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경제 행위가 된 감정

   인구의 절반 이상이 대도시에 밀집해 생활하기에 도시의 삶이 곧 표준적인 삶으로 여겨지는 오늘날, 대규모의 재난과 참사는 그러한 ‘표준’이 얼마나 예외적인 규모의 것이며 통제 불가능한 수준의 것인지를 새삼 절감하게 해준다. 그저 삶에 드는 비용상의 효율을 위해 자연스레 모여든 작은 삶들이 미처 보호받지 못하고 크나큰 사고에 휘말려 들었을 때, 우리는 거기에 너무나 깊이 감정적으로 전율하고 또 탄식한다. 마치 그러한 사고가 도시에 모여든 사람들이 의당 감수하고 치러야만 하는 대가처럼 느껴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위한 비용마저도 삭감하며 사기업처럼 처신하는 정부를 향한 분노와 무관하게, 그들의 희생이 우리의 삶과 떼려야 뗄 수 없이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향한 절망은 사람과 사람을 거쳐 전달되며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이처럼 과밀한 인구에 속해 사는 삶이란 곧 무수한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과 불가피하게 감정을 나누는 삶을 의미하기도 한다. 인터넷에서 ‘짤’이나 ‘썰’의 형태로 쉴 새 없이 돌아다니는 다종다양한 민간 처세술은 사람을 대하는 것의 고단함, 감정을 나누거나 거두거나 통제하기 위해 개인이 부담해야 하는 정서적 비용의 정도를 가늠하게 해준다. 감정은 거대한 재난 앞에서 우리를 순식간에 하나로 연결시켜주기도 하지만 일상의 매 순간마다 복잡하게 얽혀들어 우리를 난처하게 하기도 한다.
   사회학자 에바 일루즈는 『감정 자본주의』(돌베개 2010)에서 20세기 대규모 공장식 산업화를 거치며 미국의 노동자들에게 원활한 사내 ‘소통’이 생산성의 주요 척도로 자리 잡게 되었음을 분석한 바 있다. 프로이트식 정신분석학이 미국 사회에 유입되면서 가족이라는 최소 사회집단 내에서 자아를 탐색하고 자아와의 관계를 모색하는 모델이 대중화되었고, 이는 직장이라는 집단 내에서 타인과의 관계를 점검하고 감정을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개인의 능력을 중시하는 결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즉 “직장의 불확실성과 긴장을 조절할 책임은 모두 자아에게 돌아갔다.”1) 감정의 유입과 교류는 외부의 요인에 기인하며 또 지극히 상호적이지만, 감정이 갖는 주관적 속성은 자아를 그것의 관리자로 상정한다.
   감정의 통제와 관리는 자아의 몫으로 돌아가는 한편 감정의 조절을 공적인 업무 수행 능력의 일부로 종속시키는 문화는 자연스레 감정을 통약 가능하고 평가 가능한 일종의 ‘사물’로 탈바꿈시킨다. 감정을 경제 활동의 주요 항목으로 편입시키는 이른바 감정 자본주의는 “경제적 자아를 감정적이 되게 만들었고, (…) 감정들을 좀 더 도구적 행위에 종속되게 만들었다.”2) 나아가 타인과의 소통을 위해
“사회관계에서 감정적 얽힘을 유보”
3)하는 기술, 즉 자신의 주관적 감정을 객관적 사물로 처리하는 기술이 요구되기에 이르렀다. 직장 상사나 동료에게 호구가 되지 않는 법, 싫어하는 사람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법 등 감정의 훼손을 최대한 배제하면서 인간관계에서 실리를 얻을 수 있는 기술들이 꾸준히 시장에 유통되는 오늘날의 상황은 이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그런데 지난 수십여 년에 걸쳐 안정적인 고용 노동이 사실상 형해화되고, 고용 준비를 가장한 장기적인 실직 상태나 SNS 등에서 수익을 창출하기 위해 일상을 상품화하는 노동이 만연하면서, 감정을 처리하는 기술이 요구되는 영역 또한 직장 내부에 한정되지 않고 삶 전반으로 불가피하게 확장되었다. 경제와 감정 간의 긴밀한 유착은 경제 형태 자체가 변화에 직면하면서 개개인을 더욱 깊이 옥죄기에 이르렀다. 삶 전반이 노동으로 탈바꿈한 세상에서 이제 우리는 감정을 극도로 통제하는 기술이 곧 성공의 척도로 여겨지는, 나아가 그러한 금욕의 기반 없이는 한 사람 몫의 삶조차도 꾸려가기 어려운 ‘신스토아주의’를 부득불 실천하며 살아가야 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2. 감정 사물화의 어려움

