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며: 앞으로의 길을 생각하며

   “난 이런 거 봐도 잘 몰라서……”
   엄마는 끝내 딸의 등단작을 다 읽지 않으셨다. 딸의 등단을 누구보다 기뻐하시면서도 언제나 반을 채 다 읽지 못하고 글을 뒤로 물리셨다. 원래도 책을 잘 읽지 않으셨을뿐더러, 이런 종류의 글은 엄마에게 더욱 어렵게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친구들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인문학 계열 전공자가 아닌 친구들은 물론이고, 함께 국어국문학을 전공한 동기들마저 시나 소설이라면 몰라도 비평은 어렵고 생소한 분야라 자신들은 읽어도 잘 모른다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그런 반응들에 대해 이제 와 서운했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다. 비평을 잘 쓰기 위해서는 당대 이슈들에 대한 지속적 검토 및 탐구와 꾸준한 공부를 통한 이론적 소양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에 나 또한 이견은 없다. 다만, 이러한 보편적인 인식이 비평과 일반 독자들 사이에 어떤 진입 장벽으로 작용하는 건 아닐지, 그리고 나의 내면에도 알게 모르게 비평에 대한 일반적이면서도 단편적인 인식이 자리 잡고 있지는 않은지 돌이켜보게 되었다.
   읽는 사람들만 읽는 상황이 지속되며 국내 문학비평계는 어느새 ‘그들만의 리그’가 되어버린 지 오래다. 문학 관련 전공생들에게도 진입 장벽이 높은 장르로서 비평은 웬만큼 공부하지 않고서는 ‘잘 모르는 것’이라는 인식이 만연하다. 문학이 누구나 향유할 수 있는 문화·예술이라고들 하지만, 실상 한국문학은 그 체제가 소수의 문단 세력을 중심으로 독점적, 폐쇄적으로 구축되고 유지되어 왔다. 생산자/창작자로서 작가(문단)와 수용자로서 독자(대중)가 엄밀히 구별되고, 문학의 가치를 평가하고 선별하는 작업은 전문 독자로 상정되는 비평가의 권한으로 주어졌다. 한국문학/문단 체제가 문학 산업을 독점 자본화하며 자신들의 권위를 공고히 하는 동안 일반 독자는 그로부터 점점 멀어지게 된 것이다. 최근 몇 년 사이 문학계에서 불거진 각종 사건과 논란들은 이러한 한국문학 체제의 고질적인 문제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런 국면 아래 국내 문학비평계의 분위기는 매년 위기라는 말로 표상되곤 한다. 근래에는 그간 비평이 제 기능을 다 하지 못한 것에 책임을 통감하며 오랜 기간 한국문학계에 고착된 관행들을 전면적으로 재검토하고 쇄신하고자 비평이란 무엇인가, 비평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한 논의가 대대적으로 이루어졌다. 이렇게 비평 자체에 대한 독자들의 믿음이 사라져가고, 비평을 포함한 한국문학이 퇴행하고 있다는 다수의 진단과 달리 전문 평론가(비평가)가 아닌 일반인의 특정 창작물(서사물)에 대해 분석과 논의가 활발해지고 있다. 개인이 개설한 해설 전문 유튜브 채널의 구독자 및 조회 수가 백만 단위를 웃도는 일은 부지기수고, 다양한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 문학, 영화, 미술(회화)뿐만 아니라 K-pop, 웹툰 등에까지 문단 바깥의 평론 영역은 계속해서 확대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비평/리뷰/감상 그리고 문학/기타 장르 사이에 존재하는 세부적인 차이들을 고려하지 않은 채, 위의 사례들을 모두 같은 선상에 두고 비교하는 일이 바람직하지만은 않다는 걸 잘 안다. 그럼에도 굳이 이러한 근래의 흐름을 복기해보는 것은, 어쩌면 이를 통해 해결책이나 대안까지는 아니더라도 지금 이 시점에서 비평이 나아가야 할 지향점을 희미하게나마 가늠해볼 수 있지는 않을까 하는 기대에서다.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창작물을 매개로 세상과 삶을 더 잘 이해하고 다양한 사람과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욕망이 있음에도 비평은 왜 계속해서 ‘잘 모르는 것’이 되고 마는 것일까. 전 지구적으로 매체 환경이 변했고 그에 따라 ‘읽기’ 행위에 대한 인식, 습속, 관심의 정도가 달라졌다. ‘읽기’ 가치의 위상 또한 전과 같이 않은데 빛바랜 개념과 틀로 비평의 위기를 진단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이미 오래전부터 문제시되었던 문학과 문단이라는 체제 내의 독점 권력과 긴밀히 결부되어 무기력하고 무능하다 혹평받은 비평은, 어떻게 그 고리를 끊어내고 읽기/쓰기를 비롯하여 인류의 삶 전체 풍광이 변해가는 현시점에서 비평의 자리를 새로이 구획해나갈 수 있을 것인가. 쉬이 단언할 수 없는 문제와 질문을 머금고 지금, 이 자리에서 감히 앞으로의 비평을 생각해보려 한다.

