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 윤리와 관련된 주요 저작으로 꼽히는 존 쿳시의 『동물로 산다는 것(The Lives of Animals)』의 주인공 엘리자베스 코스텔로는 아마 문학 작품의 주인공으로는 가장 잘 알려진, 흥을 깨는 비건(vegan killjoy)일 것이다. 동물 윤리 및 동물권과 관련한 여러 논쟁이 인물들의 대화를 통해 구현된 이 소설에서 코스텔로가 ‘흥을 깨는’ 장면 중 하나는 다음과 같다. 작가로서 어느 대학에 강연자로 초청받은 코스텔로는 이 자리에서 동물들에 대한 집단 도살을 문제 삼으며, 당시 수용소를 고발하기 위해 사용된 언어가 “그들은 양처럼 학살되었습니다”, “그들은 동물처럼 죽어갔습니다.” 등과 같이 수용자의 희생자들을 동물의 처지에 비유한 것이었고, 이러한 언어가 “나치 정권이 저지른 죄는 바로 사람을 동물처럼 대한 것”에 있다는 생각을 표현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어 코스텔로는 동물들의 죽음을 나치의 집단 수용소에서의 죽음과 견준다. 그러한 대학살에 버금가는 학살이 바로 이 순간에도 동물들을 대상으로 자행되고 있다고, 하지만 종차별적으로 작용하는 인간의 공감 능력이 이러한 현실을 직시하거나 문제 삼는 것을 가로막고 있다고 말이다.
   소설에서 이 강연은 청중의 여러 반응을 불러일으키는데, 그중 한 시인은 코스텔로가 든 비유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강연 이후 마련된 만찬 자리에 불참하고 그녀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낸다. 그 내용의 일부를 옮기자면 다음과 같다.

    “당신은 자신의 목적을 위해, 살해당한 유럽의 유대인과 도살당한 가축이라는 친숙한 비유를 들고 있습니다. 유대인은 가축처럼 도살당했고, 따라서 가축도 유대인처럼 도살당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말장난입니다. (…)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졌지만, 하나님은 인간과 유사하지 않습니다. 유대인이 가축처럼 대우받았다고 해서, 이 때문에 가축이 유대인처럼 취급받는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이 역의 경우는 죽은 자의 기억을 모욕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또한 수용소의 참사를 비열한 방법으로 악용하는 것입니다.”1)

   이 편지는 코스텔로의 아들을 거쳐 코스텔로에게 전달된다. 쿳시는 코스텔로로 하여금 이 편지에 대해 답변하도록 하지 않고, 소설은 바로 다음 강연 장면으로 넘어간다. 이런 이유로 이 소설에 제시되는 여러 논쟁에 비해 이 동물 비유에 대한 지적은 다른 대목에 비해 숙고의 여지를 더 열어놓게 된다. “유대인이 가축처럼 대우받았다”는 사실은 우리의 도덕적 분노를 자극하지만, “가축이 유대인처럼 취급받는다”는 말은 어딘지 어색하거나 찝찝함을 주고, 심지어는 시인의 말대로 “죽은 자의 기억을 모욕”한다고 느껴지기도 한다. 마저리 가버의 표현에 따르면 프로이트가 말했던 “유추의 유혹the sedection of an analogy”2)과 관련되는 이 문제는 특히 동물 비유에 있어서 좀더 까다로운 문제가 된다. 물론 위 시인의 문제 제기는 인간과 동물 간의 넘어서선 안 되는 위계적 경계를 침해한 비유에 대한 문제 제기겠지만(또한 “유대인처럼 취급받는다”는 비유는 유대인이 받은 고통을 자연화하거나 적어도 대상화하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설령 이러한 우열 관계를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이런 비유는 때때로 ‘선’을 넘는다고 느껴지기도 한다. 이는 한 집단이 경험한 억압이나 폭력의 특수성을 무시하고 함부로 전유하는 것으로 읽힐 수 있기 때문이다.