   이원석의 소설집 『까마귀 클럽』(문학과지성사 2022)의 표제작인 「까마귀 클럽」은 감정 관리의 각자도생 시대에 어떻게든 생존하기 위해 모였다가 흩어지는 사람들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관계 맺음에 어려움을 느끼지만 “혼자서는 결코 살아갈 수 없는 사람”(44쪽)이자 “사람을 사랑하지만 사람에게 정말로 사랑받아본 적이 거의 없는 사람”(45쪽)인 화자는 트위터로 만난 친구에게 ‘절연’을 당한 어느 날 “노력형 분노 스터디 〈까마귀 클럽〉”(43쪽)에 초대한다는 트위터 공고를 보고 선뜻 신청하게 된다. 화자까지 총 4명이 참가하는 이 클럽은 평소에 화를 잘 내지 못하는 사람들의 분노 합평회로서, 상대방을 분노의 대상으로 설정한 뒤 마치 연극을 하듯이 화를 내고 이에 대해 피드백을 받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들이 하나 같이 교육과 관련된 서비스 직종에 종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화자는 학습지 판매 업체의 텔레마케터로, 클럽 내 커플인 워리와 프로틴은 공부방 운영자와 유치원 교사로, 클럽 회장인 별은 운전 학원 강사로 일하고 있다. 관련 기술이나 지식을 최대한 정제된 서비스 상품의 형태로 전달해야 하는 이들은 감정의 절제를 상시적으로 요구받는 한편, 상품에 값을 지불하는 고객에 대해 불가피하게 을의 위치에 놓이며 겪을 수밖에 없는 정서적인 수모를 최대한 능숙하게 해소해야 하는 이중의 과업을 암묵적으로 강요받는다.


   “민이 어머님, 춘희 아버님. 길거리에서 왜 애들이 저한테 인사하는 거 싫어하세요? 저 진짜 서운해요. (…) 그리고 원장님. 그렇다고 진짜 반을 바꾸자고 해요? 제가 우리 반 애들 얼마나 좋아하는지 다 아시잖아요. 애들도 저 얼마나 좋아하는데요. (…) 운동하는 것도 간섭 좀 하지 마세요. 일만 잘하면 되잖아요. 제가 왜 직장 상사한테 취미까지 간섭받아야 해요?” (51쪽)


