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
감염되지 않은 이데올로기
2022년, 우리의 삶은 이제 재난과 생존이라는 키워드를 제외하고는 논하기 어렵다. 코로나19가 불러온 팬데믹을 통과하고, 기후 위기를 살아가는 작금의 상황이 곧 재난으로부터의 생존이며 지속가능한 삶을 위한 대책들이 끊임없이 논의되고 있기 때문이다. 근래 한국소설에서 나타나는 감염의 주체들 역시 현실에 대한 반영이자 상흔과도 같은 결과물이다. 이들은 우리가 통과하고 있는 시간처럼 질병에 의한 감염을 겪은 인간으로 등장하기도 하지만, 감염 존재에 대한 고전적인 표상이 그러하듯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좀비로 그려지는 경우도 다수다. 다만 전통적인 좀비 서사가 주로 아포칼립스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면, 최근의 좀비 서사는 세계를 파국으로 이끌지 않으며 감염된 존재들을 통해 이 세계를 다른 방향으로 조명해보려 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1) 그렇다면 이 소설들에서 좀비는 누구인가? 누가 좀비가 되어 나타나는가? 공교롭게도 근래의 좀비 서사에서 감염의 주체는 대개 아버지로 특정된다. 게다가 그들 모두 가부장적이었다는 특정마저 공통적이다. 우연의 일치라고는 보기 힘든 이 설정들 속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왜 아버지가 좀비가 되었을까에 대한 문제보다 좀비가 되고 난 이후 그들의 행동에 있다. 죽었으나 완전히 죽지 않은 상태(undead)의 아버지-좀비들은 존재 변화를 겪었음에도 그에 따른 본능적인 행동 변화를 보이기보다 인간일 때처럼 여전히 가장으로서 인정받고자 한다. 주말이 되면 고집스레 김치찌개를 끓이고, 인간의 음식을 먹을 수 없음에도 식탁에 앉아 밥을 달라며 시위하는 모습은 영락없는 좀비 이전의 아버지와 같으니 말이다. 죽음으로도 끊어낼 수 없는 지독한 이데올로기에 대한 실감이 인상적이나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지금의 소설들은 좀비가 된 아버지를 통해 가족들을 억압해온 절대적인 부권이라는 이데올로기의 면면을 낱낱이 폭로한다. 그리고 복수한다.
먼저 송지현의 소설을 읽어보자. 「좀비 아빠의 김치찌개 조리법」에서 ‘나’의 아버지는 한 달이 넘도록 행방이 묘연했다가 좀비가 되어 집에 돌아오는데, 귀가 후 아버지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바로 김치찌개를 끓이는 것이었다. 그런 아버지를 보며 ‘나’는 아버지가 왜 좀비가 되었는가, 어떻게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는가에 의문을 품기보다 그저 “주말인가”(86쪽) 생각하며 맥주를 마시고 TV를 시청한다. 아버지가 좀비가 되었음에도 화자가 아무렇지 않게 일상을 보낼 수 있던 까닭은 아버지의 행동이 지난 이십 년간 지속되어온 일상적인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주말 저녁엔 꼭 참치김치찌개를 끓”여 함께 식사를 하고, “10시엔 스탠드를 켠 내 방에 들어와 가족에 대한 격언을 읽어주”(103쪽)는 것으로 아버지는 이상적인 가족의 모습을 만들어왔다. 하지만 이는 가족의 바람이나 동의와는 무관하게 일방적으로 진행되었던 것으로 오직 아버지에게만 만족감을 주는 것이었다. “조금이라도 늦게 들어오거나 외박을 하면 화를 냈다”(같은 쪽)는 서술에서 확인할 수 있듯 의식처럼 반복되는 역할극에 생기는 변수는 곧 아버지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나 온전한 가족 형태를 깨뜨리는 행위로 금기시되었기에 이상적인 가족의 형태는 지금껏 유지되어 왔다. 기이하게도 이는 갑작스러운 죽음 앞에서도 유효하게 적용되는데, 아버지의 자리를 지킴으로써 정상 가족을 유지하겠다는 강한 집념은 죽은 아버지를 “돌아오는 사람”(85쪽)으로 만들어 살아있을 때처럼 다시 김치찌개를 끓이게끔 만드는 것이었다. 이뿐인가. 정말로 죽기 위해 매일같이 손목을 긋고, 목을 매달았다가도 아침이 오면 꼬박꼬박 출근을 하며 아버지는 가장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상 가족에 대한 아버지의 비틀린 욕망은 도리어 ‘나’와 어머니를 가족이라는 공동체 바깥으로 뒷걸음질치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하게 하는 데 충분했다. 어머니가 아버지와는 다른, “어느 정도 가정에 소홀한” “평범한 중년 남성”(95쪽)과 외도를 하는 것, 어머니가 구치소에 수감되고 아버지가 행방불명이 된 것을 “대사건”(85쪽)이라 표현하면서도 혼자 살게 된 집을 자신의 취향대로 꾸미고, 아버지가 돌아온 뒤에도 사망 원인보다는 “사망 보험금의 지급 여부”(87쪽)에 더 큰 관심을 보이는 ‘나’의 모습에서 아버지가 바라는 가족 안에는 오직 아버지 혼자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소설의 후반부에서 과거의 일을 묻는 ‘나’의 질문에 대한 아버지의 답변을 통해 더욱이 선명해지는데, 아버지의 가족을 지탱하는 상징인 김치찌개 역시 이 대목에서 알레고리적으로 되풀이된다.
