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서는 김유담 「특별재난지역」, 「돌보는 마음」, 『돌보는 마음』, 민음사, 2022. 성해나 「언두」, 『빛을 걷으면 빛』, 문학동네, 2022의 ‘할머니’들을 이야기한다.
나는 김유담의 이 작품집에 대해 지붕 아래서 과감히 그 연쇄의 매듭을 끊는 여성들을, 성해나의 소설에 대해 마치 바틀비의 저 선언처럼 그것을 하지 않는 것을 하는(I would prefer not to) 여성 청년의 결단에 대해 쓴 바 있다. 이 글에서 새삼 다시 이 소설들을 다루는 이유는, ‘할머니’들을 나 역시 프레임 밖에 세워두었다는 생각 때문이다. 여기에서는 그들을 프레임 안으로 불러들여 말해보려 한다. 「집의 레짐, 고르디아스의 매듭 풀기」, 《불교문예》, 2022 여름호. 「패러디라는 세계와 조수들」, 《문학과사회》, 2022 가을호

   1. 한없이 불투명에 가까운 돌봄

   
돌보다: 동사. 관심을 가지고 보살피다.
돌봄: 명사. 건강 여부를 막론하고 건강한 생활을 유지, 증진하고 건강 회복을 돕는 일.

   동사의 본분에 충실한 이 기본형 단어는 그 대상이 애정을 쏟는 물건일 수도 있겠지만 대체로 생명을 가진 사람, 동물, 식물 등속으로 근거리에서의 바라봄, 만짐을 비롯한 부딪는 행위들이 부착되는 몸의 단어다. 그것이 노동과 결합할 때 언뜻 인식의 범주에 포착되지 않았던 것은 사회의 정의가 돌봄을 그림자로 삭제해 왔던 것 외에도 그것이 가장 연약한 사람들의 몫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부드러운 노동은 주로 어머니라는 이름의 가족-내-여성의 전유물로 가부장제는 정의 내려왔고 사회적 업무로서의 돌봄 노동은 저임금 노동으로 이주 여성이나 ‘스펙’이 취약한 여성에 의해 이루어져 왔기에 전적으로 타인의 목소리를 경유하는 식으로만 공론화될 수 있었다. 그러잖아도 문제적으로 공론화의 장에 나와 있던 이 단어를 수면 위로 불쑥 밀어올린 것은 누구도 아닌 코로나라는 바이러스다.
   코로나로 인해 개인에 부쳐지는 돌봄 노동이 쉽게 과부하에 이른 것은 그것이 이미 만조에 닿아 있었기 때문이다. 간병 살인, 영유아 학대, 아사에 이르는 방치와 같은 것들은 이 사회의 위험 인자를 제대로 관리하지 않은 데서 오는 예정된 수순인 셈이다. 그런 ‘리스크(risk)’는 위험사회(울리히 벡)에서 제대로 관리할 때에만 안전한 삶이 보장되는 인자, 위험 인자를 일컫는다. 달리 말해 리스크는 우리 사회의 구성물인 셈이다. 1990년대에서 2000년대에 이르는 한국 사회의 온갖 붕괴와 침몰의 경험은 물리적인 표본들을 위험 인자로 진단해왔으나 이제 그 내부적 요인들, 비물질적인 것으로 리스크는 이전된다. 그런 의미에서 돌봄은 충분히 우리 사회 리스크라고 말할 수 있다. 저 잔혹한 가족 살해의 제출 앞에 망연한 것은 그런 사건들이 단독으로 성립된 ‘우발적, 계획적’ 하는 식으로는 결코 수식될 수 없는 집요한 고통의 굴레를 전담하는 개인들의 (어쩌면 최초일) ‘선택’이라는 파국적 결말이기 때문이다. 누가 저들을 살해하(도록 했)는가?