   에바 일루즈가 분석했던 20세기 미국 사회의 경우 생산직 내 수평적인 네트워크 하에서 개개인의 효율적인 감정 통제 능력이 집단의 생산성 향상으로 이어지는 순환 구조가 성립했다면, 최근 한국 사회의 모습을 반영한 위 소설에서는 애초에 수평적인 네트워크가 존재하기 난망한 소규모 서비스직의 최하위에, 즉 상사와 고객의 중간에 자리한 노동자들이 양방향에서 수직으로 가해오는 감정적인 피로를 순전히 감내해야 하는 일방향 구조를 확인할 수 있다. 위 인용문에서 유치원 교사인 프로틴은 상사인 원장과 고객인 학부모들이 업무 역량과 무관하게 자신을 비합리적으로 대하는 것에 대처하기 위해 순전히 자발적으로 분노 훈련을 하고 있다. 유치원과 같은 영세한 업장에서 감정을 처리하는 데 드는 비용과 노력은 생산력을 향상시키기 위한 자기 계발 항목이라기보다는 마치 식대와 같은 고정 지출 항목으로서 노동자에게 고스란히 전가된다. 감정을 통제하고 관리하지 않으면 안 되는 노동 환경을 ‘알아서 잘’ 버텨내는 것 자체가 또 하나의 노동이 되는 셈이다.
   차분하고 느긋하게 응대하는 별에게 첫날부터 호감을 느꼈던 화자는 주로 별과 함께 분노 훈련에 임하는가 하면 모임이 끝난 뒤 둘이 남아 사담을 나누며 다른 멤버들에 비해 좀더 편하고 가까운 사이로 발전한다. 분노 훈련에 번번이 실패하던 화자는 별이 편해진 뒤 어느 날 파트너인 별을 향해 제대로 화를 내는 데 성공한다. 성공을 축하하며 화를 잘 낼 수 있게 된 비결을 묻는 워리와 프로틴에게 화자는 “많은 것이 조금 더 익숙해졌”고 멤버들이 편해졌기에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게 된 것 같다”(69쪽)고 말한다. 결국 이날은 화자가 까마귀 클럽에 참여하는 마지막 날이 되었는데, 별이 “그러니까 이제 내가 호구 같아서 그게[화를 내는 게] 쉽다는 거”냐고, “잘해주면 끝도 없이 기어”오른다고, 내가 “우습고 쉬운 애”(70쪽)라 그러는 거냐고 진짜 분노를 난사했기 때문이다.
   애초에 일터라는 공적인 환경에서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사적인 감정을 능숙하게 처리하는 연습을 위해 고안된 이 클럽은 사적인 모임이면서 사적이지 않기를 추구하는 애매한 성격을 띠고 있다. 본명이 아닌 별칭을 사용하여 거리를 두거나 “죄송해요, 감사해요, 괜찮으세요?”(55쪽)와 같이 배려하는 말을 사용하면 벌금을 매기는 것과 같은 규칙들은 파트너를 가상의 분노 상대와 혼동하지 않기 위한, 즉 사적인 감정이 얽히지 않게 하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로 작동하지만, 파트너를 향해 제대로 화를 내버리는 순간 분노의 목적과 대상은 모호해져 버린다. “화는 내 버릇해야 필요할 때 낼 수 있다”(53쪽)는 취지에서 성립된 모임이지만 화를 ‘버릇’과 같이 완전히 내면에 체화된 기술로 습득하기까지 요구되는 사적인 경험의 축적 과정으로부터 거리를 두지 않으면 모임은 와해되고 만다. 뿐만 아니라 화를 낼 줄 모르는 이들이 막상 정말로 화를 잘 내게 되면 더이상 “우리일 수가 없”(65쪽)게 된다.
