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기획의 말
   ‘뜻-밖의 오늘’은 지난겨울 낭독 퍼포먼스라는 다섯번째 씨앗을 심었습니다. 안경은 2, 3, 4화의 일부분을 발췌하고 짜깁기하여 새로운 스크립트로 엮어내어 읽은 낭독 퍼포먼스를 소재 삼아 릴레이 소설을 작성했습니다. 5화에서는 안경이 땅 밑에 심어둔 씨앗들이 스스로 싹을 틔우고 가상의 인물 ‘지율, 보름, 희원’이 등장하는 ‘오늘’의 풍경을 함께 바라봅니다.

_안경 김지율, 이보름, 장희원



   바다는 그곳에 있었다

   ※릴레이 소설의 규칙
   쓰는 사람을 정해두지 않을 것.
   스스로 원하는 시점에 글쓰기를 시작하고 멈출 것.
   다른 사람의 글을 충분히 이해하고 이의 공백을 채우지만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하며 이어 쓸 것.


   침묵을 깨는 덴 역시 헛기침만 한 게 없다.
   큼.
   낮고 굵은 음이 허공을 가로질렀다.

   침묵을 깨는 덴 역시 콧노래만 한 게 없다.
   으흠흠.
   어딘가 낯익은 멜로디가 시공을 휘감았다.

   침묵을 깨는 덴 역시 헛기침만 한 게 없다.
   톡톡톡.
   짧고 통통한 검지가 테이블을 세 번 두드리자 우리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모든 장벽들이 와르르 무너져내렸다.

   이윽고,

   더듬더듬 목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처음에 한 사람의 것이었다가 이내 두 사람의 것이 되었다. 곧이어 몇몇 존재의 목소리가 더해지면서 커졌다가 웅얼웅얼 기어들어가기를 반복했다. 마치 연습되지 않은 엉성한 합창 같잖아, 희원은 생각했다. 사실 합창이라는 단어는 꽤 정확한 표현이었다. 여러 성부로 이뤄진 하나의 악곡을 몇 사람이 나누어 부르는 합창처럼 우리도 각자의 호흡과 리듬으로 무언갈 함께 읽기로 했으니깐. 그렇다면 헛기침과 콧노래, 손장난은 일종의 전주였던 셈이다. 전주에서부터 이어지는 합창을 조용히 듣고만 있던 지율은 이 얼기설기한 웅얼거림에 목소리를 함께 포개어보기로 용기를 낸다. 합창이 애초에 완벽한 하모니를 이루고 있었다면 감히 목소리를 함께 겹쳐볼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잘못 끼어들어 다 망쳐버리면 어쩌지?’ 하는 걱정이 지율의 목소리를 삼켜버릴 일은 이제 일어나지 않는다. 완성이나 성공이랄게 없는 이 울림에 동참하기 위해 지율은 앞선 보름의 목소리가 그려내는 꼬리의 궤적을 조심스레 쫓아간다. 한편 희원은 여전히 관찰자의 자세로 침묵하며 두 목소리의 궤적을 상상한다. 보름의 힘 있는 목소리는 마치 큰 선박이 바다를 가로지르며 남기는 활기찬 포말 같다. 지율의 것은 잠수함이 해저에서 규칙적인 물결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낮고 묵직한 파장을 그려낸다. 희원은 자신의 목소리가 이 흐름을 방해하지도, 이 흐름에 무작정 끌려가지도 않는 방식을 떠올린다. 그리고 마침 보름의 목소리가 잦아들 때쯤 종이 속으로 뛰어든다. 문장들이 인쇄되어 있는 평평하고 얇았던 종이가 순식간에 깊어진다. 희원은 다이버가 보글보글 수면 위로 공기 방울 내뱉듯 입 밖으로 글자를 한 자 한 자 내보낸다. 빼곡히 쓰인 문장 중 골라진 몇 음절, 그것들은 어쩌면 희원이 가장 안쪽에 품고 있던 말이었을 테다.

   (…) 집에서 나와 (…) 아직 내가 사라지지 않고 여기 있다 (…) 안도감 (…) 저 멀리 (…) 보인다 (…) 아무렴 상관없다

   희원은 다이빙이 제법 성공적이라는 생각에 뿌듯함이 밀려왔다. 바다 한가운데로 뛰어들어 바라본 풍경은 절벽 위에서 관망할 때와는 또다른 것이었다. 이를테면 생각보다 안락하다는 것? 바다를 휘젓는 물결은 분명 역동적이었지만, 그렇다고 마냥 휩쓸리는 것도 아니었다. 바다가 나를 환대하는 것 같아, 희원은 물 위에 누워 잔잔히 흘러가는 구름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 순간 하늘을 몽땅 가릴 만큼 높고 사나운 너울이 희원을 삼켜버렸다. 꼴깍.