평생을 완벽하다고 여겨온 단 하나의 조리법 외에 다른 것은 아버지에게 ‘틀린’ 방법이었고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기에 그는 여러 번 싸움을 하고, 싸움 끝에 기억도 나지 않는 죽음을 맞이하지만, 그럼에도 또다시 “자상한 남편이니까, 또 아버지니까, 주말엔 김치찌개를 끓여야 하니까” 여전히 여기, 이 자리에 있다. 가부장제가 아버지의 자리를 지속적으로 확인함으로써 지지를 얻는 체계임을 떠올려본다면 이 소설의 아버지는 주말 저녁 김치찌개를 끓이는 것으로 자신의 자리를 스스로 입증해왔던 것이나 “그런데 이젠 갑자기 김치찌개를 어떻게 끓이는지 모르게 되었다”(108쪽)는 고백으로 자기 파멸과 가족의 해체를 인정해버린 셈이다.
죽음 이후에도 여전히 가족 내 부권을 그대로 누리고자 하는 아버지는 조예은의 「칵테일, 러브, 좀비」에도 있다. 이 소설에서 원인 모를 이유로 좀비가 되어 돌아온 아버지는 더이상 인간의 음식을 먹을 수 없음에도 “매일 아침, 저녁 밥때가 되면 식탁 앞에 앉아 먹지도 못하는 음식을 내놓으라며 시위를”(79쪽) 하며 인간일 때와 변함없이 가부장적인 모습을 보인다. 이는 송지현의 소설 속 아버지와 같이 좀비가 된 후에도 아버지의 자리를 확인받고 싶어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그러나 그를 대하는 가족 구성원의 태도에서 차이를 갖는다. 예컨대 「좀비 아빠의 김치찌개 조리법」의 말미에서 화자는 “되살아난 아버지에게 이제 김치찌개는 좀 관두세요, 라고 정중히 부탁”(109쪽)하며 아버지를 “제한적으로 포용”(246쪽)2)하려는 태도를 보인다. 이는 “내가 아버지를 아주 닮았다는 사실”(107쪽)을 문득 깨닫는 것처럼 아버지가 그토록 중시하는 가족주의적인 면모가 ‘나’에게도 어느 정도 내포되어 있음을 인정했기에 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나’의 행동은 아버지가 죽기를 진심으로 바라거나 아버지의 죽음에 적극적으로 가담하기보다 김치찌개를 관두기를 “정중히 부탁”하는 것으로 상생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보고자 하는 시도로 읽힌다.
반면 「칵테일, 러브, 좀비」의 두 모녀는 생전의 가부장적인 행동을 그대로 반복하는 아버지의 숟가락을 빼앗아 식탁에서 내쫓고, 골프채로 두들겨 패기도 하며 급기야 ‘처리’라 불리는 살인을 공모하기에 이른다. 좀비 아버지를 대하는 두 소설의 (모)녀의 대응 방식이 다른 것은 송지현의 소설에서 아버지가 공격력 0, 감염력 0의 좀비였던 것에 비해 조예은의 소설 속 아버지는 시간이 지날수록 허기를 느끼며 2차 감염의 위험이 있는 좀비라는 설정에서 발생하는 차이 때문이기도 하지만, 「칵테일, 러브, 좀비」의 모녀가 느끼는 생존의 위협이 감염에 대한 것뿐만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생계유지의 막막함 역시 그들을 위협하는 것이기도 하다. 때문에 “병사나 사고사로 조용히 정리”(91쪽)하여 아버지의 퇴직금을 수령하는 것만이 조금이나마 더 생계를 이어나갈 수 있는 방법이었기에 두 모녀는 적극적으로 아버지를 처리할 계획을 세운다. 이렇게 「칵테일, 러브, 좀비」는 고전 좀비 서사에서 보였던 사람-좀비의 대결 구도를 수용하면서 가부장적인 아버지와 그에 대항하는 모녀를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아버지-모녀간의 대결로 서사 구도가 확장된다. 이를 전면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 바로 어머니가 아버지를 직접 총으로 쏴 죽이는 장면인데, 이는 대결의 승패를 가르는 순간이자 아버지-좀비를 물리치는 일타쌍피의 쾌거를 이루는 명장면이기도 하다. 딸의 감염을 막기 위해 불가피하고 합당한 폭력을 행사하는 것으로, 근절되어야 마땅한 가부장제의 폭력에 대한 복수까지 행하게 되는 것이다.