   이러한 모순들은 감정을 사물화하여 관리하도록 강제하는 감정 자본주의에 내재한다. 감정 자본주의는 “사회관계에서 감정적 얽힘을 유보”하기를 요구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그만큼 정서적인 장벽을 허무는 절차 또한 필요하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감정적 얽힘을 유보하는 기술은 감정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기술이라기보다는, 얽혔던 감정을 유연하게 풀어내는 기술인 셈이다. 마찬가지로 최대한 거리를 두고 분노하기란 서로 간의 정서적 거리가 가까워졌을 때에야 비로소 가능해지지만 바로 그 때문에 감정의 객관적인 처리는 결국 실패로 돌아간다. 화자가 들어오기 전에 있었던 멤버 또한 별과 마찬가지로 분노에 성공(하는 동시에 분노 훈련에 실패)하며 나갔다는 사실은 이를 뒷받침한다.
   모임을 나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소설 말미에서 화자는 소설 도입에서와 마찬가지로 트위터에서 만난 친구에게 절연을 당하고 또다시 낙심해 있다. 감정 관리의 실패와 관계 맺기의 실패가 계절처럼 끊임없이 반복되는 이 구조 속에서 자기 내부에 찌꺼기처럼 쌓여가는 감정을 처리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란 “이제는 다 때려치워야겠다는 마음으로 혼자 방에서 맥주를 마시”(44쪽, 72쪽)며 자조하다가 새로운 타임라인을 보고 근거 없는 희망을 갖기를 ‘반복’하는 것뿐이다.


   3. 감정 노동과 감정 경영 사이

   흡사 자연적인 주기를 갖고 있는 듯한 이 감정의 파고는 기인이 도를 수련하듯이 순전히 몸으로 체득하여 그 흐름을 읽는 수밖에 없어 보인다. 이현석의 『덕다이브』(창비 2022)에서 주인공 태경은 검진센터에서 간호보조원으로 일하던 것을 그만두고 발리에서 서핑 강사로 일한다. 그가 파도 타는 법을 설명하는 부분은 감정의 흐름을 파악하는 법으로 읽히기도 한다. 이전 직장에서 ‘태움’이라는 위계화된 감정 노동의 극한에 시달렸던 태경은 이제는 서핑 강습생들에게 적당한 친밀함과 능숙한 강습법을 적절히 배합하여 구사해야 하는 감정 경영의 시험대에 놓이게 된다.

