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속 커다란 나무 아래에 한 사람이 서 있다. 나뭇잎 사이로 햇살이 내려앉아 빛과 그림자가 점점이 떨어진다. 평화롭고 따뜻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차가운 차창에 이마를 기댔다. 간간이 태국어가 쓰인 커다란 전광판이 보였다. 눅눅한 공기에 매캐한 향냄새가 섞여 창틈으로 흘러들었다. 타고 있는 미니밴이 미세하게 진동했다. 창문에 여러 번 머리를 박았다. 어두컴컴하고 텅 빈 육 차선 도로가 지루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새하얀 가로등 빛만 규칙적으로 빛나는 가운데 간혹 차 한두 대가 가까워졌다가 다시 멀어졌다.
  도착부터 비행기가 연착돼 일정이 어긋났다. 수완나품 공항을 한참 헤매다 겨우 숙소 사장을 만났다. 다행히 그는 아직 입국장 게이트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잔뜩 긴장한 채 돌아다니다 한국인을 보니 조금 안심이 됐다.
  미니밴 안에는 에어컨이 세게 틀려 있었다. 나는 운전석 뒷자리에 앉았다. 아직 한국에서 입고 온 차림 그대로라 땀이 삐질삐질 났다. 기모 후드는 공항 화장실에서 벗고 나올걸, 잠시 후회했다.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었다. 주렁주렁 들고 있던 여권과 보딩패스, 지갑, 줄 이어폰, 그리고 팔에 걸쳐두었던 겉옷을 모두 백팩 안에 구겨넣었다. 반쯤 남은 미지근한 생수는 마저 다 마셨다. 산발이 된 머리를 높이 올려 묶었다. 목이 끈적였다.
  눈을 감고 예정된 일정을 순서대로 짚어보았다. 숙소에 도착하면 아침일 테니 한국에서 미리 예약한 마사지를 취소할 수 있는지 물어보고, 조식도 그냥 다음에 먹어야겠다. 관광도 쇼핑도 하고 싶지 않았다. 일단 며칠 간은 숙소에 틀어박혀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이다……
  한국에 오늘 눈 왔나요?
  나는 조용히 운전만 하던 숙소 사장이 갑자기 말을 걸어 놀랐다. 그의 까무잡잡한 피부와 다부진 몸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여기까지 오는데 너무 지쳐서 새벽 4시에, 낯선 땅에서 낯선 사람과 있다는 사실을 잠시 잊고 있었다. 그는 말 건 적 없는 사람처럼 무표정하게 어두운 전방을 주시했다. 나는 몇 시간 전 공항버스에서 내릴 때를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그런데 한국의 날씨가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눈이 왔던 것 같기도, 아닌 것 같기도 했다. 그저 너무 추웠다는 것만이 생생하게 기억날 뿐이었다.
  눈이요? 글쎄요……
  그리고 긴 정적. 말을 덧붙여야 하나 고민했다. 두껍게 쌍꺼풀진 무심한 눈이 룸미러로 보였다. 내가 말을 덧붙여도 덧붙이지 않아도 별로 신경 쓰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다시 창문에 이마를 기댔다.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마사지가 취소됐는지 확인했다. 자정 넘어 수완나품 공항에 도착했더니 입국장 직원이 몇 없어 심사가 오래 걸렸다. 와중에 내가 항공권을 편도로 끊고 온 바람에 입국이 보류되었다. 덩그러니 공항 구석에서 심사를 기다리다가, 수하물 찾을 때는 길을 잘못 들기까지 했다. 마사지 예약 시간은 지난 지 오래였다. 그래도 혹시 몰라 체크인하면서 확인해 본 건데, 처음 예약했던 마사지사는 기다리다 퇴근했고 다른 마사지사가 지금까지 대기하고 있었다고 했다.
  나는 원래 내기로 한 마사지 비용에, 기다려준 시간까지 값을 더 낼 테니 미안하지만 마사지를 취소해달라고 했다. 그저 한시라도 빨리 자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러나 숙소 직원은 ‘돈을 더 지불할 필요 없다, 마사지는 예정대로 받을 수 있다’고만 말했다. 어떻게든 취소해보려고 했는데 언어가 통하지 않아 결국 마사지를 받기로 했다. 오렌지색 카라티를 입은 태국인 프런트 직원이 엘리베이터 쪽을 가리키며 룸에서 기다리면 된다고 알려주었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달콤한 유연제 냄새가 났다. 반팔 카라티 밖으로 비죽 나온 팔이 마르고 길었다. 은테 안경 너머 큰 눈이 번뜩였다. 어쩜 아침부터 저렇게 에너지가 있지. 나는 그가 가리킨 방향으로 터덜터덜 걸었다. 뒤를 돌아보니 그가 합장한 채 가볍게 미소 짓고 있었다. 나는 어색하게 마주 웃어 보였다.
  로비 통창 밖에서 아침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구름이 서서히 걷혔다. 낯선 새소리가 가볍게 들려왔다. 잠시 가던 길을 멈추고 가로로 길게 생긴 붉은 띠를 바라보았다. 햇빛이 날카롭게 유리에 꽂혔다. 실내 곳곳에 고루 빛이 들이쳐 반짝이고 있었다.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었다.

