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주 전 나는 베를린에 있었다. 베를린에 있는 내내 나는 혹시나 내가 코로나에 걸린 것은 아닐까 걱정했다. 어떤 날은 정말로 열이 있었고 식은땀이 났고 목이 부어서 기침이 났다. 아프느라고 잠에 들 수가 없어서 타이레놀과 쿠에타핀을 동시에 먹고 잠에 들면 다음 날에는 모래사장에 발이 빠지듯 온몸이 무겁고 느리게 움직였다. 내가 누운 침대보에서 시큼한 땀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조금이라도 낌새가 수상하면 외국인 대상의 신속 검사를 받기 위해 아침 일찍 숙소에서 나섰다. 나는 지금도 걱정이 지나쳐서 아팠던 것인지 혹은 그 짧은 시간 동안 여러 번 코로나에 걸렸다가 나은 것인지 모르겠다. 이 볼썽사나운 건강 염려증은 물론 정상이 아니었지만, 정상이 아니라는 측면에서 여러분 모두와 같기에 지극히 정상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병자인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차라리 나는 내가 무엇을 안다고 착각하는지 알고 있으므로, 대부분의 여러분에 비해 나은 처지가 아닌가? 그러니 감사해야 할 일이 아닌가? 그렇지만 나는 나의 의지에 반해 세계에 대항하듯 반응하는 육신의 민감성이 불쾌할 만큼 거추장스러웠다. 예고 없이 증상이 나를 침범하면 나는 모든 일을 중단하고 침대에 누워 구글에서 코로나와 증상의 관계를 몇 시간이고 검색했다. 물론 그것들은 평범한 감기나 일시적인 설사였을 수도 있고 또는 코로나가 아닌 다른 뭔가의 증상일 수도 있었다. 그런데도 구글링을 멈출 수가 없었다. 정확히는 코로나를 걱정하는 일로 (가능했을지도 모르는) 삶의 생생함과 풍부함을 유예하고 심지어 제거하는 일을 멈출 수가 없었다. 나는 이 모든 ‘호들갑’이, 웬만큼 ‘살 만한’ 상태의 나에게 고스란히 몇 곱절로 불어 빚으로 상속될 것임을 알았다. 그건 피하고 싶은 일이었다. 그러나 가장 피하고 싶은 일은 아니었다. 어느 날엔가 나는 누군가와 통화를 하다가 “아플 수도 있어, 아픈 건 괜찮아, 문제는 ‘여기서’ 아픈 거야……” 같은 말을 중얼거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여기서’ 아프다는 것, 그것은 당분간 한국에 돌아가지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으로 돌아간 뒤에 하기로 되어 있던 일정을 소화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에서 아픈 것보다 더 긴 시간을 기능하지 못하는 상태로 지내야 함을 의미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내 건강 염려증의 근원이 일하지 못하는, ‘비생산적인’ 상태에 대한 공포 자체임을 점차 깨닫기 시작했다. 나는 내가 가여워졌지만 그런다고 해결되는 일은 하나도 없었다. 수선을 떨며 예정보다 일찍 서울로 돌아오자, 그제서야 몇 주 내내 나를 괴롭히던 두통과 설사가 멎었음을 그땐 눈치채지도 못했다.

