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 언니에게 3년 만에 연락이 온 건 폭염주의보로 외출을 자제하라는 8월의 첫 주말 아침이었다. 나는 엄마와 거실에 앉아 싸우고 있던 중이었다. 다음 주 아빠 제사에 양갱을 올릴 것인가로 출발한 이야기는 누가 양갱을 제사상에 올리냐는 내 타당한 주장을 엄마가 내 남편 제사상인데 내 맘대로 할 거라는 주장으로 묵살하며 말싸움으로 번졌다. 그럴 거면 그냥 제사를 지내지 말자는 내 두 번째 주장에 힘을 싣기 위해 ‘해 준 것도 없는 인간한테 밥상을 차려 주고 싶은가’를 제시했지만 엄마는 ‘그래도 네 아빠잖아.’라는 한마디로 내 화를 부채질했다. 엄마 옆에 앉아 있던 동생도 ‘누나, 말 좀 예쁘게 해.’라며 엄마를 거들었다. 엄마는 동생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기세등등하게 ‘그래! 그래도 네 아빠잖아.’라고 재차 강조했다. 그리고 작년에도 첫 제사 잘 지내놓고 이제 와서 왜 그러냐고 타박했다.
   내가 대꾸도 못 하고 씩씩거리기만 하는 그 타이밍에 J 언니에게 전화가 온 것이다. 언니는 마치 어젯밤에도 연락을 주고받았던 사람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지금 나올 수 있냐고 물었다. 내 화는 엄마가 아니라, 죽고 없는 아빠의 제사상도 아니라 언니에게로 옮겨갔다. 그런데 언니가 ‘카니보’로 와 줄 수 있겠냐고 물어본 순간 놀라운 속도로 화가 가라앉았다. 카니보는 언니와 내가 한 달에 한두 번씩은 술잔을 기울이던 수제 맥줏집이었다.
   집에서 카니보가 있는 성수동까지는 지하철로 한 시간 반. 가겠다고 말해놓고 양치질을 하는 내 뒤통수에 대고 엄마가 한 소리했다.
   “올 때 양갱 좀 사 와.”
   가라앉았던 화가 다시 치밀었다.
   “양갱은 팥이잖아. 팥을 누가 제사상에 올려? 아무것도 해 준 게 없는 인간 후식이라도 챙기고 싶어?”
   엄마는 대답 대신 티비 볼륨을 높였다. 대신 동생이 엄마의 대답을 거들었다.
   “누나, 팥 들어간 거 말고 밤 들어간 양갱으로 사 와. 그럼 제사상에 올릴 수 있어.”
   나는 신발을 신으며 이를 악물었다. 내가 사 오나 봐라. 양갱 따위.

*


   지하철 냉방이 너무 거세서 역에서 내렸을 때 후끈한 열기가 오히려 반가웠다. 오후 다섯 시 반. 나는 지하철을 타고 서울로 올라가는 내내 언니를 생각했다. 언니는 3년 전에 감쪽같이 내 인생에서 사라졌다. 나뿐만 아니라 주변에 ‘쉬다 올게’라는 연락을 돌리고는 정말 물이 증발한 것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언니에게 전화를 걸어봤자 ‘수신이 차단된 번호입니다.’라는 안내 음성만 나올 뿐이었다. 언니는 카카오톡으로 건넨 내 안부 인사와 걱정을 하나도 읽지 않았다. 메시지가 140개쯤 쌓였을 때 나는 연락도 그만두었다.
   대학 졸업식장에도 나타나지 않았던 언니의 행방을 두고 여러 가지 추측이 쏟아졌다. 동기들은 유럽 여행이라 했고 누군가는 템플스테이라고 했다. 언니와 함께했던 천문학 동아리 ‘골디락스’ 사람들은 별 본다고 시골 어딘가에 칩거하는 거 아니냐는 우스갯소리를 했다. 나는 그때마다 언니가 비구니가 되어 유럽 어딘가에서 목탁을 두드리거나 수녀가 되어 묵주를 들고 시골 어딘가에서 별을 보고 있는 상상을 했다. 아무것도 언니와 어울리는 게 없어 상상하기도 그만두었다.