   2. 구획된 자리를 넘어


   흔히 비평의 위기를 진단하고 전망을 예견하는 논의는 비평의 ‘자리’를 묻는 것으로부터 시작되곤 한다. 이때 자리란 말 그대로 문학장 내 위치를 묻는 것일 수도 있고,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라는 연속된 연대기적 시간성 아래 비평의 존재 형식(양식)을 묻는 것일 수도 있다. 두 가지 중 어떤 것이든 비평이 무엇을 행해야 하고, 어디에 개입해야 하는지, 어떤 역할을 맡고 있는지, 그 존재 이유를 묻는 것이라는 사실만큼은 명확할 것이다. 그런데 비평의 ‘자리’를 물었을 때 그에 대한 답을 특정한 좌푯값으로 선명히 떠올리기란 힘든 일이다. 일반적으로 생산자/창작자로서의 작가와 수용자로서의 독자, 그리고 매개로서의 문학의 위치가 사뭇 자명하게 정해진 것과 달리 비평과 비평가의 위치는 창작자와 독자 사이에 위태롭게 걸쳐져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2015년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문학계 내/외부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태와 움직임들은 이러한 고정적으로 위치 지워진 문학계의 지형에 균열을 내는 일이었다. 당시 한국에서는 강남역 살인 사건과 함께 각종 분야에서 권력형 성폭력을 고발하는 목소리(미투 Me too 운동)가 터져나왔다. 문단 내에서도 성폭력을 고발하는 미투가 이어지고, 『82년생 김지영』(민음사, 2016)을 비롯한 다양한 페미니즘 서적들이 출간되기 시작하며 기존의 한국 문단을 구성하고 있는 체제뿐만 아니라 문학에 내재한 퇴행적 요소들을 전면적으로 재검토하고, 비판적으로 다시 읽고자 하는 비평적 흐름이 일반 독자층 사이에 형성되었다. 그동안 한국의 문학(적인 것)을 구성, 유지해온 체제 내 문제점과 한국문학이 젠더 차별 및 혐오 담론을 재생산, 정당화하는 데 어느 정도 복무해 왔다는 사실은 이미 1990년대 전후로 페미니즘 연구자들에 의해 꾸준히 지적, 비판되어온 것이었지만, 이러한 내부 사정과 전후 사정을 잘 알지 못하는 한국문학의 일반 독자들에게는 큰 충격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그것이 길든, 짧든 특정한 시기를 관할했던 시스템에 대한 쇄신과 변화가 요청된다는 것은, 더이상 그것의 가치가 유의미하지 않고, 지속될 수 없음(되어서는 안 됨)을 감지했기 때문이다. 변화의 한 축에 문학을 비롯하여 삶을 대하는 사회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감각, 시대적 감수성이 놓여 있었다면, 다른 한 축에는 문학에 관한 논의가 이루어지는 담론장의 이동이 놓여 있었다. 