   값싼 돌봄 노동력의 사용은 유아동의 물리적 정서적 학대 및 영양의 불충분한 공급 등으로 문제시되는 한편으로 부적절한 보수와 강도 높은 노동에 대한 책임을 비전문 양육자의 몫으로 지운다. 특히, 간병 살인, 살해 후 자살 등이 노인과 노인 간의 간병, 노인이 중증 장애 가족을 돌보는 경우에 더욱 가시화되는 것을 본다면, 그것이 가정 내 문제로 들어온다는 것이 경제적, 사회적 단절과 나란히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런 돌봄의 화두에서 종종 간과되는 것은 돌봄이 몸에 의한 노동이자 실천이라는 점이다. 생활의 편의를 위한 일부 가사 돌봄을 제외하고, 돌봄은 행위를 받는 대상자가 스스로 몸이나 주변을 관리하기 어려운 형편이라는 점에서 돌봄 행위자와의 사이에 일차적 몸의 단절을 유발한다. 따라서 타인의 몸(혹은 역할)을 일부 또는 전유하는 식으로 대신하는 이 서비스 노동은 몸의 주체를 벗어나는 노동이라는 점에서 이차 단절로 이어진다. 그것은 마치 하나의 몸을 둘이 나누어 쓰는 형국이라 대상자 쪽으로 몸의 사용이 옮겨갈 때 몸은 정작 본래의 자리를 떠나기 때문이다. 이런 노동의 특질은 몸이 각자에게 개별성으로 존재한다는 보편을 넘으면서 발생하는 단절, 즉 소통 불가능성에 닿는다. 한편 이런 돌봄은 요청자의 측면에서는 필수적이고 간절하기 마련이다. 그럴 때 돌봄은 의학적 행위의 명사인데, 저 산뜻한 명사형조차 실제 행위에 비해서는 너무도 추상적일뿐더러 실질적인 돌봄의 범위나 폭 등을 양적 질적으로 축소하는 식으로 간단하고 쉽게 뭉뚱그린다. 생각보다 우리의 생은 저 근대의 개인주의가 내세우는 것처럼 그리 홀로 우뚝 서 있지 않다.
   몸의 단절은 육체적 의미뿐 아니라 노동이 이루어지는 장소의 특수성으로 인해 다시금 작동한다. 돌봄 노동의 장이 주로 ‘보이지 않는’ 곳이라는 점은 이 노동을 폄하하는 조건으로 작용하기도 하는 것이다. 돌봄이 요청되는 곳이 병실 커튼 뒤의 침대이거나 손에 잡히는 것은 족족 입으로 집어넣는 유아가 기는 어떤 집의 거실, 타인의 그늘진 주방 등 감추고 싶거나 애초에 ‘남’의 사적 공간이라는 점에서 노동의 전문성은 종종 기각된다. 폄하는 호칭에서도 드러나는데, 일례로 가사도우미, 재가 요양 보호사와 같은 명칭이 부여되었지만 이 호칭들이 ‘아줌마’ ‘이모님’ ‘여사님’ 등을 대체하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인다. 가사도우미를 ‘도우미님’과 같이 부르는 것은 아무래도 이상하다. 호명을 고려하지 않은 직업 명칭의 부여는 결국 대면하는 사람들의 몫으로 문제를 선회시킨다. 그러면서 경제 주체인 실사업주들에 의해 호칭들이 개발되고 있는 실정이다.1)

   돌봄은 이렇게 숱한 단절이 중첩된 노동인데, 노동의 정당성 앞에서도 그것은 반복적으로 단절 당한다. 자본의 투여라는 생산을 위한 노동력의 물질화는 재생산 노동의 중핵 앞에서 간단히 가족-내-여성을 호출해버림으로써 임금, 노동과 휴식 시간의 보장, 상해와 재해, 은퇴 등의 문제를 묵살하고 ‘집으로’ 돌려보낸다. 그런 와중에 코로나의 장기화는 경제 주체를 불능으로 만들면서 일하는 여성을 가정 내로 불러들이거나 또 하나의 대체 요법으로 ‘할머니’들을 호출하는 것이다.
