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솔뫼의 소설 「원준이와 정목이 영릉에서」는 20여년 전 원준이와 정목이와 정목이 아버지가 계곡을 산책하던 날에 현재의 ‘나’가 함께하게 된 이야기다. ‘나’는 원준이를 통해 그날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사람이 20년도 더 지나버린 날을 살 수 있을까?

   1. 장막

   문학은 투명한 매체일까? 정답은 ‘아니오’지만, 꽤 그런 것 같기도 하다. 나는 가끔 거의 완전히 투명해서 그 어떤 비밀도 숨어 있지 않은 텍스트를 통과했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예술 작품에서 재현되는 것들의 의미는 드러남과 물러남의 긴장이 교차적으로 상연될 때만 발생한다는 오래된 미학 관념의 영향일까. 모든 미메시스의 목적이지만 굴절이기도 한 매체의 결절들로 인해 대부분의 텍스트는 보편적으로 비밀의 옹이를 갖추게 된다. 비밀은 아는 사람 때문이 아니라 모르는 사람의 존재 때문에 성립하는 역설적인 형태의 앎인데, 인지나 자리의 한계로 인해 필연적으로 더 많고 더 다양한 비밀들이 이론상 무수히 양산된다. 어떤 사람에게는 환하게 명징한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깜깜하게 비어 있다. 그것들은 서로 경쟁을 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견주어볼 기회를 얻지 못하기도 한다. 이 명징함과 깜깜함이 영원히 병렬할 것이고, 사람들은 각자의 가시 세계를 두고 싸우다 지쳐 죽고 말 것이라는 이 각자만의 단자적 유니버스에서,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 말하는 어떤 씩씩한 믿음과 부지런한 동작들이 박솔뫼 소설의 매혹적인 비밀을 만들어낸다.
   어떤 이유로든지 주름을 만들어내는 ‘장막’으로 인한 비가시성의 절대성은 박솔뫼 소설의 오랜 주제였다. 광주를 배경으로 한 「그럼 무얼 부르지」는 ‘그날의 광주’와 ‘오늘의 광주’의 사이에 놓인 아득한 격차로 인해 갈 곳 잃은 애도에 관한 이야기다.

   키스를 마친 남자가 말했다. 잔을 높이며, 그 노래를 틀어요. 그 노래. 그 노래는 그해에 서울에 있는 광장에서 부를 수 없게 된 노래였다. 왜인지 납득이 가지 않는 이유로 부를 수 없게 되었고 그 때문에 노래를 부르고 싶은 사람들을 구차하게 만들었다 (…) 모든 명확한 세계들이 내게서 장막을 치고 있었다 (…) 나는 그런 명확한 세계에 없었다. 마치 아주 복잡한 지도를 보고 있는 것처럼 거기는 어디지? 하고 들여다보아야만 했는데 그렇다고 무언가가 보이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그렇게 들여다보는 사람이었으므로 당사자는 아니며 또한 명확한 세계의 시민도 아니었다. 내 앞에는 장막이 있고 나는 장막을 걷을 수 없으므로.
― 박솔뫼, 「그럼 무얼 부르지」,
『그럼 무얼 부르지』, 민음사, 2020, 150-156쪽.

   당파적인 이해관계를 이유로 ‘그날의 광주’를 상징하는 ‘그 노래’를 부를 수 없게 된 상황에서 ‘나’는 그 까마득한 ‘장막’의 절대적 엄연함을 체험한다. ‘나’는 그때 직접 광주에 있었던 ‘당사자’도 아니고 진상이 규명된 ‘명확한 세계의 시민’도 될 수 없다. 이러한 막막함은 분노와 멜랑콜리아로 이어지기 쉽다. 가령 부산 인근에서 발생한 원전 사고와 ‘그날의 부산’을 재현하는 미디어 스펙터클에 지친 「겨울의 눈빛」의 ‘나’는 재난 영화가 못마땅해 극장에 앉아 스웨터 보풀을 입에 넣고 굴리다가 화가 나고, 살아남아 개를 만지는 일에 모멸감과 허무함을 느낀다.

