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단 하루, 단 한 도시, 단 한 사람

우리는 1945년 8월 15일을 해방과 환희의 날로 기억하지만, 그날은 동시에 일본의 ‘대동아공영권’이라는 프로파간다가 붕괴되며 동아시아권 내 민족 대이동이 본격화된 날이기도 했다. 문학사에서는 염상섭, 김만선, 허준, 안회남, 이태준 등 다양한 작가들이 흩어져 있던 동포들의 원점 복귀와 해방 직후의 사회‧정치상을 소묘하며 국민 국가의 재편 과정에 있었던 혼란을 전경화했고, 이는 해방공간 문학을 대표하는 하나의 프레임으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전쟁과 해방’ ‘이주와 귀환’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직접 경험해보지 않은 후세대 작가가 그 공간을 다시 펼쳐 보인다면 어떨까? 이는 당장 어떤 기대보다 우려를 먼저 떠올리게 만드는 난감한 질문 같은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 어려운 걸 김숨이 해냈다’. 그렇다면 “어떻게?”란 물음도 자연스레 따라올 것인데, 이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잃어버린 사람』 1)의 독특한 구성을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650여 쪽에 육박하는 이 장편소설은 25부 123장으로 잘게 파편화돼 있고, 그 파편들은 또다시 수많은 인물의 사연으로 복잡다단하게 쪼개어지니 말이다.
  기존 해방공간을 다룬 서사들이 대체로 ‘환희의 해방공간’이라는 ‘환상’을 하나의 거울로 가져와 그 이면의 좌우익 대립과 비극적 운명 들을 드러내며 거울을 깨트리는 방식을 차용했다면, 김숨의 작업은 그 순서를 역행한다. 김숨은 먼저 ‘개인’이라는 잘고 희미한 조각들을 꼼꼼히 찾아, 그것들을 하나씩 치밀하게 이어붙여 ‘전체 해방공간’을 하나의 모자이크형 거울로 복원해낸다. 그것은 김숨이 주인공을 따로 특정하지 않은 채 다양한 인물들을 옴니버스 형식으로 등장시키고, 그들을 ‘1947년 9월 16일 화요일’ 단 하루, ‘부산’이라는 단 하나의 도시에 집결시키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김숨은 왜 하필 해방 ‘약 2년 후’의 ‘부산’에 초점을 맞추고 있을까? 이는 크게 두 가지 이유로 유추할 수 있는데, 첫번째로 부산은 ‘일제강점기’와 ‘해방 직후 약 3년’ 동안 수많은 한인 디아스포라/일본인의 이향/귀향이 번갈아 일어난 상징적 장소였기 때문이다. 돌아갈 근대 국가도 없이 급작스레 맞은 해방 이후, 모든 것을 새로 만들어가야 했던 한반도는 혼돈과 무질서를 온몸으로 견디고 있었고, 그중 동아시아 인구의 대이동이 집중되었던 부산항은 엄청난 유동성을 지닌 공간이었다. 그리고 두번째, 그곳이 결과적으로 한반도가 그다음 거치게 될 역사적 행로를 가장 잘 암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부산에는 민간인의 이동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기존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일본군의 이동도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고 있었다. 패전한 일본군이 떠나가고, 물 흐르듯 미군이 재배치된 부산의 광경은 사실상 한반도에 대한 지배 체제 재편 과정을 가장 함축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군사적 이동과 궤를 같이한 국가 권력의 이동은 머지않아 접어들 냉전체제와 분단 시대의 뚜렷한 전조였음2)을, 김숨은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여기서 가장 주목해볼 점은, 그간 문학사가 전쟁/해방, 이주/귀환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다룰 때 천착했던 부분 역시 좌우익 정치이념과 그 우위 논쟁이었던 데에 반해, 김숨은 그 모든 양극에서 비껴서 오롯이 그 안의 ‘개인들’에만 초점 맞추고 있다는 것이다. 치밀한 고증과 현장 답사, 밀도 높은 묘사라는 주특기를 유감없이 발휘해 그녀가 향한 목적지는 결국 이 소설의 제목처럼 ‘잃어버린 사람’의 복원, 단 한 곳일 것이다. 하나의 역사 공간과 그 경계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고 흐르는 것임을 기억해보면, 김숨은 기존 해방공간에 대한 이해 지평에 증언자들의 기억적 요소까지 보태어 그곳을 한층 더 생동하는 공간으로 전환해냈다. 시대라는 그물망 안에서 지워진 ‘개인’들의 역사가, 너무 늦지 않은 ‘지금’ 시점에, ‘여기’ 김숨의 손 우물에 잔뜩 고여 있다.