   할머니의 호출은 주로 당사자의 ‘거부 불가능성’으로 인해 무람없이 행해지는데, 이른바 ‘황혼 육아’와 같은 용어들은 갈등과 난처함이 뒤엉킨 채로 우리 주변에 떠다닌다. 그럼에도 이런 문제는 해결보다는 감염 사회의 대안으로 활용되고 있는 느낌마저 든다. 이런 노년 여성들의 돌봄 노동을 나는 ‘프레임 밖의 노동’으로 이름 붙여본다. 어떤 것이 말해지기 위해서는 발화 주체로의 기회를 확보하고 획득하는 것이 우선이다. 이런 여성들은 문학적 재현으로도 아직 다양화되지 못했는데, 특히 근자의 작품들은 여성 청년의 대리적 표상들이 주도하고 있어 이들 작품에서 노년의 여성들은 상대적으로 축소된다. 이렇게 돌봄을 둘러싼 인식적 사회적 정의, 문학적 재현과 같은 문제들은 당사자성과 결별하며 한없이 불투명한 채로 남아있게 된다.

   2. 거부하거나 독박하거나

   샬럿 퍼킨스 길먼의 단편들에는 이런 여성들이 나온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어머니의 거취를 두고 서로 얼굴을 붉히면서도 유산 승계를 위해 어머니를 모시겠다는 자녀들 앞에서 지금까지의 생활, 자녀들이 설계하는 삶과 결별을 선언하는 맥퍼슨 부인(「어머니의 힘」)이나, 추수감사절을 맞아 어머니를 각자의 집으로 초청하면서 큰 집을 정리하고 들어와 자신들에게 재산과 함께 몸을 의탁하라는 자녀들의 셈과 재혼을 바라는 마음으로 경제적으로 이 여성이 의존하게끔 돈을 빌려주는 남자의 속셈 앞에서 여성 클럽하우스를 건립하는 활동력으로 당당히 맞서는 모리슨 부인(「세 번의 추수감사절」)에게서 공통적으로 강조되는 것은 몸의 건강과 경제적 자립이다.
   길먼의 소설로부터 백 년을 달려왔지만 우리 주변에서 돌봄을 거부하는 예는 그리 많지 않고,2) 사업이 어렵다는 아들에게 집을 팔아 돈을 쥐여주고 자신을 의탁하는 형식을 취하는 사례는 드물지 않다. 한국 사회가 유달리 혈연을 끈적하게 여기는 것도, 대가족 형태를 벗은 지 얼마 안 된 가족 형태에 따른 감각적 지형도가 작용함도 사실이다. 그런 사정에 더해 반복되는 경제적 타격은 어떻게라도 ‘가족끼리’ 도와 이 난국을 타개해야 한다는 마부작침으로 이어진다. 이런 가족주의의 바탕에는 ‘할머니’들의 그런 기꺼움이 있는 것이다. 때때로 저 고단함의 고리를 끊고 싶지만 그제서 이들에겐 오히려 돌봄을 요청해야 할 쇠약한 몸과 바닥난 통장만이 남았을 뿐이다.
   「특별재난지역」의 일남은 청도에서 남편과 살고 있다. 요양원에 모신 치매 아버지의 ‘보호자 노릇’3)을 하고 있는 일남은 매주 주말 아버지에게 갖가지 보양식을 해 나른다. 보호자라는 말은 보호할 대상, 즉 의사소통, 운동 능력, 생활 능력 등에서 도움을 요청하는 돌봄 받는 이로부터 파생된다. 그런 의미에서 일남은 가영의 보호자이기도 한데, 공시생 아들 상진이 동거녀와의 사이에서 낳은 가영의 돌봄은 고스란히 일남의 차지가 되었다. 그러니까 일남은 노인(환자) 돌봄과 가사 돌봄, 육아까지 모조리 해내고 있는 것이다. 일남은 먹성 좋은 가영을 최선을 다해 먹이고 남편의 찬을 따로 마련하고 아버지의 보양식을 해대며 그것만이 마치 이 세상에 온 이유이기라도 한 듯 부엌일을 한다.
   이 글의 인물들은 하나같이 문제적인데, 우선 가영의 조부는 코로나로 손님도 없는 자전거포에 매일 나가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다. 그래, 그게 고전적인 성실함일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소설 속에서 그는 장인에게 지키지 못할 나들이 약속이나 하고 가영에게 미소로만 화답하는, 그러면서도 일남에게는 반찬 타박을 하고 요리하는 일남에게 신발장 정리를 하지 않는다고 나무라는 ‘입만 산’ 인물이다. 두 아이의 엄마인 딸 상희는 최근 심리 상담을 받는다며 일남과 의식적으로 거리 두기를 하는 중이다. 그건 일남의 아들 상진에 대한 유별나게 차별적인 사랑이 심리 문제로 남아서다. 그런 두 사람은 계속 거리를 벌리는데, 상처 때문에라도 상희는 가영의 문제를 애초에 자신과 결부하지 않는다. 그의 입장이란 것은 “가영이한테 신경 좀 써요”라는 말 정도로만 표명된다.
