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just not the hero type.”
   ‘난 영웅 타입이 아니다.’ 수십 번 본 장면인데도 새로운가보다. 릴리의 눈은 모니터를 향해 있었다. 입으로는? 어서 와 밥을 먹으라고 말한다. 아이언맨에게 슈트가 있다면, 나에겐 릴리가 있지. 그녀는 나의 엄마다.
   “띵”
   전자레인지가 멈췄다. 순두부찌개가 완성되었음을 알리는 소리. 릴리는 오클라호마 시티에 있는 쇼핑몰 푸드코트에서 순두부찌개를 조리한다. 릴리의 빨간 앞치마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북창동식 순두부
   “Who is it?”
   북창동은 누구인가? 북창동식이란 무슨 뜻인가? 가르쳐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I am lron man.”
   영화의 마지막 대사가 흘러나왔다. 그제서야 릴리는 식탁에 앉았다. 그렇다. 릴리는 <아이언맨>의 열정적인 팬이다. 정확히 말하면 토니 스타크를 좋아한다. 그래서 우리 집엔 빨간 얼굴이 많다. 머그잔, 텀블러, 목욕 타월, 달력…… 곳곳에 아이언맨의 얼굴이 있었다. 나는 괜히 순두부 위에 올라간 달걀을 포크로 콕콕 찔렀다. 노랗고 부드러운 노른자가 옥수수 수프처럼 국물에 퍼졌다. 릴리가 푸드코트에서 일하게 된 날부터 식탁에는 순두부찌개가 자주 올라왔다. 릴리는 한국에서는 순두부찌개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을 했었다. 서울 근처에서 살았다고 하는데, 이해하기 좀 힘들다. 오클라호마 근처는 캔자스나 콜로라도로 나눠지는 아예 다른 곳인데. 서울 근처는 어디까지일까? 나는 릴리의 아들이지만 아는 게 별로 없다. 내가 그녀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릴리에겐 남자친구가 있었고 그가 미국인이었다는 것, 릴리는 그를 사랑했고 그래서 나를 낳았다는 것 정도이다. 이후에 그를 찾아 미국에 왔는데 그게 오클라호마였다는 것. 하지만 오클라호마엔 그가 없다. 어떻게 아느냐고? 아빠라는 사람을 본 적이 없으니까. 태어나서부터 줄곧.
   “모순”
   릴리는 한국 사람이지만 나는 한국 사람도 아니고 미국 사람도 아니다. 나는 누구일까. 새롭게 알게 된 한국어를 발음해 보았다. 릴리는 커피를 내리다 말고 나를 쳐다보았다.
   “어떤 뜻인지 아니 빌리?”
   릴리는 굳이 영어로 물었다. 릴리가 한국어를 가르쳐주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혼자 유튜브와 번역기로 한글을 배웠다. 특히 요 며칠 동안은 종일 시립도서관에서 한국 영화 DVD를 보았다. 학교를 빠지고서. 영화는 주인공이 학교 폭력에 시달리다 자살하는 내용이었다. 나는 영화 중간 ‘모순’이라는 자막이 뜰 때 일시 정지를 눌렀다. 그리고 나름대로 정의했다.
   “토니 같은 사람. 천재 억만장자에 잘생기고 세상까지 구해.”
   이렇게 말하자 릴리가 목구멍을 보이며 껄껄 웃었다. 거짓말 같은 이야기. 그런 사람은 없다. 세상에 그런 사람이 있다고 믿는 것은 한번도 본 적 없는 아빠가 학교 폭력과 월세에 시달리는 우리를 구해주러 나타날 것이라고 믿는 것과 같았다.
   “빌리 크로스, 학교 늦겠다.”
   빌리 크로스, 토니 스타크처럼 살라고 붙여준 이름. 릴리는 내 이마에 쏟아진 머리카락을 쓸어주며 아침을 서둘렀다. 손목에서 은은한 장미 향이 풍겼다.

