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누군가 묻혀 있군. 이것이 건축이다.”1)


   
1. 건축

   어느 글이 그렇지 않겠냐마는 그래도 두고두고 아쉬움을 감출 수 없는 글이 하나 있다. 그 아쉬움은 아주 구체적이고 확실한 것으로 새로운 글을 쓸 때마다 불현듯 떠올라 정신을 괴롭힌다. 지난해 봄에 썼던 조해진의 단편집 『환한 숨』(문학과지성사, 2021)에 관한 비평이다.2) 조해진은 서사 단락을 명확히 나눌 수 있을 만큼 입체적이고 탄탄한 구성의 소설을 쓴다. 나는 그 구조를 두고 ‘소설의 랑그’라고 말하며 크고 작은 사건들이 어떻게 서사를 유기적으로 생성해나가는지 밝히고자 했다. 그 랑그의 ‘뼈’들로 지은 ‘집’이 바로 작가의 소설 세계라고 말이다. 나는 그 집이 ‘조립’된다고 적었으나 조립이 아니라 ‘건축’이라고 했어야 적확한 표현이라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작은 개체 단위의 구조적인 완성을 뜻하는 조립은 그의 소설이 갖는 생동과 서사적 장악력을 담지 못한다. 문학적 세계는 정해진 매뉴얼에 따라 조립되는 단일한 구성물이 아니라 건축가 고유의 미학과 철학으로 건설되는 살아 있는 건축물이다.

   그렇다면 모든 작가는 건축가다. 지나가는 차와 행인들이 현실의 형이하학적 환경 구성물이라면 우리가 읽는 시와 소설은 형이상의 차원에서, 그러니까 마음과 정신의 층위에서 우리의 생태를 구성한다. 『도시가스』의 배관들이 만드는 격자의 맞은 편에는 비명을 지르며 공전하는 두 개의 행성─김혜순의 『지구가 죽으면 달은 누굴 돌지?』가 있다. 이수명의 건축이 지상으로부터 무언가를 계속해서 쌓아올리는 상승의 건축술이라면 김혜순의 건축술은 파괴를 향한 하강의 건축술이다.3) 소설이 독자의 의식을 깨워 그들을 새로운 세계의 빛 속으로 데려갈 때, 시는 독자의 무의식을 붙잡아 의식의 불빛이 가려둔 어둠 속으로 데려간다. 어둠 속에서 이수명은 배관으로 만든 미로를, 김혜순은 도살장을 만든다. 도시의 범속한 장소들 속에 자리한 두 건축물은 아돌프 로스의 말처럼 과연, 모두 죽음을 품고 있다.


   
2. 미로 제작자의 역설

   예술이라는 형식의 메타적 구조물, 그것의 핵심으로서 건축이 있다면 삶이라는 형식을 가능하게 하는 핵심은 죽음이다. 건물은 죽음 충동을 안고 있다. 가령, 무덤은 죽음의 자리를 가리는 덮개다.4) 상승과 하강의 건축술은 그 죽음 충동에 대하여 각기 반비례적인 유형력을 행사한다. 상승의 건축은 죽음을 덮고 가린다. 이런 식이다. 「무단결석」을 한 ‘나’는 아침에 느지막이 일어나 물을 마시고 담배도 한 대 피워물고 “오늘 무엇을 원하는지 생각해보다가 (…) 비행기 시간을 검색해보다가/출발하는 것이 싫어 아무 곳도 가고 싶지 않다”고 정리한다. 피로와 권태 사이에서 갈등하던 그가 가까스로 마련한 최후의 선택지는 겨우 지렁이 한 마리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다.

   최근에 발견한 지렁이에게
   같이 죽자고 말하는 대신 그래도 잘 지낸다고
   말하는 게 좋겠지
─「무단결석」 부분.

   작은 생물체에게 말을 건네는 상황의 다정한 표면에는 머뭇거림과 망설임이 정갈하게 나타나 있지만 사실 그는 그냥 죽어버리고 싶을 따름이다. 오래된 침전물 같은 그의 피로는 여름에도 계속된다. (「주기적 여름의 교체」) 그는 급기야 죽은 자들을 본다. 해가 멈춰버린 것 같은 뙤약볕의 한낮에서 지체하고 있다. 그는 계속해서 걸어갔다고 진술하지만 건물 유리에 붙잡혀 빙빙 도는 사람들의 그것처럼 제자리걸음이다. 『도시가스』에서 제때 빠르게 교체되는 것은 가스관뿐만이 아니라 주방의 타일(「무단결석」)과 건물의 창유리, 그리고 계절(「주기적 여름의 교체」)까지다. 불안한 세계가 그나마 겉으로는 괜찮아 보일 수 있는 이유는 그가 부품들을 계속 최신형으로 갈아 끼우기 때문이다. (“모든 제품이 최신형이고 다 좋다고 한다.”(13쪽)) 부품이 고장 나서 혹은 낡아서 바꾼다는 대목은 어디에도 없다. 교체는 필요에 의한 행위가 아니라 무기력의 극단에서 소진된 화자가 그를 타개하기 위해 부러 시도하는 최대치의 능동-자발적 행위다. 그렇게 만들어진 건물의 벽은 시간의 진행과 부패로부터 공간을 단단히 막아낸다. 일반적으로 건물에 새겨진 시간의 흔적은 부품의 노후와 파인 곳, 먼지, 부식 등을 통해 드러나기 마련이지만 연이어 교체되는 부품에 의해 늘 ‘최신’인 공간은 건물의 시원과 축적된 시간의 부피감, 역사를 말끔하게 청소해버린다.