   두 남자와 개 한 마리는 채널을 바꿔가며 뉴스를 보았고 인터넷 창을 수시로 새로고침하며 새로운 이야기가 없나 우리를 안심시켜줄 그런 이야기가 없나 보고 또 보았다. (…) 내가 아는 누가 또 누구누구가 지금 무얼 하는지를 말하는 것으로 이토록 모멸감이 드는 이유는 무어야. 우리가 개를 보고 싶다고 말하는 것으로 이렇게 허무해져야 하는 것은 또 무어야.
― 박솔뫼, 「겨울의 눈빛」,
『겨울의 눈빛』, 문학과지성사, 2017, 91-105쪽.

   「이미 죽은 열두명의 여자들과」의 강간 살해 피해자는 자신을 비롯해 다섯 명의 여자를 강간 살해하고 교통사고로 죽은 김산희를 가상으로 음독 살인해보는 상상적 복수의 반복의 반복으로도 이미 일어난 사건의 비극과 영속적 가해가 해결될 수 없다는 걸 알게 된다.

   그것을 스무 번도 넘게 반복한 끝에 저자가 정말로 단순한 생물이었고 여전히 겁나고 죽은 이후에도 떨리고 무섭고 괴로운 마음을 이기기가 힘들었으나 방에 있는 바퀴벌레 한 마리 죽이자 기둥 뒤의 바퀴벌레가 또 나타나고 그걸 다시 죽이고 그런 식으로 그저 어떤 식으로든 살았다라고 말할 수 있는 자 그 자체였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생각했는데 이미 죽은 내가 이미 죽은 김산희가 괴물이고 비겁하고 치졸하며 아무 생각도 없는 자였으며 그자는 그저 살아 있었고 생물이었고 이제 죽었고 그러나 죽은 후에도 나는 그를 괴롭게 하여 그에게 죽음의 고통을 반복하게 할 수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이 그것이 무엇이라고 할 수 있을까.
― 박솔뫼, 「이미 죽은 열두명의 여자들과」,
『우리의 사람들』, 창비, 2021, 97쪽.

   그러나 박솔뫼 소설이 주목받아온 이유는 그 ‘장막’과 n개의 재현물들의 경합과 조합을 지면 위에 수놓으며 익숙한 불가능성을 재확인하면서도 결코 좌절하지 않았다는 점에 있었다. 「그럼 무얼 부르지」의 화자는 술집 사장으로부터 광주의 온갖 시시한 음식들과 식당 설명을 한참 듣고, 「겨울의 눈빛」 화자는 사건 이듬해 부산을 떠나 해만에 피난을 온 사람들의 마을에 정착하여 해운대 이야기를 들으며, 「이미 죽은 열두명의 여자들과」의 ‘나’는 살아 있는 여자들 사이에서 지도에 없는 이정표를 만들기 시작한다. 국가 폭력, 안전사고, 페미사이드 등을 비롯하여 박솔뫼가 다루는 폭력과 저항의 체험록은 조명되지 못했던 희미한 존재들의 열망과 행위들을 비추는 대안적 서술의 가능성으로, 모든 사료를 한데 집적시키는 아카이브의 열병 가운데에서 화석화를 거부하는 역동성으로 해석되곤 했다.1) 정말로 그렇다. 진상 규명이 되면 이제 그 역사를 그만 얘기할 것인가? 기념비와 아카이브는 조성되는 순간 무한한 소실점으로서 다시 그 자신의 재료로, 기둥과 인화 물질들로 향한다. 가령 진실과 이해와 화해와 평화를 위해 이장된 중세 왕의 장지가 아이들이 떠돌고 연인들이 데이트하는 마을의 공원이 될 때까지 말이다. 「원준이와 정목이 영릉에서」의 ‘나’가 20여 년 전으로 합류하게 된 원준이와 정목이의 동네가 570여 년 전에 죽은 조선의 임금 세종대왕의 묘지 영릉인 것은 이유가 있다.