그간 문학에 관한 담론은 문예지와 전문성을 전제한 문학 관계자들 사이에 공유되던 것으로 보통은 문학계 내부의 이슈에 그쳤던 반면, 페미니즘 리부트를 계기로 한국문학의 문제점을 비판하는 논의가 온라인, 디지털 매체를 중심으로 다양한 일반 시민과 다중의 페미니스트를 통해 확산되었다. 페미니즘 도서의 인증 샷을 올리고, 해시태그를 덧붙여 미투 운동에 동참함으로써 논란이 된 사건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이들까지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고, 모습을 드러내며 당사자들과 연대하고 연루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이들은 그간 한국문학이 젠더 차별을 재생산, 정당화하는 담론으로 기능함으로써 문학이 ‘말하지 않았던’ 존재들인 동시에 소수의 ‘문단’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늘 수용자의 자리에 강제되어 ‘말할 자격을 갖지 못했던 자들이다. 구획된 자리를 벗어나 문학장을 점거/점령하기 시작한 이 불균질한 목소리들은 세대, 연령, 직업, 계층 등이 저마다 조금씩 다를지언정 ‘불안전함’과 ‘취약함’을 공통된 조건이자 감각으로 공유하며 새로운 독자-군중의 자리를 만들었다. 문학의 생산과 소비에서 언제나 종속적이고 수동적인 지위에 머물러야만 했던 이들이 능동적으로 발화하고, 상호 교섭하며 정치성을 실천/실행하고자 한 시도인 것이다. 또한 『82년생 김지영』을 읽고 그것을 단지 문학이라는 허구의 창작물/서사물로만 받아들이지 않고, 현재 한국 사회에서 여성이 처한 현실과 그리고 ‘나’의 이야기와도 다르지 않음을 읽어내고 ‘나도’ 그러했음을 말하게 된 경위는 문학을 통해 우리가 진정으로 읽어내야 할 삶이라는 텍스트가 무엇인지를 다시금 상기시켜 주었다.
   독자의 자리가 재편되며, 한국문학을 구성하던 지형이 위태로워진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인지도 모른다. 어떤 체제를 지탱하고 있는 꼭짓점 중 하나라도 지정된 자리를 이탈하게 되면 균형은 쉬이 무너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새롭게 영역을 확장해나가는 독자의 자리가 오랜 시간 동안 한국문학 체제에 누적된 부조리하고 불평등한 구조 자체에 균열을 내는 것이었다면, 오히려 이 문학/비평의 ‘위기’를 예견하는 담론은 여전히 기존 체제의 편향된 자리에서 바라본 시선의 결과인 것은 아닐까. 이미 문단 내부에 자리하고 있었기에 일반 독자의 자리를 넘어 문단에 들려오는 비판적 목소리가 위기로 느껴지는 것은 아닐까. 그런 점에서 비평의 기능과 어떤 비평이 쓰이고 읽혀야 하는지를 묻기에 앞서 위기를 논하는 이들이 체감하는 불안의 원인은 무엇이며 어디서 기원하는 것인지를 찾아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 비평이 직면해 있다는 위기를 반드시 극복해야만 하는 것일까.

