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는 말하고 싶지 않은 여자들이 있다. 말함으로써 멀어지고 싶지 않은 여자들, 사물을 비껴나가는 말로 말하고 싶지 않은 여자들이 있다. 말의 발걸음이 내는 소음은 사물들의 맥박을 뒤덮어 가려버리기에, 나는 사물 위로 떨어져내려 그 미세한 떨림을 얼어붙게 하는, 음조를 어긋나게 하는, 먹먹하게 하는 말로 그 여자들에 대해 말하고 싶지 않다. 나는 말이 그녀들의 목소리 위로 떨어져내리는 것이 두렵다.1)


1981년 여름, 김혜순이 발표한 첫 시집의 뒤표지에는 도망가고, 굴복하고, 손가락질을 당했으므로 “눈물나게 억울한 생각뿐”이라는 고백이 적혀 있다. 그해 대한민국 12대 대통령으로 전두환이 연임을 했고, 텔레비전에서는 본격적으로 컬러 방송이 송출되기 시작했으며, 시집의 가격은 3천원이었다. 그녀는 1981년 5월 이전에 쓴 시부터 역연대순으로 묶어낸 그 시집을 내팽개치고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맹렬하게 도망치고 싶다고 쓴다.

이렇게 時는 굴복의 소산이다. 역시 그들의 것인 말과 이미지를 빌어서 잠시 고통스러워하거나, 황홀해하거나, 과연 모든 것이 그들 소유로구나 하는 사실을 재확인하거나 하는 것뿐이다. 그 다음 詩人에게 거지같은 관념과 진실 곁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확실한 확신이 남는다면 다행이겠지만, 나에게 남는 것은 오직 눈물나게 억울한 생각뿐이다.

그녀의 고백은 첫 시집을 낸 직후 느낄 법한 불안함이나 부끄러움, 혹은 ‘말할 수 없음’ 같은─때로는 지나치게 고상하고 선택적인 침묵으로 느껴지곤 하는─불가능성보다는 원초적인 절규에 가깝게 읽힌다. 사실은 아주 오래전부터 느끼고 있던 기원적인 불만족감을 제대로 마주한 자가 지르는 긴 비명처럼. 굶주린 여자로부터 흘러야 할 것들의 구멍은 꽉 막혀 있어 터져나올 도리가 없었다. 그녀에게서 흘러야 하는 것은 당시 ‘여류시’에 요청되곤 했던 고백이 아닌 리듬이었다. ‘그들’의 소유인 말과 이미지를 가지고는 몸 밖으로 꺼낼 수 없는 그녀만의 리듬.

  공터에 모여 선 우리들은
  가슴을 치지 않았다.
  주먹이 빠지지 않는걸, 가슴에 박혔어.
  누군가 말했다.
  바람이 빠지지 않아.
  가슴 속 햇살이, 무럭무럭 자람이,
  주먹이 빠지지 않아.
  울음 울음이 왜 빠지지 않아?
  공터엔 돌무더기만 쌓여 있었다.

─「돌」, 『또 다른 별에서』 부분
훗날 그녀가 여성의 시를 이야기하며 자주 인용하게 되는 바리데기─딸이라서 버려진 여자─의 탄생과 『또 다른 별에서』(문학과지성사, 1981)가 고백하는 완전하고 절대적인 피동 사이의 유사성은 눈물나게 억울하다는 점이다. 미칠 수 있으나 완전히 미치지 못한 여자가 되는 까닭은 이미 체제 밖에 버려진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늘 체제에 묶여 있는 언어 때문이다.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는 현실이었으나 그녀는 훗날 “비명밖에 지르지 못하는 시인들 또한 믿지 않는다”2)고 말하게 된다.

*

사 년 뒤 여름, 『아버지가 세운 허수아비』(문학과지성사, 1985)에서 언어에 대한 김혜순의 불만족감은 여전히 두드러진다. 의식 속에서는 ‘영혼을 아무데나 흘리고 다니지 말라’는 식의 금지가 효력을 발휘하는 한편, 모든 금지의 원천인 ‘아버지가 세운 허수아비’는 입을 찢고 튀어나간 말들을 쫓아버리고 있었다. 꺼내놓은 말들은 뺨을 맞고 돌아오고, 꺼내지 못한 말들이 몸 안에서 끓는 동안 그녀는 병을 앓듯이 아주 오래도록 말을 앓는다.

  숨죽여 덩덩 울리는 땅덩어리
  마치 큰북 위에 몰려 서 있는 듯.
  저절로 두 발이 들려지고
  두 팔이 펼쳐지게 하는
  은밀한 피부 진동.
  소리쳐 불러볼 입술도 없건만
  큰 소리 들어줄 귀마저 닫혀 있건만
  온몸을 밀고 올라와 온몸을 흔드는
  울리는 간절한 리듬, 황홀한 반주.

  온몸에 음악을 품고
  우우, 그 가락을 감추지 못해.
  코를 찡긋거리며,
  열 손가락을 펼치고 오므리고
  간혹 곤두박질치는 구멍 뚫린 우리의 합창.

  해지는 어스름마다 서녘에 몰려서서
  불러도 들리지 않는 캄캄한 노래
  우리는 부르지
  검푸른 구름이 올올이 풀어져
  우리의 몸짓 노래를 삼켜버릴 때까지
  우리는 노래를 참지 못해
  온몸에 살을 털어내며, 무서워 벌벌
  떨며, 가슴을 꽝꽝 치며, 소리지르지.
  지르지. 삼키지. 부르지. 먹지.
  숨죽여 덩덩덩 솟아오르는 땅덩어리
  뒤돌아서서 달아나도 다시 솟아오르는
  안으로만 소리쳐 불러넣는 우리의
  몸짓 노래. 가슴이 꽝꽝 터지도록
  안으로만, 안으로만 쑤셔넣는 벙어리 합창.

