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
비평가의 권위와 전문성, 그리고-
팬들 사이 팔짱 낀 평론가1
이상하게 평론을 쓸 때마다 누군가의 글을 인용하고 나면 꼭 죄송한 마음이 뒤따랐다. 처음 공개했던 글에서는 래퍼 기리보이의 가사를 잔뜩 인용했는데, 왠지 모르게 기리보이에게 죄송한 마음이 따랐다. 왜냐하면 그가 쓴 가사 중에는 “팬들 사이 팔짱 낀 평론가”라는 가사가 있었었고 여기서 ‘평론가’는 ‘Hater’와 동의어로 쓰였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창작물을 끼고 앉아 집요하게 뜯어보는 사람이 있다면 께름칙하겠다 싶다가도, 평론가/비평가가 풍기는 특유의 기분 나쁜 뉘앙스가 괜히 억울하다.
비평가, 이 말은 왠지 시인이나 소설가와는 다른 깐깐함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상상해보자, 막연히 비평가를 떠올려보면 다 아는체하며 이것은 이렇다, 저것은 저렇다 평가하고 단정 짓는 이들 같아서, 어쩐지 싫다. 그런데 나는 왜 비평을 쓰느냐. 아니, 왜 내가 쓴 글을 평론 부문에 접수하고, 내가 쓴 글에 ‘서평’, ‘비평’ 따위의 제목이 붙도록 하느냐. 묻는다면 그 이유가 너무 명확해서 부끄러울 지경이다. 좋아서, 글이 좋아서 글에 대해 얘기하고 싶으니 나는 비평을 썼다.
열아홉 살 때, 내가 너무도 좋아하는 가수의 뮤지컬을 처음으로 관람했다. 내가 좋아하는 목소리와 표정으로 노래를 부르고 연기하니 당연히 몰입도가 상당했으며, 나는 기꺼이 온 마음을 다해 그 배역에 이입했다. 그랬더니 공연이 끝난 후로도 여운이 너무 남아 그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어떻게든 표현을 했어야만 했다. 주책이든, 오두방정이든 내가 방금 목도한 그 광경에 대해 털어놓는 일이 너무도 필요했다. 그래서 그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친구를 찾아다녔다. 다행히 마음이 잘 맞는 친구를 만났고, 우리는 함께 공연을 보러 다니며 어떤 장면이 얼마나, 왜 좋았는지에 대해 몇 시간씩 이야기했다. 신기하게도 서로의 감상이 너무 달라서, 대화를 시작하면 겹치는 부분 없이 시시콜콜 계속 떠들 수 있었다. 처음에는 그저 좋다며 호들갑만 떨다가, 자연스럽게 이전에 본 공연과 비교하며 아쉬운 지점을 발견하기도, 좋았던 이유에 대해 자세히 말할 수 있게 되기도 하였고, 그러다보니 아, 지금 나눈 얘기만 쭉 써도 비평이라 우길 수 있겠는데─ 싶어서 비평문 과제를 얼렁뚱땅 해결한 적도 있었다. 똑같은 일은 문학을 두고도 벌어졌고, 내게 비평은 이런 것에서 시작했다.
결국 내게는 무언가를 좋아하고 사랑해서, 시시콜콜 수다를 떨고 싶은 마음이 비평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인터뷰나 매체에서 비슷한 말을 하는 평론가들을 여럿 보았다. 그렇다면 평론가/비평가란, 그 분야의 열렬한 지지자이자 열성팬인데 왜 평론가라는 말이 Hater와 비슷한 맥락을 가지게 된 것일까. 팬으로서 지지를 드러내는 일에 왜 나는 죄송했던 걸까?
평론과 비평에 대한 비호감은 평가에 대한 권위적인 태도에서 유래한다. 앞선 이야기에 이어보자면, 똑같이 공연을 좋아하더라도 대화가 재미없는 이들이 있었다. 꼭 자신이 가진 지식의 양을 자랑하거나, 자기 경험의 깊이를 자랑하는 이들이 그랬다. 그 분야를 사랑하는 깊이가 너무도 자랑스러운 나머지 다른 이들에게 자랑하는 마음은 알겠으나, 그런 이들과 말을 섞다 보면 피곤해진다. 똑같이 지식이 깊은 이들끼리는 서로 오, 그것도 알고 있습니까? 오…… 00를 좀 아시는군요…… 하며 서로 인정해 주고 대화에 재미를 느낄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그런 대화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타입이다. 왠지 우월감을 느끼고 싶어서 맥락도 없이 지식을 늘어놓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 이들이 칭찬을 해도 기분이 썩 좋지 못한데, 비판을 시작하면 다 맞는 말임에도 괜히 꼴 보기 싫어진다.
평론가에 대한 시선도 이와 마찬가지가 아닐까. 어떤 작품 속에서 문학적 가치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좋은 작품과 그렇지 못한 작품에 대한 분할이 생긴다. 그리고 이 분할은 곧 평가나 다름없다. 상찬이든 지탄이든 평가는 곧 권력을 행사하는 행위이므로, 비평을 멀리서 보면 작품에 대한 애정보다는 권력 행사에 더 가깝게 보이는 것이다. 특히 평가에 대한 설명을 독자가 공감하지 못할 때, 설득을 위한 논리에 독자가 동조하지 못할 때, ‘비평’이라는 장르는 우월감을 위해 지식을 늘어놓는, 권력만 행사하고 재미없는 글처럼 보인다.
