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검은 말들의 춤
룰은 간단해요. 장작을 최대한 많이 모아 정상에 오르면 됩니다. 제한 시간을 넘기면 아무리 장작이 많아도 소용없다는 걸 잊지 마세요.
한 손에 횃불을 든 안내자가 말했다. 해 질 무렵이었다. 열성적인 지원자 몇 명이 박수를 치며 환호하자 다른 안내자들이 곧바로 종을 흔들었다. 조용히 하라는 뜻이었다.
오늘은 잠을 푹 자두는 게 좋을 겁니다. 동이 틀 무렵에 다시 출발하죠.
이번에는 아무도 박수를 치지 않았다. 엘은 배낭을 멘 채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온종일 행진을 한 두 다리는 평소보다 뜨겁고 단단했다. 지원자가 수백 명에 달했지만 앓는 소리만이 곳곳에서 흘러나왔다. 어수선한 침묵 속에서 공용 텐트를 설치하고, 빵과 식수를 나눠 먹는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엘은 빵을 다 먹자마자 침낭 안에 몸을 욱여넣었다. 엘의 옆자리에 침낭을 깔던 에프가 엘에게 알은체를 했다.
또 보네요. 난 벌써 세 번째예요. 그쪽은요?
처음이에요.
엘이 대답했다. 흙바닥에서 올라오는 한기가 몸의 열기를 빠르게 식혀주었다.
이번엔 꼭 정상까지 갈 거예요.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해요.
에프가 침낭의 지퍼를 올리며 호탕하게 말했다. 여유가 넘치는 사교적인 스타일이었지만 이상하게 호감이 가지 않는 사람이었다. 엘은 고맙다고 말하며 눈을 감았다. 피곤했지만 곧바로 잠이 오지 않았다. 몸이 허공으로 끝없이 떠오르는 것만 같았다.
누군가 훌쩍이는 소리를 듣고 눈을 떴을 때 엘은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했다. 더는 못하겠어. 못할 거야. 끝없이 되풀이되는 중얼거림은 어떤 주문을 외우는 것처럼 들렸다. 주문에 이끌리듯 엘은 텐트 밖으로 나갔다. 와이가 그루터기에 기대앉아 울고 있었다. 소지품 검사를 했을 때 와이를 처음 봤던 기억이 났다. 와이의 배낭에는 담배와 온갖 종류의 라이터, 성냥갑이 들어 있었는데 안내자들은 그것들을 모두 압수했다. 산불 방지를 위한 것이라는 말에 와이는 수긍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아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라이터나 성냥 같은 화기류를 소지할 수 없다는 규정은 사전 안내문에 분명히 적혀 있었다. 안내문도 제대로 확인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하겠다는 거지? 엘은 그런 생각을 하며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와이를 계속 쳐다봤었다. 고개를 돌린 와이가 엘의 눈을 보며 활짝 웃었다. 공모에 실패한 동료에게 사인을 보내는 듯한 미소였다.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엘은 와이를 따라 웃고 있었다.
울음이 그쳤는지 와이는 고개를 들고 코를 훌쩍였다.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렸다. 안내자였다. 엘은 텐트 뒤로 다급하게 몸을 숨겼다.
Y-31번? 안 자고 뭐 하는 거죠?
지금 막 들어가려고 했습니다.
그래요, 푹 자둬요.
안내자가 와이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와이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텐트로 돌아갔다. 와이의 힘없는 뒷모습을 보자 엘은 이상하게 애잔한 마음이 들었다. 누군가를 돕고 싶다는 마음이 든 건 처음이었다. 그런 여유 같은 건 없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엘은 누구보다 절실했다.
동이 틀 무렵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안내자들은 검은 우비를 쓰고 지원자들에게 장작과 파란 우비를 나눠주었다. 빗물이 스며든 장작은 축축하고 무거웠으며 밑부분에는 파란색의 로고가 찍혀 있었다. 장작을 많이 모아야 한다고 해서 직접 나무를 베는 줄 알았던 엘은 조금 놀랐다. 모든 지원자에게는 같은 양의 장작이 할당되었고, 모든 장작에는 도장이 찍혀 있었기 때문에 장작을 위조할 수도 없었다. 뭐가 좋은지 에프는 배낭 안에 장작을 쑤셔 넣으며 히죽거렸다.
일이 제법 재밌어지네.
에프의 말에 엘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배낭은 생각보다 무거웠다. 엘은 배낭을 멘 채로 우비를 걸쳤다. 비라도 그쳤으면 하는 엘의 바람과 달리 비는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안내자들은 검은 말을 타고 지원자들을 인솔했는데, 그 모습이 꼭 퍼레이드 배우들 같았다. 한 손에는 검은 깃발을 들었고 모자와 외투, 바지에 우비까지 전부 검은색이었다. 밤에는 음산하면서 신비스러운 분위기가 풍겼지만 낮에는 묘하게 우스꽝스러워 보였다.
초반에는 경사가 가파르지 않아 걸을 만했다. 한참을 걸었지만 비슷한 풍경이 이어졌다. 그루터기가 많았고 어린나무나 작은 풀이 드문드문 보였다. 누가 봐도 산불을 조심해야 할 산은 아니었고 민둥산에 가까웠다. 구름도 많아 정상이 잘 보이지 않아서 비현실적인 기분이 들었다. 엘이 배가 고프다고 느낄 때쯤 안개가 짙은 골짜기에 도착했고 안내자들은 행진을 멈추게 했다.