   2. 증강 현실

   증강 현실은 실재하는 현실에 가상의 사물이나 정보를 더해 마치 그것이 원래부터 그 환경에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그래픽 기술로, 일상적 사물들에 리추얼한 시공간 감각을 부여한다.2) 이러한 증강 현실은 기술적 유희가 되기 훨씬 이전부터 현기증을 불러일으키는 질병의 오랜 양태로 이해되기도 했다.3) 박솔뫼 문학에서 손쉽게 일어나는 아나크로니즘은 유희와 트라우마를 가로지르며 펼쳐져 왔다. 계엄령이 떨어진 광주와 원전이 폭발한 부산, 여자들이 강간 살해당한 서울, 그리고 장막이 걷히지 않은 그 밖의 모든 곳에서 박솔뫼의 화자들은 저택과 같은 건물이나 공사장의 비계처럼 드나들 수 있고, 헤맬 수도 있고, 거주할 수도 있는 시간 속을 방랑한다. 그것들은 ‘들은 이야기치고는’ 엄청나게 직접적이고 증강 현실처럼 느껴진다. 「원준이와 정목이 영릉에서」도 그런 일이 일어난다.
   어느 토요일 여름 중학교 1학년생인 정목이는 원준이에게 전화를 걸어 아버지와 함께 계곡 낚시를 가자고 제안한다. 그들은 정목이 아버지의 차를 타고 계곡으로 간다. 세 사람은 계곡으로 가 낚시를 하고 물놀이를 한다. 그런데 차를 가져온 정목이의 아버지가 두 아이를 두고 먼저 집에 가버린다. 말하고 듣는 일에 불편함이 있는 정목이의 아버지는 급한 일이 생겼을 때 사람들의 시선을 붙잡아 글을 쓰거나 수화를 해서 의사를 전달해야 했는데, 아이들에게 사정을 설명하기 번거로웠기 때문이다. 신발을 차에 두고 내린 두 소년은 맨발로 계곡을 내려와 히치하이킹을 해서 집으로 돌아가기로 한다. 두 사람은 영릉으로 향하는 한 아저씨의 차를 얻어탄다. 정목이가 먼저 내려 가까운 친척집에 집에 가고, 영릉에 도착한 아저씨는 그곳에서 누군가를 만나고, 원준이는 어느 밥집 앞에서 졸며 다리쉼을 하다 가게 사장으로부터 물과 참외를 얻어먹은 뒤 집에 돌아간다. 다음날인 일요일에 원준이는 자전거를 탄다. 정목이는 아버지 차에 두고 내린 원준이의 옷가지들을 가져다준다. 그렇게 두 사람의 중학교 1학년 어느 여름 주말이 흐르고, 그들은 2학년이 되고 3학년도 된다. 이후 정목이는 전학을 가고 원준이는 그를 다시 만나지 못한다.
   시원한 계곡, 조용한 아버지, 초여름의 볕, 생수와 참외의 맛, 소년들의 맨발, 까무룩 든 낮잠의 이완 등 감각 묘사를 제외하면 정말로 삼삼하고 거리 없는 이 이야기는 그러나 작품의 후반부 미래에 사는 ‘나’로 인해 펼쳐졌다는 것이 밝혀지며 독특한 위상을 갖게 된다.

   원준이가 정목이와 계곡에 갔던 이야기를 나에게 해준 것은 그로부터 20여 년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 나는 원준이에게 정목이랑은 이제 안 만나느냐고 물었고 원준이는 정목이가 3학년 때 이사를 갔다고 말했다. 엄마들끼리 친했는데, 그때는 정목이네 엄마 또 다들 엄마들끼리 연락하고 지내서. 정목이는 뭐 하고 지내? 궁금하네.
   정목이는 근데 고등학교 때 오토바이를 타가지고 이야기를 듣기로는.
― 박솔뫼, 「원준이와 정목이 영릉에서」,
《악스트》 33호, 202쪽.

