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
‘가장 보통의 존재’들이 ‘함께’ 걷는 우울
독립출판물 에세이를 중심으로
1. 들어가며: 우울의 시대
몇 년 전의 일이다. 일상적인 대화 중 친구가 문득 말했다. “요즘 정신과 약 먹고 있어.” 무기력이 심해서 병원에 갔더니 우울증이라고 했다. 그렇구나. 나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모르게 튀어나오려던 말을 간신히 꿀꺽 삼켰다. ‘네가 왜?’ 평생 우등생이었으며 원하는 직업을 가졌고, 중산층 가정의 구성원인 친구가 우울증이라는 사실이 낯설었다. 조건 반사 같았던 첫 번째 감정은, 내 것이라기보다 외부에서 흘러들어온 가치 판단이었다. 우울의 자격을 논하고, ‘진짜’ 우울과 ‘중2병’을 감별하려 들고, “남들도 다 힘들어~.”하고 대충 뭉개는 말에 오래 노출된 까닭이다.
2018년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백세희, 흔)는 출간 즉시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부제는 ‘정신과 치료 일기’. 상담의와의 대화 내용과 내밀한 고백은, 저자의 말에 따르면, “사적이고 구질구질한 이야기”이다. 그런 책이 이만큼 팔렸다는 것은 그만큼 이런 말이 필요한 사람이 많았다는 뜻이다. 마음은 보이지 않으니 객관적인 판단이 불가능하고,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정신질환 혐오와 맞물려 병의 가시화가 어려웠다. OECD 국가 중 자살률은 1위지만 항우울제 소비량은 최하위권인 현실에서, 자신의 정신질환 치료기를 솔직하게 고백한 책은 잔뜩 흔든 콜라의 뚜껑을 연 셈이다.
몸이고 마음이고 아프고, 또 아플 수밖에 없는 세상이다. 한병철은 2010년 『피로 사회』1)라는 책을 통해 현대사회의 성과주의 속에서 자기를 착취하는 현대인이 우울해지는 메커니즘을 분석하기도 했다. 여기저기서 우울을 말하는 목소리가 터져나온다. 우울한 개인의 에세이부터 뇌과학, 심리학, 종교, 사회학…… 아픔은 청춘의 속성이고, 구백구십구 번 흔들려도 아직 한 번이 남았으니 어른이 되려면 견디라던 시대가 지난 직후. 문자 그대로, 모두 지쳐 널브러져 있다. 떡볶이는 먹고 싶어 하면서.
본고에서는 우울증을 비롯한 정신질환이 소재인 독립출판물을 대상으로, ‘지금, 여기’의 시대적 감정인 우울2)을 읽어본다. 먼저 독립출판물의 형식이 어떻게 우울한 개인의 저자성과 연결되는지 살피고, 개인이 우울을 수용하는 양상이 지금까지와 다른 지점을 짚어볼 것이다. 이를 통해 변화하는 회복의 의미와 새로이 발견된 가치를 규명한다. 분석 텍스트는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3)(이하 ‘떡볶이’), 에세이집 『망가진 대로 괜찮잖아요』4)(이하 ‘망가진 대로), 만화 『판타스틱 우울백서』5)(이하 ‘판타스틱’) 총 3편이며, 참고할 만한 다른 출판물은 각주로 부연한다.
2. 우울의 ‘저자성’과 정상성의 해체
분석 대상을 ‘독립출판물 에세이’라는 범주로 한정한 이유는 독립출판물과 에세이의 특성 때문이다. 우선, 독립출판은 개인이나 팀이 기획부터 편집/인쇄/유통/판매를 모두 담당한다. 출판사를 통하는 기존의 방식과 가장 두드러지는 차이는 작가의 고유성이다. 독립출판은 ‘등단’하지 않아도, 유명하지 않아도, 기존의 작업물이 없어도, 출판사의 ‘제안’이나 ‘승인’ 없이 책을 낼 수 있다. 상업성이나 출판시장의 문법에서도 자유롭기에 판형부터 소재, 수위, 형식, 범위가 다양하다. 분석 텍스트의 작가 백세희, 김현경과 재은을 포함한 열두 명, 서귤은 모두 자신을 ‘보통 사람’이라고 칭한다. 전통적으로 작가 또는 ‘저자(author)’는 예술가의 권위를 부여받는다. 많이 달라졌지만 여전히 등단과 비등단의 위계가 작용하는 현실에서 작가는 ‘선생님’으로 호명된다. 반면 작가와 독자의 경계가 흐릿한 독립출판물에서 저자의 권위나 아우라는 희미해진다(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을지라도).
세 작품의 자기소개를 보자. “기분부전장애와 불안장애 환자. 글을 쓴다.”(‘떡볶이’), “고양이를 먹여 살리기 위해 회사에 다닌다. 퇴근하고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쓴다. 어제 우울했고 오늘 행복하므로 평균을 내면 보통이다.”(‘판타스틱’), “사람들의 이야기가 궁금해 책 같은 것을 만들고 있습니다.”(‘망가진 대로’, 김현경). 에세이 내용 역시 지극히 평범해 보인다. 완치의 기적도, 비 온 뒤 땅 굳듯 되찾은 일상이 얼마나 귀중한지 속삭이는 감동도, 그러니 매사에 감사하고, 건강에 ‘있을 때 잘하’라는 교훈도 없다. 요즘에는 재미있고 자극적이면 ‘매운맛’이라고 표현하는데, 이건 순한맛을 넘어 밍밍하게까지 느껴질 맛이다.
그러나, 그래서, 그렇기 때문에, 바로 지금 여기에 이토록 평범한 개인이 부려놓는 ‘에세이’가 중요하다. 건강은 흔히 기든스적 의미의 “생의학적 건강 모델”의 차원에서 다루어진다. 질병을 객관적인 측면에서 정의하고, 건강한 신체는 과학적 근거를 갖는 의료의 힘으로 되찾을 수 있다는 믿음이 사회를 지배한다. 이런 맥락에서 지금까지 유통된 질병 서사6)는 불균등하다. “세상은 아픈 이로부터 질병이 극복 가능하다거나, 최소한 나름의 쓸모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한다. 즉, 자신의 정상성(건강)에 안도하고 질병을 통제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강화할 만한 이야기”7)가 책으로 만들어질 만하다고 ‘간택’되었다.