─「手話合唱」, 『아버지가 세운 허수아비』 전문
당시 이 시집에 수록된 해설은 아이러니하게도 ‘아버지가 세운 허수아비’라는 제목에 걸맞게 그녀의 언어에 금을 긋고 재단하던 당시의 상황을 잘 보여준다.3) 해설자의 눈에 김혜순의 언어는 깊음(수직성)과 넓음(수평성)으로 이루어진 자기 초월 의지가 결여된 것이었으며, 잠이나 꿈 같은 혼몽한 상태에서나 조화를 이룰 뿐 ‘현실’ 차원에서는 선민의식과 유아독존적 의식으로 똘똘 뭉친 공격성을 표출할 뿐이었다. 자아와 세계의 결합은 마땅히 이루어져야 한다는 전제로 전개되는 평에서 그녀의 언어는 전달을 포기한 채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나 가학적 행위를 거듭하는 것으로 비춰진다.
  김혜순 역시 독재 정권 시절에 쓰기 시작한 당시의 자기 시가 “견딜 수 없는 이미지들과 발설할 수 없는 이미지들, 그러나 끝끝내 말할 수 없는 것이 늘 남는 이미지들. 물속에서 갑자기 떠오르는 억울한 시체 같은 이미지들이었고, 모스부호 같은 시들이었”4)다고 회고한다. 소통이나 의미의 전달은 그녀의 관심사가 아니었지만, 이는 스스로가 선택한 저항의 방식이 아니라 그 시대를 살던 시인이 앓을 수밖에 없던 증상이었다. 그녀의 증상은 언어보다 감각에 전적으로 의지하므로, ‘넓고 웅대한’ 언어의 세계에 비하면 ‘지극히 협소한’ 감각의 세계만을 앎의 수단으로 삼는다는 비판을 직면한다.
  하지만 사십 년 정도의 세월이 지난 자리에서 다시 읽는 『아버지가 세운 허수아비』와 수록된 해설은 서로를 마주 보며 그녀의 시가 출발한 시대적 현실을 거울처럼 비춘다. 『아버지가 세운 허수아비』의 해설을 읽다보면 작품에 대한 어느 정도 ‘부당한’ 평가를 발견하게 되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보다 “언어란 반드시 경험적으로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선험적으로 주어지기도 하는 현실”이라는 1980년대의 모순된 전제를 주로 발견하게 된다. 그녀가 언어를 앓았던 이유는 무엇이었단 말인가? 한편 “언어를 부정하면서도 그것을 포기할 수는 없다는 모순”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김혜순의 시는 평론가들로부터 당대 ‘여류시’와 구분되는 상찬을 받기에 충분했다. ‘그들’에게 시의 미덕이란 합일, 초월, 의지 따위의 단어로 설명되는 일이자, 그녀의 ‘개인적’ 언어가 “보다 공적인 차원으로 확대”되는 일이기도 했다.

*

그로테스크, 자기 파괴, 공격성, 살벌함, 가학성─때로는 ‘앙칼진 성격’이나 ‘비아냥거림’이라는 표현까지도 포함하여─은 당시의 시대적 감각으로 보기에 다분히 병적인 것이었으며, 마땅히 추구해야 하는 합일과 초월로부터 동떨어진 것이었다. 당시 평자들이 알지 못했고, 어쩌면 그녀 스스로도 그때까지 깨닫지 못했던 사실은 그녀의 시에서 난무하는 ‘감각’ 이면에 있는 ‘몸’의 존재였다. 감각을 통해 고통을 느낀다는 것은 몸이 있다는 증거이며, 인식을 선행하는 몸은 이후 그녀의 시를 전개하는 과정 자체가 된다. 감각으로 점철된 초기 시에서 태동하던 몸의 존재가 점차 김혜순의 언어를 재단하던 수직, 수평, 합일, 초월 등의 잣대를 초과하여, 온갖 죽음과 타자로 ‘시하며’ 가늠할 수 없는 방향과 부피로 확장되리라는 것을 미처 몰랐을 것이다.
  문득 김혜순의 시를 ‘몸의 시학’으로 명명하며 그것이 발전해 온 연대기적 서사를 가늠해보고 싶은 욕망의 충동을 느낀다. 그러나 선형적인 종류의 서사와 설명은 평생토록 그녀가 내쫓고자 했던 것으로, 이미 그녀의 시에 없는 서사를 불러들일 수는 없는 법이다. 다만 그녀가 몸의 존재와 감각을 전방위적으로 인식하게 되었을 계기 중 하나를 꼽아볼 수는 있다. 어림짐작해볼 수 있는 것은 『어느 별의 지옥』(청하, 1988)이 쓰이던 시기에 그녀가 경험했던 개인적이면서 시대적인 폭력의 체험이다. 당시 출판사를 다니던 그녀는 노동운동을 시작했던 여성의 연대기를 다룬 번역서의 출간과 연루되어 경찰서에 끌려가 뺨을 일곱 대 맞는다.

맞으면서 숫자를 세었다. 하숙집에 엎드려 뺨 한 대에 시 한 편씩 출판사를 결근하고 썼다. 그 시들을 몇 년 묵혔다가 이 시집에 실었다. 마지막으로 쓴 일곱 번째 시는 걸릴 것 같아 애당초 넣지 않았는데 지금은 찾을 수 없다. 그래서 이 시집엔 여섯 편만 들어 있다. 점점 현실을 구체적이고, 실재적으로 묘사하지 않게 되었다. 그때 내가 왜 그렇게 실재 묘사를 두려워했는지는 나중에 여성적 글쓰기나 여성시의 화자에 대해 생각하면서 미루어 분석하게 되었지만, 작고, 재갈 물려, 웅크린 강아지 같은 목소리만 내었다. 어느 곳이든 내 영토나 내 영역이 아니었다.5)

『어느 별의 지옥』에 실린 시는 1970년대 말에 쓰인 시로 1980년대에 발표된 것이다. 김혜순은 “그 사건들 전후로 제 시가 점점 짧아지고 말도 없어지고, 위악적이고 관념적으로 변해간 기간이 있었”6)다고 회고한다. 위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그곳」 연작시 여섯 편은 짧은 길이로 분절된 채 유추할 수 없는 상태와 감각에 대한 묘사가 ‘~한다’라는 현재형의 어미로 장식되고 있다. 펄떡거리고, 발가벗겨지고, 차오르고, 갇히고, 소용돌이친다. 현실을 구체적이고 실재적으로 묘사할 수 없었다는 설명은 도리어 당시의 현실을 가장 적절하게 묘사하는 설명이다. ‘어느 별의 지옥’이라고 부를 만한 현실을 살며 그것을 묘사하지 않게 되었다는 말은 그것을 무엇보다 묘사하고 싶었다는 욕망의 반증인 것이다. 여성의 말하기가 종종 침묵이라는 형식을 경유한다고 해서, 정말 그녀들이 말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묘사도, 재현도, 서술도 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남는 것은 관념과 위악으로 점철된 찌꺼기뿐이다. 그 자체로는 의미를 부여할 수 없는 것들. 혹여 찌꺼기 같은 말의 의미가 찌꺼기를 생산한 잔혹한 구조의 폭로라고 의미 부여할지라도, 충족될 수 없는 영원한 미진함이 남는다. 외부를 더럽히기를 선택하는 순간에조차 외부의, 외부의, 외부에 존재하는 자기를 확인하게 되는 순간이야말로 평생토록 그녀를 위악과 관념에 가둘 수도 있는 무시무시한 마주침이었다.