막냇동생이 고등학교를 수료하자마자 충동적으로 비행기 표를 끊었다. 아주 근처는 아니고 그렇다고 너무 멀지도 않은 거리, 가장 빨리 출발할 수 있는 비행기 표로, 최대한 값이 싼 걸 찾았다. 태국 방콕행이었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 동생들이 아직 아무도 태어나지 않았을 때. 할머니랑 엄마랑 나랑 셋이서 방콕에 온 적이 있었다. 엄마가 신문 귀퉁이에 실린 여행 상품 광고를 보고 전화로 예약했다고 한다. 지금 생각하면, 집안 형편이 넉넉한 것도 아니었는데 웬 해외여행이었나 싶다. 어쨌든. 엄마는 내게 그때 이야기를 가끔 했다. 더워 죽겠는데 내가 길거리에서 고집부려 힘들었다느니, 할머니가 자꾸 겁도 없이 사라져서 경찰서에 갈 뻔했다느니, 다 같이 물갈이를 하는 바람에 제대로 된 식당도 못 가봤다느니. 대체로 이런 내용이었는데, 그 얘기를 하는 엄마가 즐거워 보여서 나는 태국 여행 얘기를 좋아했다. 이야기를 듣다보면 어렴풋이 기억이 나는 것도 같았다.
  비행기 표를 예매한 뒤 곧장 숙박 앱 순위권에 뜬 곳 중 하나를 골라서 결제했다. 그런데 나중에 확인해보니 방콕 도심에서 꽤 멀리 떨어진 곳이었다. ‘교통이 너무 안 좋아서 힘들었다, 주변에 볼만한 게 하나도 없다’ 같은 리뷰가 뒤늦게 눈에 들어왔다.
  숙소는 실제로 도심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했다. 대신 근방에 편의점과 큰 공원, 지하철역이 있다고 했다. 어차피 관광차 온 게 아니기 때문에 상관없었다. 오히려 도심지에 한국인 북적거리는 유명 호텔보다 나은 선택 같기도 했다. 사장이 한국인이고, 숙소 내부에서 마사지를 받을 수 있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건물이 조금 낡긴 했지만 그런대로 관리가 잘 되어 보였다. 구석구석 자주 쓸고 닦은 티가 났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기다리고 있자 사장이 짐을 끌고 옆에 섰다. 그의 왼쪽 어깨에는 내 베이지색 백팩이 걸쳐 있었다. 별로 무겁지 않아 괜찮다고 했는데도 그는 기어이 가방을 건네받았다. 어깨를 짓누르던 가방과 커다란 캐리어가 없으니 몸이 한결 편했다.

1층 로비에는 프런트와 작은 응접실 같은 공간이 있었고, 2층은 조식당이었다. 사장은 조식이 맛있으니 꼭 먹어보라고 말했다. 아예 오픈 시간에 맞춰 가거나 9시쯤 가면 새로 채운 음식을 먹을 수 있다고 덧붙였다. 조식은 어딜 가나 비슷하던데 시간까지 맞춰서 가야 되나? 생각했다.
  사장이 내 캐리어를 좁은 엘리베이터 안으로 끌고 들어왔다. 나는 층수가 올라가는 걸 가만 보다가 습관적으로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일하던 논술 학원 학부모와 학생 몇 명으로부터 연락이 와 있었다. 학원 원장이 담당 강사 번호를 학부모들에게 알려줘서 쉬는 날에도 연락이 많이 왔다. 외할머니와 동생들 연락도 있었다.
  나는 알람이 계속 울리는 메신저 앱과 일정이 빼곡히 기록된 캘린더 앱을 지웠다. 당분간 누구와도 연락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3층부터 7층까지는 층마다 서너 개 정도의 객실이 있었다. 옥상엔 수영장이 있다며 사장이 무언가 자랑했는데 제대로 듣지 않았다. 수영장에 갈 일은 없을 것이다. 어차피 수영복도 가져오지 않았다. 태국에서 혼자 잠이나 마음껏 잘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었다. 다른 건 아무래도 좋았다.

사장은 객실 안에 캐리어와 백팩을 두고, 카드키 두 장과 와이파이 비밀번호가 적힌 작은 종이쪽지를 주고 떠났다. 밝은 곳에서 보니 그는 생각보다 어렸다. 많이 봐도 삼십대 중반 정도. 그가 나가고 나는 짐을 좀 풀까 하다가 그냥 침대에 걸터앉았다. 곧 마사지사가 올 것이었다.
  새벽 사원의 종소리가 어렴풋이 울렸다. 방 안에서 따뜻하고 물기 어린 냄새가 났다. 어릴 적 손발이 다 쪼그라들 때까지, 몇 시간이고 욕조에 몸 담그고 있던 게 떠올랐다. 밖에서 아무리 문 두드려도 절대 열어주지 않았지. 다섯 식구가 사는 18평 아파트에서, 내가 혼자 있을 수 있는 곳은 화장실뿐이었다.
  졸음이 쏟아졌다. 조식이고 마사지고 나발이고 일단 씻고 잠부터 자고 싶었다. 비행기에서야말로 잘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뜬눈으로 다섯 시간을 지새웠다. 마지막으로 통잠을 잔 게 언젠지 기억도 안 났다. 지난 몇 년간 일찍 자든 늦게 자든 새벽에 대여섯 번씩 연거푸 깨는 게 일상이었다. 잠을 한참 설치다가 아침에 겨우 잠든 적도 여러 번이었다. 그게 쌓이다보니 최근에는 어이없는 실수를 많이 했다. 내가 선생인데 수업 중에 꾸벅꾸벅 존다거나, 뜬금없이 시간과 요일을 착각해 이상한 시간에 이상한 장소에 가서 혼자 멍하니 있거나.
  그렇다고 일을 멈출 수는 없었다.
  엄마가 죽으면서 남긴 빚을 하루라도 빨리 갚으려면 공휴일도 주말도 명절도 없이 일해야 했으니까. 사람에게 기대가 없으면 실망도 없다지만 실망하지 않았다고 해서 다 괜찮은 건 아니다. 난 어릴 때부터 엄마에게 아무런 기대가 없었는데도, 그래서 실망한 적 없는데도, 괜찮진 않았다.
  나는 두 학원에 강의를 나가면서 동시에 개인 과외도 닥치는 대로 잡았다. 다행히 과외는 내가 잡으면 잡은 만큼 일할 수 있고, 시간을 쏟는 만큼 버는 액수도 커졌다. 문제는 닥치는 대로 뭉쳐 굴린 눈덩이가 이제는 내 의지로 멈출 수 없는 수준이 됐다는 거였다. 365일 스케줄이 빽빽하게 차 있었다. 매일매일 스키 상급 코스에서 정신없이 굴러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침대에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나도 모르게 설핏 잠들었다. 눈을 뜨자 심장이 평소보다 두 배는 빠르게 뛰었다. 나는 이곳이 어디인지 잠시 생각했다. 더디게 상황 파악이 됐다. 몸이 무거웠다. 어느새 비가 내리고 있었다. 번개가 치면 침대 옆 큰 창문 전체가 하얗게 질렸다. 하늘이 찢어지는 듯 날카로운 천둥소리가 뒤따랐다. 아직 오전인데 밀도 높은 구름이 짙게 드리워 사방이 어두웠다. 아까 해가 뜰 때와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그때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나는 몸을 일으켰다. 등이 식은땀으로 완전히 젖어 있었다.
  방문 앞에 마사지사가 와 있었다. 그녀는 깨끗하게 다린 아이보리색 유니폼을 입고, 마사지복과 대야와 비누, 수건과 타이거밤 등을 들고 있었다. 검은 머리를 곱게 빗어 하나로 묶었다. 나이는 사십대 정도로 보였는데 키가 크고 피부가 매우 좋았다. 속눈썹이 길고 빽빽해 큰 눈에 음영이 졌다. 부드러운 미소 띤 얼굴로 그녀가 나를 내려다봤다.
  나는 혹시 내가 자느라 그녀가 밖에 오래 서 있었을까봐 쏘리, 쏘리, 하고 사과했다. 문을 활짝 열고 옆으로 비켜섰다. 그녀는 합장 인사한 뒤 들어왔다. 트윈 베드 중 한쪽에 짐을 풀고 내게 화장실에서 마사지복으로 갈아입고 누워 있으라 했다. 나는 그녀가 짐 정리하는 동안 옷을 갈아입고 큰 베개 두 개를 포개 등을 기댄 채 반쯤 앉아 있었다. 혹시 도울 일이 있나 싶어 그녀가 움직이는 것을 쫓다가, 생각해보니 불편할 것 같아 눈을 피했다.
  그녀는 대야에 따뜻한 물을 담아 왔다. 그것을 침대 아래에 놓고 발을 달라고 했다. 발을 물에 담갔다. 따뜻한 물이 발에 닿고 비누 향이 풍기자 몸이 노곤해졌다.