완벽한 처리를 끝낸 후에야 남는 물음은 “도대체 어쩌다가 좀비가 되었을까?”(84쪽) 하는 것이다. 아버지는 “술을 좋아하고 고집불통이고 가부장적이고 의사소통이 잘 안 되는 인간이었”지만 “크게 사고를 친 적은 없었”(같은 쪽)기에 어쩌면 인간으로서의 연민은 가질 수도 있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아버지가 좀비가 된 이유가 “제약회사들의 악한 음모”(같은 쪽) 따위가 아니라 “살아 있는 뱀을 담가 만든 술”(85쪽)을 마셨기 때문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소설은 아주 찰나의 연민마저도 말끔하게 소거시킨다. 비인간적인 행동으로 스스로 비인간이 되어 맞이하게 된 파멸이었으므로 이에 대항하는 두 모녀의 처리 방식은 다분히 인간적이고 또 이성적이라 이해된다. 아버지에 대한 연민은 사라졌지만 그 자리에 진득하게 남아 있는 건 딸을 위한 엄마의 사랑이다. “20년이 훌쩍 넘는 세월 동안 시가 제사상을 차리던 실력”(106쪽)으로 뱀을 위로하고 용서를 구하는 제사상을 차리는 엄마의 모습은 유쾌하면서도 “네가 살아야 끝”(105쪽)난다는 말의 진심은 순도 100%의 것이라 뭉클하기까지 하다.
이처럼 송지현, 조예은의 소설이 좀비가 된 이후에도 여전히 가부장제 질서 안의 권력자로 군림하려는 아버지에 대한 각기 다른 대응 방식을 보여주었다면, 은모든의 소설에서는 가부장에 대한 한층 더 강력한 복수극이 펼쳐진다. 앞선 소설과 차이가 있다면 은모든의 소설에서 감염은 위계에 대한 전복의 도구로 사용되며 가정 폭력과 친족 성폭력 가해자를 향한 복수의 도구로 쓰였다는 것일 테다. 「501호의 좀비」에서 감염의 대상이 되는 이는 큰아버지로, 그가 표적이 되는 건 가족 내 한 개인의 결단에 의해서가 아니라, 큰아버지를 제외한 가족 전체가 가담한 감염 및 살해 공모라는 점에서 단연 흥미롭다. 십수 년 만에 한국을 찾은 큰아버지는 “심혈관 질환의 권위자”라는 사회적 지위를 가정 내에서도 유효하게 여기는 사람으로 큰어머니는 물론, 한나의 가족까지 부리는 일에 거리낌이 없었다. 사람을 부리는 방식 또한 실로 권위적이라 할 만했는데, 가령 큰아버지는 “결정적으로 뭔가를 시키기보다는 그저 자신이 원하는 바를 말했다.” 때문에 대규모 좀비 이동 사태로 인해 집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상황에서 단 한 사람을 제외한 501호의 모두는 더욱이 답답함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생활 범위가 집안으로 제한된 상황에서도 큰아버지가 원하는 바를 묵묵히 수행하던 한나의 가족들이 태도를 달리하게 된 것은 한나의 동생 이은이 열 살도 되기 전, 큰아버지로부터 성폭력을 당했다는 사실을 고백한 이후부터다. 게다가 범행 중 돌아가신 엄마의 목숨을 빌미로 은이의 저항을 막았다. 그런 과거가 있음에도 피해자가 사는 집에 찾아와 뻔뻔하게 도움을 요청했다는 사실에 한나는 “기만이든, 망각이든” 어느 쪽이라도 용서할 수 없는 분노를 느낀다. 복수를 꿈꾸며 아버지에게 이은의 이야기를 전한다. 그리고 아버지로부터 뜻밖의 소식을 전해 듣게 된다. 큰아버지의 친족 성폭력은 이은이 처음이 아닌데, 막내 고모에게 같은 짓을 저지르는 걸 아버지가 목격한 적이 있으나 큰아버지는 그것을 꿈이라 무마했다는 것이다. 더이상의 자비가 필요 없는 간악한 친족 성폭력 가해자에 대한 처단의 방법으로 한나의 가족은 건물 밖을 둘러싸고 있는 좀비로부터 감염을 계획하며 일부러 큰아버지를 술에 취하게 하고 전기 충격기로 기절시킨다. 이때 이들에게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건 이 집의 또다른 이방인인 큰어머니다. 