   여기서 가장 난감한 인물은 일남이다. 상희에게 마스크를 구해달라고 부탁하면서도 말이 곱지 않다. 30대 중반 여전히 공시생 신분인 아들에게는 공부에 방해될까 아무 말도 못하는 일남의 저 태도에는 아무래도 동의가 어렵다. 가영의 엄마가 아이를 데려갈까 두려우면서도 아이를 보러 오지 않는 것은 원망스럽고, 그러면서도 상진의 새출발을 위해서는 애초에 만남을 근절하는 게 좋다고 여기는 일남의 마음을 소위 부모의 마음이라는 식으로 포장한다면 너무도 염치가 없어진다. 적어도 그런 마음이 유독 아들에게만 비추어지는 것은, 일남이 가부장제 굴레의 희생양이면서 대리인, 계승자로서 열 살부터 이 집의 ‘엄마’ 역할을 해왔다는 사실과도 무관하지 않다. 엄마가 산후풍으로 죽자 아버지는 밖에서 여자를 만날지언정 재혼하지 않았다며 일남은 그런 아버지를 한편으로 가엽고 미안하고 심지어 고맙게 여긴다! 코-호스트 격리 조치로 아버지에게 식사를 전달하지 못하자 그는 죄의식에 몸서리친다. 그러던 차에 아흔둘의 아버지는 죽음을 맞고 코로나로 인해 성대한 장례식을 치를 수 없어 일남은 속상하다. 아버지의 마지막을 화려하게 치장하고 싶은 마음 이면에는 많은 사람을 불러들여 그 모든 돌봄에 대한 공치사를 듣고 싶은 바람이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장례는 더없이 조촐하게 진행되고, 일남의 기꺼운 희생에도 가영은 학습 부진과 정서적 결핍, 과체중과 성조숙증 등의 문제를 겪고 급기야 디지털 성범죄의 표적이 되기까지 한다.4) 파렴치한 범죄 앞에서 일남이 할 수 있는 일은 기껏해야 전화번호를 바꾸는 일뿐이다. 개인이 몸으로 ‘독박한’ 돌봄은 결국 한없이 허약한 것이며, 취약성의 사회란 다시 부서져 내리면서 그 자체 위험을 함의하는 위험 사회로 변질된다.

   3. 프레임 밖의 노동

   성해나의 소설 「언두」의 농인 할머니는 사고로 부모를 잃은 어린 도호를 도맡아 길러낸 인물이다. 몇 명의 친척들이 있었지만 그를 받아들이는 집은 없었고, 할머니는 재혼을 포기하면서까지 그의 보호자가 되었다. 듣지 못하는 할머니는 봉제 기술자로 일하며 도호를 키웠고, 극심한 노동 끝에 제대로 볼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어느 모로 보아도 이제는 도호가 할머니의 눈과 귀가 될 수순임을 예고하고 있었다. 도호는 데이팅 앱으로 만난 유수에게 쉽게 자신의 내부를 공개한다. 그리고 그는 취업과 동시에 은근슬쩍 자신의 돌봄을 유수에게 이전한다. 돌봄의 주체라는 자리 대신 새로운 세계로의 도피는 전혀 계획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그의 은밀한 욕망은 그런 식으로 유출되고 만다. 그런 상황에서 유수가 그의 할머니를 전적으로 돌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돌봄 이전의 파기라는 유수의 선택은 여전히 합당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전에 내가 미처 짚어보지 못한 것은 할머니의 심정 같은 것이다. 할머니의 세계는 어떤 것이었을까? 제대로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는 세계, 그런 세계에서 혼자 살아남은 손자를 돌보아야 했던 할머니의 형편 같은 것들. 그 억척의 증거물로 건물을 차지하고 사는 할머니의 숱한 돌봄들. 그렇게 키운 손자는 이제 할머니를 돌보는 자리에 위치해야 할 것 같지만 그것도 완전한 전복은 아니라서, 어영부영 다른 이에게 이 돌봄을 전가하는 손자를 보는 그의 마음은 얼마나 더 어두워져야 했을까.