이 시간부터는 물을 포함한 어떤 것도 제공하지 않습니다. 식사는 알아서 해결하고 두 시간 후에 다시 출발하죠. 근처에 있던 안내자가 말했다. 지원자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엘 역시 가진 거라곤 장작과 물 한 통이 전부였고 주위를 둘러봐도 먹을 거라곤 없어 보였다. 아침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해 배가 고팠다. 배낭을 두고 주변을 좀 둘러보고 싶었지만 누군가 장작에 손을 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엘은 배낭을 그대로 메고 계속 걸었다. 에프도 엘을 따라나섰다. 그들은 최대한 다른 지원자들이 가지 않는 방향으로 향했다. 골짜기가 점점 깊어지던 중에 수상해 보이는 물웅덩이가 보였다. 물은 무척 깨끗했지만 물고기가 사는 것 같지는 않았다. 엘은 손바닥을 동그랗게 말아 물을 떠서 마셨다. 달고 시원했지만 허기가 가시지는 않았다.
골짜기를 지나자 은빛 억새밭이 펼쳐진 넓은 분지가 나타났다. 엘과 에프의 키를 훌쩍 넘는 높이의 억새밭이었다. 멀리서 조그맣게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연기가 나는 곳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연기가 나는 곳에서 안내자들이 음식을 준비하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곳에는 와이가 혼자 있었다. 와이는 맛있게 익은 고기를 막 먹으려던 참이었다.
어디서 났어요?
엘이 물었다.
어디서 나긴요. 내가 잡았어요.
잡았어요? 뭘요?
토끼요.
와이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토끼라니, 행진을 하는 내내 엘은 토끼는커녕 새 한 마리, 벌레 한 마리도 보지 못했다. 이곳에 토끼가 있다는 사실도 놀라운데, 잽싼 토끼를 잡아 토끼 고기 꼬치를 만들어 먹고 있는 사람이 다름 아닌 와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불은 또 어떻게 피웠을까, 그런 여러 가지 생각에 빠져 있는 엘에게 와이는 꼬치구이를 건넸다.
같이 먹어요.
엘은 사양했지만 와이는 괜찮다고 말하며 거듭 권했다. 간밤에 혼자 울던 와이와 활기가 넘치는 지금의 와이가 같은 사람이라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럼, 고마워요.
에프가 꼬치구이를 낚아채 먼저 먹기 시작했다. 그들은 나란히 앉아 꼬치구이를 먹었다. 태어나 처음 먹어보는 감탄스러운 맛이었다. 꼬치를 거의 먹어갈 즈음 멀리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안내자들이 오고 있었다. 그들은 서둘러 반대쪽으로 도망쳤다. 은빛 억새밭은 끝없이 펼쳐져 있었고 한참을 달리다 돌아보니 안내자들은 보이지 않았다.
연기 때문일 거예요. 나도 연기를 보고 왔거든요.
엘이 말하자 와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쪽으로 돌아서 갈까요?
엘은 와이가 가리키는 저쪽이 이쪽인지 저쪽인지 잘 분간이 되지 않았지만 그러자고 대답하곤 와이를 따라 대열로 돌아갔다. 돌아가는 길에 이야기를 나누면서 엘은 와이에 대해 알게 되었다. 와이는 산행을 해야 하는 이유를 찾지 못해 괴로워하는 사람이었다. 반면 엘은 단 한 번도 왜? 라는 질문을 던져본 적이 없었다. 어떻게? 라는 질문이 엘에게는 언제나 제일 먼저 떠올랐다. 와이의 질문은 작은 불씨처럼 엘의 마음속에 피어났다. 작고 희미한 불씨였지만 덕분에 무언가가 보일 듯도 했다.
별일 없었다는 듯 산행은 다시 시작되었다. 걷다 지친 사람들은 아무 데고 앉아 쉬다가 아무 때고 다시 대열에 합류해서, 산행을 하는 무리는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식사 시간이 되면 행진을 멈춰야 했고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한 움직임은 점점 필사적으로 변화했다. 대부분의 지원자가 먹을 것을 찾지 못했는데, 시간이 지나자 장사꾼이라 불리는 이들이 생겨났다. 장사꾼들은 거의 마법사와 같은 수완으로 어디서 구해왔는지 모를 열매나 과일을 팔았다. 굶주린 지원자들은 사과 한 알을 맛보기 위해 네다섯 개비의 장작을 지불해야 했다. 장사꾼들의 장작은 금세 네다섯 배로 불어났다.
엘은 와이가 몰래 사냥한 토끼 고기를 얻어먹었다. 엘이 감사의 의미로 장작을 주려고 했지만 와이는 받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 에프가 보이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과 잘 어울리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엘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사냥이 잘 된 날이면 와이는 토끼 고기를 밀거래했고 많은 양의 장작을 벌어들였다. 불을 사용한 사실이 적발되면 내쫓길 수 있었기 때문에 토끼 고기를 대놓고 팔 수는 없었다. 엘은 와이의 장작을 대신 들어주며 끼니를 해결했고 덕분에 장작을 지키면서 산행을 지속할 수 있었다. 엘처럼 장사꾼들의 장작을 대신 들어주는 사람들은 짐꾼이라고 불렸다. 짐꾼은 장사꾼의 장작을 대신 들어주는 대가로 장작을 벌 수 있었다. 그런 식으로 장사꾼과 짐꾼, 식수꾼, 밀거래꾼, 농담꾼이 생겨났고 장작은 사람들 사이를 돌고 돌았다.