   3. 비워진 자리


   신경숙 표절과 문단 권력론부터 문단 내 성폭력 해시태그/미투 운동을 거쳐 이상 문학상 사태와 사적 대화 무단 인용 논란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문단 내 이슈를 통해 우리가 마주하게 된 것은 일종의 ‘재현 장치’로서 가지는 문학의 무능과 퇴행이었다. 한국문학의 낡은 관행 및 악습과 부조리한 구조가 낱낱이 드러나고, 이에 대한 자성과 쇄신을 요구하는 목소리들이 문학계 내/외부 할 것 없이 등장하자 한국문학/비평은 이를 ‘위기’라 표명했다. 이때 무능하고 퇴행한 문학을 되살리고 새로운 문학의 가능성을 예측하는 책무는 비평(가)의 몫으로 주어졌다. 요컨대, “‘재현장치’로서 한국문학이 지니는 무능 혹은 기능 부전”1)에 이를 가능하게 한 한국문학의 퇴행적인 비평적 의제 또한 연관이 있으리라는 판단이 있었기 때문이다.
   필시 어떤 구조가 지속되기 위해서는 그러한 구조를 지탱할 수 있도록 하는 동력이 있기 마련이다. 텍스트에 대한 텍스트로서 태생적으로 문학이라는 텍스트에 기대어 이차적, 파생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문학)비평이 어떤 식으로든 한국문학의 퇴행 문제에서 그 책임을 회피할 수는 없었을 것이었다. 문학의 의미, 정의, 기능을 재조명하고 문학의 퇴행을 막지 못한 비평의 역할을 다시금 규명하는 작업이 대대적으로 이루어졌다. 매체 환경이 변화하고, 문학을 향유하는 데 있어서도 새로운 시대적 감수성으로의 전환이 불가피해진 시점에서 이미 시효가 만료한 기존의 읽기/쓰기의 방식을 어떻게 대체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는 것에 이견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위기의 극복이 다시금 어떤 체제를 형성하고 구축하는 방향으로 전개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드는 것 또한 사실이다. 아닌 게 아니라 실상 위기를 초래한 근본적 책임이나 원인에 대한 것보다 전에 없던 독자-군중의 출현으로 인해 흔들리고 균열이 생긴 시스템을 어떻게 다시 봉합할 수 있을(해야 할)지, 문학에 덧씌워진 오명을 벗길 수 있을지 타개책을 논의하는 일이 더 우선순위인 듯해 보이기 때문이다.
   ‘극복’이라는 말에는 어느 정도 ‘회복’이라는 의미가 함의되어 있다. 회복의 사전적 정의는 “‘원래’ 상태를 되찾는 것”이다. 그런데 애초, 이 위기라 부르는 것이 한국문학과 문단을 이루는 구조적, 제도적 문제와 문학이라는 예술이 가진 미학적 기능과 효과를 더이상 기대할 수 없는 임계의 상황에서 기인한 것을 감안한다면 훼손된 문학/비평의 가치와 의미를 복구하는 방법으로서 비평의 기능과 역할을 묻는 것은 모순적인 일이 아닐까. 문학의 효용 가치 자체를 부정하자는 말이 아니다. 현재 위기라는 말로 표명되는 상황을 반드시 전과 같은 위상을 되찾거나 어떤 자리를 마련하는 것으로 귀결시키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을까 질문하며 가능성을 남겨 놓아보자는 것이다.
   지난해, 이상문학상의 불공정성 논란에 대항하며 이루어진 윤이형 작가의 절필 선언과 연이은 작가들의 수상 거부 선언, 그리고 그 이후로 이어진 해당 출판사에 대한 여러 작가의 청탁 거부 운동에서 불완전하게나마 가능성을 엿보고자 한다. 작가란 으레 작품을 통해 사회에 질문을 던지고,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작년 1월, 이상문학상을 주관하는 출판사가 수상자(작가)에게 불공정 계약을 요구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윤이형 작가는 이상문학상을 반환하고 다시는 작품 활동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윤이형이 절필을 선언하게 된 데에는 이상문학상 사태가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그가 작가로서 문단에서 활동하는 동안 몸소 경험한 한국문학/문단의 구조적, 제도적 부조리 때문이었다. 이는 그가 작가로서 영구적 활동 중단을 표명하며 게시한 입장문에서도 알 수 있다.


   활동 중단을 결심하고 제게 있던 청탁들과 계약들을 취소하기 시작했습니다. 수치심과 자괴감을 견딜 수 없었고, 이제 더 이상 문학계에서 어떤 곳을 믿고 일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모르는 곳에서 우수상 작가들의 권리 침해가 일어났는데 저는 그 사실을 모른 채 거기에 일조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 지금까지 일을 해 오면서 저는 문학계에 지뢰처럼 깔려 있는 이와 같은 수많은 문제와 부패와 부조리들을 한 명의 작가가 제대로 다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열심히 일을 했을 뿐인데 계속 부조리에 얽히게 됩니다.
-윤이형의 입장문 중에서