   반짝거리는 파사드(facade) 앞에 선 화자는 매 순간 새로고침 되는 시간의 현재형에 의해 창고 안에 꼼짝없이 갇힌다. 이 밀폐는 부품의 교체와 마찬가지로 누구의 강제도 권유도 없는 자발적인 선택에 의한 것이다. (“그는 창고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물류창고」 20-21쪽) 현재의 시간은 극한의 무기력을 어떻게든 없는 것으로 치부해보려는 화자를 창고 안에 걸어잠근다. (“나는 발끝으로 서 있다 시간은 어디로 간 것일까 아침에는 아침을 먹고 점심에는 점심을 저녁에는 저녁을 먹었는데 (…) 시간을 빼앗겼어” 「물류창고」 28-29쪽) 탈진의 감각을 다른 것으로 전환해내기 위해 부품을 교체하던 ‘나’는 그만 현재 속에 유폐되고 만다. 그러나 그가 정말로 교체해야 할 것은 타일이나 유리 따위가 아니라 ‘시계’─일상의 배치이지만, 삶의 시계에 손댈 수 없는 그는 그가 일으킬 수 있는 최선의 변화인 부품 교체를 꾸준히 도모해보는 것이다. 자기 안에서 낡고 닳아가는 마음을 어찌할 수 없을 때 바깥의 풍경을 바꾸어보는 일, 마치 소진과 피로, 죽음 충동이 실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외관을 만드는 일 말이다. 그래서 화자의 시야에 죽은 이들이 빈번하게 출몰하지만 그의 정신은 멀쩡하다. (“여기에 죽은 사람들이 있다 (…) 죽음에 계속 머물러 있는 사람들이 있다 같은 죽음에 아랑곳하지 않고” 「운동을 시작해볼까요」) 가스관들로 밀폐된 이 세계에서 죽음은, 어제가 오늘이 되고 그 오늘이 내일을 담보하는 시간의 불가항력적 흐름 속에서 가스처럼 투명하게 억압된다.

   현재에 밀봉된 화자에게 들리는 것은 오직 자신의 목소리뿐이다. 수평선과 수직선으로 구획된 도시는 가로와 세로 사이로 비집고 나오는 이질적인 목소리들을 차단한다. (“수직으로 수평으로 가스관은 대열을 이루어 기어가고 있다./기계적으로 충돌하지 않고/외벽을 덮고 있다.” 「가스관」) 모서리와 모서리가 끝없이 연결되는 도시의 마감은 타자들의 울퉁불퉁한 요철들을 덮어 평평하고 깨끗하게 만든다. 빈틈없이 채워지고 이어진 도시의 배치는 거대한 일자의 목소리다. 등장하는 ‘너’와 타자들은 무음 속에서 그저 관찰될 뿐 ‘나’에게 말을 건네거나 다가오지 않(못)는다. 건물의 작은 부품들처럼 일상의 시간을 구성하는 타자들은 발언권이 없으므로 ‘나’의 시간을 변형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계속해서 동일성의 배관을 쌓아올릴 수 있다. (이수명의 가스관은 지하가 아니라 지상으로 드러나 있다.) 온갖 물질과 오염의 위험을 내포한 타자들의 실존에도 불구하고 도시는 ‘나’에게 자기동일성의 깔끔한 폐제로 현상된다. 죽음이 도래하지 않도록 이수명의 화자들은 이미 죽은 척한다.5) 창고에 갇혀서, 거리를 지나다니는 망자들을 조용히 목격하며, 지렁이를 보기 위해 쭈그려 앉으면서, ‘나’의 시간을 침범하고 흠집낼 수 있는 타자들의 손길과 먼지들을 청소하면서.

   이수명의 이러한 날들은 그러나 근원적인 허무로 곧장 이어지지 않는다. 시공간의 계속적인 갱신은 오히려 그에 대한 방어술이다. 그는 그를 엄습한 무(無)를 그의 무(無)로 막아내는 중인 셈이다. 시집의 해설을 쓴 강동호는 이수명의 시에 두 개의 무(無)가 중첩되어 있다고 말하는데 하나는 ‘있음’에 대한 이항 대립적 ‘없음’, 다른 하나는 그로 인해 무엇으로도 환원할 수 없게 되는 공백으로서의 ‘없음’이다.6) 후자의 ‘없음’을 소진된 인간으로서의 이수명의 시적 주체들이 발휘하는 모종의 전략을 통해 발견해낸, 모든 존재가 평등해지는 공백의 지평이라고 해석한다. 그는 이 능동성에 거의 주목하지 않았지만, 이 ‘없음’의 사태가 주체에게 일방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 좀더 주목해야 한다. 『도시가스』에 만연한 무의 가스는 세계가 ‘나’에게 퍼붓는 것이 아니라 ‘나’가 세계를 향해 끊임없이 분사하는 자기방어의 물질이다.

    이수명의 시적 주체들은 고의적으로 무를 만들고 쌓고 축성한다. ‘없음’의 공백에는 어떤 의미도 첨가되어 있지 않으므로 역설적으로 그 없음을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있음이 아니라 없음으로 맞설 수 있다. 있음은 언제나 없음의 포획에 의해 패배하므로. 도처에 깔린 실패와 취소, 유보, 포기의 감각은 화자가 만든 미로 속에서 발생하는 가스다. 질서 정연하게 배열된 가로와 세로가 자아내는 청결함의 미학은 우울의 감정을 정돈한다. 게다가 단단하고 매끈한 유리 상자 같은 세계에서 발화하는 주체는 오직 ‘나’뿐이지 않던가. 『도시가스』의 입 다문 타자들은 ‘나’의 인칭을 무화시키는 데까지 나아간다.7) 1인칭은 2인칭과 3인칭의 이웃 속에서만 자리를 얻는다. 인칭을 소거해 버릴 만큼의 무(無)는 죽음을 막아내기 위해서 발휘된 것이었음을 잊지 말자. 최신의 현재 속에 웅크리고 있기를 자처하는 주체는 그러니 동시대의 시간에 끼인 존재8)에 머물지 않는, 일부러 끝없이 현재를 현상하고 또 현상하는 미로 제작자다. 현재라는 동시대성이 화자를 찌그러뜨리는 것이 아니라 화자가 현상(develop)해내는 현재성이 과잉인 것이다.