산행이 지속될수록 안개가 짙어졌다. 여전히 정상은 보이지 않았고 엘과 와이는 점점 지쳐갔다. 구릉 지대는 비탈이 심한 암석지대로 이어졌다. 미끄러운 바위 때문에 넘어지거나 다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와이도 발을 헛디뎌 발목을 다치고 말았다. 엘의 부축을 받지 않고는 혼자 걷기도 힘들 정도여서 사냥을 할 수도 없게 되었다.
이제 그만 포기하고 싶어요. 더는 못하겠어요.
와이가 말했다. 엘은 지금까지 온 게 아깝지 않냐고 와이를 설득했다.
장작이 좀 모자랐지만 정상에 올랐다는 이유로 좋은 평가를 받은 케이스도 있대요. 그러니까 끝까지 포기하지 말아요. 내가 같이 가면 되잖아요.
안내자들의 말을 믿으세요?
와이가 물었다. 엘은 별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당연하죠. 왜요, 거짓말 같아요?
모르겠어요. 가끔은 이 모든 게 다 거짓말 같아요. 혼란스러워요.
그런데 장작을 그렇게 열심히 모았어요?
다들 그래야 한다고 하니까요.
다들 그러니까 그런 것도 있겠지만 당신에게는 특별한 능력이 있어요. 난 그게 부러워요. 그러고 싶어도 난 그럴 수가 없는걸요.
엘은 진심으로 와이를 부러워했다. 다리만 다치지 않았어도 와이는 많은 장작을 모았을 것이다. 반면 엘은 두 다리가 멀쩡했어도 장작을 많이 벌 능력이 없었다. 와이가 사냥을 할 수 없게 되자 엘과 와이의 장작은 점차 줄어들었다. 와이는 엘을 부축하느라 짐꾼이 될 수도 없었다. 험난한 바위를 올라야 하는 코스가 이어져서 엘과 와이는 점점 산행에서도 뒤처졌다.
해 질 무렵이 되어 엘과 와이는 바위틈에 텐트를 치고 자리를 잡았다. 대열의 끄트머리여서 지원자들이 많지 않았다. 주변에 있는 이들도 대부분 부상을 당한 상태였다. 안내자들은 아픈 지원자들을 격려하며 절대 포기하지 말라는 당부를 잊지 않았다. 식수꾼에게 물을 사기 위해 텐트 밖으로 나온 엘은 안내자들의 호위를 받으며 걸어오는 지원자를 보게 되었다. 제대로 씻지 못해 꾀죄죄한 몰골의 지원자들과 달리 그는 방금 목욕을 하고 나온 것처럼 상쾌해 보였고, 지원자용 복장이며 신발까지 전부 깨끗했다. 산행을 한 지원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딱 봐도 알 수 있었다. 안내자들은 그가 상사라도 되는 것처럼 극진한 태도로 그를 대우했다. 장작이 든 배낭도 대신 들어 주고 텐트도 직접 펴주었다. 물을 사서 텐트로 돌아온 엘이 와이에게 이 사실을 이야기하자 와이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대수롭지 않은 반응을 보였다.
그래도 대놓고 그럴 줄은 몰랐는데. 일부러 저러는 걸까요?
그런 일들이 비일비재하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소문에 불과할 거라고 믿었던 엘은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자신들도 똑같은 수고 끝에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고, 눈물의 설교를 하던 안내자들의 말도 모두 거짓말 같았다. 그러나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엘은 계속 가야 했다. 계속 가는 수밖에 없다고 믿었다.
다음 날이 되자 와이의 다리는 벌겋게 부어올랐다. 엘은 와이를 부축하며 천천히 걸었다. 눈이 내리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신발이 푹 잠길 정도로 눈이 쌓였다. 엘은 조바심이 났다. 산행을 시작할 때만 해도 대열의 선두에서 가장 먼저 정상에 오르겠다는 야심에 부풀어 있었다. 이제는 앞으로 한 걸음을 나아가는 일도 힘에 부쳤다. 제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도 엘을 더욱 초조하게 만들었다. 와이는 불안해하는 엘의 표정을 보고 말했다.
먼저 가요. 나는 괜찮아요.
와이가 진심으로 미안해하며 말했다.
아니에요. 같이 가요.
와이의 얼굴을 보자 엘은 혼자서 정상에 오르는 일은 역시 무의미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와이와 함께 가고 싶었다. 그럴 수 없을 거라는 예감에 마음이 아프기도 했다. 배가 고팠고 지독하게 추웠으며 온몸이 쑤셨다. 가파른 암석 지대가 지나자 평야가 나타났고, 다시 검은 말들이 나타났다. 안내자들은 산행을 포기한 부상자들을 검은 말에 태워 어딘가로 사라졌다. 엘은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와이를 위해 무엇이든 하고 싶었다. 엘은 가까운 곳에 있는 안내자에게 달려가며 소리쳤다.
저, 부상자가 있는데요. 조금만 태워줄 수는 없나요?
엘을 돌아본 안내자는 에프였다. 엘은 곧바로 에프를 알아보았다.
당신?
에프는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엘에게 말했다.
다시 보니 반갑네요. 난 사실 지원자가 아니었어요. 많이 놀랐나요?
엘은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이제는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프인 척했던 안내자는 부상자들을 챙기기 위해 황급히 자리를 떴는데, 마지막까지 격려의 말을 아끼지 않았다.
하루만 더 버텨요. 곧 정상이니까. 안개 때문에 잘 보이진 않지만.