   상상을 그만둔 다음에는 화가 났다. 4년의 대학 생활을 함께 하며 쌓인 나와의 인연을 가볍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 다음은 언니에게도 어쩔 수 없는 일이 있어서 그랬을 거라는 이해였고 그다음은 망각이었다. 취업을 하자 언니를 기억하는 일도 힘에 부쳤다. 한 차례 이직하는 동안 언니와의 카카오톡 채팅방은 다른 사람들에게 밀리고 밀려 제일 하단으로 가라앉았다. 유일하게 딱 한 번 언니를 떠올린 적이 있는데, 아빠의 장례식장에서였다. 하지만 분노와 희열, 슬픔, 어쩌면 억울함 그 어딘가에 위치한 어중간한 감정을 다스리면서 언니에게 연락을 할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3년 만에 만나는 언니가 몰라보게 달라져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취업 준비생 시절을 지나 1년간 블랙 기업에서 처절하게 구르며 이직을 해서 사회 초년생 꼬리표까지 떼었다. 아빠의 첫 제사 내내 처음이니 밥 차려 준다는 아량까지 베풀 사회인이 되었다. 그런데 언니는 3년 전 사진에서 언니만을 쏙 꺼낸 것처럼 그대로였다. 한마디 따끔하게 한소리 하고 싶었지만 언니의 모습을 보자마자 그 의욕도 사라졌다.
   “덥지.”
   질문인지 그냥 하는 말인지 애매모호하게 끝을 내려서 말하는 목소리까지 그대로였다. 가게도 그대로였다. 이게 대체 얼마 만이냐며 인사를 건네는 사장님과 주방에서 풍기는 고소한 튀김 냄새까지. 대학 시절 내내 언니와 나는 주방 앞의 바에 앉아 아르바이트로 번 금액의 대부분을 카니보에서 탕진했다. 네 캔에 만 원짜리 편의점 맥주와 한 잔에 팔천 원쯤 하는 수제 맥주를 저울질할 때마다 술에 쓰는 돈은 아끼지 말아야 한다는 언니의 주장 때문에 언제나 저울은 한쪽으로 기울었다. 언니의 주장은 카니보 사장님이 우리를 두 번째 방문에서 단골이라 판단할 수 있게 해주었다. 여자 둘이 세 시간 동안 맥주 십삼만 원, 안주 팔만 원을 해치운 기록은 언니와 내가 골디락스 해체를 선언하던 날 동아리 사람들 세 명을 데려와 맥주 이십만 원, 안주 십만 원의 기록으로 갈아치웠다.
   “뭐 하고 지냈니.”
   언니의 질문을 듣고 별안간 기분이 나빠졌다. 뭘 하고 지냈냐는 물음은 내가 할 질문이지 언니가 꺼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나는 대답 대신 사장님이 가져다준 메뉴판을 넘기며 여기는 정말 하나도 안 변했다고 말했다.
   카니보에는 여덟 가지의 수제 맥주와 그에 어울리는 안주를 몇 가지 팔았다. ‘카니보’라는 이름에 어울릴 만큼 육식을 위주로 한 안주밖에 없었다. 언니와 나는 종종 피자 한 판에 맥주 서너 잔을 마셨다. 피자가 아니면 새우와 감자튀김을, 고기가 먹고 싶은 날에는 스테이크를 시켰다. 주방을 마주하고 있는 바에 앉아 기름 냄새를 맡고, 조리도구가 서로 부딪치는 소리를 듣고 있으면 통장에 남은 돈 따위는 이미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내가 카니보를 좋아하는 이유는 나라는 사람의 취향을 온전하게 알게 해 준 가게였기 때문이다. 나는 꼭 페일 에일에 홉을 다량으로 넣어 쓴맛과 묵직한 향을 내는 인디아 페일 에일을 시작으로 커피 향이 많이 나는 스타우트 흑맥주를 마지막 잔으로 마셨다. 언니는 나와 다르면서도 비슷했다. 언니는 생유자 껍질을 넣어 유자 향이 나는 부드러운 벨기에식 화이트 에일로 시작해 마지막은 나처럼 스타우트 흑맥주로 끝냈다. 메뉴판의 번호로만 쓴다면 나는 2-2-8이고 언니는 4-4-8인 식이다. 가끔 새로 들어온 맥주를 시음해도 결과는 2-2-8과 4-4-8이었다. 그래서 나는 언니가 사장님에게 ‘8번 하나 주세요.’라고 말했을 때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벌써 두 잔 마셨네.”