   동시대성이라는 단어가 ‘동시’의 시간성에 머무르지 않고 동‘시대’의 역사적 조건으로까지 나아간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동시대성은 과거와 현재 미래의 혼종된 층위들로 구성된다. 시대를 살아가는 다양한 세대와 정체성의 주체들이 저마다 내포한 각자의 시간성이 뒤섞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체의 동시대성이 세계의 현재에 수동적으로 붙들려 있다기보다 역으로, 이수명의 시가 동시대성을 순수한 현재로 증류해내려는 능동적인 현상(phenomena)으로 해석할 수 있겠다. 주체가 현상해낸 현재에는 어떤 식으로든 과거와 미래가 묻어 있다. 과거와 미래는 현재의 준-현재(quasi-present)다.9) 그가 끊임없이 쌓아올리는 현재는 과거와 미래를 부러 망각하고 유예하는 무(無)의 방법론이다. 과거와 미래는 현재 속에서 응결되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준-현실로서 가스관 속에 봉인되어 있을 따름이다. 말하자면 그가 처한 “영원한 현재”(124쪽)는 주체를 압박하는 주변 조건이 아니라 주체가 건설해낸 방어용 건축물, 미로다. 바타유는 글 「미로」(1936)에서 미로 체험을 통해 존재들 사이의 유동적 관계를 밝힌다.10) 바타유에게 미로는 그 안에서 유동하는 인간 존재와 그들의 고정 불가능한 삶을 표현하는 구조물이다. 인칭과 시간성이 ‘나’와 ‘현재’ 안에 유보되어 있다 할지라도 자기동일성 역시 차이와 구별의 배치 안에서 유효하다. 『도시가스』의 현재적 세계는 역설적으로 그 동일성의 구축 안에서 자기성의 일부, 권태와 무력을 상실하기를 도모하는 셈이다.11) 그래서 이수명의 주체들은 미로를 건설하고 그 안에서 문을 걸어잠근다. 그에게 미로는 탈출하기 위한 반(反)-현실이 아니라 죽음과 무의미를 밀어내고 매장하는 헤테로토피아(heterotopie)적 장소다.

   ‘없음’에 맞서는 이러한 자기 상실의 도모는 낭비라는 구체적인 행위로 드러난다. 『도시가스』에서 무(無)는 무(daikon)의 낭비를 통해 일상에서 조금씩 그러나 꾸준히 축출되고 있다. 무는 트럭에서 마트로, 집으로, 그리고 화자의 유리병 안으로 조용히 유통된다. 우리는 화자의 집으로 도착한 “박스 안의 무와 동시에 무無를 본다.”12) (「도시가스」 40쪽, 「도시가스」 46쪽) 이때의 낭비, 도처에서 등장하는 무는 사용 가치를 초월한 잉여적 행위다. 바타유의 카니발이 낭비를 통해 세속의 금기를 위반하고 넘어서는 것처럼 이수명은 낭비, 의미의 의도적 상실(無)을 과잉되게 쌓아올림으로써 매끈한 표면을 만든다. 노후의 흔적이 없어도 최신으로 교체되는 부품들, 시의 모든 행에 걸쳐 가스 검침을 할 수 없다고 의사를 표명하면서 그 이유가 단지 무를 사고 손질해야 한다는 몹시 사소한 명분에 그치고 마는 것─이는 거부나 저항이 아니라 문제적 사태를 철저히 막아내려는 방어다.13) 위기를 해결할 수 없다면 그것이 더는 위기가 아니도록 상황의 뾰족한 요철을 마모해 평평하게 지워버리는 것도 방법일 테다. 이수명의 화자들은 삶에 닥친 극한의 피로와 죽음 충동이라는 사태 앞에서 무표정으로 이렇게 무를 낭비하며 짐짓 능청을 떨어보는 것이다. 정갈하고 깔끔해 보이는 그의 일상은 우울과 불안, 공포를 봉제선(seamless)으로 기워서 보이지 않는 가스관 속으로 매장한 외양 위에서 만들어진다. 가스관의 수평과 수직으로 이루어진 이 표면의 미로, 자신이 만든 건축물 속에서 이수명의 주체들은 고의로 스스로를 봉인하며 삶의 무(無)를 되받아친다.

   미로 안을 배회하는 ‘나’의 운동은 이러한 역설의 건축술 속에서 계속적으로 지양(aufheben)된다. 그 양상은 정적 속의 역동(「정적이 흐른다」)이면서 동시에 역동 속의 정적(「완전한 나무」)이다. 앞의 시를 먼저 보자. 가장 고요한 정적 속에서 가장 열정적인 고뇌가 꿈틀거린다. 「정적이 흐른다」에서 화자는 더 좋은 글을 쓰는 것은 이미 글렀다며 더 나은 글의 탄생에 관한 가능성을 애써 붙들려 하지 않는다. “새로움은 죽음을 이어가는 것인가”는 말은 그 회의가 고도로 농축된 탄식이면서 그러나 동시에 이 “빛바랜 일”의 이어지는 정적을 뒤집는 변곡점이다. 죽음 뒤에 오는 것이 또다른 죽음이 아니라 새로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어지는 시행은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생략된 산문적인 펼쳐짐이 된다. (“글을 이어간다. 글을 쏟아낸다. 글을 덧붙인다. (…) 빛의 산만한 이데올로기가 따뜻하다.” 「정적이 흐른다」) 물론 세계는 바뀌지 않고 가망 없는 글과 정적은 시간 속에서 계속되지만 ‘나’는 고요와 더불어 빛의 이데올로기를 충분히 감각하기도 한다. 빛바랜 것과 따스하게 발산하는 빛, 두 빛의 역설이 정적 안에 내재한다. 빛이 충돌하며 생성하는 역설의 운동 에너지가 이 한 문장의 변곡점을 지나며 순간적으로 폭발하고 스러진다. 그리하여 허무와 죽음의 기호들로 점철된 일상이라 하더라도 완전한 무(無)로의 도달은 불가능한 것이 된다. 빛의 이데올로기가 있는 한 절대-무(無)는 없다(無).