   윤이형은 한 인터뷰에서 2016년을 “페미니즘 각성의 시기”2)라고 했다. 그리고 그는 한국 사회에 페미니즘 리부트를 촉발한 여러 사태를 겪은 이후, 여성을 비롯하여 한국 사회의 소수자 문제를 다루는 소설을 꾸준히 발표했다. 이는 그가 그동안 한국 사회의 다양한 구조적 문제들과 현실에 관심을 두고 있었으며 작품을 통해 비판적/비평적 문제의식을 관철해오던 작가 중 한 사람이었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가 이상문학상 사태를 계기로‘절필’을 선언하게 된 것은 아무리 한국 사회의 불평등한 구조 문제를 다룬 작품을 쓰고, 발표할지라도, 그가 결국 한국 문단이라는 거대한 체제/제도에 종속된 작가로서 작품 활동을 이어나가는 한, 어떤 방식으로든 “거기에 일조한 상황”을 겪게 되어버린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원하든, 원치 않든 “계속 부조리에 얽히게” 되는 한국문학과 문단 구조의 연쇄작용을 끊어내기 위해 필연적으로 기존의 제도를 반복하거나 답습하지 않는 방법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달리 말해 그가 영구적으로 활동을 중단하는, ‘쓰지 않기’라는 선택지를 택한 것은 강고하게 구축된 문학/문단의 제도의 고리를 끊어내고 바깥의 영역을 모색하기 위한 시도이자, 한국문학과 문단에 만연해 있던 부조리에 대한 비평적 사유를 실천한 것과 다름없었던 셈이다. 결과적으로 2020년 제44회 이상문학상의 수상자는 끝내 발표되지 않았다. 하지만 수상자들이 수상을 거부함으로써 생겨난 비워진 자리는 그 자체로 앞으로도 한국문학과 문단에 산적해 있던 부조리와 불평등을 드러내고 고발하는 비평적 텍스트로 읽히게 될 것이다.

   4. 재배열하기


   그런 점에서 현재 우리가 당면한 상황과 관계적인 맥락을 새로이 정립해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역사적으로 기존의 호명 체계가 포섭할 수 없는 무리/군중의 출현과 집단적 행동은 정제되지 않고 쉬이 다스려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불안과 공포를 조성하고 두려움의 대상이 되곤 했다. 다시 말해 어떤 체제란 “거기에 일조”하지 않는 다양한 존재와 목소리들을 잠재적 상태로 둠으로써 유지될 수 있었다는 말이다. 이는 지금껏 지켜져 온 한국문학/문단의 체제 역시 현재 문학계 내/외부 할 것 없이 분출되고 있는 비판/비평적 흐름을 통제하며 침묵시킴으로써 유지 가능했던 것이었는지 모른다는 말로도 해석된다. 그러니 이미 문학에 대한 물질적, 정서적, 인식론적 토대가 전방위적으로 흔들리고 변화하는 시점에서 구획된 자리를 넘나들고 제도/비제도의 경계를 허물며 수행되는 다양한 형태의 비평적 쓰기는, “공포를 자아내는 동시에 희망의 근원”3)이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애초에 기존의 문학이 다른 누군가를 배제하고 억압하고 희생시킴으로써 유지되어 온 것이라면 그러한 문학의 쇠퇴는 위기나 종말이 아니라 전과 다른 문학의 ‘단초’에 더 가까운 것일지 모른다. 그렇기에 지금 시도되어야 하는 것은 한국문학 내에 새로운 비평의 자리를 마련하는 게 아닌, 정해진 비평의 자리에서 이탈을 감행하는 일일 테다. 그리하여 삶 곳곳에서 발생하는 예측하지 못한 마주침/만남을 통해 우리는 더욱 새롭고 광범위한 논의를 이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5. 나가며: 다시 나의 자리로