   할머니는 거들과 슬립 차림으로 오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현란한 뽕짝 리듬에 춤을 춘다. 박자와 몸짓이 한없이 어긋나기만 하는 기괴함 앞에서 유수는 도망친다. 방 안에서 한껏 볼륨을 높여야만 기껏 울림 정도로나 느껴볼 수 있는 선율, 건물에 세든 교회로부터 밀린 월세를 받기 위해 목사를 닦달하고 결국 그가 신도들 앞에서 헌금함에 손을 넣게 만든 할머니의 저 몸짓은 한껏 과장해야지만 겨우 드러나는 너무도 ‘무해한’ 취급만 받아온 할머니의 찰나와 같은 해방 또는 ‘아등바등’의 변주는 아닐지. 할머니는 차라리 어떤 것은 일부러 모른 척하고 싶지는 않았을지. 그들의 사정을 봐주다간 자신의 도호가 위험해질 수 있으니까. 그 시간 속에서 사람들은 농인의 몸으로 손자를 키우며 악착같이 일하는 이 여성을 어떻게 대했을까? 할머니는 어쩌면 아직 자신의 돌봄 노동이 끝나지 않았다는 것(할머니는 도호의 결혼도 준비하고 있을 것이므로), 그러면서도 자신을 도호에게 의탁할 수는 없을 것(짐이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을 알고 있지 않을까? 할머니의 노동은, 바느질 기술 하나만으로 건물주가 된 이 여성의 그 숱한 노동으로서의 돌봄은 프레임 밖으로 켜켜이 밀려나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프레임 밖으로 밀려난 노동은 김유담의 「돌보는 마음」에도 있다. 남희를 힘들게 하는 것은 보수가 지급되는 유아 돌봄이 아니다. 그를 옥죄는 돌봄 노동은 CCTV 프레임 밖, 구석진 방 한 칸에 담겨 있다. 미연이 우연히 목격하게 된 그 프레임의 밖에는 치매를 앓는 남희의 시모와 엎어진 죽그릇 앞에 악다구니를 퍼붓는 남희가 있었다. 소설에서 미연은 당장에 대안이 없어(미연의 남편 역시 남의 일처럼 헐렁하게 사태를 대한다) 남희에게 아이를 맡기면서도, 이제 그의 도덕성, 인간성을 의심하게 된다. 이런 과정에서 남희의 남편은 줄곧 수수방관이라는 다른 의미로 프레임 밖에 서 있다. 60세의 남희가 감당하는 돌봄은 집을 노동의 공간으로 그래서 전혀 사적이지 못한 공간으로 바꾸어놓는다. 한밤 놀이터에 나가 앉아 겨우 한숨을 터는 남희의 우울, 자신의 돌봄조차 자신이 감당해야 하는 처지로 돈을 움켜쥐는 것밖에 할 수 없는 도호 할머니의 악착, 어린 손녀의 스포츠브라는 어디서 사야 하는 건지도 모르는 일남의 막막함 같은 것이 바로 우리 사회의 리스크이다.


   4. 친척 만들기,5) 오지랖을 펼쳐라

   여기서 우리는 소설이 던진 질문과 숙제에 대해 함께 고민해야 한다. 도나 해러웨이는 보다 넓은 반려종의 성립 가능성을 말하며 “자식이 아니라 친척을 만들자”고 말한다. 그것은 반드시 인간일 필요가 없으며, 혈연을 끊어내고 보다 친밀한 낯선 이들과 연계하자는 것이다.