   그러니까 이 소풍날은 20년 후 원준이가 ‘나’에게 전해준 이야기라는 것, ‘나’는 원준이의 이야기를 듣다가 일종의 증강 현실 속에서 20년 전의 그날 소풍을 함께하기에 이른 것. 그런데 자세히 보면 ‘나’가 사후에 체험한 증강 현실이라고만 하기에는 20년 전 원준이와 정목이도 어떤 기척을 느낀 것 같다. 나란히 걷는 세 사람 뒤에 누군가가 한 명 더 있을 것만 같다는 묘사가 끈질기게 이어지기 때문이다.

   정목이의 아버지 정목이 원준이가 계곡을 향해 걸었다. 정목이 아버지가 성큼성큼 앞서 걸었고 정목이 아버지의 뒤를 정목이와 원준이가 나란히 따라 걸었다. 그런데 뒤를 따르는 것은? 정목이와 원준이가 정목이 아버지를 따르는 것처럼 정목이와 원준이를 따르는 것이 있었는데, 뒤를 돌아보면 알 수 있겠지만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 박솔뫼, 「원준이와 정목이 영릉에서」,
《악스트》 33호, 194쪽.

   물론 그곳은 여름의 왕성한 숲속이고 수많은 생물들은 각자의 생장으로 분주하고 소란스럽다. 세 사람분을 초과하는 기운은 그저 여름의 자연이 만들어 낸 화려한 자연 감각일 수 있다. 설마 누가 더 있을까? 점점 크게 보이는 물고기, 시선을 감지하는 벌레, 자기들끼리 소근대는 개미, 사람 사이를 가로지르며 지나간 고양이는 계곡과 거리에 있는 것이 자연스러운 존재들이지만, 동시에 초과분의 기색을 끊임없이 암시한다. 오직 만물의 영장이라는 사람만이 그것을 못 느끼는 듯이 말이다. 그렇게 하루 종일 모종의 인기척이 감돌지만, 이내 그것이 동물의 소리라는 것이 밝혀지는 것이 반복해서 밝혀진다. 정목이와 헤어져 식당 앞에서 졸다 깨어난 원준이는 선잠 상태에서, 가을도 아닌데 이상하게 자꾸만 나타나는 잠자리의 목소리를 듣는다. “지금이 내가 사는 때야.”(영릉 199쪽)
   이 잠자리의 목소리는 누구의 것일까. 고등학교 때 오토바이를 타고 다녔다는 정목이는 아마 죽었을 것이다. ‘나’는 성인이 되기 전에 죽은 친구의 동창생 이야기를 반복하여 듣다 그날을 함께 체험한다. ‘나’는 그 증강 현실 속에서 정목이 아버지와 정목이와 원준이 뒤에서, 벌레와 개미와 고양이와 잠자리의 양상으로, 말을 건넨 것인지도 모른다. “지금이 내가 사는 때”라고. 이 증강 현실은 원준이가 설풋 든 선잠 속에서 상호적이 된다. 오토바이를 타던 정목이가 사고를 당한 날이나, 사고에 대한 온갖 말이 나도는 때가 아니라, 혹은 그 밖의 다른 특이하고 평범한 날도 아니라, 우연히 마주친 이방인과 이웃들의 친절함 덕에 집으로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던 두 소년의 여름 나들이 속을 함께하는 ‘나’의 증강 현실은 그저 가만히 아름답다.