그는 큰아버지의 아내이자 지극히 권위적인 큰아버지의 모습에도 별다른 불만 없이 순응하는 듯 보였기에 이것이 단순한 친족 살해가 아닌, 처단되어야 마땅한 가해자를 단죄하는 것임을 설득할 방법이 없어 보인 까닭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큰어머니는 가족들의 행동에 “보랏빛 멍 자국”을 보이며 도움의 손길을 보탤 것을 원한다. 좁은 집안에서도 “실크 블라우스에 펜슬 스커트”를 차려입고 “엷고 우아한 화장”을 고수했던 큰어머니의 모습들은 모두 큰아버지의 엄격한 통제의 결과이며 그것이 곧 가정폭력으로 이어졌다는 사실을 고백하면서 큰어머니 역시 사건의 공모자로 가담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한나와 이은, 두 딸의 아버지와 큰어머니는 기절한 큰아버지를 현관문 밖에 던져버리며 마침내 좀비들의 먹잇감이 되게 하는데, 큰아버지가 깨어나며 극한의 공포를 느끼고 도망치는 마지막 장면은 읽는 이에게 더없이 짜릿한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닥터 리는 옥상으로 향하는 계단을 급히 오르다 엉덩방아를 찧으며 굴렀고, 겨우 종종걸음밖에는 칠 수 없도록 묶인 하반신으로 다시 일어서기 위해 발버둥쳤다. 그의 이마에 피가 흘렀다. 타박상의 아픔보다 메슥거림이 더 심했지만 입술이 단단히 봉해진 터라 구역질조차 할 수 없었다. 오직 고통스러울 만큼 격렬히 펌프질해 대는 심장만이 아직 그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듯했다. 닥터 리를 위해 일생 헌신한 심장, 그를 매혹시키고 드높은 곳까지 끌어올려주기도 했던 심장. 허겁지겁 계단을 오른 좀비들을 강렬하게 유혹하는 것 또한 뜨거운 피의 원천인 바로 그 심장이었다. 그것을 손에 넣고 맛보기 위해 좀비들은 앞다투어 그의 살점을 물어뜯었다. 닥터 리는 그렇게 심장을 잃었다. 굳게 닫힌 문 바깥에서, 살려 달라는 말 한마디 외쳐보지 못하고, 공포에 질린 두 눈을 부릅뜬 채로.
이 장면을 통해 감염이 가부장에 대한 복수의 방법으로 효과적으로 기능하였음을 확인하며 앞서 이야기한 소설과 달리 처단 대상의 자리가 감염된 주체에서 감염의 대상으로 이동한 점에 대해서도 다시금 짚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가령 이미 감염된 주체를 직접 살해하는 방법은 가부장제라는 이데올로기적인 폭력에 대한 마땅한 대응으로써의 폭력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테다. 이보다는 간접적이나 감염 자체를 처단의 방식으로 이용하는 것이 더 효과적으로 여겨지는 까닭은 그것이 가해자로 하여금 신체적인 통증은 물론이며 감정적인 고통까지 선사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살려 달라는 말 한마디 외쳐 보지 못하고, 공포에 질린 두 눈을 부릅뜬 채로” 죽어가는 이를 지켜볼 수 있다는 것, “경악과 공포”가 어떤 감정인지 피해자가 깨닫게 했다는 것에서 오는 일시적인 해소감은 처단 대상이 느낀 고통에 비례한다. 이것이 아주 찰나에 불과하다는 사실만이 못내 아쉬운 것일 테다.
비인간적인 행태로 응당 인간이 아니게 되었으나 여전히 인간 행세를 하면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이들을 가족의 이름으로 포용하기엔 이미 너무 오랜 고통의 시간을 감내해왔다. 죽음으로도 무너지지 않는 지난한 폭력의 구조를 해체하기 위한 인물들의 결단은 유효하다. 인간이기에 망설일 수 있는 윤리적 선택의 문제 역시 감염에 의한 존재 변화와 생존의 위협으로 인해 말끔히 정리된다. 감염에 대한 대응과 감염을 이용하는 방식마저 적절했다고 여겨지는 건 지금과 같은 감염의 시대에 아이러니한 생각일까 아니면 현실에 조응하는 마땅한 생각일까. 아무래도 좋았다. 구조적인 감염으로 사라질 기미 없는 이데올로기를, 동시에 결코 감염되지 않는 이데올로기를 전복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감염 안에서 발견했으므로. 침입은 이미 시작되었다.