와이는 에프가 안내자였다는 사실에도 크게 놀라지 않았다. 엘은 침착함을 유지하는 것도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능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정상 근처까지는 왔다는 거죠? 이제는 정말 그만하고 싶은데.
와이가 힘없이 말했다. 엘은 말없이 와이를 위로했다. 하지만 엘도 더 나아갈 힘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지원자들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그날은 모두에게 특식이 주어졌다. 마지막까지 장작을 조금이라도 더 모으기 위해 특식을 먹지 않고 파는 이들도 있었지만, 엘과 와이는 모처럼의 특식을 편안히 즐겼다.
그날 밤이었다. 추위를 견디지 못해 장작에 불을 붙인 사람들이 안내자에게 발각되어 퇴출당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엘은 가방을 열어 남은 장작을 확인했다. 네 개비뿐이었다. 와이에게는 여덟 개비의 장작이 남아 있었다. 곧 추위와 배고픔으로부터 해방될 것이고 자유를 얻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엘은 감격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잠든 와이의 얼굴을 보며 와이와 함께 살아갈 앞으로의 삶은 어떨까 기대하면서, 엘은 천천히 잠에 빠져들었다.
매캐한 냄새에 와이가 먼저 눈을 떴다.
일어나 봐요!
와이가 놀란 얼굴로 소리치며 엘을 흔들어 깨웠다. 밖으로 나가자 멀지 않은 곳에서 불이 난 것이 보였다. 엘과 와이는 불더미로 달려갔다. 어떤 사람이 장작을 불길 속에 집어 던지고 있었다. 다른 이들은 그를 빙 둘러싸고 걱정스러운 눈길로 바라만 보고 있었다. 안내자들은 보이지 않았다.
무슨 일이에요?
와이가 장작을 집어 던지는 사람에게 물었다.
이런 미친 짓, 관두려고요.
그가 웃으며 대답했다.
관둘 거면 혼자 조용히 관두면 될 것이지.
엘의 옆에 서 있던 지원자가 중얼거리며 텐트로 돌아갔다. 관둔다는 말에 남은 장작을 자신에게 달라는 지원자들이 몰려들었다. 그는 달려드는 이들을 피해 필사적으로 남은 장작들을 불더미에 던졌다. 불길이 조금씩 거세지고 있었다. 남은 장작을 모두 불태우자 그는 입고 있던 옷과 배낭까지 벗어 던졌다. 구경하던 이들 중 일부가 흥미를 잃고 각자의 텐트로 돌아갔다. 엘도 돌아가려 했지만 와이가 보이지 않았다. 엘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와이를 찾았다. 잠시 후 와이가 배낭을 메고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와이는 엘을 지나쳐 불더미 쪽으로 달려갔다. 엘이 말릴 새도 없이 와이는 배낭을 통째로 불에 태워버렸다.
엘은 혼란스러웠다. 고지가 눈앞에 있었다. 그것을 위해 너무나 많은 것들을 참고 견뎌왔다.
아까워서 못하겠죠?
와이가 물었다.
난 저들이 되고 싶지도 않고 저들의 말을 믿고 싶지도 않고 저들이 하라는 대로 하고 싶지도 않아요. 그만뒀어요, 난.
와이는 웃고 있었다.
그러니 아까울 게 뭐가 있겠어요?
정말 정상에 오르면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 정상에 올라 얻게 될 대가는 엘에게 구원 그 자체였다. 와이는 흐느적거리는 불꽃을 따라 춤을 추기 시작했다. 구경꾼들이 하나둘 모였다. 엘은 생각에 잠겼다. 내가 구원을 받아도 와이처럼 춤출 수 있을까? 와이의 춤은 춤이라기보다 몸짓에 가까웠지만, 엘이 봤던 어떤 춤보다도 자유로워 보였다. 미친 짓을 관두기 위해 장작을 태웠다는 사람도 와이를 따라 몸을 흐느적거렸다. 엘은 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한참 후에 와이와 다시 눈이 마주쳤을 때 엘은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있었다.
장작을 태운 불은 근처의 마른 풀과 나무를 삼키며 점점 몸집을 불리고 있었다. 엘은 자신의 배낭을 통째로 집어 던졌다. 엘과 와이는 한참을 웃다가 주변의 사람들과 함께 춤을 추었다. 장작을 태우지 않고 구경만 하던 이들도 춤을 추는 일에는 동참했다. 거대한 불꽃이 사람들의 팔다리를 조종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불을 에워싼 이들은 동이 틀 무렵까지 쉬지 않고 춤을 추었다.
사람들 사이에 뒤섞여 흥겹게 춤을 추던 엘이 가장 먼저 그것을 발견했다. 안개가 걷히자 정상에 거대한 무언가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엘의 시선을 따라 와이도 그것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거대한 사람처럼 보였다. 와이가 비명을 질렀다. 다른 사람들도 그것을 바라보았다. 빛이 더해지자 윤곽이 점점 뚜렷하게 보였다. 그것은 수십만 개의 장작이었다.
<축하합니다. 귀하의 과감한 결단력은 우리를 감동시켰습니다. 장작을 태울 용기가 있는 자만이 우리의 일원이 될 수 있습니다.>
엘은 통지서를 과감하게 찢어버렸다. 그것은 이제 한낱 종잇조각에 불과했다. 엘은 문을 잠그고 자동차에 올라탔다. 운전석에 앉아 있던 와이가 엘을 가볍게 껴안고는 지체 없이 엑셀을 밟았다. 그들은 어디로든 갈 수 있었다.
