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을 하는 건 기억하기 위해서일까? 아니다.
  기록을 하는 건 나를 기억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건 망각의 고통을 이기기 위해서다1)


죽은 이가 남기고 간 얇은 사물을 들여다본다. 그가 붙잡아두고 싶었던 순간은 무엇이었을까? 그에 대한 기억을 붙잡기 위해 그와 함께 나누었던 시간의 조각들을 모아본다.

미선
현숙2) 의 사진과 영상들을 다시 꺼내보고 어떤 사진으로 이야기할지 추려내는 시간을 가졌는데 매우 좋았어요. 11년 만에, 아니 처음으로 열어본 거니까.

정윤
그전에는요?

미선
그냥 백업만 해두고……

정윤
열어보지 못한 거죠?

미선
사진을 보면 수시로 찾아오는 의심이 더욱 저를 괴롭혔거든요. ‘내가 이걸 가지고 뭘 할 수 있을까, 뭘 하려고 할까. 과연 이렇게 하는 게 맞는 건가, 무슨 의미가 있나?’ 하고 되게 복잡하게 생각하다가, 단순하게 생각하기로 했어요. ‘그래, 현숙을 기억하는 일이잖아. 그 기억의 주체가 다른 누구도 아닌 나이기도 하니까. 이건 쓸데없는 일은 아니야!’라고요.

정윤
현숙의 사진을 봤을 때 느낌이 어땠어요?

미선
뭐라고 해야 할까. 현숙의 얼굴 사진을 마주했을 때는 좀 힘들었어요. 이상한 기분, 설명할 수 없는 불편함이 느껴졌어요. 그게 뭔지는 더 생각해봐야 할 것 같아요.

정윤
얼굴 사진은 특히나 좀 보기가 쉽지 않았을 거 같아요. 저도 다른 사진 보듯이 쉽게 봐지진 않더라고요. 현숙을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전해들은 이야기와 연결해서 사진을 보게 되니까요.

미선
정윤씨가 가져온 문희 언니 사진 볼 때 저도 그랬어요.

정윤
문희3) 죽고 나서 그애 사진을 한동안 못 봤어요. 왜 그런지 지금도 잘 모르겠지만…… 죽음이랑 연결해서 사진을 보기 때문인 거 같아요. 이 사람이 지금 살아 있지 않고 죽었다는 사실, 그리고 거기에 달라붙는 여러 감정들이 있어서요.

미선
공감해요. 이미지일 뿐인데 뭔가를 확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정윤
문희가 살아 있었을 때의 기억보다는 ‘내가 이 사람을 계속 똑바로 바라봐도 되는 건가?’ 이런 생각도 들거든요.


정윤의 영상 <나는 당신을 만나지 않았어요> 중 한 장면. 현숙이 ‘찍힌’ 사진보다는 ‘찍은’ 사진에 더 시선이 간다. 사진을 찍을 때 현숙은 무엇을 보았고 어떤 생각을 했을까? 현숙이 만들어놓은 프레임을 더듬거리며 거닐어본다.

미선
그럼에도 다시 현숙을 똑바로 보는 게 나쁘지만은 않았어요. 현숙이 어떤 모습이었는지를 정확하게 보니까 반갑고 좋았어요.

정윤
어떤 모습이 반가웠어요?

미선
현숙이 자기 얼굴을 많이 찍었더라고요. 거울에 비친 자신을 많이 찍었는데, ‘현숙에게는 자기를 보는 게 중요했나보다.’라는 생각을 했어요. 예전엔 그냥 놀리기만 했거든요. “너는 맨날 네 얼굴만 찍냐? 핸드폰에 네 사진만 잔뜩이다.”라고 얘기했었는데 지금은 오히려 고마워요.

정윤
사실 현숙의 사진 하나하나 궁금했지만, 미선씨가 먼저 이야기 꺼내기 전까지는 질문하지 말아야지 하고 생각했어요. 이렇게 궁금한 채로 가도 괜찮겠다 싶어서. 그런데 지금 미선씨가 제가 궁금해했던 점에 관해 얘길 많이 해주셨어요.(웃음)

미선
그럼 하나하나 살피면서 이야기해볼까요?(웃음) 사진 중에는 커튼 사진이 두세 장 있어요. 우리가 같이 쓰던 방에 걸려 있던 커튼이에요. 제가 인도에서 가져온 머플러를 커튼 대신 걸어둔 거였거든요. 현숙이 찍은 건지 내가 찍은 건지 모르겠어요. 처음엔 ‘얘가 이런 취향이 있었나?’ 하고 보다가 ‘내가 찍었나?’ 싶었어요. 누가 찍었는지 도저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누가 찍었어도 상관없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나인지 현숙인지 모르겠지만, 커튼을 흔드는 바람을 찍고 싶었나보다 생각했어요.