- 비평가는 권력이…… 있어 보인다
문단의 문법에 여러모로 무지했던 나는, 문인들이 서로를 부를 때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것에 적잖이 당황했다. 특히, 평소에 존경하던 학교 교수님께서 내게 ‘안녕하세요, 선생님~’이라고 부를 때의 기분이 가장 이질적이었다. 학교에서 유명하신, 인기 강좌의 인기 교수님이, 불과 몇 년 전엔 ‘학생은~’하고 나를 부르시던 분이 내게 ‘선생님~’하고 부르시니 신기하기도 하고 존중받고 있는 기분이 좋기도 했지만, 이내 부담스러웠다.
이 ‘선생님’이라는 호칭은, 단순 존칭일 수도 있겠으나, 아마도 문학이 학문에 기거하고 있기에 굳어진 호칭이 아닐까 싶다. 문학은 지식인들의 소유물이었으며 아직까지도 그러한 이미지가 문학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비평가들이 대학원에서 박사에 준하는 공부를 마쳤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학문의 경우, 위계질서가 분명할 수밖에 없는데,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가장 주요한 일이 학습과 평가이며, 그 평가를 통과하면 차례로 학위를 부여받기 때문이다. 이 학위는 위계가 자명하므로, 일정 수준 이상의 학위를 획득한 사람에게 선생님이라 부르는 일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
나는 학위가 높은 편도 아니었기에 선생님이라는 말이 너무 권위적으로 다가왔다. 이전에도 나는 분명 ‘선생님’이라고 불린 적이 있었다. 교육봉사를 했을 때나, 공부방 강사 등의 아르바이트를 했을 때에도 선생님이라 불렸는데, 그때는 전혀 부담스럽지 않았다. 왜냐하면 내가 정말로 누군가를 가르쳤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가 등단 후 ‘선생님’이라 불리는 일이 부담스러웠던 이유는, 내가 그 호칭을 얻기 위한 조건을 아무것도 충족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는 누군가를 가르치지도 않았고, 나를 선생님이라 부르는 사람들과 비교하여 학문의 깊이가 더 깊지도 않았다.
이미 굳어진 관례를 비판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다만 이 관례가 생성되어 굳어졌을 과거에 비하여 과연 지금의 비평은 얼마나 달라졌는가를 확인하고 싶다. 물론 관례에 따라 내게도 선생님이라는 호칭이 붙은 것이지만, 결과만 놓고 보았을 때 나는 단지 평론 부문에 글 한 편이 당선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선생님’으로 불리게 된 꼴이다. 바꿔 말하면 이전에는 ‘선생님’이라 불릴 만한 이들이 평론을 썼다면 지금은 아니라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비평은 학술논문이라는 이름이 아닌 ‘비평’, ‘서평’이라는 이름을 달고 시 소설과 함께 문예지에 실린다. 비평은 학문보다는 작품에 가까운 것이며, 비평가는 학자가 아니라 작가다. 그런데 학자의 논리가 그대로 적용되어 학문적 깊이에 따른 권위를 고스란히 인정해 주는 것은, 또 비평가 스스로가 그 권위를 주장하는 것은 부당하다. 그러니 ‘비평가’라는 직함을 특정 권위와 지위가 포함된 것처럼 사용할 때, 대부분의 이들은 이를 부당하다고 여겨 싫어했고, 그 이미지가 지금까지 이어져 온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래 지금껏 비평과 비평가에 대한 잘못된 이미지 때문에 나는 괜히 주눅이 들었던 것이다. 지금껏 나는 내 애정을 드러냈음에도 어떤 작품에 대해 비평을 쓴다는 것이 괜한 권력 행사처럼 보일까 두려운 마음이었다. 그러나 앞으로는 두려워하지도, 죄송하게 생각하지도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 비평가에겐 어떤 권위도 없다고 선언할 것이기 때문이다.
- 그렇다. 비평가는 그 어떤 권위도 없다!
지금은 그 어떤 평가도 권위를 지니지 못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평가가 뒤집히는 것을 수도 없이 목격했다. 저조한 시청률로 방영이 끝난 드라마가 넷플릭스를 통해 전 세계적인 신드롬을 일으키기도 했으며,2) 몇 년 전 비웃음 받고 사라졌던 뮤직비디오가 갑자기 인기를 끌면서 다시 유행의 중심에 서기도 했다.3) ‘재평가가 시급하다’는 말은 일종의 관용어처럼 굳어져 사용되고 있다.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이 시공간의 제약을 극복한 시대인 지금,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 날것의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된 지금, 평가의 양상은 공공기관의 강력한 권력에서, 만인에 의한, 만 가지 기준의 평가로 바뀌게 되었다. 의견 개진 양상 또한 마찬가지다. 권위 있는 소수가 고민하여 공표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이들이 자신의 의견을 내고, 비슷한 의견이 모여 여론을 형성한다. 비평은 고작 한 개인이 자신의 이름을 걸고 내민 글이므로, (고찰의 깊이나 개인의 역량과는 상관없이) 전 세계, 지금과 미래의 모든 잠재적인 수용자에 의해 언제든지 뒤집힐 수 있다. 따라서 비평과 비평가에게 권위란 존재하지 않고, 수용자들이 지지와 공감을 통해 자신의 권위를 넘겨주는 일만 가능하다.