먼저 송지현의 소설을 읽어보자. 「좀비 아빠의 김치찌개 조리법」에서 ‘나’의 아버지는 한 달이 넘도록 행방이 묘연했다가 좀비가 되어 집에 돌아오는데, 귀가 후 아버지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바로 김치찌개를 끓이는 것이었다. 그런 아버지를 보며 ‘나’는 아버지가 왜 좀비가 되었는가, 어떻게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는가에 의문을 품기보다 그저 “주말인가”(86쪽) 생각하며 맥주를 마시고 TV를 시청한다. 아버지가 좀비가 되었음에도 화자가 아무렇지 않게 일상을 보낼 수 있던 까닭은 아버지의 행동이 지난 이십 년간 지속되어온 일상적인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주말 저녁엔 꼭 참치김치찌개를 끓”여 함께 식사를 하고, “10시엔 스탠드를 켠 내 방에 들어와 가족에 대한 격언을 읽어주”(103쪽)는 것으로 아버지는 이상적인 가족의 모습을 만들어왔다. 하지만 이는 가족의 바람이나 동의와는 무관하게 일방적으로 진행되었던 것으로 오직 아버지에게만 만족감을 주는 것이었다. “조금이라도 늦게 들어오거나 외박을 하면 화를 냈다”(같은 쪽)는 서술에서 확인할 수 있듯 의식처럼 반복되는 역할극에 생기는 변수는 곧 아버지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나 온전한 가족 형태를 깨뜨리는 행위로 금기시되었기에 이상적인 가족의 형태는 지금껏 유지되어 왔다. 기이하게도 이는 갑작스러운 죽음 앞에서도 유효하게 적용되는데, 아버지의 자리를 지킴으로써 정상 가족을 유지하겠다는 강한 집념은 죽은 아버지를 “돌아오는 사람”(85쪽)으로 만들어 살아있을 때처럼 다시 김치찌개를 끓이게끔 만드는 것이었다. 이뿐인가. 정말로 죽기 위해 매일같이 손목을 긋고, 목을 매달았다가도 아침이 오면 꼬박꼬박 출근을 하며 아버지는 가장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상 가족에 대한 아버지의 비틀린 욕망은 도리어 ‘나’와 어머니를 가족이라는 공동체 바깥으로 뒷걸음질치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하게 하는 데 충분했다. 어머니가 아버지와는 다른, “어느 정도 가정에 소홀한” “평범한 중년 남성”(95쪽)과 외도를 하는 것, 어머니가 구치소에 수감되고 아버지가 행방불명이 된 것을 “대사건”(85쪽)이라 표현하면서도 혼자 살게 된 집을 자신의 취향대로 꾸미고, 아버지가 돌아온 뒤에도 사망 원인보다는 “사망 보험금의 지급 여부”(87쪽)에 더 큰 관심을 보이는 ‘나’의 모습에서 아버지가 바라는 가족 안에는 오직 아버지 혼자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소설의 후반부에서 과거의 일을 묻는 ‘나’의 질문에 대한 아버지의 답변을 통해 더욱이 선명해지는데, 아버지의 가족을 지탱하는 상징인 김치찌개 역시 이 대목에서 알레고리적으로 되풀이된다.
아버지, 예전에 바다에서 왜 옆 파라솔 사람들이랑 싸웠어?
그건 말이다.
아버지가 말했다.
그 가족의 김치찌개 끓이는 방법이 ‘틀렸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오랫동안 멈춰 있던 동영상이 한번에 재생되듯 빠르게 말을 이었다.
나는 평생을 완벽한 김치찌개를 만들기 위해 애썼다. 김치를 넣고, 기름을 뺀 참치를 볶고, 다진 마늘과 어슷 썬 고추와…… 그런 것들은 아무렇게나 하는 게 아니란 말이다. 아마 너희 엄마와 있던 그 남자도 김치찌개 끓이는 법을 모를 거란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를 찾아갔다. 김치찌개에 대해 얼마나 아느냐고 따질 셈이었다. 그가 날 밀친 뒤론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는 가족을 생각했다.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눈을 뜨니 흙 속이었다. 나는 자상한 남편이니까, 또 아버지니까, 주말엔 김치찌개를 끓여야 하니까,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젠 갑자기 김치찌개를 어떻게 끓이는지 모르게 되었다. 그래서 죽으려고 했지만 자꾸만 되살아나버렸다. (107~108쪽)
평생을 완벽하다고 여겨온 단 하나의 조리법 외에 다른 것은 아버지에게 ‘틀린’ 방법이었고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기에 그는 여러 번 싸움을 하고, 싸움 끝에 기억도 나지 않는 죽음을 맞이하지만, 그럼에도 또다시 “자상한 남편이니까, 또 아버지니까, 주말엔 김치찌개를 끓여야 하니까” 여전히 여기, 이 자리에 있다. 가부장제가 아버지의 자리를 지속적으로 확인함으로써 지지를 얻는 체계임을 떠올려본다면 이 소설의 아버지는 주말 저녁 김치찌개를 끓이는 것으로 자신의 자리를 스스로 입증해왔던 것이나 “그런데 이젠 갑자기 김치찌개를 어떻게 끓이는지 모르게 되었다”(108쪽)는 고백으로 자기 파멸과 가족의 해체를 인정해버린 셈이다.
