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영 케어러(Young Carer)와 청소년소설

   인생의 마디마디 우리는 누군가의 보살핌을 받거나 누군가를 보살피며 살아간다. 돌봄은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찾아오며 누군가 예외가 되어서도 안 된다. 돌봄은 한 존재가 다른 존재나 세계와 맺는 관계이며 촘촘한 그물망이다. 돌봄이 관계라면 다양한 관계만큼의 선이 그어질 것이다. 특히 청소년의 돌봄 문제는 미성년과 성년 사이의 가시화되지 못했던 영역을 새롭게 조명하게 된다.
   한국 아동문학의 대표작, 『몽실 언니』가 ‘영 케어러’(young carer)가 등장하는 돌봄 서사였다는 점은 현재 시점에서 볼 때 상당히 의미 있는 대목이다. 한국 현대사의 어려운 시절을 배경으로 어린 소녀의 처지를 현실적으로 재현했기에 리얼리즘 정신이 뛰어난 작품으로 꼽히는 이 작품이 출간된 지 40년이 지났다. 작품의 시대적 배경인 한국전쟁이 일어난 것도 70년 전이다. 어린이에 대한 인권 의식이 높은 사회일수록 어린이는 당연히 가정 안팎의 노동에서 제외된다. 『몽실 언니』는 한국에서 어린이들이 어린이답게 살 수 없던 과거를 재현했지만 이제 우리는 우리 시대, 청소년 돌봄의 현장을 살펴야 한다.
   현재 청소년소설에 등장하는 청소년의 모습은 어떨까? 근대 사회의 인권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청소년의 처지에 관해 그간 청소년소설은 가정 폭력, 학교 폭력, 입시 문제, 청소년 노동, 젠더 갈등 등을 소재로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청소년소설은 일상에서 겪기 힘든 사회적 이슈를 상당히 많이 다루는데, 이러한 사건이 자주 등장하는 이유에 관해서는 부가적인 설명이 필요하지만, 어쨌든 이러한 사회 문제를 다룬 작품에는 ‘돌봄’을 받거나 누군가를 돌보아야 하는 청소년 인물이 많이 등장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가족 돌봄 청소년, 영 케어러(Young Carer)의 시선에서 새롭게 접근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영 케어러의 돌봄 노동은 언제 어디서나 있었다. 그러나 영 케어러의 돌봄과 성인의 돌봄(adult care) 간의 돌봄의 가치는 동일하지만 사회적 함의는 다를 수 있다. 또한 영 케어러의 노동 역시 여성 청소년에게 돌봄의 역할이 집중되는 젠더 문제를 안고 있다. 이제 청소년소설 속에서 영 케어러로 호명된 인물들을 가시화해 미성년의 돌봄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가 보자.

