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돌보지 않는 마음’을 다시 생각한다

   돌봄이 필요한 이에게 아픔이 모든 것이 아니듯, 돌보는 이에게도 돌봄만이 전부가 아니다. 그러나 돌봄이라는 포근한 단어가 전면에 나설 때 이는 곧잘 망각되는 사실이기도 하다. 영화 〈로스트 도터〉(The Lost Daughter, 2022)에는 이처럼 돌봄 노동에 개인성을 잡아먹힌 한 인간의 번민이 시 한 구절로 표현된다. “구부러진 날개의 한기가/내 몸을 따라 흘러내리네.” 주인공 레다가 무너진 몸과 좌절 속에서 수없이 되뇐 이 구절을, 그녀의 딸이 앵무새처럼 따라 읊는다. 집안의 누구에게도 가닿지 못했던 시구(詩句)가, 낯선 이방인을 초대한 식탁 위에서 마침내 의미를 찾는다. 안과 밖, 그 사이에서.
   돌봄은 개인성과 시민성, 독립과 의존,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 집안과 집밖이 중첩된 채 공존하는 타인과의 관계에 기반한다. 공과 사가 중첩되는 영역이기에 가사노동과 공적 노동 간의 구분도, 복지와 정책에 대한 방향도 모호하다. 고강도의 노동임에도 보상에 대한 잉여와 공백이 존재하고, 가족 외부로 상품화되어 있으면서도 비생산적인 후진적 노동으로 취급받기 일쑤다. 이런 상황에서 “‘돌보지 않겠다(그게 자신을 돌보는 길이기 때문에)’는 각성한 젊은 여성의 목소리”1)가 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가부장적 사회와 국가의 무책임 속에서, 돌봄 공백을 채운 것은 단연 여성이었기 때문이다.2)
   〈로스트 도터〉의 주인공이 ‘구부러진 날개’의 오싹함을 읊조렸던 것처럼, 돌봄 노동은 여성에게 개인성 말살의 공포를 선사한다. 금융 자본주의의 확장과 맞벌이 부부의 증대는 돌봄 복지의 바우처화와 돌봄 노동의 하청화를 가능케 했지만, 돌봄의 내용이 가부장적 전통성과 모성 이데올로기를 완전히 벗어났는지는 미지수이다. 더욱이 예기치 못한 코로나 상황으로 가정 내 양육 상황이 장기화되면서 여성들은 일과 가사, 육아의 하중을 오롯이 버텨야 했다. 여기에서 비혼 여성 청년의 시선은 임노동과 가사에 대한 책임이 모두 전업이 되어버린 여성 노동자/유자녀 기혼 여성의 고난으로 향하게 된다. 비상시에는 언제나 가족 단위로 수렴되고, 슬며시 그 공백을 여성에게 전가하고 마는 돌봄 노동의 가부장성은 프레카리아트 여성 청년이 감당하기 어려운 헌신의 자리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여성-개인의 ‘돌보지 않는 마음’이, 점차 시민-공동체의 ‘돌보는 마음’으로 전이되는 현상은 주목을 요한다. 사소하거나 사적인 ‘가정의/가족의/여성의’ 것으로 치부되던 돌봄이 손쉽게 ‘시민의/공동체의/국가의’ 일로 떠넘겨질 때, 이 미심쩍은 이행이 무엇을 비가시적으로 남겨두고 있는지를 고민해야 하기 때문이다.3) 돌봄은 여전히 끈적끈적한 몸의 헌신을 요구하고, 의존과 박탈이라는 주체의 취약성을 기초로 한다. 공동, 정의, 의제의 영역인 돌봄 민주주의에 과연 그런 끈적끈적한 것이 들어갈 자리가 있는가. 그 사려 깊은 협력의 자리에 포악성과 원한을 담아낼 웅덩이가 있는가. 이 글은 돌봄의 자리에 그것을 묻는다.

