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이 놀이터 깊숙이 드리운 봄이에요. 솜사탕 같은 민들레 씨앗이 바람에 포르르 날렸어요. 민들레 보육원 놀이터에서 아이들은 민들레 씨앗을 따라다녔어요. 씨앗을 손으로 잡으려고 폴짝폴짝 뛰면서요. 그런데 바람은 보육원 담벼락 밖만 뚫어지게 바라보며 중얼거렸어요.
  “바람아, 바람아, 아빠 좀 찾아줘.”
  바람은 밤이 될 때까지 바람에게 빌다가 아빠가 쓴 편지를 다시 읽었어요.

바람아, 아빠가 열심히 돈 벌어서 민들레 씨앗이 다시 날리는 내년 봄에 꼭 너를 찾으러 올게. 약속할게. 아빠 믿지?

바람은 편지를 구겼어요.
  “아빠 나빠. 미워. 우주 최강 거짓말쟁이.”
  일 년 전, 바람은 아빠의 손을 잡고 민들레 보육원 앞으로 왔어요.
  “바람아, 널 돌봐줄 사람도 없고 살 집도 없어서 어쩔 수가 없다. 아빠가 일 년 동안 열심히 돈 벌어서 데리러 올게.”
  그후 다시 봄이 찾아왔지만, 아빠는 나타나지 않았어요. 바람은 매일 울며 아빠를 기다렸는데도 말이에요.
  “어디든 날아갈 수 있는 바람아, 아빠를 찾아줘.”
  그때였어요. 담 너머에서 바람 한 자락이 불어와 바람이 주위를 맴돌았어요. 바람의 머리칼이 흩날렸어요.
  “네가 나를 자꾸 불렀어?”
  바람은 주위를 돌아봤어요. 아무도 없었어요. 아이들은 멀리서 놀고 있거든요.
  “누구야?”
  “난 바람의 정령이야.”
  따뜻한 바람이 바람의 온몸을 감싸안았어요.
  “내가 느껴지지?”
  “드디어 왔구나. 고마워. 바람아, 혹시 우리 아빠 좀 찾아줄 수 있니?”
  바람의 정령은 바람의 머리칼을 쓸어올렸어요.
  “너희 아빠가 누군데?”
  바람은 주머니에서 사진을 꺼냈어요. 사진 속에서는 바람이 아빠 품에 꼭 안겨 있었죠.
  “너랑 아빠랑 눈이 정말 닮았다. 근데 이 사진 한 장으로 사람을 찾는다는 게 가능할까?”
  “넌 어디든 갈 수 있는 멋진 바람이잖아.”
  바람의 정령이 바람의 옷자락을 팔락거렸어요.
  “음…… 혹시 보이면 이야기해줄게. 나 간다.”
  바람의 정령은 놀이터 한 바퀴를 슥 돌아 담벼락을 타고 밖으로 밀려나갔지요.
  바람은 그때부터 바람의 정령을 불러댔어요.
  “바람아, 우리 아빠 봤니?”
  “아니. 못 봤는데……”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바람은 바람의 정령에게 아빠의 행방을 물었어요.
  어느 날이었어요.
  “나 봤어. 네 아빠.”
  바람의 정령은 이른 새벽에 창문 틈으로 들어와 바람을 깨웠어요.
  “정말? 어디서?”
  잠이 덜 깬 바람이 눈을 비비며 물었어요.
  “말로 설명하기가…… 같이 가서 볼래?”
  “어떻게?”
  “나를 타고 가면 되지.”
  바람의 정령은 바람의 온몸을 에워쌌어요. 따스한 바람이 바람의 몸을 감쌌죠. 마치 포근한 엄마 품 같았어요. 살랑거리는 바람처럼 바람의 몸이 좌우로 흔들거렸어요.
  “꽉 잡아.”