   
2. 돌봄의 대상에서 돌봄의 주체로

   우리는 어린이와 청소년을 가족과 사회의 보호를 받는 약자로 인식하지만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 특히 청소년은 가정 형편이 어려워지면 어른과 함께 혹은 어른을 대신하여 가족을 돌보고 생계에 보탬이 되어야 하는 존재가 된다. 청소년이 가진 ‘사이’의 정체성에 따라 청소년은 돌봄을 받거나 돌봄의 주체가 될 수 있다. 청소년은 청소년 노동에 종사하여 가정의 경제원이 되기도, 가족 내 돌봄 노동을 담당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는 청소년을 돌봄의 주체가 아닌 돌봄의 대상으로만 인식해 왔다.
   청소년이라고 일방적으로 양육자의 돌봄을 받는 것이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가족 내에서든 가족을 넘어서든 돌봄은 상생과 연대에 기초한 가치이다. 청소년 역시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 돌봄을 실천하며 성장하는 것이 그들에게 주어진 몫이다. 그런데 청소년이 돌봄의 ‘주체’가 되어 감당하기 힘든 돌봄의 시간을 통과해야 한다면 그것을 어떻게 헤쳐나갈 것인가?
   백온유 작가는 그의 전작 『유원』(창비, 2020)에 이어 청소년소설 『페퍼민트』(창비, 2022)에서 다시 한번 관계의 문제를 이야기한다. 작가가 주목하는 것은 구체적으로 ‘관계에서 발생하는 아이러니’다. 『유원』에서는 생명의 은인이 가장 부담스러운 존재가 되는 아이러니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페퍼민트』에서도 역시 관계의 아이러니를 풀어간다. 그 과정에서 ‘돌봄’이라는 소재를 가져와 가족 돌봄 청소년인 시안이 겪는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다.
   시안의 어머니는 코로나바이러스를 떠올리게 하는 프록시모 바이러스에 걸린 후 식물인간이 되었으며 시안은 엄마의 엄마가 되어 엄마를 돌본다. 전문 간병인과 여러 직업을 전전하는 아버지, 그리고 고등학생인 딸 시안이 번갈아 어머니를 돌보지만 어머니는 몇 년째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 주인공 시안은 “내가 깜빡 존 사이에 엄마가 잘못되면 어떡하지, 그런 두려움 때문에 쏟아지는 잠을 쫓는 마음을”(71쪽) 다른 사람은 모를 거라고 생각한다. 또 친구를 만난 후 “나는 내가 세상에서 얼마나 낙오되어 있는지 실감했다. 보통 사람들의 진도를 죽을 때까지 따라잡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내 미래에 실망하게 되었다.”(71쪽)고도 고백한다.
   근대 사회에서 돌봄의 대상으로 여겨지던 청소년이 자신의 양육자를 돌보게 된 돌봄의 역전이 바로 이 작품의 첫 번째 아이러니다. 이 사회가 정한 청소년의 위치에 의심을 품게 하고 청소년을 바라보는 이중 잣대에 주목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 아이러니의 결과 시안은 ‘이번 생은 망했다’라는 의미인 ‘이생망’의 처지에 놓여, 입시도 장래 희망도 상상할 수 없고 끝이 보이지 않는 간병의 길을 걷게 된다. 우리 사회가 청소년에게 부여한, 자신의 미래를 계획하고 그것을 준비하는 청소년기의 과업으로부터 소외되며 중심에서 점점 더 멀어지는 삶을 살게 된다. 그것은 낯선 길이고 겪어보지 못한 길이다.
   이 작품에서 시안의 엄마는 그들과 매우 친했던, 시안의 친구인 해원의 엄마로부터 감염된다. 한 가족이나 다름없던 이웃이 고통의 원인 제공자라는 게 이 작품의 두 번째 아이러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면 돌봄의 기나긴 여정은, 질병이든 사고든 예기치 못한 순간과 사건, 예기치 못한 사람 때문에 시작된다. 가장 행복한 순간 뒤에 가장 괴로운 시간이 올 수도 있다. 시안 가족에게 일어난 사건은 바로 어느 가족이나 겪을 수 있는 인생 자체가 가진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시안은 다시 일상을 되찾아 평범한 삶을 살고 있는 친구 해원을 우연히 만나며 자신의 내면에서 자라고 있던 상처를 발견한다. 시안은 친구를 보며 시험 준비나 데이트 같은 평범한 일상과도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자신을 처지를 깨닫는다. 해원이 다니는 교회에 일부러 찾아가거나 해원이 기르는 강아지에게 간식을 과도하게 먹이며 자신에게 잠재되어 있던 분노를 표출한다. 거기에 더하여 시안은 해원에게 엄마의 산소 공급 장치 밸브를 잠가달라고 요구하게 된다.
   시안의 이러한 요구나 시안의 아버지가 시도하는 간병 살인 미수의 현장을 보며 우리는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돌보는 시간 속에는 그 사람의 죽음을 원하는 비밀 한 조각도 담겨 있음을 깨닫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영원한 이별을 바라는 속내야말로 인생이 주는 폭력의 아이러니이다. 돌봄 노동에는 육체적, 경제적 문제뿐 아니라 이러한 세밀한 감정의 파고가 고스란히 숨겨져 있다.
   시안이 엄마를 돌보는 딸의 복잡한 심정을 드러낸다면 전문 간병인 최선희라는 인물은 장애인 아들을 돌보는 엄마이자 간병인으로, 험난한 여정을 돕는 단단한 바위 같은 모습을 보여준다. 그동안 적지 않은 편견에 시달려온 직업 간병인을 따뜻한 마음과 전문적 태도를 지닌 직업인으로 긍정적으로 담아낸다.

   “너무 슬퍼하지 마. 모두 결국에는 누군가를 간병하게 돼. 한평생 혼자 살지 않는 이상, 결국 누구 한 명은 우리 손으로 돌보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야. 우리도 누군가의 간병을 받게 될 거야. 사람은 다 늙고, 늙으면 아프니까. 스스로 자기를 지키지 못하게 되니까. 너는 조금 일찍 하게 된 거라고 생각해 봐.” (155쪽)

   간병인이 시안에게 들려주는 대화는 너무 이른 시기에 가족을 돌보게 된 청소년 시안을 위로해주며 동시에 돌봄 문제가 급증하는 이 시기에 우리 사회가 돌봄에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 전한다. 시원의 엄마가 가족을 떠나 요양병원으로 옮겨가는 장면은 가족 내 돌봄에서 사회적 돌봄으로 나아가는 방향을 보여준다. 이 작품은 영 케어러 시안의 가족 내 돌봄 노동과 직업 간병인 여성의 돌봄 노동을 두루 살피며 돌봄이라는 렌즈를 통해 인생을 통찰할 수 있게 도와준다.