  침을 퉤퉤 뱉아
  만들었다는 묵
  칼로리도 없고 맛도 없어 양념 덕에 먹는다는 묵
  우뭇가사리처럼 말갛게 굳은 것
  그것을 길에 냅다 쏟아부으면
  민방위날 서울 한복판처럼
  자동차들이 몽땅 멈추고
  새는 물론
  새를 따라가던 총알이 공중에
  그대로 멎는다 한다
  말 또한 뱉아지는 대신 삼켜진다고 한다

  그대 검은 장갑 낀 손에
  들려진 침묵 한 사발
  오늘 아침 얻어먹으니
  느. 닷. 없. 이
  ㄴㅐㄱㅏㅅㅡㅁㅅㅗㄱㅇㅡㄹㅗ
  ㅍㅕㄹㅊㅕㅈ‘ㅣ’ㄴㅡㄴㅇㅗ ㅅ‘ㅣ’ㅂㅁㅏㄴㅍㅕㅇㅇㅢㅊ‘ㅣ’ㅁㅁㅜㄱㅅㅏㅁㅏ
  ……ㄱ
  나는 사막에다 말을 걸고 싶은 타조처럼
  동굴 벽에다 그림을 새기고 싶은 크로마뇽인처럼
  자동차사막 바퀴사막을 달려간다
  끈적끈적한 침으로 빚은
  묵에다 시를 새기고 싶어
  어둔 밤 사막을 휘휘 저어 달려간다
  말은 안 하고
  침을 게워
  묵을 만드는 사람들 사이로
  그 묵에 갇혀 급기야 콘크리트 되는
  사람들 사이로

─「침묵」, 『우리들의 陰畫』7) 전문
현실의 경험에서 탄생하였으나 조금도 ‘현실적’이지 않은 묘사는 김혜순의 표현처럼 “작고, 재갈 물려, 웅크린 강아지 같은 목소리”에 가깝다. 그러나 그녀의 시를 가득 채운 도저한 비관성은 안으로든 밖으로든 터지고 뛰쳐나와 그녀를, 또는 거리(외부)를 더럽히는 것으로 묘사되곤 한다. 몸속에 쌓인 말은 밖으로 뛰쳐나오든 안에 묶여 있든 썩어가기는 매한가지지만, 썩는다는 것은 살아 있음의 다른 상태이기도 하다. 틔워내는 삶으로서의 생명력이 아니라 극도의 죽음 상태가 발현하는 생기로서의 썩음. 그녀가 경험하는 현실이 시로 뛰쳐나올 때 그것은 대개 현실이 아닌 것으로 받아들여지곤 했다. 여성의 몸안에 도사린 침묵을 길거리에 쏟아부을 때 거리가 삽시간에 멈추고, 다시 끈적끈적한 침묵을 삼키는 순간 분절되는 언어의 형식으로 표출되는 언어는 그녀가 경험하는 현실을 담아낸 것이었으나, 그녀의 언어는 우화적, 연극적이라고 규정되거나 현실을 중단하고 ‘환상적’ 세계에 진입한 결과로 여겨졌다. 그녀의 현실이 비현실─혹은 초현실─로 읽힌 이유는 당시로써는 그것을 해석해낼 언어가 없었기 때문이다. 여성시의 현실을 해석할 형식적 지표가 없어서 거듭되는 오독은 김혜순이 여성시의 ‘리얼리즘’을 재구성하는 작업으로 이어진다.
  그녀가 선택한 것은 ‘비명’을 대신할 ‘언술’의 발명이었다. 비명을 중단하는 것이 아니라 언술로써 비명을 지르는 것이었다. 침묵이 모든 것을 일시적으로 중단시킨다면, 언술은 내부와 외부에 구멍을 내어 안과 밖을 드나들게 한다. 이제 그녀는 병든 신체와 광증 그 자체를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불타오르고 깨어진다는 단말마를 덧붙이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둘러싼 외부의 모든 것을 어루만지고 그것들의 문을 열고 닫는다. 외부와 겹쳐지는 그녀의 신체는 직유나 은유의 질서로 몸과 외부를 줄 세우지 않고, 인접성을 공유하며 순서 없이 전환되고 연쇄한다.

유리문을 밀고 들어가면 또 유리문이 나온다. 유리문 안쪽엔 출구라고 씌어 있고, 바깥쪽엔 입구라고 씌어 있지만 그러나 나가든 들어가든 언제나 너는 어떤 몸의 내부에 속해 있다. 마치, 난자를 만난 정자가 그녀의 집에 영원히 체포되듯 너는 거기에 속해 있다. 내부의 사람이면 누구나 유리문을 밀고 나가 또 하나의 유리문을 향해 걸어가야 하며, 그곳을 나와서도 또 하나의 유리문을 향해 걸어가야 하며, 그곳을 나와서도 또 하나의 유리문을 열어야 한다. 밤이 오면 어떤 유리문들은 네온사인을 달고 여기가 정말 출구예요 말하는 듯하지만 그러나 어디에도 출구는 없다. 어떤 유리문을 열면 거기 매맞은 얼굴들이 한 방 가득 들어 있고, 어떤 유리문을 열면 죽은 네 어머니가 웬일이냐 돌아앉으신다. 어떤 유리문을 열면 길 잃은 파리가 윙윙거리는 방안에 허벅지를 드러낸 여자들이 뒤엉켜 누워 있고, 어떤 방문을 열면 네 시신 위로 구더기들이 한없이 쏟아져나온다. 어떤 유리문은 빗속을 맹렬히 달려 너는 젖은 머리칼을 흔들며 죽어라 그 문을 향해 뛰기도 해야 하고, 어떤 유리문은 지하 깊숙이 미로를 개설하기도 한다. (중략) 너는 늘 떠나지만 멀리 가지 못하고 늘 제자리로 돌아온다. 새로운 길을 개척해보려 하지만, 늘 역시 그 자리로 돌아오고야 만다. 벙어리 네 그림자는 말하리라. 땅바닥에 누워 네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져서 말하리라. 이 길로 가서는 안 돼요. 그림자 언제나 길은 틀렸어요 말한다. 날마다 복선이 증가한다. 유리벽에 뭘 새길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너는 유리벽에 매달려 뭔가 새기려 하고 있구나. 꿈속에 있으면서 꿈속에 전령을 보내려고, 헛되이 허공중에 고운 얼굴을 새기고 있구나. 미로는 날마다 골목 끝에 유리문을 세운다. 이 몸을 깨뜨리고 어떻게 밖으로 나가지? 내 몸 밖에서 누가 나를 아직도 부르고 있는데……