  바람은 바람의 정령을 타고 공중으로 솟아올랐어요. 처음엔 무서워 몸을 부르르 떨었지만 곧 괜찮아졌어요. 바람처럼 자유로워지는 일, 이건 늘 상상하던 일이었거든요.
  “너무 상쾌하다.”
  바람은 초록색 잔디 위로 몸을 날렸어요. 풀잎들이 바스락거리며 한꺼번에 돌아누웠죠. 바람은 라일락을 흔들었어요. 라일락 꽃향기가 몽글몽글 피어올랐죠.
  그때였어요. 바람의 정령이 크게 말했어요.
  “저기 네 아빠 맞지?”
  바람은 숨을 멈췄어요. 아빠였거든요. 아빠는 뼈가 드러나는 비쩍 마른 팔뚝으로 아빠 몸집보다 커다란 쇠붙이를 들었어요. 아빠 몸이 휘청거렸어요. 눈물이 왈칵 솟아올랐어요.
  “아빠 가까이 가자. 안기고 싶어.”
  “너는 바람을 타고 있어. 그래서 사람들 눈에 안 보여.”
  “그럼 아빠 땀이라도 닦아주자.”
  아빠는 비틀거리며 무거운 쇠붙이를 들고 날랐어요. 아빠의 이마에 땀방울이 조로록 흘러내려 눈에 들어갔어요. 아빠는 눈이 따가운지 눈을 쉼 없이 깜빡거렸지요.
  “그래, 땀을 식혀주자.”
  바람의 정령은 아빠의 이마를 스쳐지나갔어요.
  “아, 시원하다.”
  아빠는 이번에 필요없는 목재를 쌓았어요. 목재들이 테트리스 게임처럼 겹겹이 포개졌어요.
  “밥 먹고 합시다.”
  어떤 아저씨가 외치자 아빠는 장갑을 벗었어요. 아빠의 손은 더는 보드랍지 않았어요. 나무껍질처럼 단단하고 울퉁불퉁했죠. 아빠 손을 잡아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어요. 아빠는 사무실에 서서 컵라면을 후루룩 먹다 사레가 걸려 콜록거렸어요.
  “먹고 또 일해야 하는데 너무 뜨겁네.”
  바람은 바람의 정령에게 부탁했어요.
  “아빠 라면 좀 식혀주자.”
  바람의 정령은 컵라면 위를 한 바퀴 돌았어요. 꿀떡꿀떡 아빠는 조금 식은 컵라면 국물을 목에 넘겼어요.
  후루룩 몇 번의 젓가락질 끝에 아빠는 컵라면 한 컵을 뚝딱 해치웠어요.
  아빠는 컵라면 그릇을 쓰레기통에 버리고 높은 건물로 올라갔어요. 계단을 밟을 때마다 발에 힘을 실었죠. 아빠는 3층 건물에 올라가 안전고리를 걸고 계속 망치질을 했어요. 난간대가 없어 너무 위험해 보였어요. 아빠가 움직일 때마다 안전고리가 이리저리 흔들렸어요. 아빠는 줄 하나에 목숨을 걸고 종일 일을 했지요.
  “아이고, 허리야.”
  아빠가 잠시 허리를 펴고 목을 뒤로 젖혔어요.
  “아이고, 목이야.”
  아빠는 주먹으로 허리와 목을 마구 두드렸어요.
  저녁이 되고 일이 끝나자 아빠는 한 편의점으로 걸어갔어요. 아빠는 편의점 작업복을 입고 앉았어요. 유통기한이 지난 삼각김밥 한 개를 허겁지겁 먹어치웠어요. 소화가 안 되는지 주먹을 말아쥐고 가슴을 툭툭 쳤지요. 한 아저씨가 아빠에게 다가와 소리쳤어요.
  “오늘은 실수하지 말고 일 똑바로 해요.”
  “네, 사장님.”