한 손에 횃불을 든 안내자가 말했다. 해 질 무렵이었다. 열성적인 지원자 몇 명이 박수를 치며 환호하자 다른 안내자들이 곧바로 종을 흔들었다. 조용히 하라는 뜻이었다.
오늘은 잠을 푹 자두는 게 좋을 겁니다. 동이 틀 무렵에 다시 출발하죠.
이번에는 아무도 박수를 치지 않았다. 엘은 배낭을 멘 채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온종일 행진을 한 두 다리는 평소보다 뜨겁고 단단했다. 지원자가 수백 명에 달했지만 앓는 소리만이 곳곳에서 흘러나왔다. 어수선한 침묵 속에서 공용 텐트를 설치하고, 빵과 식수를 나눠 먹는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엘은 빵을 다 먹자마자 침낭 안에 몸을 욱여넣었다. 엘의 옆자리에 침낭을 깔던 에프가 엘에게 알은체를 했다.
또 보네요. 난 벌써 세 번째예요. 그쪽은요?
처음이에요.
엘이 대답했다. 흙바닥에서 올라오는 한기가 몸의 열기를 빠르게 식혀주었다.
이번엔 꼭 정상까지 갈 거예요.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해요.
에프가 침낭의 지퍼를 올리며 호탕하게 말했다. 여유가 넘치는 사교적인 스타일이었지만 이상하게 호감이 가지 않는 사람이었다. 엘은 고맙다고 말하며 눈을 감았다. 피곤했지만 곧바로 잠이 오지 않았다. 몸이 허공으로 끝없이 떠오르는 것만 같았다.
누군가 훌쩍이는 소리를 듣고 눈을 떴을 때 엘은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했다. 더는 못하겠어. 못할 거야. 끝없이 되풀이되는 중얼거림은 어떤 주문을 외우는 것처럼 들렸다. 주문에 이끌리듯 엘은 텐트 밖으로 나갔다. 와이가 그루터기에 기대앉아 울고 있었다. 소지품 검사를 했을 때 와이를 처음 봤던 기억이 났다. 와이의 배낭에는 담배와 온갖 종류의 라이터, 성냥갑이 들어 있었는데 안내자들은 그것들을 모두 압수했다. 산불 방지를 위한 것이라는 말에 와이는 수긍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아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라이터나 성냥 같은 화기류를 소지할 수 없다는 규정은 사전 안내문에 분명히 적혀 있었다. 안내문도 제대로 확인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하겠다는 거지? 엘은 그런 생각을 하며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와이를 계속 쳐다봤었다. 고개를 돌린 와이가 엘의 눈을 보며 활짝 웃었다. 공모에 실패한 동료에게 사인을 보내는 듯한 미소였다.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엘은 와이를 따라 웃고 있었다.
울음이 그쳤는지 와이는 고개를 들고 코를 훌쩍였다.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렸다. 안내자였다. 엘은 텐트 뒤로 다급하게 몸을 숨겼다.
Y-31번? 안 자고 뭐 하는 거죠?
지금 막 들어가려고 했습니다.
그래요, 푹 자둬요.
안내자가 와이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와이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텐트로 돌아갔다. 와이의 힘없는 뒷모습을 보자 엘은 이상하게 애잔한 마음이 들었다. 누군가를 돕고 싶다는 마음이 든 건 처음이었다. 그런 여유 같은 건 없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엘은 누구보다 절실했다.
동이 틀 무렵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안내자들은 검은 우비를 쓰고 지원자들에게 장작과 파란 우비를 나눠주었다. 빗물이 스며든 장작은 축축하고 무거웠으며 밑부분에는 파란색의 로고가 찍혀 있었다. 장작을 많이 모아야 한다고 해서 직접 나무를 베는 줄 알았던 엘은 조금 놀랐다. 모든 지원자에게는 같은 양의 장작이 할당되었고, 모든 장작에는 도장이 찍혀 있었기 때문에 장작을 위조할 수도 없었다. 뭐가 좋은지 에프는 배낭 안에 장작을 쑤셔 넣으며 히죽거렸다.
일이 제법 재밌어지네.
에프의 말에 엘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배낭은 생각보다 무거웠다. 엘은 배낭을 멘 채로 우비를 걸쳤다. 비라도 그쳤으면 하는 엘의 바람과 달리 비는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안내자들은 검은 말을 타고 지원자들을 인솔했는데, 그 모습이 꼭 퍼레이드 배우들 같았다. 한 손에는 검은 깃발을 들었고 모자와 외투, 바지에 우비까지 전부 검은색이었다. 밤에는 음산하면서 신비스러운 분위기가 풍겼지만 낮에는 묘하게 우스꽝스러워 보였다.
초반에는 경사가 가파르지 않아 걸을 만했다. 한참을 걸었지만 비슷한 풍경이 이어졌다. 그루터기가 많았고 어린나무나 작은 풀이 드문드문 보였다. 누가 봐도 산불을 조심해야 할 산은 아니었고 민둥산에 가까웠다. 구름도 많아 정상이 잘 보이지 않아서 비현실적인 기분이 들었다. 엘이 배가 고프다고 느낄 때쯤 안개가 짙은 골짜기에 도착했고 안내자들은 행진을 멈추게 했다.