   3. 그림자

   물론 이 시공간의 왜곡은 물리적으로 반증 가능한 것은 아직 아니지만, 아예 다다를 수 없는 것도 아니다. ‘장막의 기술’이 있기 때문이다. 박솔뫼의 근작 「믿음의 개는 시간을 저버리지 않으며」는 ‘그림자 개’가 깊은 슬픔에 잠긴 사람들에게 나타나 산책을 요구하고, 그 산책의 시간은 시간과의 관계성을 회복할 실마리를 준다는 설정의 소설, 혹은 증강 현실 문학이다. 다만 게임과 다른 것이 있다면 인물에게 플레이 수락과 종료 권한이 없고, 규칙에 대한 고지 없이 느닷없이 현상이 시작된다는 데에 있다.
   그런데 이때 진짜 개, 살을 비비거나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실물 개가 아니라 ‘개의 그림자’가 나타난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소설 속에서 어느 날 자신을 찾아온 그림자 개의 존재가 의심스러운 태식은 그러나 이미 눈앞에 나타난 명백한 것을 부정할 수 없다. 규칙을 모르는 게임에 이미 참가되어 미로를 헤매는 것, 가령 카프카에게 이런 것은 악몽이었다. 게다가 실물도 아닌 그림자가 길을 안내한다. 그러나 이 정처 없는 여행이 꼭 미로에 갇힌 악몽만도 아니다. 사물들이 일상의 리듬을 멈추고 고유의 동작을 개시하는 시간, 아이가 잠든 후 움직이는 장난감들의 세계처럼 사물을 소모하는 어른이 입장하면 고요해지지만 그것을 향유하는 어린이가 드나들면 전혀 다른 생동성으로 활기를 띄는 세계, 그림자 개는 최면을 거는 것처럼 느닷없이 나타나 인물들을 더 깊은 세계로 안내하기 시작한다.

   우리가 우리 자신과 세상을 연결하는 끈이 느슨하다고 느껴질 때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 눈을 감고 당신을 찾아오는 이를 떠올리세요. 둘. 그들은 당신을 산책으로 이끌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 둘 셋을 셋을 셌는데.

   -세 번째는 뭔데?
   -셋.

   셋.

   눈을 떠.
― 박솔뫼, 「믿음의 개는 시간을 저버리지 않으며」,
『믿음의 개는 시간을 저버리지 않으며』, 스위밍꿀, 155-6쪽.

   증강 현실, 꿈, 동면 등 아직 단단한 것은 아니지만 완전히 환상이라기엔 지나치게 감각적이라 믿지 않을 수도 없는 중간 지대. 눈을 뜬 태식은 자신이 들어간 증강 현실의 규칙을 서서히 알게 된다. “어딘가 먼 곳에 개가 있고 그 개가 반사되어 그림자로 나타나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영화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믿음의 개 143쪽) ‘그림자’는 ‘장막’ 위에서만 가능한 베일이다. 그림자 개가 출현하는 일의 선결 조건이 장막인 것이다. 물리적, 심리적, 정치적 풍화 현상이 빚어버린 장막 때문에 우리는 무언가를 볼 수 없지만, 장막이 있어 그림자 개가 찾아오기도 한다.4) 증강 현실이 증강 안 된 현실과 동일하고 나란하게 성립할 수 있다는 가능성의 발견. 「원준이와 정목이가 영릉에서」의 마지막은 증강 현실 속에서 이윽고 증강 안 된 현실은 없다는 화자의 희미한 깨달음으로 끝이 난다.

   원준이는 이 이야기를 매번 크게 더하지도 빼지도 않고 여러 번 반복해서 해주었다. 계곡을 향해 걷는 원준이와 정목이 정목이 아버지. 정목이 아버지가 먼저 성큼성큼 계곡을 향해 걸었다. 그 뒤를 정목이와 원준이가 따라 올라가고 나는 그 뒤를 따라서 천천히 쏟아지는 녹색 속으로, 물소리, 나무와 바람 속으로 걸었다. 풀 냄새와 나무 냄새로 가득하고 나는 바위 위에 누워서 그것을 듣다가 눈을 감고 나를 따라온 것이 무엇이었는지 생각해보려 하지만 물소리는 쏟아지고 감은 눈으로도 선명한 햇볕은 알아차릴 수 있고 나뭇잎은 흔들리고 그 역시 알 수가 있고 그런데 금세 잠이 들어서 내가 그곳까지 어떻게 걸어왔는지 그것이 내가 평소에 걷는 것과 어떻게 달랐는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 박솔뫼, 「원준이와 정목이 영릉에서」,
《악스트》 33호, 203쪽.


