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김의 구멍
이건 김이라는 성을 가진 남자의 이야기야. 그리고 구멍에 관한 이야기. 난 거의 삼 년 만에 김의 구멍에 대해 떠올렸는데 만약에 그날 혼자 술을 마시지 않았다면 구멍 따위는 생각하지도 못했을 거야. 가끔씩이나마 추억하던 건 김이었지, 구멍이 아니었거든.
응, 전혀 아니야.
왜? 잘 몰라.
그 남자와는 별 계기도 없이 헤어졌어. 그 뒤론 연락을 받은 적도 없다니까. 내가 김에 대해 무슨 생각을 했겠어? 그렇고 그런 이유들밖에 더 있었겠어? 더구나 난 김의 구멍에 새끼손가락 하나 넣어본 적도 없단 말이야.
부활절이 가까웠던 날이었던 것 같아. 뭐 교회에서 하는 행사 있잖아. 십자가에 매달려 죽은 사람이 삼일 만에 살아났다는 날. 일요일은 아니었어.
그 술집은 일요일에 문을 닫거든.
가로등이 켜지고 있었어. 아스팔트가 검었고. 난 길이 축축하다고 생각했어. 낮 동안 아주 짧게 비가 내렸고 기분은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어. 나는 어떤 기분이랄 것도 없이 약간 축축한 채로 멀리 있는 것들을 보며 걸었어. 집에서 나온 지 십 분도 지나지 않았는데, 팔이 늘어졌고 손가락에도 힘이 없었지. 어쩌면 낮에 먹은 두통약 때문이었는지도 몰라. 슬리퍼가 발가락에서 깔짝거렸고 작은 비 웅덩이를 피하지 않고 밟았을 땐 물방울이 튀어서 청바지 밑단이 죄다 젖었어.
아니야. 별 생각 없이 발을 디뎠을 뿐이야.
발을 내디딜 때마다 왼쪽 주머니에선 지갑이, 오른쪽 주머니에서는 휴대폰이 실룩거렸어. 쓸데없이 두툼하고 커다란 것들. 바지에 튄 물방울을 털어내며 열 발자국 정도 떨어져 있는 버스 정류장을 쳐다봤지. 버스에서 내린 사람들이 지나가며 힐끗 나를 보는 것 같았는데 아무 의미 없는 눈길이었어. 내 두 다리가 거대하게, 그러니까 청바지 주머니에 꽂혀 있는 것들이 거대하게 느껴졌어. 버스가 섰다가 갈 때마다 허벅지가 무겁게 늘어지고 있는 느낌.
오 분쯤 아니 십 분쯤.
그래, 난 버스를 타고 싶었던 건지 몰라. 그걸 타고 어디든 가고 싶었는지도 몰라. 그런데 바지 밑단이 젖어버렸다니까. 낡아빠진 슬리퍼를 신고 있었어. 그 상태로 어딜 가나.
인정한다고. 가야할 곳도 날 찾는 이도 없었지. 한참이나 없었어.
그렇게 걸음을 떼지 못하고 있을 때 어떤 여자애가 다가왔어. 삶은 달걀이 담긴 라탄 바구니를 들고서.
여자애는 조그만 입술로 조잘거렸어. 소리로 치자면 듣기 싫은 소리가 아니었지만 부활이니 죄를 대신해 주었다느니 하는 말은 알아들을 수 없었지. 여자애의 뒤쪽으로 대여섯 명의 일행이 보였고 나는 약간 어리둥절한 상태였어.
다들 이십대 초반으로 보였어. 남자애들은 양복을 여자애들은 원피스를 입고 있었지. 그 여자애도 스무 살 가량으로 보였고 원피스를 입고 있었는데, 그게 좀, 좀 그랬어.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은 아이들이었어. 제 나이에 맞지 않게 입었다는 의미는 아니야.
나는 달걀을 받았어. 따뜻한 달걀은 아니었지. 차가웠고 매끈매끈했어. 달걀엔 비닐이 씌워져 있었고 비닐엔 알록달록한 색으로 글자가 적혀 있었어. 예수 다시 사셨네. 여자애는 계속해서 조잘거렸고 그 조잘거림엔 정해진 리듬이 있는 것처럼 반복되는 구절이 있었는데 발간 뺨과 까맣게 반짝이는 눈동자 때문에, 어쩌면 달걀 바구니와 원피스 때문에 목가풍 사랑 이야기를 듣는 것 같기도 했지. 한결같은 결말로 끝나는 사랑 이야기. 노래가 끝나가는 것처럼 여자애의 목소리가 작아졌어.
목소리는 점점 작아지더니 결국엔 눈앞에서 윙윙거리는 하루살이 떼의 날갯짓보다 더 작게 들렸지. 어쩐지 무안해져서 나는 오른쪽 귓구멍을 한번 쑤셨어. 귓구멍을 만지다 귓불도 한번 만져봤지. 그러고 알았지. 피어스 한 개를 잃어버렸다는 걸.
보여줄게, 난 이쪽 귀에 피어싱을 두 개 했거든.
1.2밀리미터. 제일 얇은 걸로 뚫었더랬지.
곧바로 잃어버린 피어스를 생각하진 못했어. 그들 일행이 서로서로 닮은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어. 달걀에 씌워진 비닐 같은 옷을 입고서 말이야.
거기서 벗어날 생각으로 나는 술집 문을 열었어. 정류장을 마주보고 있는데다 건물 1층에 있는 널찍한 일본풍 펍은 우리 동네에서 알아주는 술집이었지.
음악 소리가 컸고 조도가 낮은 조명 때문에 어둑했어. 혼자 앉아 있는 사람이 있어서 그와 한 테이블 떨어진 곳에 앉았어. 흰 머리가 많은 남자였는데 창을 향해 앉아 소주를 마시고 있었지. 나도 남자처럼 창밖을 보며 맥주를 마셨어. 창밖엔 가로등 불빛이 있었고 검은 아스팔트가 있었고 달리는 버스가 있었고. 테이블 위엔 베이컨숙주볶음과 식어가고 있는 정종. 휴대폰과 지갑. 그리고 달걀.
먹지 않았어. 그저 테이블을 굴러다니는 걸 지켜봤지.
지켜보다가 달걀이 테이블에서 떨어지려고 하면 손가락으로 막았지. 손가락으로 막으면 달걀은 또 굴렀어. 스피커가 바로 위 천장에 달려 있어서 귀가 아팠는데 아는 노래도 없더라고. 일정한 트랙대로 세 번 정도 반복되는 동안 흰 머리 남자가 갔어. 익숙해질 만도 된 것 같은데 귀가 계속 아프더라. 결국 귓구멍을 만지작거리다가 굴러가는 달걀을 막지 못했어.
아니, 깨뜨리진 않았어.
아슬아슬하게, 떨어지는 걸 손바닥으로 받았어.
그래, 귀를 만지다가 한발 늦었던 거지.
나는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 달걀을 쥐었다 놓았어.
물론 차갑고 매끈매끈했어. 그런데 손가락에 남아 있는 낯선 느낌.
나는 다른 걸 느끼고 있었어. 귓불에 있는 구멍 말이야.
