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다시, 소설 속 ‘당사자’에 대한 의문

   《문학3》 2020년 1호에 수록된 이민진의 「풀에 빠진 사람들」은 이야기와 현실, 환상과 실제 사이를 오가며 이야기와 환상이 발휘하는 생생하고도 불가해한 힘을 연애의 과정 속에서 신비롭게 풀어낸 소설이다. 해당 호에 수록된 소설 작품들에 대해 나눈 좌담인 〈아직 도착하지 않은 이야기〉에서, 시인 장현은 「풀에 빠진 사람들」에 등장하는 양성애자 인물 설정에 문제를 제기한다. 그 인물의 퀴어니스에 대한 언급은 “그 여자가 양성애자였으며 그들과 함께 밥을 먹었던 그녀의 친구가 애인이었다는 과거의 내막”1)이라는, 한 줄도 채 되지 않는 요약적 서술이 전부다.
   “왜 여기서 이렇게? 이게 끝인가? 이렇게 쉽게?”2)라는 탄식에 가까운 의문형으로 제시된 장현의 문제의식 역시도 자세히 이야기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앞서 언급된 한국문학이 “분류와 라벨링에 지나치게 많은 힘을 쏟고 있다”는 진단, 소설이 주는 감동이 오히려 “현실을 향한 이해나 직시를 막”을 수 있다는 우려는 뒤이은 문제의식과 자연스럽게 연결되며 그 탄식의 구체적인 내용을 가늠해 볼 수 있게 한다.

   김경미 : (윤이형의 소설 「마흔셋」을 언급하며) 소설 속에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분들의 자리를 만드는 이야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어서 되게 좋은 경험이었어요. (…) 어쨌든 인생은 다 1회차인데 내가 만나고 경험할 수 있는 세상의 실평수가 있다면, 그 실평수에서 베란다 확장공사를 해주는 도구가 소설이 아닐까 생각해요.
   장현 : (김경미의 답변에 대해) (…) 저는 자기가 사는 세상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오류는 누구나 저지를 수 있는 일이라 소설을 읽는 사람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소설을 통해 타인의 세계와 경험을 배우고 관찰하는 것은 소설의 역할 혹은 소설이 잘할 수 있는 일이라기보다는 소설이 잘하기 어려운 일임에도 불구하고 어쩌다보니 여기까지 왔다는 생각이 듭니다. (…) 만약 제가 ‘외연’과 ‘확장’에 물음표를 붙이고 이 고민을 계속해서 이어나가고 이 공부에 대한 피드백을 작품 속에 넣어 발표하겠다고 했을 때, 어떤 반응이 나타날까요?3)

―김경미·이정현·장현, 〈아직 도착하지 않은 이야기〉, 《문학3》, 2020년 1호, 223-224쪽.


   ‘양성애자’와 같은 명확한 개념에 인물의 정체성 전부를 모조리, 그리고 가볍게 맡기고 지나가기에 퀴어한 존재들은 LGBTQIA의 범주로 말끔히 환원되지 않는다.4) 그러한 현실에 비해 너무나 간결한 「풀에 빠진 사람들」의 양성애자 설정은 조미료처럼 단순 첨가된 것에 불과하다는 느낌을 준다. 또한 양성애자로 설정된 해당 인물이 “머리카락 기장이 허리까지 오는 데 비해 앞머리는 눈썹에도 안 닿을 만큼 짧아서 눈썹과 코에 한 피어싱이 눈에 띄”는 “개성 있는 타입”이자 종잡을 수 없는 성격의 소유자로 묘사되었다는 점까지를 고려하면 양성애자라는 설정이 그러한 개성의 일부를 위해 동원된 것이 아닌지를 의심하게 된다. 관련하여 성소수자에 대한 스테레오타입―그들의 성적 취향은 ‘독특한’ 것이며 독특한 ‘취향’에 불과한 것이라는―을 재생산한다는 비판 역시 가능하다. 장현이 문제시하는 것이 이런 식으로 소수자가 소설에 ‘그저 등장’하는 것, 그리고 그렇게 ‘그저 등장’한 소수자에 의해 문학의 외연이 확장되었다거나 ‘그저 등장’한 소수자를 독자가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는 만족감을 얻게 되는 것이라면 나의 문제의식 또한 그와 맞닿아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 ‘그저 등장’이라는 표현은 좀 더 엄밀해지기 위해 반드시 수정되어야 할 터인데, 소수자가 아무리 시시한 방식으로 등장한다(혹은 동원된다)고 해도 그가 작가에 의해 포착되는 과정에서 기존의 편견을 강화하거나 일부 특성에 대한 생략과 과장을 거치는 등의 영향을 수반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한편, 장현의 의견에 대한 좌담 참여자 간의 활발한 토의에 덧붙여, 김미정은 진행자로서 “세상의 복잡함이나 변화가 두드러지는 세계에서 문학 언어들은, 좀 더 명료해지거나 정보성의 경향을 보이더라”5) 는 오가와 사토시의 연구(『비평 미디어론』, 이와나미 쇼텐, 2015)를 참조점으로서 제공한다. 이 언급은 「흔들리는 재현, 대의의 시간」6)에서부터 「움직이는 별자리들 : 포스트 대의제의 현장과 문학들」7)로 이어지는 그의 지난 작업을 떠올리게 한다.8)