나는 그녀가 하라는 대로 천장을 보고 푹신한 침대에 누웠다. 그녀는 에어컨을 약하게 틀고 내 몸 위에 얇은 수건 하나를 덮어줬다. 마사지는 발끝에서부터 시작했다. 그녀는 손바닥을 비벼 따뜻하게 한 뒤 발목에 손을 얹어 잠시 그대로 있었다. 태국어로 뭐라고 작게 속삭였는데, 짧은 기도 같았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양손으로 발등과 발바닥을 지그시 눌렀다. 발목과 발가락 하나하나 관절을 가볍게 풀어준 뒤 종아리 근육을 손날로 두드렸다. 정강이 옆 라인을 팔로 꾹꾹 누르며 올라왔다. 그 순간 소리를 지를 뻔했다. 나도 잘 몰랐던 통증이 있는 곳을 어떻게 안 건지 정확하게 그 부분들만 겨냥해 찌르듯 눌렀다. 잠이 확 깼다.
  한쪽 다리씩 들어 올렸다가 가슴 쪽으로 접어 스트레칭해주고, 내 발목을 끌어당기면서 허벅지 안쪽을 자신의 발로 밀었다. 내가 호흡하는 것에 맞춰 압이 달라졌다. 어디서부터 뭉친지도 모를 만큼 돌덩이 같던 몸이 점차 부드러워지는 것 같았다.

하체가 끝나고 그녀는 손목부터 팔, 어깨까지 꾹꾹 눌러 올라오다가 손을 깍지 껴 마주잡고 손목 관절, 손가락 마디 하나하나를 풀어주었다. 손등을 지그시 누르며 내게 컴퓨터로 일을 하냐고, 손목이 안 좋다고 했다.
  그녀는 내게 엎드리라고 했다. 그녀의 손은 뜨겁고 건조하고 거칠었다. 척추 좌우 근육을 차례대로 주물렀다. 손아귀를 크게 벌려 어깨 근육을 붙잡고 느리게 안마했다. 오른쪽 어깨도 안 좋다며 허공에 글자 쓰는 시늉을 했다. 글을 많이 쓰냐고 물어보는 것 같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녀가 내 오른쪽 어깨에 손을 얹고 잠시 멈췄다. 내게 쌓여 있던 무언가가 그녀의 몸을 통해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몸이 가볍고 속도 개운했다. 잠을 푹 잔 것 같기도, 한참을 운 것 같기도 했다.
  단단하게 움츠려 있던 근육들이 그녀의 손길을 따라 서서히 풀어졌다. 불필요한 움직임은 하나도 없었다. 몸이 풀리니 다시 피로가 몰려왔고, 어쩐지 눈물이 났다.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숨이 막혔다.
  아파요?
  그녀가 한국어로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협탁에 있던 휴지로 눈물을 닦고 코를 풀었다. 그리고 휴대폰을 가져와 번역 앱을 켜서
  안 아파요. 마사지 너무 좋았어요. 감사합니다.
  라고 친 문장을 태국어로 번역해 보여주었다. 사실 혼자 있고 싶어져서 말한 건데 그녀는 꿋꿋하게 나머지 마사지 루틴을 마친 뒤에야 일어났다. 그리고 준비해 온 따뜻한 수건과 허브차를 내왔다. 향긋한 허브 향이 올라왔다. 차를 한 모금 마시는데 그녀가 작은 유리그릇과 보라색 향, 그리고 성냥 한 갑을 건넸다. 이 향을 피우면 잠을 잘 잘 수 있을 거라고 했다. 내가 제대로 자고 싶어 한다는 걸 눈치챈 걸까?