지금은 창작도 엄연히 노동으로 여기는 인식이 널리 퍼지고 있다. 창작은 더이상 번뜩이는 영감과 재능의 영역이 아니다. “못 쓴 자기 글을 꾸준히 견딜 줄 아는 애가 작가로”4) 산다는 이슬아 작가의 말처럼, 여느 직업과 같이 시간을 들여야 하며 꾸준함으로 승부해야 하는 노동이다. 창작이 노동이며 예술가가 직업이 된다면 자연스럽게 작품은 곧 상품으로 치환된다. 비평이, 작품의 가치를 발견하고 들여다보는 일이라면 상품의 가치를 발견하고 들여다보는 이들은 단연 소비자다. 작품을 선택하고 수용하며, 그 비용을 지불하는 것은 소비자 개개인의 선택이기 때문이다.
결국 과거 비평이 가지고 있던(있다고 여겼던) 평가의 기능은 이제 소비자에게로 넘어갔으며, 비평 스스로도 소비자의 평가를 기다리고 있는 셈이다. 그러므로 비평 또한 독자들의 검증을 받고 지지를 받아야만 그 의미를 획득하는 것이다. 자연히 지금의 비평은, 난해하고 깊은 언어로만 설명할 수 있는 고차원적인 비평보다는 아주 좁고 간단할지언정 납득 가능하고 공감을 유도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비평가 1인이 100에 대해 논하는 것이 아니라 100인 중 1인으로서 목소리를 내는 것이 마땅하겠다. 결국 ‘지금-비평’은 만인에 의해 이루어져야 하고, 모두가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아무리 만인에 의한 비평이 이루어진다 한들, 문학비평에 관해 논할 때 현재 실재하는 권력을 간과할 수는 없다. 정확히 말하면 문학비평이 실리는 지면이 가지고 있는 권력이다. 메일링 서비스가 발달하고, 웹진 형태의 문학 플랫폼이 등장했다 하더라도, 문학은 아직까지도 출판 권력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다. 출판사와 유통사의 선택을 받은 ‘선정된 작품’들은 압도적인 숫자의 독자를 만난다. 신생 지면은 그 형태적 독특함 때문에 많은 화제성을 가지고 있을 수도, 어쩌면 제도를 충실히 따른 몇몇 지면보다 더 많은 독자를 가지고 있을 수도 있겠으나, 제도권 안에 안정적으로 안착한 중심 지면과는 비교할 수 없다.
제도권의 입문 과정을 거쳐 평론가/비평가라는 직함을 얻은 이들은, 또는 제도권의 수호를 받는 지면에 글을 싣는 이들은 자신이 보유하고 있는 권력을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 자신의 말이, 다른 개인 독자의 비평보다 더 멀리 닿을 수 있음을 명심하며, 그에 대한 전문 직업인으로서의 책임 의식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비평가의 소박한 권력이란, 학업적인 깊이도, 문학에 대한 뛰어난 고찰이나 창의적인 시선도 아니라, 단지 제도권의 인증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 전문 직업인으로서의 비평가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대자보를 붙이기보다 모두가 한 문장씩이더라도 포스트잇을 붙여 벽을 채울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이 우선 필요한 일이겠다. 그러나 개인의 짧은 단상으로는 거대한 개념을 설명하기 어렵다. 거대한 관념을 충분한 설명 없이 함부로 명쾌하게 단정 짓는 문장은 이미 유머로 자리 잡았다. ‘이게 나라냐’, ‘이게 나라다’와 같은 말은 ‘나라’라는, 한 문장으로 설명할 수 없는 관념을 그 어떤 설명조차 없이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유머로 사용된다. 마찬가지로 ‘이게 문학이다’라는 말 또한 유머로서의 맥락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개개인의 짧은 단상을 모았다면, 필연적으로 그들을 유의미하게 엮어내는 일이 필요하다.
그렇기에 가장 이상적인 비평가의 모습은 빅데이터 애널리스트라고 할 수 있겠다. 빅데이터를 바탕으로 했을 때 가장 정확하고 예리한 진단과, 미래에 대한 예측이 가능하듯이, 막대한 양의 문학에 대한 논의를 바탕으로 했을 때, 문학에 대한 가장 정확하고 예리한 진단이 가능할 것이다. 모두가 작품에 대해 저마다의 비평을 하고, 막대한 양의 비평 모수가 모이면 이를 분석하고 규명하는 일. 유효한 정보 값을 선별하고 분류하여 이들이 의미하는 바를 알아내는 일. 그 일을 비평가가 담당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할 것이다. 이를 잘 해내 많은 이들의 지지를 받았을 때, 비로소 비평가에게는 전문 직업인으로서의 권위가 생길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지금은, 문학에 대한 모든 논의를 모아도 ‘빅데이터’라 부를 만한 모수가 모이질 않는다. 당장 지금 벌어지고 있는 문학적 논의의 가짓수도 적으며, 논의에 참여하는 이도 적다. 그래서 많은 비평가들은 공시적 확장이 불가능하므로 통시적으로 확장하여 과거의 계보를 확인하고, 논의들을 가지고 와 요리조리 뜯어보고 살펴본다. 좋다, 계보를 살피는 일, 학문적 지식을 바탕으로 논의의 맥을 짚고 방향을 설계하는 일을 누군가 담당한다면 다른 누군가는 모수 확대를 위해 비평 논의에 많은 이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비평장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것이 어떨까. 문학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할 수 있도록 문학적 가치라 부를 수 있는 흥미로운 요소를 최대한 많이 발견해내는 것은 어떨까.