  사장은 편의점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어요. 아빠는 카운터 의자에 앉았어요. 깜깜한 밤이라 그런지 손님이 없었어요. 아빠가 꾸벅꾸벅 졸았어요. 그때였어요. 편의점 밖에서 사장님이 다시 편의점으로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었어요. 바람은 아빠에게 소리쳤어요.
  “아빠, 얼른 일어나요.”
  하지만 바람의 목소리가 아빠 귀에 들릴 리가 없었어요.
  “바람아, 도와줘.”
  바람의 정령은 얼른 몸을 비틀어 아빠 머리 위에서 동그라미를 그렸어요. 아빠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휙 날렸어요.
  “아, 깜짝이야.”
  아빠가 눈을 뜨자마자 사장님이 들어왔어요.
  “물건을 두고 간 게 있어서 말이야. 큼큼.”
  사장님은 카운터에서 종이 한 장을 들고 다시 사라졌어요.
  “휴, 다행이다. 뭔가 바람이 불어왔던 것 같은데…… 바람이 날 깨워줬네. 바람아, 고맙다.”
  바람은 입을 툭 내밀었어요.
  “아빠가 좋아서 이렇게 해주는 게 아니야. 여전히 아빠는 미워. 날 데리고 간다는 약속도 안 지키고.”
  딸랑 편의점 문이 열렸어요. 여러 명의 아저씨가 들어왔죠. 아저씨들은 과자와 음료를 많이 사들고 계산대로 왔어요. 물건들이 산처럼 쌓였죠.
  “삑, 삑.”
  아빠는 천천히 물건들을 계산했어.
  “빨리 좀 계산해요. 왜 그렇게 천천히 하는 거야?”
  물건을 든 아빠의 손이 덜덜 떨렸어요. 이마에는 식은땀이 흘러내렸죠.
  “죄송합니다. 제가 편의점 일한 지 며칠 되지 않아서……”
  “아휴, 답답해.”
  손님들이 소리를 칠 때마다 아빠의 손은 더 떨렸어요. 계산을 마친 아저씨들이 편의점 밖으로 나가며 투덜댔어요.
  “저렇게 일 못하면 민폐야, 민폐.”
  아빠가 고개를 푹 숙였어요. 바람의 정령이 고개 숙인 아빠의 머리 위를 동그랗게 한 바퀴 돌았어요.
  “이상하다. 문이 열렸나? 바람이 자꾸 부네.”
  아빠는 문을 열었어요, 그러고는 하늘을 바라보았어요.
  “바람이 엄마, 바람이 잘 있겠지? 오늘따라 내 딸이 더 보고 싶네.”
  눈물이 솟구쳤지만 바람은 꾹 참았어요.
  “거짓말쟁이. 그렇게 보고 싶다면서 데리러 오지도 않고.”
  아빠는 가슴팍에서 사진을 꺼내들었어요. 아빠 품속에 안긴 바람의 사진을 보고 고개를 떨구었어요. 어깨를 들썩거리면서요.
  아빠는 밤하늘에 별이 뱅글뱅글 돌 때쯤 편의점 밖으로 나왔어요. 차가운 밤공기를 뚫고 터덜터덜 집으로 걸어갔지요.
  낡은 건물로 들어가 방문을 열자 좁고 추운 방 하나가 나왔어요. 콜록콜록 기침을 내뱉자 공중에 하얀 입김이 삐져나왔어요. 아빠는 먼지가 잔뜩 묻은 잠바를 의자에 걸고 의자에 몸을 묻고 앉았어요. 그러다 갑자기 서랍을 열고 노트를 꺼냈어요. 누런 노트를 펼치고 뭔가를 열심히 끄적였어요. 그러다 그대로 바닥에 누워 잠이 들었죠. 바람은 공책을 바라보았어요.
  아빠가 펼쳐놓은 장에는 ‘해’만 적혀 있었어요.
  “앞 장이 보고 싶어. 바람아, 도와줘.”
  바람의 정령은 바람을 불어 일기장을 팔랑팔랑 넘겨주었어요.

