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저장되지 않은 번호였다. 그렇지만…… 어쩐지 숫자가 눈에 익어서 윤경은 무심코 수화기 모양의 아이콘을 옆으로 밀었다. 아차차 싶었을 때는 이미 상대방과의 통화가 시작된 상태였다. 윤경은 잠시 망설이다가 휴대폰을 귀에 가져다 댔다.
   “나야, 승혜.”
   “또 너구나.”
   “지난번에는 많이 놀랐지? 너무 오랜만이어서……”
   “어, 좀 정신이 없었네. 병원이었거든. 통화할 수가 없었어.”
   “그랬구나. 어디가 아프니?”
   “내가 아니고 이모가 좀.”
   “많이 편찮으셔?”
   “수술은 잘 됐다는데, 걱정이네. 예후를 더 지켜봐야지.”
   “어떡하니. 너한텐 엄마 같은 분이시잖아.”
   “그런 걸 다 기억하네.”
   “그러게. 기억이 나네. 이모님 얼굴도 생각나는걸. 얼른 쾌유하시기를 빌게.”
   “내 번호는 어떻게 알았어?”
   “규민 오빠가 가르쳐줬어.”
   “둘이 계속 연락해?”
   “아니, 규민 오빠만 쓰던 번호가 그대로더라고.”
   “그 오빠는 좀 그렇지. 고지식해가지고. 그런데 연극은 그만뒀어.”
   “그만뒀다고?”
   “얘기 안 해?”
   “안 했어. 나라서 얘기 안 했을지도 모르겠네.”
   “지금은 그만둔 사람이 더 많으니까. 굳이 말하고 싶지 않았던 걸지도.”
   “규민 오빠만큼은 계속할 줄 알았는데.”
   “그렇지. 현아 언니도 오래전에 그만뒀어.”
   “그 언니는 그만둘 줄 알았어.”
   “그랬어? 너 학교 다닐 때 현아 언니랑 꽤 친했잖아.”
   “현아 언니는 처음부터 인생이 너무 복잡했어. 돈을 벌어야 했잖아. 애초에 가는 길이 완전히 달랐던 것 같아.”
   “지금 보면 참 현명했네. 어차피 다 관둘 텐데.”
   “어쩌면……”
   “다 돈을 벌어야 되고.”
   “그래, 결국엔 다 돈을 벌어야 하지.”
   “예술이니 뭐니 했던 때가 순진해 빠졌던 거지.”
   “……”
   “우리 기수 중에 살아남은 사람은 강주가 유일할 거야.”
   “강주?”
   “그래, 그 강주.”
   “걘 좀 평범했는데.”
   “교수도 하고 결혼해서 잘 먹고 잘산다더라.”
   “너는? 뭐 준비하는 게 있니?”
   “나? 난 완전히 그만뒀다고 봐야지. 이제 너무 옛날 사람이 됐어. 세상이 많이 변했으니까.”
   “나한테라서 그렇게 얘기하는 거니?”
   “……”
   “그런 거니?”
   “그렇게 생각해?”
   “조금.”
   “그래도 상관없어.”
   “이제 상관이 없니?”
   “별로 말하고 싶지 않아. 연극에 관해서는 말이야.”
   “그렇구나.”
   “……”
   “마음이 닫혔니?”
   “많이 다쳤냐고?”
   “아……”
   “승혜야, 나 솔직히 너랑 통화하는 게 편치 않아. 용건이 있으면 어서 얘기하고 정리하자.”
   “난 그냥 너랑 이야기가 하고 싶어서……”
   “그러니까 무슨 얘기?”
   “……”
   “졸업한 지 거의 이십 년이나 됐잖아. 이렇게 불쑥 연락해서 하고 싶은 얘기란 게 도대체 뭔데.”
   “그냥 사는 얘기랑 연극 얘기.”
   “나는 별로 하고 싶지 않은 것 같아.”
   “왜?”
   “너도 알잖아.”
   “모르겠어.”
   “……”
   “상대가 나라서 말하기 싫은 거니?”