- 부러 길을 잃는 비평
김복희 : 나는 감정과 감정 사이, 문장과 문장 사이, 맥락과 맥락 사이가 최대한 멀 때 시라고 느껴. 너무 가깝고 촘촘하면 시보다는 다른 장르의 글에 더 가깝게 느껴지고 말이야. 문장의 아름다움도 중요하지만, 내 다리가 찢어지도록 스트레치를 시켜줄 수 있는지 없는지, 팔을 뻗게 해주는 희열이 좋아요.
(…중략…)
문보영 : 네, 일종의 필라테스…
《문보영 7월 일기 딜리버리》(2020)에서 문보영 시인과 김복희 시인은 시를 감정의 필라테스로 비유하고 있다. 이 문장에서 저 문장으로 갈 때, 감정이 쭉 늘어나는 기분이 드는 것이 시에 가깝다고 한다. 이와 같은 맥락으로, 문학이 일상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느냐 묻는다면, 사유의 계기를 준다고 답하고 싶다. 문학작품은 일상에서 쉽게 발견/사유할 수 없는 것을 굳이 꺼내어 보여주고 손에 쥐여준다. 일상에서 사용할 일 없는 근육을 사용하고, 유지할 일 없는 자세를 위해 몸을 뻗는 필라테스처럼, 문학작품의 수용이란 그 계기를 가지고 닿을 수 있는 만큼, 한없이 뻗어나가는 사유와, 그로부터 촉발되는 감정을 즐기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그렇게 마음의 근력을 단련하여 다시 가뿐하게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그 사유가 꼭, 정갈하고 고귀한 것이 아니더라도 나 한 사람에게만이라도 어떤 영감이나 영향을 주기에 충분했다면, 그것은 충분히 문학적 가치가 된다.
아이유 노래 중, 〈이름에게〉를 들었을 때였다. 노랫말에는 그런 말이 하나도 나오지 않지만, 나는 왠지 모르게 노랫말 속 ‘나’와 ‘너’가 꿈에서밖에 못 만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끝없이 길었던 짙고 어두운 밤 사이로 조용히 사라진 네 소원을 알아’라는 가사를 들었을 때, ‘너’와 헤어지기 싫어서 어딘가 우물 같은 곳에서 끝없이 밤을 길어와 꿈을 연장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우물 안에 담겨있는 밤을 열심히, 끝없이, 길어서 들이부었지만, 시간을 멈출 수는 없어서 끝내 꿈에서 깨어, ‘네 소원’이 조용히 사라진 것으로 생각했다. 어쩌면 연애란, 연장하기 위해 끝없이 노력해도 그만 사라지고야 마는 것이고 그걸 오래 기억하는 게 사랑이 아닐까 싶었다. 곧 밤이 길다는 의미였단 걸 알았지만, 나는 내 해석을 계속 간직했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 노래가 애틋해졌다. 나의 이런 해석을, 그 누구도 의미 없다고 비난할 수 없다. 작품을 계기로 발견한 새로운 의미이므로.
어차피 한 사람의 언어가 다른 이에게 온전히 가닿지 못한다면, 나는 당신의 언어를 내 마음대로 해석하고야 말겠다. 작품은 그저 계기일 뿐, 나는 내 생각을 잔뜩 펼치겠다. 바로 이곳 이 지점에서 시작해 일부러 길을 잃어 반대편 꼭짓점까지 다다르는 일, 그러니까 ‘마음대로 읽기’가 오히려 누군가에게 더 깊은 감명을 주고 작품의 가치를 설득시킬 수 있다면, 이 또한 비평이 아닐까.
시에 대해 이야기할 때, 뜬금없이 게임이나 어젯밤 꿈을 빌어와 이야기하더라도, 더 풍부한 감상을 촉발시키는 일. 나는 그런 일을 하고 싶다. 역사를 비평에 끌어오고, 철학을, 미술을, 음악을 비평에 끌어오듯이 개인적인 감상을 비평에 끌어옴으로써 작품에 대한 시선을 확장하고 싶다. 그것이야말로 비평의 묘미고 더 많은 이들이 비평의 매력을 느끼게 되는 열쇠가 아닐까. 그리하여 각자의 관심사를 기반으로 문학작품에 애정을 갖고 발언하는 일이 쉬워져서, 대(大)문학수다의 장이 생성되었으면 좋겠다. 이것이 지금, 내가 비평이라는 이름을 두고 그리는 가장 발칙한 꿈이다.