   
2. 돌봄 민주주의의 시대, 유령으로서의 사적 돌봄

   쓰레기를 묶고, 생리 현상을 받아내고, 손발톱을 깎는 일들이 ‘돌봄’이라는 한 단어로 압축될 때 돌연 느껴지는 상실감의 정체는 무엇일까. 아마도 그것은 돌봄이 결코 표준화될 수 없는, 즉 완결이나 한계가 없는 영역이라는 것에 대한 모종의 재현적 불안에서 비롯되는 것이리라. 돌봄 노동에는 정확한 가이드라인도, 완벽한 매뉴얼도 없다. 돌봄의 사정과 상황은 모두 제각각이지만 ‘가족 같은 돌봄’이라는 모호한 가치는 늘 최상위 기준으로 여겨진다. 이처럼 돌봄의 내용에 완결성과 전문성의 영역이 부재한다는 사실은, 돌봄 노동의 가치가 언제든 사소하고 사적인 것으로 치부될 수 있으리라는 강한 예감을 불러일으킨다.
   강영숙의 「버려진 지대에서」4)는 이러한 상황을 미리 예견이라도 한 듯하다. 소설의 화자인 ‘은수’는 다큐멘터리 감독으로, 홀로 탯줄을 자르고 미역국을 끓여먹은 엄마 ‘소희’의 출산 이야기에 곧장 매혹당한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소희의 출산에 더이상 매력을 느끼지 못하고, 다큐멘터리 작품으로 만들겠다는 의지도 희미해진다. “왠지 어느 순간 세상의 그 누구도 출산에 흥미를 갖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78쪽)이다. 공적 영상 매체로 아카이빙하기에는, 어느새 시시해져버린 그것.
   한 사람에 대한 다큐로도 모두에 대한 다큐로도 만들 수 없는 것이 돌봄에 관한 이야기다. 인류의 종(種)이 모두 겪은 그것이지만, 그 몸짓은 제각기 다르다. 소설이 그 사이에 놓인 재현의 임계를 돌파하는 것은, 돌봄을 ‘극사적(極私的) 에로스’로 한정시키는 것에서 시작된다. 지극히 사적인, 그래서 버려진/버린 사실조차 희미해진 지대에서 다시 다큐멘터리라는 사실적·객관적·공적 기록을 시작하겠다는 것.
   소설은 소희와 은수 모녀가 폐허가 된 오종시로 떠나는 여행에서 시작된다. 여행 내내 소희는 고단했던 돌봄과 살림의 기억이 떠오르는 것을 떨칠 수가 없다. 과거에 소희는 남편의 돌봄 무임승차와 가정폭력을 뒤로한 채 집을 떠난 적이 있다. 그러나 다시 돌아와 딸 은수를 보살폈다(이 플롯이 〈로스트 도터〉 속 레다의 삶과 꼭 닮아 있다는 것은 단지 우연일까?). 중년이 된 은수는 감독으로서 사회적 비극에 관한 영상을 촬영하고, 영화제에 작품을 상영하지만 정작 소희를 카메라에 담는 일에는 늘 실패한다. 그러나 은수는 단 한번 소희의 뒷모습을 카메라에 담는데, 그날은 공교롭게도 소희가 은수로부터 멀리 이사 가는 날이다.
   소설이 다크 투어리즘으로 서사의 포문을 여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서로 돌봄, 함께 돌봄, 돌봄 두레와 같은 민주적 돌봄 정치에 대한 논의가 확산되는 시점에, 가정 내의 사적 돌봄을 생각한다는 것은 불평등과 악순환의 폐허를 보겠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다크 투어리즘의 목적지인 오종시는 소희가 감당해낸 사적 돌봄의 잔해와 동일시되고, 폐허를 돌아보는 여행은 소희의 과거 기억과 함께 물결치며 엮인다. “1970년대 후반의 지방 도시에서 남편이 때린다고 가출한 여자는 소희가 유일”(78쪽)했지만, 그 유일함을 바라보는 세상의 시선은 오종시를 여행하는 사람들의 반응처럼 “이상하리만치 고요”(76쪽)하다. 그 누구도 소희의 유일함에 관심이 없다. 이와 같은 무관심은 보살핌 노동을 사적인 영역에 제한하고, 여성의 역할이라는 뿌리 깊은 고정 관념에 맡기고 방관해온 사회의 결과이다.5) 그러므로 서스펜스가 폭발하는 소희의 삶은, 기억을 간직한 채 죽어버린 오종시의 랜드마크처럼 묘하게 텅 비어있다. 소희의 가사노동 및 돌봄 노동은 “한국 나이로 칠십 세인 김소희 혼자만의 엑소더스, 어쩌면 탈출에 관한 이야기”(77쪽)로서 개인이 감당해야 하는, 잔인하리만치 사적인 기억으로 남아있다는 것.
   젊은 소희가 가사 내의 돌봄과 불화했다면, 노인 소희는 가정 밖의 돌봄과 불화한다. 사실 서사 전반에 걸쳐 소희는 언제나 누군가를 돌보는 자리에 처하지만, 자신에게 부과된 그 일과 늘 조금씩 어긋난다. 마치 그것이 원래부터 그녀의 일이 아니었던 것처럼 말이다. 노인이 된 소희는 돌봄 시장에 고용된 상태로 노동력을 제공하지만, 그 일은 언제나 불안정하다. 초등학교 하교 지도 도우미, 유치원 등원 도우미와 같은 일들은 노인 여성의 일자리로 적합하지만, 이 일은 언제든 다른 사람으로 대체될 수 있는 불안정한 일자리이다. 그러므로 그녀가 공들여 구한 돌봄 노동에서 “일주일 만에 해고”(74쪽) 당하는 이유는, 그 일자리가 “앉아서 텔레비전으로 연합뉴스나 보는 시간대”(73쪽)에 거동이 자유로운 모든 노인 여성들에게 열려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처럼 돌봄 노동의 저평가에 근거한 저임금과 고용 불안은 돌봄 노동을 ‘필수 노동’으로 보자는 주장과 보기 좋게 어긋나고 만다.6) 가사 내 돌봄 노동의 사적 기억이 개인의 폐허에 묻히듯, 시장화된 돌봄 노동에 가해지는 불안정함과 저임금마저도 개인의 몫으로 남는다는 것. 이와 같은 사실을 간과하고 이루어지는 관계적 돌봄 노동은 공감 없는 연대이고 공존 아닌 전환일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소희의 기억을 바라보는 소설의 시선이다. 소설은 소희가 겪은 삶의 잔해를 다큐멘터리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며, 이 재현에 부가되는 비극적 트라우마의 색채를 담담하게 순화시킨다. 그리고 이 시선은 사적 돌봄을 생각할 때 우리가 가져야 할 자세를 가르쳐준다. 연민으로도, 숭고로도, 증오로도 보이지 않고 담담하게 기억되어야 할 것. 그러나 돌봄 민주주의를 상상하는 자리에서 반드시 반성되어야만 할 것. 허울 좋은 이름으로, 떠밀리듯 만들어지는 민주적 돌봄의 자리에 유령처럼, 고집스럽게 자리잡고 있어야 할 바로 그것. 부정되어야할 것이 아니라, 부정 신학처럼 존재해야 할 것. 그 지극히 사적인 에로스.