이 시간부터는 물을 포함한 어떤 것도 제공하지 않습니다. 식사는 알아서 해결하고 두 시간 후에 다시 출발하죠. 근처에 있던 안내자가 말했다. 지원자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엘 역시 가진 거라곤 장작과 물 한 통이 전부였고 주위를 둘러봐도 먹을 거라곤 없어 보였다. 아침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해 배가 고팠다. 배낭을 두고 주변을 좀 둘러보고 싶었지만 누군가 장작에 손을 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엘은 배낭을 그대로 메고 계속 걸었다. 에프도 엘을 따라나섰다. 그들은 최대한 다른 지원자들이 가지 않는 방향으로 향했다. 골짜기가 점점 깊어지던 중에 수상해 보이는 물웅덩이가 보였다. 물은 무척 깨끗했지만 물고기가 사는 것 같지는 않았다. 엘은 손바닥을 동그랗게 말아 물을 떠서 마셨다. 달고 시원했지만 허기가 가시지는 않았다.
골짜기를 지나자 은빛 억새밭이 펼쳐진 넓은 분지가 나타났다. 엘과 에프의 키를 훌쩍 넘는 높이의 억새밭이었다. 멀리서 조그맣게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연기가 나는 곳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연기가 나는 곳에서 안내자들이 음식을 준비하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곳에는 와이가 혼자 있었다. 와이는 맛있게 익은 고기를 막 먹으려던 참이었다.
어디서 났어요?
엘이 물었다.
어디서 나긴요. 내가 잡았어요.
잡았어요? 뭘요?
토끼요.
와이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토끼라니, 행진을 하는 내내 엘은 토끼는커녕 새 한 마리, 벌레 한 마리도 보지 못했다. 이곳에 토끼가 있다는 사실도 놀라운데, 잽싼 토끼를 잡아 토끼 고기 꼬치를 만들어 먹고 있는 사람이 다름 아닌 와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불은 또 어떻게 피웠을까, 그런 여러 가지 생각에 빠져 있는 엘에게 와이는 꼬치구이를 건넸다.
같이 먹어요.
엘은 사양했지만 와이는 괜찮다고 말하며 거듭 권했다. 간밤에 혼자 울던 와이와 활기가 넘치는 지금의 와이가 같은 사람이라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럼, 고마워요.
에프가 꼬치구이를 낚아채 먼저 먹기 시작했다. 그들은 나란히 앉아 꼬치구이를 먹었다. 태어나 처음 먹어보는 감탄스러운 맛이었다. 꼬치를 거의 먹어갈 즈음 멀리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안내자들이 오고 있었다. 그들은 서둘러 반대쪽으로 도망쳤다. 은빛 억새밭은 끝없이 펼쳐져 있었고 한참을 달리다 돌아보니 안내자들은 보이지 않았다.
연기 때문일 거예요. 나도 연기를 보고 왔거든요.
엘이 말하자 와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쪽으로 돌아서 갈까요?
엘은 와이가 가리키는 저쪽이 이쪽인지 저쪽인지 잘 분간이 되지 않았지만 그러자고 대답하곤 와이를 따라 대열로 돌아갔다. 돌아가는 길에 이야기를 나누면서 엘은 와이에 대해 알게 되었다. 와이는 산행을 해야 하는 이유를 찾지 못해 괴로워하는 사람이었다. 반면 엘은 단 한 번도 왜? 라는 질문을 던져본 적이 없었다. 어떻게? 라는 질문이 엘에게는 언제나 제일 먼저 떠올랐다. 와이의 질문은 작은 불씨처럼 엘의 마음속에 피어났다. 작고 희미한 불씨였지만 덕분에 무언가가 보일 듯도 했다.
별일 없었다는 듯 산행은 다시 시작되었다. 걷다 지친 사람들은 아무 데고 앉아 쉬다가 아무 때고 다시 대열에 합류해서, 산행을 하는 무리는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식사 시간이 되면 행진을 멈춰야 했고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한 움직임은 점점 필사적으로 변화했다. 대부분의 지원자가 먹을 것을 찾지 못했는데, 시간이 지나자 장사꾼이라 불리는 이들이 생겨났다. 장사꾼들은 거의 마법사와 같은 수완으로 어디서 구해왔는지 모를 열매나 과일을 팔았다. 굶주린 지원자들은 사과 한 알을 맛보기 위해 네다섯 개비의 장작을 지불해야 했다. 장사꾼들의 장작은 금세 네다섯 배로 불어났다.
엘은 와이가 몰래 사냥한 토끼 고기를 얻어먹었다. 엘이 감사의 의미로 장작을 주려고 했지만 와이는 받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 에프가 보이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과 잘 어울리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엘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사냥이 잘 된 날이면 와이는 토끼 고기를 밀거래했고 많은 양의 장작을 벌어들였다. 불을 사용한 사실이 적발되면 내쫓길 수 있었기 때문에 토끼 고기를 대놓고 팔 수는 없었다. 엘은 와이의 장작을 대신 들어주며 끼니를 해결했고 덕분에 장작을 지키면서 산행을 지속할 수 있었다. 엘처럼 장사꾼들의 장작을 대신 들어주는 사람들은 짐꾼이라고 불렸다. 짐꾼은 장사꾼의 장작을 대신 들어주는 대가로 장작을 벌 수 있었다. 그런 식으로 장사꾼과 짐꾼, 식수꾼, 밀거래꾼, 농담꾼이 생겨났고 장작은 사람들 사이를 돌고 돌았다.
산행이 지속될수록 안개가 짙어졌다. 여전히 정상은 보이지 않았고 엘과 와이는 점점 지쳐갔다. 구릉 지대는 비탈이 심한 암석지대로 이어졌다. 미끄러운 바위 때문에 넘어지거나 다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와이도 발을 헛디뎌 발목을 다치고 말았다. 엘의 부축을 받지 않고는 혼자 걷기도 힘들 정도여서 사냥을 할 수도 없게 되었다.