정신질환이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 않다. 건강 중심주의 세계에서 환자는 질병이 정체성의 전부인 병리적 존재로 타자화된다. 특히 정신 질환자의 말은 믿을 수 없는 것이고 신뢰해서는 안 되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 출판물의 저자들은 심지어 ‘완치’되지 않았다. 여전히 아프고, 아플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말하고 쓰고 그린다. 이 지점에서 고유한 저자성이 구축된다.
지금까지 저자는 ‘정상적인(건강한/완치된)’, 그리고 제도의 승인이나 인정(등단이나 출판사의 선택)을 받은 사람으로 한정되었다. 그러나 스스로 ‘작가’가 된 이들이 우울을 정체성 삼아 쓰는 행위는, 여성 작가들이 기존의 남성적 저자의 권위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여성의 저자성을 창조하였듯, ‘우울’의 저자성8)이라는 영역을 일구는 것이다.
물론, 저자성에 대한 의심이 따라붙을 것이다. 기존의 가치평가 체계 안에서 이러한 에세이와 작가는 ‘검증되지 않은 아마추어, 환자의 병리적 독백’으로 평가절하당하기 쉽다. 언제나 내밀한 ‘우울’보다 긍정적이고 희망찬 ‘명랑’이, 혼란스럽고 양가적인 감정보다 단정하고 간결한 선언이 더 우월하게 여겨졌으니. 그러나 새것에는 새로운 연장이 필요하다. 흔히 평가의 기준이 되는 미학적 완성도나 가치평가는 우울 에세이를 쓰는 독립출판물 작가에게 더운 나라의 스케이트화 같다. 욕망과 갈구의 대상이 아니라는 뜻이다.
목적은 지금껏 주어지지 않았던 말하기와 가시화의 경험이다. 자신의 이야기로 세상에 말을 걸고, ‘이런’ 삶이나 우울이 크게 잘못되거나 특이한 것이 아니며,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는 기준과 폭력에 의문을 제기한다.9)
“새삼스러운 게, 나 혼자 사는 거면 누구나 정상일 텐데, 이 세계를, 세대를 ‘함께 겪어내고’ 있어서 우리는 아무것도 정상으로 만들 수가 없다. 그러니 누가 제일 잘못됐는지 줄 세우지 않아도 된다.”
“어쩌면 우울증 환자들은 남들과 다른 비정상인 사람들이 아니라 자신의 상태를 솔직히 인정한 단계에 있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나는 요즘 내 가족과 사회에서 만난 사람들, 그리고 내가 아끼는 친구들과의 문제를 새로운 시각에서 바라보기 시작했다. (…) 다만 그들은 아직 본인의 어려움을 깨닫지 못해 스스로도 어쩔 수 없는 것 아닌가 싶었다.”
“늘 우울을 유난으로 치부했다. 우울증에 걸린 사람을 떠올리면 잠도 못 자고, 식욕도 없고, 스스로를 자해하는 풍경이 그려졌다. 그 정도는 되어야 병이라고 생각했다. (…) 정신병의 기준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역시 정신병은 아닌 건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 나처럼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하지만 속은 곪아있는, 애매한 사람들이 궁금하다. 세상은 아주 밝거나 지나치게 어두운 부분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 같다.”
“정신병을 진단하는 것도 결국 정규분포에 따른 거거든요. 몇 가지 지표로 사람을 평가하고, 주류에서 벗어난 예외적인 점수가 나오면 비정상으로 보는 거죠. 그게 어쩌면 다수가 소수를 억압하는 모습처럼 느껴지기도 해요.”, “어쩌면 이렇게 말하고 싶은 게 아닐까요? 난 비정상이 아니다. 난 예외적인 존재가 아니다. 우리 모두가 서로에게 그러하듯 그냥 ‘다른 사람’일 뿐이다.”
이 지점에서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를 흔드는 효과가 발생한다. ‘판타스틱’과 ‘떡볶이’에는 자신이 ‘진짜’ 아픈지, 우울하다고 할 자격이 있는지 의심하는 부분이 나온다. 자신이 쥔 정상성―비장애인, 대학 교육, 전형적인 가정, 남들이 부러워하는 직장 등―때문이다. 우울의 타자화는 이렇게 막연하게, 우울은 ‘비정상적인’ 존재에게 일어나는 일이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더하기 빼기의 공식처럼, ‘이만큼’의 정상성을 획득했으면 우울할 리 없다는 세상의 사탕발림은 우울을 더욱 악화시켰다.
웅성거리는 목소리가 말한다. 우울은 정상성의 여부와 무관하게 닥친다. 누구나 아플 수 있으며, 우울과 우울하지 않음을 나누는 기준은 어디까지나 임의로 구성된 진단표이다.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가 사실은 그렇게 확실하지 않다고. 문제는 우울이 아니라 경계를 나누는 권력, 정신질환을 차별하고 배제하는 폭력이다.10)
3. 회복의 ‘재전유’와 연결의 감각
‘판타스틱’에서 서귤은 정신과 치료에 대한 이야기를 만들겠다고 마음먹으면서부터 “결말을 미리 정해놓고 있”었다고 밝힌다. “여전히 약을 먹고 상담을 받고 있지만 언젠가 나아질 거라는 희망찬 내용으로!”(169쪽) 이것이 기존의 세계가 바라는 우울의 질병 서사이다. 그러나 이제 서귤은 의심한다. “내가 원하는 것이 정말 이 문을 열고 들어가 ‘정상’이 되는 것일까?”(169쪽), “이 문을 부숴버리고 싶은 게 아니고?”(170쪽).
2016년 우울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엮은 『아무것도 할 수 있는』을 만든 김현경은 2018년 ‘망가진 대로’에서 쓴다. “사람들은 고상하고 조용히 책 같은 걸 만들고 기적적으로 우울증 같은 걸 이겨내고 긍정적으로 열심히 사는 나를 좋아한다. 하지만 그건 내가 아니다. 자주 울고 자주 멍청히 누워 언제 죽을까 생각하며, 누구에게도 드러내지 못해 결국에 정신과 폐쇄병동에까지 가게 되는, 그게 나였다.”(220-221쪽) 우울증 환자를 가시화하고, 책과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서로 ‘연결’하는 작업은 고무적이었다. 잘 만들어진 서사에서 기승‘전’쯤에 해당한다. 이제 김현경을 기다리는 것은 ‘기적적으로 우울증 같은 걸 이겨내고’ ‘긍정적으로 열심히’ 사는 해피엔딩이다.