   은수는 소희가 혼자서 자신을 낳고 탯줄을 자른 뒤 미역국을 끓여먹었다는 말을 좀처럼 믿을 수 없었지만 그래서 그 이야기에 더욱 매혹당했다. 은수가 출산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어보려고 시도했을 때 제일 먼저 본 영화는 하라 가즈오의 〈극사적 에로스〉였다. 주인공 미유키는 오키나와 미군기지에서 성매매를 하는 여성들과 공동육아를 하며 남자들의 도움 없이 유사 가족 형태를 이루어 사는 급진적인 페미니스트이다. 자유로운 성생활을 즐기는 미유키는 미군과의 사이에서 아이를 임신하기도 하는데, 영화 속에서 그녀는 두 무릎을 접은 채 방바닥에 앉아 아이를 출산하고 신문지로 방바닥에 묻은 피를 닦아낸다. 영화를 찍은 하라 가즈오 감독은 미유키의 전남편이었다. 영화 속 미유키의 출산 장면에 충격을 받은 은수는 같이 작업하는 동료들과 무릎을 굻고 앉아 아기를 낳는 시늉을 내보기도 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은수는 출산에 관한 다큐를 만드는 것에 더이상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왠지 어느 순간 세상의 그 누구도 출산에 흥미를 갖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도 가끔씩 은수는 혼자서 탯줄을 자른 뒤 차가운 문을 밀고 부엌으로 나가 미역국을 끓이는 어린 엄마를 상상해보곤 했다. (74쪽)

