유튜브에서 보고 알려주었지만 언니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승민도 다시 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서연이네 학원들은 아직 온라인 수업 중이라고 했더니 승민이 부러워했다.
‘숙제가 완전 많아졌어.’
‘어제는 테스트 통과 못해서 학원에 거의 2시간 있었음.’
승민은 3학년 때 수학 선행을 시작해 이제 중학교 1학년 과정에 들어갔다. 승민이 다니는 수학학원은 매 수업이 끝날 때마다 시험을 치러서 통과해야만 집에 보내주는 것으로 유명하다. 처음 등록할 때부터 언제 끝날지 모르니 수학학원 이후로 다른 스케줄은 잡지 말라고 했단다.
힘들겠다, 승민이 파이팅, 같은 문자를 보내긴 했지만 서연은 왜 저렇게까지 하나 싶었다. 서연은 4학년 2학기부터 수학학원에 다녔다. 전에는 문제집만 풀었다. 엄마가 채점하고 틀린 문제를 설명해 주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엄마의 설명만으로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엄마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언니가 학원을 권했다.
“엄마, 쟤 학원 보내. 분수는 안돼. 분수부터는 가족끼리 공부하는 거 아니야.”
서연은 일주일에 두 번, 한 시간씩 수학학원에 가서 학교 진도의 문제들을 풀었다. 그래도 수업을 잘 따라갔고, 단원평가도 늘 90점 이상 받아서 2학기 수학 성적표는 모두 ‘매우 잘함’이었다. 이 정도 하면 별로 부족하지 않은 것 같은데. 서연은 의아하기도 불안하기도 했다.
4월이 되면서 서연의 영어학원도 등원 수업을 시작했고 16일부터는 학교도 온라인 개학을 했다. 서연은 이제 노는 건 끝이구나 싶어 아쉽기도, 왠지 불안했는데 다행이기도, 다른 친구들은 공부 많이 했나 궁금하고 뒤처지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4월 1일 수요일, 서연은 영어학원 가기 전에 놀이터에서 잠깐 승민을 만났다. 한 달 만이었다. 마스크 위 승민의 눈이 초승달처럼 휘어 있었다. 승민은 웃을 때면 눈이 아예 감기다시피 한다. 앞에서 손가락을 흔들며 이거 몇 개게? 하고 놀리듯 말했지만 서연은 그 착한 눈이 좋았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얼마나 불안하고 또 답답했는지 폭풍처럼 감정을 쏟아냈다. 서연이 친구들하고 같이 놀고 싶다며 수빈이, 다경이, 연수, 지유, 하고 한 명씩 이름을 부르는데 갑자기 울컥 감정이 올라왔다. 더 말하다가는 진짜 눈물이 날 것 같아 입술을 꽉 깨물었다. 마스크를 써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승민이 서연의 마음을 읽었는지 숙제도 없고 단원평가도 없고 독서록도 일기도 쓰지 않는 건 좋지 않으냐고 과장해 웃었다. 서연은 승민의 의도를 다 알면서도 괜히 으이그, 하고 승민을 타박했다.
서연이 이제 월요일에 보겠네, 하고 말을 돌리자 승민이 그제야 생각난 듯 월요일은 안 된다고 대답했다.
“나 이번 달부터 월요일마다 과학 다녀. 수학 전에.”
“아, 그렇구나.”
“너도 같이 다니자.”
“엄마한테 물어보고.”
“너 수학 옮길 거랬지? 그럼 우리 학원 와라. 현행반 생겨서 그것만 다니는 애들이 더 많아. 준수도 인재수학 다니면서 우리 학원 현행반 또 다녀.”
학교 수업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자 학원들은 열심히 보완책을 내놓았다. 보충 수업을 해주거나 정기 테스트를 치러 성취도를 파악할 수 있게 돕기도 했고, 학교 진도를 나가는 특별 클래스를 운영하기도 했다. 승민이 다니는 수학학원에도 그런 현행반이 생긴 것이다. 승민은 하던대로 중1 수학을 배우면서 현행반에서 5학년 과정도 듣고 있다. 승민뿐 아니라 선행반 친구들 모두 현행반까지 다닌다고 한다.