그러나 삶은 한 편의 영화가 아니고, 끝이 없으며, 어떤 병은 쉽게 낫지 않는다. 영영 나을 수 없는 병도 있다. 아프면 나아야 하고, 완치가 유일한 목적이자 행복의 조건이라는 환상이 환자를 소외시킨다. 같은 병이라도 양상이나 경과가 사람마다 다르고, 의술은 전능하지 않다. 온전한 건강이 도달할 수 없는 환상이듯, 완치라는 개념도 그렇다. 김현경은 “많은 것들이 바뀌었습니다. 다만 제 자신은 여전히 자주 우울하고, 남들과 같이 평범하게 먹고 자고 사람들을 만나고 하루를 버티기는 어렵습니다.”(268-269쪽)라며 책을 읽는 독자가 품을지도 모르는 섣부른 낙관에 선을 긋는다.
우울은 쉽사리 넘어설 수 있는 산이 아니다. 약의 종류와 복용량을 세세하게 기록한 ‘떡볶이’에서는 손톱보다 작은 약 반 알에 일상이 무너지고, ‘판타스틱’에서 완치를 목전에 두었던 서귤은 어느 날 갑자기 집 앞에서 괴한을 만나는 바람에 상태가 악화 된다. ‘망가진대로’, ‘떡볶이’, ‘판타스틱’을 비롯한 여러 우울 에세이에서 완치의 기대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저 다소 지루할 만큼 우울한 일상이 반복된다. 물이 가득 찬 컵을 들고 걸을 때처럼 어떤 날은 조금 넘치고 어떤 날은 뽀송한 차이의 정도만 있을 뿐이다.
비관일까? 역시…… 우울증 환자라서? 아니, 이것은 훨씬 더 결연하고 존엄한 차원의 ‘수용’이다. 김원영의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을 참고하면, 수용은 나의 자발적인 선택이자 내가 원하는 삶의 전체적인 기획 및 그에 대한 근본적인 태도와 밀접하다. 수용은 외부 질서에 종속되거나 휘둘리지 않고, 자기 삶에 머무는 어떤 것을 선택하기로 실천하는 행위이다.11) 받아들인다는 것. 부정하지도 않고, 질병을 선물이나 시련 같은 것으로 낭만화하여 긍정하지도 않고, 패배주의에 빠지지도 않고, 그저 있는 그대로.
아픔이나 병을 살아가는 동안 어쩔 수 없이 ‘동반’하는 개념으로 이해할 때 회복의 의미 역시 달라진다. 삶은 “사회의 기준에 가까워지고 멀어지며, 오만과 불안 사이를 진자운동하며 살아가”(‘망가진 대로’, 222쪽)는 것이다. ‘판타스틱’에서 서귤은 자신의 일상에 자연스럽게 병원 상담과 복용을 추가한다. “오늘도 회사의 눈치를 보며 병원에 가고”, “상담을 하고”, “약을 받는다.” 그리고 이것은 서귤에게 “그런 보통날”, “보통 삶”(171-173쪽)이다. 이는 오히려 ‘완치’와 ‘실패’라는 이분법 속에 갇혀 있는 질병의 개념을 확장하고, 그 과정의 삶에 초점을 맞추는 행위이다. ‘회복’과 ‘실패’, ‘정상’과 ‘비정상’의 이분법을 넘어서면 아픈 과정의 현재가 나타난다. 현재는 아프지 않은 미래로 가는 과정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내 몫의 삶, 회복 중인 하루’이다.
‘떡볶이’ 역시 “한 권의 책은 반드시 그래야 한다고 생각”해서 “내가 이만큼 좋아졌다는 것을 보여주거나, 뭔가 대단한 마무리를 짓고 싶었”(218쪽)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상담을 받는 내내 여전히 우울했다고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그러다가, 빛과 어둠은 한 몸이라는 걸 다시 떠올렸다. 시작하며 이야기했던 행복과 불행의 공존처럼 삶의 곡선은 유동적이다. 그리고 내가 포기하지 않는 이상 계속해서 이어가며 웃고 울 수 있다.”(218-219쪽) 죽음에의 충동과 삶에의 충동이 동시에 찾아와, 죽고 싶어도 떡볶이는 먹고 싶은 스스로가 우습고 미웠던 저자는 이제 “감정의 파동을 삶의 리듬으로 여”기고 싶어한다. 치유와 차도만이 삶의 방향성이 아니고, 때로는 악화되고 고꾸라질지라도 ‘계속해나가는 것’의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다.
조한진희는 “아프다는 것은 삶에 새로운 정체성이 추가된다는 의미”12)라고 말하며, 회복의 방법으로 ‘다른 아픈 몸과의 연결’을 제안한다. 그렇게 완치와 동의어로 여겨지던 회복이 새로운 의미로 바뀐다. 이때의 연결은 아픈 사람끼리 서로의 슬픔에 빠져 매몰되는 형태가 아니다. 연결은 고립되었던 우울을 고리 삼아 타인에 대한 관심을 뻗고, 바깥으로 확장된다. ‘망가진 대로’에서 피치코니는 정신병동에서 자신을 다른 사람으로 착각하는 환자에게 위로받는 경험을 말한다. “사지 육신 멀쩡한 사람에게 치이고 조현병 환자에게 치유 받는 내 현실이라니. 그럼에도 기꺼이 조용히 다가가 그분의 ‘호희’가 되어드리는 것은 그 어떤 위로보다도 그분의 문장 하나가, 노랫말 하나가 지금의 나에게 가장 큰 위안이 되어주기 때문.”(‘망가진 대로’, 121쪽) “내가 슬픈 사람들의 슬픔을 이해하게 된 때도, 나에게 내가 가장 슬픈 사람이 된 후였다. 우리는 서로의 슬픔을, 눈물을 조금 더 이해할 필요가 있다.”(‘망가진 대로’, 222쪽) 새로운 회복의 개념 안에서, 우울과 고통은 타인을 깊이 이해하는 감수성이다.
이러한 가능성은 작가와 독자 사이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떡볶이’, ‘망가진 대로’, ‘판타스틱’은 모두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나왔다. 앞서 말하였듯 ‘평범한, 보통의 우울’이 저자성인 독립출판물 에세이는 독자와 내밀한 관계를 맺는다. 독립출판물 에세이의 출간목적에는 자신과 같은 사람을 위로하고 싶다는 말이 빠지지 않는다. 독자는 자신과 곧장 접속되는 그 보통의 저자성과, 고유한 저자성인 우울에 반응한다. 그렇게, 시대가 남긴 상처를 함께 쓰다듬는 위로와 공감의 공동체가 탄생한다.