   지난해 12월, 전화로 처음 등단 소식을 전해 듣던 당시의 기분을 아직 생생히 기억한다. 기쁨과 감사가 공존하는 가운데 어딘지 모르게 막막하고 두려운 감정이 들었다. 당선 소감에서 밝힌 바 있지만, 문학을 전공하면서도 문학평론가(비평가)의 자리가 ‘나의 몫’이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등단 이후로도 한동안 내가 평론가/비평가로서의 역할을 잘 해낼 수 있을지, 평론가/비평가라는 호칭에 부합하는 글을 쓸 수 있을지에 대한 걱정과 불안으로 잠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이처럼 등단이라는 기뻐 마땅한 소식을 듣고도 내가 불안과 두려움을 느끼고, 평론가/비평가의 ‘자리’와 그 몫을 다시금 가늠했던 것은 어쩌면 나 역시 문학장 안의 평론가/비평가를 전문가 혹은 권위자라는 특수한 자리에 올려놓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제법 호기롭고 장황하게 늘어놓긴 했지만, 사실 지금 ‘필요한’ 비평이란 무엇이고 어떤 것인지 여전히 자신 있게 말하기 어렵다. 무엇보다 뚜렷한 답이 정해져 있는 문제가 아니고, 뚜렷한 답을 내놓는다고 할지라도 그 답은 지금 내가 발 딛고 있는 이 시·공간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지점에서만 유효할 뿐, 그 자리에서 벗어나면 금세 그 유효성을 상실해버리게 되리라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지금’이라는 키워드와 ‘비평’을 나란히 놓아두고 이야기해야 한다면, 그것은 비평을 대하는 태도에 관한 문제가 될 것이다. 모두가 공감하고 공유할 만한 비평의 의미와 가치를 도출하는 건 쉽지 않지만, 적어도 ‘나의’ 비평은 ‘주관’이라는 변명에 기대어 얼마간 말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다.
   2000년대 이후로 진행된 매체 기반의 변화와 종류의 다양화는 디지털 시대 이전 한정적 자원이었던 ‘지면(紙面)’의 확장을 촉발했다. 그 결과, 비록 전문 평론가/비평가가 아니더라도 각종 미디어 플랫폼을 통해 누구나 언제든 담론 생산의 현장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전문적 주체에 한해서만 비평이 이루어지던(용납되었던) 과거와 달리 다종다양한 주체들이 담론장에 출현하여 누구나 자유롭게 의견을 주고받을 수 있다는 점은 충분히 고무적이라 할 만하다. 하지만 누구나 담론을 생산할 수 있게 되면서 오히려 무분별한 말들 역시 전과 비교했을 때 폭발적으로 증가했다는 점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여전히 소수자와 약자를 향한 혐오 표현이 횡행하고, 페미니즘을 곡해하는 담론들이 생성되고 있다. 비단 문학계뿐만 아니라 정치권, 언론까지 합세하여 백래시가 이루어지고 있는 지금, 진정 우리가 고려해야 할 것은 비평의 자격이나 역할 다음으로 어떤 ‘말’들을 비평으로 간주할 것인가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이 말의 합당성을 묻기 위해 다시금 자리의 문제로 되돌아가는 것은 어쩌면 너무도 당연하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 함께 발 디디고 있는 여러 존재를 인식하고 공통의 감각을 공유하는 것이 곧, 다른 누군가를 억압하고 배제하지 않는 일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다른 누구의 자리도 아닌, 나의 자리로부터 시작되는 글을 적어나가고자 조심스레 다짐해본다. ‘지금’이 아니면, 그리고 ‘여기’가 아니면 안 되는 말들을 말이다.

강희정

처음 시작하던 때의 마음을 잊지 않고자 합니다.

2021/10/26
47호

1
백지은, 「한사코 문학-‘K문학’ 유감」, 『건너는 걸음』, 민음사, 2021, 44쪽
2
신준봉, 〈차갑고 나쁘고 무섭고… 위험한 소설 써보고 싶다〉, 중앙선데이, 2019년 9월 19일 기사. (링크))
3
주디스 버틀러, 『연대하는 신체들과 거리의 정치』, 창비, 2020, 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