   『82년생 김지영』(조남주, 2017)을 비롯한 몇몇 작품들에 한하여, 김미정의 분석은 몹시 설득력 있으며 전에 없었던 통찰을 우리에게 제공한다. 주로 미학적인 관점에서 문제시되어 온 정보성과 명료성이야말로 새로운 시대의 미학적 감각일 수 있으며, 이것이 오늘날의 여성/시민들이 욕망하는 정치성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그의 분석은 미학성과 정치성(혹은 페미니즘의 정치성) 사이의 오랜 구도화를 해체하고 새롭게 변화하는 감각을 포착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그런 식의 미학적 감각과 정치성이 여러 복잡한 맥락들의 구체적인 뒷받침을 받아 충분히 해명된다 하더라도, 오늘날의 문학/현상을 사후적으로 분석하는 것을 넘어 옹호하거나 정당화하기에 충분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 또, 당사자성을 내세우는 최근의 문학적 전략이 과연 당사자로서의 정치성만으로 충분히 설명될 수 있을까? 소수자-당사자를 전면에 내세우는 최근의 몇몇 작품들은 대의되지 않고 당사자로서 발화하는 일보다, 소수자의 포섭을 통한 문학의 외연 확대에 더욱 관심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당사자성을 내세우는 문학적 전략들은 그 정치적 효능이 입증되었다 하더라도 여전히 검토될 필요가 있는 주제이고, 앞선 질문들의 난감함을 돌이켜볼 때 아직 충분히 검토되지 않은 주제이기도 하다.
   이 글은 비거니즘과 퀴어 페미니즘까지 사유의 대상을 확장한 몇 편의 소설들을 윤이형의 「승혜와 미오」, 그리고 최은영의 「그 여름」을 중심으로 검토하며 작품에 당사자로서 재현된 소수자가 정상사회의 시선에 비친 모습에 불과한 것이 아니었는지를 의심해 볼 것이다. 또한 너무나 명료하게 당사자로서 소설의 전면에 드러나 있었기에 미처 의심하지 못했던, 바로 그 당사자가 배제되어 있을 가능성을 의심해 볼 것이다. 더불어 명료하고 간결한 메시지나 정보9)의 형태로나마 문학의 사유 범위가 확장되었다고 할 수 있을지, 아니면 혹여 그간의 문학이 소수자를 단순 동원하며 ‘외연의 확장’이라는 목표를 성찰 없이 공회전하고 있었던 게 아니었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2. 비거니즘10)

   최근 2년간 문학 출판계에서는 기후 위기와 비거니즘 등 환경에 관련된 이슈를 다룬 기획이 몇 차례 시도된 바 있다.11) 이는 2016년의 페미니즘 리부트, ‘#문단_내_성폭력’ 해시태그 운동의 열기와 페미니스트 여성 작가들의 약진으로 뜨거워진 페미니즘 문학에 대한 관심이 퀴어를 비롯한 소수자 전반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진 것으로서 충분히 해석 가능하다. 그러나 이러한 관심을 ‘문학(의 대상)의 확장’으로서 단순히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는 힘든데, 어쩌면 바로 그러한 해석에 기반해서다.
   윤이형의 단편 소설집 『작은마음동호회』(문학동네, 2019)는 단지 페미니즘에 대한 인식뿐만 아니라 그로부터 한발 더 나아간 교차성 페미니즘에의 통렬한 인식을 기반으로 하여 쓰인 소설들의 모음처럼 보인다. 그의 소설에서는 성별뿐만 아니라 연령, 젠더, 그리고 비거니즘을 비롯한 개인의 신념들까지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역학에 큰 힘을 발휘하는 것으로 드러나 있다. 그중에서도 수록작 「승혜와 미오」는 레즈비언에 대한 사회적 통념을 넘어, 그들을 입체적인 인물로 구성하려 한 노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레즈비언은 (이성애를 기반으로 하는)정상가족 제도와 무관하다고 여겨지거나 오히려 그것에 저항하는 존재로 간주되지만, 승혜는 레즈비언임에도 불구하고 부부와 아이로 구성된 ‘정상적인’ 가정을 꾸리고 싶어 한다. 심지어 그의 직업은 얼핏 정상가족 제도에 봉사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베이비시터이다. 반면 그의 연인 미오는 정상가족 제도에 대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데, 이에 대한 두 사람의 의견 차이가 둘 사이의 갈등을 조성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비채식인인 승혜와 달리 미오는 비거니즘을 지향하는데, 동일성을 기준을 묶여 포착되던 레즈비언 내부의 정치적 차이가 이 소설에서는 잘 드러나고 있다. 하나의 범주로서 다뤄지던 여성들 내부의 차이를 퀴어라는 새로운 렌즈를 통해 드러내고, 퀴어 여성 내부의 다양한 차이 또한 드러내 보여준다는 점은 이 소설의 훌륭한 성취이다.