   
3. 너무나 오래된 돌봄의 방향

   입양을 소재로 삼은 문경민 작가의 청소년소설 『훌훌』(문학동네, 2022)은 단단한 문장과 흥미롭게 펼쳐지는 전개, 주인공 서유리에게 일어나는 드라마틱한 사연과 주인공의 주위를 다정하게 감싸주는 다양한 조연들의 활약으로 단숨에 읽게 되는 작품이다. 한편의 짜임새 있는 드라마같이 가독성과 흡입력을 갖춘 작품이지만 돌봄의 시각에서 볼 때 몇 가지 고민을 안겨준다.
   이 작품에서 제일 먼저 ‘돌봄’을 실천한 사람은 다름 아닌 서유리를 입양한 서정희다. ‘입양’이야말로 혈연 가족을 넘어 사회적 돌봄의 가치를 논하게 하는 중요한 키워드다. 서정희는 서유리를 자신의 아버지에게 맡겨 버렸고, 자신이 낳은 아이 서연우 역시 제대로 돌보지 않고 방치하고 학대한다. 작품에서 서정희는 이미 사망했기에 독자들은 서정희의 목소리를 직접 들으며 그의 속내를 파악하기 어렵다. 서정희는 입양과 출산이라는 돌봄을 선택했으나 그것에 실패했으며 입양의 사연도 극단적이기에 이 이야기가 ‘입양’이라는 주제를 보편적으로 보여주기는 어렵다.
   서정희의 아버지, 작품 속 할아버지 역시 갑자기 맡게 된 서유리를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 냉정하게 혹은 과묵하게 보이는 할아버지는 이 사회의 전형적인 가부장의 모습을 보여주는 양육자다. 서유리에게 정을 주지 않으려 의식하는 권위적 모습이 단단하고 견고한 벽을 떠올리게 한다. 돌봄이 정신적, 정서적인 부분까지 포함하는 것이라고 할 때 어린 서유리는 할아버지에게 외면을 받으며 외롭게 성장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청소년이 될 때까지 서유리는 할아버지와 정서적 유대감을 전혀 형성하지 못한다.
   표면적인 서사는 서정희와 할아버지가 서유리를 거둔 모양새다. 그러나 실제 이야기에서 돌봄의 방향은 서유리에서 출발한다. 서유리는 열 살 때부터 집안 살림을 묵묵히 해내고 독립을 목표로 학업에도 최선을 다한다. 서유리는 서정희의 아들 연우를 돌보게 되고, 할아버지의 병간호를 맡으며 실질적인 영 케어러가 된다. 여성 청소년의 돌봄 노동으로 집안이 유지되기에 돌봄의 방향은 이 작품에서도 반대로 작동한다.
   언뜻 보기에는 『페퍼민트』와 유사한 영 케어러로 보이지만 두 작품의 돌봄이 수행하는 기능은 전혀 다르다. 『페퍼민트』가 돌봄 노동 청소년을 통해 현대 사회를 되짚어 청소년을 향한 이중 잣대를 보여준다면 『훌훌』 은 『몽실 언니』에서 시작된 오래된 돌봄의 구도를 고스란히 잇는다. 아무리 어려도 ‘여성’ 어린이가 부엌일을 맡고 남성은 가사노동에서 제외되는 한국 사회의 오래된 돌봄 노동의 가부장적 구도가 2022년에 의심 없이 재현된다. 이 작품에서 할아버지는 2층, 서유리는 1층에 기거한다. 서유리가 할아버지에게 대화를 청하기 위해선 2층에 올라가 문을 열고 닫아야 한다. 이런 행동의 반복은 이들의 수평적이지 않은 의사소통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요리를 시작하게 된 건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였다. 할아버지는 말만 없는 게 아니라 요리 실력도 없었다. 삶은 감자와 삶은 달걀만 식탁에 올라올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내가 처음으로 감자와 양파가 들어간 된장국을 끓여 식탁에 올렸을 때, 할아버지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한 숟가락을 떠 입에 넣었다. 별것 아닌 그 순간의 기억이 선명했다. 지금보다 한참 젊었던 할아버지는 너무 오래 끓여 숟가락만 닿아도 허물어지는 감자를 떠먹은 뒤 음미하는 것처럼 음, 하는 소리를 냈다. 나는 윗니로 아랫입술을 지그시 누르고 할아버지의 입과 눈가를 쳐다보았다.
   할아버지는 눈을 껌벅거리며 말했다.
   “맛이, 괜찮구나.”
   그 기억을 떠올리면 그때의 감정이 되살아났다.
(중략)
   할아버지의 입에서 맛이 괜찮다는 말이 나왔을 때 내 안에 차올랐던 기쁨과 보람은 쓸쓸한 바다에서 만난 초록빛 작은 섬 같았다. 그날 나는 식사를 마치고 내 방으로 돌아와 소리 없이 웃었다. (94-95쪽)