   가정 안/밖의 돌봄을 감내하는 여성을 향한, 증오도 화해도 없는 시선이 「버려진 지대에서」를 이끌었던 이유는 소설의 중핵에 다큐멘터리 영화인 〈극사적 에로스〉가 놓여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은수가 출산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고자 결심했을 때 참고하는 자료로 등장한다. 전통 가족을 거부하고, 성매매 여성들과 공동육아를 하고, 남자들의 도움 없이 유사 가족 형태를 이루어나가는 영화. 방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홀로 출산을 하는, 피를 닦아내는, 그녀의 자유로운 성생활을 담아내는 르포. ‘돌봄’에 관한 포악하고 비체적인, 그러나 공적이고 이상적인 보고서. 이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미유키의 삶이 무엇보다 미유키 그 자신을 위한 지극히 사적인 선택에서 비롯되었지만, 가장 정치적이고 급진적인 난잡한 돌봄의 형태를 담고 있다는 것이다. 전통 가족의 붕괴와 비혼이 만연해지는 정치적 현상이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미유키의 선택으로 한 주체의 삶 안에서 동시에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사적/공적으로 나눌 수 없는 불안한 지대가 돌봄이라는 큰 테두리 안에 들어있음을 상기시킨다.
   서사 말미에 엄마를 우울증적으로 자신과 합체한 은수의 태도는 바로 이러한 영역을 가시화한다. 전화도 잘 받지 않는 딸인 은수였지만, 소희를 가평으로 떠나보낸 이후로 은수는 늘 소희를 생각한다. 그리고 그 순간 소희는 은수의 프레임 안으로 들어온다. 소희가 은수의 프레임 안에서 가시화된다는 것은, 엄마를 ‘돌보지 않는 마음’으로 대했던 은수가 엄마를 우울증적으로 합체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엄마가 가평으로 가서 마음이 아프다. 엄마를 제대로 보살피지 못하는 무능한 딸이라 자괴감이 든다. 너무 우울하다. 엄마보다 내가 먼저 죽었으면 좋겠어. 엄마가 나 죽는 걸 지켜 봐주면 안 무서울 것 같아.”(89쪽)라고 고백하는 은수 내면의 우울증적 목소리가 등장하고, 그제야 선배의 안위를 묻는 은수의 (혈연관계 그 이상의) 돌봄적 제스처가 등장한다. 중요한 것은 돌봄의 주체가 된 순간, 아이러니하게도 은수의 몸은 곧 돌봄이 필요한 아픈 몸이 된다는 것이다. 침투당한 몸, 허물어진 몸, 박탈당한 몸. 그 사이에 돌봄을 주고받는 진자 운동이 생성된다.
    재현의 완수는, 누군가를 떠나보낸 후 그 마음을 고요히 간직할 때에야만 가능하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필요한 돌봄의 종류와 방향은 기계적이고 효율적인 덕목이 아닌 의존과 박탈의 드라마에서 비롯된다. 마침내 완성된 은수의 영상이 차분하고 따뜻해진 이유는 그녀의 내면에 소희라는 유령이 고여있기 때문이다. “은수가 찍었던 수많은 영상 속의, 현실 속의 여자들처럼 평범한 모습”(88쪽)이었던 소희의 뒷모습이 은수의 카메라에 재현되었기에, 그녀의 영상은 따뜻한 빛을 얻는다. 아이를 홀로 출산하는 <극사적 에로스>의 한 장면을 동료들과 재연하며 이해해보려는 노력이 없었다면, 은수에게 소희는 영원히 프레임 바깥에 자리했을 것이다. 사실의 기록, 중립적 언어, 공적 매체인 다큐멘터리의 중핵에 지극히 내밀한 개인성이 자리하듯, 공적 돌봄의 매끄러움은 사적 돌봄이라는 유령의 자리를 함께 생각해야 한다.