   그러나 정치적 실천이자 새로운 앎의 네트워크인 비거니즘에 대한 문학적 접근이 ‘비건’이라는 소수자를 조명하는 작업을 통해(서만) 이루어진 것이 과연 성공적이었다고 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미오는 왜 그렇게 고기를 못 견디게 싫어하게 되었을까, 승혜는 문득 생각하고는 자신이 그런 의문을 떠올렸다는 사실에 놀랐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런 게 한 번도 궁금하지 않았다. 미오는 얼굴이 까만 대로, 너무나 좋아해서 목이 다 늘어난 티셔츠를 입고 다니면 입고 다니는 대로, 운동을 싫어하면 싫어하는 대로, 그냥 그대로 미오였고, 승혜는 또 그대로 승혜엿는데, 점점 서로의 ‘그대로’가 못마땅해지는 일이 늘어가고 있었다.

―「승혜와 미오」, 『작은마음동호회』, 39쪽.


   비거니즘은 이 소설에서 ‘그대로’라는 단어를 통해 얼굴이 까만 것이나 목이 늘어난 티셔츠를 입는 옷 취향, 운동을 싫어하는 성향과 같은 취향의 문제와 구분되지 않고 있다. 이런 전략을 통해 비거니즘이 지닌 운동성과 정치성은 삭제된다. 물론 취향이야말로 여러 가지 정치성이 경합하는 영역일 수 있음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육식주의의 해체를 요구하는 움직임인 비거니즘에 육식주의와 동등하게 존중받을 얄팍한 권리만을 부여하고는, 그 권리를 이유 삼아 오히려 저항의 대상인 육식주의를 존중받을 권리를 은근히 획득하고서, 어떤 윤리성이라도 획득한 것 같은 태도를 내보이는 것은 확실히 기만적이지 않은가. 오혜진의 말을 빌리자면 그것은 “취향입니다, 존중해주세요(반발하거나 문제 삼지 말아 주세요)”12)라는 요구를 통해 취향의 정치성에 수반되는 책임을 회피하는 방식에 불과하다.
   한편, 소설 속에서 ‘밀푀유 나베’는 경계의 존재인 레즈비언 승혜가 정상성 혹은 정상성과의 화합에 대해 가지고 있는 동경을 드러내는 소재로 등장하는데, 소설의 말미에서는 실제로 이 ‘밀푀유 나베’를 매개로 하여 정상-이호네 가족과 비정상-승혜가 교감이랄 것을 성취하는 장면이 제시되기도 한다. 밀푀유 나베는 승혜에게 “빨간 고기와 하얀 배추가 겹겹이 쌓여 냄비 속에서 부글부글 끓고 있는”(30쪽) 음식이자 “절대로 닿을 수 없는 어떤 아득한 세계의 상징, 영원한 불가능의 표지”(30쪽)이다. 밀푀유 나베는 채식과 육식의 절충안이 아니라 명백하게 채식을 하지 않는 사람만 먹을 수 있는 음식임에도 불구하고, 고기와 야채가 “겹겹이 쌓여”(30쪽) 함께 요리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어떤 (불가능한) 화합의 상징으로 묘사된다. 그것을 ‘그저 종합’하기만 한 것의 결과 채식인은 그 음식을 먹지 못하게 됨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는 여전히 그 ‘그저 종합’의 여부로 다양성과 화합의 성취를 판단한다. 비정상-채식인과 연애를 하며 그 자신도 비정상-레즈비언인 승혜가 내내 자신의 소수자성과 그 정당성에 의문을 가지다가 고기가 든 정상-음식을 나눠 먹으며 정상-이호네 가족으로부터 승인을 받은 후에야 자기 존재에 대해 아늑한 확신을 갖게 된다는 결말은 비거니즘 관점에서도, 퀴어 관점에서도 꺼림칙하다. 소수자의 이야기를 화합 혹은 ‘해피엔딩’으로 끌고 갈 힘이 결국 정상성의 손에 쥐어져 있다는 점이 너무나 적나라하게 드러나 보이기 때문이다.