   솟아오른 파도가 하얗게 깨지기 시작하는 부분. 서퍼들은 그곳을 ‘피크’라 부른다. 파도에 대한 우선권은 피크 가까이에 있는 사람이 가진다. 보드에 엎드려 팔을 젓는 동작인 ‘패들링’을 하면서 피크가 만들어져 파도를 타는 지점인 ‘라인업’까지 나간 서퍼들은 그곳에 둥둥 떠서 자기만의 파도를 기다린다. 그러다 먼바다에서부터 너울이 꿈틀대면, 피크를 먼저 잡기 위해 서퍼들은 앞다투어 너울을 등지고 미친 듯이 패들링을 한다. 보드의 꼬리 부분이 들리면서 머리부터 물에 처박힐 것만 같은 그때, 공포를 이기고 일어선 사람만이 파도의 주인이 된다. (12-13쪽)


   파도는 언제 어떻게 다가올지 예측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서퍼가 쉽게 정복할 수 있을 듯하다가도 금세 위협적으로 돌변한다. 그러니 속된 말로 ‘치고 빠지는’ 게 중요할뿐더러 아무리 능숙한 서퍼라도 방심하는 순간 큰 사고를 당할 수 있다. 훈련과 경험을 최대한 축적하여 몸으로 어느 정도 익힐 수는 있지만 그 누구도 온전히 제 것으로 만들 수는 없는 것이 서핑인 셈이다. 자신의 감정을 완벽하게 통제하고 공사의 아슬한 경계를 완전히 허물지는 않으면서 그 경계를 유연하게 넘나들 줄 아는 이른바 감정 경영에도 왕도는 없어 보인다. 극도로 위계화된 구조 내에서 자신에게 부여된 몫의 감정 노동을 견뎌내야 하는 태움과 달리, 서핑과 같이 노동과 가장 멀리 떨어져 있고 삶에 가장 밀착해 있는 취미 행위에서 수익을 창출하기 위해서는 삶과 노동이 서로를 넘나들며 ‘치고 빠지는’ 것에 한없이 관대해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감정 노동 또한 지극히 주관적인 감정을 개인이 자발적으로 관리해야 한다는 점에서 자기 경영으로 보아도 무방하기에, 감정 노동과 감정 경영 간의 경계는 매우 흐릿하다. 태움의 굴레 속에서 간호사와 간호보조원들은 위아래 상관없이 자신의 정서적인 일부를 헐어가며 견고한 구조를 위태롭게 떠받친다. 수간호사에게 시달린 뒤에 이를 고스란히 아래 직원들에게 되돌려주는 조미진도, 그런 조미진을 굽어살피느라 단체 대화방에 모였다 흩어지기를 반복하며 업무 현장을 사수하는 직원들도, 정서적으로 소진되느라 축나는 몸을 다시금 정서적으로 보살피며 일으켜세우는 ‘돌려막기’에 능란해질 수밖에 없다. 태움 구조의 중간 관리자인 조미진은 직원들을 불러 세워놓고 “중환자실에서 신규 때만 15킬로그램 넘게 쪘다고, 석 달 넘게 하혈을 했다고, 나이트에서 데이로 넘어가는 날에는 한숨도 못 자고 뜬눈으로 지새웠다”(173쪽)고 과거 자신의 힘겨웠던 무용담을 늘어놓는 것으로 현재의 고단함을 다스린다. “올라프[조미진]의 심기가 다른 직원들의 남은 하루를 결정”하는 상황 속에서 태경 또한 “어느 때인가부터 그들의 웃음에 동참”하고 있다(69쪽).
   그런데 직원들 중 다영은 이 무언의 구조에 웬일인지 동참하지 않을뿐더러 조미진에게 저성과자로 낙인찍혀 괴롭힘과 따돌림을 당했었다. 태경이 현재 일하고 있는 서핑 클럽에 어느 날 강습생으로 나타난 그녀는 건강하고 균형 잡힌 라이프 스타일을 파는 인플루언서 ‘민다’로 거듭나 있다. 태움이 강요하는 감정 노동에 극도로 미숙했던 다영은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소비하고 싶게끔 가공하여 만인에게 제공하는 감정 경영에는 성공한 모습이다. 자기를 드러내는 게 어색한 태경에게 팁을 전수하며 다영은 “사람들도 이제는 약아서 그저 그런 이미지에는 반응하질 않”는다며(114쪽) “내가 누군지를 알아야 나를 팔 수 있다”(137쪽)고 너스레를 떤다.
   그런 다영이 보기에 태경 또한 자신의 삶을 상품화하는 데 능숙한 면이 있는데 바로 “쌤[태경]이나 사장님이나 뭔가 은은히 미쳐 있는데 또 정신 줄을 확 놓은 거 같지는 않”(133쪽)다는 것이다. 서핑이라는, 자신의 취미이자 삶인 동시에 일이기도 한 행위에 완전히 몰두해 있는 듯하면서도 몰아의 상태에 빠지지는 않는 아슬아슬한 균형점에 도달해 있다는 것이다. 이 ‘은은히 미쳐 있는’ 상태, 흡사 서퍼가 파도에 완전히 전념하는 듯하지만 파도에 완전히 잠식당하지는 않는 것과 같은 상태를 감정 경영자들은 끊임없이 추구해야만 하는 처지에 놓여 있다. 일개인의 위치에서 이는 “매일 새롭게 주어지는 나날에 충실했던 한 인간의 모습”으로, “그저 자기만의 완벽한 파도를 만나기 위”한 “끊임없는 시도”(139쪽)라는 양태로 나타난다. 검진 센터라는 규모 있는 노동 현장에서의 감정 노동이 견고한 노동 착취의 굴레를 지탱하기 위해 노동자 개인의 감정을 다시금 착취하는 구조적 동인으로서 가시화되어 있다면, 서핑 클럽이라는 개인 영업장에서의 감정 경영은 순전히 자기 삶을 오롯이 돌보고 책임지기 위한 것, 나아가 자기실현의 필수 덕목과 같은 것으로 자아에 보다 깊이 내면화되어 있다.