비평가, 이 말은 왠지 시인이나 소설가와는 다른 깐깐함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상상해보자, 막연히 비평가를 떠올려보면 다 아는체하며 이것은 이렇다, 저것은 저렇다 평가하고 단정 짓는 이들 같아서, 어쩐지 싫다. 그런데 나는 왜 비평을 쓰느냐. 아니, 왜 내가 쓴 글을 평론 부문에 접수하고, 내가 쓴 글에 ‘서평’, ‘비평’ 따위의 제목이 붙도록 하느냐. 묻는다면 그 이유가 너무 명확해서 부끄러울 지경이다. 좋아서, 글이 좋아서 글에 대해 얘기하고 싶으니 나는 비평을 썼다.
열아홉 살 때, 내가 너무도 좋아하는 가수의 뮤지컬을 처음으로 관람했다. 내가 좋아하는 목소리와 표정으로 노래를 부르고 연기하니 당연히 몰입도가 상당했으며, 나는 기꺼이 온 마음을 다해 그 배역에 이입했다. 그랬더니 공연이 끝난 후로도 여운이 너무 남아 그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어떻게든 표현을 했어야만 했다. 주책이든, 오두방정이든 내가 방금 목도한 그 광경에 대해 털어놓는 일이 너무도 필요했다. 그래서 그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친구를 찾아다녔다. 다행히 마음이 잘 맞는 친구를 만났고, 우리는 함께 공연을 보러 다니며 어떤 장면이 얼마나, 왜 좋았는지에 대해 몇 시간씩 이야기했다. 신기하게도 서로의 감상이 너무 달라서, 대화를 시작하면 겹치는 부분 없이 시시콜콜 계속 떠들 수 있었다. 처음에는 그저 좋다며 호들갑만 떨다가, 자연스럽게 이전에 본 공연과 비교하며 아쉬운 지점을 발견하기도, 좋았던 이유에 대해 자세히 말할 수 있게 되기도 하였고, 그러다보니 아, 지금 나눈 얘기만 쭉 써도 비평이라 우길 수 있겠는데─ 싶어서 비평문 과제를 얼렁뚱땅 해결한 적도 있었다. 똑같은 일은 문학을 두고도 벌어졌고, 내게 비평은 이런 것에서 시작했다.
결국 내게는 무언가를 좋아하고 사랑해서, 시시콜콜 수다를 떨고 싶은 마음이 비평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인터뷰나 매체에서 비슷한 말을 하는 평론가들을 여럿 보았다. 그렇다면 평론가/비평가란, 그 분야의 열렬한 지지자이자 열성팬인데 왜 평론가라는 말이 Hater와 비슷한 맥락을 가지게 된 것일까. 팬으로서 지지를 드러내는 일에 왜 나는 죄송했던 걸까?
평론과 비평에 대한 비호감은 평가에 대한 권위적인 태도에서 유래한다. 앞선 이야기에 이어보자면, 똑같이 공연을 좋아하더라도 대화가 재미없는 이들이 있었다. 꼭 자신이 가진 지식의 양을 자랑하거나, 자기 경험의 깊이를 자랑하는 이들이 그랬다. 그 분야를 사랑하는 깊이가 너무도 자랑스러운 나머지 다른 이들에게 자랑하는 마음은 알겠으나, 그런 이들과 말을 섞다 보면 피곤해진다. 똑같이 지식이 깊은 이들끼리는 서로 오, 그것도 알고 있습니까? 오…… 00를 좀 아시는군요…… 하며 서로 인정해 주고 대화에 재미를 느낄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그런 대화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타입이다. 왠지 우월감을 느끼고 싶어서 맥락도 없이 지식을 늘어놓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 이들이 칭찬을 해도 기분이 썩 좋지 못한데, 비판을 시작하면 다 맞는 말임에도 괜히 꼴 보기 싫어진다.
평론가에 대한 시선도 이와 마찬가지가 아닐까. 어떤 작품 속에서 문학적 가치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좋은 작품과 그렇지 못한 작품에 대한 분할이 생긴다. 그리고 이 분할은 곧 평가나 다름없다. 상찬이든 지탄이든 평가는 곧 권력을 행사하는 행위이므로, 비평을 멀리서 보면 작품에 대한 애정보다는 권력 행사에 더 가깝게 보이는 것이다. 특히 평가에 대한 설명을 독자가 공감하지 못할 때, 설득을 위한 논리에 독자가 동조하지 못할 때, ‘비평’이라는 장르는 우월감을 위해 지식을 늘어놓는, 권력만 행사하고 재미없는 글처럼 보인다.
- 비평가는 권력이…… 있어 보인다
문단의 문법에 여러모로 무지했던 나는, 문인들이 서로를 부를 때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것에 적잖이 당황했다. 특히, 평소에 존경하던 학교 교수님께서 내게 ‘안녕하세요, 선생님~’이라고 부를 때의 기분이 가장 이질적이었다. 학교에서 유명하신, 인기 강좌의 인기 교수님이, 불과 몇 년 전엔 ‘학생은~’하고 나를 부르시던 분이 내게 ‘선생님~’하고 부르시니 신기하기도 하고 존중받고 있는 기분이 좋기도 했지만, 이내 부담스러웠다.