   소수자로서의 채식주의자를 작품의 전면에 내세운 것은 「승혜와 미오」뿐만이 아니다. 비거니즘을 커버스토리로 내세웠던 《릿터》 17호에 수록된 소설 「광반사 재채기 증후군」(임솔아), 「스무 숲」(전석순), 「더 나은 것」(조진주), 그리고 동물권 테마소설집 『무민은 채식주의자』의 표제작 「무민은 채식주의자」(이장욱)에도 비슷한 방식의 접근법이 드러나 있다.13) 작품에서 강조되는 것은 채식주의자가 일반적이지 않은 존재라는 점이며 주로 고민되는 것은 그들이 어떻게 정상성과 화합할 수 있을지이다. 비거니즘의 목표는 정상성과의 화합이 아니라 정상성에의 저항을 문제 삼는다는 점은 충분히 고려되지 못하고 있다. 이는 실상 문학계의 문제의식이 채식주의나 비거니즘, 그것과 긴밀히 결부된 환경의 문제에 관심을 기울인 것이었다기보다 소수자 문학을 둘러싼 열기 속에서 (비거니즘이나 채식주의가 아닌) ‘채식주의자’라는 소수자-인물의 유형을 소화해야 한다는 의무감 정도에 그쳐 있었을 뿐임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잘’ 이어져 오던 새로운 소수자 문학의 계보가 비거니즘이라는 미지의 네트워크를 맞닥뜨리며 난데없이 난관에 부딪혔다는 식의 해석을 도입하는 것은 그간 문학이 소수자-퀴어를 재현해온 방식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 얼마나 부족했는지를 고백하는 일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3. 비거니즘―퀴어 페미니즘

   최은영의 단편소설 「그 여름」은 레즈비언 커플이 계층의 차이로 인해 서서히 이별을 맞이하게 되는 과정을 섬세한 감정 묘사를 통해 그려낸 작품으로, 제2회 문지문학상, 제8회 젊은작가상을 수상하고 해당 작품이 수록된 『내게 무해한 사람』이 ‘소설가 50인이 뽑은 2018 올해의 책’에 선정되는 등 문학 출판계에서 뜨거운 관심을 받으며 그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의외로, 그리고 의미심장하게도, 「그 여름」에 대한 평론이 ‘문단 문학’에서 시도된 사례는 찾아보기 힘들다. 이 화제작에 대한 이야기가 가장 뜨겁게 오간 것은 아마 sns상의 걸그룹 팬덤과 성소수자들의 친목·취향 공동체에서였을 것이다.
   뜻밖에도 「그 여름」에 대한 이들의 반응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독자들의 이해와 공감을 이끌어내는 탁월한 힘을 지닌 최은영 특유의 아름답고 맑은 감성이 퀴어 서사에 녹아들며 왠지 모를 위화감과 작위성을 자아냈다는 감상이 많았다. 그리고 이러한 위화감의 탓은 보다 구체적으로 “여성 간의 연대와 순수한 로맨스로 여성 서사의 무결성을 증명하려는 최근 한국 문학”의 경향에 돌려지기도 했다(「걸그룹 팬픽이 레즈비언 문학이 되기까지」, 하피)14). 우리는 이 비판이 미학과 정치를 양분하며 페미니즘 문학을 그 정치성으로 인해 미학적으로는 결여되기 쉬운 작품군으로 다루었던 남성(중심적) 비평가들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페미니즘의 정치성을 기쁘게 수용하고 일상적으로 창조하는 이들로부터 나온 것이라는 점을 절대로 애써 외면해서는 안 된다. 이 비판이 겨냥하고 있는 것은 특정한 미학을 낳는 특정한 정치성의 ‘방향’이지 문학이 정치적이며 정치적일 수 있다는 점이 아니다.
   「걸그룹 팬픽이 레즈비언 문학이 되기까지」에서, 하피는 「그 여름」과 비슷한 시기에 발표된 레즈비언 팬픽 「한 철」을 예시로 들며 두 작품의 차별점으로 「한 철」에 이성애자 남성에 대한 불편함이나 레즈비언 정사 장면 등 (이성애 정상적 사회가 불쾌감을 느낄 법한) 레즈비언의 욕망이 두드러지게 드러나 있다는 점을 제시한다. 그리고 이 차별점인즉슨 「그 여름」에는 결여되어 있는 지점으로서 언급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언뜻 보기에 「그 여름」은 하피가 한계점으로 지적한 것들을 이미 성취한 작품처럼 읽히기도 한다. 「그 여름」은 레즈비언 간의 계층 차이와 그로 인한 이별을 이야기하며 레즈비언 내부의 상상적 동일성을 가정하는 외부의 시선에 저항하는 측면이 있다. 그러므로 이 소설은 ‘무결한 여성 연대’와는 거리가 있는, 오히려 그러한 무결함의 압박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미덕을 갖춘 이야기로 평가될 수 있다. 또한 「그 여름」은 여성에 대한 여성의 끌림을 묘사할 때 “얇은 피부, 가느다란 머리카락”(41쪽) 등 외모의 여성성을 부각하는데, 여기서는 인물들의 사랑이 여성(동성)에 대한 것임을 강조하며 동성애가 퀴어함으로부터 탈구되어 보편적인 사랑으로 환원되지 않도록 애쓴 흔적이 엿보인다. 따라서 작가가 ‘레즈비언의 욕망’을 그리지 않았다는 주장 역시 곧장 이해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눈에 띄지는 않을 수 있으나―이 ‘눈에 띄지 않음’ 자체가 비판적으로 반추될 필요는 있겠지만― 소설에는 이경과 수이가 학교가 파한 후 매일같이 창고에 숨어 서로의 몸을 만지는 장면, 그리고 그러한 충동으로 인해 미묘한 갈등을 빚는 장면도 등장한다(14-15쪽). 그렇기에 성적인 욕망을 배제하고 의도적으로 ‘순수한 로맨스’만을 그렸다는 비판도 불가능하다.15)