민들레 씨앗이 날리는 봄, 바람이를 데리러 가겠다고 바람이에게 약속했다. 그래서 그동안 안 해본 일이 없다. 그러다 새벽에 오토바이를 타고 배달일을 나가 크게 다쳤다. 몇 달간 병원에 입원해 있어 돈을 벌지 못했다. 이제 막 다시 일을 시작했다. 아직 몸이 다 낫지 않아 온몸이 아프다. 하지만 오직 바람이만를 데려오는 생각만 하고 견딘다. 바람아 미안해. 조금만 더 기다려. 바람이 엄마, 하늘에서 바람이 잘 돌봐줘. 약속 못 지켜서 미안해. 조만간 꼭 바람이 데리고 와서 잘 키울게. 약속.

“아, 아빠.”
  바람이 마음속에 있던 아빠에 대한 미움이 바람에 모두 밀려나갔죠. 바람은 엉엉 울며 속삭였어요.
  “아빠, 엄마랑 나한테 한 약속 꼭 지켜야 해.”
  잠이 든 아빠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어요. 낮에 본 얼굴은 근심이 가득한 무거운 얼굴이었는데, 새근새근 잠이 든 아빠의 모습은 마치 아무것도 모르는 귀여운 아기의 모습 같았어요.
  “아빠!”
  바람은 나지막이 아빠를 불러보았어요.
  “바람아, 미안해.”
  아빠는 잠꼬대를 해댔어요. 눈가에 눈물이 새어나왔죠. 바람은 마음이 아팠어요.
  “우리 바람으로 아빠 눈물 말려드리자.”
  그날 밤, 바람은 새벽이 올 때까지 아빠의 눈물을 말려주었어요. 아빠의 얼굴은 눈물 자국 때문에 얼룩덜룩해졌어요.
  어느새, 날이 밝아왔어요.
  “바람아! 이제 다시 보육원으로 돌아가야 해. 바람의 정령의 정체가 들키면 안 되거든.”
  바람은 다시 민들레 보육원으로 날아갔어요. 그곳에서 바람을 데리러 올 아빠를 기다리려야 하거든요.
  보육원으로 가는 길, 바람을 타고 숲속으로 날아갔어요. 바람은 나뭇가지 틈으로 빠져나갔어요. 바람에 나뭇잎이 아느작거렸어요. 바람은 숲속에 있는 냇가도 건넜어요. 스치는 바람에 냇가가 올랑거렸지요.
  바람을 타고 처마 끝을 스쳐지나갔어요. 처마 끝에 매달린 풍경이 자랑거렸어요. 맑게 뻗어나가는 풍경 소리에 마음이 편안해졌지요.
  바람은 보육원에 도착해 이불 속으로 들어왔어요. 이불 속에 구겨진 아빠의 편지를 다시 반듯하게 펼쳐 가슴에 꼭 안았어요.
  바람은 전처럼 그렇게 슬프지 않았어요. 아빠가 데리러 오기 전까지 바람의 정령과 함께 아빠를 몰래 찾아갈 거니까요.
  창문 틈으로 밀려들어오는 달빛을 받으며 바람은 코 잠이 들었지요. 바람의 얼굴이 환한 달빛에 비쳐 반짝거렸어요.

이미주

2022년 KB창작동화제 작품공모전에서 대상(문화체육관광부 장관상)을 수상하고, 2023년 경상일보 신춘문예와 토지문학제 평사리문학대상을 통해 동화를 발표하기 시작했다.

저는 글 쓰는 게 세상에서 제일 신납니다. 저만의 세상을 마음껏 만들 수 있거든요.

-초대장-
어린이 여러분, 그리고 동화를 사랑하는 모든 분을 동화작가 이미주가 만드는 재미있고 다양한 세계에 초대합니다.
장소 : 마음속
시간 : 언제 어디서나

우리 어린이들이 각자 가진 소중하고 간절한 바람이 이루어지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바람의 바람」을 썼습니다. 감사합니다.

2024/01/17
6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