   음식 맛이 괜찮다는 할아버지의 한마디에 기쁨과 보람을 느끼는 서유리의 모습을 보는 독자의 마음은 안타깝다. 그러나 이러한 장면에서 독자가 공유해야 할 윤리적 고민은 서유리가 꾸려갈 미래의 삶에 대한 것이어야 한다. 이 작품에서 돌봄을 중심으로 현재적 의미를 찾으려면 전통적 여성 성장 서사를 가져와 우리 시대에 맞추어 어떻게 의미부여를 할 것인지 논의가 이뤄져야 한다. 오래된 돌봄의 방향과 수직적 소통에 의심을 품으면 가부장의 이데올로기와 서유리의 삶이 충돌할 때 새로운 길이 만들어질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후반부 서유리가 입양된 사연이 밝혀지며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서정희는 자신의 남편과 아이를 잃게 만든 교통사고 현장에서 추돌 차량에 탑승했던 서유리를 입양하였고, 자신의 아이 수민을 대신할 존재로 여겨 다시 한번 엄마가 되어 보려 하지만 실패한 것이다. 서유리를 입양한 반전은 전통적 돌봄 서사를 의심하기보다 도리어 강화하는 방향으로 작용한다.
   서유리는 엄마가 자신을 입양한 사연을 알게 되고 자신의 뿌리에 대해 깊이 좌절한다. 서유리의 인생에서 가장 큰 걸림돌은 자신이 벌이지도 않았으며 기억도 할 수 없던 시절에 일어난 사건이다. 그것은 마치 이마에 남은 상처의 흔적처럼 서유리의 마음에 깊이 새겨진다. 서유리라는 인물이 헤쳐나가야 하는 서사적 갈등은 바로 자신의 운명이다. 그리고 과거에 일어난 사연이 압도할 때 인물은 자기 서사를 만들어가기 어렵다.
   이때 작품에 등장하는 교사 서향숙의 발언은 결정적이다. 서향숙은 서정희나 할아버지와 달리 서유리를 도와주며 걱정하는, 서유리에게 돌봄의 마음을 보여주는 유일한 어른이다. 그럼에도 서향숙에 관한 소문과 그 소문을 대하는 서향숙의 태도를 통해 작품은 모든 사람에게는 각자의 사연이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그리고 서향숙의 발언은 어른 인물들이 각자 마주해야 할 자신의 과오를 지워버리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 정도면 죽을 만큼 힘들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것보다 더 독한 일들이 세상 곳곳에서 벌어지더라. 일단 우리는 전쟁은 겪고 있지 않잖아. 지독한 곳에 끌려가서 고문을 당하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내가 겪은 일로 죽어 버리겠다고 말하기는 나는 좀 그래. 하지만 유리야. 사람마다 느끼는 고통은 각각 다른 것 같더라. 감당해 낼 여건도 다르고. 설령 나와 비슷한 상황에서 죽음을 선택한 사람이 있다고 해도 함부로 말할 수는 없을 거야.”
(중략)
   “살아온 길이 저마다 다르니까 함부로 판단할 수는 없을 것 같아. 나는 그 사정을 알 수가 없잖니.” (206-207쪽)

   따라서 이 작품은 갈등의 서사가 아닌 서유리가 지금까지 보살펴 온 연우와 할아버지를 가족으로 보듬는 화해의 서사로 귀결된다. 할아버지와 연우와 함께하는 다정한 마지막 장면은 서유리가 자신의 과거 사연을 녹여 만들어낸 결과이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리베카 솔닛은 젊은 여성으로 산다는 것은 “자신의 소멸을 수많은 방식으로 맞닥뜨리는 것, 혹은 소멸로부터 달아나는 것, 혹은 소멸을 깨닫기조차 회피하는 것, 혹은 이 모두를 동시에 겪는 것”1)이라고 말한다. 서유리가 자신의 과거를 소멸하든, 달아나든 맞닥뜨리든, 스스로 고민할 자기 서사의 내면화가 충분히 필요하지 않았을까? 서유리가 돌보아야 할 대상은 연우나 할아버지가 아니라 다름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이다. 이 작품은 어른들이 자라며 읽어 온,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 말라’는 푸시킨의 시가 주는 메시지와 무척 닮아 있다. 어른들이 세상의 모든 고통에 선하고 의연하게 대처하기를 바라는 이상적 모델을 청소년 인물에게 투영하고 있지 않은가 돌아보게 된다.