   나는 이러한 해명의 난감함 앞에서 더더욱 나 역시 이 소설을 읽으며 경험했던 위화감의 정체를 밝힐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이해 가능할 감정과 욕망들을 경유해서 굉장히 설득적인 방식으로 (이해 불가능한/했던) 퀴어 존재에 대한 독자들의 공감과 수용을 자아낸 이 소설의 미덕을 바로 이 소설의 맹점으로 지목해 보고 싶다. 이경이 처음으로 여성(수이)에게 끌림을 느끼는 장면을 출발점으로 삼는 이 소설은 이경과 수이 커플의 사랑과 이별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면서 레즈비언으로서 정체화하고 아픔을 겪으며 성장해나가는 이경 개인의 연대기이기도 하다. 또한 이 소설은 1인칭 시점으로 쓰여 있지는 않지만 명백하게 이경의 상황과 심리를 서술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성애 중심적 사회가 강제하는 전제들을 아직 받아들이지 않은 (것으로 가정되는) 여성 청소년이 어떤 내적 모순도 없이 로맨스 생애사의 출발선에 서는 모습은 우리 역시도 거리낌 없이 그 뒤를 따라가게 만든다. 뒤를 잇는 사랑의 문장들은 아름답기 그지없고, 구체성을 적당히 건너뛰며 비밀스럽게 묘사된 이경과 수이가 서로의 몸을 만지는 장면에서도 불쾌감이랄 것은 느껴지지 않는다. 사랑이 시효를 다해가는 장면들에서조차 낱낱이 아름다운 이 소설의 흐름은 빠짐없이 개연성 있으며 몹시도 자연스럽다. ‘동성 간의 사랑이 가능하다’는 아주 간단한 명제에만 동의하는 사람이라면, 그 짧은 명제가 채 맞서지 못하는 이성애-정상성 사회의 전제들을 거의 모조리 답습하고 있다 할지라도 마치 자신이 이경이 되기라도 한 것처럼 레즈비언의 삶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다.
   이러한 매끄러움, 이런 슬픈 아름다움, 그러나 퀴어에 관해서라면 ‘여자가 여자를 사랑할 수 있다’, 그리고 ‘레즈비언 내에도 계층 차가 있다’ 정도의 분석밖에는 내놓기가 힘든 이 이야기의 편안한―이상(queer)함을 찾아보기 힘든―감수성은 퀴어(문학 및 담론)의 목표가 과연 널리 이해받고 수용되는 것인지를 되묻게 한다. 문학이 퀴어와 관련하여 감성의 영역을 재구축할 능력이 있다면 그건 문학이 본디 이해 가능한 대상이었으나 부당하게 몰이해의 영역에 내몰려 있던 소수자들에게 안정적인 공감의 자리를 찾아줄 수 있기 때문이 아니다.16) ‘본디’ 이해 가능했다는 말이 그간의 무지에 대한 외면에 다름 아니라는 점을 차치하고서라도, 섣불리 성취된 공감과 이해는 감성 구조부터 기반시설에 걸쳐 사회를 인식적으로 완전히 재편하고 변화한 후에서야 겨우 보일 새로운 세계와의 대면을 불가능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런 방식의 이해보다야 차라리 불쾌에 가까운 ‘이해 불가능’이라는 감정이 구조적·복합적으로 배제된 타자들의 실재와 충돌하며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와 모르는 세계가 어떤 사회적 구조를 공유하고 있는지를 발각시키는 일이 이해 받지 못하는 타자들을 사유하게 하는 더 개연성 있는 계기일 것이다.
   덧붙여, 나는 이해 가능한 것과 이해 불가능한 것의 경계에 서 있는 인물로서 「그 여름」의 또 다른 주인공인 수이를 분석하고 싶다. 「그 여름」은 퀴어한 감정의 출발점으로 분명히 수이를 지목하며 퀴어한 감정과 그 원동력을 수이(의 존재 자체)에게 돌린다. 이경이 이후 느끼게 되는 여성에의 끌림 또한 수이에게 느꼈던 감정과 비슷한 방식―주로 외모에 대한 묘사, 어지러움이라는 감각―으로 표현된다. 그러나 막상 이 ‘(퀴어한)원점’인 수이의 목소리에서는 동성애적인 감각의 묘사나 그것의 정체에 대한 이야기가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이는 소설에 제시된 여러 가지 요소들(성격, 계층 차이 등)로 미루어 볼 때 충분히 개연성 있는 결과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소설이 끝내 (퀴어 당사자가 ‘있음’의 차원을 넘어) ‘퀴어한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사유를 별로 드러내지 못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기도 한다. 또한 축구부에서 활동하고, 기계에 매력을 느끼며, 외모를 꾸미는 것에 관심이 없는 중성적인 매력의 수이는 ‘여성(성)에의 끌림’으로 레즈비언 욕망을 정의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퀴어한 인물이다. 이런 수이가 서사가 진행됨에 따라 서서히 이야기에서 멀어지고, 과거의 회상으로만 흐릿하게 남게 되는 전개는 불편함 없는 감정의 유려한 흐름 그 자체가 무엇에 대한 사유를 유보함으로써 가능해진 것인지를 의심하게 한다.