*

   나는 릴리가 시티로 가는 버스를 타는 것을 보고 정류장 의자에 앉았다. 노먼에서 시티까지는 왕복 3시간이 걸린다. 이곳으로 이사를 온 후부터 릴리는 토네이도가 오지 않는 이상 매일 일을 하러 갔다. 그럼 나는 학교로 가는 것이 이 곳의 생활이었다. 하지만 학교에는 그놈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작은 키, 노란 피부, 검은 머리카락에 폭이 좁은 눈을 가지고 있는 나를 기만하는 놈들. 놈들의 행동이 더욱 과격해진 건 몰에서 일하는 릴리와 나를 목격한 이후부터였다. 내가 다가가면 등을 돌리거나 갑자기 책을 읽거나 먹지도 않는 ‘김치’ 냄새가 난다고 코를 막거나 양손으로 눈을 찢는 시늉을 하는 건 그저 그런 것에 불과했다. 내기 농구를 하는 놈들은 게임이 끝나면 나를 불러냈다. 진 쪽의 화풀이가 나의 머리로, 가슴으로, 배로, 배꼽 아래로 왔다. 농구 코트에 서서 나는 인간 농구대처럼 날아오는 농구공을 온몸으로 막았다. 아니 맞았다.
   “탈거니?”
   학교까지 가는 버스가 도착해 있었다. 아저씨는 오늘도 담배를 피우며 운전 중이었다. 나는 손을 저었다. 버스 문이 빠르게 닫혔다. 내가 일주일쯤 학교에 빠진다고 해서 일어날 일은 학교에 가서 일어날 일보다 적었다. 이곳의 선생님들은 오클라호마에 퍼붓는 비만큼이나 무기력하고, 학교는 재난이 일상이 된 것처럼 가난했다. 그런 환경에서 열세 살짜리 동양인을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정류장을 등지고 걸었다. 붉은 벽돌로 지은 건물들이 한 블록, 두 블록, 세 블록…… 노먼의 끝까지 이어진 것처럼 빼곡했다. 대로에 자전거 한 대 지나가지 않는 휑한 오전이었다. 이따금 옥수수를 실은 트럭이 이 차선 아스팔트를 시원하게 달렸다. 덩치 큰 뭉게구름들이 건물 옥상에 하얀 이불 빨래처럼 걸려있었다. 예쁜 하늘을 보자 실내에만 있는 릴리가 생각났다. 나는 아이폰으로 하늘을 찍어 남겼다. 세 블록쯤 지났을 때, 빨간 간판의 드럭 스토어가 보였다.
   나는 드럭 스토어 뒤편 골목으로 갔다. 좁은 골목을 통과하면 거짓말처럼 뻥 뚫린 하늘과 공터가 나타났다. 공터는 노먼시의 폐쇄된 옛 철길이었다. 이곳은 학교에서 도망쳐 숨을 곳을 찾다가 알게 된 장소였다. 빛바랜 갈색 철길은 오클라호마의 뜨거운 태양과 건조한 바람을 고스란히 맞은 듯 부식되어 있었다. 손끝으로 철길을 만지면 8월 놀이터의 조약돌을 만지는 것처럼 뜨끈하고 시린 냄새가 났다. 정류장에서 3블록 정도를 걸었을 뿐인데, 이곳은 토니 스타크의 지하 연구실처럼 은밀하고, 유일했다. S자 모양으로 뻗은 철길 옆으로는 우거진 나무 한 그루와 데번 에너지 센터가 있었다. 원래는 역사였던 곳인데 이제는 에너지 센터로 쓰이고 있었다. 나는 철길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가방에서 책을 꺼내 무릎에 올려놓았다. 나무 인형이 안경을 쓴 할아버지와 웃고 있는 책 표지에는 한글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피노키오』 (7세~10세용) 지난주 아마존 직구로 15달러에 구매했다. 나는 이 한글 학습용 책을 사기 위해 점심에 칠면조 샌드위치 대신 햄이 들어간 샌드위치를 먹어야 했다. 칠면조의 짭짤하고 푹신한 식감을 떠올리며 책을 넘겼다.