   4. 소비되고 소진되는 감정

   이처럼 오늘날 감정이란 개인의 성공을 위해 신중하게 굴려나가며 차곡차곡 축적해야 하는 일종의 자본이 되었고, 그런 감정 자본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감정 경영이 중요해졌다. 위의 두 소설에서 살펴본 바 감정 자본주의 사회에서 감정이란 이른바 시장의 ‘큰 손’들이 막대한 자산을 무기로 자유롭게 적재적소에 매입과 매수를 행하듯이 다룰 수 있는 자산의 성격을 강하게 띠게 되었다. 나아가 감정 경영이란 모든 개인이 경영자 내지 CEO로 내몰리는 탈고용사회에서 자아실현의 중요한 방편으로, 노동과 삶의 경계가 무화되어가는 상황에서 그 보이지 않는 경계를 서핑하듯이 유연하게 드나들 수 있는 자아의 덕목과 같은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자본-경영이라는 은유의 도식에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듯이 감정은 축적과 증식을 거듭하여 최대한 너그럽게 부릴 수 있을 만큼의 규모를 형성해야 할 필요를 은연중 강제당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한 규모를 획득하지 못한 감정은 단지 착취당하고 소모당하며 공중에 점점이 흩어질 뿐이다. 김화진의 「척출기」(《문학동네》 2022 가을호)에서는 흡사 푼돈처럼 소모되는 영세한 감정의 면모가 잘 드러나 있다. 오랫동안 임용 고시를 준비하다 지쳐 기간제 교사 일을 하고 있는 영은은 귀에 종양이 생겨 청력을 잃을 수도 있는 병을 진단받았으며, 성공하더라도 청력을 완전히 회복하지 못할 수도 있는 수술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일상의 기반을 다지기도 전에 그 근간부터 흔들리고 있는 이 위태로운 시기에 영은은 친구인 희재로부터 주현을 소개받게 되고 첫 만남부터 호감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관계의 진척은 생각보다 지지부진하여 영은으로 하여금 여러 가지 고민에 잠기게 한다. 가령 주현이 주말에 웨딩홀 알바할 생각이 있냐고 묻는 식으로 만나자는 말을 멀리 에둘러 표현하는 것에 의아해하기도 하고, 안정적인 일을 꾸준히 하고 있지 않는 듯한 주현의 상황을 이리저리 재보다가 마찬가지로 미래가 보장되어 있지 않은 자신의 처지를 상기하며 셈을 거두어들이기도 한다. 주저하는 주현을 향해 영은 또한 덩달아 유보적인 태도를 취하게 되는 까닭은 “당신이 당신의 아픔을 말해도 나는 내 아픔에만 놀라”(269쪽)게 되는, 극도로 핍진한 상태에 내몰려 있기 때문이다. 사실은 성전환 수술을 했었다는 주현의 고백에 놀라기는커녕 귀의 염증으로 잘 듣지 못한 그 말을 눈치껏 유추해내고 대화를 이어가느라 전전긍긍하는 영은의 모습이 그러하다.
   주현을 소개시켜 주었던 희재의 이야기는 위와 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외향적이고 활기차 보이다가도 금세 지친 기색을 보이는 희재를 향해 무엇이 제일 지치냐고 영은이 묻자 희재는 “서로 아픈 부분을 보여줘야만 친구가 된다는 것”(259쪽)이 가장 지친다고, “뭐가 어때서라기보다 사람을 대하는 건 언제나, 가끔 지치는 일”(260쪽)이라고 털어놓는다. 인간관계에 대한 희재의 견해에는 의미심장한 구석이 있는데 인류학자들이 문명의 발생과 사회의 팽창에 필수적이라고 보는 요소, 즉 선물과 빚의 논리를 교묘하게 뒤집어놓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A가 B에게 증여한 선물에 보답하기 위해 B 또한 A에게 선물을 주더라도 A의 호의에 완벽하게 보답할 수는 없으며 언제나 갚지 못한 잉여의 호의가 남게 된다. 즉 A의 선물에서 B의 선물을 뺀 값에는 반드시 잉여가 발생한다. 이 잉여를 메꾸고 갚아나가기 위한 지난한 과정이 바로 인간관계가 지속되는 논리이며 우리가 서로에게 계속해서 호의를 베푸는 원동력이 된다.
   반면 희재의 논리와 그 실제로서 영은과 주현의 관계에는 미처 갚지 못한 호의의 빚을 메꾸는 축적의 과정 대신에 자신의 상처 난 일부를 헐어 상대의 일부와 거의 정확한 몫으로 맞바꾸는 냉철한 교환의 법칙만이 남아 있다. 이러한 관계는 아무리 지속되어도 결국 자신에게 더해지는 것은 없게 된다. 잘해봐야 고작 ‘0’으로 수렴될 뿐이며 교환의 밑천이 일천하거나 상대의 상처보다 더 큰 상처를 헐어 내어줄 경우 자신의 마음에 생긴 빈 공간을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하기도 한다. 그렇기에 영은은 “다른 사람의 세계에 구멍을 크게 뚫는 일이, 그래서 내 쪽으로 넘치게 하는 일이 뭐가 그렇게 좋겠”(268쪽)냐고 체념하는가 하면 “너라는 총체적인 세계보다 내 오른 귀의 편협한 청력의 세계가 중요”(272쪽)하다고 생각하면서 마음을 정리한다. 나에게로 축적되지 않고 나로부터 ‘척출’되는 감정의 소모성은 사회적인 안정의 부재(영은)나 인정의 부재(주현)로 인해 축적의 기반 자체가 다져지지 못한 이들이 필연적으로 겪을 수밖에 없는 것으로서, 「까마귀 클럽」의 프로틴이 짊어져야 했던 고정 비용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5. 감정 실패의 구조에 관하여