죽음 이후에도 여전히 가족 내 부권을 그대로 누리고자 하는 아버지는 조예은의 「칵테일, 러브, 좀비」에도 있다. 이 소설에서 원인 모를 이유로 좀비가 되어 돌아온 아버지는 더이상 인간의 음식을 먹을 수 없음에도 “매일 아침, 저녁 밥때가 되면 식탁 앞에 앉아 먹지도 못하는 음식을 내놓으라며 시위를”(79쪽) 하며 인간일 때와 변함없이 가부장적인 모습을 보인다. 이는 송지현의 소설 속 아버지와 같이 좀비가 된 후에도 아버지의 자리를 확인받고 싶어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그러나 그를 대하는 가족 구성원의 태도에서 차이를 갖는다. 예컨대 「좀비 아빠의 김치찌개 조리법」의 말미에서 화자는 “되살아난 아버지에게 이제 김치찌개는 좀 관두세요, 라고 정중히 부탁”(109쪽)하며 아버지를 “제한적으로 포용”(246쪽)2)하려는 태도를 보인다. 이는 “내가 아버지를 아주 닮았다는 사실”(107쪽)을 문득 깨닫는 것처럼 아버지가 그토록 중시하는 가족주의적인 면모가 ‘나’에게도 어느 정도 내포되어 있음을 인정했기에 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나’의 행동은 아버지가 죽기를 진심으로 바라거나 아버지의 죽음에 적극적으로 가담하기보다 김치찌개를 관두기를 “정중히 부탁”하는 것으로 상생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보고자 하는 시도로 읽힌다.
반면 「칵테일, 러브, 좀비」의 두 모녀는 생전의 가부장적인 행동을 그대로 반복하는 아버지의 숟가락을 빼앗아 식탁에서 내쫓고, 골프채로 두들겨 패기도 하며 급기야 ‘처리’라 불리는 살인을 공모하기에 이른다. 좀비 아버지를 대하는 두 소설의 (모)녀의 대응 방식이 다른 것은 송지현의 소설에서 아버지가 공격력 0, 감염력 0의 좀비였던 것에 비해 조예은의 소설 속 아버지는 시간이 지날수록 허기를 느끼며 2차 감염의 위험이 있는 좀비라는 설정에서 발생하는 차이 때문이기도 하지만, 「칵테일, 러브, 좀비」의 모녀가 느끼는 생존의 위협이 감염에 대한 것뿐만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생계유지의 막막함 역시 그들을 위협하는 것이기도 하다. 때문에 “병사나 사고사로 조용히 정리”(91쪽)하여 아버지의 퇴직금을 수령하는 것만이 조금이나마 더 생계를 이어나갈 수 있는 방법이었기에 두 모녀는 적극적으로 아버지를 처리할 계획을 세운다. 이렇게 「칵테일, 러브, 좀비」는 고전 좀비 서사에서 보였던 사람-좀비의 대결 구도를 수용하면서 가부장적인 아버지와 그에 대항하는 모녀를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아버지-모녀간의 대결로 서사 구도가 확장된다. 이를 전면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 바로 어머니가 아버지를 직접 총으로 쏴 죽이는 장면인데, 이는 대결의 승패를 가르는 순간이자 아버지-좀비를 물리치는 일타쌍피의 쾌거를 이루는 명장면이기도 하다. 딸의 감염을 막기 위해 불가피하고 합당한 폭력을 행사하는 것으로, 근절되어야 마땅한 가부장제의 폭력에 대한 복수까지 행하게 되는 것이다.
흡. 누가 낸 소리인지 알 수 없었다. 자신인지, 민인지, 엄마인지. 주연은 고개를 들어 정면을 응시했다. 한 발 앞에, 엄마가. 아빠를 향해 총구를 겨누는 엄마가 보였다. 엄마의 자세는 엉성하기 짝이 없었고 묵직하고 긴 총은 버거워 보였지만 그 끝만은 정확히 아빠를 향했다. 엄마가 분노와 울분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빌어먹을 양반, 끝까지 자식 새끼한테 민폐나 끼치고.”
“엄마!”