4. 나가며 : 망가진 대로 판타스틱 떡볶이
비평이 주로 만나는 대상은 제도의 한 관문을 통과하여, 섬세하게 독해할 가능성이 있다고 평가받는 텍스트다. 하지만 결국 다른 모든 창작처럼 사랑을 발견하는 일, 그 평가와 기준으로부터 자유로운 세계에 대해서 써보자고 생각했다. 2013년부터 독립출판을 해왔다. 출판물의 질을 깎아내리거나 ‘출판을 못해서’ 만드는 마이너리그쯤으로 인식하는 사람도 심심찮게 만났다. 그럴 때마다 나의 대답은 “마이너리그 아닌데요.”가 아니라, “마이너리그면 어쩔 건데요.”였다. 너무 개인적이어서, 너무 정제되지 않아서, 너무 감정적이어서, 너무 1차원적이라서……, 익숙한 기준에 따라 우열을 가르려는 시도를 맞닥뜨릴 때마다 나는 이 다듬어지지 않은 것들을 부쩍부쩍 사랑하게 되었다. 섣불리 낙관하지 않으며 비슷한 고통을 위로하는, 결도 형식도 다른 작업을 연결해보고 싶었다.
“망가진 채로 살아간다고 해도, 결국 망가진 것들이 가장 행복하게 웃는다. 우리를 고칠 필요가 없어서, 다 고개 끄덕일 수 있으니까. 당신 정말 아무래도 괜찮으니까.”(‘망가진 대로’, 78쪽). 이 문장을 읽었을 때 산뜻한 해방감을 느꼈다. 우리는 너무나 간단하게 정상과 비정상을 설정하고, 너는 훼손되었다고 선언하는 세상에서 살고 있으니까. 복구나 정상성의 탈환을 노리기보다 지금의 연속을 수용하기. 털끝 하나 손상되지 않은 온전함만이 곧 정상은 아닐 텐데 우리는 너무 쉽게, 조금이라도 부서질까 봐 전전긍긍한다.
2020년의 우울은 여전히 아프다. 그러나 제약 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쓰고 나눌 수 있는 시대에, 우울은 폐쇄적인 감정만은 아니다. 퇴치하거나 극복해야 하는 대상도 아니다. 이제 우울은 자신에게서 도려낼 수 없는 어떤 한 부분이다. 돌봄과 공존의 태도로, 서로 가장 연약한 부분을 들여다보고 바람을 쐬어준다. 단절되고 병리화 되었던 우울을 다시 사유하면서 회복과 삶의 가능성이 다른 빛깔을 띤다. 망가진 대로도 그럭저럭 ‘판타스틱’한 날이 오고, 죽고 싶다고 중얼거리는 입술에 묻은 떡볶이 양념을 닦아주는 날. 그런 보통 날을 받아들이는 순간 비로소 무엇이 우리를 우울하게 하는지 직시할 수 있다. ‘정확하게’, 좀 더 잘 슬퍼하며 살아갈 수 있다.
몇 년 전의 일이다. 일상적인 대화 중 친구가 문득 말했다. “요즘 정신과 약 먹고 있어.” 무기력이 심해서 병원에 갔더니 우울증이라고 했다. 그렇구나. 나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모르게 튀어나오려던 말을 간신히 꿀꺽 삼켰다. ‘네가 왜?’ 평생 우등생이었으며 원하는 직업을 가졌고, 중산층 가정의 구성원인 친구가 우울증이라는 사실이 낯설었다. 조건 반사 같았던 첫 번째 감정은, 내 것이라기보다 외부에서 흘러들어온 가치 판단이었다. 우울의 자격을 논하고, ‘진짜’ 우울과 ‘중2병’을 감별하려 들고, “남들도 다 힘들어~.”하고 대충 뭉개는 말에 오래 노출된 까닭이다.
2018년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백세희, 흔)는 출간 즉시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부제는 ‘정신과 치료 일기’. 상담의와의 대화 내용과 내밀한 고백은, 저자의 말에 따르면, “사적이고 구질구질한 이야기”이다. 그런 책이 이만큼 팔렸다는 것은 그만큼 이런 말이 필요한 사람이 많았다는 뜻이다. 마음은 보이지 않으니 객관적인 판단이 불가능하고,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정신질환 혐오와 맞물려 병의 가시화가 어려웠다. OECD 국가 중 자살률은 1위지만 항우울제 소비량은 최하위권인 현실에서, 자신의 정신질환 치료기를 솔직하게 고백한 책은 잔뜩 흔든 콜라의 뚜껑을 연 셈이다.
몸이고 마음이고 아프고, 또 아플 수밖에 없는 세상이다. 한병철은 2010년 『피로 사회』1)라는 책을 통해 현대사회의 성과주의 속에서 자기를 착취하는 현대인이 우울해지는 메커니즘을 분석하기도 했다. 여기저기서 우울을 말하는 목소리가 터져나온다. 우울한 개인의 에세이부터 뇌과학, 심리학, 종교, 사회학…… 아픔은 청춘의 속성이고, 구백구십구 번 흔들려도 아직 한 번이 남았으니 어른이 되려면 견디라던 시대가 지난 직후. 문자 그대로, 모두 지쳐 널브러져 있다. 떡볶이는 먹고 싶어 하면서.
본고에서는 우울증을 비롯한 정신질환이 소재인 독립출판물을 대상으로, ‘지금, 여기’의 시대적 감정인 우울2)을 읽어본다. 먼저 독립출판물의 형식이 어떻게 우울한 개인의 저자성과 연결되는지 살피고, 개인이 우울을 수용하는 양상이 지금까지와 다른 지점을 짚어볼 것이다. 이를 통해 변화하는 회복의 의미와 새로이 발견된 가치를 규명한다. 분석 텍스트는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3)(이하 ‘떡볶이’), 에세이집 『망가진 대로 괜찮잖아요』4)(이하 ‘망가진 대로), 만화 『판타스틱 우울백서』5)(이하 ‘판타스틱’) 총 3편이며, 참고할 만한 다른 출판물은 각주로 부연한다.