응, 잃어버린 피어스가 있던 자리.
다시 더듬더듬 오른쪽 귓불을 만졌어. 말랑하고 따뜻하더라. 그건 여전히 내 귀였어. 아래쪽에 달린 피어스의 티타늄 볼도 그대로, 내 귀에 달려 있었어. 나사처럼 생겨서 곧잘 볼트 모양의 볼이 느슨해지곤 했지만 잃어버린 적은 없었지. 그런데 그보다 1센티미터 위쪽, 피어싱 구멍만 남아 있던 자리가 문제였어. 구멍으로 검지가 들어가버렸거든. 손가락을 대고 두어 번 문지르니까 쑥 들어가버렸다니까. 들어가기만 한 게 아니야. 귀 뒤로 손가락이 나오지도 않는 거야.
찢어진 게 아니라 구멍이었다니까.
그건 결코 1.2밀리미터짜리 구멍이 아니었어. 마음만 먹으면 손가락이 아니라, 쥐고 있던 달걀을, 잘만하면 달걀을 쥔 주먹까지도, 넣을 수 있을 것 같았단 말이야. 그 기분을 어떻게 말해야 할까.
맞아. 내 기분을 설명하려던 게 아니었지. 김의 구멍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한 게 맞아. 그래도 이건 얘기할래. 나는 비로소 사라진 피어스의 행방이 궁금해진 거야.
손가락은 들어갈 때처럼 쑥 나왔어. 검지에는 아무런 흔적이 없었지. 손톱도 말끔했어. 여전히 나의 손가락이었어. 나는 달걀을 테이블 위에 놓았어. 둥글게 달걀이 굴렀고 그때 떠오른 거야. 김이 말하던 구멍이.
김은 커다란 원목 침대를 가지고 있었어. 그런 걸 킹사이즈라고 하나 퀸사이즈라고 하나. 나는 중학생 때부터 십오 년이 넘도록 줄곧 싱글사이즈의 침대를 써왔기 때문인지 그 침대가 참 편하더라. 침대 머리가 단단하고 높아서 베개를 세우고 앉아 있기에도 좋았지. 김은 말수가 적은 편이어서 무얼 물어보는 일이 드물었고 내가 질문을 해도 길게 대답하는 법이 없었어. 섹스를 하고 나서도 별 말이 없었지. 나는 주로 침대 머리에 기대서 텔레비전을 보거나 푹신하고 넓은 침대 위에 드러누워 있거나 했지. 옆에 누운 김의 몸에 팔이나 다리가 닿으면 맨살끼리 닿는 느낌까지도 아늑했어.
그래. 침대 때문이 아니었을 거야. 그때는 잘 몰랐어.
그렇지만 다른 사람 옆에서 잠드는 건 쉽지 않아서 김의 집에서 밤을 보낸 날은 몇 번 없었어. 자매 없이 자란 나는 혼자 자는 데 익숙했고 작은 기척에도 민감했어. 생활이라는 게 그렇잖아. 그렇게 살다보면 그런 사람이 되어 있잖아. 대부분 자정이 되기 전에 김의 집에서 나와 우리 집으로 갔어. 자다가 몇 번이나 깨버리고 나면 다음날 두통에 시달리느라 회사에서 내내 정신을 못 차렸거든.
구멍에 대해 처음 듣던 날은 서너 번, 밤을 같이 보낸 뒤였어. 김이 불쑥 말을 걸었어.
“여기 좀 만져볼래요?”
우리 둘 다 잠들지 못하고 있었지. 수십 분째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지만 숨소리를 들으면 알 수 있잖아. 창에 걸린 블라인드 때문에 방안은 아주 컴컴했어. 깜짝 놀랄 만큼 낮은 목소리 때문에 긴장을 했었던 것 같아. 나는 숨을 죽이고 김의 손이 이끄는 대로 김의 배를 만졌어.
그냥, 배꼽이었어.
그것 말로 배에 뭐가 있겠어. 그런데도 김은 이렇게 묻는 거야.
“거기 구멍이 하나 있지요?”
나는 조심스럽게 김의 배꼽에 손가락을 넣었어. 배꼽이 남들보다 깊은 것 같기는 했어. 손마디 하나가 다 들어갈 정도로 움푹 패여 있었으니까 그걸 구멍이라고 표현하는가보다 생각했어. 뱃살 때문이었는지도 모르지. 당시에 서른일곱 살이었던 김은 아랫배가 나와 있었거든.
아니야. 옷을 입으면 드러나지 않았어. 오히려 수척해 보이는 쪽에 가까웠지.
김의 뱃살이 도독하게 손안에 잡혔어. 나도 모르게 입가의 긴장이 풀리면서 웃음이 나왔어. 볼이 홀쭉하고 항상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는 김의 얼굴과 뱃살은 전혀 어울리지 않았거든. 한마디로 영 딴판이었어. 그 얼굴에 반했던 나는 김이 옷을 벗을 때마다 침울한 코미디를 보는 것처럼 웃기더라. 소리 없이 웃으면서 나는 그렇다고, 당신 배에 뭔가가 있다고 답했어. 그리고 곧 김의 물음을 잊었어.
김을 알게 된 지 두 달 남짓 지나고 있었고 김에 대해 알고 있는 게 거의 없었지.
사 년 전, 봄에 만났어. 김은 내 대학 시절 친구의 지인의 지인의 지인쯤 되는 것 같은데, 정확히 김이 누구의 지인인 줄은 몰라. 나도 친구의 전화를 받고 나갔던 자리라 일면식도 없는 이들이 대부분이었어. 가이드북 출간 기념 모임이라고 들었는데 책이 출간되고 나서 뭘 기념한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스물 몇 명 되는 사람들이 술집에 둘러앉아 열심히 맥주와 소주를 섞어 마시고 있더라. 마다가스카르 여행 안내서는 구석에 그들의 앉은키만큼 쌓여 있었어. 책을 집어 첫 장을 넘기니까 작자의 친필 사인이 있었어. 가이드북으로는 한참 모자란 책이었지. 그 나라에서 찍어온 사진만 잔뜩 인쇄해놓은 선전 책자 같더라고. 눈동자가 짙고 깨끗한 그 나라 아이들을 클로즈업해서 찍은 사진이 특히 노골적이었어.
직접? 어떻게 그런 말을 해. 작가는 내 친구의 새로 생긴 애인이었단 말이야.
친구는 나를 발견하고 사람들에게 소개해주었지만 다들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지. 양 볼이 상기된 채로 애인을 바라보느라 친구도 작가의 곁에서 일어나지 않더라고. 빈 의자는 쌓여 있는 여행 안내서 옆자리뿐이었어. 맥주나 한 잔 마시고 가려고 거기 앉았어. 좀 피곤했어.
야근을 한 데다 벚꽃 축제로 길이 막혀서 버스에서 한 시간이나 서 있었거든.
내일이 주말이라 다행이다, 어쩌다 여행 작가를 알게 된 거지, 비슷한 수준의 회사에서 나와 다르지 않은 일을 하는 친구인데, 집에 갈 때는 택시를 타고 가야하나, 택시비는 얼마나 나올까, 머릿속으로 그런 생각들을 하면서 사람들을 훑어봤어. 모두 무슨 말들을 하고 있어서 누구의 말도 들리지 않았지. 한 남자만 말없이 가이드북의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기고 있었어. 그 남자도 마다가스카르 여행 안내서 옆에 앉아 있었지.