   만약 이러한 무무(無無)의 옆에 나무 한 그루가 있다면 그때의 나무는 아무(anyone, 나+無14))인 것일까? 이희우의 해석대로 「완전한 나무들」은 『도시가스』의 정적 속에서 예외적으로 유표적인 운동성을 보이는 시다. “언덕이 솟”고 날이 “활활 타오르고” “지난날의 나무들이 뛰어다니”는 요란한 세계다. 그런데 이러한 역동의 연속 안에 단단한 정적이 앉아 있다. 시에서 나무의 완전함은 더이상의 성장이 불필요한 상태에 이르렀음을 알리는 표상이다. 스스로를 쪼개고 쪼개는 세포 분열의 일시 정지 상태는 무기력으로 이어지고, 그러므로 나무(‘나’)가 서 있는 것은 자신에게 내리는 모종의 처벌이 된다. 나무가 ‘아무’(=나(我)+무(無))일 때 자아를 소거하고 그곳에 무(無)를 채워넣는다는 해석도 물론 가능하지만15) 앞에서 본 무(無)의 낭비와 무(無)를 쌓아올리는 건축술을 염두에 둔다면, 역설적으로 자아(我)는 없음(無)으로 채워(+)지는 사태에 이른다. 나무는 과연 불교의 4법인, 그중에서도 특히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 일체개고(一切皆苦)의 세계관에 기대고 있는 듯하다. 모든 것은 변화하는 운동 중이며 따라서 고정된 나의 본질이란 실상 없는 것이지만 ‘나’는 그러한 변화의 흐름 속에 녹아들지 못하고 미로 안에 웅크리고 앉아 자아의 안정을 고집하려 하니 불안과 괴로움에 시달리는 것이다. 이수명의 시적 주체가 죽음의 냄새를 풍기는 세계 속에 힘겹게 발 딛고 있는 것은 맞지만 그는 일상에서 지속적인 무의 낭비를 통해 “세계와 공통되는 중”에 있다. 그러니까, 그가 겉으로 내보이는 허무나 무기력은 일체개고의 세계에 맞서 끊임없는 무의 유통, 정리, 손질─생성을 통해 역설적으로 죽음을 의식의 표면 아래로 봉합한 행위의 결과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현실의 죽음 충동을 완전히 외면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기존 논의들이 입을 모아 말하는 것과 달리 이수명의 무(無)는 보편적이지 않다. 무를 더는 무가 아니게 하는 무(daikon and 無)는 정적 속에서 역동을, 역동 속에서 정적을 창조하는 미로 제작자의 특별한 건축술이다.


   
3. 모래 인간의 도살장

   나무 아래에는 팔 벌리고 서 있는 ‘나’ 말고도 다른 이들이 있다. (“나무 아래로 환자복을 입은 환자들이 여럿 앉아 있고/한 환자는 처음 듣는 노래를 부른다.” 「도시가스」 33쪽) 노래하는 이가 등장하자 세계는 갑자기 그로테스크하게 변한다. 그의 입에서 모래가 줄줄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모래 때문에 말을 멈추었지 너의 입에서 모래가 흘러나왔지” 「근린공원」) 뜨악스러운 이 모래가 무엇이냐 물으니 그는 친절하게 답해준다.

   모래는 전체다. 갑자기 집 앞에 나타난
   뾰족한 전체다.
   모래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호루라기를 불며 신호를 보낸다.

─「아파트 공사장」 부분.

   이수명의 주체들이 삶에 닥친 위기의 뾰족한 요철을 사포질하여 갈아버렸던 것을 기억하는가? 모래는 그 마모의 결정들이다. 날카로운 전체를 갈아서 기울기를 평평하게 만들어 평면으로 만들 수 있을지언정 그것들의 원자는 사라지지 않고 잔존한다. 요컨대 모래는 미로의 지하 물질이다. 이제 우리는 미로의 매끈하고 깨끗한 표면으로부터 아래의 거칠고 성긴, 끈적하고 악취 나는 어두운 공간으로, 텁텁한 모래 알갱이들이 가득한 더러운 바닥으로 내려간다. 김혜순의 『지구가 죽으면 달은 누굴 돌지?』는 죽음이 살고 죽느라 내지르는 비명으로 가득한 도살장이다. 지구가 죽고 달이 방황하는 이 우주에는 언제나 모래비가 내리고 있다. (“모래비를 묵묵히 맞고 있는 수성 금성 화성 지구 내 형제자매들” 「서울식 우주」) 그래서 『지구는 죽으면 달은 누굴 돌지?』의 3부는 온통 모래에 관한 것이다. 시인의 말을 빌려오더라도 그렇다. (“엄마, 이 시집은 읽지 마, 다 모래야.” (서문)) 시집 전체를 덮고 있는 모래는 아픈 인간의 신체가 분비하는 가장 작은 단위의 입자, 또는 신체적 통증 속에서 고통받는 인간의 몸 그 자체다. 한편, 김혜순의 모래가 아파듐 암석에서 기원한다는 사실이 지난 9월 밝혀졌다.