*


   나는 우리 중 누구도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한 국면인 ‘성과사회’가 이끄는 자기 착취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걸 안다. 로렌 벌렌트는 우리가 처한 역사적 현재라는 조건 속에서 주체의 정서적 상태를 ‘잔혹한 낙관주의’로 정의한다. “‘잔혹한 낙관주의’란 실현이 불가능하여 순전히 환상에 불과하거나, 혹은 너무나 가능하여 중독성이 있는 타협된/공동 약속된compromised 가능성의 조건에 대한 애착 관계를 이르는 말이다.”1) 이 애착이 ‘잔혹한’ 이유는 “설령 그 x의 현존이 그들의 ‘안녕well-being’을 위협한다 해도 그것의 상실을 잘 견뎌내지 못”2)하는 데 있다. 대상의 내용이 무엇이건 간에, 그것을 원하고 그것에 근접한 느낌으로만 삶을 추진할 수 있게 된 주체에게 있어, 대상과의 애착적 관계를 중단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심지어 대상이 주체의 행위 능력을 손상시키고 그를 ‘천천히 죽이고’ 있다고 해도 그렇다. 내 삶 전체가 힘껏 그 자체의 역량을 절멸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음에도, 나는 그저 내 삶의 어리둥절한 목격자로 존재하고 있을 뿐 그것을 바로잡을 ‘권한’이 없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는 주체의 한번 ‘잘’ 살아보려는 의지가 자기 착취적인 ‘노오력’과 쉽게 구별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한병철은 우울증, ADHD, 번아웃과 같은 우리 시대의 ‘질병들’이 ‘긍정성의 과잉’에서 비롯되었음을 지적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긍정성의 과잉 상태에 아무 대책도 없이 무력하게 내던져져 있는 새로운 인간형은 그 어떤 주권도 지니지 못한다. 우울한 인간은 노동하는 동물로서 자기 자신을 착취한다. 물론 타자의 강요 없이 자발적으로. 그는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이다. (…) 성과 주체는 자기 자신과 전쟁 상태에 있다. 우울증 환자는 이러한 내면화된 전쟁에서 부상을 입은 군인이다. 우울증은 긍정성의 과잉에 시달리는 사회의 질병으로서, 자기 자신과 전쟁을 벌이고 있는 인간을 반영한다.”3) ‘규율사회’가 ‘할 수 없음’에 따른 금지와 처벌로 특징지어진다면, ‘성과사회’는 ‘할 수 있음’의 ‘무한 긍정’으로 인한 과잉, 과다, 과열에 따른 탈진으로 특징지어진다. ‘긍정성 과잉’의 사회는 부정성으로 환원되는 이질적인 것, 차이를 참지 못하므로 모든 것들을 비슷하게 중요한 것인 동시에 의미 없는 것으로 만든다. 이제 (과거에 가능했던) ‘절대적이고 적대적인 타자’의 폭력은 시스템 내부에 잠복하고 있는 폭력인 ‘내재성의 테러’로 대체 된다. 더욱이, 우리가 기존의 면역학적 타자의 형상에 의존하는 한 이러한 ‘내재성의 테러’, 즉 자기 자신을 파괴하고 착취하는 폭력을 포착하기란 어렵다. 그것은 “박탈privativ하기보다 포화saturativ시키며, 배제exklusiv하는 것이 아니라 고갈exhaustiv시키는”, 철저히 자폐적이고 신경증적인 파괴를 지향한다.4)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성과사회의 부드러운 ‘제안’─‘할 수 있음’을 계속할 수 있는 주체이든, 또는 ‘할 수 있음’을 더이상 ‘할 수 없게 된’ 주체이든 간에, 우리 시대의 가장 중대한 문제가 우리 내부의 ‘정신적 탈진’이자 ‘몰락’5)임은 자명한 사실이자, 무엇보다 고통스러운 진실이다.

   우리는 꼼짝없이 (생계를 위해, 인정을 위해, 당장의 욕구를 위해, 자신의 ‘일중독’을 상대하기 위해) 주어진 일 이상을 “자꾸 해내버리는”6) 유감스러운 교착 상태에 처해 있다. 특히 예술과 그 언저리를 서성대는 우리의 ‘일’─또는 ’작업’, ‘프로젝트’, ‘기획’, ‘전시’, ‘비평’, ‘실천’으로 불리기도 하는 모든 종류의 활동들─속에서 창조적 열정의 에너지와 자아 착취적인 노동은 분리 불가능하도록 뒤얽혀있다. 나의 동료인 허성원은 《일간 이슬아》를 예시로 ‘자아 노동자’의 모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작가의 노동이 판매자의 노동과 구별되는 신성한 것이어야 한다는 얘기가 아니라, 자기만의 시각을 통해 독특한 글을 써야 하는 자아와 상대의 요구를 받고 합의를 도출하는 자아를 동시에 구현해야 하는 모순적 상황은 그 자체로 누구에게나 괴로울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 그리고 이런 형태로 모순된 자아를 유지할 수 있는 균형 감각은 사람들이 더이상 사유에 값을 지불하지 않으려고 하는 시대에 글 쓰는 사람으로서 살아남기 위한 필수적 자질이 되어가고 있다. 이슬아 작가는 자신을 ‘연재 노동자’로 지칭했었다. 우리는 어쩌면 자기 자신을 ‘자아 노동자’로 훈육하는 시대에 들어선 것은 아닐까.”7) 물론 이런 모순을 알면서도 자신을 ‘훈육’해야만 하는 일은 ‘괴롭다’. 그러나 또한 여기에는 자신을 작가-노동자로 변형하고 재구성하는 황홀과 고통, ‘열정과 망상’이 공존하는 것도 사실이다. ‘우연히’ 살아남게 될 몇몇을 제외하고, 이 같은 자기 착취와 창조성의 만족할 줄 모르는 변증법적 운동은 언젠가 우리 모두를 완전히 탈진시키고 말 것이다. 나는 이 글을 쓰면서 주변의 동료들의 얼굴을 떠올리고 있다. 나를 포함해 이들 중 누구도 오르막길에서 안전하게 멈추는 법을 모르는 것 같다. 고소 공포증을 여전히 해결하지 못한 나는 멈추느니 차라리 굴러떨어지기 만을 바란다.