응, 김이야.
코가 유난히 길어서 못생겨 보이는 인상이었어. 그런데 어찌나 천천히 책을 보는지 페이지 넘어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어. 그리고 그 진지한 표정이란. 나도 가이드북을 펼쳤어. 한손으로는 맥주잔을 들고 한손으로는 책장을 넘기며 그를 곁눈질했어. 자세히 보니까 긴 코도, 홀쭉해서 코를 더 길어보이게 만드는 볼도, 진지한 김의 얼굴에 잘 어울리더라. 갑자기 김이 고개를 들었을 때 마주쳤던 눈빛은 말할 것도 없었지.
쑥스러웠어. 나는 머리를 숙이고 가이드북을 보는 척했지. 역시 노골적인 선전물로 읽혔지만 김처럼 천천히 페이지를 넘겼어. 겉장을 덮으니, 기다렸다는 듯이 김이 말을 걸었어.
“책으로는 아무 데도 갈 수 없잖아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어. 우리는 맥주를 꽤 마셨지. 여행 안내서 더미를 사이에 두고 팔을 내밀어 서로 잔을 부딪히면서.
그때 난 김이 무슨 말을 해도 고개를 끄덕였을 거야.
“구멍에 넣었어요.”
침대 머리에 베개를 세우고 앉아 있다가 김에게 시간을 물었어.
버스가 끊기기 전에 집에 가려고. 침대 옆 탁자에 늘 자명종이 놓여 있었거든. 그날은 자명종이 보이지 않았어.
“여기에 더 큰 것도 넣을 수 있어요.”
김은 똑바로 누워 자기 배를 가리켰어. 그제야 배꼽이 떠올랐지. 구멍에 넣었다는 게 뭘까. 자명종을 배꼽에 넣어봤다는 얘기인가. 살이 쪄서 배꼽이 더 깊어진 건가 싶었어. 슬며시 웃음이 나왔어. 김의 뱃살은 정말이지 처음 봤을 때보다 더 많아진 것 같았고 양 옆구리가 통통하게 튀어나와 있었어. 김이 주먹을 쥐고 진지하게 들었다가 놨다가 하는 바람에 웃음이 터지려고 했어.
간신히 참았어.
그러다 조금 걱정이 됐어. 언뜻 간이 나빠지면 뱃살이 붙을 수도 있다는 얘기를 들었던 게 생각났거든. 그러고 보니 김의 안색이 검게 보였어.
텔레비전에서 의사가 말했던 것 같기도 하고. 회식 자리에서 팀장이 말했던 것 같기도 하고.
나는 김에게 간이 안 좋은 게 아니냐고 물었어. 이번에는 김이 의아한 얼굴로 나를 보더라고. 간이 안 좋으면 그럴 수도 있다더라고 했더니 김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어. 얼굴색이 검어진 것도 간 때문이 아니냐고 다시 물었어. 그랬더니 깊은 잠을 못자서 그런 거래. 그럼 언제부터 불면이었냐고 했더니 또 말이 없어지는 거야. 나는 침대를 빠져나왔어.
아니, 건강과 관련된 책을 찾아보려고.
실제로 병에 걸렸다고 여긴 건 아니야.
김의 집은 복층형 원룸이었어. 아래층의 전면이 창으로 되어 있어서 기다랗고 커다란 블라인드가 필요한. 그런데도 창문은 아주 작게만 열 수 있는 그런 집말이야. 좁은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낮은 천장을 가진 다락같은 마루가 있는 그런 구조의 원룸 있잖아.
거기에 책이 많았어. 복층.
글쎄 백 권? 이백 권?
잘 모르겠다. 난 책이랑 안 친해서. 사실 그게 몇 권이나 되는지 가늠할 수도 없었어.
그즈음 나는 말수 없는 김에게 조바심을 느끼고 있었는데 김이 가진 책을 통해 조바심을 해소해보려고 하는 심리가 생겼어. 수시로 김의 복층을 살폈어. 이를테면 컴퓨터 프로그래밍 서적들로 김의 과거와 앞날을 추측해보는 식이었어. 컴퓨터 프로그래머였다던 김은 일을 쉬고 있다고 했거든. 다시 사는 것처럼 시작하고 싶다고 했어. 난 김이 괜찮은 회사를 찾는 중인가보다 그렇게 여겼지.
뭘 찾을 수 있었을 것 같아?
취미조차 짐작할 수 없었어. 프로그래밍 용어를 이해하는 건 애초부터 불가능했던 일이라고 할게. 세계진문기담이나 습지생태보고서, 단체줄넘기대회 같은 책은 어느 쪽으로 분류해야 하는 건데.
그날은 질병이 들어간 제목의 책을 대충 들춰봤지. 내려와보니 김은 시무룩한 낯빛을 하고 잠들어 있었어. 불면이라더니. 김의 이마를 짚어봤지만 열은 없었어. 샤워를 하고 김의 집을 나서면서, 함께 운동을 하는 게 어떨까 고민했어. 주말마다 자전거로 한강변을 달리면 뱃살이 좀 빠지겠지.
자전거가 방법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한 건 며칠 뒤였어.
“구멍에 넣었다고 했잖아요.”
자명종이 어디 있느냐고 물었어.
당연히. 어째서 그런 말을 중요하게 생각해?
나는 미소를 지으려고 했어. 예쁜 자전거를 봐두었으니 시간이 날 때마다 함께 타자고 말하려고 했고. 구멍은 없다고 말하려고 했지.
미소를 지으려고 했는데, 김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비죽비죽 웃음이 나왔어. 배꼽에 시계를 넣는다는 건 아무래도 정상이 아니잖아.
“내 말을 믿지 않는군요?”
김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어. 보라고, 웃지 말고 자기 배꼽을 보라고, 말하는 김의 가슴이 오르락내리락 했지. 나는 입술을 깨물었어. 그게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어. 나는 웃는 게 아니고 배꼽에는 아무 것도 없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납작하고 창백한 가슴팍이 파르르 떨리고 있더라.
하얗게 빛나는 형광등과 공중에서 퍼지는 먼지 그리고 그 아래 서 있는 김의 벗은 몸을 보고 있자니,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어. 배에는 처음 봤을 때와 마찬가지로 뱃살이 한 줌 붙어 있었고 배꼽 주변으로 털이 성기게 돋아 있었어. 그 평범한 배에 뭐가 있다는 건지 내 눈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더라고. 그렇지만 한 가지는 알 수 있었지. 김이 말하는 건 내가 보고 있는 배꼽이 아니라는 걸. 뱃살 때문도 아니고 다이어트도 필요 없다는 걸.
전혀. 그렇게 생각 못 했어.
기껏 내가 해낸 건 대학 시절 친구를 떠올리는 거였어.
아까, 여행 작가와 연애하던.
그 친구는 학과 동기야. 나와는 달리 잘 웃고 적극적인 성격이라 누구와도 금방 친해지는 아이지. 집 방향이 같아서 친해진 동기였지. 걔가 그런 말을 종종 했거든.