2. 우울의 ‘저자성’과 정상성의 해체
분석 대상을 ‘독립출판물 에세이’라는 범주로 한정한 이유는 독립출판물과 에세이의 특성 때문이다. 우선, 독립출판은 개인이나 팀이 기획부터 편집/인쇄/유통/판매를 모두 담당한다. 출판사를 통하는 기존의 방식과 가장 두드러지는 차이는 작가의 고유성이다. 독립출판은 ‘등단’하지 않아도, 유명하지 않아도, 기존의 작업물이 없어도, 출판사의 ‘제안’이나 ‘승인’ 없이 책을 낼 수 있다. 상업성이나 출판시장의 문법에서도 자유롭기에 판형부터 소재, 수위, 형식, 범위가 다양하다. 분석 텍스트의 작가 백세희, 김현경과 재은을 포함한 열두 명, 서귤은 모두 자신을 ‘보통 사람’이라고 칭한다. 전통적으로 작가 또는 ‘저자(author)’는 예술가의 권위를 부여받는다. 많이 달라졌지만 여전히 등단과 비등단의 위계가 작용하는 현실에서 작가는 ‘선생님’으로 호명된다. 반면 작가와 독자의 경계가 흐릿한 독립출판물에서 저자의 권위나 아우라는 희미해진다(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을지라도).
세 작품의 자기소개를 보자. “기분부전장애와 불안장애 환자. 글을 쓴다.”(‘떡볶이’), “고양이를 먹여 살리기 위해 회사에 다닌다. 퇴근하고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쓴다. 어제 우울했고 오늘 행복하므로 평균을 내면 보통이다.”(‘판타스틱’), “사람들의 이야기가 궁금해 책 같은 것을 만들고 있습니다.”(‘망가진 대로’, 김현경). 에세이 내용 역시 지극히 평범해 보인다. 완치의 기적도, 비 온 뒤 땅 굳듯 되찾은 일상이 얼마나 귀중한지 속삭이는 감동도, 그러니 매사에 감사하고, 건강에 ‘있을 때 잘하’라는 교훈도 없다. 요즘에는 재미있고 자극적이면 ‘매운맛’이라고 표현하는데, 이건 순한맛을 넘어 밍밍하게까지 느껴질 맛이다.
그러나, 그래서, 그렇기 때문에, 바로 지금 여기에 이토록 평범한 개인이 부려놓는 ‘에세이’가 중요하다. 건강은 흔히 기든스적 의미의 “생의학적 건강 모델”의 차원에서 다루어진다. 질병을 객관적인 측면에서 정의하고, 건강한 신체는 과학적 근거를 갖는 의료의 힘으로 되찾을 수 있다는 믿음이 사회를 지배한다. 이런 맥락에서 지금까지 유통된 질병 서사6)는 불균등하다. “세상은 아픈 이로부터 질병이 극복 가능하다거나, 최소한 나름의 쓸모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한다. 즉, 자신의 정상성(건강)에 안도하고 질병을 통제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강화할 만한 이야기”7)가 책으로 만들어질 만하다고 ‘간택’되었다.
정신질환이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 않다. 건강 중심주의 세계에서 환자는 질병이 정체성의 전부인 병리적 존재로 타자화된다. 특히 정신 질환자의 말은 믿을 수 없는 것이고 신뢰해서는 안 되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 출판물의 저자들은 심지어 ‘완치’되지 않았다. 여전히 아프고, 아플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말하고 쓰고 그린다. 이 지점에서 고유한 저자성이 구축된다.
지금까지 저자는 ‘정상적인(건강한/완치된)’, 그리고 제도의 승인이나 인정(등단이나 출판사의 선택)을 받은 사람으로 한정되었다. 그러나 스스로 ‘작가’가 된 이들이 우울을 정체성 삼아 쓰는 행위는, 여성 작가들이 기존의 남성적 저자의 권위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여성의 저자성을 창조하였듯, ‘우울’의 저자성8)이라는 영역을 일구는 것이다.
물론, 저자성에 대한 의심이 따라붙을 것이다. 기존의 가치평가 체계 안에서 이러한 에세이와 작가는 ‘검증되지 않은 아마추어, 환자의 병리적 독백’으로 평가절하당하기 쉽다. 언제나 내밀한 ‘우울’보다 긍정적이고 희망찬 ‘명랑’이, 혼란스럽고 양가적인 감정보다 단정하고 간결한 선언이 더 우월하게 여겨졌으니. 그러나 새것에는 새로운 연장이 필요하다. 흔히 평가의 기준이 되는 미학적 완성도나 가치평가는 우울 에세이를 쓰는 독립출판물 작가에게 더운 나라의 스케이트화 같다. 욕망과 갈구의 대상이 아니라는 뜻이다.
목적은 지금껏 주어지지 않았던 말하기와 가시화의 경험이다. 자신의 이야기로 세상에 말을 걸고, ‘이런’ 삶이나 우울이 크게 잘못되거나 특이한 것이 아니며,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는 기준과 폭력에 의문을 제기한다.9)
“새삼스러운 게, 나 혼자 사는 거면 누구나 정상일 텐데, 이 세계를, 세대를 ‘함께 겪어내고’ 있어서 우리는 아무것도 정상으로 만들 수가 없다. 그러니 누가 제일 잘못됐는지 줄 세우지 않아도 된다.”
―재은, 「우리 망가진 대로 괜찮잖아요」, ‘망가진 대로’, 78쪽.
“어쩌면 우울증 환자들은 남들과 다른 비정상인 사람들이 아니라 자신의 상태를 솔직히 인정한 단계에 있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나는 요즘 내 가족과 사회에서 만난 사람들, 그리고 내가 아끼는 친구들과의 문제를 새로운 시각에서 바라보기 시작했다. (…) 다만 그들은 아직 본인의 어려움을 깨닫지 못해 스스로도 어쩔 수 없는 것 아닌가 싶었다.”
―호송, 「우리는 어딘가 조금씩 비정상이기에」, ‘망가진 대로’, 43쪽.
“늘 우울을 유난으로 치부했다. 우울증에 걸린 사람을 떠올리면 잠도 못 자고, 식욕도 없고, 스스로를 자해하는 풍경이 그려졌다. 그 정도는 되어야 병이라고 생각했다. (…) 정신병의 기준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역시 정신병은 아닌 건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 나처럼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하지만 속은 곪아있는, 애매한 사람들이 궁금하다. 세상은 아주 밝거나 지나치게 어두운 부분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 같다.”
―백세희, ‘떡볶이’, 19쪽.