2. 그들이 잊어버린 것과 잃어버린 것

잃어버린 조국, 그리웠던 고향집으로 돌아온 이들이 있다는 것은 기쁜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온전한 해방’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1947년 말 기준, 부산을 통해 귀환한 한인 디아스포라의 8.8퍼센트에 상당하는 약 22만 명이 부산에 그대로 잔류했다는 기록3)을 보면, 적지 않은 이들이 기존 네트워크와 삶의 자리를 박탈당한 채 다음 방향을 잃고 적체되었음을 볼 수 있다. 그런 그들에게도 과연 ‘온전한 해방’이라는 말을 적용할 수 있을까.
  실제로 김숨이 소설 전반의 배경으로 배치해 낱낱이 가시화한 것도 이러한 적체가 빚은 당대 부산 지역사회의 문제―만성화된 실업과 빈곤, 주택 부족, 토착민/귀환민 갈등, 타민족 배제 및 무차별적 혐오, 아동 행상 양산, 치안 불안, 전염병 확산 등―일 것이다. 소설에 재현된 당대 부산 현실을 보고 있으면, 살아남기 위한 귀환 동포들의 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지가 여실히 읽힌다. 그들은 자유의 기쁨을 누리거나 그간의 야만적 지배 아래 겪었던 고통과 상실을 봉합할 시간도 없이, 재편된 민족국가의 경계 안에 들어가기 위해 이 악물고 생존의 고투에 돌입해야 했다.
  그 고투의 자리는 소설에서 하나의 ‘광장’으로 묘사된다. 광장의 군상은 반상이나 계급, 출신지, 남녀, 노소와 같은 구분 없이 뒤죽박죽 뒤엉켜 있다. 공장노동자, 유학생 출신 교사, 학생, 사채업자, 비렁뱅이, 어부, 농부, 어염집 아녀자와 매춘부 등 대중없는 그들의 모습은 다른 한편에서 “한 그물에 걸려든 물고기들”(423쪽)로 비유되기도 한다. 이는 광장이라는 하나의 운명 공동체가 그물에 건져올려질 때까지 자신들의 이름도 운명도 알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물며 조그만 어항 주인조차 자신의 어항 안에서 “어느 금붕어가 죽었는지” 알지 못하고, “금붕어들 자신조차도 어느 금붕어가 죽었는지”(468쪽) 알 수 없는 시대였다. 그저 ‘복’을 뜻하는 숫자 여덟(八)에 맞춰, 금붕어가 죽어나갈 때마다 그 마릿수를 하나씩 채워넣기만 하면 됐던, 바야흐로 우둔한 시대였던 것이다.
  그렇게 한 그물에 걸린 삶들은 같은 시공간의 벡터 안에서 하나같이 ‘무지(無知)’, 즉 ‘알지 못함’을 호소한다. 우리는 소설 전반에 걸쳐 대부분의 인물이 (토착민/귀환민 구분에 관계없이) 자기 고통의 원인을 ‘방향 감각의 상실’로 지목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들은 도대체 자신들이 어디에서부터 ‘왔는지’,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진술하고 있다. 이를테면 “나도 내가 어디서 왔는지 모르겠”(212쪽)다고 말하는 ‘연희’라든가, “자신이 태어난 섬을 무슨 연유로 떠나왔는지 (…) 까맣게 잊”(591쪽)은 사내의 호소는 그들이 자기 기원을 잃었음을 보여준다. 당장 어제 자신이 있었던 위치조차 혼동하며 ‘난 아무 데도 없었다’는 말을 되풀이하는 ‘애신’도 자기 실존을 부정하고, ‘소복’ 역시 “세상 어디에도 없는 것 같은 기분”(353쪽)으로 인해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어디를 그렇게 가냐’고 묻는다.