   언니는 깔깔거리며 웃었고 사장님은 2번과 8번을 가득 채운 잔을 가져다주었다.

*


   “그래도 너한테만 연락한 거야.”
   언니는 안주로 시킨 새우튀김 위에 레몬즙을 뿌리며 말했다. 그리고 내 접시에 새우튀김을 놓아주었다. 언니는 언제나 주변 사람들에게 음식을 덜어주고 자신의 몫을 챙겼다. 꼭 음식 앞에서는 본인보다 주변을 챙겨서 원체 다정한 성격인 줄 알았는데 그건 버릇이었다. 같은 상황을 무수히 반복해서 만들어진 습관이기도 했고, 오랫동안 반복해서 몸에 익어버린 행동이기도 했다. 언니의 이런 행동이 첫째이기 때문에 만들어진, 본인이 원하지 않았지만 그렇게 된 버릇이자 습관이라는 걸 알게 된 후부터 나는 언니가 음식을 나누어 줄 때마다 잠자코 받기만 했다. 첫째, 심지어 장녀이기 때문에 만들어진 버릇이나 습관은 다시 태어나지 않는 이상 절대 고쳐지지 않는 것이라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다들 잘 지내니.”
   나는 새우튀김을 한 입 먹고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언니와 나밖에 없던 카니보에는 사람이 많이 들어와 북적거렸다. 언니가 물어보는 질문은 당연히 골디락스 사람들의 안부다. 하지만 대답할 수 없었다. 골디락스를 해체하며 같이 본 초승달이 보름달이 되었다가 다시 초승달이 되기를 수백 번 반복했지만 언니의 행방이 묘연해진 이후로 다들 연락도 뜸해졌다. 화성과 금성이 우주 내 생명 거주 가능 구역인 골디락스 존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지만 생명체를 발견하지 못한 것처럼 다들 그 아슬아슬함으로 연결되어 있던 것뿐이었다. 애초에 동아리도 대학 생활하며 추억이나 만들어보자 하고 결성했던 것이었고, 그 많은 동아리 중에 유일하게 천문학 관련 동아리가 없어서 신청했던 것뿐이었다. 이런 게 낭만이지 하며 웃던 언니는 이력서에 한 줄이라도 추가할 것이 있을까 해서 들어온 사람들에게 미안해했고, 그만큼 술을 많이 마셨다. 카니보라는 이름의 동아리였다면 동아리 개설 목적을 달성했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졸업하고 취업하면서 다들 뜸해졌지 뭐. 내가 제일 마지막으로 취업했거든.”
   “어머, 취업했구나. 축하해.”
   언니는 깔깔거리며 웃었다. 취업난이라던데 대단하네. 언니는 벌써 맥주잔을 반이나 비우고 있었다. 3잔째가 되면 취기가 오르는 모습까지 정말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왜 연락 안 했어?”
   “그냥.”
   언니의 대답에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언니의 그냥은 그냥이 아니다. 설명할 것이 너무 많으면 언니는 언제나 ‘그냥’이라고 말했다. 그러면 질문이 갖고 있던 목적은 증발하고 아무런 이유가 없기 때문에 받아들여야 한다는 결론만 남는다. 그러다 한참이 지나고 나면 ‘그냥’의 이유를 ‘어쩌다’ 찾게 된다. 이를테면 언니가 장녀이기 때문에 갖게 된 어쩔 수 없는 버릇을 알게 되던 것처럼. 그래서 나는 언니의 ‘그냥’이 좋았다. 언니의 ‘그냥’은 대부분 내가 겪어 왔던 장녀의 삶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이번에도 언젠가 이 ‘그냥’에 대한 이유를 찾게 될 것 같았고 그래서 웃음이 났다.