   이것은 허구를 통해 과거를 수정하고 보완하는 대체 역사라는 소설의 일반적 기능에 관한 것은 아니다. 작가는 장막만을 강조하며 그 불가능 앞에서 사건을 신성화하는 대신 다양한 감각적 과부하를 통해 실재적인 것의 유일한 권위를 폐지시킨다.5)

   *
   어떤 비극적인 일이 일어나고, 성찰과 반성과 정비를 거쳤다고 주장해도 비슷한 일이 다시 일어나고, 또 일어나면, 서둘러 장막들이 쳐지는 동시에 그것을 보고 들은 사람들의 움직임이 그림자처럼 솟아나 증강 현실을 형성한다. 단일한 현실이 단일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현실들이 무수히 생겨난다. 그러니까 「원준이와 정목이가 영릉에서」의 화자는 20년 전 어느 날로 자꾸 돌아가 원준이와 정목이를 따라다니다가 원준이와 정목이가 직접 체험하지 못한 그날의 다른 세부도 환하게 알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가령 원준이가 전해주었을 리 없는 정보들, 영릉에 간 아저씨와 여자가 나눈 대화, 그들의 저녁 식사 메뉴 같은 것들 말이다. 그것은 원준이도 정목이도 모르는 것들이다. 그런 이야기들이 원준이가 말로 전해준 그날의 세부와 동시에 나란히 가능한 현실이라는 점이 박솔뫼의 소설을 멜랑콜리와 멀어지게 한다. 우뚝한 기념비와 장엄한 아카이브로부터 나와 공원과 산책길로 접어들게 만든다.
   트라우마로 인해 솟아오른 과거의 어느 날을 반복 재생하는 것만이 아니라 감각의 증강 속에서 다른 세부들을 발견하며 다른 가능한 현실을 열어가기. “정목이는 뭐 하고 지내? 궁금하네. 정목이는 근데 고등학교 때 오토바이를 타가지고 이야기를 듣기로는.”에서 끊긴 그전과 그다음에 일어났고, 일어날 수 있었던 무수한 일들을 말이다. 500여 년 전 죽은 왕의 무덤을 배경으로 20여 년 전 사람들을 따라다니는 ‘나’는 정목이도 정목이의 아버지도 모르는 사람이다.

오은교

읽고 씁니다.