  이 무지로 인해 가장 크게 폭발하는 인물은 ‘천복’으로, 그는 중국 우한에서 돌아와 부두 앞 막사에 정착한 사내이다. 그는 당장 자신이 귀환선에서 겪었던 일은 소상히 읊을 수 있지만, 세월 속 먼 기억을 더듬을 때면 아무것도 떠올리지 못한다. 자아의 뿌리를 지탱하는 기억들이 전무한 상태인 것이다. 어느새 ‘천복’은 거리 한복판에 우두커니 서서 “누가 날 여기에 데려다놨을까”(241쪽)를 중얼거리기 시작하고, 지나가는 여자들을 붙잡고 당신이 내 어머니인지, 아내인지, 딸인지를 묻는다. 일종의 정신착란에 빠진 그를 향해 ‘동수’는 자신이 학교에서 배웠던 ‘자유의지’ 개념을 빌려와, 당신을 이곳에 데려다놓은 사람은 결국 ‘당신 자신’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가 세상에 태어나는 데 1할도 기여하지 않은 것들로 넘쳐”(466쪽)나는 세상이, 그에게 허락한 자유의지란 과연 몇이나 될까?
  이러한 ‘동수’의 이야기에 차마 반박하지 못한 채 붕괴된 ‘천복’은 더이상 이성적인 판단이 불가능해진다. 완전한 정신적 미결정의 상태, 즉 아포리아에 빠져 심각한 불안을 보이던 그는 이내 거리에 있는 인간들을 한두 명씩 삼키기 시작한다. 검은 양복 차림의 사내, 늙은 지게꾼, 교복 입은 학생들, 아가씨, 지식인, 부자, 가난뱅이, 민족주의자, 공산당원, 극우, 장사치……그렇게 너나없이 만인을 집어삼켜보았지만, ‘천복’은 오히려 “더할 수 없이 비참해진 몸을 떨며 절규”하고는 다시 묻는다. “아, 누가 날 여기에 데려다놨을까?”(481쪽) 그러나 그는 끝끝내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 ‘천복’이 광장 전체를 집어삼키려던 속도보다 빠르게 광장을 가로질러온 쑥색 화물 트럭이 그의 숨을 거두어갔기 때문이다. 그렇게 아무도 대답해주지 못한 ‘천복’의 질문은 소설 전반에 맥락 없이 툭툭 튀어나오며 그의 망령을 상기시킨다.
  이렇게 김숨이 그리는 ‘거의 모든’ 개인은, ‘거의 모든’ 상황을 천재지변처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자신이 알지도 못하고 행했던 과거의 일에 영향을 받으며 살아간다. 그들이 자신의 ‘기원(from)’과, ‘현 위치(at)’와, ‘목적지(to)’에 대한 무지를 호소할 수밖에 없는 까닭은, 그들의 인식 능력이 부족해서라기보다 그들이 처한 위치가 그러하기 때문이다. 안정된 사회에서는 ‘동수’의 말마따나 개인들이 ‘자유의지’에 따라 상황을 인식하고 만약을 대비할 수 있다. 반면에, 어떤 변수가 어떻게 돌출할지 모르는 불확실성의 시대에서는 개인들이 그 정세를 파악할 수도 없거니와 관성대로 움직였다가는 죽음으로 직결되므로 무지한 존재들을 낳을 수밖에 없다. 김숨은 여기서 ‘동수’가 말한 ‘자유의지’를 정면으로 반박하기 위해, 그들의 처한 극적인 위치를 ‘운명’ 단위로 확장해낸다.