“코로나 지나가고 나면 성적 차이가 엄청날 거래. 절대 못 따라올 거래. 우리 원장 선생님이 그랬어.”
서연은 이번에도 엄마한테 물어보겠다고만 대답했다. 사실 서연은 수학학원을 옮길 계획이 없다. 그냥 그만두었다.
연초부터 서연의 아빠는 직원들을 한 사람씩 내보내고 이제 혼자 일한다. 출근해서 하는 일이라고는 취소와 환불뿐이지만 폐업만은 하지 않으려 애쓰고 있다. 안 그래도 변화가 필요했다. 갈수록 패키지여행 선호가 낮아져 온천 위주의 효도 관광도 부부나 가족 단위로 움직이려는 고객들이 많았다. 아빠는 이 위기를 새 상품 개발의 기회로 삼으려고 한다. 매출은 전혀 없지만 소상공인과 관광업을 대상으로 하는 각종 코로나 특별 지원금 덕분에 오히려 작년보다는 상황이 나았다. 그리고 아빠는 요즘 택배 상하차 일도 한다.
모두 언니에게 들었다. 엄마가 수학학원은 학생 수가 너무 많으니 당분간 쉬라고 하길래 코로나 때문인 줄 알았다. 언니가 수학과 미술학원을 가지 않는 것도 코로나 때문인 줄 알았다. 아빠가 늦게 오는 것은 여행사 야근인 줄 알았고, 엄마가 지역돌봄센터 방역 봉사 가는 것은 말 그대로 봉사인 줄 알았다. 엄마가 차려놓고 나간 식어버린 점심을 먹으면서 모르는 아이들에게 갓 지은 따뜻한 밥을 먹이고 있을 엄마를 조금 원망하기도 했다. 그게 시급을 받는 아르바이트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서연은 아무것도 모르고 스마트폰을 사달라고 했다가 엄마가 나간 사이 언니에게 꿀밤을 맞았다.
“아빠 회사 망하게 생겨서 우리 학원도 못 다니는데 너는 스마트폰 소리가 나오냐?”
언니에게 집안 사정을 모두 전해 듣고 서연은 엉엉 울었다. 무섭기도 했고 서럽기도 했고 엄마 아빠가 불쌍하기도 미안하기도 했다.
“근데 언니, 우리 영어학원은 계속 다녀도 괜찮을까?”
“괜찮아. 내가 미술 그만뒀잖아. 미술 안 할 거야. 예고 안 갈 거야.”
잘못한 것도 없는데 죄책감이 무겁게 서연의 어깨를 짓눌렀다. 가족들과 도망 다니는 꿈을 며칠 연달아 꾸었다. 잠을 잘 못 자니 기운이 없고 그래서 언니와도 싸우지 않게 되었는데, 둘이 데면데면 있는 것을 본 엄마가 차라리 싸울 때가 낫다고 했다. 불안한 마음을 승민에게 털어놓고 위로받고 싶었지만 짧은 문자 메시지로 나눌 수 있는 대화에는 한계가 있었다.
학원 시간이 다 되어 서연이 벤치에서 일어나려는데 승민이 가방에서 종이봉투를 하나 꺼내 내밀었다.
“뭐야?”
“선물.”
“여기서 열어봐도 돼?”
“응.”
마스크였다. KF94 중형 마스크 다섯 개. 서연은 청혼 반지라도 받은 듯 손이 떨렸다.
“이걸, 어디서 났어?”
“마스크 한 개 며칠씩 쓰면서 모았지. 우리 엄마는 몰라.”
목이 메어서 서연은 겨우 고맙다고 말할 수 있었다. 손을 잡고 아무도 없는 놀이터를 가로질러 나와서 손을 놓고 각자의 방향으로 걸어갔다.
대화다운 대화는 그날이 마지막이었다. 승민은 월요일에는 과학학원에 가야 해서, 수요일에는 숙제가 남았거나 테스트가 있거나 보강이 있어서 늘 바빴다. 처음의 약속은 자연스럽게 없던 게 되었고 마스크로 가린 반쪽의 얼굴마저 보지 못하고 지냈다. 가끔 문자를 주고받을 때면 승민이 너도 우리 학원 다니면 좋겠다, 너도 카카오톡 되면 좋겠다, 고 말하곤 했는데 서연은 그 말들이 부담스러웠다.