   
3. 돌봄 여성의 섹슈얼리티와 욕망

   우리 모두가 원하는 것이 정의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그러나 만일 민주적 돌봄이 정의의 영역이라는 것을 부각한다면, ‘정의’라는 보편주의적 사유에 대한 반성 또한 필요할 것이다. 사랑이 하나(One)에 특권을 부여함으로써 전체를 일그러트리는 것이라면, 정의는 이러한 하나에 특권을 부여하는 과정에서 생긴 그늘에 남겨진 얼굴 없는 다수를 기억할 때 시작된다.7) 그런데 돌봄에는 이 두 가지가 끝내 엉키고 마는 수상한 질감이 있다. 정의에서 시작해서 사랑이 되는, 사랑에서 시작해서 정의로 끝나는, 사랑이 사랑으로 남는, 정의가 정의로 남는, 혹은 그마저도 이름 붙일 수 없는 그런 계기들.
   그러나 어쩌면 이와 같은 반성은 시시할 수도 있다. 돌봄은 ‘몸’과 ‘물질’이 남긴 자산이니 말이다. 우리가 돌봄에서 말할 수 있는 것은 결국 뒤섞이고 파편화된 욕망의 잔해뿐일 것이다. “능동적으로 수동적인 시간”8)이라는 피학성이 돌봄 노동자의 삶을 정확하게 수식한다면, ‘수동적으로 능동적인 욕망’의 가학성이 현실 한가운데에 누수되고 있는 흔적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 피학성과 가학성이라는 폭발적 성애 앞에서, 우리가 과연 ‘정의의 이름으로’ 타인에게 돌봄을 부과할 수 있을지에 대한 겸허한 반성이 피어오른다.
   박서련의 「기미」9)에서 ‘원희’는 틈틈이 학원 차 운전을 하며 생계를 유지하고, 고약한 치매 어머니를 돌보는 여성 가장이다. 돌봄 노동과 생계 노동이라는 단순한 현재가 계속되는 와중에 원희는 친구 ‘성미’로부터 산악회에 초대받고, 한 남자를 애인으로 두게 된다. 이 남자는 원희의 육체적 욕구를 충족시켜주지만, 엄마에 관한 이야기 앞에서 그는 원희를 실망시킨다. 남자가 원희의 어머니에게 상한 젓갈(취약한 몸에 위독할 수 있는)을 먹이라고 조언했기 때문이다. “엄마 때문에 힘들다는 이야기를, 엄마를 어떻게 죽이면 좋을지 묻는 것으로 착각하는 남자”(171쪽)와, 욕설과 폭력을 일삼는 치매 어머니, 불안정한 일자리 등은 원희를 궁지로 몰아넣는다. 친구 성미가 이웃들의 소문을 빌미로 원희의 연애를 몰아세울 때, 원희의 욕구 불만은 마침내 폭발하고 만다.

   그 말에 도리어 원희는 딱 한 번만 더 그 남자를 만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남자의 온몸을 쥐어뜯으면서 정사를 나누고 싶어진다. 온몸이 피와 멍으로 얼룩지고 뼈 마디마디가 울릴 때까지 서로 몸을 부딪친 후에 아파트 복도로 뛰어나와 소리를 지르는 것이다.
   이것 봐. 보라고.
   나는 살아 있어.
   너희들처럼 살아 있다. 너희들만큼 살아 있어. 다 이렇게 살잖아. 똑같이 이러고들 살잖아. 왜 나는 그러면 안 돼? 왜 나만. (173쪽)