   「특별재난지역」에서 엄마는 가영을 두고 떠났고, 아빠는 아직도 독립하지 못한 채 자신의 부모에게 여러모로 의존하고 있다. 고모는 자신의 마음 치유를 위해 독해지기로 했다. 조손 가정과 다문화 가정 아이들을 위한 돌봄 학교는 다시 한번 이들에게 차이라는 프레임을 씌우고, 이 모든 조건은 가영이 쉽게 ‘표적’이 되도록 작동한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이 모두가 해러웨이가 말하는 ‘친척’으로 작동할 수 있는 인간, 비인간(여기서는 시스템)이라는 자원일 수 있다.6) 가영에게는 엄마와 아빠라는 존재가 있고 일남과 경호라는 조부모까지 있다. 고모가 있으며 돌봄 학교 선생님과 학교가 제도적으로 그의 곁에 있다. 청도라는 지역 사회와 대구 경북이라는 자치 권역이 있다. 국가 이전에도 이미 이만큼의 연결 고리들이 가영을 둘러싸고 있는 것이다. 한 사람의 전적인 돌봄으로 아이가 제대로 자랄 수 없음은 자명하다. 이런 인식의 전환은 꽤 중요한데, 많은 것들은 얽혀보기 전에는 서로가 어떤 존재로 변모할지, 어떤 변화를 겪을지 그래서 무엇을 만들어내고 어떤 세계가 도래할지 전혀 상상할 수 없다.7) 이때 일남, 남희, 도호의 할머니와 같은 인물들에게 요청되는 것은 한 사람의 희생으로 가정을 지킬 수 있다는 이 헛된 게임의 환상, 일루지오(피에르 부르디외)를 벗어나는 일이다.
   세상의 끝을 찾아 나선 아이가 십오 년의 여정 끝에 ‘세상의 끝’이라 불리는 농가의 오두막을 찾고는 더없이 기쁜 마음으로 그 집의 하녀가 된다는 로베르트 발저의 「세상의 끝」은 맹목적으로 이데올로기화된 사유의 덫을 보여준다. 이 소설에는 누구든 겹쳐놓을 수 있다. 무언가를 위해 우리는 얼마나 맹렬하게 달리는가, 그 열정의 끝에서 오는 자기 확신과 만족은 그 세계에 담뿍 몸을 적시게 하고 더이상의 의심을 차단하게 하기도 한다. 우리보다 좀더 먼저 태어난 여성들을 여기에 포개서 생각할 때, 그들에게 이데올로기란 무엇이었나? 아버지의 말씀과 국가의 슬로건 같은 것들은 이 여성들에게 오히려 의심하지 말 것을 미덕으로 심어주었다. 그런 습속은 경제 개발의 대의 앞에서, 민주주의라는 소명 앞에서, 그리고 이제 자식들의 안타까운 먹고살기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그 기꺼운 희생을 또 하게 만드는 일종의 체화된 시스템으로 작동하고 만다. 일남이나 남희와 같은 인물을 살게 하는 그 힘은 안간힘, 환상이 내몬 외길의 진위를 의심하는 일을 기각하는 내재화된 강제성의 힘이다. 하나의 세상과 하나의 구조 그것만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고 아래서 꿈꾸던 저 아이는 하인이 된다. 우리는 더 많은 구조와 더 많은 존재와 서로 더 많이 얽혀봄으로써만 그런 맹목성에서 벗어나 사유할 수 있다. 특히 「특별재난지역」은 그 제목이 함의하듯 기후 변화가 촉발한 오염과 감염의 세계에 새로운 화해와 화합, 공생의 필요성에 대한 시급함을 보여준다. 집으로 전달된 “대구 경북 힘내라!”는 문구가 인쇄된 아동용 마스크, 그런 제도적 만짐이 서로에게 실질적 위로가 될 수 있다. 그것은 저 무수한 일남과 같은 희생을 지우며 그에게 노년의 돌봄을 제공해야 한다.