   “나 지금 취조당하는 거 같다?”
   “미안해.”
   “……”
   “그런데 들었어? 나 사실 한국에 살지 않아. 아주 먼 곳에 있어.”
   “몰랐네. 별로 궁금하지도 않지만.”
   “여기 있으면 옛날 생각이 많이 나. 대화할 사람이 없거든. 하루에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날들이 더 많아.”
   “그렇군.”
   “이상해. 사람을 만나지 않으니까 예전 일들이 더 생생히 기억나. 바로 어제 일어난 일처럼 말이야.”
   “어제?”
   “한번 네 생각이 나니까 멈출 수가 없었어.”
   “갑자기?”
   “갑자기.”
   “돌았니?”
   “뭐라고?”
   “미쳤냐고.”
   “……”
   “……”
   “윤경아, 그런 말은 함부로 쓰는 게 아니야.”
   “왜 내 생각이 나셨을까? 난데없이.”
   “우리 아이가 너 같았거든.”
   “그게 무슨 소리야?”
   “듣고 싶니?”
   “글쎄, 잘 모르겠어. 네가 무슨 의도로 이리저리 돌려 묻는 건지 말이야. 난 듣고 싶은 것도 아니고, 듣기 싫은 것도 아니야. 네가 결혼했었는지 아이가 있었는지도 전혀 몰랐어. 별로 알고 싶지도 않고.”
   “결혼 안 했어.”
   “……”
   “나는 말이지, 말하고 싶었어. 누구에게든 말하고 싶었는데, 누가 좋을지 판단이 서질 않는 거야. 그러다가 너여도 좋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어. 너여야만 한다는 생각.”
   “……”
   “기분 나쁘다면 사과할게.”
   “뭐하는 수작인지 난 잘 모르겠다.”
   “미안해.”
   “……”
   “하지만 내 아이의 일이니까. 그 아이는 지금 내 전부야.”
   “……”
   “나도 그렇게 되어버렸어. 아이가 전부인 여자가.”
   “좋아, 말해봐. 그런데 시간을 오래 낼 수는 없어. 금방 끊어야 할 거야.”
   “일은 당분간 쉰다고 하지 않았어?”
   “할 일이야 차고 넘치지 않겠니. 빨리 끝내자.”
   “알았어. 노력해볼게.”
   “……”
   “그때 말이야. 우리가 졸업 작품 준비할 때.”
   “정말 그때 얘기할 거니?”
   “응, 필요해. 필요한 것 같아.”
   “그 시절은 별로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야. 다 지나간 일이잖아. 옛날 일이라고.”
   “하지만 너도 듣고 싶을지 몰라.”
   “그건 네가 판단할 문제가 아니야.”
   “맞아. 하지만 내 문제이기도 했으니까.”
   “네 문제라고?”
   “네가 상처받은 건 알아. 그런데 그 일로 나도 무척 상처받았어.”
   “어떻게?”
   “너는 잘못을 저질렀지만, 모두의 동정을 받았잖아. 나는 아무도 동정해주지 않았어. 내 상처에 대해서 말이야. 나는 어떠한 보호도 받지 못했다고. 완전히 혼자였어.”
   “그 사건에서 네가 상처받았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니?”
   “너는 이제 당당하구나.”
   “다 지난 일이야. 시발 벌써 이십 년이나 지났다고.”
   “맞아. 네 말이 맞아. 다 지난 일인데도, 돌아와 버렸어, 어느 날.”
   윤경은 전화를 끊어버렸다. 여전히 그때와 똑같은 목소리를 내는 그 애를 참을 수 없었다.


2

   설핏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윤경은 보호자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협탁 위에 놓인 휴대폰이 나지막한 소리를 내며 병실의 침묵을 깼다. 승혜였다. 한두 달쯤 전에 번호를 차단한 것 같은데 다시 전화가 온 것이었다.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하며 윤경은 진동하는 휴대폰을 그러쥐고 복도로 나왔다. 문득 하나의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완전히 말도 안 되는 인과관계였지만 이미 거기에 설득당하고 말았다. 이 전화를 받으면 이모가 또다시 수술을 받지 않아도 된다. 그러니까, 내가 애써 누군가를 다정하게 대한다면 세상 또한 나를 좀더 너그럽게 대해주지는 않을까, 하는 그런 생각.