나는 그녀가 나가고도 한동안 잠들지 못했다. 불 꺼진 천장을 꿈뻑꿈뻑 응시하며 몸을 감싸는 따뜻한 기운을 느꼈다. 여전히 피곤했지만 잠이 들 것 같진 않았다. 눈을 감으면 온갖 생각이, 눈을 뜨면 온갖 감각이 날 괴롭혔다.
  이럴 땐 차라리 몸을 움직이는 게 나았다. 나는 캐리어 짐을 풀었다. 향 좋은 보디용품과 부드러운 실내복, 안대, 다리 마사지기, 원적외선 찜질 패드, 이어플러그, 수면 영양제…… 그동안 SNS 광고에 속아 산 것들이 끊임없이 나왔다. 살 땐 푹 잘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기대만큼의 효과는 없었다.
  나는 영양제를 먹고 보디로션을 바른 뒤 실내복을 입은 채, 안대와 이어플러그, 다리 마사지기를 모두 끼고 따뜻한 찜질 패드를 배 위에 올렸다. 살짝 잠이 오나 싶다가, 답답해서 결국 벌떡 일어났다. 안대와 이어플러그, 마사지기를 아무렇게나 내동댕이치고 다시 자세를 잡았다. 영 불편했다.
  뒤척이다 결국 창가 쪽 침대로 자리를 옮겼다. 침구가 에어컨 바람을 맞아 시원했다. 이불 겉면을 쓰다듬었다. 혼자 있으면 쉽게 잠들 줄 알았는데. 그때, 마사지사가 주고 간 보라색 향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창틀에 비스듬하게 놓여 있었다. 나는 속는 셈 치고 향을 피워보았다. 아로마틱한 냄새가 났다. 익숙한 향이었다. 다시 이불 속으로 들어와 그 향을 어디서 맡아봤더라 생각했다. 그러다 정말 오랜만에 깊이 잠들었다.


눈을 뜨자 다음 날 새벽이었다. 대체 몇 시간을 잔 거지? 온몸에 근육통이 느껴졌다. 아직 밖은 깜깜했다. 엄마 생각이 났다. 나는 엄마의 목소리를 떠올려보려고 노력했다. 이상하게 몇 년 전부터 엄마의 목소리도 말투도,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나는 혼자 엄마의 말투를 여러 버전으로 상상하곤 했다. 진짜 엄마처럼 느껴지는 버전은 아직까지 없었다.
  엄마는 내게 어린 두 동생과 깐깐한 외할머니, 18평 아파트 하나를 남기고 죽었다. 엄마가 죽자, 친척들은 다들 날 쳐다봤다.
  동생 중 하나, 아님 외할머니, 아님 18평 아파트, 빚.
  이 중 하나라도 없었다면 삶이 좀더 수월했을 것이다. 그런데 모두 다 있었다. 그리고 내가 붙잡지 않으면 이것들은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 혼자였음 상속 포기를 했겠지만 동생들과 18평 아파트에서라도 함께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침대에서 내려와 캐리어를 열었다. 여름옷 조금과 돈다발이 보였다. 지난 삼 년간 과외해서 모은 전 재산 중 일부를 바트로 환전해서 가져왔다. 이걸로 며칠이나 버틸 수 있을까. 돈이 다 떨어지면 한국행 비행기를 끊을 것이다. 일부러 계산기를 두드려보진 않았다. 되는대로 쓸 생각이었다. 어차피 나는 사치를 하지도, 음식을 많이 먹지도 않아서 돈 쓸 일이 별로 없을 것이다. 이래저래 계산하고 아끼는 건 이제 지겨웠다.
  그러고 보니 그저께 인천 공항에서 샌드위치 하나 사먹고 여태 굶었다. 어제는 입국하자마자 숙소 와서 마사지 받고 잠드느라 먹을 새가 없었다. 곧 조식 오픈 시간이었다. 마음 같아선 잠이나 더 자고 싶었지만, 이틀 넘게 굶는 건 위장에 별로 안 좋을 것 같아서 일어났다. 타지에서 아프면 귀찮아지니까.
  복도 바닥에는 검붉은 카펫이 깔려 있었다. 푹신한 카펫을 밟으며 엘리베이터 쪽으로 향했다. 객실 문들에서 짙은 속나무 냄새가 났다. 창밖이 점점 밝아오고 있었다. 근데 죽은 나무에서도 피톤치드가 나오나?

숙소 조식당은 크진 않아도 웬만한 건 다 있었다. 일찍 도착한 몇몇 사람들이 이미 자리를 잡고 접시에 음식을 덜고 있었다. 나는 음식이 놓인 곳을 한 바퀴 돌며 오믈렛과 샐러드 조금, 수박 주스 한 잔을 떠왔다.
  그런데 막상 먹으려고 하니 손이 잘 가지 않았다. 별로 먹고 싶지 않았다. 포크로 샐러드를 찍어 깨작깨작 먹었다. 오믈렛은 반으로 갈라서 식힌 뒤 조금씩 뜯어 먹었는데, 씹는 것도 삼키는 것도 힘들었다. 다른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이 접시 가득 음식을 떠 와 먹는 걸 구경했다. 작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는 태국인 커플도 있었고, 포크와 나이프를 든 백인 노인도 있었다. 그들의 손과 입이 쉬지 않고 움직였다. 확실히 사장의 말대로 조식은 신선하고 맛있었다. 메뉴 하나하나, 들어가는 재료 하나하나 신경 쓴 티가 났다.
  나는 포크를 내려놓고 밍밍한 수박 주스를 마셨다. 한 잔을 다 마시고 다시 뜨러 갔다. 조식당에 사람이 점점 많아졌다. 자리로 돌아오면서 플레인요구르트에 꿀을 뿌려 담아 왔다. 씹지 않아도 되니 먹을 만했다.
  과일이나 팬케이크도 가져와봤는데 역시 다 먹지 못했다. 나는 벌 받는 사람처럼 그 자리에 한참 앉아 있다가, 남은 음식물을 접시 하나에 모아두고 일어났다.