“정신병을 진단하는 것도 결국 정규분포에 따른 거거든요. 몇 가지 지표로 사람을 평가하고, 주류에서 벗어난 예외적인 점수가 나오면 비정상으로 보는 거죠. 그게 어쩌면 다수가 소수를 억압하는 모습처럼 느껴지기도 해요.”, “어쩌면 이렇게 말하고 싶은 게 아닐까요? 난 비정상이 아니다. 난 예외적인 존재가 아니다. 우리 모두가 서로에게 그러하듯 그냥 ‘다른 사람’일 뿐이다.”
―서귤, ‘판타스틱’, 147-148쪽.
―서귤, 『판타스틱 우울백서』, 이후진프레스, 2018.
이 지점에서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를 흔드는 효과가 발생한다. ‘판타스틱’과 ‘떡볶이’에는 자신이 ‘진짜’ 아픈지, 우울하다고 할 자격이 있는지 의심하는 부분이 나온다. 자신이 쥔 정상성―비장애인, 대학 교육, 전형적인 가정, 남들이 부러워하는 직장 등―때문이다. 우울의 타자화는 이렇게 막연하게, 우울은 ‘비정상적인’ 존재에게 일어나는 일이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더하기 빼기의 공식처럼, ‘이만큼’의 정상성을 획득했으면 우울할 리 없다는 세상의 사탕발림은 우울을 더욱 악화시켰다.
웅성거리는 목소리가 말한다. 우울은 정상성의 여부와 무관하게 닥친다. 누구나 아플 수 있으며, 우울과 우울하지 않음을 나누는 기준은 어디까지나 임의로 구성된 진단표이다.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가 사실은 그렇게 확실하지 않다고. 문제는 우울이 아니라 경계를 나누는 권력, 정신질환을 차별하고 배제하는 폭력이다.10)
3. 회복의 ‘재전유’와 연결의 감각
‘판타스틱’에서 서귤은 정신과 치료에 대한 이야기를 만들겠다고 마음먹으면서부터 “결말을 미리 정해놓고 있”었다고 밝힌다. “여전히 약을 먹고 상담을 받고 있지만 언젠가 나아질 거라는 희망찬 내용으로!”(169쪽) 이것이 기존의 세계가 바라는 우울의 질병 서사이다. 그러나 이제 서귤은 의심한다. “내가 원하는 것이 정말 이 문을 열고 들어가 ‘정상’이 되는 것일까?”(169쪽), “이 문을 부숴버리고 싶은 게 아니고?”(170쪽).
2016년 우울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엮은 『아무것도 할 수 있는』을 만든 김현경은 2018년 ‘망가진 대로’에서 쓴다. “사람들은 고상하고 조용히 책 같은 걸 만들고 기적적으로 우울증 같은 걸 이겨내고 긍정적으로 열심히 사는 나를 좋아한다. 하지만 그건 내가 아니다. 자주 울고 자주 멍청히 누워 언제 죽을까 생각하며, 누구에게도 드러내지 못해 결국에 정신과 폐쇄병동에까지 가게 되는, 그게 나였다.”(220-221쪽) 우울증 환자를 가시화하고, 책과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서로 ‘연결’하는 작업은 고무적이었다. 잘 만들어진 서사에서 기승‘전’쯤에 해당한다. 이제 김현경을 기다리는 것은 ‘기적적으로 우울증 같은 걸 이겨내고’ ‘긍정적으로 열심히’ 사는 해피엔딩이다.
그러나 삶은 한 편의 영화가 아니고, 끝이 없으며, 어떤 병은 쉽게 낫지 않는다. 영영 나을 수 없는 병도 있다. 아프면 나아야 하고, 완치가 유일한 목적이자 행복의 조건이라는 환상이 환자를 소외시킨다. 같은 병이라도 양상이나 경과가 사람마다 다르고, 의술은 전능하지 않다. 온전한 건강이 도달할 수 없는 환상이듯, 완치라는 개념도 그렇다. 김현경은 “많은 것들이 바뀌었습니다. 다만 제 자신은 여전히 자주 우울하고, 남들과 같이 평범하게 먹고 자고 사람들을 만나고 하루를 버티기는 어렵습니다.”(268-269쪽)라며 책을 읽는 독자가 품을지도 모르는 섣부른 낙관에 선을 긋는다.
우울은 쉽사리 넘어설 수 있는 산이 아니다. 약의 종류와 복용량을 세세하게 기록한 ‘떡볶이’에서는 손톱보다 작은 약 반 알에 일상이 무너지고, ‘판타스틱’에서 완치를 목전에 두었던 서귤은 어느 날 갑자기 집 앞에서 괴한을 만나는 바람에 상태가 악화 된다. ‘망가진대로’, ‘떡볶이’, ‘판타스틱’을 비롯한 여러 우울 에세이에서 완치의 기대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저 다소 지루할 만큼 우울한 일상이 반복된다. 물이 가득 찬 컵을 들고 걸을 때처럼 어떤 날은 조금 넘치고 어떤 날은 뽀송한 차이의 정도만 있을 뿐이다.
비관일까? 역시…… 우울증 환자라서? 아니, 이것은 훨씬 더 결연하고 존엄한 차원의 ‘수용’이다. 김원영의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을 참고하면, 수용은 나의 자발적인 선택이자 내가 원하는 삶의 전체적인 기획 및 그에 대한 근본적인 태도와 밀접하다. 수용은 외부 질서에 종속되거나 휘둘리지 않고, 자기 삶에 머무는 어떤 것을 선택하기로 실천하는 행위이다.11) 받아들인다는 것. 부정하지도 않고, 질병을 선물이나 시련 같은 것으로 낭만화하여 긍정하지도 않고, 패배주의에 빠지지도 않고, 그저 있는 그대로.
아픔이나 병을 살아가는 동안 어쩔 수 없이 ‘동반’하는 개념으로 이해할 때 회복의 의미 역시 달라진다. 삶은 “사회의 기준에 가까워지고 멀어지며, 오만과 불안 사이를 진자운동하며 살아가”(‘망가진 대로’, 222쪽)는 것이다. ‘판타스틱’에서 서귤은 자신의 일상에 자연스럽게 병원 상담과 복용을 추가한다. “오늘도 회사의 눈치를 보며 병원에 가고”, “상담을 하고”, “약을 받는다.” 그리고 이것은 서귤에게 “그런 보통날”, “보통 삶”(171-173쪽)이다. 이는 오히려 ‘완치’와 ‘실패’라는 이분법 속에 갇혀 있는 질병의 개념을 확장하고, 그 과정의 삶에 초점을 맞추는 행위이다. ‘회복’과 ‘실패’, ‘정상’과 ‘비정상’의 이분법을 넘어서면 아픈 과정의 현재가 나타난다. 현재는 아프지 않은 미래로 가는 과정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내 몫의 삶, 회복 중인 하루’이다.