이제 그만 포기하고 싶어요. 더는 못하겠어요.
와이가 말했다. 엘은 지금까지 온 게 아깝지 않냐고 와이를 설득했다.
장작이 좀 모자랐지만 정상에 올랐다는 이유로 좋은 평가를 받은 케이스도 있대요. 그러니까 끝까지 포기하지 말아요. 내가 같이 가면 되잖아요.
안내자들의 말을 믿으세요?
와이가 물었다. 엘은 별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당연하죠. 왜요, 거짓말 같아요?
모르겠어요. 가끔은 이 모든 게 다 거짓말 같아요. 혼란스러워요.
그런데 장작을 그렇게 열심히 모았어요?
다들 그래야 한다고 하니까요.
다들 그러니까 그런 것도 있겠지만 당신에게는 특별한 능력이 있어요. 난 그게 부러워요. 그러고 싶어도 난 그럴 수가 없는걸요.
엘은 진심으로 와이를 부러워했다. 다리만 다치지 않았어도 와이는 많은 장작을 모았을 것이다. 반면 엘은 두 다리가 멀쩡했어도 장작을 많이 벌 능력이 없었다. 와이가 사냥을 할 수 없게 되자 엘과 와이의 장작은 점차 줄어들었다. 와이는 엘을 부축하느라 짐꾼이 될 수도 없었다. 험난한 바위를 올라야 하는 코스가 이어져서 엘과 와이는 점점 산행에서도 뒤처졌다.
해 질 무렵이 되어 엘과 와이는 바위틈에 텐트를 치고 자리를 잡았다. 대열의 끄트머리여서 지원자들이 많지 않았다. 주변에 있는 이들도 대부분 부상을 당한 상태였다. 안내자들은 아픈 지원자들을 격려하며 절대 포기하지 말라는 당부를 잊지 않았다. 식수꾼에게 물을 사기 위해 텐트 밖으로 나온 엘은 안내자들의 호위를 받으며 걸어오는 지원자를 보게 되었다. 제대로 씻지 못해 꾀죄죄한 몰골의 지원자들과 달리 그는 방금 목욕을 하고 나온 것처럼 상쾌해 보였고, 지원자용 복장이며 신발까지 전부 깨끗했다. 산행을 한 지원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딱 봐도 알 수 있었다. 안내자들은 그가 상사라도 되는 것처럼 극진한 태도로 그를 대우했다. 장작이 든 배낭도 대신 들어 주고 텐트도 직접 펴주었다. 물을 사서 텐트로 돌아온 엘이 와이에게 이 사실을 이야기하자 와이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대수롭지 않은 반응을 보였다.
그래도 대놓고 그럴 줄은 몰랐는데. 일부러 저러는 걸까요?
그런 일들이 비일비재하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소문에 불과할 거라고 믿었던 엘은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자신들도 똑같은 수고 끝에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고, 눈물의 설교를 하던 안내자들의 말도 모두 거짓말 같았다. 그러나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엘은 계속 가야 했다. 계속 가는 수밖에 없다고 믿었다.
다음 날이 되자 와이의 다리는 벌겋게 부어올랐다. 엘은 와이를 부축하며 천천히 걸었다. 눈이 내리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신발이 푹 잠길 정도로 눈이 쌓였다. 엘은 조바심이 났다. 산행을 시작할 때만 해도 대열의 선두에서 가장 먼저 정상에 오르겠다는 야심에 부풀어 있었다. 이제는 앞으로 한 걸음을 나아가는 일도 힘에 부쳤다. 제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도 엘을 더욱 초조하게 만들었다. 와이는 불안해하는 엘의 표정을 보고 말했다.
먼저 가요. 나는 괜찮아요.
와이가 진심으로 미안해하며 말했다.
아니에요. 같이 가요.
와이의 얼굴을 보자 엘은 혼자서 정상에 오르는 일은 역시 무의미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와이와 함께 가고 싶었다. 그럴 수 없을 거라는 예감에 마음이 아프기도 했다. 배가 고팠고 지독하게 추웠으며 온몸이 쑤셨다. 가파른 암석 지대가 지나자 평야가 나타났고, 다시 검은 말들이 나타났다. 안내자들은 산행을 포기한 부상자들을 검은 말에 태워 어딘가로 사라졌다. 엘은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와이를 위해 무엇이든 하고 싶었다. 엘은 가까운 곳에 있는 안내자에게 달려가며 소리쳤다.
저, 부상자가 있는데요. 조금만 태워줄 수는 없나요?
엘을 돌아본 안내자는 에프였다. 엘은 곧바로 에프를 알아보았다.
당신?
에프는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엘에게 말했다.
다시 보니 반갑네요. 난 사실 지원자가 아니었어요. 많이 놀랐나요?
엘은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이제는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프인 척했던 안내자는 부상자들을 챙기기 위해 황급히 자리를 떴는데, 마지막까지 격려의 말을 아끼지 않았다.
하루만 더 버텨요. 곧 정상이니까. 안개 때문에 잘 보이진 않지만.
와이는 에프가 안내자였다는 사실에도 크게 놀라지 않았다. 엘은 침착함을 유지하는 것도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능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정상 근처까지는 왔다는 거죠? 이제는 정말 그만하고 싶은데.