모든 일은 순식간에 벌어졌다. 탕, 소리와 함께 썩은 피 냄새가 코를 훑었다. 다리가 풀린 엄마가 그대로 주저앉았다. 오열할 줄 알았던 엄마는 그냥, 그 상태로 멍하니 바닥을 보았다. 그게 다였다. 산탄총은 아무렇게나 바닥을 굴렀다.(102~103쪽)
완벽한 처리를 끝낸 후에야 남는 물음은 “도대체 어쩌다가 좀비가 되었을까?”(84쪽) 하는 것이다. 아버지는 “술을 좋아하고 고집불통이고 가부장적이고 의사소통이 잘 안 되는 인간이었”지만 “크게 사고를 친 적은 없었”(같은 쪽)기에 어쩌면 인간으로서의 연민은 가질 수도 있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아버지가 좀비가 된 이유가 “제약회사들의 악한 음모”(같은 쪽) 따위가 아니라 “살아 있는 뱀을 담가 만든 술”(85쪽)을 마셨기 때문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소설은 아주 찰나의 연민마저도 말끔하게 소거시킨다. 비인간적인 행동으로 스스로 비인간이 되어 맞이하게 된 파멸이었으므로 이에 대항하는 두 모녀의 처리 방식은 다분히 인간적이고 또 이성적이라 이해된다. 아버지에 대한 연민은 사라졌지만 그 자리에 진득하게 남아 있는 건 딸을 위한 엄마의 사랑이다. “20년이 훌쩍 넘는 세월 동안 시가 제사상을 차리던 실력”(106쪽)으로 뱀을 위로하고 용서를 구하는 제사상을 차리는 엄마의 모습은 유쾌하면서도 “네가 살아야 끝”(105쪽)난다는 말의 진심은 순도 100%의 것이라 뭉클하기까지 하다.
이처럼 송지현, 조예은의 소설이 좀비가 된 이후에도 여전히 가부장제 질서 안의 권력자로 군림하려는 아버지에 대한 각기 다른 대응 방식을 보여주었다면, 은모든의 소설에서는 가부장에 대한 한층 더 강력한 복수극이 펼쳐진다. 앞선 소설과 차이가 있다면 은모든의 소설에서 감염은 위계에 대한 전복의 도구로 사용되며 가정 폭력과 친족 성폭력 가해자를 향한 복수의 도구로 쓰였다는 것일 테다. 「501호의 좀비」에서 감염의 대상이 되는 이는 큰아버지로, 그가 표적이 되는 건 가족 내 한 개인의 결단에 의해서가 아니라, 큰아버지를 제외한 가족 전체가 가담한 감염 및 살해 공모라는 점에서 단연 흥미롭다. 십수 년 만에 한국을 찾은 큰아버지는 “심혈관 질환의 권위자”라는 사회적 지위를 가정 내에서도 유효하게 여기는 사람으로 큰어머니는 물론, 한나의 가족까지 부리는 일에 거리낌이 없었다. 사람을 부리는 방식 또한 실로 권위적이라 할 만했는데, 가령 큰아버지는 “결정적으로 뭔가를 시키기보다는 그저 자신이 원하는 바를 말했다.” 때문에 대규모 좀비 이동 사태로 인해 집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상황에서 단 한 사람을 제외한 501호의 모두는 더욱이 답답함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생활 범위가 집안으로 제한된 상황에서도 큰아버지가 원하는 바를 묵묵히 수행하던 한나의 가족들이 태도를 달리하게 된 것은 한나의 동생 이은이 열 살도 되기 전, 큰아버지로부터 성폭력을 당했다는 사실을 고백한 이후부터다. 게다가 범행 중 돌아가신 엄마의 목숨을 빌미로 은이의 저항을 막았다. 그런 과거가 있음에도 피해자가 사는 집에 찾아와 뻔뻔하게 도움을 요청했다는 사실에 한나는 “기만이든, 망각이든” 어느 쪽이라도 용서할 수 없는 분노를 느낀다. 복수를 꿈꾸며 아버지에게 이은의 이야기를 전한다. 그리고 아버지로부터 뜻밖의 소식을 전해 듣게 된다. 큰아버지의 친족 성폭력은 이은이 처음이 아닌데, 막내 고모에게 같은 짓을 저지르는 걸 아버지가 목격한 적이 있으나 큰아버지는 그것을 꿈이라 무마했다는 것이다. 더이상의 자비가 필요 없는 간악한 친족 성폭력 가해자에 대한 처단의 방법으로 한나의 가족은 건물 밖을 둘러싸고 있는 좀비로부터 감염을 계획하며 일부러 큰아버지를 술에 취하게 하고 전기 충격기로 기절시킨다. 이때 이들에게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건 이 집의 또다른 이방인인 큰어머니다. 그는 큰아버지의 아내이자 지극히 권위적인 큰아버지의 모습에도 별다른 불만 없이 순응하는 듯 보였기에 이것이 단순한 친족 살해가 아닌, 처단되어야 마땅한 가해자를 단죄하는 것임을 설득할 방법이 없어 보인 까닭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큰어머니는 가족들의 행동에 “보랏빛 멍 자국”을 보이며 도움의 손길을 보탤 것을 원한다. 