3. 무지라는 운명의 ‘주체’들

‘과거’ 나의 행동이 ‘지금’ 나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운명’이 개념화될 때, ‘나’는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아마 ‘나’는 과거의 자신을 책망하거나, 고통 속에서 업보를 치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일례로, 해방을 맞자마자 아들만 데리고 귀향해버린 남편을 쫓아 부산으로 온 일본인 ‘가쓰코’는, 그새 조선인 아내를 들인 남편에게서 버림받고 아이까지 빼앗긴 참담한 마음을 안고 바다를 바라본다. 자신이 건너온 바다에서 그녀가 보는 것은 단 하나, “운명도 모르고 배를 타”던(244쪽) 시모노세키 항구에서의 자신이다. 그런 과거의 자신을 향해 ‘단 한 번만이라도 뒤를 돌아보라’고 읊조리는 ‘가쓰코’의 뒷모습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하다. 밀항선 삯을 벌기 위한 노역과 노숙을 버티고, ‘쪽바리’ 소리를 견디면서도, 그녀는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향해 원망을 겨누고 있다.
  먹고살기 위해 악착같은 세월을 견뎠던 과부 ‘소복’의 모습 역시 마찬가지이다. 자식들은 징집가 죽거나 시집을 가고, 곁에는 아무도 남지 않은 상황에서 그녀는 자신의 ‘갈 곳 없음’을 “열아홉 살에 인간을 낳는다는 게 무엇인지 모르고 덥석 인간을 낳았”(533쪽)던 자신의 탓으로 돌린다. 때마침 들려오는 갓난아기의 울음소리에 덩달아 울음을 토해내는 늙은 여인의 뒷모습은, 인파에 뒤섞여 흔적도 없이 지워진다.
  그러나 거기서 김숨은 인물들이 주저앉아 자신을 책망하는 데서 멈추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의 ‘운명’을 과거의 대리자이자, 당대의 불확실성을 극적으로 드러내기 위한 소설적 수사로 전환해낸다. 그 말인즉슨, 김숨이 그리는 해방공간은 이미 그 자체로 “거대한 바보들의 세상”(330쪽)이었던 까닭에, 그곳에 놓인 개인들의 운명 역시 ‘무지의 필연’이었던 셈이다. 김숨이 인물들을 무지의 ‘주체’로 그린 까닭은 단 하나, 당대 국가라는 ‘전체’가 ‘부분’(개인)의 자유의지를 허용할 여력조차 없던 무질서의 공간이었음을 부각하기 위함이며, 그 공간에 미리 각인되어 있던 그들의 운명을, 그들은 애써서 살아냈을 뿐이라는 위로를 건네기 위함이다.
  이를테면 외돛배에서 그물을 건져올리고 있는 한 부부는 “방금 자신들이 (…) 꼭 붙들고 있는 명줄을 하마터면 놓칠 뻔했다는 걸 모르고”(68쪽) 서롤 향해 안도 섞인 웃음을 내어 보인다. “자신이 오늘 먼 데로 떠날 거라는 걸”(456쪽) 알지 못하는 누군가는 그저 시계만 보고 있다. 선망하던 값비싼 구두에 발을 억지로 욱여넣은 양화점 종업원 ‘옥자’는 “구두 속에 자신의 두 발이 영원히 갇혔다는 것”(482쪽)을 까맣게 모른 채, 자신의 운명을 향해 길을 나선다. 떠돌이 노동자 ‘석구’ 역시 자신이 “그곳의 척박한 땅에 영원히 묻히리라는”(431쪽) 사실은 알지 못한 채 다만 ‘그곳’(일광 광산)을 향해 걸음을 내딛을 뿐이다. 이 ‘알 수 없음’이라는 운명은 이미 인간 존재보다 앞서 ‘과거형’으로 새겨져 있고, 그들은 그 대과거―즉 ‘과거’ ‘현재’ ‘미래’의 방향을 결코 알 수 없을 거라고 예지된 자신들―를 향해 발을 뻗어내며 주어진 시간들을 착실히 살아낸 ‘운명의 주체들’로 승화된다.
  그리고 김숨은 한낱 자신의 운명조차 알지 못하는 인간이, 타인의 운명을 향한 진심 어린 당부나 애도를 건네는 찰나를 힘주어 강조한다. 오가는 길에 우연히 만난 ‘점삼’과 ‘막산’이 각자 삶이라는 지게를 메고 수레를 끌며, 과거 중국인 동료의 죽음을 회상하는 대목은 심오하게 읽힌다. 그들은 머잖아 길이 두 갈래로 갈라지면 “자신들이 살아서 다시는 만나지 못하리라는 걸”(118쪽) 모른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적어도 그들이 함께 있는 동안만은 자신들의 목적지를 뚜렷이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오늘 처음 만나 나란히 영도다리를 걸으며 담소를 나누고 있는 ‘덕순’과 ‘울순’ 역시 다리를 건너자마자 인사도 못 하고 헤어져 영영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잠시 동안 나눈 서로의 사연과 고향 이야기는 ‘개별자’로서의 자신들을 증언하는 원초적 대화가 된다.
  이렇듯 소설에 모인 인물들은 상대의 이야기를 듣거나 상대에게 자신의 사연을 구구절절 털어놓으며 세계를 이해하고 “너는 나를 분유한다는 사실”4)을 읽어낸다. 나란히 걷는 그들의 뒷모습을 통해 김숨은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인간의 무력한 실존 앞에서 “꼭 어디서든 또 만나자”(437쪽)는 약속은 곧잘 휘발될 것이지만, 누군가는 그 섬광 같은 만남에서도 기원과 실존을 되찾을 것이고, 누군가는 상대의 다음 맥락이 되어줄 것이라고. 한 여인이 죽은 아들을 떠올리며 가쁜 숨을 몰아쉴 때, 어떻게든 그녀 입에 담배 한 개비라도 물려주려 했던 중국인 노파의 모습처럼, 더없이 한심한 위로와 부질없는 당부가 어쩌면 또 인간에겐 전부일지도 모른다고.
  이렇듯 수동적이면서 능동적이고, 의존적이면서 독립적이며, 우연으로 쓰이되 필연으로 읽히는 삶의 사건과 만남 들이, 김숨의 소설에는 있다. 이 연쇄들은 모순 안에 드리워진 자기 운명을 의연하게 받아들이는 인간들을 또다른 ‘주체’로 승화시킨다. 때로는 죽을 고비를 직접 넘기며 스스로 깨달아야 터득할 수 있는 뱃일의 법칙처럼, 또 때로는 하늘을 만져본 적 없어도 하늘이 있다는 것을 아는 원리처럼, 그들은 운명의 법칙에 구속되지 않고 다만 주체의 진실을 구사하며 살아간다. 그런 그들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김숨이 복원하고자 했던 세계는 사실 ‘부분’(개인)과 ‘전체’(국가)가 전복된 세계였음을 보게 될 것이다.