로비를 지나는데 오늘도 카라티 직원과 사장이 서 있었다. 그들이 나를 보더니 인사했다. 나도 그들에게 인사했다. 그리고 엘리베이터로 가려다가 돌아와 사장에게 다가갔다.
  저, 혹시……
  사장이 모니터를 보고 있다가 내게 시선을 옮겼다.
  어제 새벽에 저 마사지해주신 분이요.
  네. 사장이 눈을 맞추고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저녁때도 그분께 마사지 받을 수 있을까요?
  사장은 오늘 그녀가 다른 마사지숍에서 일하는 날이라 그럴 수 없다고 했다.
  오늘은 숙소에서 가만히 쉬어야겠구나, 생각하다가 그럼 어제 그녀가 주고 간 보라색 향을 여기서 살 수 있는지 물었다. 왠지 그 향이 있으면 오늘도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건 파는 게 아니고 근처 사원에서 나눠주는 거예요.
  나는 실망한 채 그럼 다음에 또 예약하게 마사지사의 이름을 알려달라고 했다.
  이름은 개인 정보라 알려줄 수 없어요…… 다음부터 넘버 파이브를 찾으면 돼요.
  넘버 파이브는 언제 다시 오나요?
  글쎄, 여기저기 예약이 많이 들어오는 분이라 확실하게 알려드릴 수가 없네요.
  나는 조금 시무룩해져서 알았다고 했다. 그리고 돌아가려는데
  그 향 주는 사원, 걸어서 십 분이면 갈 수 있어요. 여기 지도에 표시해드릴게요.
  사장이 A4 용지 크기 지도에 동그라미를 쳐서 건넸다. 나는 그 지도를 빤히 보다가 감사하다고 말하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이젠 결정을 해야 했다. 어제 잠을 너무 많이 잔 탓에 더이상 잠이 오지도 않았고, 무언가 먹고 싶지도, 가고 싶은 곳이 있지도 않았다. 나는 불 꺼진 방, 침대에 누워 사장이 준 지도를 다시 보았다. 커튼 틈으로 빛이 스며들어 지도 윤곽이 보였다. 지도상에서는 새끼손가락 한 마디면 그 사원에 갈 수 있었다. 이 정도면 해볼 만하지 않을까. 시간만 계속 흐르다가 결국 해가 지기 직전 숙소에서 나가기로 결심했다. 어제처럼 긴 잠을 다시 자고 싶었다.
  로비 유리문을 열어젖히자 뜨거운 공기가 밀려왔다. 온갖 이국적인 소리와 냄새, 색깔, 글자가 함께 쏟아졌다. 조금 걸으니 큰 길이 나왔다. 갑자기 다른 세계로 빨려든 것 같았다. 읽을 수 없는 간판들, 색이 화려한 차와 수십 대의 오토바이, 흰 셔츠에 검은 주름치마를 입고 무리 지어 가는 학생들, 낯선 가로수와 처음 보는 꽃, 벽을 타고 기어가는 작은 도마뱀들, 바닥이 울퉁불퉁한 인도에 파라솔을 펼친 노점, 뜨거운 국물의 향신료 냄새, 짙은 매연과 의미를 알 수 없는 대화들……
  나는 네 번 접어 주머니에 넣어놨던 지도를 다시 펼쳐 사원 방향으로 걸었다. 중간에 공사하는 곳을 빙 둘러 가느라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다.

가게들이 촘촘히 붙어 있는 시장 골목을 지나, 공원만 가로지르면 목적지였다. 공원에는 나시와 짧은 반바지를 입고 뛰는 사람들도 있었고 잔디에서 요가 수업을 듣거나, 운동기구들이 잡다하게 놓여 있는 노상 체육관에서 근력 운동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다들 비지땀을 흘리며 자신이 하는 일에 열중했다. 작은 호수 둘레에 거목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심겨 있었다. 야자수도 있고 꽃나무도 있었다. 부드러운 햇살이 등을 떠미는 것처럼 느껴졌다.
  공원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니 작은 공터가 나왔다. 그 중앙에 있는 오래된 나무에는 쇠 울타리가 쳐져 있었다. 그리고 누군가 나무 기둥에 태국 승려들이 입는 주황색 샤프란 천을 감아 놨다. 가까이 가서 안내판에 쓰인 영어 설명을 읽어보았다. 태국에는 수백 년 된 나무에 스님이 되는 의식인 수계를 하고 보호하는 전통이 있다고 했다.
  울타리 아래 쌀밥이 담긴 그릇과 향로, 새빨간 딸기맛 환타 몇 개가 놓여 있었다. 거대한 나무뿌리가 보도블록을 뚫고 울타리를 넘어 공터 사방으로 구불구불 뻗쳤다. 오랜 시간 침묵 속에서 생존한다는 건 어떤 걸까. 애쓰지 않고도 살아남는 것. 한곳에 뿌리내린 채 어디로도 도망치지 않는 것. 이 나무 스님은 모든 번뇌를 뿌리째 뽑고 아라한이 되어 윤회에서 벗어났을까?
  서쪽으로 지는 햇살이 모든 것을 명료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나무 스님의 한쪽 면이 밝게 빛났다. 샤프란 천이 살짝 바람에 흔들렸다. 광합성만으로 이렇게 큰 몸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게, 아무것도 씹어 삼키지 않고 몇백 년을 살 수 있다는 게 부러웠다.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고, 기대를 받지도 않고, 세상에 빚진 것도 갚을 것도 없이 그저 빛을 받는 것만으로 몇백 년을 살아왔다니. 나는 제각각의 모습으로 곳곳에 살아 있는 오래된 나무들을 둘러보았다. 나무들이 내뿜는 기운을 들이마셔보았다.

부드러운 햇살이 등을 떠미는 것처럼 느껴졌다. 사원은 화려하진 않지만 단정한 공간이었다. 나는 본당처럼 보이는 건물로 가 신발을 벗고 대리석 계단을 올랐다. 내부는 예상보다 훨씬 넓었다. 금빛 불상이 입구 바로 맞은편에 보였다. 사원 한편에 놓인 사기그릇 안에서 향불이 희미하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태국에 막 도착했을 때 났던 것과 비슷한 향냄새가 진동했다. 천장이 높고 나무 바닥이 맨질맨질했다. 낡은 선풍기 두 대가 양옆 벽에 붙어 느리게 고개를 젓고 있었다.
  구석에서 한 할머니가 바구니에 손바닥만 한 상자들을 정리 중이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녀가 미소 지으며 ‘컴, 컴’ 하고 손짓했다. 다가가니 박스 하나를 주었다. 박스 안에는 보라색 향 조금과 노란 국화 세 송이가 들어 있었다. 향 하나가 조금 부러져 있어 나는 그것을 아래로 감췄다. 할머니는 내게 불상 앞으로 가라고 손짓한 뒤 자리를 피해주었다.
  집에 있는 외할머니가 떠올랐다. 저 할머니보다 어리고, 마르고, 머리는 하얗고, 언제나 눈썹에 힘을 주고 있는. 지금쯤 저녁을 먹고 거실에서 티브이를 보고 있을 것이었다. 졸기도 하고 웃기도 하면서. 외할머니는 세상 대부분 일들에는 ‘당연히, 으레’ 그렇게 되어야만 하는 방향이 있다고 생각했다. 나도 할머니 말마따나, 세상에는 그런 것―당연한 방향이 있는 줄 알았다. 그녀의 당연한 바람대로 막냇동생까지 무사히 고등학교 졸업을 목전에 두자, 나는 그제야 무언가 형용할 수 없는 느낌, 경사로에서 굴러떨어지듯 내장이 붕 뜬 듯한 느낌을 받았다.
  불상 앞에 천천히 무릎을 꿇고 앉았다. 평온한 표정의 불상을 보자 무엇이든 이해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불을 붙여 향 하나를 꽂았다. 연기가 휘청이다 금세 흩어졌다. 손을 모아 절했다. 완벽한 침묵. 이곳에선 누가 사라져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것 같았다. 사원 한쪽 모퉁이에서, 아무도 보지 못하는 사이에, 향불 꺼지듯 마음이 꺼져버리는 상상을 했다. 조용하고 슬프지 않은 죽음을.