─「서울」,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 부분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문학과지성사, 1994)에서 서울이라는 공간은 몸의 형식과 겹쳐진다. 상하좌우의 위계질서 없이 나선형의 미로처럼 중첩된 길을 통해 언술의 내용을 표출하는 형식이 개진된다. 입체적인 도형들이 켜켜이 쌓인 듯한 구성을 따라서 왔던 길을 되돌아가거나,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터져나오는 시는 비명을 내보낼 형식을 갖춘다. 그간 그녀의 비명을 몸속에 가두는 동시에 터져나온 비명을 미해독 문자로 만들던 원인은 획일적인 언술 방식이었다. 이제 그녀는 자기 몸 내부와 외부를 가로막고 있던 획일적인 언술 방식에 ‘구멍’을 내기로 한다.
  공교롭게도 자기만의 언술 방식을 발명하기로 마음먹던 시기에 그녀의 시는 이미 당시의 ‘여류시’들과 비교되며 상찬을 받고 있었다. ‘감상적’이거나 ‘비성찰적’인 자세를 내려두고 세상과의 ‘불화 의지’로 세상을 초월한다는 이유로 당시 평론가들은 김혜순의 언어를 높이 샀다. 물론 그녀의 언어를 모두 이해하여 가치를 인정한 것은 아니었으나, 그들 눈에 보기에도 김혜순의 언어에는 부정할 수 없는 극강의 생기가 있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김혜순의 목적은 당시의 ‘여류시’를 뛰어넘는 것도, 남성 평론가들의 상찬을 받는 것도 아니었다. 보다 본질적인 차원에서 자기에게 쏟아지는 온갖 폄하와 상찬을 생산해내는 언어 체제 자체를 박살내는 것이었다. (그녀는 자기의 시가 해석되곤 하던 모티프들(구멍, 몸, 물 등)을 하나씩 모아 훗날 자기 시론집의 목차로 삼는다.) 그녀가 택한 파괴의 방식은 곧 언술 방식의 발명이었다. 가부장제의 해체를 우선 이루고 난 다음에 발명되는 언술이 아니라, 언술의 발명과 동시에 해체될 온갖 체제를 꿈꾼다.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 이후로 언술 방식을 향한 그녀의 욕망은 더욱 뚜렷해진다. 이제 그녀에게 시란 말하는 형식을 탐닉하는 장르이며, 때로는 발명한 형식을 부수는 형식적 긴장을 품고 있는 장르가 된다. “시는 말씀이 아니다. 말하는 형식이다./ 그러므로 장르는 운명이다./ 나는 시라는 장르적 특성 안에 편안히 안주한 시들은 싫다.”8)

나는 내가 모든 학생인 그런 학교를 세울 수 있지. 쉰 살의 나와 예순 살의 내가 고무줄 양끝을 잡고, 열 살의 내가 고무줄 뛰기 하는 그런 학교. 이를테면 말이야. 지금의 내가 기저귀 찬 나에게 엄마 엄마 이리와 요것 보세요 말을 가르칠 수도 있고, 여중생인 나에게 생리대를 바르게 착용하는 법도 가르칠 수 있을 거야. 어쩌면 열 살인 내가 예순 살인 나에게 인생이란 하고 근엄하게 가르칠 수 있을지도 몰라. 또, 이를테면 말이야. 나는 또 내가 모두 등장인물인 그런 소설도 지을 수 있지. 실연당하고 미친 듯이 농약을 구해온 열아홉 살 나와 네가 싫어 그랬다고 우리집 담은 도끼로 부수던 남자를 바라보는 스무 살의 내가 함께 나오는 그런 소설도 지을 수 있을 거야. 이런 소설은 어때? 열 살의 나와 예순 살의 나에게 겸상으로 우리 엄마가 밥상 차려주는 그런 소설. 결혼 전의 내가 공원에 앉은 지금 나의 뺨을 때리고, 일흔 살의 내가 뺨 맞은 나를 위로해주는 그런 소설 말이야.