   “난 여행 다녔어.”
   “다들 언니가 유럽 여행이나, 템플스테이…… 뭐 그런 거 간 거 아니냐고 하더라. 그래서 난 언니가 비구니가 된 상상도 해봤어.”
   언니는 또 깔깔거리며 웃었다.
   “엉뚱한 상상 하는 건 여전하네. 비구니라니, 너무 웃긴다.”
   “정말 종교에 귀의라도 한 줄 알았어. 언니 정말 너무한 거 알아? 어쩜 연락을 한 번 안 해?”
   언니는 맥주를 단숨에 마셨다. 안주가 이만큼 남았는데 4-4-8을 끝냈으니 또 4-4-8이다. 사장님이 4번 맥주를 언니 앞에 놓을 때까지 언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때 갔었거든. 장례식. 근데 도착하니까 발인 날이라 그냥 멀리서 보기만 했어. 미안해.”
   언니는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아버지 장례는 작년이었다. 작년 이맘때. 언니는 사과를 연습하기라도 한 사람처럼 미안하단 말을 되풀이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멀리서 상복 입고 서 있는 걸 보는데 이상하게 후련해 보였어.”
   말을 마친 언니는 화장실을 다녀온다며 자리를 비웠다. 바에 앉아있을 때, 가장 좋은 건 혼자 남겨져도 사장님이 말을 걸어준다는 점이다.
   “뭐 하고 지냈어요? J 씨는 3년 동안 여행 다녀왔다던데. 미국.”
   나는 또 불쾌해졌다. 미국이라니. 정말 난데없는 이야기였다.
   “언니가 삼 년 만에 연락했거든요. 그래서 왔어요. 그동안 회사 다니느라 바빴죠.”
   사장님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어떤 회사냐고 물었다. 그리고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다른 테이블 호출을 받고 자리를 비웠다. 사장님은 언니와 왜 그간 연락을 주고받지 않았는지 물어보지 않았다. 언니는 내가 카니보에 도착하기를 기다리며, 맥주 두 잔을 비우며 3년간의 행적을 말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자 불쾌하던 기분은 허탈해졌다. 아빠 장례식장에 왔다는 말도 기가 막혔고, 상복을 입고 있던 나를 보고도 아는 척하지 않았던 무심함이, 내가 알던 언니가 아닌 것 같아서 허탈했던 기분이 다시 불쾌함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언니가 자리로 돌아오자마자 미국은 왜 갔는지 물었다.
   “그냥.”
   나는 앞에 놓인 맥주를 전부 들이켰다. 맥주는 여전히 맛있었고, 언니의 그냥은 여전히 그냥이라 이제 와서 그동안의 부재에 화를 내자니 전부 다 의미가 없어진 것 같았다.
   “장례식은 어떻게 알고 왔었는데?”
   “학과 전체 문자 와서 알았지. 이거 지금이라도 주고 싶은데 받아줄래.”
   언니가 주섬주섬 가방을 열어 봉투를 꺼냈다. 언니의 이름이 쓰인 흰 봉투를 보고 다시 사장님을 불러 2번을 한 잔 더 시켰다. 사장님이 맥주를 가져다주는 사이 언니는 자꾸만 봉투를 내 손에 쥐여 주었다. 받을 생각도 없었고 받고 싶지도 않았다. 언니는 결국 봉투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내가 후련해 보였어?”
   “밀린 숙제 다 하고, 발표까지 잘 끝낸 후련한 표정이었어. 우리 처음 같이 수업 들었던 교양수업. 그때 생각이 났어.”