   그런데 한국이야말로 그런 가능성, 자원이 풍부하지 않은가? 우리가 누구던가, 소위 ‘오지랖’의 민족이 아닌가! 정 많고 얽힘이 가능하고 ‘낯선 자들의 친밀성’을 얼마든지 실행할 수 있는 사회로부터 우리는 그리 멀어지지 않았다. 나는 우리 사회의 ‘친척 만들기’의 가능성을 호칭에서부터 생각해본다. 그러니까 ‘할머니’와 같은 단어를 보자. 이는 엄연히 친족 용어인데, 우리나라는 모든 사람을 친족 용어로 부르고(부를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식당에는 ‘어머니’나 ‘이모’가 있고 커피숍이나 호프집에는 ‘언니’ ‘오빠’가 있지 않은가. 이 친족 중심의 호명은 되레 가족주의의 환원이라는 점에서 그리 합당하지는 않지만, 뒤집어서 이것을 활용하는 방법도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
   경상도 지역에는 ‘아재’ ‘아지매’라는 호칭이 있다. 대개 4촌 이상의 친척에게 5촌, 8촌 대신 그를 존중해 부르는 이 호칭은 촌수 우선의 법칙으로 작동되는데, 때로 나이는 많지만 촌수는 아래인 친척이 자신보다 어린 윗사람을 호명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이 호칭은 그러니까 아무렇게나 막 부르는 것이 아니라 그런 곤란한 상황에 대한 배려가 전제된 그러면서도 먼 촌수가 주는 거리 감각을 상쇄하는 꽤 섬세하고 다정한 부름인 셈인데, 어떤 다정함으로도 뻗어나가는가 하면 혈연이 아니라도 가깝고 믿음직하게 지내는 사이라면 아지매, 아재가 될 수 있다. 그건 그러니까 매우 친밀한 사이에 쓰는 ‘가족 같은’ 관계로의 승인, 승격을 내포하는 의미인 거다. 그렇게 심리적 거리 뭉개기 혹은 친척으로 맞아들이기와 같은 ‘친척 만들기’는 한국 사회에 이미 있어 왔던 것이다! 그렇게 새로운 친척, 친척의 친척은 탄생하고 있었다.
   돌봄의 사회적 방관 앞에서 젊은 부부들은 출산의 포기를, 미혼의 청년들은 비혼을 선언함을 우리는 목도하고 있다. 그것은 이토록 난감한 돌봄 앞에 그런 ‘리스크’가 개인이 ‘러스크(rusk)’화 되는 것을 피할 유일한 방책이라고 그것이 합리적 선택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한 생명 재생산의 위기를 일시적으로 지급하는 수당만으로 해결할 수는 없다. 보다 근본적이고 전체적인 해결을 향해 우리는 차라리 조금 더 친밀해질 필요가 있다. 그래서 가족 중심주의를 끊어낼 때 낯선 이들의 친밀함으로 가득 찬 사회는 홀로 버티기의 수렁에서 개인을 해방시킬 수 있다. (도나 해러웨이에 의하면 모든 아이가 평생 셋 이상의 부모를 가지는 문화적 변화 같은 것들도 상상해볼 수 있다.) 누구라도 가능하다는 생각, 무엇이든 가능하다는 혈연과 인간 중심을 탈피하는 생각만이 젠더화된 돌봄 노동의 그림자를 지울 수 있다.
   저 뒤에 물러나 있는 일남의 남편, 남희의 남편, 도호들은 더 가까이 다가서라. 당신들은 당사자, 가장 가까운 친척이다. 리스크는 결코 개인의 영역이 되어서는 안 되며, 그것이 계속해서 가족 내 한 사람에게 지워진다면 잔혹한 살해의 충동과 예감은 영속될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늙어간다. 이 위태로운 몸으로 서로 기대야 하며, 그것은 훨씬 더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사유와 활동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팬데믹이 사회적 약자에게 더욱 지난하게 경험되는 상황은, 바이러스와 물질적 사회 구조가 얽혀있다는 방증이다. 탈인간중심적 사고와 다종 간 연결을 통한 생태주의적 돌봄에 대한 상상력은 이 사회 리스크를 특정 개인이 껴안고 부스러지는 불합리를 넘어설 수 있는 어쩌면 유일한 출발점일 수도 있다.
   “나-우리-는 보편성과 개별성이 아니라 부분적이고 불완전한 연결을 가지고 세계들을 결합하고 변형하는 법을 다시 배워야 한다.”8)

황유지

제대로 정의되지 못했다는 것은 발화 주체로의 경험 부재에서 온다. 문학의 다정함은 그런 것들의 뒤를 밟아 집요하게 캐묻는 것에 기인한다. 그것이 곧 문학의 역할 중 하나일 것이다. 정의되어 본 적 없는 것들과 함께 사유하고자 글을 쓴다. 문학의 손길은 그런 것들을 썼다 지우고 또 누군가가 다시 쓰며 자꾸 옮겨놓아보는 일일 것이다. 고정된 자리라는 것은 폭력일지 모른다.