   나는 세상에 없는 암석을 발명했다
   나는 그것을 아파듐이라 부르기로 했다
   아파듐 암석은 공중에 떠 있다

   (…)

   녹는점 1554.9℃, 끓는점 2,963℃, 밀도 12.023g/cm³이라고 칭했다

   (…)

   나다, 나란 말이다

   아파듐 암석이 이제 내 대가리 위 공중에 박힌
   나 태어나기 전 거주지 행성의 흔적이라면
   내 악몽의 용질이라면

   아파듐 암석이 자마놈 용매를 만나면

   72시간 눈 감지 못한 불면의 끝에서
   나는 저절로 몸이 가려운 유령이 된다고 했다

─「아파듐」 부분.16)


   말놀이(소리은유)의 대가인17) 김혜순이 발견한 암석 아파듐은 통각의 광물, 그리고 그 암석을 용해하는 자마놈은 잠의 용매다. “악몽의 용질”이자 종말의 예언을 퍼붓는 아파듐은 통증 물질이다. 삼일 밤낮을 잠들지 못하고 유령이 되게 하는 이것은 지구에 속한 물질이 아니다. 지구의 몸에 아파듐이 불시착해서 작용하게 되면 고통이라는 이상 반응을 일으킨다. 조물주를 비난하면서 악다구니를 놀리는 ‘나’는 이를 갈며 바로 이 고통이 죽음에 다름 아니라고 소리 지른다. (“끝이란 건 이런 거다”) 아파듐의 모래는 인간의 몸을 조각내는 면역계 외부의 침입자이면서 동시에 통증에 지배당한 인간 신체를 구성하는 세포다. 그러므로 이 세계의 인간은 모래 인간이다. (“젖은 모래 한 자루는 걷습니다” 「포츠다머 플라츠」) 인간은 극심한 통증의 끝에서 모래로 해체되지만 존재의 의식과 언어는 불사한다. 모래로 변한 인간이 목도하는 몸과 주변 세계의 변화는 그와 상담자가 벌이는 심리 상담 극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상담자 F: 모래인은 너와 나의 구분이 없다

      너는 내 모든 구멍으로 들어와서 내가 된다
      나는 네 모든 구멍으로 들어와서 네가 된다

   내담자 H: 모래인은 엄마아빠와 자식의 구분이 없다

   상담자 F: 모래인은 미래와 과거가 섞인 채 탄생한다
      모래인은 탄생하고 거듭 탄생한다

(…)

   상담자 F: 모래인은 크기로 그 사람을 가늠하지 않는다
      모래인은 색깔로 그 사람을 가늠하지 않는다

   내담자 H: 아빠가 죽으면 아빠가 오고, 영원히 아빠가 오고
      엄마가 죽으면 엄마가 오고, 영원히 엄마가 온다

─「Yellowsand          
Blackletter          
Whitebooks」 중 *모래인 (부분).

   내담자의 경험을 객관의 언어로 기록하는 상담자의 말은 주관적 현실을 묘사하는 내담자의 말과 짝을 이룬다. 예컨대, “모래인은 너와 나의 구분이 없다”는 상담자의 말은 “너는 내 모든 구멍으로 들어와서 내가 된다”는 내담자의 노에시스(noesis)를 노에마(noema)로 옮겨둔 것이다. 부모 자식 간의 구별이 없다는 4행의 말은 자식의 과거인 부모와, 부모의 미래인 자식 사이의 구분이 없다는 뜻, 말하자면 “탄생하고 거듭 탄생하는” 모래인은 과거와 미래가 뒤섞인 영원한 현재의 시간 속에 있다는 의미다. 김혜순의 현재는 항상적인 고통의 상황이다. 부모가 죽으면 영원히 부모가 다시 온다는 마지막 행은 단지 모순의 인과율이 아니라 통각의 고문 속에서 끔찍하게 현전하는 진실이다. 이수명의 현재가 그러하였듯 김혜순의 현재 또한 준-현재의 양태로 살아 있는 과거와 미래가 중첩된 퇴적층이다. 현재라는 동시대성의 시제는 과거와 미래로부터 잘린 절단면이 아니라 그것들의 혼합 물질이다. 김혜순의 죽음은 과거의 무덤에 묻히지 않고 부모와의 탯줄을 통해 영원히 현재형으로 삶 속에 살아 있게 된다. 김혜순의 우주는 죽음이 살아가는 세계다. 삶이라는 기표의 기의는 곧 죽음이다.

   그런 연유로 이곳에서의 죽음은 끝없이 죽임을 당하는 처지다. 지구의 죽음은 달의 악몽이며 동시에 그것은 모래 인간의 악몽이기도 하다. (“달은 지구의 지층을 벗겨낸 사막의 악몽/달은 나의 악몽을 담당하고 있구나” 「종 속 과 목 강 문 계 역」) 태양은 지구의 살갗을 벗겨내고도 무자비하게 제 존재를 이어나간다. (“태양은 지구의 껍데기를 벗기고, 다시 벗기고/태양은 너의 계속을 담당하고 있구나”) 존재의 계통을 내림차순으로 번역하는 시의 제목과는 반비례의 관계로, 고통의 계통은 태양에서 지구로, 지구에서 달로, 그리고 모래로 분화한다. 지구가 아픈 몸이라면 남아 있는 달은 갈 곳을 잃은 병과 통증이고, 지구가 준-현재의 시제 속으로 스러진 부모라면 달은 남겨진 현재의 자식이다. 그러므로 지구의 사망 이후에도 계속되는 달의 공전은 통각의 무한한 운동이다. (“하늘도 무심하지 불쌍한 모래야/죽었는데 죽지 못하는구나 모래야” 219-220쪽) 지구의 죽음을 막아보려고 죽음을 죽이고 또 죽이지만 모래가 되고도 죽지 못하는 김혜순의 현재는 계속해서 흐르는 모래시계 안에 머물러 있다.

   죽음만이 살아 있는 현재는 무참히 죽음을 도살하면 도살할수록 고통이 배가 되는 악순환에 놓여 있다. 죽일 때마다 새롭게 태어나는 죽음이 트라우마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상담자 F와 내담자 H는 사막을 건너온 사람들처럼 허옇게 갈라진, 입술. (…) 우리는 지금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다.” 「사막의 숙주」) 회복과 치유의 기미가 조금도 없는 이곳에서 발설되는 모든 언어는 그러므로 가장 피 흘리는, 갓 태어난 새된 비명이다.