   동물 비유의 역사는 길다. 특정한 인간을 동물에 빗대는 것은 그를 멸시하고 모욕하거나 존엄성을 박탈하기 위해 인간을 동물처럼 취급하는 ‘동물화’의 흔한 방법이 되어왔다. 개, 원숭이, 돼지, 닭, 소 등 특정한 인간을 비유하기 위해 수사적으로 동원되는 동물 대부분은 이성이나 도덕성과 같은 ‘인간적’인 능력을 갖추지 못한 인간이나 (백인 남성 비장애 이성애자로 표준화된) ‘정상’적인 인간의 기준에 미달하는 것으로 여겨진 인간 특히 비백인, 여성, 장애인, 퀴어와 동일시되었다. 먼 사례를 들 것도 없이 나는 작년 12월 젖소와 여성을 빗대어 논란이 되었던 서울우유 광고를 떠올려 본다.3) 광고는 카메라를 들고 산을 오르는 한 남성을 비추며 시작한다. 이 남성의 시선을 따라 푸른 들판 위에서 깨끗한 이슬을 마시고 평화롭게 체조하는 여성들이 화면에 잡히고, 이 남성은 이들을 카메라로 몰래 찍으려다가 실수로 나뭇가지를 밟아 자신의 존재를 들키게 된다. 발각 이후 전환되는 장면에서 들판 위에 있는 것은 여성들이 아니라 유유히 풀을 뜯고 있는 젖소들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이처럼 광고는 여성을 젖소에 빗댄 데다가, 이들을 숨어서 지켜보며 카메라로 찍는 남성의 모습은 여성의 신체를 몰래 찍는 불법 촬영 범죄를 연상시켰다. 광고는 공개되자마자 여론의 거센 뭇매를 맞고 소비자들의 불매 운동을 촉발했다. 서울우유 측은 즉각 영상을 내리고 곧 사과문을 게재하는 식으로 사태를 무마하려 시도했다.
   여러 언론에서도 이 광고의 문제성을 다룬바 이 광고의 노골적인 여성 혐오적 이미지는 비난을 피하기 어렵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더 주의를 필요로 하는 지점은 이 광고가 얼마나 여성에게 모욕적이었는지를 지적하는 것 이외에도 젖소라는 ‘동물의 입장’4)에서 이 광고를 문제 삼는 것이 가능한가의 문제에 있다. 사실 여성을 젖소에 빗대는 것은 여성의 신체를 성애화된 대상으로 표상하거나 ‘동물을 다루듯’ 함부로 다루어도 되는 대상으로 사물화하는 아주 흔한 재현의 한 사례에 해당한다. 그런데 여기서 만약 동물의 입장까지 고려할 수 있다면, 이 광고의 기만성은 소를 성폭행함으로써 유지되는 우유 제조 산업의 실상을 은폐하고 초원에서 평화롭게 풀을 뜯어 먹고 있는 젖소의 이미지를 재현한 데에도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젖소가 축사에 갇혀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통제당하고 성폭력을 당하고 착취되는 것은 젖소가 동물로서 겪는 문제이면서 여자인 동물로서 겪는 문제이지 않은가. 그렇기에 여자인 사람이 ‘젖소 취급’을 당해서는 안 된다는 말은 온당한 말이겠지만, 이 주장이 젖소가 실제로 어떻게 ‘취급’당하고 있는지에 대한 무관심을 내포한다면 이 온당함은 미심쩍어지는 것이다.
   물론 사회적 소수자들에 대한 ‘동물화’가 그저 수사적이거나 재현의 차원에 국한된 문제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인간의 긍정적인 면을 동물에 빗대는 경우도 더러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동물 비유는 비이성적이거나 비도덕적인 속성 혹은 정상성에서 벗어났다고 여겨지는 신체적 특징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으며, 이는 특정한 조건의 신체를 혐오·구속·통제하거나 (성)폭력의 대상으로 삼는 관행과 결부되어 있다. 여러 페미니스트 및 동물권/동물 윤리 이론가들은 동물의 가축화 및 동물 도살의 산업화가 여성, 비백인, 하층 계급의 종속화에 대한 모델이 되었다는 사실을 밝혀오기도 했다. 가축화나 도살과 같은 말은 어쩐지 지나치게 무시무시하게 들리고,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동물 비유에 이런 혐의가 있다는 사실이 께름칙하게 느껴질 테지만, 나는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에는 인간의 사고방식과 편견, 오래된 관행과 역사가 반영되어 있다는 아주 상식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다.