4. “나는 오고 있는 사람입니다(I am a man who is coming)”

다시 그 ‘전체’를 표상하는 ‘광장’으로 돌아가본다. 광장 속의 인간들은 “방향도 없이 광장으로 흘러들어와 방향도 없이 엉켜 떠돌다, 방향도 없이 흩어”(423쪽)지고 있다. 그뒤로 “민족청년단 단원들이 흥분한 말떼처럼 광장으로 몰려”(620쪽)가고, 미군 지프까지 “그 안의 인간들을 흩뜨려놓으며 광장을 수직으로 통과”(620쪽)하고 있다. 이 장면은 그 이후 ‘민족국가’ 건립을 위해 이 나라가 경험해야 했던 또다른 비극적 역사를 암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섬뜩하게 느껴질 정도이다. 이미 광장 위에 서서히 작동하기 시작했던 ‘선택과 배제’ ‘좌익과 우익’의 메커니즘은 머잖아 일어날 무고한 민간인들의 희생을 예고하고 있었고, 종전과 함께 사라졌을 거라 여겼던 파시즘, 군국주의를 대체할 ‘냉전체제’가 경적을 울리며 광장 안으로 맹렬히 돌진하고 있다. 식민의 상처와 보복 심리로 뒤엉킨 균열의 광장에서, 또 자신들의 과오를 서둘러 지우려던 수치의 광장에서, 누군가는 경계 바깥으로 서서히 밀려나고 있었다. 그렇게 ‘전체’라는 광장이 천천히 ‘잃어버린 사람’들은, 지금-여기 우리의 망각에 의해 한 번 더 ‘잊어버린 사람’들로 전환된다.
  그러나 김숨은 여기서 한 지점 더 나아간다. ‘전재민’ ‘이주민’ ‘난민’, 또는 그냥 ‘민중’이라는 이름 외에는 갖지 못한 채 그녀의 손 우물 안에만 고여 있는, 그 변두리의 이름들이 못내 아쉬웠던 까닭일까. 김숨은 그것들이 자신의 손 틈 사이로 빠져나가기 전에 서둘러 호명을 시작한다. 하물며 잊혀도 아주 잊혀 이름조차 없게 된 이들의 ‘무명(無名)’까지 꿋꿋이 대리 증언하며, 그 구슬 같은 이름들을 하나의 실로 한알 한알 꿰어본다. 한 사람의 이름은 그의 ‘기원’ ‘실존’ 그리고 ‘운명’을 축약하는 하나의 역사이다. 그러므로 이름들의 건져올림은 김숨 그 자신에게 있어서 “죽은 사람들을 살아 있는 사람들이 쫓아낼 수는 없”(291쪽)다는 믿음의 이행이다.
  거기에는 이런 구슬들이 꿰여 있다. “부디 명줄을 꼭 붙들고 놓지 말라고 ‘붙들아’ 하고 불렀”(66쪽)던 이름. 그 한 알에는 젖을 떼기도 전에 떠나보내야 했던 네 명의 자식을 향한 아버지의 그리움과 새 생명을 향한 염원이 담겨 있다. 어떤 이름 한 알에는 존재의 시초―“시즈코는 어미가 지어준 이름, 옥분이는 할아비가 지어준 이름”(82쪽)―를 잊지 않겠다는 절절한 다짐이 묻어 있다. 나가사키 원자폭탄에 피폭되어 눈이 먼 일본인을 업고 구호소로 향하던 조선인 사내의 이름 ‘도끼’도 그 실에 꿰인다. 그 이름 한 알엔 ‘당신에게 입은 은혜를 결코 잊지 않겠다’는 한 일본인의 각오가 담겨 있다. 그렇게 석분, 말똥, 쑥국, 간난, 막자, 옥분, 봉금, 갑동, 상희, 복순, 순애, 명순, 양춘, 쇠돌, 공점, 구북, 목순, 석구 등을 알알이 꿰고, “설마 너도 이름이 없”(382쪽)냐는 물음에 멋쩍게 웃고 있을 누군가의 ‘무명’ 한 알까지 잊지 않고 보태 깨운다.