   “여보세요.”
   “……”
   “승혜니?
   “……”
   “승혜 맞지?”
   “아, 미안. 네가 전화 받을 줄 몰랐어.”
   “지난번에 말이지. 그렇게 끊어버린 건……”
   “괜찮아. 난 괜찮아.”
   “……”
   “이모님은 좀 어떠셔?”
   “그냥…… 많이 주무셔.”
   “그렇구나.”
   “……”
   “좋아지실 거야.”
   “……”
   “네가 옆에 있을 거니까.”
   “저기 있잖아, 저번에 네가 하고 싶다는 얘기. 한번 들어보고 싶었어.”
   “정말?”
   “응.”
   “고마워.”
   “……”
   “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혹시 그때 필 교수님 기억나? 졸업 작품 담당해주시던.”
   “필 교수? 그 사람이야 물론 기억하지. 학생들하고 술 자주 먹고 말도 잘 통하고. 왜 우리랑 드랙쇼 같은 거 보러 갔다가 사라져가지고 한참 찾아다녔잖아. 진짜 대단했다 그날.”
   “그랬어?”
   “너는 없었나?”
   “난 없었어.”
   “……”
   “아무튼. 그때 그 일 있고 나서 필 교수님이 나를 따로 불렀어. 연구실에 갔더니 전에 없이 차가운 얼굴을 하고 있더라고. 바쁜 척, 괜히 책상을 정리하는 척하면서, 나랑 눈도 못 마주치셨어. 그러다 하는 소리가 ‘너한테 실망했다’라고, 아니 ‘네가 더 실망이다’ 일지도 모르겠는데, 온몸으로 날 책망하셨어. 실망이라고. 진짜 실망했다고. 원망의 눈을 하고서 말이야. 우리 기수는 내가 다 망친 거라고. 그렇게 말했어.”
   “너 필 교수 좋아했잖아.”
   “아니, 네가 알았는지 모르겠지만 교수님은 너를 무척 아끼셨어. 나 따위는 아무리 노력해도 너처럼 되기 어려울 거라고 말하곤 했으니까.”
   “글쎄, 그 사람은 좀 무기력했지. 온갖 멋있는 척은 다 하면서도 정작 중요한 일이 생기면 뒤로 빠져버렸잖아. 그때도 뭘 한 게 없지. 아무것도.”
   “그건 그분 권한 밖의 일이었기 때문이야. 그래도, 우리는 그 사람한테 더 많은 걸 기대했지……”
   “술 좀 사준다고 너무 마음을 줬지 우리가.”
   “필 교수님은 내가 너를 배신했다고 생각하셨어.”
   “배신? 우리가 무슨 배신을 하고 말고 할 사이였나? 단순히 같은 해에, 같은 학과에 입학했을 뿐인데.”
   “그래. 그렇게 여기는 편이 낫겠지.”
   “지금 생각하면 다들 왜 그랬나 싶다. 평생 보고 살 사람들처럼.”
   “영원히 살 것처럼 사니까. 젊은 사람들은.”
   “그런데 왜 갑자기 그런 얘기를 꺼내는 거야? 억울한 기분이라도 드니? 그때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았어?”
   “……”
   “……”
   “내가 말하는 게 이런 거야. 나는 옳은 일을 하고도 비난받았어.”
   “너는 공개재판이라도 하듯이 모두의 앞에서 나를 고발했어. 나는 갈가리 찢겨졌고. 그것으로 부족했다는 거니?”
   “아니야, 충분했어. 너의 굴욕적인 얼굴을 보면서 만족했어.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된 것 같았고.”
   “그런 말 하려고 전화했었구나. 아주 마음이 시원하겠다.”
   “아니, 그런 게 아니야. 나를 오해하지 말아줘. 나는 내 아이 얘기를 하고 싶었어.”