‘떡볶이’ 역시 “한 권의 책은 반드시 그래야 한다고 생각”해서 “내가 이만큼 좋아졌다는 것을 보여주거나, 뭔가 대단한 마무리를 짓고 싶었”(218쪽)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상담을 받는 내내 여전히 우울했다고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그러다가, 빛과 어둠은 한 몸이라는 걸 다시 떠올렸다. 시작하며 이야기했던 행복과 불행의 공존처럼 삶의 곡선은 유동적이다. 그리고 내가 포기하지 않는 이상 계속해서 이어가며 웃고 울 수 있다.”(218-219쪽) 죽음에의 충동과 삶에의 충동이 동시에 찾아와, 죽고 싶어도 떡볶이는 먹고 싶은 스스로가 우습고 미웠던 저자는 이제 “감정의 파동을 삶의 리듬으로 여”기고 싶어한다. 치유와 차도만이 삶의 방향성이 아니고, 때로는 악화되고 고꾸라질지라도 ‘계속해나가는 것’의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다.
조한진희는 “아프다는 것은 삶에 새로운 정체성이 추가된다는 의미”12)라고 말하며, 회복의 방법으로 ‘다른 아픈 몸과의 연결’을 제안한다. 그렇게 완치와 동의어로 여겨지던 회복이 새로운 의미로 바뀐다. 이때의 연결은 아픈 사람끼리 서로의 슬픔에 빠져 매몰되는 형태가 아니다. 연결은 고립되었던 우울을 고리 삼아 타인에 대한 관심을 뻗고, 바깥으로 확장된다. ‘망가진 대로’에서 피치코니는 정신병동에서 자신을 다른 사람으로 착각하는 환자에게 위로받는 경험을 말한다. “사지 육신 멀쩡한 사람에게 치이고 조현병 환자에게 치유 받는 내 현실이라니. 그럼에도 기꺼이 조용히 다가가 그분의 ‘호희’가 되어드리는 것은 그 어떤 위로보다도 그분의 문장 하나가, 노랫말 하나가 지금의 나에게 가장 큰 위안이 되어주기 때문.”(‘망가진 대로’, 121쪽) “내가 슬픈 사람들의 슬픔을 이해하게 된 때도, 나에게 내가 가장 슬픈 사람이 된 후였다. 우리는 서로의 슬픔을, 눈물을 조금 더 이해할 필요가 있다.”(‘망가진 대로’, 222쪽) 새로운 회복의 개념 안에서, 우울과 고통은 타인을 깊이 이해하는 감수성이다.
이러한 가능성은 작가와 독자 사이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떡볶이’, ‘망가진 대로’, ‘판타스틱’은 모두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나왔다. 앞서 말하였듯 ‘평범한, 보통의 우울’이 저자성인 독립출판물 에세이는 독자와 내밀한 관계를 맺는다. 독립출판물 에세이의 출간목적에는 자신과 같은 사람을 위로하고 싶다는 말이 빠지지 않는다. 독자는 자신과 곧장 접속되는 그 보통의 저자성과, 고유한 저자성인 우울에 반응한다. 그렇게, 시대가 남긴 상처를 함께 쓰다듬는 위로와 공감의 공동체가 탄생한다.
4. 나가며 : 망가진 대로 판타스틱 떡볶이
비평이 주로 만나는 대상은 제도의 한 관문을 통과하여, 섬세하게 독해할 가능성이 있다고 평가받는 텍스트다. 하지만 결국 다른 모든 창작처럼 사랑을 발견하는 일, 그 평가와 기준으로부터 자유로운 세계에 대해서 써보자고 생각했다. 2013년부터 독립출판을 해왔다. 출판물의 질을 깎아내리거나 ‘출판을 못해서’ 만드는 마이너리그쯤으로 인식하는 사람도 심심찮게 만났다. 그럴 때마다 나의 대답은 “마이너리그 아닌데요.”가 아니라, “마이너리그면 어쩔 건데요.”였다. 너무 개인적이어서, 너무 정제되지 않아서, 너무 감정적이어서, 너무 1차원적이라서……, 익숙한 기준에 따라 우열을 가르려는 시도를 맞닥뜨릴 때마다 나는 이 다듬어지지 않은 것들을 부쩍부쩍 사랑하게 되었다. 섣불리 낙관하지 않으며 비슷한 고통을 위로하는, 결도 형식도 다른 작업을 연결해보고 싶었다.
“망가진 채로 살아간다고 해도, 결국 망가진 것들이 가장 행복하게 웃는다. 우리를 고칠 필요가 없어서, 다 고개 끄덕일 수 있으니까. 당신 정말 아무래도 괜찮으니까.”(‘망가진 대로’, 78쪽). 이 문장을 읽었을 때 산뜻한 해방감을 느꼈다. 우리는 너무나 간단하게 정상과 비정상을 설정하고, 너는 훼손되었다고 선언하는 세상에서 살고 있으니까. 복구나 정상성의 탈환을 노리기보다 지금의 연속을 수용하기. 털끝 하나 손상되지 않은 온전함만이 곧 정상은 아닐 텐데 우리는 너무 쉽게, 조금이라도 부서질까 봐 전전긍긍한다.
2020년의 우울은 여전히 아프다. 그러나 제약 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쓰고 나눌 수 있는 시대에, 우울은 폐쇄적인 감정만은 아니다. 퇴치하거나 극복해야 하는 대상도 아니다. 이제 우울은 자신에게서 도려낼 수 없는 어떤 한 부분이다. 돌봄과 공존의 태도로, 서로 가장 연약한 부분을 들여다보고 바람을 쐬어준다. 단절되고 병리화 되었던 우울을 다시 사유하면서 회복과 삶의 가능성이 다른 빛깔을 띤다. 망가진 대로도 그럭저럭 ‘판타스틱’한 날이 오고, 죽고 싶다고 중얼거리는 입술에 묻은 떡볶이 양념을 닦아주는 날. 그런 보통 날을 받아들이는 순간 비로소 무엇이 우리를 우울하게 하는지 직시할 수 있다. ‘정확하게’, 좀 더 잘 슬퍼하며 살아갈 수 있다.