   이 소설은 돌봄 여성 노동자의 개인적 욕망과 섹슈얼리티가 자주 소거되는 부분을 핍진하게 포착한다. ‘여성’ 노동자의 젠더와 섹슈얼리티가 자주 중성적인 노동자로 탈성화된다는 사실을 돌이켜본다면, 돌봄 여성 노동자의 섹슈얼리티 또한 자주 무성적으로 소거되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원희의 “살아 있다”라는 외침, “왜 나만” 안되냐는 절규는 노동자의 섹슈얼리티라는 불안정한 지대를 건드린다. 끔찍한 노동의 굴레 속에서 인간됨의 존엄을 확인할 수 있는 최소한의 빌미는, 결국 가장 사적이고 육체적인 여성의 섹슈얼리티적 욕망을 주장하는 데에서 찾아진다. 이 참을 수 없는 노출은 우리가 노동자라는 중성적·중립적인 이름으로 해소할 수 없는 취약성, 즉 “우리가 확고한 경계를 통해 철저히 분리된 존재가 아니라, 피부 속의, 양도된, 서로의 손안의, 서로의 자비를 바라는 존재라는 것을 이해할 방법을 제공할 취약성을 묘사”10)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원희의 성적인 욕망이 강렬한 언어로 발설될 때, 우리는 비로소 누군가가 ‘필요로 하는’ 노동자의 몸이 아니라 누군가가 절실히 ‘원하는’ 노동자의 몸에 대해 상상11)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돌봄 구매자/돌봄 노동자, 돌봄 수혜자/돌봄 제공자, 피돌봄인/돌봄인이라는 이원화된 분리는 그야말로 모순적이다. 한 명의 개인을 하나의 상황 속으로 떠밀면서, 돌봄이 가진 상호의존성을 사유할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역방향 돌봄’, ‘상호 돌봄’과 같은 단어를 발명하게 만드는 상황 또한 이와 같은 이분법적 분리가 만들어낸 곤경이라고 할 수 있다. 돌봄 받을 수 있는 권리, 돌봄 수혜자가 약자로 보이지 않을 권리, 약자를 약자로 만드는 사회를 혁명해야 할 당위는 이 ‘분리’에 내재된 기울어짐을 평평하게 다지는 시도일 테다. 그러나 그 전에 먼저, 돌봄이라는 ‘단어’ 내에는 여전히 기우뚱하게 기울어진 권력의 분배가 숨어 있다는 것을 지적해야겠다. ‘베풀다’라는 말이 주어가 목적어를 위해 일을 차리는 것을 묘사하듯, ‘돌보다’라는 말에는 주어가 목적어를 거둔다는 위계와 권력이 비대칭적으로 쏠려있다. 즉, 돌봄이라는 단어에는 누군가의 희생을 담보하는 소외가 무의식적으로 내재한다. 소설에서 원희는 바로 이러한 소외를 가시화하며 돌봄 노동에 내재된 위계적 구조를 이야기한다. 돌봄 수혜자가 약자로 낙인찍히듯 돌봄 노동자 역시 투명 인간으로 지워진다는 사실, 돌봄 노동자는 사실 언제든지 대체 가능한 노동력으로 여겨짐으로써 개체적·자율적·독립적 욕구와 욕망마저도 비가시화된다는 사실은 언제나 돌봄이라는 위계적인 단어 속에 잠복한다.
   최은미의 「보내는 이」12)는 공동육아라는 포근한 이름 아래에 휘몰아치는 감정을 드러내며, ‘공동’이라는 것이 결코 편안한 돌봄의 영역이 아니라는 사실을 몸서리치게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이 소설의 화자는 가까운 육아 동지 ‘진아씨’를 각별하게 생각한다. “둘 다 외동인 여자아이를 키우고 있었고―이름 끝 자까지 같은―, 같은 단지 안에서도 앞 동 뒷 동에 살았고─둘 다 꼭대기 층인─, 많은 것들이 불안했지만 적어도 서로 때문에 불안”(15-16쪽)하지 않다. 폭염의 여름 방학, ‘윤이들’의 돌봄을 꼼짝없이 도맡아야 하는 두 여성은 서로의 집에 건너가 친밀함과 지겨움을 나눈다. 그러나 화자는 초조할 정도로 진아씨에게 집착하고, 그녀의 집 변기에 붙은 참외 씨의 출처까지도 궁금해할 정도로 그녀를 숨 막히게 집어삼킨다. 이런 ‘나’의 앞에서 결별을 선고하듯 진아씨가 취하는 행동은 자못 강렬하다.