오늘은 사장 옆에 다른 직원이 서 있었다. 나는 꾸벅 인사하고 지나가려다 되돌아왔다. 사장에게 근처 맛집 중 어디가 제일 비싸고 맛있느냐고 물었다. 사장은 곰곰 생각하다가, 휴대폰으로 뭔가 진지하게 검색하다가, 길이 좀 어려워서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나는 괜찮다고 스스로 찾아보겠다고 했는데, 그가 여긴 꼭 가봐야 된다며 데려다주겠다고 우겼다. 계속 거절하기도 뭣해서 알겠다고 했다.
  나는 건물 밖에 서 있다가, 지는 해가 너무 뜨거워서 다시 건물 안으로 들어왔다. 아침에는 비가 퍼붓더니 언제 비가 왔었냐는 듯 하늘이 맑게 개어 있었다. 하늘에서 노랑, 보라, 주황색 구름이 조화롭게 섞였다. 나는 하늘빛이 시시각각 변하는 것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회색 SUV가 건물 앞에 섰다. 나는 운전석에 사장이 앉아 있는 걸 확인하고 뒷좌석 문을 열었다. 둘밖에 없는데 옆에 탔어야 하나? 생각했지만 이미 뒷좌석에 앉아버렸다.

십 분 정도 지났을까, 그가 도착했다고 말했다. 나는 그새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태국에서는 아무 때나 졸고 아무렇게나 잤다. 날이 뜨거워서 그런지 좀만 움직여도 금세 피곤해졌다. 첫날처럼 매일 통잠을 잔 건 아니지만, 한국에서보단 확실히 더 많이 잤다. 메신저와 캘린더 앱을 지운 게 처음엔 불안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아무 일도 생기지 않는다는 걸 체감하면서 마음이 편해졌다.
  눈을 뜨니 큰 창이 여러 개 달린 새하얀 단층 건물이 보였다. 건물 앞에는 작은 분수가 있는 근사한 정원도 있었다. 나는 고맙다고 말하고 차에서 내렸다. 더운 공기를 타고 튀김 냄새 같은 게 흘러왔다. 바로 식당으로 향하려다 문득 돌아보았다. 그는 벌써 차를 돌리고 있었다. 나는 그쪽으로 뛰어가 운전석 창문을 두드렸다. 그가 의아한 표정으로 창문을 내렸다.
  사장님, 식사하셨어요?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안 먹었다고 답했다.
  그럼 같이 먹어요. 제가 살게요. 데려다주셨으니까……
  여태까지는 조식 한 끼로 대충 식사를 때우고 저녁때 혹시 배가 고프면 편의점에서 뭘 사먹고 끝냈는데, 오늘은 자느라 조식을 못 먹었다. 그리고 생각보다 내가 돈을 더 안 써서 돈이 많이 남았다. 음식이 먹고 싶진 않은데 돈은 좀 써보고 싶었다.
  내가 창가 자리를 잡는 동안 그는 주차를 마치고 들어왔다. 나는 메뉴판을 대충 넘겨보다가 덮었다.
  사장님이 좋아하시는 걸로 먹어요. 전 정말 다 좋아요. 마음껏 시키세요.
  무슨 요리가 있는지 잘 모르기도 했지만, 어떤 음식이 나와도 많이 먹진 못할 거라 뭘 먹든 그다지 상관없었다. 단순히 기왕 돈 쓰는 거 한 명보단 두 명이 더 많이 쓰겠지, 싶은 생각이었다. 사장은 한참 고심해서 메뉴를 고르더니 종업원을 불렀다. 태국어로 말할 줄 알았는데 그는 짧은 영어와 손짓으로 주문을 했다.
  음료는요?
  내가 물었다. 그가 고개를 저었다. 나는 제로콜라 하나를 추가로 시켰다.
  음식이 나오길 기다리면서 정원에 앉았다 날아가는 작은 새를 보다가 문득 궁금해져서 물었다.
  근데 사장님은 왜 태국어 안 쓰세요?
  그는 태국어를 할 줄 모른다고 했다.
  하나도요? 내가 놀라 물었다.
  싸와디캅, 코쿤캅 정도는 알아요.
  그건 저도 알아요.
  그가 민망하게 웃었다. 웃는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았다. 살짝 처져 있던 눈꼬리가 더 아래로 내려갔다. 사람이 순해 보였다. 웃기는 사람이네.
  여태 여기서 어떻게 살아남은 거예요?
  태국어는 일부러 안 배웠어요. 그래서 아직 여기서 살 수 있는 것 같아요.
  그가 말을 마치자마자 모닝글로리 볶음과 태국식 닭구이, 소고기 쌀국수와 팟타이가 나왔다. 사 인분은 돼 보이는데 다 먹을 수 있나?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는 내 앞접시에 나물처럼 생긴 모닝글로리 볶음을 먼저 덜어주었다. 공기밥과 제로콜라가 연달아 나왔다.