   눈여겨봐야 할 지점은 비슷한 전개가 「승혜와 미오」에서도 엿보인다는 것이다. 「승혜와 미오」는 제목의 한 축을 차지하는 주요 등장인물로서 미오를 제시하고 있으면서도, 미오의 목소리를 독자에게 직접 들려주지 않는다. 미오의 이야기는 언제나 승혜의 회상 속에서 독자에게 가닿는다. 미오는 영화 〈옥자〉를 보고 “마치 날카로운 금속 봉이 자기 살을 실제로 뚫고 들어와 단백질을 쭉 뽑아가기라도 하는 것처럼 신음을 내뱉고 땀을 흘리며 괴로워”(40쪽)하는데, 승혜의 해석을 거친 회상 속 미오의 모습은 인간에게 분노한 비인간 동물 그 자체인 것 같기도 하고, 정념에 휩싸인 광인 같기도 하며, “승혜의 눈에는 시간과 에너지의 과도한 소모로 보이는 그런 행동들을 결코 낭비라고 생각하지 않”(40쪽)는, 확실한 ‘괴짜’이다. 비거니즘에 대한 미오의 (혹은 이 소설이 마땅히 수행해야 했을) 사유는 승혜의 해석을 통과하며 형성된 그러한 울부짖음과 절규의 안개에 가려 결코 드러나지 않는다. 소설은 마지막 화합의 식탁에 고기 국물이 뽀얗게 우러났을 밀푀유 나베를 올릴 때까지도 미오를 현실의 시간선 위에 단 한 번도 등장시키지 않는다. 고기 국물을 떠먹으면서도 “왜 지금껏 미오에게 조금 더 많은 것을 물어볼 용기를 내지 않았을까”(58쪽)를 되묻는 ‘착한’ 승혜의 너른 이해력 속에서 미오를 또다시 아주 흐릿하게만 소환할 뿐이다.


   4. 당사자에 대해 말하지 않기

   당사자-비당사자의 문제는 소수자를 재현하는 것이 우리 사회와 문학의 관심사가 된 이후부터 끊임없이 주목받아왔다. 이는 달리 말해 이미 문학의 소수자 재현과 관련해서 당사자의 문제가 지겨울 정도로 논의되어왔다는 것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러나 당사자성에 관한 물음들은 ‘비당사자가 당사자의 삶을 재현해도 되는가’라는 당위적인 차원의 물음이나 ‘소수자-당사자가 없는 소수자 문학이 가능한가’라는 범주 규정의 문제로만 다루어져 왔다. 이 물음들은 사실 이상한데, 시원하게 ‘아니’라고 답할 수 없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비당사자가 당사자를 재현해서는 안 된다거나, 당사자가 등장한 것만이 소수자 문학이라고 규정할 경우 발생하는 문제점에 대해서는 이미 숱하게 논의가 되어 왔다. 비당사자의 재현이 비윤리적이라는 이유로 금기시된다면, 당사자를 제외하고는 모두 침묵하게 될 것이며 소설가는 작품보다도 먼저 해부의 대상이 될 것이다. 또한 당사자가 등장한 것만이 소수자 문학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라면, 당사자가 대체 누구인지를 규정하는 일부터가 그 범주의 모호함으로 인해 어렵다는 점을 차치하고서라도, 재현의 형식이 몹시 제한될 수밖에 없을 것이며 소수자 문학은 당사자들만의 게토가 될 것이다. 그러나 당사자성에 대한 논의들은 시원하게 ‘예’라고도 대답하지 못한 채, 앞선 두 가지 질문들만을 맴돌고 있는 듯하다. 당사자를 활용하는 문학적 전략들이 미학성과 정치성을 양분하지 않은 채 미학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옹호될 때에도 이 질문들만큼은 여전하다.
   어쩌면 당사자에 대한 난제들을 해결하는 방법은 이해 당사자로서의 ‘당사자’가 굉장히 협소한 개념에 불과함을 인정하고 더이상 중요하게 취급하지 않는 데 있는지도 모른다. 버틀러가 『윤리적 폭력 비판』에서 말한 방식을 빌리자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설명할 때에도 타자의 존재를 기입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타자와의 연관 속에서만 비로소 살아갈 수 있다. 소수자의 문제에 어떤 이해관계도 얽혀 있지 않은 그런 비당사자란 애초에 불가능한 것이며, 따라서 비당사자의 대립항으로서의 당사자도 한없이 모호한 개념에 불과하다.