   “이게 그 당시에 내 몸에 돌던 것들이야. 아이한테 먹일 수 있었던 마지막 모유. 잠든 아이를 보면서 밤새 울다가 짜놓은 모유. 수십 번씩 천장과 바닥을 오가던 그때의 하루, 그때의 나, 그때의 윤이까지도 다 동결돼 있는 여섯 개의 덩어리야. 이제 이게 녹을 거야.”
   땀으로 머리칼이 뺨에 다 붙어버린 진아씨가 말했다.
   “이게 나야.”
   그리고 이어 말했다.
   “이게 다야.”
   잘 지내. 진아씨는 분명히 그렇게 말했다. 잘 지내, 영지씨. (33쪽)


   살을 녹일 듯 뜨거운 여름, 냉동된 여섯 개의 모유 팩을 식탁에 내려놓으며 진아씨는 협상하듯 말한다. “이게 나”고, “이게 다”라고. 그리고 나의 모든 것을 녹여서 흘려버리겠다고. 자신에게 더 다가오지 말 것을 경고하는 듯한 진아씨의 행동에는 ‘결별’이라는 정직한 독해를 가로막는 끈적한 육체성―모성, 액체성, 그리고 섹슈얼리티―이 한 방울씩 누수되고 있다. 그로 인해 이 장면은 속박과 이별의 팽팽한 신경전이 아니라, “자신의 몸을 휘돌던 모유처럼 모성 역시 자신의 일부를 구성하는 근본적인 감정으로 받아들임으로써, 그리고 그 모성을 상대방에 대한 깊은 감응과 포개놓음으로써 근원적으로 상대방과 깊이 관계를 맺고자 하”13)는 중첩된 감정으로 읽힌다. 맺고 끊음의 지경을 상상하기 어려운, 속수무책의 감정과 허기 어린 욕망이 모유가 녹는 뜨거운 식탁 앞에서 폭력적으로 펼쳐진다.
   진아씨를 향한 ‘나’의 집착은 친구를 에로틱하게 갈망하는 사춘기적 욕망으로는 해석될 수 없다. ‘나’의 모성 아래에 흐르는 끈끈한 감응적 순간들이 진아씨를 향해 전이되고, 그것이 중첩되며 증폭되고, 고여서 옭아매는 다층적 상황들을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모든 감정의 휘몰아침은 폭염의 여름 방학에, 아이를 잘 돌보겠다고 다짐하는 두 여성의 평범한 일상에 끈적하게 스며든다. “지켜야하는 선이 있”다는 사실을 신중하게 생각하고, “내 아이에게 불리한 빌미가 될 수도 있”으니 “훅 들어가선 안 된”(17쪽)다는 전략은 무의미해진다. 이 소설은 돌봄에 얽힌 정의로운 이름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살이 끈적하게 달라붙는 몸과 몸 사이의 상황에 대에서, 돌봄이라는 그릇이 담을 수 없는 이 축축함에 대해서, 법과 의제가 담을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에 대해서. 그 모든 것이 유령이 되는 순간들에 대해서.
   돌봄의 상호성은 이타적이고 선한 무엇이 아니라, 차라리 자신과 타인의 미성숙을 교집합 삼아 서로 폐를 끼치고 받는 위험한 관계이다. 최은미의 소설에서 친밀하게 육아를 함께하는 두 여성의 관계가 낭만적인 유대 관계가 아닌 감정적인 고양을 동반한 위험함, 모성이 겹쳐진 섹슈얼리티, 근본적인 어긋남으로 재현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맺고 끊음이 불분명한 관계에의 몰입과 견딤, 집착과 통제를 오갈 때 주체의 감정선은 위태해지기 마련이다.
   돌봄 공동체라는 위험한 관계에서 주체는 얼마간 발생할 타인의 민폐를 감당해야 할 것이고, 내가 남에게 민폐를 끼치는 의존 또한 부끄럽지 않게 여겨야 한다. 공적 돌봄이라는 정의가 시민의 의무나 권리에서 비롯될 것이라고 강조하기 전에, 돌봄 노동자라는 개인의 삶이 얼마나 어떻게 쉽게 훼손되는지를 돌아보아야 한다. 납작하고 평평한 사회 윤리가 주체의 입장을 정해서는 안 될 일이고, 가족주의와 재생산 이데올로기가 돌봄 공백을 암묵적으로 용인해서도 안 될 것이다. 다만 타인에 의해 허물어지는, 그 고양된 감정을 버텨낼 때 ‘돌보지 않는 마음’은 다시 생각될 수 있을 것이다.


전청림

먹먹함을 기억하고, 유연함을 잃지 않으며, 문학을 읽고 쓰고 싶다.