*


   그런데 나는 무슨 ‘일’을 하고 있나?
   작년 유일한 고정 수입을 (자발적으로) 잃은 뒤, 올해 내내 나는 예술과 빈민 기금에 의존해 살고 있다. 그러니 그 ‘일’이라는 것이 행정적인 관점에서 ‘근로’ 소득이 아님은 분명하다. 그런데도 이걸 ‘일’이라고 불러야 할까? 나는 분명히 시간과 체력을 투자해 글을 쓰고 ‘기획’이라는 것을 하고 ‘기금 사업’이라는 것도 한다. 본격적으로 이렇게 된 지가 만으로 6년째다. 이런 ‘일’들은 분명히 노동이라고 부를 수 있지만 오로지 노동으로만 환원될 수는 없다. 최소한 내가 경험한 다른 모든 종류의 노동들과 비교하자면 더욱 그렇다. 물론 예술 역시 노동이며 그래서 예술가에 대한 부당한 착취와 대우를 즉각 개선하기를 요구했던 투쟁의 결과 덕분에 꼬박꼬박 ‘표준 계약서’를 써가며 일을 할 수 있게 된 입장에서, 나는 배은망덕하게도 퇴행적이고 반동적인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이 ‘일’이 내 삶의 외면과 내면 모두에서 전혀 분리될 수 없다고 느낀다. 그래서 ‘일’은 애매모호한 채로 남아 한나 아렌트식의 인간 활동의 분류가 깨끗하게 절단하지 못했던 영역들을 모조리 포용하는 침대 밑 서랍장 같은 것이 되었다. 거기엔 야망과 희망, 절망과 비관, 수치와 분노가 원래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뒤섞인 채 존재한다. 하루는 트위터에서 그림을 그리는 10대들이 자기네들끼리 정한 ‘마감’을 무슨 직업적 사활이라도 달린 양 남발하는 꼴이 아주 우습다는 내용의 글을 봤다. 가끔 내가 ‘일’이라고 말할 때 나는 어린 내가 동인지를 만들기 위해 몇 주간 밤을 새던 것을 떠올린다. 비지땀을 흘려가며 출력된 글자를 한 자 한 자 오려서 말풍선 위에 얹는 작업은 실수의 리스크가 컸지만, 동시에 아무런 보람이 없었다. 그런데도 거기에는 우스꽝스러울 만큼의 필사적임이 있었다. 나는 처절하게 비장한 마음으로 ‘마감’을 지키고 싶어 했다. 그러니 거기엔 세속적 기준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자기만의 ‘직업적 사활’이 걸려 있었던 셈이다. 이런 말을 하면서 나는 부끄러워지는데, 왜냐하면 지금이라고 다를 바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나는 내 ‘일’이라는 것이 내게 있어 거의 유일하게 의미를 가지는 존재임을 안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이 ‘현실 세계’에서의 유용성과 효용성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도 안다. 그래서 나는 쉽게 부끄러워진다.

   부록. 아니 그래서 나는 도대체 무슨 ‘일’을 그렇게나 하고 있나?