한 번은 서연이 영어 보강을 듣고 평소보다 한 시간쯤 늦게 집으로 돌아오다가 편의점 앞에서 승민과 마주쳤다. 반가운데 어색했다. 서연이 먼저 손을 흔들며 안녕, 하자 승민도 손을 흔들었다. 서연은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승민을 지나쳐 걸었는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마스크에 가려져 표정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을 것 같았다. 혹시 오해를 할까 걱정되거나 아쉽지는 않았다.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6월 5일에야 처음으로 학교에 갔다. 5월 중순, 고등학교 3학년부터 순차적으로 등교 수업을 시작해 초등학교 5, 6학년과 중학교 1학년이 6월 1일에 마지막으로 등교했다. 매일 등교가 아닌 반별로 일주일에 한 번 등교라 5반인 서연은 금요일마다 학교에 가면 됐다.
평소였으면 학교 사물함에 두고 다녔을 교과서와 공책, 독서록, 사인펜, 색연필, 가위, 풀, 테이프에 화장지, 물티슈, 손 소독제, 실내화까지 챙겼더니 가방 지퍼가 겨우 잠겼다. 어깨가 끊어질 것 같아서 학교 가는 내내 손으로 가방끈을 들어올리면서 걸었다. 교문에는 ‘반가워 친구들아! 보고 싶었어!’라고 적힌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서연은 열화상카메라가 설치된 중앙 현관으로 건물에 들어가 교실 입구에서 실내화로 갈아신고 앞문을 통해 교실에 들어갔다. 구글 미트 화면으로만 보았던 담임 선생님이 앉아계셨다. 신기했다. 연예인을 직접 보면 이런 기분일까. 서연이 이름을 말하자 담임은 반가워 서연아, 하며 체온을 재서 출석부에 기록한 후 손바닥에 손 소독제를 짜주었다.
책상이 한 팔 길이만큼 간격을 두고 하나하나 떨어져 놓여 있었다. 책상의 양옆과 정면에 투명 파일로 가림막을 세우고 정면 가림막 하단에는 이름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서연은 자신의 이름이 붙은 자리로 가 앉아 교실을 둘러보았다. 모두 마스크를 했지만 친했던 친구들은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지유만 못 알아볼 뻔했다. 지유는 겨울방학 때 머리를 짧은 단발로 잘랐는데 그새 어깨 한참 아래까지 길어 있었다. 아이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손을 뻗어 흔들며 인사를 나누었다.
서연이 가방에서 필통과 배움 공책, 국어 교과서를 꺼내는데 누가 가림막을 두 번 톡톡 치고 지나갔다. 까만색 나이키 가방. 승민이었다. 인사는 그게 전부였다. 쉬는 시간은 너무 짧고 화장실 가는 게 아니라면 자리에 앉아 있어야 했다. 하교할 때는 간격을 두고 일렬로 줄을 서서 교문을 빠져나갔다. 승민과는 내내 3미터쯤 떨어져 있었다.
등교 셋째 주 아침이었다. 옆자리의 친구가 가방을 열어 교과서들을 서랍에 옮겨 담다 말고 가방 안의 내용물들을 잔뜩 책상 위에 쏟아놓기 시작했다. 빠르게 뒤적거리는 모습이 중요한 것을 가져오지 않은 듯했다.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어쩔 줄 몰라하는 친구에게 서연이 물었다.
“뭐 안 가져왔어?”
한 팔 길이만큼 떨어져 앉은, 가림막 속, 마스크를 쓴 친구가 답했다.
“물 있어.”
“응?”
“물 있다고.”
“뭐, 안, 가, 져, 왔, 냐, 고!”
“아, 필통. 필통 안 가져왔나 봐.”
서연은 잠시 고민하다가 자신의 필통에서 꽁지에 지우개가 달린 연필을 하나 꺼내 친구에게 건넸다. 친구는 물끄러미 보기만 할 뿐 선뜻 받지 못했다. 서연은 다시 가방에서 물티슈를 꺼내 연필을 꼼꼼히 닦고 끝부분만 물티슈로 감싼 후 그 부분을 살짝 쥐고 친구에게 연필을 건넸다. 그제야 친구는 연필을 받아들고 고마워, 했다.
