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개의 목소리
4화 기록
기록을 하는 건 기억하기 위해서일까? 아니다.
기록을 하는 건 나를 기억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건 망각의 고통을 이기기 위해서다1)
기록을 하는 건 나를 기억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건 망각의 고통을 이기기 위해서다1)
미선
현숙2) 의 사진과 영상들을 다시 꺼내보고 어떤 사진으로 이야기할지 추려내는 시간을 가졌는데 매우 좋았어요. 11년 만에, 아니 처음으로 열어본 거니까.
정윤
그전에는요?
미선
그냥 백업만 해두고……
정윤
열어보지 못한 거죠?
미선
사진을 보면 수시로 찾아오는 의심이 더욱 저를 괴롭혔거든요. ‘내가 이걸 가지고 뭘 할 수 있을까, 뭘 하려고 할까. 과연 이렇게 하는 게 맞는 건가, 무슨 의미가 있나?’ 하고 되게 복잡하게 생각하다가, 단순하게 생각하기로 했어요. ‘그래, 현숙을 기억하는 일이잖아. 그 기억의 주체가 다른 누구도 아닌 나이기도 하니까. 이건 쓸데없는 일은 아니야!’라고요.
정윤
현숙의 사진을 봤을 때 느낌이 어땠어요?
미선
뭐라고 해야 할까. 현숙의 얼굴 사진을 마주했을 때는 좀 힘들었어요. 이상한 기분, 설명할 수 없는 불편함이 느껴졌어요. 그게 뭔지는 더 생각해봐야 할 것 같아요.
정윤
얼굴 사진은 특히나 좀 보기가 쉽지 않았을 거 같아요. 저도 다른 사진 보듯이 쉽게 봐지진 않더라고요. 현숙을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전해들은 이야기와 연결해서 사진을 보게 되니까요.
미선
정윤씨가 가져온 문희 언니 사진 볼 때 저도 그랬어요.
정윤
문희3) 죽고 나서 그애 사진을 한동안 못 봤어요. 왜 그런지 지금도 잘 모르겠지만…… 죽음이랑 연결해서 사진을 보기 때문인 거 같아요. 이 사람이 지금 살아 있지 않고 죽었다는 사실, 그리고 거기에 달라붙는 여러 감정들이 있어서요.
미선
공감해요. 이미지일 뿐인데 뭔가를 확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정윤
문희가 살아 있었을 때의 기억보다는 ‘내가 이 사람을 계속 똑바로 바라봐도 되는 건가?’ 이런 생각도 들거든요.
미선
그럼에도 다시 현숙을 똑바로 보는 게 나쁘지만은 않았어요. 현숙이 어떤 모습이었는지를 정확하게 보니까 반갑고 좋았어요.
정윤
어떤 모습이 반가웠어요?
미선
현숙이 자기 얼굴을 많이 찍었더라고요. 거울에 비친 자신을 많이 찍었는데,
‘현숙에게는 자기를 보는 게 중요했나보다.’라는 생각을 했어요. 예전엔 그냥 놀리기만 했거든요. “너는 맨날 네 얼굴만 찍냐? 핸드폰에 네 사진만 잔뜩이다.”라고 얘기했었는데 지금은 오히려 고마워요.
정윤
사실 현숙의 사진 하나하나 궁금했지만, 미선씨가 먼저 이야기 꺼내기 전까지는 질문하지 말아야지 하고 생각했어요. 이렇게 궁금한 채로 가도 괜찮겠다 싶어서. 그런데 지금 미선씨가 제가 궁금해했던 점에 관해 얘길 많이 해주셨어요.(웃음)
미선
그럼 하나하나 살피면서 이야기해볼까요?(웃음) 사진 중에는 커튼 사진이 두세 장 있어요. 우리가 같이 쓰던 방에 걸려 있던 커튼이에요. 제가 인도에서 가져온 머플러를 커튼 대신 걸어둔 거였거든요. 현숙이 찍은 건지 내가 찍은 건지 모르겠어요. 처음엔 ‘얘가 이런 취향이 있었나?’ 하고 보다가 ‘내가 찍었나?’ 싶었어요. 누가 찍었는지 도저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누가 찍었어도 상관없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나인지 현숙인지 모르겠지만, 커튼을 흔드는 바람을 찍고 싶었나보다 생각했어요.