   또, 과연 작품들은 당사자가 등장해서 정치적인 것이 되거나 당사자가 등장하지 않아서 정치적이지 못한 것이 되는 걸까? 당사자를 통해서 문학의 외연이 확장되거나 당사자의 부재를 통해 문학의 외연이 확장되지 못하는가? 예컨대 「승혜와 미오」는 비거니즘이 사유하는 그 문제들에는 괄호를 쳐 버린 채 ‘(비거니즘)을 실천하는 사람들인 비건’만을 괄호 통째로 문학 속에 옮겨 버렸다. 이것은 외연의 확장이라기보다 소수자의 동원에 가깝지 않은가. 「그 여름」은 문학의 감성 세계 안에 레즈비언 존재들을 포용 혹은 포섭하는 데 성공했지만, 또 그러한 작업을 통해 문학계의 상찬을 받았지만, (어딘지 모를) 문학계에 「그 여름」에 대한 퀴어 독자들의 위화감을 다루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여기서 당사자는 어디 있는가? (오로지) 소설 속에?
   이미 거듭 말해진 이야기이지만, 중요한 것은 당사자의 등장 여부가 아니라 그가 작품 내에 재현된 방식이다. 심지어는 그가 작품 내에 재현된 방식조차도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닐는지도 모른다. 그가 가장 ‘pc하게’, 가장 섬세하게 작품 내에서 재현되었을 때에도 작품의 사유가 확장되지 못한다면 당사자란 그저 얄팍한 인물 설정에 그치게 될 것이다. 개성 있는 캐릭터로서의 양성애자나, (동물의 감정에 공감하자거나 동물을 학대하지 말자는 식의) 비채식인들 사이에서도 이미 널리 공유된 깨달음을 제외하고선 비거니즘에 대해 단 한마디도 하지 못하는 비건, ‘여자를 사랑하는―그러나 이게 대체 뭐란 말인가?―’ 레즈비언처럼.


진송

글 쓰는 게 너무 어렵습니다……

2020/09/29
34호

1
이민진, 「풀에 빠진 사람들」, 《문학3》, 2020년 1호, 198쪽.
2
김경미·이정현·장현, 소설 중계 〈아직 도착하지 않은 이야기〉, 위의 책, 225쪽.
3
위의 좌담, 223-224쪽.
4
관련하여, 오혜진은 그의 글에서 “서른 세 개 이상의 젠더와 섹슈얼리티 범주에 대한 논의가 제출된 적”이 있으며 “1960년대 일부 여성 커뮤니티에서 널리 쓰인 ‘바지씨’라는 명칭이 지시하는 존재”가 “오늘날 정의된 ‘레즈비언 부치’나 ‘트랜스젠더 남성’으로 말끔하게 호환되지 않”는다는 점 등을 폭넓게 언급하며 “모든 ‘퀴어한 것’을 LGBTQIA라는 규범화된 언술로 설명하려 할 때 삭제되는 역사적 존재가 있음”을 또렷이 되새겨준 바 있다. 오혜진, 「지금 한국 퀴어 문학장에서 퀴어한 것은 무엇인가(1) 한국 퀴어 서사의 퀴어 시민권/성원권에 대한 상상과 임계」, 《문학과 사회》 2018년 겨울, 84쪽.
5
위의 좌담, 228쪽.
6
김미정, 「흔들리는 재현, 대의의 시간」, 『#문학은_위험하다』, 민음사, 2019, 233-259쪽.
7
김미정, 「움직이는 별자리들 : 포스트 대의제의 현장과 문학들」, 《크릿터》 1호, 8-19쪽.
8
「흔들리는 재현, 대의의 시간」에서 김미정은 대의되지 않는 주권자와 직접 발화하기를 원하는 독자들의 등장, 오랜 시간 누적되어온 분노와 절박함이 담긴 읽는 이의 욕망, 오리지널리티보다는 명료성을 선호하는 새로운 감각 등을 폭넓게 훑으며 정치적 올바름과 미학(의 양립 불가능성)에 관련된 논쟁들이 채 다루지 못했거나 의도적으로 구도화해 버린 맥락들을 복원한 바 있다. 「움직이는 별자리들 : 포스트 대의제의 현장과 문학들」에서는 문화연구자 시미즈 도모코를 인용하며, 당사자성을 전면에 내세운 문학적 전략이 미학적 관점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어 왔지만, 그러한 전략 역시 변화하는 예술 현상 속에서는 새로운 미적 체험이 될 수 있음을 전달하기도 했다. 이러한 현재적 맥락의 복원은 당사자성과 명료성을 내세운 작품들이 기존의 미학적 해석 틀로 섣불리 평가절하될 수 없음을 말해 준다.
9
이 글에서 ‘정보’가 언급된 것은, “‘정보’를 ”전문적 담론“의 맞은편에 놓거나, ”가벼운“ 속성의 것으로 전제하는 것에 대해서 이론의 여지가 있”으며, “정보(information)를 정념, 정동과 무관한 주지주의적, 기호적 개념으로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김미정의 의견에 충분히 동의하는 한에서이다. 김미정, 「흔들리는 재현, 대의의 시간」, 『#문학은_위험하다』, (민음사, 2019), 252쪽.