교실은 대체로 무사했다. 아무도 뛰지 않았고 다치지 않았고 싸우지 않았다. 쉬는 시간이면 가까운 친구끼리 소곤소곤 수다를 떨었고, 수업 중 누군가 엉뚱한 대답을 하면 다들 웃었고, 운동장을 뛰지는 못해도 스피드 컵이나 풍선 배구 같은 간단한 체육 활동도 했다. 그리고 하교 시간이 되면 서연은 숨이 막혔다. 학원이나 마트에서도 몇 시간씩 마스크를 써봤고 견딜 만했는데 이상하게 한 줄로 서서 교문을 향해 걷고 있으면 마스크가 너무 갑갑했다.
언니와 서연의 몫으로 김치와 채소들이 가득 담긴 학교 식자재 꾸러미가 두 박스 배달되었다. 엄마는 쌀도 8kg씩 16kg이나 왔고 농협몰 포인트로는 과일을 사면 되니까 당분간 먹을거리는 걱정 없다고 좋아했다. 우엉조림과 팽이버섯 부침이 끼니마다 식탁에 올라오는 것은 좀 지겨웠지만 엄마가 딸들 덕분에 잘 먹는다고 말해주어서 서연은 왠지 뿌듯했다.
우엉조림이 떨어질 즈음 엄마는 시래기를 삶았다. 외할머니가 다 삶아서 소분해서 냉동해 보내주면 먹어만 봤지 직접 삶는 것은 엄마도 처음이란다. 서연도 그런 냄새는 처음이었다. 불린 시래기가 끓으며 나는 냄새는 꼭 장마철의 수건 냄새 같았다. 최근 한 번씩 이런 꿉꿉한 냄새가 창으로 날아와 서연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다들 식자재 꾸러미의 시래기를 삶고 있었던 모양이다.
서연은 냄새를 피해 줄넘기를 들고 동 앞에 나갔다가 수빈을 마주쳤다. 같은 반이었던 작년에는 꽤 친했는데 올해 들어서는 처음 만났다. 수빈은 4월부터 승민과 같은 수학학원에 다니게 되었다며 서연에게 물었다.
“너네 올해도 같은 반이지?”
“응.”
수빈이 뭔가 생각난 듯 피식 웃으며 말했다.
“김승민 되게 착하더라.”
“그래?”
“나 김승민하고 영어랑 수학 다 같은 학원이라 매일 보거든. 요즘 카톡도 자주 하는데, 너가 왜 좋아하는지 알겠어.”
“나 김승민 안 좋아해.”
“너네 사귀지 않아?”
“아니! 김승민하고 사귀냐는 소리 이제 지겹다.”
사귀는 사실을 비밀로 하기로 이미 승민과 약속했다. 하지만 좋아하지도, 사귀지도 않는다고 말하고 나니 서연은 마음이 좋지 않았다. 게다가 요즘은 정말 사귀고 있는 것 같지도 않다. 서연은 집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에서 승민에게 학원에는 잘 갔다 왔냐고 문자를 보냈다. 승민에게서 곧바로 ‘응’하고 답이 왔고 그게 전부였다. 대화는 언제나처럼 쉽게 끝났다.
등교 수업 날인 금요일, 3교시 영어 교과 수업이 일찍 끝났다. 서연은 눈짓으로 승민을 불러냈다. 다른 반 학생들이 아무도 등교하지 않아 텅 빈 복도를 지나 도서관 쪽 계단으로 올라갔다. 반 층 올라간 계단참에 서서 서연이 말했다.
“우리 헤어지자.”
“서연아……”
“전화나 문자 말고 얼굴 보고 얘기하고 싶었어. 지금 아니면 말할 시간이 없을 것 같아서. 헤어져.”
서연이 계단을 내려가려는데 승민이 서연의 손목을 붙잡았다.
“갑자기 왜 그래?”
“쉬는 시간 끝나겠다. 들어가자.”