   “제페토 할아버지는 만들지 못하는 것이 없는 목수였어요.” 나는 소리를 내어 읽어보았다. 모르는 단어가 있었다. 아이폰 키보드의 지구 버튼을 눌러 한글로 변환시킨 다음 ㅁㅗㄱㅅㅜ 라고 쳤다.
   목수 [명사] 나무를 다루어 집을 짓거나 가구, 기구 따위를 만드는 일을 업으로 하는 사람.
   업? 이번엔 ㅇㅓㅂ 을 검색했다. 나의 독서란 이렇다. 한 줄 읽고 검색, 검색 결과에서 또 검색, 그런 다음 문장을 다시 읽고 마음속으로 그려보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같은 문장을 한 번이 아니라 두 번을 읽은 적도 있고 열 번을 읽은 적도 있다.
   “할아버지는 귀여운 나무 인형을 만들었어요.”
   모르는 단어가 없을 때에는 기분이 좋았다.
   “어느 날 밤, 별똥별이 할아버지네 집으로 떨어졌어요.”
   똥이라는 단어는 한국어 중에서 가장 재밌다. 똥이라고 발음할 때 진짜 변기로 똥이 떨어지는 것 같기 때문이다. 별똥별, 그러니까 별의 똥?
   “뻥!!!!!!”
   갑자기 사방에서 벽을 뚫고 폭탄이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하마터면 똥이 나올 뻔했다! 나는 무서워서 피노키오 책으로 머리를 가리고 몸을 낮췄다. 총기 사고 대비 훈련 때 익힌 자세였다. 그때는 ‘이런 자세로 날아오는 총알을 막을 수 있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 난 누구보다 빠른 속도로 방어 자세를 했다. 그것도 낡아빠진 철길 위에서. 그때! 눈부신 섬광이 나타났다. 에너지 센터 쪽이었다. 희뿌연 연기 사이로 나뭇가지가 보였다. 자세히 보니 나뭇가지는 아니고 벌레 같았다. 벌레는 더 가까워졌다. 믿을 수 없지만, 벌레가 나에게로 뛰어오고 있었다. 누렇고 길쭉한 벌레, 까만 점 같은 눈과 입을 가지고 팔다리를 휘저으며 직립보행으로 뛰어오는 벌레가, 내 발 앞에 와있었다.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벌레는 체조 선수처럼 내 운동화 위로 풀쩍 뛰어올라 끈에 매달렸다. 예수님 자세로 말이다! 나는 소리를 지르며 발을 흔들었다. 오 할렐루야. 피노키오의 얼굴이 벌레처럼 보였다. 벌레가 피노키오처럼 생긴 건가. 나는 온 팔다리를 흔들면서 철길을 빠져나가려고 뛰었다. 골목을 통과하는데 아까 지나온 드럭 스토어에서 여전히 같은 노래가 나오고 있었다. 난 내가 폭발로 죽어서 귀신이 된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

   빌라의 꼭대기에 있는 집까지 쉬지 않고 달렸다. 현관 문고리를 잡아보았다. 문고리가 손에 잡혔다. 죽은 것은 아닌 것 같았다. 갓 블레스 유. 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갔다. 2인용 패브릭 소파가 있는 거실 겸 주방을 지나 욕실을 마주보고 있는 내 방으로 갔다. 내 방 옆에는 파티션으로 분리해 놓은 릴리의 방이 있었다.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나는 바닥에 『피노키오』 책과 가방을 던져놓고 침대에 벌러덩 누웠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비명처럼 들렸다. 시계를 보니 벌써 오후였다. 내가 무슨 경험을 한 걸까. 릴리에겐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만약 FBI가 찾아오면? 쉴드1)가 진짜로 있는 건 아니겠지?