   예컨대 김지연의 소설 「공원에서」(《황해문화》 2021년 봄호)를 읽어본다. 이 소설에는 소위 ‘여성스럽지’ 않은 외모의(“175센티미터의 키에 머리가 짧고 화장도 하지 않는 데다 몸매가 드러나지 않는 옷을 주로 입”는) 여성 화자가 공원에서 자신을 남자로 오해한 어느 취객과 시비가 붙어 “개 패듯” 맞는 에피소드가 나온다. 이 취객은 화자에게 “뭔 여자가 남자같이 하고 다”니냐며 시비를 걸었다가 화자로부터 “씨발, 그냥 꺼지”라는 욕을 듣자 “계집년이 어디서 까부냐”며 화자를 마구 짓밟고 화자에게 침을 뱉은 후 떠난다. 이후 화자는 자신이 폭력의 빌미를 제공했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사회적 분위기에 분노하며 자신이 겪은 폭력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그 사람은 정말 나를 개 패듯 팼다”고 내뱉는다. 여성으로서의 규범에서 벗어난다는 이유로 경험한 성별화된 모욕과 폭력은 자신이 동물 취급을 받은 것으로 인식되는 것이다. 이 대목은 우리가 ‘비인간’적인 대우와 관행의 부당함을 고발할 때 얼마나 인간을 동물에 빗대는 언어에 의존하는지를 보여준다.
   그런데 이 말을 내뱉고 난 후에 화자는 자신이 개처럼 취급받았다고 표현한 것을 돌아보고, 곧 ‘동물의 입장’에서 생각해보게 된다. 자기도 모르게 내뱉은 말, “개처럼 맞는다는 관용구”는 도대체 “왜 존재하는 것”인지 의문을 품고 사전에 있는 개에 관련된 단어들을 뒤지게 되는 것이다. 이 장면에 바로 이어지는 장면은 여자와 관련된 속담들(여자가 셋이면 나무 접시가 들논다, 여자는 사흘을 안 때리면 여우가 된다, 여자는 익은 음식 같다, ……)을 찾아보게 되는 것으로, 그렇게 “사전 속에는 인간의 온갖 악행과 차별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여성과 동물에 대한 차별의 역사가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 후 화자는 ‘복날 개 맞듯’이라는 관용구가 등재된 사전의 출판사 측에 집요하게 일일이 삭제 요청 메일을 보내게 된다. 화자에게 이러한 항의는 이제 자신이 ‘개 맞듯’ 맞았던 경험에 대한 항거와 별개의 일이 아니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김지연의 소설은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는 방법으로서의 동물화에 저항하는 유일한 길이 ‘인간화’에 있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도록 만든다. 알려져 있다시피 “나도 인간”이라는 말은 비인간화의 폭력에 저항하는 표어가 되어왔으며, ‘인간화’는 여러 권리 운동의 핵심적인 요구로서 영향을 발휘해 왔다.5) 수나우라 테일러의 말대로 “어떤 사람들에게 동물과의 비교는 모욕 그 이상”이며 “이때 이들은 인격 상실의 위험”에 처할 수도 있기에,6) 신속하게 동물화된 상태에서 벗어나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렇지만 ‘인간화’를 폭력과 착취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로 생각하는 한, 특정한 존재나 집단은 여전히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아도 되는 존재로 남겨질 수 있고 ‘동물화’의 폭력에서 근본적으로 벗어나는 일은 불가능할 것이다. 우리가 궁극적으로 벗어나야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동물화된 상태가 아니라, 끊임없이 인간과 인간이 아닌 것을 구분하고 ‘비인간’에 대한 차별과 폭력을 정당화해온 차별적인 인식론과 폭력의 역사다.