10
‘비거니즘’은 다양한 이유로 동물 착취에 반대하는 철학이자 실천으로, 기후 위기를 비롯하여 환경 문제에 대한 다양한 관심을 포괄한다. ‘채식(주의)’은 비거니즘의 한 가지 실천 방식으로, 그 명명이 동물실험을 한 상품이나 가죽 제품을 소비하지 않는 등의 비거니즘적 실천을 포괄하지 못하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비거니즘’과 ‘채식주의’가 약간의 의미 차이를 두고 혼용된다. ‘비건’은 비거니즘을 실천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로, 마찬가지로 본고에서 ‘채식주의자’와 약간의 의미 차이를 두고 혼용될 예정이다.
11
지난 2018년 11월에는 동물권 테마소설집인 『무민은 채식주의자』(이장욱 외, 걷는사람, 2016)가 출간되었고, 2019년 4월 《릿터》가 17호의 커버스토리로 비거니즘을 다루었다. 올해인 2020년에는 《문학3》이 1호, 2호를 모두 환경과 동물권에 관련된 기획으로 구성한 바 있다.
12
오혜진, 『지극히 문학적인 취향』, 오월의봄, 2019, 11쪽.
13
지면의 한계로 언급된 모든 작품을 자세히 분석할 수 없음이 아쉽다. 한계 내에서라도 언급된 소설들을 분석한 바를 간단히 설명하자면, 이 소설들 역시 개인이 사유의 결과로 선택한 신념이자 행동 방식인 채식주의를 질병과 빗대며 선천적 정체성의 문제로 환원하거나(「광반사 재채기 증후군」, 임솔아), 채식인이자 질환자인 어머니가 다른 소수자-채식인들과 함께 고립된 공동체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그리며 영양소가 부족하고 병든 채식인이라는 고정관념을 강화하는(「스무 숲」, 전석순) 등의 문제적인 면모를 보인다. 「더 나은 것」(조진주)의 경우 임신 상태의 채식인이 입덧으로 인해 고기에의 충동을 참지 못하고 끝내 고기를 먹는 모습을 그리는데, 이런 방식의 재현 역시 채식과 채식인에 대한 정상 사회의 시선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소설은 채식을 ‘고기를 향한 인간의 본성적 끌림’의 대척점에 있는 취향으로 그린다. 채식을 취향과 관련지어야 한다면, 우리가 사유해야 할 것은 아주 본래적이고도 고정불변하는 인류 보편의 취향에 대한 환상이 아니라 ‘고기가 맛있다’라는 집단적이고 사회적인 취향이 어디서부터 비롯되고 구성되었는지에 대한 물음 아닌가. 언급된 작품들이 난제로서 다루는 것들이 다소 엉뚱하게 설정된 문제의식이 아닌지를 의문하지 않을 수 없다.
14
하피, 「걸그룹 팬픽이 레즈비언 문학이 되기까지」, 웹진 《OFF》, https://offmagazine.cargo.site/fanfiction_lesbian
15
비판의 근거 이전에, ‘성’소수자의 ‘성’에만 초점을 맞춘 이들이 성소수자를 성적으로 문란하거나 오로지 그들의 성적 욕망을 통해서만 가시화될 수 있는 존재로 간주해온 역사가 있다는 점을 고려해 보건대, 이 비판 자체가 구체화될 필요도 있어 보인다.
16
이러한 문제의식은 보다 구체적인 사례의 뒷받침을 받으며 벼려져야 할 것이지만, 아쉽지만 이 글에서는 퀴어를 ‘수용’하고 ‘이해’한다는 것과 관련된 몇 가지의 투박한 질문으로 그것을 대체하고자 한다. 정상 사회가 성소수자들에게 공감의 손길을 내밀며 성소수자들이 우리의 편견처럼 문란한 존재들이 아님을 힘주어 말할 때, 당사자들이 직접 그 ‘문란한’ 면모를 드러내 보인다고 해도 정상 사회는 관용을 유지할 수 있을까? 예컨대 게이들의 ‘찜방 문화’나 사도마조히즘 커뮤니티인 ‘가죽 공동체’의 자리가 본디 그 안정적인 공감의 지대에 놓여 있던 것이었노라고, 그래서 어떠한 감성과 인식의 재편도 없이 가시화되기만 하면 충분히 정상 사회로부터 받아들여질 수 있을(있었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애초에 그들의 성적 수행이 보이는 적극성이 정상 사회로부터의 수용과 자기 존재의 대중화를 목표로 삼는다 할 수 있는가? 또 다른 경우에, ‘부치·펨’ 문화를 이성애 중심주의와 성별 이분법에 기대어 손쉽게 이해하고, 이들의 행동이 사실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태만한 방식의 위선에 불과하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