   “똑, 똑”
   침대 위 창문에서 노크 소리가 났다. 우리 집은 3층인데, 비가 내릴 때 말곤 창문 두드리는 소리를 들어본 적 없는 나는 몸을 일으켰다가 기절할 뻔했다. 철길에서 본 벌레가 창문 틈에 몸을 욱여넣고 있었기 때문이다. 벌레는 긴 얼굴과 통통한 팔과 다리, 나무껍질 같은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딱 아이폰만한 체구였다. 벌레는 끙끙거리며 내 방으로 들어왔다. 맙소사. 검은 깨 같은 그 눈을 마주치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나 좀 숨겨줘!”
   창문을 통과해 방으로 들어온 벌레가 사냥꾼에게 쫓기는 사슴처럼 애원했다.
   “한국말 할 줄 알아?”
   나는 어안이 벙벙해서 물었다. 움직이고, 뛰고, 말하고, 사람 같이 생긴 벌레가 한국말까지 했기 때문이다.
   “당연하지. 나 이름도 있어.”
   벌레는 작은 눈으로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강. 냉. 이.”
   처음 듣는 단어였다. 이름이 강냉이인 벌레는 우선 자기를 들여보내 준다면 강냉이의 뜻뿐만 아니라, 더 많은 걸 알려주겠다고 했다. 이 벌레가 정치인처럼 협상을 제안하는 것을 보고 생명체라는 확신이 들었다. 좀 징그러웠지만 나는 벌레에게 손바닥을 내밀어 마치 우주선 도킹이라도 하듯이 조심스럽게 안으로 모셨다. 그러자 벌레는 자연스럽게 『피노키오』 책 위에 올라가 다리를 뻗고 앉았다.
   “나는 마틸다 할머니네 농장의 옥수수였어.”
   강냉이는 오클라호마의 드넓은 건조 지대에서 자란 무수히 많은 옥수수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강냉이는 특별했다. 강냉이의 몸은 황갈색의 유리 알갱이로 이루어져 있었던 것이다. 마틸다 할머니는 강냉이의 특별함을 알아보았지만 트랙터를 모는 젊은 농부는 그렇지 않았다. 그에게 흰색이 아닌 옥수수는 옥수수가 아니었던 것이다.
   “뭐야? 돌연변이잖아!”
   강냉이의 몸은 날카로운 톱니에 잘려 사방으로 흩어졌다. 마틸다 할머니는 두 달 동안 밭을 헤매며 온전한 알갱이를 모아 종자 연구를 위해 데번 에너지 센터로 보냈다. 황갈색의 유리 알갱이들은 기차처럼 연기를 내뿜는 에너지 센터의 기계 속으로 들어갔고 뻥! 소리와 함께 지금의 형태로 태어났다. 진짜 돌연변이가 된 것이다. 사람처럼 탄생한 옥수수를 알게 되면 FBI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므로 강냉이는 태어나자마자 도망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사람으로 치면 정자, 난자였을 때 말야.”
   강냉이는 엄청나게 똑똑했다. 자신이 ‘종자’였을 때도 기억하는 천재였다. 강냉이가 들려주는 얘기는 고대 유물 전시관에서 듣는 인류 스토리보다 더 흥미로웠다. 모르는 게 없고, 못하는 게 없는 마틸다 할머니는 넓은 밭에 옥수수를 심고 정성스레 키웠다고 한다. 스피커를 설치해서 볕이 좋은 날엔 라디오 뉴스를 틀어주고, 바람이 부는 선선한 날엔 책을 읽어주었으며, 비가 내리는 날에는 가만히 빗소리를 듣게 해주었다고 한다. 옥수수들이 조금 자란 후에는 알파벳을 알려 주었으며 아랍어, 만다린, 한국어, 티베트어를 가르쳐 주었다고 한다. 마틸다 할머니는 독재자를 싫어하고 세상의 모든 어린이를 좋아하여 그 영향으로 인해 강냉이 자신도 어린이를 좋아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언젠가 어린 사람을 만나면 마틸다 할머니처럼 지켜줄 것이라는 다짐을 했다는 것도.