서연이 승민의 손을 뿌리치고 계단을 내려가버리자 승민이 서연을 다급하게 부르며 따라왔다. 서연아, 잠깐만! 야, 최서연! 마침 연구실에 있다가 교실로 돌아오던 담임이 그 모습을 보았다. 오싹할 만큼 싸늘한 눈을 하고 앞서 걷는 여자아이와 어쩔 줄 모르고 매달리듯 따라오는 남자아이. 그리고 다음 수업 시간 내내 남자아이는 가림막에 숨어 어깨를 들썩였다. 5학년 남학생이 학교에서 우는 경우는 흔치 않다. 담임은 뭔가 심상치 않다고 느꼈다. 괴롭힘, 따돌림, 뭐 그런 건가. 그렇다면 누가 피해자이고 누가 가해자일까.
담임은 수업이 끝나고 둘을 교실에 남게 했다.
“화장실 가는 거 아니면 쉬는 시간에도 자리에 앉아 있는 거야. 알지?”
서연은 네, 하고 대답했는데 승민은 답이 없었다. 대신 고개를 푹 숙이고 또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하, 김승민. 마음이 여린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울어버릴 줄은 몰랐다. 서연은 한숨이 나왔다. 담임이 승민에게 괜찮은지 물었는데 승민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담임이 둘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
“너희 싸웠어? 무슨 일이야?”
승민이 이렇게 울고 있는데 아무 일도 아니라고, 싸우지 않았다고 하면 오히려 더 이상할 것 같아 서연이 싸웠다고 대답했다.
“조금 싸우긴 했는데 별거 아니에요. 잘 화해할게요.”
그때 승민이 불쑥 끼어들었다.
“얘가 헤어지재요!”
“야!”
서연이 눈이 동그래져서 승민을 향해 소리쳤지만 승민은 아랑곳 않고 말했다.
“코로나 때문에 몇 번 만나지도 못했는데, 제가 뭐 잘못한 것도 없는데, 얘가 갑자기 헤어지재요!”
담임은 조금 당황하긴 했지만 차분하게 아이들을 진정시켰다.
“그래. 너희가 사귀고 헤어지고 하는 자세한 사정은 선생님이 알 수 없으니까 뭐라고 말은 못하겠는데, 어, 그래도 지금은 방역수칙을 잘 지켜야……”
아이들의 귀에는 담임의 말이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서연은 승민을 노려보며 맞받아쳤다.
“네 말대로 코로나 때문에 만나지도 못하잖아. 근데 사귀어서 뭐 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뭔데?”
“그게 나 때문이야? 너가 우리 학원 안 왔잖아! 너가 카톡도 안 되잖아!”
“나도 너네 학원 다니고 싶어. 카톡도 하고 싶어. 근데 안 되는 걸 어떡해? 그러니까 헤어지자고 하잖아.”
“그럼 내가 준 마스크 도로 내놔!”
“하, 김승민 인성 진짜…… 알았어. 다음 주에 갖다줄게. 대신 우리 사귀기로 했던 거 취소야. 사귀다가 헤어진 게 아니라 사귄 게 아예 취소야. 없던 일이야.”
서연은 담임에게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교실에서 뛰어나가버렸다. 곧 승민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줄줄 흘러내려 마스크를 적셨다. 담임은 서랍을 열어 여분의 마스크를 꺼내 승민에게 건넸다.
“승민아. 너희들이 사귀고 헤어지는 일까지 선생님이 방법을 가르쳐주고 틀린 부분을 고쳐주고 할 수는 없어. 그런데, 음, 마스크 도로 내놓으라고 그런 건, 좀 아닌 것 같아.”
승민은 말이 없고 담임이 덧붙였다.
“코로나 때문에 이렇게 된 건 선생님도 안타깝다. 미안해.”
“선생님이 뭐가 미안해요?”
“글쎄. 미안한 마음이 드네.”
교실 창 너머로 교문을 나서는 서연의 뒷모습이 보였다. 작은 몸집에 비해 가방이 너무 커다랗고 무거워 보였다. 승민은 콧물을 훌쩍이고 눈물을 훔치며 서연이 건물에 가려 사라질 때까지 계속 지켜보고 있었다.
조남주
온라인 수업을 받는 초등학생의 보호자로 2020년을 보냈다.
2020/12/29
3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