이 ‘선생님’이라는 호칭은, 단순 존칭일 수도 있겠으나, 아마도 문학이 학문에 기거하고 있기에 굳어진 호칭이 아닐까 싶다. 문학은 지식인들의 소유물이었으며 아직까지도 그러한 이미지가 문학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비평가들이 대학원에서 박사에 준하는 공부를 마쳤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학문의 경우, 위계질서가 분명할 수밖에 없는데,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가장 주요한 일이 학습과 평가이며, 그 평가를 통과하면 차례로 학위를 부여받기 때문이다. 이 학위는 위계가 자명하므로, 일정 수준 이상의 학위를 획득한 사람에게 선생님이라 부르는 일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
나는 학위가 높은 편도 아니었기에 선생님이라는 말이 너무 권위적으로 다가왔다. 이전에도 나는 분명 ‘선생님’이라고 불린 적이 있었다. 교육봉사를 했을 때나, 공부방 강사 등의 아르바이트를 했을 때에도 선생님이라 불렸는데, 그때는 전혀 부담스럽지 않았다. 왜냐하면 내가 정말로 누군가를 가르쳤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가 등단 후 ‘선생님’이라 불리는 일이 부담스러웠던 이유는, 내가 그 호칭을 얻기 위한 조건을 아무것도 충족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는 누군가를 가르치지도 않았고, 나를 선생님이라 부르는 사람들과 비교하여 학문의 깊이가 더 깊지도 않았다.
이미 굳어진 관례를 비판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다만 이 관례가 생성되어 굳어졌을 과거에 비하여 과연 지금의 비평은 얼마나 달라졌는가를 확인하고 싶다. 물론 관례에 따라 내게도 선생님이라는 호칭이 붙은 것이지만, 결과만 놓고 보았을 때 나는 단지 평론 부문에 글 한 편이 당선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선생님’으로 불리게 된 꼴이다. 바꿔 말하면 이전에는 ‘선생님’이라 불릴 만한 이들이 평론을 썼다면 지금은 아니라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비평은 학술논문이라는 이름이 아닌 ‘비평’, ‘서평’이라는 이름을 달고 시 소설과 함께 문예지에 실린다. 비평은 학문보다는 작품에 가까운 것이며, 비평가는 학자가 아니라 작가다. 그런데 학자의 논리가 그대로 적용되어 학문적 깊이에 따른 권위를 고스란히 인정해 주는 것은, 또 비평가 스스로가 그 권위를 주장하는 것은 부당하다. 그러니 ‘비평가’라는 직함을 특정 권위와 지위가 포함된 것처럼 사용할 때, 대부분의 이들은 이를 부당하다고 여겨 싫어했고, 그 이미지가 지금까지 이어져 온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래 지금껏 비평과 비평가에 대한 잘못된 이미지 때문에 나는 괜히 주눅이 들었던 것이다. 지금껏 나는 내 애정을 드러냈음에도 어떤 작품에 대해 비평을 쓴다는 것이 괜한 권력 행사처럼 보일까 두려운 마음이었다. 그러나 앞으로는 두려워하지도, 죄송하게 생각하지도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 비평가에겐 어떤 권위도 없다고 선언할 것이기 때문이다.
- 그렇다. 비평가는 그 어떤 권위도 없다!
지금은 그 어떤 평가도 권위를 지니지 못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평가가 뒤집히는 것을 수도 없이 목격했다. 저조한 시청률로 방영이 끝난 드라마가 넷플릭스를 통해 전 세계적인 신드롬을 일으키기도 했으며,2) 몇 년 전 비웃음 받고 사라졌던 뮤직비디오가 갑자기 인기를 끌면서 다시 유행의 중심에 서기도 했다.3) ‘재평가가 시급하다’는 말은 일종의 관용어처럼 굳어져 사용되고 있다.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이 시공간의 제약을 극복한 시대인 지금,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 날것의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된 지금, 평가의 양상은 공공기관의 강력한 권력에서, 만인에 의한, 만 가지 기준의 평가로 바뀌게 되었다. 의견 개진 양상 또한 마찬가지다. 권위 있는 소수가 고민하여 공표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이들이 자신의 의견을 내고, 비슷한 의견이 모여 여론을 형성한다. 비평은 고작 한 개인이 자신의 이름을 걸고 내민 글이므로, (고찰의 깊이나 개인의 역량과는 상관없이) 전 세계, 지금과 미래의 모든 잠재적인 수용자에 의해 언제든지 뒤집힐 수 있다. 따라서 비평과 비평가에게 권위란 존재하지 않고, 수용자들이 지지와 공감을 통해 자신의 권위를 넘겨주는 일만 가능하다.
지금은 창작도 엄연히 노동으로 여기는 인식이 널리 퍼지고 있다. 창작은 더이상 번뜩이는 영감과 재능의 영역이 아니다. “못 쓴 자기 글을 꾸준히 견딜 줄 아는 애가 작가로”4) 산다는 이슬아 작가의 말처럼, 여느 직업과 같이 시간을 들여야 하며 꾸준함으로 승부해야 하는 노동이다. 창작이 노동이며 예술가가 직업이 된다면 자연스럽게 작품은 곧 상품으로 치환된다. 비평이, 작품의 가치를 발견하고 들여다보는 일이라면 상품의 가치를 발견하고 들여다보는 이들은 단연 소비자다. 작품을 선택하고 수용하며, 그 비용을 지불하는 것은 소비자 개개인의 선택이기 때문이다.