   언니와 친해진 건 우리 둘 다 장녀의 숙명을 타고났기 때문이었다. 한국 가족문화의 이해라는 교양 수업에서 나는 장녀는 살림 밑천이란 말이 왜 나왔는지 발표를 했다. 발표가 끝난 다음 언니가 나를 불렀다. 발표에 대해 무어라 첨언이라도 하는가 싶어 잔뜩 긴장했는데 언니는 대뜸 이렇게 말했다. 나도 살림 밑천이야.
   살림 밑천이 살림 밑천을 만나 그간 쌓인 억울함을 풀고 풀었는데, 대부분 언니는 내 억울함을 들어주기만 했다. 하지만 누군가 장녀이기 때문에 받은 차별을 물어본다면 갑자기 또 애매해졌다. 엄마는 최대한 공평하게 사랑하려고 노력했고, 난 첫째라는 이유로 동생이 태어나기 전까지 그 수혜를 온전히 누릴 때도 있었다. 그래서 살림 밑천이라 말하기 애매해지는 그런 때가 오면 언니는 항상 첫째라 누린 수혜 때문에 평생을 살림 밑천으로 살아야 한다면 무엇이 더 억울한지 생각해보라고 했다.
   나는 ‘네가 누나니까 참아야지. 네가 누나니까 이해심이 많아야지.’라는 말을 끔찍하게 생각했고 언니는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라는 말을 싫어했다. 그리고 우리는 부모가 너무도 당연하게 생각하는, 자신들이 죽고 나면 동생을 살뜰히 챙겨달라는 무언의 압박을 죽도록 싫어했다. 성실하고 멀쩡하게 잘살고 있는 성인 남성이 부모 눈에는 어디 하나 부족하고 모자란 아들로 뒤바뀌고 그 간극을 채우는 건 장녀, 살림 밑천일 뿐이라는 내 발표 내용은 증거자료가 부족하고 논리가 없다는 이유로 많은 이들의 반박을 샀지만 언니에게는 아니었다. 다들 언니가 발표한 ‘여동생 네 명과 막내 남동생 한 명을 둔 첫째의 초, 중, 고 시절 일과표’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우리 둘 다 살림 밑천이 싫으면 그 무게를 무시하면 그만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결국 우리는 장녀이기 때문에 부모, 특히 엄마를 완전히 이해해서 사랑하려고 발버둥 쳤다. 4학년 1학기, 중간고사를 끝내고 언니와 찾은 카니보에서 우리는 만취한 상태로 아들은 아들이라 자랑스럽지만 딸은 그렇지 않다고 외치다가 결국 엄마도 엄마가 처음이라 아무것도 몰랐다는 이유로 엄마를 이해했고 또다시 사랑했다.
   사장님이 다시 가져다준 8번 맥주잔의 표면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테이블로 떨어졌다. 물방울은 언니가 가져온 흰색 봉투 끝에 닿을 듯 말 듯 아슬아슬했다.
   “우리 집. 제사 없던 집안인데 아빠 죽더니 갑자기 제사를 지내자고 해. 멋대로 집 나가서 뭐 하고 살았는지도 모르는 인간 제삿밥은 챙겨주고 싶나 봐.”
   언니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웃었다.
   “미국에서는 제사 안 지내서 좋더라. 그냥 묘지 가서 인사하고 오면 끝이던데. 땅이 넓은 나라라 그런가, 묘지가 얼마나 넓은지 몰라. 봉분도 없어서 찾기도 힘들어.”
   “묘지나 보러 3년이나 미국에 가 있었어?”
   언니는 또 웃었다.
   “어머, 그렇네. 3년 동안 묘지나 봤네.”
   나는 누구의 묘지인지 물어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누구의 묘지인지, 왜 묘지나 봤냐고 물어보면 언니가 또 ‘그냥’이라고 대답할 것 같았다.
   “그래도 별은 많이 봤어. 평생 볼 수 있는 별을 거기서 다 보고 왔어.”
   우리는 감자튀김을 추가로 주문하고 맥주도 다시 주문했다. 슬슬 술기운이 올라와 점점 더 말이 많아졌다.