   “자, 이제 네 얘기를 해봐.”
   강냉이는 좀 편해졌는지 책 위에 벌러덩 누우며 말했다. 나는 할 얘기가 없었다. 나는 모르는 게 많다. 릴리가 사랑한 사람이 누구인지, 미국인이 맞는지, 토니 스타크를 닮았는지, 그렇다면 왜 내 머리 색은 검은지, 왜 나를 미국으로 데려왔는지, 나는 왜 차별을 받고 있는지……
   “어차피 세상은 다 미스터리야.”
   강냉이는 눈을 감고 이렇게 말했다. 미스터리, 나는 강냉이를 만난 것도 미스터리하다고 생각했다.
   “내일은 나랑 같이 학교에 가.”
   강냉이가 제페토 할아버지 얼굴 쪽으로 돌아누우며 말했다. 맙소사. 학교에 피노키오 같은 강냉이를 데리고 간다면?
   “빌리?”
   나를 찾는 릴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시계를 보니 오후 3시였다. 릴리가 일찍 퇴근한 것을 보고 오늘이 목요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얼른 강냉이를 침대 밑으로 옮겨 놓고 방을 나왔다. 소파에 놓인 장바구니에서 치즈를 뿌린 옥수수의 달콤한 냄새가 났다.

*

   학교를 싫어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학교에 다니다 보면 이유가 생긴다. 내가 다니게 된 학교는 보라색 페인트칠이 된 옛날 콘도 같았다. 보라색 바탕과 외벽의 그라피티 때문에 겉에서 볼 때는 ‘애들이 신나겠네’, ‘참 재밌어 보여’라는 인상을 주지만, 안에서 보면 썩어 있었다. 남자 화장실 변기에서 빈대를 발견한 적도 있다. 과학 실험실의 벽은 멍든 것처럼 파랗게 변색되어 있었고 폭우가 쏟아지면 학교의 꼴은 더욱 비참해졌다.
   “안 들어가고 뭐 해?”
   가방 주머니에서 강냉이가 고개를 내밀고 말했다. 그렇다. 강냉이를 데리고 학교에 왔다. 우리는 지난밤, 릴리가 잠들고 밤새 작전을 짰다. 나는 비장하게 교실로 들어갔다. 딱 일주일 만이었지만 알아보는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누워있거나 음악을 듣는 아이들, 머리를 땋는 여자애, 총 게임을 하며 욕하는 애, 자기 팔에 문신처럼 그림을 그리는 애와 공기가 빵빵하게 들어간 농구공을 들고 장난치는 무리가 있었다. 나는 84제곱미터 밖에 안 되는 교실이 아마존 유역처럼 느껴졌다. 책가방을 메고 아마존에 갔다가 살아서 돌아올 확률은 몇 퍼센트나 될까.
   “헤이, 칭크”
   농구공을 든 녀석이 뒤에서 알짱거렸다.
   “칭크. 칭크. 칭크.”
   못 들은 척하면 놀림은 더욱 심해졌다. 하지만 난 못 들은 척 한 게 아니다. 들은 척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목덜미에 바짝 붙은 녀석이 이따 농구 코트에서 보자고 하면서 혀를 내밀었다. 학교에 온 첫날, 소개를 하고 나서부터 나를 보면 혀를 내밀고 가는 게 유행처럼 번졌다. 내 혀가 짧아서 영어가 구리다는 뜻이었다. 내 혀가 짧은 이유 같은 건 궁금하지 않다. 영어는 구릴 수도 있다. 나는 한국 사람이다. 이런 말을, 속으로 삼켜야 했다. 수업 종이 울리고 내내, 가방 주머니가 자주 열렸다가 닫혔다.