   1. 기획서 쓰기. 기획서를 쓰는 일은 삶과 세계의 희망적이고 건설적인 전망과 직업적 방향성, 전문성, 대체 불가능성 등을 자문하게 하는 자기 분석적인 작업을 동반한다. 또한 자기가 진짜로 하고 싶은 말(“아무것도 더이상 물어보지 말아 주십시오. 저는 괴롭습니다.”)과, 자기의 쓸모와 가치를 적극적으로 어필하는 말(“저는 존재 자체로 세계에 이롭습니다.”) 사이에서 어느 정도는 정신을 ‘해방’ 시키는 제한된 자유도 수반된다. 무엇보다 기획서를 쓰는 일은 하나의 완전한, 그러나 잠재된 우주를 창조하는 일이다. 만약 누군가가 나의 기획서를 자세히 보게 된다면 거기에는 가능했던 세계들의 무한하고 반복되는 탄생과 종말이 표와 문자, 특수 기호들로 표현되어 있음을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랄 것이다. 나는 지난 수십 개의 기획서를 통해 이미 여성 해방과 성별 규범의 해체, 그리해서 “성적 차이가 비로소 도래한” 세계를 창조했을 뿐만 아니라, 내가 생각한 위대한 작가들을 모두 제 자리로 복권 시켰다…… 어쨌든 이와 같은 기획서 쓰기의 위대함에도 불구하고 대체로, 기획서는 앞으로 기술한 모든 종류의 그야말로 욕이 나오는, 자질구레할 뿐만 아니라 어떤 인정도 기대할 수 없는 성가신 일들의 모체다. 하나의 기획서는 다른 모든 기획서들의 상호 모방적인 판본이다. 그들은 각자의 정신과 그것의 육체뿐만 아니라 성가신 일들 역시도 모방한다. 그런 식으로 영원히 성가신 일들이 자가-복제하며 증식하는 것이다.

   기획서가 지원 사업에 선정되었다면, 이제 아래의 항목들을 ‘유연하게’ 실행하면 된다. 일의 순서는 상관없지만 어떤 순서로 일이 일어나도 대처할 수 있도록 언제든 ‘깨어있을 것’을 권한다.

   2. 사람들을 만나기.
   3. 이메일 쓰기.
   4. 전화하기.
   5. 홍보하기.
   6. 실제로 ‘일’이 마감 기한에 맞추어 완성되도록 하기.
   7. 사례비 집행을 완료하고 정산 보고서 작성하기.
   8. 완전히 정신과 체력을 소진한 채로 두 번 다시 이런 헛짓거리를 하지 않겠다고 맹세하면서 다음 일을 구상하는 것을 자제하려고 애쓰기.
   9. 노후 대비하기.
   10. 노후 대비에 대해서는 잊어버리고 다음 기획서 준비하기.
   그리고 이런 1년짜리 ‘프로젝트’들과 무관하게 계속해서 존재하는 일들: 글을 읽고 글을 쓰고 남의 글을 고치는 일. 집세를 내고 이자를 내고 공과금을 내고 빚을 갚는 일. 논문 준비를 하는 일. 화분을 사고 친구를 초대하는 소박하고 작은 계획을 실행하는 일. 사람들과 더 가까이 더 깊이 친해지고 싶어 하는 동시에 그들을 질투하고 의심하는 일. 내가 살고 있는 동네와 내가 일하는 환경을 저주하고 혐오하는 일. 이 모든 총체로 말미암은 고통과 비참이 마치 나뿐만이 아니라 세계 전체가 겪고 있는 중대한 일인 양 착각하고 ‘긴급하게’ 글로 써서 모두에게 알려야 한다고 믿는 일.

   나는 개인적인 탈진에 대해 기록하기 위해 이 글을 시작했다. 그러나 시작하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만약 내가 정말로 탈진했다면……

   이제 나는 나의 쾌락이, 곧 성과에 대한 집착과 중독적 자기 착취를 재생산할 수밖에 없다는 비판에 아무런 이의 제기를 하지 않는다.