지구에 구멍이 뚫려 있다고 했어.
구멍 속에는 이곳과 비슷한 다른 세계가 있다는 거야. 시간은 아주 천천히 흐르고, 생명체들은 이곳보다 크고 넓고 긴 형태로 살아간대. 딸기 한 알이 어른 주먹만 하다던가. 거기에 갔다 왔다는 사람들이 있대. 알 수 없는 힘에 휩쓸려 바다 한가운데나 집 앞 마당에서 그 구멍으로 빨려들어갔다고 말하는 사람들.
아끼는 목걸이나 잘 벗어둔 양말 한 짝이 종종 사라진다고. 그것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 거냐고. 우리는 키들거리며 장난을 쳤어.
그냥 괴담이고 농담이었어.
지금은 다른 대륙에서 살고 있어.
마다가스카르가 아니고, 빈.
오스트리아 남자랑 결혼했다던데.
여행 작가와 얼마나 만났더라. 끝난 날 우리 집 앞까지 와서 술을 엄청 마셨어. 테이블에 엎드려서 울다가 콘택트렌즈 한쪽을 잃어버렸고. 이것 보라면서, 이것도 감쪽같이 없어졌다면서 주정을 했어.
나는 김의 구멍이 친구의 구멍과 뭐 다른 건가 싶었어. 김에게는 자전거가 아니라 시시한 농담이나, 따뜻한 손 같은 게 필요한 건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생각했어.
얼마간은 기꺼이 김의 배를 어루만져줄 마음이었지.
막 섹스를 끝냈을 거야. 에어컨을 틀었다가 곰팡이 냄새 때문에 다시 꺼버렸어. 블라인드를 올리자 달빛인지 가로등빛인지 모를 빛이 들어왔지. 창을 열었지만 원룸의 창은 왜 그리도 작게 만들어 놓는 건지. 그마저도 활짝 열리지 않아서 공기는 후텁지근했어.
목이 말랐어.
침대 머리에 기대 차가운 물을 꼴깍꼴깍 나누어 마시고 있다보니, 자동차의 경적 소리며 때이른 매미 울음소리며 개 짖는 소리가 들렸지. 김은 말이 없었고 나는 가만히 소리에 귀 기울였어.
그냥 그랬던 거지. 할말도 없었고.
차츰 작은 소리까지 들리더라. 멀리서 들리는 것 같은 소리들, 또각또각 하이힐 소리, 자박자박 하는 발소리 같은 것들이. 뒤섞여 창을 넘어오는 소음들은 불규칙했지만 발소리는 균일하게 이어졌어. 자각자각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재각재각 하는 것 같기도 하는.
나는 속으로 쿡 웃었어.
시계 초침이었어.
그 소리는 점점 선명하게 들리고 있었고, 김의 집엔 시계가 자명종뿐이었지.
당신 배 속에 자명종 잘 있나봐, 라고 말했어.
농담을 해보려고.
김은 웃지도 않고 자기 배 속에 어째서 시계가 있느냐고 하더라. 창으로 들어오는 빛만으로도 김의 진지한 얼굴이 다 보였지. 나는 웃음을 씹어 삼켰어. 마음먹은 대로 김의 배꼽에 손을 올렸지. 배 속에 자명종을 넣었다고 하지 않았느냐고 답하면서, 어릴 적 배탈이 났을 때 엄마가 해주던 것처럼 김의 배꼽 주변을 손바닥으로 쓸어주었어.
“구멍에 넣었어요.”
그 사이 김은 더 살이 쪘는지 배가 볼록했어. 포동포동한 뱃살의 감촉과 홀쭉한 김의 뺨을 번갈아 보고 있자니 다시 쿡쿡 웃음이 나왔어. 그 소리를 듣고 김이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그때 그 진지한 눈빛과 마주치지 말았어야 했는데.
참고 있던 웃음이 터져버렸어.
한 번 터진 웃음은 키득키득 계속 새어나왔고 김의 눈빛이 조금씩 변하는 걸 보면서도 웃음을 그칠 수가 없었어. 대신 나는 초침 소리가 들린다고, 자명종 소리가 들린다고, 웃음처럼 말을 내뱉었어. 뜨악하게 김의 표정이 변하고서야 나는 웃음을 멈출 수 있었어.
우리의 침묵 속에서 초침 소리는 너무도 정확하고 끈질기게 들려왔지.
“저건 내 시계가 아니에요.”
“자명종인데.”
“아닌데요.”
“당신 거야.”
“아니야.”
김은 침대에서 일어나 방안을 살피기 시작했어. 나도 소리를 따라 몸을 움직였어. 결국 우리는 침대로 돌아왔는데 침대 주변에서만 초침 소리가 잘 들렸기 때문이었지. 김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은 우리가 벗어놓은 옷더미였어. 나는 그걸 믿을 수가 없었지만 김은 형광등을 켰어.
손목시계였어.
샤워하기 전에 끌러놓았던 나의 손목시계.
가을이 오기 전에 우리는 몇 번 더 만났을 거야. 때마침 회사에서 영업소 개설 사업을 시작했고 나는 수도권으로 발령을 받았지. 통근 시간이 길어졌어. 평일엔 김을 만나기 어려웠어. 서서히 연락이 뜸해졌고 낙엽이 지는 것처럼 김과 멀어졌어.
그래, 아니었어.
사실은 김의 집에 찾아갔었지.
완전히 연락이 끊기고 한 달쯤 지난 후에.
벨을 눌렀지만 아무도 나오지 않았어.
원룸 비밀번호는 바뀌어 있더라. 휴대폰은 받지도 않았고 메시지를 남겨도 답이 없었어. 이메일 계정은 알지도 못했고. 김에게서는 단 한 번도 연락을 받지 못했어. 그래서 난 이별에 대해 그렇고 그런 추측만 하다가 김을 잊었지.
그날 혼자 걷지 않았다면 생각지도 않았을 이야기지. 그 아이들이 달걀을 주지 않았다면 떠올리지도 못했을 이야기야. 술집의 음악이 귀를 아프게 할 정도로 시끄럽지 않았다면 잊었을 이야기. 테이블에서 떨어지려는 달걀을 손에 쥐고 나는 생각했어. 김의 자명종은 어떻게 됐을까.
맞네, 너무 늦은 질문이었네.
나는 술집 문을 열었어. 4월인데도 밤공기가 차가웠지. 차들은 빠르게 달렸고 거리의 사람들은 목을 움츠리고 제 갈 길로 가고 있었어.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은 아이들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어. 하지만 어디선가 사람들에게 한결같은 표정으로 달걀을 주고 있을 것 같았지. 나는 집을 향해 걸었어. 청바지의 양 주머니에서 휴대폰과 지갑이 무겁게 늘어지는 걸 견디며 나는 알록달록한 달걀의 옷을 벗기고 껍데기를 깠어.
응, 그 달걀.
희게 반짝이는 달걀은 차갑고 매끄러웠지.
먹지 않았어. 구멍으로 밀어넣었어.
그날 찾은, 귓불에 있는 나의 구멍 말이야.