   영국의 문화 연구자 레이먼드 윌리엄스는 세계관이나 이데올로기와 같이 사회 문화적으로 유형화된 패턴뿐만 아니라 완전히 개인적인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사회적인 맥락을 함의하고 있는 감정의 구조 또한 들여다볼 필요가 있음을 역설한 바 있다. 이 감정의 구조는 “격식을 차리는 공식적인 의식(official consciousness)과 구분”되는 “실천적 의식(practical consciousness)”4)으로서, 제도나 신념 등으로 구조화되기 이전의 구조라고 할 수 있다. 구조 이전의 구조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한 까닭은 장기적으로 형성되고 고착화된 제도 등에 비해 현재 사회와 현재 세대 특유의 정서를 파악하기에 용이하기 때문이다. 이는 순간적인 체험에서 얻는 단발적인 느낌과도 다른 것이며 “살아 있으면서 끊임없이 서로 작용하는 연속적인 흐름 속에 놓여 있는” 보다 유기적이고 유동적인 것, 즉 “느껴진 생각(thought as felt)이고 생각된 느낌(feeling as thought)”5)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유동하는 현재를 아마도 가장 기민하게 포착하는 예술 행위 중 하나일 최근의 문학에서 우리가 마주치게 되는 것은 상호 주관적이고 실천적인 의식으로서의 감정이 아니라 감정이 되는 데 실패하는, 혹은 감정이 되기도 전에 실패하는 미증유의 무엇일 따름이다. 이 ‘무엇’은 서로 간에 교류되기는커녕 그러기 전에, 더 정확히는 그러지 ‘않기’ 위해 개개인이 알아서 잘 다스려야 하는 사물이자 자산의 성격을 강하게 띠게 되었으며 발아하지 않은 채 자아 내부에 영영 포집해 있어야 하는 운명에 처해 있는 듯하다. 감정이 사회의 실천적 층위를 가늠해볼 수 있는 구조 이전의 구조라면, 우리가 위의 몇 편의 소설을 통해 살펴본 감정 이전의 감정, 혹은 감정이 되지 못한 감정은 ‘감정 실패의 구조’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이 구조를 들여다보는 일이란 사회의 의식 차원을 넘어 그 저변의 무의식으로까지 파고들 수밖에 없는 막막함을 배경에 깔고 있다. 달리 말하면 사회의 구조 자체가 단순히 외적인 현상을 파악하고 진단하여 개선하는 것이 어려운 지경으로 무수한 자아들의 내면에 숨어들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감정 이전의 감정을 각자 알아서 감당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는 이 각자도생의 엄혹한 사회에서 결국 이기는 것은 그러한 사회, 그러한 구조 자체뿐이다.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비용이 들지 않는 감정, 경영하거나 통제하지 않아도 되는 감정, 소비되거나 소진되지 않는 감정을 잃어버렸으며 감정을 최대한 배태하지 않는 자아(그런 것을 ‘자아’라고 불러도 된다면)를 길러내거나 오로지 자기 자신을 향하는 감정만을 돌보는 지극히 재귀적인 행위에 몰두하고 있다.
   프랑스의 철학자 피에르 자위는 이러한 추세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자기 자신을 드러내지 않거나 사라지게 하는 기술의 필요성을 역설하기도 한다. 그에 따르면 “낯모르는 사람들 틈바구니에 잠시 끼어들어가는 것과 비슷”6)한 이 드러내지 않기란 삶과 세상을 향한 지극히 비인격적이고 중립적인 태도로서, “현대 세계에 동의하되 그 세계를 건드리지 않는 것, 세계를 거절하는 바로 그 몸짓으로 세계에 들어가는 것”7)과 같다고 한다. 흡사 서구의 오리엔탈리즘을 자극하며 수출용으로 가공된 일본의 선(禪, zen) 철학의 프랑스 번외판을 보는 듯한 이 희한한 기술 또한 결국은 ‘기술’이라는 표현이 함의하듯이 그럴 만한 충분한 여유가 있는 이들에게만 허락되는 오랜 자기 극기와 꾸준한 자기 단련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럴 여유가 없는 이들이 감정을 다스리고 자기를 가꿀 수 있는 전략에 대한 비판적 모색은 그렇게 언젠가부터 소리 없이, 사라져가고 있다. 우리는 이 사라지고 있는지도 모를 사라짐을 충분히 알아차리고 있는 것일까?8) 그러기는커녕 알아차림과 사라짐 간의 시차는 좁혀지지 않고 그 간극을 쉬이 극복할 수 없는 수준으로 보다 견고하게 다져가고 있는 듯하다.

이은지

읽고 쓰고 옮깁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법,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법을 고민합니다.

2022/12/27
61호

1
에바 일루즈, 『감정 자본주의』, 김정아 역, 돌베개, 2010, 54쪽.
2
같은 책, 55쪽.
3
같은 책, 81쪽.
4
레이먼드 윌리엄스, 『마르크스주의와 문학』, 박만준 역, 지식을만드는지식, 2012, 265쪽.
5
같은 책, 269쪽.
6
피에르 자위, 『드러내지 않기―혹은 사라짐의 기술』, 이세진 역, 위고, 2017, 43쪽.
7
같은 책, 125쪽.
8
나아가 우리는 이 ‘사라지고 있는지도 모를 사라짐’을 알아차리는 능력마저도 그럴 만한 충분한 여유가 있는 이들 중 일부만이 간신히 수양할 수 있는 기술이 되었음에, 심지어 그 일부 중 극히 일부만이 그러한 능력을 수양해볼 요량을 아주 잠깐 품었다가 금세 저버린다는 사실에 충분히 경악하고 있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