*


   나는 요 며칠간 계속해서 요한나 헤드바의 「아픈 여자 이론」의 마지막 문장을 떠올리고 있다.
   “왜냐하면, 만약 우리가 모두 아프게 되고, 그래서 침대에만 갇혀있게 되어서, 서로 위안을 나누고 치료 경험을 나누며, 지지그룹을 형성하고, 서로의 트라우마적 경험에 대해 증인이 되며, 우리의 아프고, 고통에 차 있으며, 비싸고, 민감하고, 환상적인 신체들에 대한 사랑과 보살핌을 가장 우선으로 여기게 된다면, 일하러 갈 사람은 아무도 남지 않게 될 것이므로, 아마도 그때가 되면, 그제서야, 자본주의는 그토록 필요했고, 오래 지체되었으며, 존나게 영광스러운 정지 motherfucking glorious halt로 인해 단말마를 지를 것이기 때문이다.”8)

   존나게 영광스러운 정지.
   나는 주머니 속에 작은 칼이라도 품은 것처럼 조심스럽게 그 말을 되뇐다. 원하면 언제든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처럼. 원하면 지금 끝장낼 수 있을 것처럼.

   끝이라는 말에는 보장된 달콤함이 있다. 끝이 있다면 우리는 참을 수 있는 데까지 참을 것이고 끝내 그것이 도래했을 때 기꺼이 삶의 고통과 수치, 모욕에 성스러운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회고할 것이다─그것은 내가 견딜만한 시련이었다고. 그리고 그 시련을 통해서 나는 더 강해졌노라고.

   문제는 대부분의 경우에 끝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의 상황은 소설이나 영화의 ‘다음 장면’처럼 상쾌하게 전환되지 않는다. 모든 것이 엿가락처럼 더 가늘게 늘어질 뿐, 끝만은 쉽게 나지 않는다. 우리의 한껏 위축된 삶의 시공간 속에서 파괴적 충동과 낙관적 희망은 (단지 우리 자신의 생존을 위해) 유순하게 변형되고 결합된 형태로 출현한다. 나는 지금 무슨 대단한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노동 착취에 대한 비판이나 우리의 사적이고 공적인 삶 전반을 지배하는 성적 차이와 다양성에 따른 폭력을 거시적으로 분석하려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이런 것이다. 나는 홈택스, 위택스, 이나라도움과 에스카스를 들락거리면서 다양한 방식으로 성가신 인증서를 설치하고 월별 보고서, 정산 보고서, 실행 보고서와 같은 행정 서식들을 작성할 때, 때로 머릿속에서 타닥거리는, 신경이 말 그대로 ‘끊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도무지 이런 일들이 왜 계속해서 벌어져야만 하는지 모르는 채로 기관과 은행을 들락거리면서 기계적으로 수십 개의 서명을 한다. 두 번 다시는 이런 일을 벌이지 않으리라고. 내 삶을 아주 미세한 단위로 조각내고 갉아먹는 ‘예술 사업’의 관료주의적 지리멸렬함에 질려 나는 이를 바득바득 간다. 그러나 나는 안다. 내가 얼마나 이런 일들로부터 나오는 돈푼어치들에 의존하는지, 그리고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이런 ‘예술-노동’이 이따금 얼마나 놀라운 통찰과 흥분을 제공하는지를. 이런 식으로 나는 그것들을 혐오하기도 전에 반사적으로 타협의 제스처를 취한다. 나는 민망한 소리를 해대고 악수를 청하면서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끝장’내는 일 없이 약속한 일을 해낼 것이다.

   헤드바는 우리 모두가 침대에만 갇혀 ‘사랑’과 ‘돌봄’을 나누고 그래서 아무도 일을 하지 않게 되면 자본주의가 정지할 거라고 말한다. 그러니 그렇게 해보자. 침대에 누워 서로를 돌보고 일을 하지 말아보자.

   그런데 그것이 어찌나 ‘존나게’ 힘이 드는지. 아무 일을 하지 않는 것이 어찌나 어려운지.