─「내가 모든 등장인물인 그런 소설 1」, 『불쌍한 사랑기계』 부분
온갖 것에 구멍을 내는 그녀의 언술 방식은 정체성의 확립이라기보다 정체성으로부터의 벗어남을 겨냥한 것이었으므로, 분열된 자아를 가진 화자가 등장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병적인 의미에서의 분열이 아니라, 병을 탄생의 조건으로 삼는 여성이 앓을 수밖에 없는 현실로서의 분열. 열 살, 스무 살, 예순 살의 ‘나’는 한 몸 안에 거주하며 서로를 돌본다. 현재와 과거와 미래가 공존한다. 현실에서도 늘 그러하듯이. 해체되는 동일성은 그녀가 체제를 전복하기 위해 선택한 수단이 아니다. 상징질서 외부로 쫓겨난 존재들을 죄다 몸으로 끌어안은 결과이다.
  그렇게 유령 혹은 복수의 존재로 등장하게 된 화자들은 환상이나 신비주의의 결과물이 아니었으나, 환상이나 신비주의의 결과물로 보이기에 충분했다. 그리하여 그녀의 시가 처음부터 영원토록 직면하게 될 핵심적인 몰이해는 이런 것이었다. “한때 마녀를 자칭하기도 했던 김혜순의 이러한 변모는 자못 놀라운 것이기도 한데, 이 변모는 아마도 사회적, 실존적 의미망의 확충을 좀더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이를 사족으로 달아둔다.”9) 반면, 김혜순은 애초에 자기의 존재와 현실이 사회적 의미 외부에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다시 말해 무슨 말을 하든, 무슨 행동을 하든, 그 말과 행동이 생산되는 여성의 현실이 권력의 효과 아래 있다는 것이다. 도무지 현실이 아닐 수가 없다는 뜻이다.
  바리데기 공주는 딸이라는 이유로 공동체로부터 유기되었으며, 그것은 공주의 삶이 기원부터 공동체(사회)의 영향 아래 있었음을 보여준다. 아버지를 살릴 약수를 구하기 위해 저승으로 간 것도, 저승으로부터 뿜어져나오는 죽음의 이미지들도, 모두 태초의 기원적 권력으로부터 이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에게 지속적으로 가해지는 비판은 ‘사회의 바다’로 나오라는 것이었다. ‘여성성’을 품고 경험하는 사회는 그들이 말하는 ‘사회의 바다’와 다른 것이었으며, 당연히 그녀는 그런 ‘바다’로 나갈 수 없었다. 이미 그녀는 병이 현실이고 건강이 망상인 현실을 살고 있었으므로. 김혜순의 눈에 여성 시인들이 만들어내는 ‘환상적’ 공간은 비현실이나 초현실이 아니라 ‘또 하나의 현실’이었다. 대체 현실이 무엇이고, 나아가야 할 ‘리얼’은 무엇인가? 십수 년 뒤에 아시아 지역을 여행하던 김혜순은 ‘리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쓴다. “나의 시는 한사코 나이면서 나와 다른 것, 나 아닌 것, 낮은 것, 분열된 것, 작은 사람들을 향해 가는 하기의 작용이다. 만약 시인이 이 과정에 개입하지 않거나 이 과정을 멈춘 자리에 붙박여 있다면, 그가 설사 리얼리스트라 자부하더라도, 그는 리얼하지도, 시하지도 않은 것이리라.”10)
  병이라는 현실을 살며 자기 자신마저 타자화되는 순간은 타인의 고통을 감각하는 방법이 되었다. 빙의된 무당이 몸속에 다른 존재를 받아들여 그의 목소리를 내는 것처럼, 김혜순의 시 속 화자들은 대리하는 화자이다. 김혜순이 극단의 타자화를 설명하기 위해 선택한 것은 잉태와 출산의 비유였다. 초기 시부터 거듭 그려지고 있는 잉태와 출산의 이미지는 타자를 내 몸으로 품는 행위(잉태)이면서 타자를 꺼냄으로써 ‘나’의 소유를 부정하는 극단의 행위(출산)이다. 이러한 방식의 말하기는 시적 대상을 전유하는 ‘남성적 말하기’와는 정면으로 대치하는 ‘여성적 말하기’의 특징으로 연결된다.

  나는 늘 한 여자를 구해주는 상상을 한다
  그 여자의 손을 잡고
  그 여자를 품에 안는 상상을 한다
  나는 늙어도, 늙지도 않는 여자
  언제나 같은 여자
  꿈속으로 들어가면 늘 나를 기다리던 그 여자

  서치라이트처럼 쏟아지는 햇빛에 쫓겨다니다
  그 빛에 강간당해 날개가 다 타버린 여자
  나는 죽은 얼굴에 밤마다 미백 크림을 발라준다
  아기를 가졌다고 아버지에게 잡아 뜯겨
  한정 없이 입술이 풀어진 여자
  바위에 눌려 깊은 물속에 처박힌
  물새같이 가련한 여자
  나는 그녀의 끝없이 풀어지는 강물의 입술로 시를 쓴다
  급기야는 도망가다 감옥에 갇혀 알을 낳은 여자
  (아버지는 그녀의 아기를 돼지에게 주었다지만)
  나는 그녀가 낳은 알뿌리를 옮겨 심고
  거기에 꽃처럼 맺혀 서 있다

  나는 늘 한 여자를 구해주는 상상을 한다
  나는 그 여자의 손을 잡은 것처럼 내 손을 잡기도 하고
  나는 그 여자를 숨긴 것처럼 내 얼굴을 어루만지기도 한다
  언제나 같은 여자 늙지도 않는 여자
  아직도 내 몸 밖으로 한번도 나와보지 못한 그 여자
  나는 그 여자의 몸에 베이비 오일을 발라준다

  그녀의 내지르지 못한 비명이 엎어진 건가 붉은 하늘이 지자
  그녀의 손톱이 후벼 파놓은 상처인가
  한밤중 쓰라린 초승달이 뜬다
  나는 또 한 여자를 구해주는 상상을 한다

─「유화부인」, 『한 잔의 붉은 거울』11) 전문
그런데 김혜순이 여성적 말하기를 설명하기 위해 잉태와 출산의 비유를 끌어들였다는 사실을 선뜻 받아들이기에 어딘가 찜찜한 구석이 있다. 시 속에서 어머니를 부를 때 그녀의 어머니는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가? 인류 역사에 걸쳐 여성을 가두어온 역할이 다시 한번 여성들에게 주어지는 것은 아닌가? 김혜순은 단호하게 자기 시 속의 어머니와 허구적인 모성 이데올로기를 구분한다. 어머니는 낳고 기르고 순종하지 않는다. 아이를 낳아야 획득할 수 있는 지위도 아니며, 자신을 낳아준 생물학적 어머니를 가리키는 말도 아니다. 그녀에게 어머니는 문체이다. 어머니는 말을 하는 방식이다. 어머니로 말한다는 것은 타자를 품되 소유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남자도 어머니를 할 수 있고, 시 속에서 어머니를 해야만 한다. “여성시인을 향해서만 모성운운하지 마라. 진짜 시인은 다 어머니다. 시인은 모성을 요리하지 않고 시인이 될 수 없다”12)
  오히려 김혜순이 시 속에서 어머니를 말할 때, 어머니는 우리가 알던 어머니가 아니게 된다. 어머니를 수행함으로써 구성되는 어머니는 여성들에게 강요되어 온 모성의 정체가 뻔뻔한 허구였음을 드러낸다. 따라서 어머니를 말하는 것은 어머니를 구하는 일이 된다. 그러나 이 과정은 어머니와 몸 사이의 불화가 종식된다는 말은 아니다. 타자를 품는 일은 자기를 지우는 일이며, 몸은 의미는 좀처럼 안착하는 법이 없다. 몸의 경계가 사라지고 타자를 출산하는 말하기를 거듭하는 과정에서도 그녀는 끊임없이 몸과 불화한다. 몸은 여전히 낯설고, 몸은 늘 떠나고 싶고, 두렵다. 몸의 안과 밖을 떠도는 리듬에 이름을 붙이는 일, 시를 짓는 일은 늘 처음처럼 구차하고 무모하다.