응, 전혀 아니야.
왜? 잘 몰라.
그 남자와는 별 계기도 없이 헤어졌어. 그 뒤론 연락을 받은 적도 없다니까. 내가 김에 대해 무슨 생각을 했겠어? 그렇고 그런 이유들밖에 더 있었겠어? 더구나 난 김의 구멍에 새끼손가락 하나 넣어본 적도 없단 말이야.
부활절이 가까웠던 날이었던 것 같아. 뭐 교회에서 하는 행사 있잖아. 십자가에 매달려 죽은 사람이 삼일 만에 살아났다는 날. 일요일은 아니었어.
그 술집은 일요일에 문을 닫거든.
가로등이 켜지고 있었어. 아스팔트가 검었고. 난 길이 축축하다고 생각했어. 낮 동안 아주 짧게 비가 내렸고 기분은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어. 나는 어떤 기분이랄 것도 없이 약간 축축한 채로 멀리 있는 것들을 보며 걸었어. 집에서 나온 지 십 분도 지나지 않았는데, 팔이 늘어졌고 손가락에도 힘이 없었지. 어쩌면 낮에 먹은 두통약 때문이었는지도 몰라. 슬리퍼가 발가락에서 깔짝거렸고 작은 비 웅덩이를 피하지 않고 밟았을 땐 물방울이 튀어서 청바지 밑단이 죄다 젖었어.
아니야. 별 생각 없이 발을 디뎠을 뿐이야.
발을 내디딜 때마다 왼쪽 주머니에선 지갑이, 오른쪽 주머니에서는 휴대폰이 실룩거렸어. 쓸데없이 두툼하고 커다란 것들. 바지에 튄 물방울을 털어내며 열 발자국 정도 떨어져 있는 버스 정류장을 쳐다봤지. 버스에서 내린 사람들이 지나가며 힐끗 나를 보는 것 같았는데 아무 의미 없는 눈길이었어. 내 두 다리가 거대하게, 그러니까 청바지 주머니에 꽂혀 있는 것들이 거대하게 느껴졌어. 버스가 섰다가 갈 때마다 허벅지가 무겁게 늘어지고 있는 느낌.
오 분쯤 아니 십 분쯤.
그래, 난 버스를 타고 싶었던 건지 몰라. 그걸 타고 어디든 가고 싶었는지도 몰라. 그런데 바지 밑단이 젖어버렸다니까. 낡아빠진 슬리퍼를 신고 있었어. 그 상태로 어딜 가나.
인정한다고. 가야할 곳도 날 찾는 이도 없었지. 한참이나 없었어.
그렇게 걸음을 떼지 못하고 있을 때 어떤 여자애가 다가왔어. 삶은 달걀이 담긴 라탄 바구니를 들고서.
여자애는 조그만 입술로 조잘거렸어. 소리로 치자면 듣기 싫은 소리가 아니었지만 부활이니 죄를 대신해 주었다느니 하는 말은 알아들을 수 없었지. 여자애의 뒤쪽으로 대여섯 명의 일행이 보였고 나는 약간 어리둥절한 상태였어.
다들 이십대 초반으로 보였어. 남자애들은 양복을 여자애들은 원피스를 입고 있었지. 그 여자애도 스무 살 가량으로 보였고 원피스를 입고 있었는데, 그게 좀, 좀 그랬어.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은 아이들이었어. 제 나이에 맞지 않게 입었다는 의미는 아니야.
나는 달걀을 받았어. 따뜻한 달걀은 아니었지. 차가웠고 매끈매끈했어. 달걀엔 비닐이 씌워져 있었고 비닐엔 알록달록한 색으로 글자가 적혀 있었어. 예수 다시 사셨네. 여자애는 계속해서 조잘거렸고 그 조잘거림엔 정해진 리듬이 있는 것처럼 반복되는 구절이 있었는데 발간 뺨과 까맣게 반짝이는 눈동자 때문에, 어쩌면 달걀 바구니와 원피스 때문에 목가풍 사랑 이야기를 듣는 것 같기도 했지. 한결같은 결말로 끝나는 사랑 이야기. 노래가 끝나가는 것처럼 여자애의 목소리가 작아졌어.
목소리는 점점 작아지더니 결국엔 눈앞에서 윙윙거리는 하루살이 떼의 날갯짓보다 더 작게 들렸지. 어쩐지 무안해져서 나는 오른쪽 귓구멍을 한번 쑤셨어. 귓구멍을 만지다 귓불도 한번 만져봤지. 그러고 알았지. 피어스 한 개를 잃어버렸다는 걸.
보여줄게, 난 이쪽 귀에 피어싱을 두 개 했거든.
1.2밀리미터. 제일 얇은 걸로 뚫었더랬지.
곧바로 잃어버린 피어스를 생각하진 못했어. 그들 일행이 서로서로 닮은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어. 달걀에 씌워진 비닐 같은 옷을 입고서 말이야.
거기서 벗어날 생각으로 나는 술집 문을 열었어. 정류장을 마주보고 있는데다 건물 1층에 있는 널찍한 일본풍 펍은 우리 동네에서 알아주는 술집이었지.
음악 소리가 컸고 조도가 낮은 조명 때문에 어둑했어. 혼자 앉아 있는 사람이 있어서 그와 한 테이블 떨어진 곳에 앉았어. 흰 머리가 많은 남자였는데 창을 향해 앉아 소주를 마시고 있었지. 나도 남자처럼 창밖을 보며 맥주를 마셨어. 창밖엔 가로등 불빛이 있었고 검은 아스팔트가 있었고 달리는 버스가 있었고. 테이블 위엔 베이컨숙주볶음과 식어가고 있는 정종. 휴대폰과 지갑. 그리고 달걀.
먹지 않았어. 그저 테이블을 굴러다니는 걸 지켜봤지.
지켜보다가 달걀이 테이블에서 떨어지려고 하면 손가락으로 막았지. 손가락으로 막으면 달걀은 또 굴렀어. 스피커가 바로 위 천장에 달려 있어서 귀가 아팠는데 아는 노래도 없더라고. 일정한 트랙대로 세 번 정도 반복되는 동안 흰 머리 남자가 갔어. 익숙해질 만도 된 것 같은데 귀가 계속 아프더라. 결국 귓구멍을 만지작거리다가 굴러가는 달걀을 막지 못했어.
아니, 깨뜨리진 않았어.
아슬아슬하게, 떨어지는 걸 손바닥으로 받았어.
그래, 귀를 만지다가 한발 늦었던 거지.
나는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 달걀을 쥐었다 놓았어.
물론 차갑고 매끈매끈했어. 그런데 손가락에 남아 있는 낯선 느낌.
나는 다른 걸 느끼고 있었어. 귓불에 있는 구멍 말이야.
응, 잃어버린 피어스가 있던 자리.