   여성을 ‘젖소 취급’하는 폭력에 저항하는 길이 여성을 인간으로 대우하라는 것만이 아니라 젖소를 그러한 방식으로 ‘취급’하는 것에 대한 문제 제기로 연결될 가능성, 여자답지 못하다는 이유로 ‘개 맞듯’ 맞은 경험이 개도 그렇게 맞아서는 안 된다는 인식으로 연결될 가능성은 없을지 생각해보고 싶다. 다시 수나우라 테일러의 말을 옮겨본다. “과연 자기 자신이 동물임을 자처하면서 동시에 인간의 동물화라는 잔혹한 현실을 비판할 수 있을까? 이런 역사를 알고 난 후에도 내가 동물임을 자처할 수 있을까?”7) 동물화에 저항하는 길이 “나도 인간”임을 주장하는 단선적인 회로에 갇히지 않을 수 있다면, 그 가능성은 어떻게 모색할 수 있을까. 나는 그 하나의 방법이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나’와 동물이 겪는 폭력이 어떻게 얽혀있는지 인식하는 것이라면, 다른 하나는 바로 그 얽힘 안에서 ‘나’와 동물의 관계를 모욕이 아닌 기쁨과 긍지로 결속시키는 것에 있다고 주장하려 한다.

   임솔아의 소설 「초파리 돌보기」(《릿터》 2021년 8·9월호)는 그 두 번째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보도록 우리를 이끈다. 이 소설에는 “자신이 인간이라는 당연한 사실”을 잊어버리게 만드는 성차별적이고 열악한 근무 환경 속에서 노동하는 50대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 원영이 등장한다. 원영은 가발 공장, 외판원, 마트 캐셔, 초등학교 급식실 조리원, 볼펜 부품을 조립하는 부업, 텔레마케터 등을 전전하며 끊임없이 노동을 해왔지만, 그 노동의 경험은 기록되지 못하고 원영은 “50대 무경력 주부”로 간주 된다. 텔레마케터로 일하게 된 곳에서 다짜고짜 쌍욕을 하는 고객을 응대하는 일에 시달리게 되면서 원영은 “어째서 텔레마케팅 업무는 보수가 좋은지, 어째서 이 공간을 갓 스물이 넘은 여자아이들과 주부들이 채우고 있는지”도 이해하게 된다. 성별화된 모욕에 시달리며 ‘여성스러운’ 상냥함으로 고객을 응대해야 하는 곳에서 여성 노동자로서의 노동고는 두 배로 가중된다.
   원영은 텔레마케터 일을 그만두게 되고, 함께 텔레마케터로 일했던 동료의 소개로 과학기술원의 실험동 아르바이트 자리를 얻는다. 원영의 업무는 실험용 동물인 초파리를 양육하고 번식시키는 일이다. 원영은 초파리를 보며 초파리의 외양과 생명력에 넋 나갈 정도의 아름다움을 느끼며 매혹되고, 5일 정도가 지나면 성충이 되는 초파리의 성장을 지켜보며 딸을 키울 때만큼의 기쁨을 느끼기도 한다. 또한 초파리들 각각의 개성과 특성을 인지하게 되고 폐기 처분될 초파리를 몰래 집으로 훔쳐 오기까지 한다. 이러한 원영의 모습은 혐오스러운 것으로 여겨지는 동물이자 인간을 위해 이용되고 폐기되는 실험용 동물로 범주화되는 초파리에게서 어떻게 개별성을 알아볼 수 있는지, 어떻게 초파리가 각별한 돌봄의 대상이 될 수 있는지 보여준다.