   “언니, 난 전등 스위치를 끄는 것처럼 사람이 죽으면 모든 게 단숨에 끝나는 줄 알았거든?  아니더라. 죽고 나서 해야 할 일이 더 많았어. 여름이라 더워 죽겠는데 상복을 벗을 수도 없고. 직장 동료들이 다 와줬는데 인사하면서 땀을 얼마나 흘렸는지 몰라. 내 표정이 후련했다면 그건 조금만 참으면 상복을 벗을 수 있어서 그랬던 걸 거야.”
   언니는 그때를 생각하는지 지그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공항 내려서 깜짝 놀랐다니까. 너무 더워서.”
   언니가 고마운 건 아빠의 죽음이 나의 인생에 그 어떤 영향도 끼치지 않는다는 걸 알아주기 때문이었다. 납골당으로 아버지의 유골함을 들고 가는 동생의 뒤를 따르며 나는 이 모든 일들이 내 삶을 잠시 스치고 간 단순한 헤프닝에 불과한 작디작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아빠가 멋대로 집을 나간 이후로 가족들이 겪은 고통을 생각하면 분통이 터졌지만 그것도 다 끝이었다.
   “회사는 어때?”
   언니는 술기운이 돌면 질문을 의문형으로 제대로 말해주었는데 나는 그게 또 3년 전과 다름이 없어서 실실 웃음이 나왔다. 언니의 지난 이야기를 톡톡히 듣겠다고 왔지만 정작 예전과 다름없이 내 이야기를 하게 된 점에도 웃음이 났다.
   “21세기에 믿을 수 없겠지만, 상사가 컴퓨터를 정말 제대로 쓸 줄 몰라. 모든 일을 수작업으로 해. 그래서 별명이 원시인이야. 후배는 별명이 예수님이야. 평일에는 다 죽어가는 얼굴로 앉아있는데 금요일엔 팔팔하게 살아나서. 일 못 한 부분을 지적하면 다른 사람도 그렇게 생각하는지 물어보겠다면서 원시인을 찾아가. 그래서 나는 원시인과 예수님 사이에서 진지하게 퇴사를 고민 중이지.”
   언니는 박수까지 치며 웃더니 그런 이상한 사람들이 있어야 세상이 정상적으로 돌아간다는 뜻 모를 대답을 했다. 하지만 언니의 대답을 듣고 있으니 어쩐지 원시인 상사와 예수님 막내가 있어야 회사가 제대로 돌아갈 것 같다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언니는 앞에서 바삐 오가는 사장님을 보더니 ‘다른 사람도 그렇게 생각하는지 물어보자.’고 했다.
   “사장님. 세상엔 이상한 사람 참 많은 것 같죠?”
   사장님의 대답은 짧고 명쾌했다.
   “그래도 그런 이상한 사람들이 있어야 내가 잘살고 있다고 알죠.”
   언니는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명언이라며 박수까지 쳤다.
   “아빠 묘지를 보는데 내가 아주 잘 살았다는 생각이 들더라니까. 이런 이상한 사람이 있어서 내가 정상적으로 자랄 수 있던 거지. 그치? 처음엔 화가 났는데, 그렇게 애지중지 키운 아들 다 크는 것도 못 보고 죽었다고 생각하니까, 그게 우스웠어.”
   언니는 자신의 집안 사정에 대해 말을 아꼈다. 여동생 네 명과 막내 남동생이라는 가족 구성원 이야기만 꺼내도 어떤 집안 환경인지 대번에 유추가 가능하기 때문은 아니다. 열여덟 살 차이 터울의 남동생이 감기에 걸렸다는 이유로 고등학교 졸업식에 참석하지 못했거나, 자식 여섯 명을 먹여 살리느라 바쁜 부모님 때문에 수학여행을 비롯한 학교 행사에 매번 결석해야 하는 이유 때문도 아니다. 이야기를 시작하면 해야 할 말이 많기 때문에 ‘그냥’이라는 말로 모든 이야기를 함축해야 했을 뿐이다. 그래서 나는 언니의 집안 사정을 구멍 난 천 조각을 기워내듯 얼기설기 조립해서 알고 있는 것밖에 없다. 언니가 톨스토이가 쓴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 “행복한 가정은 서로 닮았지만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를 격언처럼 읊을 때처럼. 미국에 있던 3년 동안 묘지를 보고 왔는데 그것이 아버지의 묘지라는 것에서 나는 또 언니가 ‘그냥’ 여행을 다녀온 게 아니라는 사실을 얼기설기 조립한 언니의 삶에 덧댔다.