  당신이 떠난 자리에 맥주병 두 개 담배꽁초 한 개 메모지 두 장.
  왜 내 전화를 먹니? 메시지를 먹니? 먹을 게 그렇게 없니?
  당신은 통신 부르주아. 나는 왜 항상 전화가 무섭니?
  나는 당신이 쳐다보면 항상 무엇으로 변해야 할 것 같아. 소파에 고꾸라진 옷 뭉치로 변하는 건 어떨까?
  아니면 뒤집어져서 버둥거리는
  모든 짐승의 불쌍한 배처럼 얄따란 분홍색
  누군가의 입술에 매달린 풍선껌은 어떨까?
  당신은 아니?
  눈동자의배꼽신. 팔뚝의귓바퀴신.
  고구마무릎의사과씨신. 돼지발톱의병아리신.
  꿈꾸는물방개의물푸레나무신. 어여쁜아가씨의뒤꿈치발톱신. 개미귀신의고양이눈깔신. 쥐구멍의고양이몸뚱아리추깃물신. 총체흔드는아줌마팔뚝의코끼리신. 프레온가스처럼터져나오는침방울. 사자의썩은입냄새보다더굴욕구역질침샘신.
  당신은 당신과 나의 사지에 매달린 신님들 모두 아니?
  당신이 떠난 자리에 젖어버린 수건 뱉어버린 껌 뭉개진 토마토. 저마다 몽땅 몸을 빌려준 고마우신 검은 비닐봉지님들. 내 발아래 콘크리트와 철근과 유리창의 깍지 낀 팔뚝들이여.
  그 팔뚝들을 집요하게 내리치는 기계해머팔뚝들이여 드높아라.
  전세계의 돼지여 단결하라 신. 전세계의 고양이여.
  버터자 되자 신. 손목들이여 팔뚝을 탈출하라 신.
  축구 선수 입에서 튀어나오는 욕설 무더기 고등어 시체 신. 인도에는 신님들 수가 3억. 사람은 거기 모두 몇 명 살까?
  하늘 땅 바다에서 몰려온 별의별 신님들.
  당신이 떠난 자리에 내가 마치 쓰레기 신처럼 좌정하고, 사람에 대한 공복으로 이제껏 버티고 계신
  저 더럽게 제일 높으신 신님처럼
  쓰레기 매립지로 가는 초록색 트럭을
  기다리고 있다는 거, 아니? 모르니?
  매일 매일 빠져버린 당신과 나의 머리카락들이
  저 멀리 바다에서 빙산 녹은 물과 섞이고 있다는 거,
  아니? 모르니? 당신콧구멍의콧털따가운지구한방울신!

─「전세계의 쓰레기여 단결하라」, 『당신의 첫』13) 전문
어느 순간부터 그녀의 시가 엉터리로 읽히지는 않지만, 그녀의 시를 엉터리라고 읽었던 권력의 언어는 도처에 살아 있으므로 김혜순은 다방면에서 명사를 죽이는 시를 써나간다. 구멍이든, 모래이든, 물이든 그녀의 시에서 명사는 소재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동사의 의미를 입고 의미를 무한정 확장한다. 김혜순의 ‘나’는 출산과 임신을 반복하여 일 년에 열두 번까지 새끼를 낳는 암컷쥐의 감수분열처럼14), 3억이 넘는 인도의 신처럼, 무한히 증식하는 존재이다. 존재의 테두리가 벗겨지자 존재들 사이의 무작위적인 짜임이 난발하고, 더이상 그녀의 시적 탐색 과정에서 단계적으로 발전하는 무엇은 없다. “너는 죽어서 무엇이 되고 싶니?/나는 죽어서 테두리 없는 것이 될 거야!”(「토성의 수면제」, 『슬픔치약 거울크림』). 무한으로 증식하고 분열하는 존재들 ‘사이’의 자유로운 이행만이 남는다. 무한한 존재로서의 타자와 접촉하고, 감응하여, 이행되는 그리하여 자기 자신마저 타자화하는 ‘시-하기’가 남는다.
  2011년, 한국에서 구제역이 창궐하여 300여만 마리의 돼지가 살처분되었고, 그녀는 생매장되는 돼지들을 목격한 뒤에 연시 「피어라 돼지」를 쓴다. 그녀가 느낀 것은 죽음으로 내몰린 돼지에 대한 슬픔뿐만 아니라, “돼지와 몸을 서로 맞대고 있다는 공통감각”15)이었다. 폭력에 내몰린 모든 몸과 내 몸을 겹칠 때 덮쳐오는 고통의 감각이었다. ‘-하기’를 통해 짐승에서 분비물에까지 분열되는 ‘나’는 접촉을 통해 ‘짐승’과 자리를 바꾸고, ‘분비물’과 자리를 바꾼다. 여기서 자리를 바꾼다는 것은 ‘나’가 ‘쥐’나 ‘돼지’로 변신을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은유가 아니다. 이 과정에서 언급되는 짐승 역시 “퇴행이나 미성숙”이 아니며, “일탈이나 (역)진화”도 아니다.16) 다만 ‘나’는 ‘짐승-하기’를 통해 인간과 짐승의 경계적 존재가 되고, 그 과정에서 “짐승으로 취급하기” 혹은 “인간 이하로 보기”의 체험을 몸으로 느끼게 되는 것이다.17) 김혜순에게 ‘짐승-하기’란 ‘나’가 아닌 다른 모든 존재와 접촉하며 스스로의 육체를 끊임없이 분열하는 과정에 놓는 것이다. ‘여자짐승아시아하기’라는 표현에서 ‘여자’와 ‘짐승’ 사이에는 둘을 구분하는 기호가 없다. 김혜순은 ‘여자하기짐승하기’ 혹은 ‘여자짐승하기’라는 말을 통해 둘의 구분을 무효화한다. 이 무효화는 “언어적 담론과 권력에 의해 구성된 인간이라는 범주”를 넘어보려는 시도로, ‘-하기’의 움직임으로 무한한 ‘열림’의 세계로 넘어간다.18) 그러나 이 시집에 대한 문학상 수상이 결정되자 그녀는 “친일파 혹은 특정 지역 사람들을 ‘돼지’로 하대하는 사람, 모더니스트, 언어주의자”19)로 내몰리게 된다.