   김혜순도 이수명처럼 무를 숭덩숭덩 썬다. 그에게 무(無)는 부재다. 이때 부재는 건강한 ‘나’의 없음이다. 극심한 통증에 만성적으로 시달리는 이에게 외부 세계는 물리적 유무와 상관없이 객관적으로 현상되지 않는다. 그는 3인칭 타자들의 세계를 볼 수 없다. 같은 장소를 손상이나 이상이 생긴 몸으로 다시 경험할 때 과거에 그곳에서 형성되었던 공간 감각은 부재한다. 고통을 유발하는 신경 전달 물질이나 호르몬, 전기 신호들이 활성화된 신체는 자아가 알던 그간의 ‘나’를 그의 몸으로부터 축출한다. 그때부터 몸의 주인은 ‘나’가 아니라 통증이다. 그러니 통증은 ‘나’의 부재다.

   ‘나’의 주인은 ‘나’를 상실한 ‘나’다. ‘나’는 환자다. 오랫동안 큰 고통에 시달려온 ‘나’는 ‘너’를 아프게 하고 심지어 사라지게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너’에게도 신체가 고통에 잠식당해 모든 선택과 자율을 잃어버리는 경험이 있고 (2연) ‘너’ 역시 그러한 환자의 상태로라면 “나의 온전함을 다치게 할 수도 있”다. 그래서 완전무결한 ‘너’가 아니라 아픈 ‘내’가 ‘나’를 지켜야 한다. 이때 ‘나’를 지키는 ‘나’ 역시도 아픈 와중에 있기에 아픈 ‘나’는 역설적으로 ‘나’에게 약이 된다. 헌데 주위를 아무리 둘러봐도 고통뿐인 이곳에서 ‘약’은 없는 것 같다. ‘없는 것’이 약이라면 약의 반대는 ‘있는 것’인가? 부재가 약(medication)이라면 실존은 악(toxic)인가? 이러한 시적 논리 속에서 2연의 마지막 행은 다음과 같이 번역된다: “실존은 무(無)가 하나도 없는 것인가.” 답변은 이내 도착한다. 아니오. “우리는 부재로 가득찬 세상을 살아”(231쪽)가고 “부재가 지구 생태계의 균형을 맞추고 (…) 부재하는 것이 없다면 아무도 살아 있지 않”(231쪽)게 된다. 김혜순의 부재-무(無)는 건강하고 통일된 자아가 부재하는 통증의 제국주의를 뜻하기도 하고, 또는 실존을 형성하는 아이러니한 죽음을 뜻하기도 한다. 부재를 마구 펼치고 써내는 시인 덕에 지구와 달은 무로 범람한다.

   무의 탄생은 두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네 번의 살인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엄마는 아이를 죽이고, 태어나지 않은 아이도 죽이고, 딸도 엄마를 죽이고, 그리고 태어나지 않은 엄마도 죽인다. 김혜순에게 딸은 엄마와의 강한 자기동일성 속의 존재이므로18) (“모래로 일어선 내 몸은 점들로 그려진 몸처럼/어느 것이 엄마 몸인지 어느 것이 내 몸인지/누가 누구를 임신한 것인지 가를 수 없었다” 「내세의 마이크」) 엄마를 죽이는 것은 곧 자기 자신을 죽이는 일이기도 한데, 주목할 점은 이것이 죽음에 대항한 자기 구원의 아이러니로 나아간다는 점이다. 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죽이는 행위는 죽음을 사전에 미리 죽여버림으로써 존재를 죽음으로부터 비켜서게 하는 무시무시한 전략이다. (“상상 속의 딸에게 중얼거리는 습관/태어나지 않았으니 얼마나 다행이야” 「아파의 가계」)

   「먼동이 튼다」에서 태반을 매개로 엄마와 아이 사이에 공유되는 것은 죽음이다. 뱃속에 잉태된 것이 죽음이므로 ‘나’(아이) 역시 죽음이고, 나아가 아직 도래하지 않은 것으로서의 죽음이 된다. 괄호 안에 들어간 목소리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의 것으로 아이는 엄마의 과거와 미래를 이미 모두 알고 있다. 엄마와 아이의 시간은 서로를 순환할 뿐만 아니라 동일성의 차원에서 폐제되어 있다. 객관의 현실 그리고 외부 세계와의 단절은 고통에 완전히 잠식된 세계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는 엄마의 고통을 미리 바라본다. 그리고 절규한다. “도대체 하나님,/이 병실을 보세요. 우리가 무엇을 그리 잘못했습니까?”(89쪽) 아이는 엄마에게 그 고통을 모두 삼켜버리라고, 그리하여 이 무한정 계속되는 고통의 세계에서 함께 해방되자고 외친다. 그러기 위해서 저를 죽이라 고래고래 소리 지른다. (“나는 마치 자궁 속에 밀폐된 아기가 제 엄마의 목소리를 듣고 있는 것처럼 영사기 속에서,//엄마 삼켜! 엄마 삼켜!” 「민들레의 흰 머리칼」)

   엄마가 죽은 후에도 아이는 엄마의 죽음을 계속해서 죽인다. (“네가 버리지 못한 너를 마저 버린다. 버린다. 버린다. 버린다. 버린다.” 「빈집의 아보카도」) 죽음을 죽이는 이 행위는 아이가 엄마가 되어 그녀의 아이를 죽이는 행위로 환치된다. 아이는 엄마가 저지른 영아 살해의 공범이다. 아이가 태어나지 못하도록 죽이는 것은 그 아이가 겪게될 죽음과 고통을 미리 차단하는 일, 죽음을 다시 한번 죽이는 일이다. 이미 도착한 죽음(과거)과 예정된 죽음(미래)의 도살은 현재의 동일성을 무한히 토막내는 일이다. 김혜순의 시적 주체에게 있어 그 동일성은 삶의 얼굴 위로 제 몸을 포갠 포악한 통증과 질병, 고통이 난무하는 활력의 죽음이다.