2022/11/29
60호

1
백지은은 「미래 산책 연습」에서 이야기의 제도화를 가능케 하는 음화된 이야기의 착상을 본다. “보이고 보고 남기고 남는 것들에 대한 생각-가정은 역사/세계에 대한 확신을 낳지만, 그 확신이 가능하지 않은 역사/세계도 있(을 수 있)다. 그 있(을 수 있)었던, 존재(하지 못)했던 역사/세계에 대한 생각-가정은, 그것이 실재했다는 확신과는 거리가 있겠으나 그렇다고 오직 꾸며진 가상의 역사 같은 것은 아니다. 그것은, 보이고 찍히고 남았기에 확실하게 인식되는 역사/세계가 바로 그렇게 있었다는 사실을 뒷받침하기 위해서라도, 마치 우주의 암흑물질처럼 알 수 없음과 불확정성의 상태를 가정한 채로 존재하여 알 수 있음과 확정의 상태를 역으로 증명해내는, 다른 위치의 역사/세계다” 백지은, 「안으로 나가는 역사」, 《문학동네》 2022 봄호.
2
한병철은 반복의 리추얼을 통해 사물과 다른 관계를 맺는 것을 생산 강제 사회의 덧없는 감정 소모와 대별한다. “감정은 사물보다 더 덧없다. 따라서 감정은 삶을 안정화하지 못한다. 게다가 감정을 소비할 때 사람들은 사물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 관련 맺는다. 감정적 진정성Authentizität이 추구된다. 그렇게 감정의 소비는 나르시시즘적 자기관련Selbstbezug을 강화한다. 그리하여 사물들이 매개했어야 할 세계관련Weltbezug은 점점 더 상실된다.” 한병철, 『리추얼의 종말』, 전대호 옮김, 김영사, 2021.
3
이는 폭력 사건 생존자들의 ‘증강 현실적 신체 감각’에 대한 권명아의 논의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것이다. “생존자의 현실 감각은 일상적인 공감 감각이나 현실 감각과는 매우 이질적인 복잡화되고 증강된 신체 감각을 갖게 된다 (…) 이러한 현실 감각의 변용이 ‘우울증, 정신착란, 사회부적응, 히스테리’ 등 병리적 이름으로 명명된 것도 이런 현실 감각의 착란화 혹은 복잡화를 논의하는 이론과 방법론이 부재한 결과다.” 권명아, 「증강 현실적 신체를 기반으로 한 대안기념 정치 구상: 애도 주체와 현실의 증강, 그리고 ‘완서학’의 원천」, 《여성문학연구》 2017.
4
오석화는 영화관이 자주 등장하는 박솔뫼의 소설들에서 ‘장막’과 ‘그림자 개’의 존재론적 관계성을 읽어낸다. “그림자와 영화는 우선 원본에 해당할 것의 존재나 빛으로 이루어진다는 점 등에서 서로 닮아있지만 나는 그보다도 그 빛이 투사될, 즉 가로막힐 평면을 필요로 하며 그로부터 발생한다는 점에 주목하게 된다. 그림자 개의 가장 중요한 존재론적 특성이 여기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 지금까지의 박솔뫼의 ‘장막’이 어떤 불가능성의 은유로서 기능해 왔다면 그림자 개는 바로 그 ‘장막’, 즉 불가능성 위에서 태어난 존재다. 나아가, 우리가 알던 그림자가 자신의 원본에 종속돼 동일한 시공간에 자리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면 그림자 개는 실제 개의 여부와도 무관하게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스스로 찾아 나설 수 있는 존재다. 다시 말해, 그림자 개는 그 자체로 ‘장막’의 불모성과 절대성에 대한 박솔뫼식 반증이다.”?오석화, 「그림자 공동체- 박솔뫼의 부산, 산책, 그리고 그림자들」, 《동리목월》 2021 가을호.
5
이러한 해석은 강보원의 글에 자세히 담겨 있다. “다가갈 수 없음을 전제로 픽션이 가능해지는 경우, 우리는 이 픽션의 가능성을 보존하기 위해 그 사건 자체에 접근하지 않으려 할 것이다. (…) ‘픽션의 한계를 지킨다’는 윤리적 강력 속에서 은밀하게 사건 자체를 실체화하며 동시에 결코 닿을 수 없는 어둠 속으로 밀어 넣는다. 그렇기에 이 관점은 “중요해 보일 법한 장면”을 화면에 담아야 한다는 요구와 상반되는 외관에도 불구하고 그 요구가 궁극적으로 표현했던 전혀 보지 않으려는 마음을 정확히 공유한다. (…) 즉 여기서 부재하는 것은 내가 결코 갈 수 없는 특정한 장소라기보다, 그러한 장소를 내가 실제로 있는 장소와 구분 짓는 질서이다. 픽션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이 병렬과 중첩의 가능성, 즉 ‘현실적인 것’의 지위 상실이다.“ 강보원, 「지나가기 혹은 영원히 남아있기」, 『우리의 사람들』, 창비,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