   
4. 돌봄 없는 세상은 없다, 그러나

   돌봄은 인류의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노동일 것이다. 사적 행위로 범주화된 그래서 오늘날까지 비가시화와 폄하 속에 이어진 노동이다. 그 폄하의 이유는 젠더적인 측면이 적지 않은데, 그것은 돌봄 노동에 가스라이팅적 속성이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돌봄이라는 단어가 가진 따뜻하고 자애로운 느낌은 돌봄의 실체를 감춘다. 돌봄은 결코 말랑말랑하지 않으며 각종 위계로 엉켜 있고 때로는 폭력적이기도 하다. 그 단단한 결계를 풀어내고 가시화하여 그 방향을 면밀히 살필 수 있는 도구가 현실의 반영물인 문학이다.
   또한 좋은 문학은 어떤 소재를 취했느냐보다는 그 소재를 어떻게 문학적으로 구현하여 보편적인 삶의 진실을 밝히는가를 중요하게 여긴다. 돌봄이라는 소재도 예외는 아니다. 본론에서 모두 살피지 못했으나 현재 여러 청소년소설에 나타나는 돌봄과 젠더의 관계는 고민의 지점을 던져준다. 가령 『얼토당토않고 불가해한 슬픔에 관한 1831일의 보고서』(조우리, 문학동네, 2022) 역시 동생의 실종 이후 무너진 가족 내에서 엄마를 돌보지만 자신 역시 돌봄을 필요로하는 남성 청소년이 등장한다. 이때 엄마는 병원에 입원하고 주인공은 병원을 찾지 않는 전개가 이어진다. 주인공은 주로 돌봄 센터에서 식사를 제공받으며 돌봄 센터 원장과 가족을 잃은 상처를 함께 나눈다. 이 작품의 주제는 가족 상실의 슬픔을 보여주는 것이므로 돌봄은 작품을 평가하는 논외의 기준이라 여길 수 있다. 그러나 돌봄은 특별한 행위가 아니라 인간이 삶을 유지하는 기본 행위다. 이 작품도 남겨진 가족이 서로를 어떻게 돌보거나 외면하는 지에서부터 서사를 되짚어보아야 한다. 그래야 주인공과 가족이 공유하는 슬픔의 사연과 애도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룰 수 있다.
   근대 사회는 성년과 미성년으로 세대를 구분하며 청소년을 가족과 사회의 보호와 통제를 받는 존재로 인식하여 왔다. 하지만 실제로 청소년은 어른을 대신하여 가족을 돌보고 생계에 보탬을 주는 존재로 호명되어 왔다. 많은 청소년소설 속 인물들이 이미 미성년의 노동과 돌봄을 보여주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청소년소설 속 인물들은 돌봄 서사와 어떤 방식으로 마주해야 하는가? 청소년 인물은 의심 없이 이어져내려온 관습화된 돌봄의 위계와 오래된 돌봄의 구도에 질문을 던지는 한편 돌봄의 주체로 성장하며 공동체와 함께 연대해야 한다. 돌봄 없는 세상은 없지만 돌봄의 방향과 구도는 존재한다. 청소년 돌봄 서사는 그 방향과 구도를 드러내는 담론의 장이 되어야 한다.

오세란

청소년문학 평론을 한다. 그간 청소년문학의 정체성에 이어 청소년문학 속에 등장하는 소수자와 타자가 우리 사회의 중심과 주변을 드러낼 수 있는가에 관심을 가져왔다. 올해는 청소년 노동과 청소년 돌봄 노동을 통한 한국 사회 청소년의 위치와 그간 한국 현대사에서 비가시화되었던 직업 청소년의 존재를 드러내는 작업을 고민하고 있다. 청소년 돌봄 문제 역시 우리 공동체의 청소년이 처한 위치와 지향해야 할 방향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테마 임이 분명하다.

2022/11/29
60호

1
리베카 솔닛, 『세상에 없는 나의 기억들』, 김명남 옮김, 창비, 2022, 1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