   그런데 원영은 실험동에서 초파리를 훔쳐 온 그날부터 탈모가 심해지고 몸이 약해져 더이상 일을 할 수 없게 될 지경에 이른다. 원영의 딸이자 소설가인 지유는 이러한 원영을 보며 이를 실험동에서 당한 “산재”라고 의심하게 된다. 지유는 실험동에서의 정황을 파악하고자 엄마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소설을 쓴다는 구실로 원영에게 그곳에서의 일을 캐묻는다. 정황상 원영의 원인 모를 병은 산재일 가능성이 크지만, 원영의 생각은 다르다. 원영은“굳이 따지자면 해를 끼친 쪽은 초파리가 아니라 자신”일 것이라고 생각하며 “원영의 꿈”이 이루어진 공간이기도 했던 실험동을 “수만 마리의 벌레들이 득실거리며 병균을 옮기는 공간”이자 “머리카락이 후둑후둑 빠지는” 위험한 공간으로 상상하게 만드는 딸의 이야기에 기억이 훼손된다고 느끼는 것이다. 원영은 지유의 ‘뻔한’ 이야기 대신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어떻겠냐며 지유에게 들려준다. “텔레마케팅 사무실에서 헤드셋 너머로 종일 욕설을 듣는 여자 이야기. 평생 자기 책상을 가져 보지 못해서 아프기 시작하는 여자 이야기. 식기세척기를 구입하면 어떠냐고 물으면서도 책상이 필요하지 않으냐고는 한 번도 묻지 않는 가족 이야기. 밀가루가 체질에 맞지 않아 늘 위무력증에 시달렸지만 남편이 국수를 좋아해서 30년 동안 국수를 먹은 여자 이야기. 체할 때마다 그러게 왜 국수를 먹느냐고 다그치던 딸 이야기. 그러면서도 일요일 저녁이면 와, 국수다, 라며 손뼉을 치던 딸 이야기……”
   이러한 원영의 이야기 속에는 산재의 피해자로서의 원영이 아니라 여성이자 텔레마케터이자 가족을 위한 돌봄 노동자로서 살아온 삶의 내력이 담긴다. 산재의 피해자로서의 서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해서 원영이 자신이 경험한 현실에 대해 무지하다거나 현실을 기만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어떠한 의미에서 원영은 지유보다 정확하게 자신이 겪은 삶의 내력을 인식하고 있다. 소설 말미에서 지유는 여전히 원영의 질병은 초파리와 실험동 때문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만, 원영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신이 쓰던 소설의 결말은 원영이 원하는 대로 행복한 결말로 마무리를 짓게 된다. 지유의 소설 속에서 로열 젤리를 먹고 “산란능력이 두 배나 증가했고 수명도 두 배나 늘어”난 초파리처럼 원영도 로열 젤리를 먹으면서 몸에 “보송보송한 솜털”이 나기 시작한다. 그렇게 소설은 “이원영은 다 나았고, 오래오래 행복하다”고 끝이 난다. 이러한 결말에 흡족함을 느끼는 원영은 초파리와 실험동에서의 기억을 아름다운 것으로 간직할 수 있게 된다. 이처럼 「초파리 돌보기」는 피해의 서사로 주어지는 삶의 각본을 거부하고 모욕과 아픔, 기쁨과 행복이 한데 얽힌 삶을 마주하는 여성 인물을 인상적으로 재현한다.
   원영이 자기 삶을 서사화하고 종국에는 지유와도 함께 이야기를 만들어 가게 되는 과정에서 실험용 동물인 초파리를 돌본 경험이 중요한 계기가 되고 있다는 점은 흥미롭다. 원영은 (실험용 동물과 비정규직 노동자에 대한) 착취가 이루어지는 현장이 고통과 피해의 경험으로만 환원되는 것에 거부감을 느낀다. 원영이 피해의 서사를 거부하는 데는 초파리를 돌보며 일의 기쁨을 느꼈던 기억이 훼손된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실험동에서 일을 시작할 때부터 초파리는 생생한 존재감을 내뿜는, 코스텔로의 표현을 빌리자면 하나의 살아있는 “충만한 존재”8)로 원영의 삶에 들어선다. “매우 정동적인 감각을 통해 세계를 향해 살아 있고 공간을 향해 뻗어 있는 팔다리를 가진 몸”9)으로서 말이다. 그렇게 원영이 만들어 가는 삶의 서사에서 초파리는 병균을 옮기고 원영에게 해를 끼치는 존재가 아니라 원영과 함께 건강해지고 “오래오래 행복”할 꿈을 꾸는 존재로 자리한다. 초파리를 돌보게 되며 원영이 자기 삶을 서사화하는 동력을 얻게 되는 이 서사에서 바로 이 돌봄으로 인해 실험동에서의 경험이 모욕이나 피해로만 번역되지 않을 수 있었다.