   “괜찮으니깐 팔다리에 힘을 모두 빼 봐. 아직도 뭐가 그렇게 무서운 거야?” J가 푸스스 웃으며 말했다. 희원은 J를 꽉 붙잡고 있던 두 손을 조심히 놓았다. “너도 이제 바다의 일부야. 정확히는 바다를 이루는 무수히 많은 옅은 물결들의 일부. 그렇게 꼿꼿하고 반듯이 서 있는 게 아니라 흔들리는 균형에 몸을 내맡기고 주변의 흐름들과 공명하는 거지. 애써 꾸며낼 것도 없어. 네 몸에 길들여진 습관대로 미끄러지면 돼. 너가 이 흐름에 동참하겠다고 진정으로 마음을 여는 순간, 바다에 새겨진 물결들도 네 물결을 받아들일 테니깐. 자 봐, 이제 움직임이 자연스러워졌지?” 몇 해 전 J에게 바다 수영을 배우며 들었던 말을 끝으로 희원은 정신이 들었다. 눈앞에 보이는 것은 새하얗고 텅 빈 진공뿐. 이곳에서 나가야 해, 희원은 고개를 들어 손에 쥔 종이에서 빠져나와 둥그런 테이블로 시선을 향했다. 바다는 그곳에 있었다. 방금 전처럼 갑작스러운 너울이 치기도 모래사장에 뽕뽕 뚫린 구멍 사이로 공기 방울이 터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다. 때때로 찾아온 정적 사이로 부드럽고 편안한 숨결들이 흘러간다. 테이블 위로 끝을 모르는 자잘자잘한 소리들이 흘러넘치고 모든 소리의 주인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서로를 인식하며 함께하고 있었다. 희원은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어깨에 잔뜩 들어간 힘을 내려놓고. 목소리와 목소리가, 문장과 문장이 맞물리며 파도치는 찰나의 우연한 순간들을 기대하며.

*

   “점점 제가 투명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투명?” 지율이 따뜻한 차를 홀짝이며 되물었다. “우인이, 그다음엔 새벽, 뒤따라 민, 그리고 또다시 새벽, 때로는 지은이…… 순간적으로 머물렀다가 떠나기를 반복하니깐 그게 마치……” “모든 사람이 내가 되고 나는 그들 모두 혹은 아예 새로운 사람이 된 거 같았죠?” 머뭇거리는 희원의 말을 보름이 받았다. “맞아, 그리고 대화하는 기분도 들었어요. 말들이 하나도 연결되진 않지만, 그 자리에 있던 모두 충만했던 요상스러운 대화.” 지율이 동조하며 말을 덧붙였다. “어쩌면 우리가 되는 대화는 ___으을 너머어서는 ______.” 보름의 말이 느리게 멀어져간다. 뻐끔뻐끔 움직이는 보름의 입 모양만 아득히 바라보던 지율은 자신이 여전히 아까 그 테이블에 앉아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방금 전에는 뭐였지? 다시 돌아온 건가, 아니면 데자뷔? 지율의 손에는 마지막 장이 붙들려 있었다.

   대부분이 여백으로 남겨진 마지막 장을 눈으로 훑으며 지율은 상황을 이해해보려 했다. 물밀듯 단편적인 기억들이 스쳐갔다.

   분명 여기에 인쇄된 글자들을 읽었던 것 같은데, 엉성한 합창 같다고 생각했어. 아니, 읽기로 했던 것이 맞나? 그건 일종의 대화였어. 어쩐지 누군가를 만났던 것 같기도 하고 함께 수영을 했던 것도 같아. 몸이 어딘가를 통과해서 여러 빛깔을 가지게 되고 점점 투명해졌다는 말을 했던 것 같은데. 그런데 이게 내가 했던 생각들이 맞을까?

   당황한 지율이 다시 고개를 들어 테이블 너머로 시선을 던졌다. “그건 흔적이에요.” 찻잔에 데워진 물을 따르던 보름이 말을 이었다. “지율 안으로 들어왔던 이들이 내어준 조각이기도 하죠.” 그러자 지율이 천천히 말을 시작했다. “정확하진 않지만 어떤 안도감, 허무함, 결심과 고마움 같은 감정들이 생생해요. 우인이 요리했던 팥죽의 떫은맛과 레스토랑을 박차고 나오던 지은의 씩씩한 마음, 그리고 민이 우산 없이 비를 맞았던 날의 미적지근한 온도까지, 그런 사소한 것들이 모두 느껴져요.” 가만히 듣던 희원이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저는 지율이 만든 팥죽이라고 생각했어요. 비를 맞았던 건 보름이 아니었나요?” “우리에게로 누군가가 뛰어들었고, 우리도 누군가에게로 뛰어들었다는 말이면 충분한 답이 될까요?” 보름이 대답했다.

   보름의 대답에 셋은 자신들이 한 바다가 되어 있음을 깨닫는다. 허리를 곧추세우며 답을 찾아가지 않고 푸스스 힘을 뺀 채 바다에 누인 몸들을 물결이 품고 감싸 안는다. 저기 밀물과 썰물의 물살이 만들어낸 모래 알알의 파편이 반짝이고 있다. 한동안 가만히 빈 여백 속 파도의 흔적들을 바라보는 시간이 이어졌다. 보름은 이 침묵의 시간을, 생각을 가다듬는 것이 아닌, 좀 전의 기억을 더듬더듬 간직하는 데 할애한다. 보름은 이 순간을 영원히 간직하고 싶어졌다.


   
작업 노트 5.




안경

보름, 지율, 희원은 줄곧 안경을 썼던 고도근시자들로, 비슷한 시기에 시력 교정술을 통해 한 꺼풀의 베일을 벗겨냈다. 세 사람은 선명해진 세계에서 여전히 희미한 존재를 찾아 나서기로 한다.
인스타그램 : @wescatterseed

2023/02/14
6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