와이가 힘없이 말했다. 엘은 말없이 와이를 위로했다. 하지만 엘도 더 나아갈 힘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지원자들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그날은 모두에게 특식이 주어졌다. 마지막까지 장작을 조금이라도 더 모으기 위해 특식을 먹지 않고 파는 이들도 있었지만, 엘과 와이는 모처럼의 특식을 편안히 즐겼다.
그날 밤이었다. 추위를 견디지 못해 장작에 불을 붙인 사람들이 안내자에게 발각되어 퇴출당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엘은 가방을 열어 남은 장작을 확인했다. 네 개비뿐이었다. 와이에게는 여덟 개비의 장작이 남아 있었다. 곧 추위와 배고픔으로부터 해방될 것이고 자유를 얻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엘은 감격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잠든 와이의 얼굴을 보며 와이와 함께 살아갈 앞으로의 삶은 어떨까 기대하면서, 엘은 천천히 잠에 빠져들었다.
매캐한 냄새에 와이가 먼저 눈을 떴다.
일어나 봐요!
와이가 놀란 얼굴로 소리치며 엘을 흔들어 깨웠다. 밖으로 나가자 멀지 않은 곳에서 불이 난 것이 보였다. 엘과 와이는 불더미로 달려갔다. 어떤 사람이 장작을 불길 속에 집어 던지고 있었다. 다른 이들은 그를 빙 둘러싸고 걱정스러운 눈길로 바라만 보고 있었다. 안내자들은 보이지 않았다.
무슨 일이에요?
와이가 장작을 집어 던지는 사람에게 물었다.
이런 미친 짓, 관두려고요.
그가 웃으며 대답했다.
관둘 거면 혼자 조용히 관두면 될 것이지.
엘의 옆에 서 있던 지원자가 중얼거리며 텐트로 돌아갔다. 관둔다는 말에 남은 장작을 자신에게 달라는 지원자들이 몰려들었다. 그는 달려드는 이들을 피해 필사적으로 남은 장작들을 불더미에 던졌다. 불길이 조금씩 거세지고 있었다. 남은 장작을 모두 불태우자 그는 입고 있던 옷과 배낭까지 벗어 던졌다. 구경하던 이들 중 일부가 흥미를 잃고 각자의 텐트로 돌아갔다. 엘도 돌아가려 했지만 와이가 보이지 않았다. 엘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와이를 찾았다. 잠시 후 와이가 배낭을 메고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와이는 엘을 지나쳐 불더미 쪽으로 달려갔다. 엘이 말릴 새도 없이 와이는 배낭을 통째로 불에 태워버렸다.
엘은 혼란스러웠다. 고지가 눈앞에 있었다. 그것을 위해 너무나 많은 것들을 참고 견뎌왔다.
아까워서 못하겠죠?
와이가 물었다.
난 저들이 되고 싶지도 않고 저들의 말을 믿고 싶지도 않고 저들이 하라는 대로 하고 싶지도 않아요. 그만뒀어요, 난.
와이는 웃고 있었다.
그러니 아까울 게 뭐가 있겠어요?
정말 정상에 오르면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 정상에 올라 얻게 될 대가는 엘에게 구원 그 자체였다. 와이는 흐느적거리는 불꽃을 따라 춤을 추기 시작했다. 구경꾼들이 하나둘 모였다. 엘은 생각에 잠겼다. 내가 구원을 받아도 와이처럼 춤출 수 있을까? 와이의 춤은 춤이라기보다 몸짓에 가까웠지만, 엘이 봤던 어떤 춤보다도 자유로워 보였다. 미친 짓을 관두기 위해 장작을 태웠다는 사람도 와이를 따라 몸을 흐느적거렸다. 엘은 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한참 후에 와이와 다시 눈이 마주쳤을 때 엘은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있었다.
장작을 태운 불은 근처의 마른 풀과 나무를 삼키며 점점 몸집을 불리고 있었다. 엘은 자신의 배낭을 통째로 집어 던졌다. 엘과 와이는 한참을 웃다가 주변의 사람들과 함께 춤을 추었다. 장작을 태우지 않고 구경만 하던 이들도 춤을 추는 일에는 동참했다. 거대한 불꽃이 사람들의 팔다리를 조종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불을 에워싼 이들은 동이 틀 무렵까지 쉬지 않고 춤을 추었다.
사람들 사이에 뒤섞여 흥겹게 춤을 추던 엘이 가장 먼저 그것을 발견했다. 안개가 걷히자 정상에 거대한 무언가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엘의 시선을 따라 와이도 그것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거대한 사람처럼 보였다. 와이가 비명을 질렀다. 다른 사람들도 그것을 바라보았다. 빛이 더해지자 윤곽이 점점 뚜렷하게 보였다. 그것은 수십만 개의 장작이었다.
<축하합니다. 귀하의 과감한 결단력은 우리를 감동시켰습니다. 장작을 태울 용기가 있는 자만이 우리의 일원이 될 수 있습니다.>
엘은 통지서를 과감하게 찢어버렸다. 그것은 이제 한낱 종잇조각에 불과했다. 엘은 문을 잠그고 자동차에 올라탔다. 운전석에 앉아 있던 와이가 엘을 가볍게 껴안고는 지체 없이 엑셀을 밟았다. 그들은 어디로든 갈 수 있었다.
한다진 (한지혜)
외로웠고 외롭고 외로울 테지만, 시간이 흐른다는 것은 기억해야 할 일들이 늘어나는 것. 흐릿한 기억들을 붙잡느라 외로워하는 일에는 좀 게을러지기를.
2018/10/30
1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