   내가 태어나기 3년 전, 릴리가 서울 근교에서 나의 생물학적 아빠와 막 사랑에 빠졌던 2003년도에 조지 부시는 북한을 지구 ‘악의 축’이라 선언했다. 나는 세 살 때 오클라호마로 왔는데, 주니어하이스쿨 입학을 앞두고 시티 다음으로 큰 도시인 노먼으로 이사를 올 때까지 학교에 다니지 못했다. 난 릴리가 연방정부로부터 받은 보조금으로 홈스테이를 하면서 지냈다. 하지만 이제 보조금을 받을 수 없다. 미국의 대통령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악의 축, 나는 그 단어를 ‘한국’-‘분단’-‘북한’으로 이어지는 검색 키워드를 통해 알게 되었다.
   “악의 축 같은 것들.”
   나는 농구공을 들고 선 놈들을 향해 말했다. 어차피 한국어여서 못 알아들을 터였다. 내가 한국어를 배우고 싶었던 가장 큰 이유. 바로 놈들을 응징할 수 있어서였다. 놈들은 처음 듣는 언어였지만 나쁜 뜻이라는 것은 아는 듯했다. 욕설이 날아왔다.
   “멍청하긴. 한국말 몰라?”
   나는 한국어로 놈들을 조롱했다. 기분이 야릇했다. 하지만 곧바로 농구공이 날아왔다. 멍청이. 난 머리를 세게 맞고 넘어졌다. 다행히 코트 철조망에 걸려 나자빠지지는 않았다. 나는 손바닥을 털고 일어났다. 옆에 떨어진 농구공을 주워 손에 들었다. 놈들은 다시 농구공을 가져가 내게로 던질 게 뻔했다. 가슴으로, 배로, 그다음은 배꼽 아래, 마지막은 늘 거기를 맞추는 것으로 끝났다. 아픈 것보다 수치스러웠다. 농구공을 든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이제, 강냉이 차례였다.
   “강냉이 털릴 차례!”
   강. 냉. 이. 명사로 옥수수. 치아의 속어. 나는 허공으로 농구공을 던졌다. 놈들은 욕을 하며 내게로 다가왔다. 그때였다. 농구공은 바닥으로 떨어지지 않고 놈들을 향해 돌진했다. 한 놈, 두 놈, 세 놈의 머리에 명중했다! 농구공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머리를 감싸 쥔 놈들의 가슴을 향해서!
   “퍽, 퍽”
   놈들의 가슴에서는 욕과 비슷한 소리가 났다. 나는 눈에 힘을 주며 농구공을 가리켰고 그럼 농구공은 내가 지시하는 방향대로 놈들을 차례로 맞추었다.
   “잠시만! 빌리 저 자식, 초능력자 아니야?”
   놈들은 당황해서 더듬거리며 영어로 말했다. 나는 눈동자를 바닥으로 휙, 내렸고 농구공도 휙, 바닥으로 내려왔다. 이때 놈들의 표정이란, 닭 쫓던 개가 지붕을 쳐다보는 것 같았다. 나는 다시 한번 눈에 힘을 주고 놈들을 노려보았다. 그러자 농구공은 거짓말처럼 놈들을 향해 날아갔다! 일명 ‘마틸다 작전’이었다. 강냉이가 농구공에 붙어서 놈들을 혼내주고, 나는 마치 초능력을 쓰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 이 작전으로 말할 것 같으면, 마틸다 할머니가 오래전에 학교에서 악당을 물리칠 때 썼던 유서 깊은 작전이었다. 내 생각보다 훨씬 강냉이의 점프력과 파워가 좋아서 몇 번 눈에 힘이 풀리고 동공이 커졌었지만 놈들은 나보다 더 놀라서, 그것까지 볼 정신은 없었던 듯하다.