결국 과거 비평이 가지고 있던(있다고 여겼던) 평가의 기능은 이제 소비자에게로 넘어갔으며, 비평 스스로도 소비자의 평가를 기다리고 있는 셈이다. 그러므로 비평 또한 독자들의 검증을 받고 지지를 받아야만 그 의미를 획득하는 것이다. 자연히 지금의 비평은, 난해하고 깊은 언어로만 설명할 수 있는 고차원적인 비평보다는 아주 좁고 간단할지언정 납득 가능하고 공감을 유도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비평가 1인이 100에 대해 논하는 것이 아니라 100인 중 1인으로서 목소리를 내는 것이 마땅하겠다. 결국 ‘지금-비평’은 만인에 의해 이루어져야 하고, 모두가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아무리 만인에 의한 비평이 이루어진다 한들, 문학비평에 관해 논할 때 현재 실재하는 권력을 간과할 수는 없다. 정확히 말하면 문학비평이 실리는 지면이 가지고 있는 권력이다. 메일링 서비스가 발달하고, 웹진 형태의 문학 플랫폼이 등장했다 하더라도, 문학은 아직까지도 출판 권력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다. 출판사와 유통사의 선택을 받은 ‘선정된 작품’들은 압도적인 숫자의 독자를 만난다. 신생 지면은 그 형태적 독특함 때문에 많은 화제성을 가지고 있을 수도, 어쩌면 제도를 충실히 따른 몇몇 지면보다 더 많은 독자를 가지고 있을 수도 있겠으나, 제도권 안에 안정적으로 안착한 중심 지면과는 비교할 수 없다.
제도권의 입문 과정을 거쳐 평론가/비평가라는 직함을 얻은 이들은, 또는 제도권의 수호를 받는 지면에 글을 싣는 이들은 자신이 보유하고 있는 권력을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 자신의 말이, 다른 개인 독자의 비평보다 더 멀리 닿을 수 있음을 명심하며, 그에 대한 전문 직업인으로서의 책임 의식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비평가의 소박한 권력이란, 학업적인 깊이도, 문학에 대한 뛰어난 고찰이나 창의적인 시선도 아니라, 단지 제도권의 인증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 전문 직업인으로서의 비평가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대자보를 붙이기보다 모두가 한 문장씩이더라도 포스트잇을 붙여 벽을 채울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이 우선 필요한 일이겠다. 그러나 개인의 짧은 단상으로는 거대한 개념을 설명하기 어렵다. 거대한 관념을 충분한 설명 없이 함부로 명쾌하게 단정 짓는 문장은 이미 유머로 자리 잡았다. ‘이게 나라냐’, ‘이게 나라다’와 같은 말은 ‘나라’라는, 한 문장으로 설명할 수 없는 관념을 그 어떤 설명조차 없이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유머로 사용된다. 마찬가지로 ‘이게 문학이다’라는 말 또한 유머로서의 맥락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개개인의 짧은 단상을 모았다면, 필연적으로 그들을 유의미하게 엮어내는 일이 필요하다.
그렇기에 가장 이상적인 비평가의 모습은 빅데이터 애널리스트라고 할 수 있겠다. 빅데이터를 바탕으로 했을 때 가장 정확하고 예리한 진단과, 미래에 대한 예측이 가능하듯이, 막대한 양의 문학에 대한 논의를 바탕으로 했을 때, 문학에 대한 가장 정확하고 예리한 진단이 가능할 것이다. 모두가 작품에 대해 저마다의 비평을 하고, 막대한 양의 비평 모수가 모이면 이를 분석하고 규명하는 일. 유효한 정보 값을 선별하고 분류하여 이들이 의미하는 바를 알아내는 일. 그 일을 비평가가 담당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할 것이다. 이를 잘 해내 많은 이들의 지지를 받았을 때, 비로소 비평가에게는 전문 직업인으로서의 권위가 생길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지금은, 문학에 대한 모든 논의를 모아도 ‘빅데이터’라 부를 만한 모수가 모이질 않는다. 당장 지금 벌어지고 있는 문학적 논의의 가짓수도 적으며, 논의에 참여하는 이도 적다. 그래서 많은 비평가들은 공시적 확장이 불가능하므로 통시적으로 확장하여 과거의 계보를 확인하고, 논의들을 가지고 와 요리조리 뜯어보고 살펴본다. 좋다, 계보를 살피는 일, 학문적 지식을 바탕으로 논의의 맥을 짚고 방향을 설계하는 일을 누군가 담당한다면 다른 누군가는 모수 확대를 위해 비평 논의에 많은 이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비평장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것이 어떨까. 문학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할 수 있도록 문학적 가치라 부를 수 있는 흥미로운 요소를 최대한 많이 발견해내는 것은 어떨까.
- 부러 길을 잃는 비평
김복희 : 나는 감정과 감정 사이, 문장과 문장 사이, 맥락과 맥락 사이가 최대한 멀 때 시라고 느껴. 너무 가깝고 촘촘하면 시보다는 다른 장르의 글에 더 가깝게 느껴지고 말이야. 문장의 아름다움도 중요하지만, 내 다리가 찢어지도록 스트레치를 시켜줄 수 있는지 없는지, 팔을 뻗게 해주는 희열이 좋아요.