2022/11/29
60호

1
김영옥 외, 『새벽 세 시의 몸들에게』, 메이 엮음, 봄날의 책, 2020, 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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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가정 내의 육아와 살림 노동뿐만이 아니더라도, 돌봄 노동의 젠더화는 만연하다. 단적으로, 서울시 어르신돌봄종사자 종합지원센터에서 내놓은 돌봄 가이드 책의 제목과 표지에 ‘슬기씨’라는 단발머리 여성이 등장한다는 것을 지적할 수 있다. 현직 요양보호사에 대한 정보를 통계적으로 반영한 재현이겠지만, 국가가 지혜로운 요양보호사를 젊은 여성의 얼굴로 호명할 때 드러날 정치적 효과 또한 배제할 수 없다. 서울시 어르신돌봄종사자 종합지원센터 연구진, 『슬기씨, 돌봄을 부탁해』, 초록비책공방,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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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세 시의 몸들에게』, 14쪽 참조. 돌봄의 탈가족화가 필요하다는 목소리 덕분에 돌봄의 대안과 공공적 시스템이 등장하고 있지만, 공동체와 결연에 대한 무비판적 낭만화는 또다른 희생으로 엮어진 ‘돌봄 사슬’을 도출시킬 위험이 존재한다. 돌봄이 사회의 시급한 문제로 공론화된다고 해서, 반응성(비대칭적, 유동적, 개인적)을 지닌 돌봄의 속성이 곧장 상호성(정의, 독립, 의제)의 영역으로 변모하는 것은 아니다. 이 글은 “돌봄 노동의 핵심이 여전히 여성의 몸을 매개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돌봄에 대한 대안이 오히려 “누구도 실천할 수 없을 만큼 불가능한 주장”이 되기도 하며, 돌봄의 양식이 관계의 지속력을 가혹하게 시험하기도 한다는 문제 제기를 이어받아 논의를 전개한다. 박윤영, 「엄마의 자리에 서서: 돌봄과 자기윤리」, 《실천문학》 2020년 가을호, 이연숙, 「「퀴어-페미니스트의 ‘돌봄’ 실천 가이드」를 위한 예비적 연구」, 《문학동네》 2022년 여름호, 인아영, 「Healers, carers, and lovers」, 《뉴래디컬리뷰》, 2022 가을호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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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숙, 「버려진 지대에서」, 『두고 온 것』, 문학동네, 2021. 이하 인용 시 본문에 쪽수만 밝힌다.
5
정희진, 「보살핌 윤리와 페미니즘 이론」, 『돌봄이 돌보는 세계』, 조한진희·다른몸들 엮음, 동아시아, 2022, 2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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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 돌봄 시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만이 아니라, 공공의 돌봄 시스템 안에 들어온 노동자들도 위험을 피할 수 없었다. 돌봄 노동의 저평가에 근거한 저임금과 고용 불안은 공적 돌봄 노동자들도 겪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이정희·김정엽·신의철·이주희·조지훈, 『좋은 돌봄』, 민중의 소리, 2021, 24쪽 참조.
7
슬라보예 지젝, 「이웃들과 그 밖의 괴물들: 윤리적 폭력을 위한 변명」, 『이웃』, 케네스 레이너드 외 공저, 정혁현 옮김, 도서출판b, 2010, 289쪽 참조.
8
『새벽 세 시의 몸들에게』, 99쪽.
9
박서련, 「기미」, 『당신 엄마가 당신보다 잘하는 게임』, 민음사, 2022. 이하 인용 시 본문에 쪽수만 밝힌다.
10
주디스 버틀러, 『윤리적 폭력 비판』, 양효실 옮김, 인간사랑, 2013, 175쪽.
11
손유경, 「일하는 사람의 ‘아플’ 권리」, 《상허학보》 50, 상허학회, 2017, 241쪽.
12
최은미, 『눈으로 만든 사람』, 문학동네, 2021. 이하 인용 시 본문에 쪽수만 밝힌다.
13
강지희는 이와 같은 파열적 감정과 뜨거운 허기가 손쉽게 병리화되는 모성의 일면이 아닌, 기존에 언어화되지 못했던 기혼 여성들의 입체성을 밝히는 욕망임을 섬세하게 논증한다. 강지희, 「파열하며 새겨지는 사랑의 탄성」, 『눈으로 만든 사람』 해설, 38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