*

이후 김혜순은 『죽음의 자서전』(문학실험실, 2016), 『날개환상통』(문학과지성사, 2019), 『지구가 죽으면 달은 누굴 돌지?』(문학과지성사, 2022)라는 ‘죽음 3부작’을 쓴다. 죽음 3부작은 한국에서 발생한 사회적 참사뿐만 아니라 시인이 개인적으로 경험한 가족의 죽음과 애도를 그린다. 돼지로 겹쳐졌던 몸이, 새로, 사막으로 확장되는 과정에서 김혜순은 죽음을 향한 ‘자발적인’ 애도를 수행한다.

저는 시를 쓰면서 저의 원형 가족을 쪼갭니다. 그 힘의 선분들 사이로 스며들어갑니다. 가족은 끝없이 쪼개집니다. ‘가족주의’는 ‘가족분자화주의’를 신봉하는 저의 시에 의해 끝없이 ‘모래’처럼 부서져야 합니다. 민족주의나 국가주의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족주의는 독신자들, 일인가구에 의해 죽습니다. 저는 아버지 남자와 어머니 여자, 동생 남자와 나 여자가 사는 가족이 아니라, 여자도 남자도 아닌 분열된 가족 구성원으로 함께 보인 가족이 최고의 가족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아버지가 죽은 다음, 다음 세대의 새 아버지가 나타나고, 어머니가 죽은 다음 세대의 새 어머니가 나타나는 가족의 연대기가 아니라 끝없이 비정상적인 가족이 나타나는 세상을 꿈꿉니다. 식물과 함께 사는 가족, 동물과 함께 사는 가족, 친구와, 고아와, 입양아와, 동성과, 외국인과 함께 사는 가족이 주류가 되는 세상말입니다. 가족주의가 들어올 수 없는 가족을 꿈꿉니다.20)

그녀가 죽음 3부작에서 수행하는 것은 죽은 어머니, 죽은 아버지에 대한 애도이자, 원형적 상징의 저주처럼 김혜순 시속의 화자들을 끊임없이 얽매던 가족주의와의 작별이다. 제도와 규범이 작동하는 현실의 삶 속에서는 만나지 못했던 가족을 ‘새’로, ‘사막’으로 마주하는 만남이 김혜순의 죽음 3부작이 수행하는 애도의 과정이다. 그래서 죽음 3부작의 죽음의 묘사를 따라가다보면 죽음은 모든 것이 동시에 태어나는 사건처럼 느껴진다. 사라진 사람이 ‘새’의 몸을 하고 다시 돌아오는 것이 죽음이다. 죽음은 감각이 한꺼번에 사라지는 암흑이 아니라 ‘너’의 존재가 엄청나게 작아졌다가 동시에 커지는 바람에 ‘너’를 알아보지 못하는 사건이다. 이 세상의 모든 스위치가 전부 켜지는 것 같은 사건이 바로 죽음이다. 그녀가 가족의 죽음에 ‘작별’이라는 말을 붙인 것은 존재와의 헤어짐 뿐만 아니라, 살아 있는 동안 ‘나’와 ‘그’와 ‘그녀’를 얽매고 있던 가족이라는 질서와의 헤어짐을 의도한 것이다. 죽음 3부작이 마무리된 뒤에 발표된 『싱크로나이즈드 바다 아네모네』(난다, 2025)에서는 여전한 암컷 귀신이, 그러나 허공중에 풀어헤쳤던 원한의 머리칼이 이제는 물속에서 하늘거리는 말미잘의 촉수가 되어 아름답게 헤엄친다. 죽음 3부작을 거치며 온갖 자유로움을 억압하던 주의와 작별한 뒤, 그녀의 언어는 “식물도 동물도 어류도 파충류도” 아닌 것 같은 몸으로 자유롭게 하늘거린다. 가족주의, 민족주의, 국가주의, 인종주의를 죽이는 것은 끝없이 쪼개지고 부서지는 몸이다. 아무것도 묶거나, 매달지 않고, 오직 흔드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몸.

  이게 나의 어느 순간의 일인지
  네가 알아챘으면 좋겠어

  나는 지금 아름다운 싱크로나이즈드 말미잘
  물도 없는데
  물속에 있는 듯

  내 코에서 돋아나온 문어 같은 조갯살 같은 코끼리의 간 같은
  널찍한 혀 같은
  나는 식물도 동물도 어류도 파충류도 아니야

  너를 감은 내 손이 갓 땅을 박차고 올라온 새싹 같고
  너에게 기댄 내 머리가 커다란 꽃잎 같고, 아니야
  한 대야 커다란 닭벼슬 같고

  네게 노래 불러주면 나는 성별이 달라져
  여자가 되었다가
  남자가 되었다가 다시 여자도 남자도 아닌 자가생식의 성
  너와 뒤척이면서 나는 인종이 달라져
  레드 인종 블루 인종 핑크 인종
  고음을 낼 땐 설치류의 얼굴이었다가
  저음을 낼 땐 물에 사는 조류의 얼굴이었다가

  내 몸에서 내 몸이 돋아나올 때
  내 몸이 세상 전체일 때

  이게 어느 순간의 일인지
  네가 정말 알아챘으면 좋겠어

  나는 명랑한 싱크로나이즈드 말미잘
  내 몸에서 끝없이 돋아나는 천 개의 줄
  물속인 듯 물 없는 공중에 일렁이는 기나긴 줄

  이 줄로 아무것도 묶고 싶지 않아
  아무것도 매달고 싶지 않아

  나는 그냥 줄을 흔들고 싶어

  나는 그냥 해삼 말미잘 문어 뱀장어 여자
  내게서 솟아나는 수생식물을 내가 먹는 여자

─「싱크로나이즈드 말미잘」, 『싱크로나이즈드 바다 아네모네』 전문

*

2022년 겨울, 김혜순은 『여성이 글을 쓴다는 것은』(2002)의 개정판을 펴내며 ‘영감’으로 적었던 모든 표현을 ‘여성적 발화’로 수정했다. 신비주의적 체험을 의미하는 ‘영감’만으로는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고, 말을 할 수 없다면 그녀들을 영영 가두어버리게 된다. 몸에서 터져나오는 발화만이 쫓겨난 유령들의 말을 담아낼 수 있다. 그녀는 신비주의라는 체계에서는 나를 포함한 모든 타자들이 스스로 살아 있지 못한 채 증발된다고 생각했다. 외부가 아니라, 저승이 아니라, 저쪽이 아니라, 끊임없이 이쪽과 저쪽을 오가는 사이의 언술을 꿈꿨다. 실체가 없는 영감이 아니라, 모든 인식을 선행하는 몸을 시에 새겨넣고자 했다. 환상이나 신비주의라는 명목 아래 쉽게 버려지고 남겨지는 것이 없기를 바랐다.