   케어 콜렉티브의 『돌봄 선언』에는 ‘난잡한promiscuity 돌봄의 윤리’가 등장한다. “‘돌봄’은 사회적 역량이자, 복지와 번영하는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을 보살피는 사회적 활동이다. 무엇보다도 돌봄을 중심에 놓는다는 것은 우리의 상호의존성interdependency을 인지하고 포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 인간, 비인간을 막론하고 모든 생명체 간에 이루어지는 모든 형태의 돌봄이 필요와 지속가능성에 따라 공평하게 그 가치를 인정받고 사용되어야 한다. 이것을 우리는 난잡한 돌봄의 윤리라고 부른다.”9) 이 난잡한 돌봄의 윤리는 더글라스 크림프의 에세이, “감염병의 시대에 우리의 문란한 사랑을 계속하는 법”10)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다. 그의 에세이에서 ‘세이프 섹스’는 게이(퀴어)들의 ‘난잡함’ 속에서만 이끌어내어질 수 있었던, ‘우리를 구원할’ 새로운 성적 실천이다. 마찬가지로 케어 콜렉티브 역시, ‘현재 기준에서는 실험적이고 확장적인 방식’으로, 그리고 차별 없는 방식으로 새로운 돌봄의 실천적 형식을 고안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것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가볍고 진정성 없는’ 돌봄은 아니어야 한다. 이는 다른 한편으로 말하자면, 자본주의적 상품 경제 속에서 돌봄이 또 하나의 ‘트렌드’가 되지 않는 한에서만 ‘난잡’하라는 이야기일 것이다. 이 어려운 자격 테스트 속에서 무엇이 ‘진정성 있는 난잡한 돌봄’이 될 수 있을까? 수사적인 질문이 아니다. 나는 ‘사랑’과 ‘돌봄’을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지 모른다. 나는 나 자신의 ‘문제’와 그에 수반되는 비생산성에 대한 자기혐오 때문에, 때로 부정성 그 자체인 ‘아픈’ 이들이 어떻게 서로를 돌볼 수 있는지를 모른다. 내가 아는 것은 ‘돌봄’이라기엔 사실상 한심한 오지랖, 실망과 분노, 의존 장애, 자살 예방과 신고와 같은 우스꽝스러운 경험들뿐이다. 누군가에게 ‘윤리’로서 제안하기에, 이런 경험들은 꽤 고통스럽고 끔찍하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나는 꼭 필요할 때가 아니라면 두 번 다시 누군가를 겨우 살려만 놓기 위해 그런 일들을 하고 싶지 않다. 어떻게 아픈 사람이 아픈 사람을 돌볼 수 있을까? 나는 나와 비슷하게 아픈 사람들과 함께 침대에 누워 서로를 돌보고 싶지 않다. 너무 많은 다른 사람들의 고통들. 나는 이런 광경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지쳐버렸다. 나는 혼자서 쉬고 싶다. 오랫동안 그저 지루하고만 싶다.

   이 많은 핑계들.
   누구도 돌보고 싶지 않아서 고안된 말장난들.

   내가 정말로 ‘영광스러운 정지’를 원하기는 하는 걸까?

이연숙

리타라는 닉네임으로 활동한다. 대중문화와 시각 예술에 대한 글을 쓰고 비교문학을 공부한다. 현재 기획/출판 콜렉티브 ‘아그라파 소사이어티’의 일원으로서 웹진 《세미나》를 발간하고 있다. 프로젝트 ‘OFF’라는 이름으로 페미니즘 강연과 비평을 공동 기획하고 있다. 블로그 http://blog.naver.com/hotleve를 운영한다.

2021/10/26
47호

1
멜리사 그레그, 그레고리 시그워스 외, 「잔혹한 낙관주의」, 『정동 이론』, 최성희 외 옮김, 갈무리, 2010, 2015쪽.
2
같은 책, 163쪽.
3
한병철, 『피로사회』, 김태환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2, 27쪽.
4
같은 책, 21쪽.
5
같은 책, 48쪽.
6
지인인 금개의 트위터에서 발췌했다. 원문은 “나의 문제점: 자꾸 해냄”이다. (링크)
7
허성원, 「남아있는 것들: 코로나19 바이러스 이후 디지털 세계의 일상 혹은 정치」, 웹진 세미나, 2021년 10월 07일 접속. (링크)
8
요한나 헤드바, 「아픈 여자 이론」, 허지우 옮김, 오프, 2021년 10월 7일 접속, (링크) (원문은 요한나 헤드바의 웹사이트에서 읽을 수 있다. (링크))
9
더 케어 컬렉티브, 『돌봄 선언』, 정소영 옮김, 니케북스, 2021, 17-18쪽.
10
더글러스 크림프, 「감염병의 시대에 우리의 문란한 사랑을 계속하는 법」, 『애도와 투쟁』, 김수연 옮김, 현실문화, 2021, 9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