2022/11/29
6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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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사 서비스 애플리케이션 업체는 채용된 가사 도우미들에게 전문화 교육 과정을 이수하게 하고 자체적으로 ‘홈매니저’라는 명칭을 부여했다. 해당 서비스 이용 후기에 따르면 이 서비스를 이용하는 고객들은 가사 도우미들을 ‘매니저님’이라고 호명하고 있었다. 외래 단어라는 점에서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매니저라는 단어가 우리 생활에 두루 쓰이는 친숙한 어휘라는 점, 직업의 전문성을 담보하는 동시에 폄하의 뜻을 내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대안으로 충분히 참고할 만하다. (애플리케이션 ‘대리주부’ 참조.)
2
김은정, 「손자녀 양육지원을 거부한 조모의 경험에 관한 연구」에 따르면 돌봄 거부의 사례가 매우 드물뿐더러 거부를 표명할 경우 자녀들과의 불편함과 그들에 대한 미안함은 고스란히 이들의 부채감으로 남는다. 《한국가족복지학》 62호,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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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호자란 대체 무엇인가? 보호자란 말이 가장 난무하는 곳은 병원일진대, 이 공간에 들어서면 우리는 외부에서 지속되었던 관계의 정의에 아랑곳없이 환자-보호자 간 관계로 재구성된다. 이런 보호자의 지명과 호출은 의료 행위에 따르는 수납과 위험 부담에 대한 책임의 명기로서 사실상 의료법에서는 명확히 정의된 존재가 아니다. 보호자는 보호를 해야 할 대상의 상정이라는 점에서 정상 가족과 가족 간병을 당연시하는 결과를 추동한다. 보호자에 대한 개념은 어떤 식으로든 돌봄을 경유하기에 이 글의 사유와 연결된다고 여겨 전희경, 「‘보호자’라는 자리」 를 참고하였다. 『새벽 세 시의 몸들에게-질병, 돌봄, 노년에 대한 다른 이야기』, 메이 엮음, 봄날의 책,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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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한 보고서에 의하면 맞벌이 가정은 전문 돌봄 인력보다는 조부모에 의한 양육을 안전의 측면에서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으며(그중에서도 가장 선호되는 것은 외조모이다) 그러면서도 학습 부진, 아이의 건강을 비롯한 정서의 문제를 염려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조사가 코로나 이전에 이루어졌다는 점을 감안할 때 포스트 코로나에 이르러 이러한 수치는 변화가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코로나로 인한 가계 경제의 붕괴라는 보다 일차적인 문제 앞에서 이런 불안들은 우선순위에서 멀어질지도 모른다. 또 이런 조사는 보다 많은 당사자성을 확보하는 실제적 행위자들의 입장에서도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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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이 아니라 친척을 만들자(making kin, not babies)”는 도나 해러웨이, 『트러블과 함께하기』의 슬로건이다. 최유미 옮김, 마농지,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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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아콰이어’는 성악 전공자들이 주축이 되어 만든 한 지역 내 ‘엄마’들이 꾸린 합창단이다. 구성원들에게는 총 35명의 자녀가 있는데, 이들은 노래를 하고 싶어서 ‘자체 놀이방’을 운영해가며 활동을 해왔다고 밝힌다(SBS <싱포골드>). 나는 이에 대해 “엄마는 위대하다”라고 쓰는 기사들의 제목이 불편하다. 그들의 실행력과 용단은 분명히 훌륭하다. 그렇지만 엄마는 위대하다는 저 말은 자꾸만 ‘엄마’에게 그 일을 도맡게 하는 이 사회의 주술로 작용한다. 대신 이렇게 묻고 싶다. 그들이 그렇게 하기까지 사회는 무얼 했나, 그들이 하는 일을 왜 국가는 하지 못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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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 문화, 주체, 객체는 그들이 밀접하게 뒤엉킨 세계를 만들기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도나 해러웨이, 앞의 책, 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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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나 해러웨이, 같은 책, 2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