좁은 집안에서도 “실크 블라우스에 펜슬 스커트”를 차려입고 “엷고 우아한 화장”을 고수했던 큰어머니의 모습들은 모두 큰아버지의 엄격한 통제의 결과이며 그것이 곧 가정폭력으로 이어졌다는 사실을 고백하면서 큰어머니 역시 사건의 공모자로 가담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한나와 이은, 두 딸의 아버지와 큰어머니는 기절한 큰아버지를 현관문 밖에 던져버리며 마침내 좀비들의 먹잇감이 되게 하는데, 큰아버지가 깨어나며 극한의 공포를 느끼고 도망치는 마지막 장면은 읽는 이에게 더없이 짜릿한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닥터 리는 옥상으로 향하는 계단을 급히 오르다 엉덩방아를 찧으며 굴렀고, 겨우 종종걸음밖에는 칠 수 없도록 묶인 하반신으로 다시 일어서기 위해 발버둥쳤다. 그의 이마에 피가 흘렀다. 타박상의 아픔보다 메슥거림이 더 심했지만 입술이 단단히 봉해진 터라 구역질조차 할 수 없었다. 오직 고통스러울 만큼 격렬히 펌프질해 대는 심장만이 아직 그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듯했다. 닥터 리를 위해 일생 헌신한 심장, 그를 매혹시키고 드높은 곳까지 끌어올려주기도 했던 심장. 허겁지겁 계단을 오른 좀비들을 강렬하게 유혹하는 것 또한 뜨거운 피의 원천인 바로 그 심장이었다. 그것을 손에 넣고 맛보기 위해 좀비들은 앞다투어 그의 살점을 물어뜯었다. 닥터 리는 그렇게 심장을 잃었다. 굳게 닫힌 문 바깥에서, 살려 달라는 말 한마디 외쳐보지 못하고, 공포에 질린 두 눈을 부릅뜬 채로.
이 장면을 통해 감염이 가부장에 대한 복수의 방법으로 효과적으로 기능하였음을 확인하며 앞서 이야기한 소설과 달리 처단 대상의 자리가 감염된 주체에서 감염의 대상으로 이동한 점에 대해서도 다시금 짚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가령 이미 감염된 주체를 직접 살해하는 방법은 가부장제라는 이데올로기적인 폭력에 대한 마땅한 대응으로써의 폭력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테다. 이보다는 간접적이나 감염 자체를 처단의 방식으로 이용하는 것이 더 효과적으로 여겨지는 까닭은 그것이 가해자로 하여금 신체적인 통증은 물론이며 감정적인 고통까지 선사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살려 달라는 말 한마디 외쳐 보지 못하고, 공포에 질린 두 눈을 부릅뜬 채로” 죽어가는 이를 지켜볼 수 있다는 것, “경악과 공포”가 어떤 감정인지 피해자가 깨닫게 했다는 것에서 오는 일시적인 해소감은 처단 대상이 느낀 고통에 비례한다. 이것이 아주 찰나에 불과하다는 사실만이 못내 아쉬운 것일 테다.
비인간적인 행태로 응당 인간이 아니게 되었으나 여전히 인간 행세를 하면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이들을 가족의 이름으로 포용하기엔 이미 너무 오랜 고통의 시간을 감내해왔다. 죽음으로도 무너지지 않는 지난한 폭력의 구조를 해체하기 위한 인물들의 결단은 유효하다. 인간이기에 망설일 수 있는 윤리적 선택의 문제 역시 감염에 의한 존재 변화와 생존의 위협으로 인해 말끔히 정리된다. 감염에 대한 대응과 감염을 이용하는 방식마저 적절했다고 여겨지는 건 지금과 같은 감염의 시대에 아이러니한 생각일까 아니면 현실에 조응하는 마땅한 생각일까. 아무래도 좋았다. 구조적인 감염으로 사라질 기미 없는 이데올로기를, 동시에 결코 감염되지 않는 이데올로기를 전복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감염 안에서 발견했으므로. 침입은 이미 시작되었다.
소유정
질병이 아닌 무언가에 오랫동안 감염되어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다. 스스로 백신을 꽂아넣는 마음으로 읽고 쓴다.
2022/07/26
5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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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송지현의 「좀비 아빠의 김치찌개 조리법」, 『이를테면 에필로그의 방식으로』, 문학과지성사, 2019, 조예은의 「칵테일, 러브, 좀비」, 『칵테일, 러브, 좀비』, 안전가옥, 2020, 은모든의 「501호의 좀비」, 《릿터》 26호를 대상으로 한다. 이후의 인용은 쪽수만을 적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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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해설, 24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