이진송
2013년 <계간홀로>로 셀프 데뷔했다. 인정과 위계로부터 자유로운 이야기를 좋아한다. 내키는 대로 쓰고, 마음 맞는 친구들과 책을 만든다.
2020/09/29
34호
- 1
- 2010년 독일에서 출간되었으며, 한국에는 2012년 문학과지성사에서 번역본이 나왔다. 한병철, 『피로 사회』, 김태환 역, 문학과 지성사, 2012년.
- 2
- 이때의 우울은 문학 비평에서 익숙한 멜랑콜리가 아니라, ‘은유로서의 질병’을 걷어낸 ‘데프레시옹’(Depression)이다. 멜랑콜리와 데프레시옹의 구별은 다음 논문을 경유한다. 김연순, 고봉만, 김종엽, 「질병으로서 ‘멜랑콜리(Melancholie)’와 ‘데프레시옹(Depression)’에 관한 인문적 고찰」, 『인문학 연구』 48권 48호, 조선대학교 인문학 연구원, 2014. “데프레시옹은 급변하는 시대의 불확실성과 경쟁적 성과주의에 집착하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탈진한 영혼의 표현이자 병리학적인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기에 그것은 전통적으로 낭만적이면서 창조적 영감의 정조를 함축하고 있는 멜랑콜리와는 다른 스펙트럼을 가진다.”(346), “데프레시옹은 “슬픔이라는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장기간 지속되는 기분 저하 상태와 여기에 동반된 여러 장애”를 뜻하며, 여기서 “장애란 생각의 과정, 동기, 의욕, 행동, 수면 등 전반적인 기능이 저하되어 일상적인 생활이 어려운 상황”(358쪽).
- 3
- 백세희,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 2018. 이 책은 독립출판물과 출판사 ‘흔’의 출간작 두 가지 버전이 있다. 본 논의에서는 ‘독립출판물’의 정체성이 중요하기에 독립출판물 버전을 선정하였다.
- 4
- 이 책을 엮은 김현경은 2016년 『아무것도 할 수 있는』으로 독립출판물로는 거의 처음 우울증 환자의 이야기와 인터뷰를 담은 책을 냈다. ‘거의 처음’은 모호한 표현이지만, 독립출판물은 주로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나오기 때문에 텀블벅 (https://tumblbug.com/)의 펀딩 기록을 참고했다. 김현경은 비슷한 작업을 지속하는데, 이 중 『망가진 대로 괜찮잖아요』가 비교적 최근작이고, 작가들의 자기 인식이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고 판단하여 분석 대상으로 선정하였다. 재은 외 열세 명 함께 쓰고/김현경, 송재은 엮음, 『망가진 대로 괜찮잖아요』, warmgrayblue, 2018.
- 5
- 서귤, 『판타스틱 우울백서』, 이후진프레스, 2018. 이 책은 독립출판물 서점 ‘이후북스’의 출판 브랜드로, 독립출판물과 상업출판물의 경계선에 있다. 그러나 서귤이 처음 독립출판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으며, 출판사의 소규모 인원과 ‘팀’에 가까운 형태로 만든 책이기에 독립출판물의 분류에 넣었다. 최근에는 개인이나 서점이 출판 브랜드를 소유하는 경우가 늘어 ‘독립출판물은 출판사를 통하지 않은’ 책이라는 설명이 느슨해지는 추세다.
- 6
- ‘질병 서사(pathography)’는 환자의 입장에서 쓴 질병 경험에 대한 글쓰기다. “‘자전적 질병서사(authopathography)라는 용어를 만들어낸 토마스 쿠저의 정의에 따르면, 질병과 장애 서사와 같은 삶의 글쓰기의 가장 중요한 동기는 다른 사람들의 권위와 담론의 지배로부터 다양한 기능 장애를 가진 몸을 복원하고, 수동적인 치료 대상을 능동적인 주체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서길완, 「자전적 질병 이야기를 통한 질병경험의 재건과 자아-정체성의 재창출 : 오드르 로드의 『암 일기』를 통해서」, 『수사학』 22권 22호, 한국수사학회, 2015, 142쪽.
- 7
- 조한진희,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 도서출판 동녘, 2019, 343쪽.
- 8
- 독립출판물 『우울한 주인공 시점 시즌 1』은 ‘우울한 주인공 시점 1기 15명’이 공동 집필했다. 책 소개는 다음과 같다. “제목처럼 ‘우울한 당신도 주인공이 되어, 당신의 시점에서 글을 쓸 수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우울한 사람들이 자신이 기존의 저자성과 맞지 않음을 인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독립출판물은 ‘우울한 당신도’ ‘쓸 수 있’는 형식이고, 그 안에서 우울은 글감이, 우울한 사람은 저자가 된다.
- 9
- 이러한 인식과 시도는 다른 작가에게서도 공통적으로 드러난다. “우울함은 모든 사람에게 있잖아요. 설기 엄마, 아빠는 우울하실 때가 없을까? 사실 저도 있어요. 주변 사람 중에 슬프고 우울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 있을까요? 설기는 그 흔한 우울함이 엄청나게 커졌고, 치료를 통해 일반적인 수준으로 줄였어요. 당뇨랑 비슷하죠. 모든 사람에게 혈당이 있지만, 당뇨인 사람은 그 혈당 수치가 일반 사람보다 높으니 그 수치를 낮추려고 치료하잖아요.” 김설기, 『우울한 거지 불행한 게 아니에요』, 레터프레스, 2018. 김설기 작가의 경우도 2018년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독립출판물 『무삭제판 우울증 회복일기』를 펴냈다. 출판사 버전과 다른데, 독립출판의 특성상 품절된 상품을 확보할 수 없어 출판사 버전을 인용하였다.
- 10
- ‘판타스틱’에서 서귤은 우울증 진단을 받은 후 사회에서 쓰이는 정신질환자 혐오 발언이 얼마나 많은지 깨닫는다. 더 나아가 ‘암 걸릴 것 같다’는 유행어나 시각장애인을 고려하지 않은 표현 등을 돌아보며, 차별적이고 폭력적인 언어 사용을 주의하겠다고 다짐한다.(74-75쪽)
- 11
- 김원영,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사계절, 2018, 139-144쪽 참고.
- 12
- 조한진희, 앞의 책, 356쪽,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