   “미안. 멈춰 줘!”
   엉덩방아를 찧고 누워있는 놈들이 애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Too late!”
   나는 강냉이에게 눈으로 신호를 보냈다. 강냉이는 농구공에 붙어 바닥에서부터 점프해 높이 뛰어올랐다. 그러고는 하나, 둘, 셋의 배에 농구공을 내리꽂았다. 나는 아이폰을 꺼내서 놈들이 배 아파하는 모습을 찍었다. 연속 촬영 셔터 소리가 총알이 나가는 소리처럼 들렸다. 속이 다 시원했다. 마지막으로, 강냉이는 다시 한번 농구공을 들고 뛰어올랐다. 핵미사일을 들고 우주로 날아가는 아이언맨처럼 말이다. 놈들은 하늘에 뜬 탱탱한 주홍빛 농구공을 보고 질겁하여 달아났다. 이번엔 어디 차례인지, 자신들이 잘 알기 때문이다. 나는 떨어지는 농구공을 두 손으로 받았다. 강냉이가 다시 지구로 떨어진 아이언맨처럼 탈진해 있었다. 나는 농구공에서 강냉이를 조심스럽게 떼어내고, 강냉이를 안았다.
   “하얗게, 불태웠다.”
   이런 순간에 한국식 농담을 하다니, 강냉이는 진짜 토니 스타크 같았다. 혹시 억만장자가 아닐까? 내가 모르는 걸 수도 있다. 나는 강냉이를 어깨 위에 앉히고 해질녘을 바라보며 농구 코트를 빠져나갔다. 뜯기고, 쓰러진 농구 코트의 철조망이 꼭 나 같았다. 하지만 철조망의 촘촘한 발들이 아직 땅에 박혀 있었다. 빈번히 얻어맞는 태풍에도 말이다. 나와 강냉이는 발에 힘을 주고 꿋꿋하게 학교를 빠져나왔다. 놈들에게 아까 찍은 사진을 한 장씩 보냈다. 그건 한 번만 더 나를 괴롭히면 페이스북에 사진을 유포하겠다는 경고였다. 미국 애들은 SNS를 가장 두려워한다. 진짜 현실은 여기에 있는데. 주홍빛으로 물든 하늘이 우리의 머리 위로 드리워 있었다.

*

   나와 강냉이는 친구가 되었다. 하지만 우린 잠시 헤어지게 되었다. 지역 뉴스에 데번 에너지 센터에서 있었던 폭발이 사흘이나 지나 보도된 것이다. 마틸다 할머니는 뉴스에 출연해서 눈물을 흘렸고 강냉이는 마음 아파했다.
   “내가 데려다줄게.”
   강냉이를 외투 주머니에 넣고 집을 나섰다. 집을 나서기 전에 청바지 밑단을 잘라 동그랗게 묶어 강냉이에게 배낭을 만들어 준 덕분에 오른쪽 주머니가 불룩했다. 한국 고전 영화에서 본 조선 시대 서당식 배낭이었다. 강냉이는 촌스럽다고 싫어했지만 막상 메보고 잘 어울려서 좋아했다.
   “빌리 크로스, 난 이제 네가 누군지 알 것 같다.”
   블록을 내려가는데 강냉이가 주머니에서 얼굴을 위로 내밀고 나를 보며 말했다. 난 내가 누군지 모르겠는데. 무엇이 되고 싶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그런데 이틀 전에 만난 강냉이가 나를 알 것 같다니. 기분이 묘했다.
   “넌 내 최초의 친구야.”
   강냉이가 이렇게 말하고 다시 주머니 속으로 스르륵 들어갔다. 나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 강냉이의 민둥한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렇게 3블록에 도착했는데 드럭 스토어가 보이지 않았다. 폐점을 했는지 꿈을 꾼 건지. 골목을 빠져나오니 철길에 폴리스라인이 쳐져 있었다.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주머니에서 강냉이를 꺼냈다.