다시 더듬더듬 오른쪽 귓불을 만졌어. 말랑하고 따뜻하더라. 그건 여전히 내 귀였어. 아래쪽에 달린 피어스의 티타늄 볼도 그대로, 내 귀에 달려 있었어. 나사처럼 생겨서 곧잘 볼트 모양의 볼이 느슨해지곤 했지만 잃어버린 적은 없었지. 그런데 그보다 1센티미터 위쪽, 피어싱 구멍만 남아 있던 자리가 문제였어. 구멍으로 검지가 들어가버렸거든. 손가락을 대고 두어 번 문지르니까 쑥 들어가버렸다니까. 들어가기만 한 게 아니야. 귀 뒤로 손가락이 나오지도 않는 거야.
찢어진 게 아니라 구멍이었다니까.
그건 결코 1.2밀리미터짜리 구멍이 아니었어. 마음만 먹으면 손가락이 아니라, 쥐고 있던 달걀을, 잘만하면 달걀을 쥔 주먹까지도, 넣을 수 있을 것 같았단 말이야. 그 기분을 어떻게 말해야 할까.
맞아. 내 기분을 설명하려던 게 아니었지. 김의 구멍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한 게 맞아. 그래도 이건 얘기할래. 나는 비로소 사라진 피어스의 행방이 궁금해진 거야.
손가락은 들어갈 때처럼 쑥 나왔어. 검지에는 아무런 흔적이 없었지. 손톱도 말끔했어. 여전히 나의 손가락이었어. 나는 달걀을 테이블 위에 놓았어. 둥글게 달걀이 굴렀고 그때 떠오른 거야. 김이 말하던 구멍이.
김은 커다란 원목 침대를 가지고 있었어. 그런 걸 킹사이즈라고 하나 퀸사이즈라고 하나. 나는 중학생 때부터 십오 년이 넘도록 줄곧 싱글사이즈의 침대를 써왔기 때문인지 그 침대가 참 편하더라. 침대 머리가 단단하고 높아서 베개를 세우고 앉아 있기에도 좋았지. 김은 말수가 적은 편이어서 무얼 물어보는 일이 드물었고 내가 질문을 해도 길게 대답하는 법이 없었어. 섹스를 하고 나서도 별 말이 없었지. 나는 주로 침대 머리에 기대서 텔레비전을 보거나 푹신하고 넓은 침대 위에 드러누워 있거나 했지. 옆에 누운 김의 몸에 팔이나 다리가 닿으면 맨살끼리 닿는 느낌까지도 아늑했어.
그래. 침대 때문이 아니었을 거야. 그때는 잘 몰랐어.
그렇지만 다른 사람 옆에서 잠드는 건 쉽지 않아서 김의 집에서 밤을 보낸 날은 몇 번 없었어. 자매 없이 자란 나는 혼자 자는 데 익숙했고 작은 기척에도 민감했어. 생활이라는 게 그렇잖아. 그렇게 살다보면 그런 사람이 되어 있잖아. 대부분 자정이 되기 전에 김의 집에서 나와 우리 집으로 갔어. 자다가 몇 번이나 깨버리고 나면 다음날 두통에 시달리느라 회사에서 내내 정신을 못 차렸거든.
구멍에 대해 처음 듣던 날은 서너 번, 밤을 같이 보낸 뒤였어. 김이 불쑥 말을 걸었어.
“여기 좀 만져볼래요?”
우리 둘 다 잠들지 못하고 있었지. 수십 분째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지만 숨소리를 들으면 알 수 있잖아. 창에 걸린 블라인드 때문에 방안은 아주 컴컴했어. 깜짝 놀랄 만큼 낮은 목소리 때문에 긴장을 했었던 것 같아. 나는 숨을 죽이고 김의 손이 이끄는 대로 김의 배를 만졌어.
그냥, 배꼽이었어.
그것 말로 배에 뭐가 있겠어. 그런데도 김은 이렇게 묻는 거야.
“거기 구멍이 하나 있지요?”
나는 조심스럽게 김의 배꼽에 손가락을 넣었어. 배꼽이 남들보다 깊은 것 같기는 했어. 손마디 하나가 다 들어갈 정도로 움푹 패여 있었으니까 그걸 구멍이라고 표현하는가보다 생각했어. 뱃살 때문이었는지도 모르지. 당시에 서른일곱 살이었던 김은 아랫배가 나와 있었거든.
아니야. 옷을 입으면 드러나지 않았어. 오히려 수척해 보이는 쪽에 가까웠지.
김의 뱃살이 도독하게 손안에 잡혔어. 나도 모르게 입가의 긴장이 풀리면서 웃음이 나왔어. 볼이 홀쭉하고 항상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는 김의 얼굴과 뱃살은 전혀 어울리지 않았거든. 한마디로 영 딴판이었어. 그 얼굴에 반했던 나는 김이 옷을 벗을 때마다 침울한 코미디를 보는 것처럼 웃기더라. 소리 없이 웃으면서 나는 그렇다고, 당신 배에 뭔가가 있다고 답했어. 그리고 곧 김의 물음을 잊었어.
김을 알게 된 지 두 달 남짓 지나고 있었고 김에 대해 알고 있는 게 거의 없었지.
사 년 전, 봄에 만났어. 김은 내 대학 시절 친구의 지인의 지인의 지인쯤 되는 것 같은데, 정확히 김이 누구의 지인인 줄은 몰라. 나도 친구의 전화를 받고 나갔던 자리라 일면식도 없는 이들이 대부분이었어. 가이드북 출간 기념 모임이라고 들었는데 책이 출간되고 나서 뭘 기념한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스물 몇 명 되는 사람들이 술집에 둘러앉아 열심히 맥주와 소주를 섞어 마시고 있더라. 마다가스카르 여행 안내서는 구석에 그들의 앉은키만큼 쌓여 있었어. 책을 집어 첫 장을 넘기니까 작자의 친필 사인이 있었어. 가이드북으로는 한참 모자란 책이었지. 그 나라에서 찍어온 사진만 잔뜩 인쇄해놓은 선전 책자 같더라고. 눈동자가 짙고 깨끗한 그 나라 아이들을 클로즈업해서 찍은 사진이 특히 노골적이었어.
직접? 어떻게 그런 말을 해. 작가는 내 친구의 새로 생긴 애인이었단 말이야.
친구는 나를 발견하고 사람들에게 소개해주었지만 다들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지. 양 볼이 상기된 채로 애인을 바라보느라 친구도 작가의 곁에서 일어나지 않더라고. 빈 의자는 쌓여 있는 여행 안내서 옆자리뿐이었어. 맥주나 한 잔 마시고 가려고 거기 앉았어. 좀 피곤했어.
야근을 한 데다 벚꽃 축제로 길이 막혀서 버스에서 한 시간이나 서 있었거든.
내일이 주말이라 다행이다, 어쩌다 여행 작가를 알게 된 거지, 비슷한 수준의 회사에서 나와 다르지 않은 일을 하는 친구인데, 집에 갈 때는 택시를 타고 가야하나, 택시비는 얼마나 나올까, 머릿속으로 그런 생각들을 하면서 사람들을 훑어봤어. 모두 무슨 말들을 하고 있어서 누구의 말도 들리지 않았지. 한 남자만 말없이 가이드북의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기고 있었어. 그 남자도 마다가스카르 여행 안내서 옆에 앉아 있었지.
응, 김이야.