   「체세포복제배아」에서 탄생은 두 타자의 결합으로 만들어진 수정란에 의해서가 아니라 ‘나’의 체세포 복제에 의해 재생산된다. 생식 세포가 아니라 체세포를 그대로 복사한 것이므로 유전자 정보 역시 동일하다. ‘배아’라는 타자는 체세포의 주체와 동일한 자기(self)가 된다. ‘나’의 알은 엄마의 바느질에서 나온 것이다. (“그 바느질 땀 하나를 고이 안아 눈먼 새처럼 품어/잠잘 때도 쉬지 않고 흥얼거렸더니/몇 달 만에 흐릿한 알 같은 것으로 자라났다.” (35쪽)) 고통의 잉태는 동일자의 문법 속에서 증식한다. 엄마의 바느질은 그녀가 산 자도, 온전히 죽은 자도 아닌 그 사이에서 압착된 영원히 고통받는 존재자로서 죽음과 사투를 벌이는 방식이다. (“엄마는 병원에 누워서도 가방을 만들었다. (…) 이 세상은 거대한 병원이라고 한다.” (33쪽)) 통증에게 고문당하던 엄마는 급기야 자기가 만든 가방 속으로 도망친다. 바느질은 엄마의 몸에 밀어닥치는 통증의 불길을 봉합하려는 계책이다. 고통의 밀봉은 외부 세계의 시선에서는 그것의 소거처럼 보일 수 있겠으나 그것을 감각하는 주체에게 밀봉은 오히려 밀집이 된다. 가방 안에 들어감으로써 사라지는 것은 다만 아픈 주체의 얼굴일 뿐, 아픔 자체는 오히려 가방이라는 협소한 장소 안에서 더욱 증폭된다. (“가방에 얼굴을 넣고 아 아 아 아 하자 한참 있다가/아 아 아 아 메아리가 돌아왔다.” (34쪽)) 그래서 실상 이 세계의 모든 단어와 문장의 모음은 아픈 이가 영원토록 내지르는 절규와 비명의 ‘ㅏ’이다. (“한 음절로 치환되었는데 그것은/아마도 자음을 버린 모음 한 개였다”, 「모음의 이중생활」)

   「엄마 on 엄마 off」는 엄마의 바느질이 통증과 죽음으로부터 달아나기 위한 발악임을 서슬 퍼런 목소리로 드러낸다.19) 바늘로 뜨개질을 할 수도 있지만 상처를 꿰맬 수도 있다. 고통을 어떻게든 봉합하려는 엄마의 모든 시도는 처참한 실패로 끝난다. 그녀가 휘두른 바늘 끝에서는 치유와 평화가 아니라 “털실로 짠 냄비”와 “털실로 짠 가위”, “털실 주전자”들이 태어난다.20) 털실로 된 주방 도구들이라니. 오랫동안 극심한 고통에 아파하는 자의 생활은 말 그대로 파탄이다. 끝없이 태어나는 실패를 목도하면서도 엄마가 바느질을 멈추지 않는 것은 그것이 지닌 구체적인 행위의 실감 때문이리라. 그러면 “불안감을 재울 수 있었다고/엄마는 회상했다”(14쪽). 하지만 닥쳐오는 끝장을 막을 수는 없다. 김혜순이 죽음을 죽여가며 마주하는 것은 죽음에 붙어 있는 고통-부재(無)가 인간 삶의 절대 군주라는 뼈아픈 진실이다.21) 부패하고 문드러지고 피 흘리는 육체의 삶에 스며든 죽음을 제 손으로 움켜쥐는 시인은 단어들의 단정한 배열이 아니라 어지러운 비유와 뒤틀린 통사 구조를 무기로 삼아 가까스로, 죽음과 한치의 간격도 허하지 않으면서 공격적으로 대치한다. (「형용사의 영지」, 「진저리 치는 해변」)

*

   이수명의 시적 주체가 지상의 미로 속에서 낭비된 무(無)들 사이를 다소 울적하게 소요하며 자아의 회복을 그러모으는 동안 김혜순의 지하 도살장에서 자아는 계속해서 찢어진다. 그 살육은 인간의 수명이 지속되는 한 결코 완전히 성취될 수 없기에 삶 속에서 언제나 현재 진행형으로 잔인하게 이어진다. 고통과 통증에 괴로워하며 몸부림치는 달의 괴성이 가스관에서 반향되며 지구의 무수한 밤낮을 채운다. 이수명의 건축이 자아의 동일성을 회복하려는 몸짓으로서 주체의 고유한 무라면 김혜순의 건축은 엄마와 딸의 동일자적 연속체 안에서 고통과 부재, 죽음으로 이어지는 무를 해체하는 하강의 건축이다.

   바타유의 ‘반-건축’의 쓰기는 기존의 합리성과 일자적 세계의 동일성을 무너뜨리고자 한다. 이수명과 김혜순이 이러한 ‘반-건축’을 도모하는 것은 시가 로고스와의 합일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로고스를 해체하고 언표 불가능한 것들을 어떻게든 언어로 건져올리려는 절박함의 포에지(poesie)이기 때문이다. 건축이 문학과 예술 일반의 은유로 기능하도록 하는 토대는 공간과 장소의 공백이 그것의 물리학적 설계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이데올로기로 채워진다는 진실이다.22) 이수명의 닫힌 미로와 김혜순의 죽음이 비명을 지르는 도살장 모두, 삶 속에 공기처럼 자욱한 죽음에 맞서는 시들의 비장한 건축이다. 죽음을 낭비하거나 혹은 그것을 무참히 토막 내면서 우리는 각자만의 방식으로, 고통과 함께한다.