  밥이랑 같이 드셔보세요.
  나는 그가 얘기한 대로 밥 한 스푼에 모닝글로리 한 줄기를 올려 먹었다.
  예상외로 짭짤하게 간이 밴 모닝글로리가 밥과 잘 어울렸다.
  맛있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내 반응을 보고 만족스러워하며 자신의 앞접시에도 음식을 덜었다. 숟가락에 밥과 모닝글로리를 올려 한입 가득 먹었다. 그러더니 여기는 올 때마다 진짜 맛있다며 좋아했다. 먹는 게 저렇게까지 좋을 일인가. 나는 그가 행복한 표정으로 음식 먹는 걸 보며 팟타이를 조금 덜었다.
  팟타이에 든 새우도 꼭 드셔보세요. 진짜 맛있어요.
  그의 말을 듣고 새우도 덜어 같이 먹었다. 새우 살이 탱글탱글했다.
  맛있죠?
  그가 또 물어서 이번에는 네, 진짜 맛있어요, 하고 답했다. 그는 만족스럽게 다시 식사를 이어갔다.
  사장님은 태국에 언제 오셨어요?
  내가 수저를 내려놓고 물었다. 그는 칠 년쯤 전에 본격적으로 살기 시작했고 그전까지는 거의 매년 태국 여행을 왔다고 했다. 한국에는 다시 안 가냐고 묻자 아마 평생 안 갈 것 같다고 답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눈 오는 게 가끔 그립기도 해요.
  그 말을 듣자 눈사태가 쏟아져 나를 덮쳐버리는 모습이 상상됐다.
  전 추운 게 싫어요. 내가 답했다.
  올해 겨울은 너무 추웠다. 지하철을 타고 서울의 동서남북을 다 쏘다니며 과외 하던 날들이 생각이 났다. 카페에서 과외를 할 때면 항상 따뜻한 녹차를 시켰다. 달거나 텁텁하지 않아 말하는데 거슬리지 않고, 하루에 여러 잔도 먹을 수 있으니까. 처음엔 뜨거워서 컵을 만지기도 힘든데 과외를 하다보면 녹차가 차가워졌다. 그럼 수업이 끝날 때가 된 거다.
  사장은 자기도 추운 건 싫다고 했다. 그런데 어릴 때 강원도 산지에서 자라 폭설로 온 땅이 죽은 듯 하얗게 뒤덮인 풍경이, 지붕에 쌓인 눈을 하루 종일 치우던 게, 무릎까지 오는 눈밭에 발자국을 찍으며 놀았던 게 가끔 생각난다고 했다. 그 말을 하고 그는 흰쌀밥을 잔뜩 퍼서 입에 넣었다. 나는 제로콜라를 마시다가 모닝글로리를 다시 밥에 얹어 먹어보았다. 정말 맛있네. 그와 함께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새벽, 나무 스님을 다시 보러 왔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세상이 어둠 속에 숨죽이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새가 울고, 나뭇잎 틈새로 옅은 빛이 어른거리기 시작했다. 멀리서 차 달리는 소리, 사람 말소리가 조금조금 들려왔다. 금세 주변에 생명력이 돌았다. 나는 한곳에 뿌리내린 식물처럼 나무 수님을 마주보고 서서 조용히, 천천히 숨을 쉬어보았다. 햇빛이 나를 찾아올 때까지.
  식물도 살아남으려면 끝없이 광합성 연습을 해야 할까?
  나무 스님도 막 자라나는 나무였을 때, 광합성에 서툴러 죽을 뻔한 적이 있을까?
  숨 쉬는 데에만 집중하려 해도 계속 잡생각이 끼어들었다. 그래도 다시 숨으로, 피부로, 몸 내부로 감각을 집중했다. 따뜻한 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흉곽이 부풀었다 꺼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위장에서 무언가 소화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중간중간 넘버 파이브의 아파요? 하는 목소리, 몸이 수분을 꼭 짠 빨래처럼 힘없이 구겨진 채 널브러져 있던 감각, 흰쌀밥 냄새 같은 게 떠올랐다.
  그러는 동안 오전이 지나고 한낮이 되었다. 전신에 땀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나뭇잎 틈새로 점점이 떨어지던 빛이 팽장하다가 서서히 내 몸에 스며들었다. 그림자가 길어지고 있었다.