   이처럼 소설은 비인간화된 처지의 여성 노동자와 동물의 현실을 겹쳐 놓으면서도, 그러한 처지를 공유하는 동물과 얽혀 살아가는 삶의 이야기가 돌봄 관계를 통해 얼마나 풍부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돌봄은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서로 다른 종 간의 상호 의존적인 관계성을 구체적으로 경험하고 기쁨과 충만함을 느끼게 만드는 원천이기도 하다. 특히 이 글의 맥락에서 나는 여성과 동물의 관계를 피해의 경험만이 아니라,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만드는 다양한 감정들로 결속시키는 데에 돌봄이 지니는 가치를 강조하고 싶다. 돌봄의 경험은 동물이라는 기표가 더이상 모욕이나 낙인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을 수 있게 하며, 인간과 동물의 관계를 새롭게 짜는 언어와 서사를 만들어내는 원동력이 된다.
   물론 실제로 돌봄의 양상은 매우 다양하며, 모든 돌봄의 경험이 곧장 동물에 대한 더 나은 대우나 동물과 인간의 윤리적인 관계를 가능하게 만드는 것도 결코 아니다.10) 「초파리 돌보기」에서 초파리와 원영의 서사가 초파리에 대한 윤리적 대우로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말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돌봄 윤리에 대한 우려 속에서도, 동물 윤리를 모색하는 데 있어서 여성적이고 개인적인 경험으로 폄훼되어 온 돌봄 경험을 인식론적 자원이자 저항의 동력으로 삼는 일에 대해서는 강조할 필요가 있다. 기존의 동물권 이론이 주로 자유주의적 권리 이론이나 공리주의에 기반해 상황의 특수성을 추상화하고 보편화된 원칙을 수립했다고 비판해온 여러 페미니스트들은 상황적 맥락과 구체적인 돌봄의 경험, 감정적이고 정서적인 자원을 중시하는 동물 돌봄 윤리 이론을 구축해왔다.11) 이들의 작업이 증명하고 있는바 (여성·비백인·장애인·퀴어를 향한) 여러 형태의 사회적 폭력과 동물에 대한 폭력이 교차하는 구조에 대한 인식과 저항, 그리고 동물과의 정서적이고 감정적이고 신체적인 경험은 (어쩌면 당연하게도) 연결되어 있던 것이며, 연결될 수 있는 것이다. 도노반의 주장처럼 동물 돌봄의 본의는 단지 동물을 따뜻하게 대우하자는 것이 아니라 동물의 입장과 말에 주의를 기울이는 데에 있다.12) 그렇게 ‘동물의 입장’을 더 많이 고려하고 상호 의존성을 느낄 수 있을 때에 우리는 ‘인간다운’ 대우에 호소하는 언어에 의존하지 않으면서도 ‘동물화’의 폭력을 끝내는 방법을 배우고 상상하고 실천할 수 있지 않을까.
   마지막으로 앞서 언급했던 소설 「공원에서」의 결말을 살펴본다. 화자는 폭력의 경험으로 인한 두려움과 공포로 다시 갈 수 없을 것 같던 그 공원을 다시 찾아간다. 공원의 벤치에 앉아 울고 있던 화자에게 한 아이가 다가와 말을 건다. 아이는 자신이 데려온 개의 이름을 토리라 소개하며, 토리를 한 번 쓰다듬어보겠냐며 제안한다. 아이의 제안에 개를 쓰다듬으며 화자는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개를 쓰다듬으면서 나는 죽이고 싶은 사람들에 대해서 생각했다. 개보다 못한 인간들에 대해서 생각했다. 개를 쓰다듬으면서. 개의 활력과 온기를 느끼면서, 어떻게 하면 그 인간들에게 복수를 할 수 있을까를 생각했다. 어떻게 하면 짓이겨버릴 수 있을까. 목을 졸라버릴 수 있을까. 찍소리도 못하게 아주 박살을 내버리고 싶다. 숨통을 끊어놓고 싶다. 그냥 쳐 죽이고 싶다. 그런 것들을 생각하고 있다고 아이에게는 말하지 않고 다만 계속 개를 쓰다듬었다. 개 같은 것을 쓰다듬는 것은 좋다. 개 같은 것들, 개 같은 것들, 개 같은 것들. 나는 그 말을 계속 되뇌었다. 되뇔수록 그 말은 내 속에서 박살나고 뭉개져서 원래 통용되는 의미를 잃었다가 완전히 다른 의미로 조합되었다. 나는 개를 쓰다듬었다. 개의 이름은 토리이고 토리는 아주 사랑스럽다. 그것이 아주 개답다고, 개 같다고 생각했다.