(…중략…)
문보영 : 네, 일종의 필라테스…
― ‘김복희 시인과 문보영의 사랑에 관한 대화록 3 (번외편)’ 중에서.
《문보영 7월 일기 딜리버리》(2020)에서 문보영 시인과 김복희 시인은 시를 감정의 필라테스로 비유하고 있다. 이 문장에서 저 문장으로 갈 때, 감정이 쭉 늘어나는 기분이 드는 것이 시에 가깝다고 한다. 이와 같은 맥락으로, 문학이 일상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느냐 묻는다면, 사유의 계기를 준다고 답하고 싶다. 문학작품은 일상에서 쉽게 발견/사유할 수 없는 것을 굳이 꺼내어 보여주고 손에 쥐여준다. 일상에서 사용할 일 없는 근육을 사용하고, 유지할 일 없는 자세를 위해 몸을 뻗는 필라테스처럼, 문학작품의 수용이란 그 계기를 가지고 닿을 수 있는 만큼, 한없이 뻗어나가는 사유와, 그로부터 촉발되는 감정을 즐기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그렇게 마음의 근력을 단련하여 다시 가뿐하게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그 사유가 꼭, 정갈하고 고귀한 것이 아니더라도 나 한 사람에게만이라도 어떤 영감이나 영향을 주기에 충분했다면, 그것은 충분히 문학적 가치가 된다.
아이유 노래 중, 〈이름에게〉를 들었을 때였다. 노랫말에는 그런 말이 하나도 나오지 않지만, 나는 왠지 모르게 노랫말 속 ‘나’와 ‘너’가 꿈에서밖에 못 만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끝없이 길었던 짙고 어두운 밤 사이로 조용히 사라진 네 소원을 알아’라는 가사를 들었을 때, ‘너’와 헤어지기 싫어서 어딘가 우물 같은 곳에서 끝없이 밤을 길어와 꿈을 연장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우물 안에 담겨있는 밤을 열심히, 끝없이, 길어서 들이부었지만, 시간을 멈출 수는 없어서 끝내 꿈에서 깨어, ‘네 소원’이 조용히 사라진 것으로 생각했다. 어쩌면 연애란, 연장하기 위해 끝없이 노력해도 그만 사라지고야 마는 것이고 그걸 오래 기억하는 게 사랑이 아닐까 싶었다. 곧 밤이 길다는 의미였단 걸 알았지만, 나는 내 해석을 계속 간직했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 노래가 애틋해졌다. 나의 이런 해석을, 그 누구도 의미 없다고 비난할 수 없다. 작품을 계기로 발견한 새로운 의미이므로.
어차피 한 사람의 언어가 다른 이에게 온전히 가닿지 못한다면, 나는 당신의 언어를 내 마음대로 해석하고야 말겠다. 작품은 그저 계기일 뿐, 나는 내 생각을 잔뜩 펼치겠다. 바로 이곳 이 지점에서 시작해 일부러 길을 잃어 반대편 꼭짓점까지 다다르는 일, 그러니까 ‘마음대로 읽기’가 오히려 누군가에게 더 깊은 감명을 주고 작품의 가치를 설득시킬 수 있다면, 이 또한 비평이 아닐까.
시에 대해 이야기할 때, 뜬금없이 게임이나 어젯밤 꿈을 빌어와 이야기하더라도, 더 풍부한 감상을 촉발시키는 일. 나는 그런 일을 하고 싶다. 역사를 비평에 끌어오고, 철학을, 미술을, 음악을 비평에 끌어오듯이 개인적인 감상을 비평에 끌어옴으로써 작품에 대한 시선을 확장하고 싶다. 그것이야말로 비평의 묘미고 더 많은 이들이 비평의 매력을 느끼게 되는 열쇠가 아닐까. 그리하여 각자의 관심사를 기반으로 문학작품에 애정을 갖고 발언하는 일이 쉬워져서, 대(大)문학수다의 장이 생성되었으면 좋겠다. 이것이 지금, 내가 비평이라는 이름을 두고 그리는 가장 발칙한 꿈이다.
김정빈
사랑의 투명하고 단단한 힘을 믿습니다.
세상을 좀 엉뚱하게 바라봐야겠습니다.
2020/09/29
34호
- 1
- 〈Rain Showers Remix〉, 그냥노창 · 스윙스(Swings) · 기리보이 · C JAMM.
- 2
- 스페인 드라마 〈종이의 집〉은 방영 당시 저조한 시청률로 종영했으나, 넷플릭스를 통해 세계적인 흥행에 성공해 2018년 Emmy Awards를 수상하였다.
- 3
- 2017년에 발매된 가수 비의 노래 〈깡〉은 2020년에 재조명 받기 시작하여 Official Remix도 발매되었으며 진로와 농심에서 〈깡〉을 활용한 CF도 제작되었다.
- 4
- ‘〈일간 이슬아〉 이슬아 작가 : 재능을 이기는 꾸준함’, 《멋있으면 다 언니 : 황선우의 스압 인터뷰》, 카카오페이지,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