   “얘, 난 대학교 방학이 너무 길어서 싫었어. 방학 때는 아르바이트도 하고 동생도 봐야 하니까 끔찍했거든. 학교 다닐 땐 집안일에서 해방이었으니까. 그것도 내가 집안 뒤집어 놓고 나서야 가능했던 거지만. 대신 보험처럼 이런저런 조건이 붙었지. 아르바이트 비용 절반을 집에 준다는. 한번은 그게 너무 싫어서 세상에서 제일 형편없는 이유로 돈을 다 써버리고 싶었어. 그게 술값이었지. 아빠가 제일 잘하던 게 술주정인데, 술만 마시면 기집년한테 돈 써봤자 다른 집 밑구멍으로 들어간다고 했거든.”
   나는 또 이렇게 술에 쓰는 돈은 아끼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던 언니를 이해하게 되었다. 언니의 말을 듣고 있자니 내가 꺼낸 원시인이니 예수님이니 하는 이야기의 무게가 얄팍한 것 같아 민망했고, 동생이 한 명밖에 없어서 또 민망했다. 언니는 나를 빤히 보더니 실실 웃었다.
   “넌 꼭 네가 당한 것처럼 억울한 표정을 짓더라. 골디락스 이름 정할 때도 그랬지.”
   ‘골디락스’이라는 이름은 천문학 동아리라는 뜻에 맞게 우주와 관련된 이름을 쓰고자 해서 우주 내 생명 거주지를 의미하는 ‘골디락스 존’에서 따왔다. 하지만 언니와 나에게는 ‘골디락스와 세 마리 곰’ 이야기에서 가져왔다고 하는 편이 더 정확했다. 숲속 어느 집에 살고 있는 아빠 곰, 엄마 곰, 아기 곰이 산책을 나간 사이 골디락스라는 소녀가 찾아온다는 영국의 전래동화다. 골디락스는 배가 고파서 곰들이 점심으로 만들어 놓은 수프를 먹게 된다. 하지만 아빠 곰의 수프는 너무 뜨거웠고, 엄마 곰의 수프는 차가웠다. 아기 곰의 수프는 딱 알맞은 온도라서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이런 적당하고 알맞은 상황에 빗대어 ‘골디락스 존’의 개념이 탄생했고 지구상의 생명체들이 살아가기에 적합한 환경을 지니는 우주 공간의 범위를 설명할 때 쓰이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동아리 결성을 앞두고 언니와 카니보에서 맥주를 기울이며 골디락스가 먹어버린 뒤에 빈 접시만 핥게 된 아기 곰의 안부를 걱정했다. 그때 언니는 피자 한 조각을 내 접시 위에 올려주며 엄마 곰이 아기 곰에게 동생이 생겼으니 양보해야 한다고 설명해주고 아기 곰도 그것을 납득했을 거라 대답해주었다.
   “아들은 넓은 세상을 봐야 한다면서 그 어린 것 끼고 여행 갔는데 거기서 심장 발작이 와서. 갑자기 비명횡사했지 뭐. 원래 화장하고 유골을 한국으로 가지고 와야 했는데, 그냥 거기에 묻어버렸어.”
   언니는 휴대폰으로 지도 앱을 켜고 묘지 위치를 보여주었다. 캘리포니아에 있는 로즈 힐 메모리얼 파크는 언니 말대로 봉분도 없는 넓은 평야처럼 보였다.
   “네 아버지 장례식 때문에 한국에 왔던 기간 빼면 매일 여기를 오갔어. 한국으로 돌아가면 영원히 찾지 않을 거니까. 나, 불법체류자로 거기에 있었거든. 이제 미국 못 가.”