   “인간의 온갖 악행과 차별의 역사”를 고스란히 반영하는 언어를 새로 쓰는 일은 어떻게 가능할까. “개 같은 것들”로 넘치는 세상에서, 화자는 “개보다 못한 인간들”을 박살 내고 싶다는 마음으로 “개 같은 것들”이라는 말을 되뇌고 박살 내고 뭉개며 다른 의미로 조합한다. 사랑스러운 개를 쓰다듬으면서, 개의 활력과 온기를 고스란히 느끼면서. 그렇게 “개답”고 “개 같다”는 말의 의미가 바뀐 세상이라면, ‘동물화’는 모욕이 아닐 수 있을까. 그렇게 아주 개다워질 세상을 상상한다.

김보경

문학평론을 쓴다. 에코페미니스트들이 던졌던 질문들을 떠올리며 이 글을 썼다. tathata1@hanmail.net

2022/02/22
51호

1
위의 책, 64쪽. 번역 일부 수정.
2
마저리 가버, 「시로 도살장을 폐쇄시킬 수 있다고?」, 위의 책, 110쪽. 가버는 이 글에서 비유적인 언어의 위험을 강조하면서도 유추의 긍정적인 기능에 대한 기대를 남긴다. 그것은 유추를 근간으로 하는 문학 언어의 가능성에 대한 기대이기도 하다.
3
이해람, “풀밭 위 여성이 젖소로 변신…서울우유 광고 ‘뭇매’”, JTBC, 2021.12.09. (링크)
4
Josephine Donovan, “Feminism and the Treatment of Animals: From Care to Dialogue”, Signs 31(2), 2006, p.319.
5
인간 해방이라는 의미의 ‘인간화’라는 개념은 남미 해방 신학과 맑스주의의 영향으로 만들어진 개념으로, 한국의 경우에는 1970-80년대 민주화 운동의 주요 산실 중 하나였던 크리스찬아카데미의 주요 의제이기도 했다. 크리스찬아카데미는 당대 한국 사회의 문제가 비인간화에 있다고 보고 여성, 노동자, 농민 등의 인간화를 중점 과제로 두었다. 1980년대 한국의 여성 해방 운동의 주요 의제 역시 여성의 인간화이기도 했다. (박인혜, 「1980년대 한국의 ‘새로운’ 여성운동의 주체 형성 요인 연구: 크리스챤 아카데미의 ‘여성의 인간화’ 담론과 ‘여성사회교육’을 중심으로」, 『한국여성학』 25(4), 한국여성학회, 2009.)
6
수나우라 테일러, 『짐을 끄는 짐승들』, 이마즈 유리 역, 오월의봄, 2020, 192쪽.
7
수나우라 테일러, 앞의 책, 195쪽.
8
존 쿳시, 앞의 책, 36쪽.
9
앞의 책, 37쪽. 번역 일부 수정.
10
이러한 맥락에서 최근 몇 년간 한국 문학에서 동물 돌봄을 다룬 작품이 늘어나는 추세 속에서 동물이 그저 ‘인간적’인 감정이 투사된 존재로 소모되고 마는 것은 아닌지, 인간에 대한 동물의 의존성이 연민을 자아내는 데 그침으로써 인간의 지배적인 위치를 도리어 강화하는 것으로 재현되지는 않는지 등에 대한 진지한 성찰도 필요하다. 어쩌면 「초파리 돌보기」에서 돌봄 대상인 초파리가 어느 정도 ‘인간화’된 얼굴로 등장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고민과 함께 말이다.
11
앞의 글(2006)을 보라.
12
위의 글(2006), p3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