코가 유난히 길어서 못생겨 보이는 인상이었어. 그런데 어찌나 천천히 책을 보는지 페이지 넘어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어. 그리고 그 진지한 표정이란. 나도 가이드북을 펼쳤어. 한손으로는 맥주잔을 들고 한손으로는 책장을 넘기며 그를 곁눈질했어. 자세히 보니까 긴 코도, 홀쭉해서 코를 더 길어보이게 만드는 볼도, 진지한 김의 얼굴에 잘 어울리더라. 갑자기 김이 고개를 들었을 때 마주쳤던 눈빛은 말할 것도 없었지.
쑥스러웠어. 나는 머리를 숙이고 가이드북을 보는 척했지. 역시 노골적인 선전물로 읽혔지만 김처럼 천천히 페이지를 넘겼어. 겉장을 덮으니, 기다렸다는 듯이 김이 말을 걸었어.
“책으로는 아무 데도 갈 수 없잖아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어. 우리는 맥주를 꽤 마셨지. 여행 안내서 더미를 사이에 두고 팔을 내밀어 서로 잔을 부딪히면서.
그때 난 김이 무슨 말을 해도 고개를 끄덕였을 거야.
“구멍에 넣었어요.”
침대 머리에 베개를 세우고 앉아 있다가 김에게 시간을 물었어.
버스가 끊기기 전에 집에 가려고. 침대 옆 탁자에 늘 자명종이 놓여 있었거든. 그날은 자명종이 보이지 않았어.
“여기에 더 큰 것도 넣을 수 있어요.”
김은 똑바로 누워 자기 배를 가리켰어. 그제야 배꼽이 떠올랐지. 구멍에 넣었다는 게 뭘까. 자명종을 배꼽에 넣어봤다는 얘기인가. 살이 쪄서 배꼽이 더 깊어진 건가 싶었어. 슬며시 웃음이 나왔어. 김의 뱃살은 정말이지 처음 봤을 때보다 더 많아진 것 같았고 양 옆구리가 통통하게 튀어나와 있었어. 김이 주먹을 쥐고 진지하게 들었다가 놨다가 하는 바람에 웃음이 터지려고 했어.
간신히 참았어.
그러다 조금 걱정이 됐어. 언뜻 간이 나빠지면 뱃살이 붙을 수도 있다는 얘기를 들었던 게 생각났거든. 그러고 보니 김의 안색이 검게 보였어.
텔레비전에서 의사가 말했던 것 같기도 하고. 회식 자리에서 팀장이 말했던 것 같기도 하고.
나는 김에게 간이 안 좋은 게 아니냐고 물었어. 이번에는 김이 의아한 얼굴로 나를 보더라고. 간이 안 좋으면 그럴 수도 있다더라고 했더니 김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어. 얼굴색이 검어진 것도 간 때문이 아니냐고 다시 물었어. 그랬더니 깊은 잠을 못자서 그런 거래. 그럼 언제부터 불면이었냐고 했더니 또 말이 없어지는 거야. 나는 침대를 빠져나왔어.
아니, 건강과 관련된 책을 찾아보려고.
실제로 병에 걸렸다고 여긴 건 아니야.
김의 집은 복층형 원룸이었어. 아래층의 전면이 창으로 되어 있어서 기다랗고 커다란 블라인드가 필요한. 그런데도 창문은 아주 작게만 열 수 있는 그런 집말이야. 좁은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낮은 천장을 가진 다락같은 마루가 있는 그런 구조의 원룸 있잖아.
거기에 책이 많았어. 복층.
글쎄 백 권? 이백 권?
잘 모르겠다. 난 책이랑 안 친해서. 사실 그게 몇 권이나 되는지 가늠할 수도 없었어.
그즈음 나는 말수 없는 김에게 조바심을 느끼고 있었는데 김이 가진 책을 통해 조바심을 해소해보려고 하는 심리가 생겼어. 수시로 김의 복층을 살폈어. 이를테면 컴퓨터 프로그래밍 서적들로 김의 과거와 앞날을 추측해보는 식이었어. 컴퓨터 프로그래머였다던 김은 일을 쉬고 있다고 했거든. 다시 사는 것처럼 시작하고 싶다고 했어. 난 김이 괜찮은 회사를 찾는 중인가보다 그렇게 여겼지.
뭘 찾을 수 있었을 것 같아?
취미조차 짐작할 수 없었어. 프로그래밍 용어를 이해하는 건 애초부터 불가능했던 일이라고 할게. 세계진문기담이나 습지생태보고서, 단체줄넘기대회 같은 책은 어느 쪽으로 분류해야 하는 건데.
그날은 질병이 들어간 제목의 책을 대충 들춰봤지. 내려와보니 김은 시무룩한 낯빛을 하고 잠들어 있었어. 불면이라더니. 김의 이마를 짚어봤지만 열은 없었어. 샤워를 하고 김의 집을 나서면서, 함께 운동을 하는 게 어떨까 고민했어. 주말마다 자전거로 한강변을 달리면 뱃살이 좀 빠지겠지.
자전거가 방법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한 건 며칠 뒤였어.
“구멍에 넣었다고 했잖아요.”
자명종이 어디 있느냐고 물었어.
당연히. 어째서 그런 말을 중요하게 생각해?
나는 미소를 지으려고 했어. 예쁜 자전거를 봐두었으니 시간이 날 때마다 함께 타자고 말하려고 했고. 구멍은 없다고 말하려고 했지.
미소를 지으려고 했는데, 김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비죽비죽 웃음이 나왔어. 배꼽에 시계를 넣는다는 건 아무래도 정상이 아니잖아.
“내 말을 믿지 않는군요?”
김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어. 보라고, 웃지 말고 자기 배꼽을 보라고, 말하는 김의 가슴이 오르락내리락 했지. 나는 입술을 깨물었어. 그게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어. 나는 웃는 게 아니고 배꼽에는 아무 것도 없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납작하고 창백한 가슴팍이 파르르 떨리고 있더라.
하얗게 빛나는 형광등과 공중에서 퍼지는 먼지 그리고 그 아래 서 있는 김의 벗은 몸을 보고 있자니,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어. 배에는 처음 봤을 때와 마찬가지로 뱃살이 한 줌 붙어 있었고 배꼽 주변으로 털이 성기게 돋아 있었어. 그 평범한 배에 뭐가 있다는 건지 내 눈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더라고. 그렇지만 한 가지는 알 수 있었지. 김이 말하는 건 내가 보고 있는 배꼽이 아니라는 걸. 뱃살 때문도 아니고 다이어트도 필요 없다는 걸.
전혀. 그렇게 생각 못 했어.
기껏 내가 해낸 건 대학 시절 친구를 떠올리는 거였어.
아까, 여행 작가와 연애하던.
그 친구는 학과 동기야. 나와는 달리 잘 웃고 적극적인 성격이라 누구와도 금방 친해지는 아이지. 집 방향이 같아서 친해진 동기였지. 걔가 그런 말을 종종 했거든.
지구에 구멍이 뚫려 있다고 했어.