전승민

비평은 발신을 의무로 하는 수신이다. 아름다운 수사는 비평의 손톱쯤 된다. 꾸미기 나름이며 언뜻 내보일 수도 있겠지만 손톱으로 무언가를 그러쥘 수는 없다. 비평은 일반 독자(common reader)의 활동이며 그래서 그는 문학 속에서 삶을 갱신할 수 있다. 최근 이미상의 첫 소설집 『이중작가초롱』의 해설을 쓰고 많은 힘을 얻었다.

2022/11/29
60호

1
Loos, Adolf. “Arichitecture,” Ornament and Crime, 1910.
2
전승민, 「기화된 파롤의 자리에서 숨 쉬기」, 《문학과사회》, 2021년 여름호, 316쪽.
3
생성·상승하는 건설을 위한 쓰기가 아니라 해체와 파괴를 위한 하강의 글쓰기를 지향한 이로는 바타유가 있다. 올리에는 바타유의 그러한 건축적 기획을 두고 ‘반건축’(反建築), 무너뜨리기 위한 건축이라고 명명한다. 드니 올리에, 『반건축: 조르주 바타유의 사상과 글쓰기)』, 배영달·강혁 옮김, 열화당, 2022.
4
드니 올리에, 위의 책, 91-92쪽.
5
“우리는 죽음이 오지 않도록 죽은 체한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도록, 시간이 머물 자리를 얻지 못하도록 그렇게 한다.” 드니 올리에, 앞의 책, 92쪽.
6
강동호, 「무의 광장」, 이수명 『도시가스』 해설, 문학과지성사, 2022, 150-151쪽.
7
이희우 역시 『도시가스』의 인물들이 비인칭적이라고 읽지만 그가 말하는 것처럼 이수명의 화자들이 과연 “고유성의 완전한 상실”(270쪽)에 도달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이수명의 시적 주체는 “무기력, 자살 충동, 우울감”에 대하여 현재를 무한히 현상하며 방어한다. 이희우, 「나의 우울과 나무의 기쁨」, 《문학과사회》 2022년 여름호.
8
강동호는 시적 주체가 처한 시간성이 과거-현재-미래가 무차별해지는 현재라고 보며 시적 주체는 그 현재의 시간 속에 압도적으로 갇혀 있다고 본다. 위의 글, 124-126쪽.
9
“우리가 과거 지향과 미래 지향의 생생한 경험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일련의 완결된 사건들을 밟아간다는 생각도 할 수 없을 것이다.” 폴 리쾨르, 『시간과 이야기3─이야기된 시간』, 김한식 옮김, 문학과지성사, 2004, 210-211쪽.
10
드니 올리에, 앞의 책에서 재인용, 145쪽.
11
“그들이 도달하는 동일성[은] 자기성의 상실을 내포[한다.]” 드니 올리에, 앞의 책, 146쪽.
12
강동호, 앞의 글, 149쪽.
13
이희우는 사태를 지연시키기만 하는 화자들의 몸짓이 바틀비의 저항보다 훨씬 연약한 종류의 것이라고 읽지만 그러나 그 꾸물거림은 오히려 역설적인 단호함일 수 있다. 이희우, 앞의 글, 269쪽.
14
이희우는 시적 주체들이 보이는 운동성의 표상인 ‘나무’가 ‘나+무(無)’라고 해석한다. ‘나무’가 ‘나’가 무(無)의 빈 공간을 통과하는 순간으로 주체가 발휘한 역능의 결과라고 한다. (273쪽) 그는 통일된 자아와 세계의 의미가 거대한 허구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는 시적 주체의 운동을 ‘나무의 자전’이라고 읽는다. (277쪽) 이희우, 앞의 글.
15
이희우, 앞의 글, 275-276쪽.
16
김혜순, 「아파듐」, 웹진 『비유』 57호 (2022.9) (링크)
17
권혁웅은 해설 「단 한 편의 시」에서 기표로 한번 말하고 기의로 다시 한번 더 말하는 김혜순의 말놀이를 소리은유라고 말한다. “소리은유는 기표 차원에서 서사를 추동하는 주요 인자다.” 김혜순, 『피어라 돼지』, 문학과지성사, 2016, 222-223쪽.
18
모성을 중심어로 이 시집을 읽은 성현아는 엄마와 아이의 관계를 분리된 타자의 관계로 읽는다. ‘모래’로 인해 타자들의 신체적 경계는 불분명해지지만 “타자로서 서로를 출산하는 행위”(323쪽)는 두 타자 간에 공유되는 ‘엄마 되기’의 수행이다. 성현아, 「시는 엄마한다」, 《문학과사회》 2022년 가을호, 314쪽.
19
성현아는 엄마의 ‘바느질’이 대상과 직접 감응하는 공평한 삶의 태도라고 해석하며 나아가 이러한 태도를 모성의 개념으로 확장하여 ‘엄마 하기’를 “누구든 타자와 진정으로 조우하기 위[한]” 수행이라고 읽는다. 성현아, 앞의 글. 성현아, 앞의 글, 314쪽.
20
더불어 그는 털실로 된 사물들이 “생기를 지닌 존재로 거듭난다”고 하며 “엄마의 뜨개질로 인해 사물들이 인간이 부여한 기능에서 벗어나” 오히려 그들의 본질에 가까워지는 활력의 상황이라고 읽는다. 성현아, 앞의 글, 313-314쪽.
21
해설을 쓴 박준상은 김혜순의 ‘죽음’이 “삶이 여분 없이 완전히 배제된 절대 타자”이며 “모든 언어의 절대 타자로서의 침묵의 영역”에 있다고 말한다. 박준상, 해설 「모래바람」, 김혜순, 『지구가 죽으면 달은 누굴 돌지?』, 문학과지성사, 2022, 269쪽.
22
■이태원 참사로 돌아가신 분들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