그때 종아리에 따뜻하고 말랑한 감촉이 느껴졌다. 나는 자다 깬 사람처럼 화들짝 놀랐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테리어류의 갈색 점박이 강아지가 꼬리를 신나게 흔들며 내 종아리를 핥고 있었다. 나는 강아지를 쓰다듬기 전에 주인을 올려다보았다. 그 강아지의 주인은 넘버 파이브였다. 사실 유니폼 입은 모습이 아니라서 바로 알아보진 못했고, 그녀가 나를 먼저 알아보고 인사했다. 오늘은 긴 생머리를 풀고 있었다. 검은 머리가 가슴께에서 흔들렸다. 그녀는 머리를 귀뒤로 쓸어넘겨 정돈했다.
  얼떨떨하기도 했지만, 여기서 아는 사람을 만나니 몹시 반가웠다. 그녀는 자신의 오른쪽 어깨를 툭툭 쳤다. 어깨 괜찮냐고 묻는 것 같았다. 나는 잘 모르겠지만 나아진 것 같다고 답했다. 그러자 그녀가 한 단어 한 단어 끊어서 천천히 말했다.
  슬픔은 몸에 남아요. 마음에 남는 것보다 훨씬 오래.
  나는 그녀가 영어로 한 말을 한국어로 번역해 곱씹었다.
  강아지가 천방지축 돌아다니다가 이번에는 그녀에게 매달렸다. 그녀는 리드줄을 당겼다. 쪼그려 앉아 강아지를 쓰다듬었다. 강아지는 눈을 감고 손길에 따라 머리를 더 들이밀다가 아예 바닥에 누워버렸다. 넘버 파이브가 아무리 등을 밀어도 요지부동이었다. 그 모습을 보다가 나도 쓰다듬어도 되냐고 손짓으로 물어봤다. 그녀가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얘는 이름이 ‘플라이’예요.
  플라이의 보슬보슬한 털이 햇빛을 받아 따끈했다. 이마를 긁어주니 내 무릎에 매달렸다. 바지에 시커먼 흙먼지가 묻었다. 나는 두 손으로 플라이의 얼굴을 쓸어주었다. 넘버 파이브가 내 옷에 얼룩이 생긴 걸 보고 리드줄을 끌어 플라이를 안았다. 플라이가 고개를 내 쪽으로 최대한 뺀 채 두툼한 꼬리를 열심히 흔들었다. 갈색 코로 냄새도 맡았다. 그녀는 꼬리를 피해 고개를 뒤로 빼면서 웃었다. 그리고 나에게 어딜 가는 길이었냐고 물었다. 나는 당황해 저스트…… 저스트……거리다가 어깨를 으쓱해 모르겠다고 했다.
  그럼 여기서 뭐하고 있었냐고 묻길래 나무 스님을 가리켰다. 이상하게 보일 것 같았는데 그녀는 그냥 나무 스님을 올려다보았다. 왠지 그녀의 눈동자에 그리움 같은 게 살짝 비친 것 같았다.
  나는 그녀가 떠나기 전에 감사 인사를 하고 싶었다. 그런데 영어 단어가 도무지 떠오르지 않아 손으로 향 피우는 시늉을 한 뒤 엄지를 들어 보였다. 그녀도 고개를 끄덕이며 마주 엄지를 들었다. 나는 땡큐, 라고 여러 번 말했다.
  그녀가 내 이마를 가리키며 땀이 많이 났다고 말했다. 나는 괜찮다고 했다. 그러자 그녀가 음료 마시는 시늉을 하며 어딘가를 가리켰다. 플라이를 땅에 내려놓더니 내 팔을 잡아끌었다. 나는 어차피 할 일이 없었으므로 그녀를 따라갔다. 그녀는 공터를 떠나기 전 양손을 모으고 나무 스님에게 반절했다. 나도 나무 스님을 몇 번 돌아보며 마음속으로 인사했다. 또 오겠다고.
  중천을 지나 서쪽으로 살짝 기울어진 햇빛이 머리와 어깨를 감쌌다. 우리는 해가 가리키고 있는 방향으로 걸었다.

그녀가 데려간 곳은 근처에 있는 한 카페였다. 인테리어가 깔끔하게 잘 꾸며져 있어 사람이 북적였다. 이렇게 많은 사람 속에 있는 건 오랜만이었다. 그래도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으니 위협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카페 내부에는 에어컨이 추울 정도로 강하게 틀어져 있었다. 우리는 음료를 주문하고 테라스 자리에 앉았다. 플라이는 넘버 파이브가 앉은 의자 밑에 몸을 말고 누웠다. 눈은 감았지만 귀가 쫑긋거렸다.
  정말 오랜만에 따뜻한 녹차 대신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마셨다. 머리가 띵할 정도로 차가웠다.
  넘버 파이브는 음료수를 천천히 마시며 방콕에 있는 게 좋냐고 물었다.
  나는 아직 확신할 수 없지만 대체로 그런 편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했다.
  그녀는 그럼 한국은 어떠냐고 물었다.
  나는 한국은 지금 한파라 춥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한파가 영어로 뭔지 몰라서 그냥 나쁘지 않다고 답했다. 커피가 금세 바닥을 보였다. 아직 갈증이 남아 있어 물 한 병을 더 샀다.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남은 얼음에 물을 부었다. 그것도 단숨에 마셨다. 벌겋게 익었던 몸이 점점 식어갔다.
  정적 속에서 할말을 찾다가 마사지는 무슨 요일에 하냐고 물었다. 그녀는 화요일 목요일에만 하는데 최근에는 공부하느라 거의 일을 못했다고 했다. 하고 싶은 공부가 있어서 뒤늦게 대학에 다닌다고. 좋은 기술이 있으면서 하고 싶은 공부까지 한다는 게 멋져 보였다. 나와 그녀의 나이 차이를 대략 짐작하고 앞으로 살아갈 까마득한 그 시간을 상상해보았다. 플라이는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작고 볼록한 배가 오르락내리락했다. 나는 플라이를 바라보고 있는 넘버 파이브에게 대뜸 물었다.
  멈추는 방법을 알고 싶어요.
  그녀는 잘 못 알아들어서 내가 한 말을 몇 번 되물었다. 그리고 말했다.
  살아 있는 건 멈출 수 없다, 라고.
  나는 내가 해석한 게 맞나 의심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바람에 따라 잎을 흔드는 나무 스님을 떠올렸다. 그새 플라이가 일어나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그녀는 플라이를 가리키며 이제 가봐야겠다고 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멀어지는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녀는 그때 내 몸에서 어떤 모양의 슬픔을 봤을까 궁금해졌다.

숙소 건물에 도착했지만 왠지 방에는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나는 옥상 수영장을 한번 가보기로 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옥상에 내렸다. 작고 네모난 풀이 하나 있고 난간 대신 유리 벽이 있어 바깥이 보이는 구조였다. 썬베드도 몇 개 놓여 있었다.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수영장 물이 배수구에 빨려들어가는 소리가 났다. 나는 제일 왼쪽에 있는 썬베드에 누웠다. 눈을 뜰 수 없을 만큼 강한 직사광선이 내리쬈다. 땀이 나기 시작했다. 조금 어지러웠다. 그래도 그냥 눈을 감고 누워 있었다. 문득 갈증이 났다.
  눈앞에 수영장 물이 찰랑이고 있었다. 크기는 작았지만 꽤 깊어 보였다. 나는 수영을 할 줄 몰랐다. 수영복도 없고…… 아쉬운 대로 수영장 물에 발을 담갔다. 물이 너무 차가워서 놀랐다. 그래도 종아리까지 물속으로 밀어넣었다. 전신에 닭살이 돋았다. 햇빛이 나를 감싸안았다. 나는 그저 햇빛을 받으며 그렇게 앉아 있었다. 느리게 퍼지는 물결을 느끼며. 언젠가는 분명 오늘이 에너지로 바뀔 것이라 믿으며.

이주현

2020년 웹진 《비유》에 단편소설 「코사멧에서」를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하였다.

정지하지 않고, 느리게 진동하는 법을 배우고 싶다.

2025/11/05
7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