   “네 아이?”
   “그래. 내 아이. 내 아이가, 너처럼 굴었어.”
   “나처럼 굴다니?”
   “미안, 표현이 이상해서. 한국어를 자주 말하지 않아서 그래. 아주 어색해질 때가 있거든. 생각처럼 말이 안 나갈 때가 있어.”
   “됐어.”
   “그 애는 라이팅 클래스를 들었지. 글을 쓰고 싶다고 했어.”
   “나는 이제 글 같은 건 쓰지 않아. 누구 덕분에.”
   “들어봐. 내 아이가 수업 과제에서 다른 사람의 글을 베꼈어. 완전히 똑같이.”
   “……”
   “똑같이 말이야.”
   “……”
   “나는 그때 너를 바보라고 생각했어. 순서도 바꾸지 않고, 그냥 보이는 것을 거의 그대로 베껴 쓰다니, 거기엔 표절이라는 말조차 아까웠어. 너는 어쩌면 그렇게 바보 같을 수 있었을까. 아무도 모를 거라 생각하고, 남이 쓴 문장을 네 것이라고 우겼어. 몇 번씩이나.”
   “……”
   “그런데 내 아이가 똑같은 짓을 저지른 거야.”
   “……”
   “심지어 그건 아름다운 글도 아니었어.”
   “너는 그 아이도 고발할 거니?”
   “모르겠어.”
   “모르겠다니.”
   “그럴 수도 없어.”
   “그때는 망설임이 없었잖아. 나는 네게서 광기를 느꼈어.”
   “아니야, 그때도 망설였어. 많이, 많이 망설였어. 내가 너에게 했던 말 생각 안 나니?”
   “이젠 그 일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아. 다 지워버렸어.”
   “내가 그 작품을 안다고 얘기했을 때, 그때 봤던 너의 표정을 절대로 잊을 수 없을 거야. 그런 장면은 평생 잊을 수가 없지.”
   “……”
   “너는 부인했어. 너는 모른다고 되풀이해서 말했어. 지금도 그렇게 얘기할 수 있니?”
   “이미 다 인정했잖아. 합당한 처벌도 받았으니까 다 끝난 얘기야.”
   “넌 정말 가벼워졌구나.”
   “아니, 나는 사라지고 싶었어. 아주 오랫동안. 죽은 듯이 지냈어. 그게 지금의 나야.”
   “그렇지만 너는 꿋꿋이 남아서 연극을 계속했잖아. 나는 너를 존경해. 너는 정말 용감해. 비꼬는 게 아니야. 난 졸업하고 바로 그만뒀어. 시작도 전에 그만둘 수밖에 없었어. 네가 알았는지 모르겠지만 네 평판보다 나에 대한 소문이 더 안 좋았어. 나는 배신자였어. 나는 밀고자로 완전히 낙인찍혔던 거였어. 아무도 내 앞에서 자기 속을 드러내지 않았거든. 아무도, 정말 누구도 내게 일을 주지 않았고……”
   “나를 탓하고 싶은 거니?”
   “아니야.”
   “그럼 왜 자꾸 전화하는 거야?”
   “너랑 이야기가 하고 싶었어. 아니, 너한테 묻고 싶었어.”
   “……”
   “너는 행복했니? 훔친 그 글로 공연할 때, 그 순간만이라도 행복했니?”
   “후폭풍이 워낙 세서 그런 건 별로 생각나지도 않아. 생각 안 한 지 오래고. 나도 살아야 하지 않겠니.”
   “그래. 살아야지, 살아있어야 돼.”
   “……”
   “다행이다.”
   “승혜야, 그만하자. 역시 무리였던 것 같아. 이제 와서 다 무슨 소용이니.”
   “잠깐만, 너에게 한 가지를 더 묻고 싶어.”
   “또 뭐가 남았는데.”
   “네가 연극을 계속했던 건, 무언가를 증명하고 싶어서였니?”
   “그게 무슨 뜻이야?”
   “말 그대로야.”
   “네 생각이 그렇다는 거야?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그딴 식으로 떠들었다는 거야?”