  시를 쓰는 학생이 나에게 와서
  영감이 떠올랐다고 말했다

  나는 정말 내가 싫어하는 단어 중에 하나가
  영감이란 단어인데 하고 생각했다

  영감이 떠오른 학생이
  먼 나라의 여자가 손이 잘려 붕대 감은 팔로
  죽은 아이를 껴안고 있는 장면을 보았다고 말했다

  나는 영감이 떠오른 학생이
  밤의 교정에 맨발로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갑자기 나타난 그 여자와 아이를 어쩌지 못해

  그 여자를, 슬픔의 마비에 빠진 그 여자를
  깃대 위에 올려놓고

  영감이 떠오른 학생이
  그 여자를 국회의사당 돔 위에 올려놓고

  (…)

  영감이 떠오른 학생이
  그 여자의 소름 돋은 목덜미의 감촉을 느껴보고
  나의 작업은 서사가 아닌 음악이어야 해
  어떤 조성으로 표현해야 해
  소리의 근원을 찾아야 해
  하다가 그 여자를 잊어버리고

  밤이 깊어도 그 여자를 가로수 위에서 내려놓지 않고
  그 여자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슬픔 속에 있도록 내버려두고
  그 여자를 버림받게 하고 바람에 얻어맞게 하고

  (…)

  영감이 떠오른 학생은
  이제 정신없는 새의 발자국을 종이 위에 떨어뜨리고 싶고

  아이를 잃은 여자가 밤하늘에 유폐되게 내버려두고

  그리고 모든 종류의 슬픔이
  종이 밖에서 대기하게 내버려두고

─「모든 종류의 슬픔」, 『싱크로나이즈드 바다 아네모네』 부분
김혜순은 말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에도 불구하고 말하기를 멈춰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비명을 비명으로 남겨두지 않고 말하기를 계속해야 한다고 우리를 떠민다. 환상성이나 신비주의라는 아늑한 공간에 머물지 말고 형식이라는 틀에 비명을 담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때 형식이란 ‘그들’이 만들어낸 틀이 아니라, 그래서 오랫동안 틀 밖으로 존재를 내몰던 형식이 아니라, ‘나’가 만들어낸 말하기 방식으로써의 형식이다. ‘나’의 비명을 위해 발명하는 것이자, 구천을 떠도는 온갖 비명을 더이상 비명으로 남겨두지 않기 위해 발명하는 것이다. ‘나’가 겪는 현실에 초현실이니 난해라는 이름이 붙어도 ‘그들’이 말하는 현실이 무엇인지 되물어야 한다. 되묻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들’이 말하는 현실과 ‘나’의 현실 사이를 오가며 목소리를 전해야 한다. 이곳과 저곳을 오가는 역할을 선택한 바리데기 만신처럼, 저승으로서의 현실을 말해야 한다. 왜 이곳이 저승이며 저곳이 이승인지 물어야 한다. 둘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 물어야 한다. ‘나’의 무한한 분열은 정체성을 고정시키지 않은 자유로움을 얻기 위함만이 아니라, 무한히 분열하고 증식하는 과정에서 사방으로 겹쳐지는 다른 존재와의 만남을 위함이어야 한다. 그들의 몸을 공유하여 그들의 목소리를 내는 과정에서도 그들을 소유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스스로에게조차 타자가 되며 수많은 그들의 목소리가 몸 밖으로 뛰쳐나가도록 만들어야 한다. 사람이 어떻게 돼지냐고 묻는 사람에게 한 번도 돼지가 되어본 적 없는지 반문하라고 한다. 몸 안팎을 흐르는 리듬을 살려내고 결코 죽이지 말자고 한다. 그것을 제대로 꺼내놓을 수 없을 때조차도. 이것이 그녀가 나에게 가르쳐준 것이다.

최선교

문학평론가. 202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나는 그녀를 모르지만 아는 것처럼 말했다. "시에 관한, 시에 대한 글은 시와 함께 미끄러지는 글이 제일 좋다"는 그녀의 문장을 등에 업었으나 미끄러지는 일도 쉽지는 않았다. 원고 맨 앞에 달아둔 엘렌 식수의 글은 내 마음을 어느 정도 대변한다. 하지만 완벽하게 일치하지는 않는다.

2025/11/05
76호

1
엘렌 식수, 『리스펙토르의 시간』, 을유문화사, 2025.
2
김혜순, 「프랙털, 만다라」, 『여성이 글을 쓴다는 것은』, 문학동네, 2002, 245쪽.
3
권오룡 해설, 「조화의 이상과 방법적 시」, 『아버지가 세운 허수아비』, 문학과지성사, 1985.
4
김혜순, 『김혜순의 말』, 마음산책, 2023, 143쪽.
5
『어느 별의 지옥』, 문학과지성사, 2017 개정판.
6
『김혜순의 말』, 140쪽.
7
문학과지성사, 1987.
8
작가의 말, 『불쌍한 사랑기계』, 문학과지성사, 1997.
9
성민엽 해설, 「몸의 시학, 역동적인 에로스」,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 문학과지성사, 1994.
10
『여자짐승아시아하기』, 11~12쪽.
11
문학과지성사, 2004.
12
「여성, 시하다」, 『여성, 시하다』, 131쪽.
13
문학과지성사, 2008.
14
『여자짐승아시아하기』
15
『김혜순의 말』, 47쪽.
16
『여자짐승아시아하기』, 19쪽.
17
앞의 책, 같은 쪽.
18
앞의 책, 21쪽.
19
『김혜순의 말』, 46쪽.
20
앞의 책, 168~16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