구멍 속에는 이곳과 비슷한 다른 세계가 있다는 거야. 시간은 아주 천천히 흐르고, 생명체들은 이곳보다 크고 넓고 긴 형태로 살아간대. 딸기 한 알이 어른 주먹만 하다던가. 거기에 갔다 왔다는 사람들이 있대. 알 수 없는 힘에 휩쓸려 바다 한가운데나 집 앞 마당에서 그 구멍으로 빨려들어갔다고 말하는 사람들.
아끼는 목걸이나 잘 벗어둔 양말 한 짝이 종종 사라진다고. 그것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 거냐고. 우리는 키들거리며 장난을 쳤어.
그냥 괴담이고 농담이었어.
지금은 다른 대륙에서 살고 있어.
마다가스카르가 아니고, 빈.
오스트리아 남자랑 결혼했다던데.
여행 작가와 얼마나 만났더라. 끝난 날 우리 집 앞까지 와서 술을 엄청 마셨어. 테이블에 엎드려서 울다가 콘택트렌즈 한쪽을 잃어버렸고. 이것 보라면서, 이것도 감쪽같이 없어졌다면서 주정을 했어.
나는 김의 구멍이 친구의 구멍과 뭐 다른 건가 싶었어. 김에게는 자전거가 아니라 시시한 농담이나, 따뜻한 손 같은 게 필요한 건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생각했어.
얼마간은 기꺼이 김의 배를 어루만져줄 마음이었지.
막 섹스를 끝냈을 거야. 에어컨을 틀었다가 곰팡이 냄새 때문에 다시 꺼버렸어. 블라인드를 올리자 달빛인지 가로등빛인지 모를 빛이 들어왔지. 창을 열었지만 원룸의 창은 왜 그리도 작게 만들어 놓는 건지. 그마저도 활짝 열리지 않아서 공기는 후텁지근했어.
목이 말랐어.
침대 머리에 기대 차가운 물을 꼴깍꼴깍 나누어 마시고 있다보니, 자동차의 경적 소리며 때이른 매미 울음소리며 개 짖는 소리가 들렸지. 김은 말이 없었고 나는 가만히 소리에 귀 기울였어.
그냥 그랬던 거지. 할말도 없었고.
차츰 작은 소리까지 들리더라. 멀리서 들리는 것 같은 소리들, 또각또각 하이힐 소리, 자박자박 하는 발소리 같은 것들이. 뒤섞여 창을 넘어오는 소음들은 불규칙했지만 발소리는 균일하게 이어졌어. 자각자각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재각재각 하는 것 같기도 하는.
나는 속으로 쿡 웃었어.
시계 초침이었어.
그 소리는 점점 선명하게 들리고 있었고, 김의 집엔 시계가 자명종뿐이었지.
당신 배 속에 자명종 잘 있나봐, 라고 말했어.
농담을 해보려고.
김은 웃지도 않고 자기 배 속에 어째서 시계가 있느냐고 하더라. 창으로 들어오는 빛만으로도 김의 진지한 얼굴이 다 보였지. 나는 웃음을 씹어 삼켰어. 마음먹은 대로 김의 배꼽에 손을 올렸지. 배 속에 자명종을 넣었다고 하지 않았느냐고 답하면서, 어릴 적 배탈이 났을 때 엄마가 해주던 것처럼 김의 배꼽 주변을 손바닥으로 쓸어주었어.
“구멍에 넣었어요.”
그 사이 김은 더 살이 쪘는지 배가 볼록했어. 포동포동한 뱃살의 감촉과 홀쭉한 김의 뺨을 번갈아 보고 있자니 다시 쿡쿡 웃음이 나왔어. 그 소리를 듣고 김이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그때 그 진지한 눈빛과 마주치지 말았어야 했는데.
참고 있던 웃음이 터져버렸어.
한 번 터진 웃음은 키득키득 계속 새어나왔고 김의 눈빛이 조금씩 변하는 걸 보면서도 웃음을 그칠 수가 없었어. 대신 나는 초침 소리가 들린다고, 자명종 소리가 들린다고, 웃음처럼 말을 내뱉었어. 뜨악하게 김의 표정이 변하고서야 나는 웃음을 멈출 수 있었어.
우리의 침묵 속에서 초침 소리는 너무도 정확하고 끈질기게 들려왔지.
“저건 내 시계가 아니에요.”
“자명종인데.”
“아닌데요.”
“당신 거야.”
“아니야.”
김은 침대에서 일어나 방안을 살피기 시작했어. 나도 소리를 따라 몸을 움직였어. 결국 우리는 침대로 돌아왔는데 침대 주변에서만 초침 소리가 잘 들렸기 때문이었지. 김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은 우리가 벗어놓은 옷더미였어. 나는 그걸 믿을 수가 없었지만 김은 형광등을 켰어.
손목시계였어.
샤워하기 전에 끌러놓았던 나의 손목시계.
가을이 오기 전에 우리는 몇 번 더 만났을 거야. 때마침 회사에서 영업소 개설 사업을 시작했고 나는 수도권으로 발령을 받았지. 통근 시간이 길어졌어. 평일엔 김을 만나기 어려웠어. 서서히 연락이 뜸해졌고 낙엽이 지는 것처럼 김과 멀어졌어.
그래, 아니었어.
사실은 김의 집에 찾아갔었지.
완전히 연락이 끊기고 한 달쯤 지난 후에.
벨을 눌렀지만 아무도 나오지 않았어.
원룸 비밀번호는 바뀌어 있더라. 휴대폰은 받지도 않았고 메시지를 남겨도 답이 없었어. 이메일 계정은 알지도 못했고. 김에게서는 단 한 번도 연락을 받지 못했어. 그래서 난 이별에 대해 그렇고 그런 추측만 하다가 김을 잊었지.
그날 혼자 걷지 않았다면 생각지도 않았을 이야기지. 그 아이들이 달걀을 주지 않았다면 떠올리지도 못했을 이야기야. 술집의 음악이 귀를 아프게 할 정도로 시끄럽지 않았다면 잊었을 이야기. 테이블에서 떨어지려는 달걀을 손에 쥐고 나는 생각했어. 김의 자명종은 어떻게 됐을까.
맞네, 너무 늦은 질문이었네.
나는 술집 문을 열었어. 4월인데도 밤공기가 차가웠지. 차들은 빠르게 달렸고 거리의 사람들은 목을 움츠리고 제 갈 길로 가고 있었어.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은 아이들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어. 하지만 어디선가 사람들에게 한결같은 표정으로 달걀을 주고 있을 것 같았지. 나는 집을 향해 걸었어. 청바지의 양 주머니에서 휴대폰과 지갑이 무겁게 늘어지는 걸 견디며 나는 알록달록한 달걀의 옷을 벗기고 껍데기를 깠어.
응, 그 달걀.
희게 반짝이는 달걀은 차갑고 매끄러웠지.
먹지 않았어. 구멍으로 밀어넣었어.
그날 찾은, 귓불에 있는 나의 구멍 말이야.
정채진
몇 줄 문장으로는 전달되지 못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누군가 그건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하면 딱히 반박할 수도 없는, 지칭할 수 있는 단어를 찾기 어려운 무엇입니다. 제가 그 무언가를 표현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소설을 다 읽고 나면 어느새, 이상한 덩어리가 우리 앞에 놓여 있기를 바랍니다.
2018/01/30
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