   “나는 졸업한 후에 사람들과 만나지 않았어.”
   “너는 기수 모임에 한 번도 나오지 않았지.”
   “아무도 나를 불러주지 않았어. 아무도.”
   “……”
   “왜 너의 작품을 쓰지 않고 스태프로만 일했어?”
   “……”
   “너는 속죄하는 사람처럼 남의 작품만을 위해서 일했어. 네 글을 쓰지 않았어.”
   “속죄가 아니야. 겁이 났을 뿐이지.”
   “겁?”
   “그래.”
   “너는 분명 재능이 있었어. 재수 없긴 했지만, 재능이 있었어.”
   “……”
   “아무것도 훔칠 필요가 없었어.”
   “……”
   “정말이지 그럴 필요가 없었다고.”
   “아니, 네 말이 맞아. 나는 남의 것을 훔쳤어. 해서는 안 되는 짓을 했어. 원인이 있고, 그에 따르는 결과가 주어졌을 뿐이야. 그저 그랬을 뿐이야.”
   “맞아. 그건 변함없는 사실이야.”
   “지금 와선 다 쓸데없는 얘기지. 난 그만 끊어야겠다.”
   “잠깐만.”
   “……”
   “내 아이는 말이지. 재능이 없어. 나는 그것을 알아버렸어.”
   “남의 것을 베꼈기 때문에?”
   “아니, 내 아이이기 때문이야. 그 아이는 나를 쏙 빼닮았거든. 가끔은 정말 끔찍할 정도로 똑같아.”
   “……”
   “유전자라는 건 정말 무시무시해.”
   “……”
   “나는 그때 너한테 화가 났었어.”
   “무슨 소리야?”
   “네가 바보같이 남의 것을 표절하고 하는 짓거리가 멍청해서 견딜 수가 없었어. 너 같은 사람이 겨우 그 정도를 탐냈다는 게…… 참을 수 없었어.”
   “……”
   “그래, 나는 그 얘기를 하고 싶었던 것 같아.”
   “……”
   “……”
   “다 지난 이야기야. 너나 나나. 우리 모두.”
   “모두.”
   “다들 늙고 지쳐서 죽을 일만 남은 것 같아. 자기 인생이 만들어놓은 잔해에 치이면서.”
   “……”
   “……”
   “만약에 말이야. 네가 그 이후로도 계속 무언가를 썼다면, 그건 어떤 이야기였을까?”
   “글쎄. 아마도…… 꽤 어두운 이야기들이었겠지.”
   “그렇겠지?”
   “혼자 남은 사람이 있고,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것으로부터 배반당하는 그런.”
   “……”
   “……”
   “윤경아, 내가 다 망친 걸까?”
   “……”
   “그런 걸까?”
   “……”
   “정말 이상하지 않니? 어째서 세계가 이따위인지.”
   “……”
   “……”
   “그만 끊을게.”
   “그러자.”
   “참, 네 아이는……”
   “그 아이는 괜찮을 거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괴로움도 슬픔도 없이. 나는 그 아이가 평화롭게 지내기를 바라. 그 무엇도 만들지 않고. 조용히, 먼 곳에서.”

전하영

여름에 쉬고 가을부터 다시 소설을 쓰려니 생각처럼 잘 진행이 되지 않았다. 아이디어 단계에서 이것저것 손댈뿐 아무것도 완성하지 못할 것 같다는 불안이 커지던 어느 시점에선가 새로운 이야기를 쓰는 대신 예전 글을 고쳐보자고 방향을 틀었다. 이 글의 초고를 쓰던 때, 대략 2019년 1월 즈음 내 인생의 그래프는 최저점을 지나는 중이었다. 소설을 쓰면서 그 시간을 버텼고, 이후로는 좋은 일들이 많이 생겼다. 아무튼 그때나 지금이나 소설 안에 대화가 들어가고 그것을 큰따옴표로 묶어 표시하는 방식이 왠지 귀엽게 느껴지고 마음에 든다.

2021/12/28
49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