   언니는 남은 맥주를 털어 넣고 입을 닦았다.
   “적어도 십 년은.”
   처음에는 불법체류자가 될 생각이 없던 언니는 90일간의 미국 체류 기간을 지키려고 했다. 하지만 상복을 입은 날 보고 기꺼이 불법체류자가 되겠다고 다짐했다고 말하는 언니의 표정은 후련해 보였다.
   “미국, 어땠어?”
   “날씨는 좋더라.”
   나는 테이블 위에 놓인 봉투를 집어 가방에 넣었다.
   “안 받을 줄 알았는데.”
   자리에서 일어나 카운터로 향하며 언니를 향해 말했다.
   “그냥.”

*


   사장님은 우리에게 앞으로 종종 놀러 오라며 입구까지 나와 손을 흔들어주셨다. 언니는 그 인사를 늘 그렇듯, 다음에 또 온다는 인사로 받았다. 여전히 3년 전에서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언니는 지하철역으로 가는 내내 덥다는 말만 중얼거렸고 나는 미지근한 여름 바람에 흐르는 땀을 손등으로 훔쳐냈다. 뚝섬역에서 나는 내선순환 방향으로 가야 했고 언니는 외선순환선을 타야 했다. 언니는 막내가 학부모 참관 수업 때 늙은 엄마보다 예쁜 큰 누나가 왔으면 좋겠다는 소원을 빌었기 때문에 여전히 가족들과 함께 산다고 했다. 나는 개찰구에 교통카드를 찍고 들어가는 언니를 향해 물었다.
   “언니. 아빠 제사를 지내는 게 좋을까?”
   “하게 될걸.”
   언니의 대답에 나는 바보같이 패배자가 됐음을 인정해야 했다. 나는 언니의 집안이 얼마나 불행한지 잘 모르지만 언니 개인의 불행은 잘 알고 있다. 언니도 내 아빠가 얼마나 나쁜 인간이었는지는 잘 모르지만 내가 겪은 불행은 잘 안다. 그 불행은 적당하고 알맞은 상태의 골디락스 존을 위해 자신의 수프를 희생한 아기 곰에게도 있다. 아기 곰은 골디락스가 배부를 수 있도록 매일 수프를 양보했고 앞으로도 계속 양보할 예정일지도 모른다. 그래야만 이 넓은 우주에서 생명체가 살아가기 적합한 유일한 행성, 지구가 존재할 수 있다면.
   지하철이 플랫폼으로 들어오는 소리가 들리자 언니는 빠르게 계단을 올라갔다. 나는 언니의 뒤통수에 대고 외쳤다.
   “언니, 하나만 더 물어볼게. 제사상에 양갱 올리는 건 법도에 어긋날까?”
   언니의 대답은 내가 막 내선순환 열차를 탔을 때, 카카오톡으로 왔다.
   ‘밤 양갱이면 괜찮을걸?’

*


   나는 지하철역에서 내리자마자 근처의 편의점을 전부 돌아다녔다. 몇 군데 편의점을 돌고 돌아 팥 양갱과 밤 양갱을 하나씩 골랐다. 가방을 열어 지갑을 꺼내려는데 언니가 준 봉투가 손에 잡혔다. 만 원짜리 열 장. 그리고 더 작은 봉투가 있었는데 거기엔 빳빳한 오만 원짜리 두 장이 메모지와 함께 들어 있었다. 단정한 필체로 쓰인 ‘3년 치 생일 선물.’이라는 글자를 보고 이 돈은 다음번에 카니보에서 써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만 원짜리 한 장을 꺼내 양갱을 샀다. 엄마와 동생이 안 사 올 것처럼 굴더니 결국 사 왔냐고 한소리를 하면 ‘그냥’이라고 대답할 준비를 하면서.

이세은

하루를 위로하고 싶을 때는 맛있는 술. 잠들기 전 위로가 필요할 때는 소설 한 편. 하지만 거창한 위로가 필요할 때는 할 줄 아는 게 없어 글을 씁니다.

2019/08/27
2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