정윤
커튼이 무척 인상적인데요. 제가 그런 색과 질감의 천을 무척 좋아해서 그런지 자꾸 눈이 가더라고요. 사진마다 커튼의 형태가 다르네요. 생명이 있는 게 아닌데 계속 바뀌는 천 모양은…… 바람 때문에 그런 건지, 그때 선풍기를 일부러 틀어놓은 건지?
미선
바람, 밖에서 들어오는 바람.
정윤
세게 불어온 바람 때문에 천이 매우 팽팽하게, 무척 볼륨감 있게 변하는데, 그 형태가 참 인상적이에요. 그 아래로 책상 두 개도 보여요.
미선
네, 지저분한 쪽이 제 책상이에요.
정윤
리버 피닉스 사진도 붙어 있네요. 저도 무척 좋아했어요.
미선
옆에 니키라는 화가 그림도 붙어 있어요. 그런데 보다보니까 이 사진, 현숙이가 찍은 사진이면 좋을 것 같아요. 내 자리를 현숙이 바라보고 사진 찍어둔 거라고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서.
정윤
사진 말고 영상도 있잖아요. 현숙의 모습과 시선을 영상으로 살피니까, 사진으로 볼 때와는 느낌이 또 달랐어요. 영상 속에 정말 살아서 움직이고 있으니까, 생생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으니까…… 여전히 저는 현숙을 모르지만, 화면 너머 현숙을 대면했을 때 마음이 아프기도 하면서 무척 반가웠어요. ‘아, 얘구나!’
미선
맞아요, 대면. 저도 그래서 사진이나 영상을 볼 때 불편했나봐요. 만질 순 없지만 거의 만지는 것과 가까운 듯한 느낌으로, 앞에 현숙이 서 있으니까. 꿈속에서만 보다가 깜짝 놀란 거죠. 결국은, 영상으로 남았다고 해도 어쨌거나 없는 사람이니까, 그것도 실체는 아닌 거잖아요. 그래서 회로가 꼬이듯이 제 감각이 확 꼬였던 거예요. 현숙은 지금 사라진, 어쩌면 사라지고 있는 상태 아닌가 싶어요. 제 기억 속에서도, 현숙 자신의 삶에서도, 세상 속에서도 아무리 소환해서 불러낸다고 해도 결국은 사라지는 중 아닐까요.
두 개의 목소리
안미선은 그림을 그리고, 안정윤은 영상을 만듭니다. 미선과 정윤은 죽음에 관한 주제로 대화를 나누고 기록합니다. 마치 산책길을 거니는 사람들처럼, 예쁜 돌을 주우면 보여주고 낯선 소리를 들으면 멈춰 서서 같이 귀 기울였다가 다시 이야기합니다.
2019/03/26
16호
- 1
- 롤랑 바르트, 『애도 일기』, 김진영 옮김, 이순(웅진), 2012, 123쪽.
- 2
- 미선의 동생 안현숙은 문구 디자이너를 꿈꾸던 청년이었다. 장난감 수집을 좋아했다. 특히 로봇을 좋아했고 로봇 전개도를 만들어 조립하기를 즐겼다. 1981년 10월 28일 태어나 2007년 10월 15일 스스로 생을 마쳤다.
- 3
- 정윤의 친구이자 옛 직장 동료인 강문희는 전자연구소 연구원으로 근무하다 결혼 후 남편의 전근으로 여러 나라에 체류하면서 일과 학업을 병행했다. 케냐에서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 컴퓨터공학 박사 과정을 준비하던 중 무장테러리스트의 총격으로 사망했다. 1975년 5월 14일 태어나 2013년 9월 21일 생을 마쳤다.
- 4
- 마리 로랑생, 「잊혀진 여자」, 『밤의 수첩』, 오성춘 옮김, 도서출판 한빛, 19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