  이 성실한 작업들을 보고 있으면, ‘시간’과 ‘존재’를 향한 작가의 믿음이 드러난다. 소설의 시작은 묘지의 비석들을 비추는 아침해가 떠오르는 장면에서 시작해, 사람들이 하나둘 잠들기 시작하는 밤으로 마무리된다. 그러나 그 밤은 어둠에 잠기는 시간이 아니라, 두 여자가 호롱 등잔 심지에 불을 붙이며 ‘빛을 다시 밝혀내는 시간’이다. 끝끝내 ‘빛’을 다시 살려낸 뒤 이야기를 닫는 작가의 모습은, “괘종시계의 분침이 한 번 돌고 두 번, 세 번, 네 번” 돌다 이내 “틀림없이 다시 올” 것(289쪽)을 아는 선지자적 모습으로 읽힌다. 국가와 역사라는 거대한 회로 안에서 ‘개인’은 명멸하는 작은 불꽃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보다, 이제는 그 불꽃들을 어떻게 보전하고 복원할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는 작가의 당부가 읽힌다면, 그것은 나만의 착각일까.
  저 멀리서 우리가 ‘잃어버린 사람’들이 오고 있다. 그것을 안다면 가만히 있을 수 없다. 다시 그들을 ‘잃을’ 수 없으므로, ‘잊을’ 수도 없다. ‘오고 있는 사람’과 함께 돌아‘오는’ 시간이란 과연 반가운 것이기도, 때론 무서운 것이기도 하니까.

1950년대 부산역 전경이 그려져 있다.
1950년대 부산역 전경.



민가경

문학평론가. 202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평론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이 책을 안고, 뒹굴고, 펼치고, 덮느라, 하나의 계절을 한입에 몽땅 털어넣었다. 원고를 보내고 난 이후에도 나는 내가 너무 쉽게 잊어버렸거나 아니면 아예 잊을 수 없을 구절들을 한참 떠올려야 할 것이다. 그 작업은 소모적이지만, 다음 계절과 해후하기 위해 꼭 필요한 준비의식이기도 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자주 생각했던 것인데, 이 계절에 일어나지 않으면 다음 계절에 일어날 일이라는 것이, 세상에는 있다. 나는 겨우 피했지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피하지 못할 일이라는 것이, 세상에는 있다.

2023/11/15
64호

1
본문에서 이 책에 대한 인용은 괄호 안에 쪽수만을 표기한다.
2
김윤미, 「1945년 해방공간에서 교차하는 미군과 일본군의 이동」, 『지역과 역사』 48호, 2021, 333~334쪽.
3
「釜山府內의要救護者15萬」, 『民主衆報』, 1947년 12월 24일 ; 최민경, 「한인 디아스포라의 귀환과 해방공간 부산」, 『동북아문화연구』 제66집, 2021, 13~14쪽에서 재인용.
4
장-뤽 낭시, 『무위의 공동체』, 박준상 옮김, 그린비, 2022, 7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