   “몸조심해.”
   나는 강냉이가 돌아오지 못할까 봐 걱정이 되었다.
   “행운을 빌어줘, 빌리.”
   마지막으로 우리는 셀피를 한 장 남기고 헤어졌다. 강냉이는 폴리스 라인을 발판 삼아 점프 후 에너지 센터 창문에 가 닿았다. 그러고는 내 방으로 들어올 때처럼, 창문의 틈을 비집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창문 사이로 빼빼한 손을 내밀어 엄지를 들었다. 저편에서 강냉이가 ‘아 윌 비 백’이라고 하고 있을 것만 같았다. 배낭을 멘 강냉이의 뒷모습이 엄청 귀여웠다.
   나는 집으로 가지 않고 정류장에서 오클라호마 시티로 가는 버스를 탔다. 오늘은 주말이라 몰이 늦게 끝난다. 나는 몰 앞에서 내려 푸드코트로 향했다. 멀리 빨간 앞치마를 두른 릴리가 보였다. 순두부 코너는 한국에서 어학연수를 온 대학생 누나, 형들로 붐볐다. 나는 음료 코너에서 콜라를 한 잔 시켜서 앉았다. 찌개와 밥이 놓인 식판을 받아가는 한국 학생들에게 릴리는 한국말로 인사했다. 기분이 좋은지 쌍꺼풀진 눈이 활처럼 휘어있었다. 나는 릴리처럼 무엇을 열정적으로 좋아해 본 적이 없다. 강냉이가 내게 친구라고 말할 수 있었던 건, 그건 아마 강냉이가 나를 좋아해서라는 생각이 들었다. 릴리가 아이언맨을 좋아하는 것처럼, 제페토 할아버지가 피노키오를 좋아하는 것처럼, 한국 사람이 순두부찌개를 좋아하는 것처럼, 내가 릴리를 좋아하는 것처럼 말이다. 릴리가 어디에 살았는지, 내 진짜 아빠는 누구인지, 내 머리는 왜 블랙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릴리가 좋아하는 아이언맨의 다음 시리즈가 언제 나오느냐다. 그래야 몰의 꼭대기에 있는 영화관에 가서 티켓도 끊고, 아이언맨 슈트가 달려 있는 콜라와 팝콘도 사고, 나란히 앉아 영화를 보게 될 텐데 말이다. 시간이 흐르고 한국 학생들이 우르르 빠져나갔다.
   -엄마. 오클라호마에서 좋은 게 뭐야?
   난 릴리에게 문자를 쳤다. 이런 건 말로 하기가 아직 어렵다.
   -갑자기 그런 걸 왜 물어?
   못마땅한 표정의 이모티콘이 함께 도착했다. 난 혼자 있을 때 가끔씩 상상한다. 이 휑뎅그렁한 오클라호마에 세 살배기 아들을 데리고 도착했을 때, 릴리의 마음이 어땠을지. 내가 학교에 가기 싫은 것보다 더욱 막막했겠지. 나는 며칠 전에 찍은 오클라호마의 하늘 사진을 보냈다.
   -오클라호마엔 내가 있잖아.
   답장을 받은 릴리의 표정이 보였다. 백합꽃처럼 하늘하늘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최현진

오클라호마는 토네이도가 빈번히 발생하는 곳이지요. 모든 걸 휩쓸고 폐허가 된 자리에 뜨는 무지개는 누군가의 눈에는 비극적이고, 누군가의 눈에는 아름다울 거예요. 미스터리한 일로 가득한 세상 속에서 오늘도 잘 버텼다고 응원해주고 싶어요. 지구 어딘가에서 외롭고, 방황하는 모든 ‘빌리’에게.

2018/08/28
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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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아이언맨>과 <어벤져스>에 등장하는 미국의 비밀 조직. 캡틴아메리카, 아이언맨, 헐크 등의 영웅을 관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