정윤
커튼이 무척 인상적인데요. 제가 그런 색과 질감의 천을 무척 좋아해서 그런지 자꾸 눈이 가더라고요. 사진마다 커튼의 형태가 다르네요. 생명이 있는 게 아닌데 계속 바뀌는 천 모양은…… 바람 때문에 그런 건지, 그때 선풍기를 일부러 틀어놓은 건지?

미선
바람, 밖에서 들어오는 바람.

정윤
세게 불어온 바람 때문에 천이 매우 팽팽하게, 무척 볼륨감 있게 변하는데, 그 형태가 참 인상적이에요. 그 아래로 책상 두 개도 보여요.

미선
네, 지저분한 쪽이 제 책상이에요.

정윤
리버 피닉스 사진도 붙어 있네요. 저도 무척 좋아했어요.

미선
옆에 니키라는 화가 그림도 붙어 있어요. 그런데 보다보니까 이 사진, 현숙이가 찍은 사진이면 좋을 것 같아요. 내 자리를 현숙이 바라보고 사진 찍어둔 거라고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서.

정윤
사진 말고 영상도 있잖아요. 현숙의 모습과 시선을 영상으로 살피니까, 사진으로 볼 때와는 느낌이 또 달랐어요. 영상 속에 정말 살아서 움직이고 있으니까, 생생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으니까…… 여전히 저는 현숙을 모르지만, 화면 너머 현숙을 대면했을 때 마음이 아프기도 하면서 무척 반가웠어요. ‘아, 얘구나!’

미선
맞아요, 대면. 저도 그래서 사진이나 영상을 볼 때 불편했나봐요. 만질 순 없지만 거의 만지는 것과 가까운 듯한 느낌으로, 앞에 현숙이 서 있으니까. 꿈속에서만 보다가 깜짝 놀란 거죠. 결국은, 영상으로 남았다고 해도 어쨌거나 없는 사람이니까, 그것도 실체는 아닌 거잖아요. 그래서 회로가 꼬이듯이 제 감각이 확 꼬였던 거예요. 현숙은 지금 사라진, 어쩌면 사라지고 있는 상태 아닌가 싶어요. 제 기억 속에서도, 현숙 자신의 삶에서도, 세상 속에서도 아무리 소환해서 불러낸다고 해도 결국은 사라지는 중 아닐까요.


정윤의 영상 <나는 당신을 만나지 않았어요>의 일부(1분 8초)

미선
현숙이 거울 속 자신을 사진으로 많이 남겼다고 했죠. 그중 빛이 반사되어 얼굴 부분이 날아간 듯이 나온 사진 있잖아요. 얼굴이 잘 안 보이는데 오히려 그 사람이 거기에 더 있는 것처럼 느껴졌어요.

정윤
네, 저도 참 인상적이었어요. 빛 때문에 잘 보이지 않는 얼굴 부분엔 카메라가 있을 거예요, 카메라 들고 있는 현숙.

미선
현숙의 사진들은 현숙의 자화상이 아닌가 싶어요. 다른 사람이 찍어준 사진보다 이렇게 자화상 찍듯이 찍어놓은 사진이 저는 참 좋더라고요. 현숙이 자기에 대한 고민이 많았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고요.

정윤
또다른 사진을 보면 더 그런 생각이 들어요. 단순하게 예뻐 보이려고 찍은 게 아니라, 현숙 얼굴에 자기 자아가 드러나는 것 같아요. 그때 무슨 생각을 하며 찍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미선
그 사진은 현숙이 학교 화장실 거울을 바라보며 찍은 사진인데, 꽤 여러 컷을 찍어둔 걸 보면 뭔가 심혈을 기울여서 찍은 것 같아요. 입은 옷도 인상적이고요. 제 옷이거든요.

정윤
위아래 다?

미선
다. 현숙이 입은 티셔츠는 특히 제가 좋아했던 옷이에요. 목 부분이 엄청나게 늘어나고 누렇게 바래고 해졌는데도 오래 갖고 있었거든요. 인도 여행 다니면서 갖고 다녔던 옷이고요. 현숙이 제 옷을 입은 걸 보니까 희한한 기분이 들었어요. 그때는 미처 몰랐는데, 지금 보니까 무척 희한해요.

정윤
그럴 것 같아요. 내가 모르는 사람이 나랑 똑같은 옷을 입고 지나가도 저는 기분이 되게 이상하거든요. 근데 미선씨가 알고 있는 사람이, 그것도 동생이 자기 옷을 그대로 입고 있으면……

미선
다른 사진도 잘 보면, 다 저랑 같이 입던 옷이에요. 현숙이 입은 보라색 옷이 반갑게 느껴지기도 하고, ‘그래, 주인 없는 옷인데 현숙이 잘 써줬구나.’ 이런 생각도 들어요. 그리고 사진을 보다보면, 현숙의 체취가 사진을 뚫고 건너오는 것 같아요. 이틀 동안 새벽에 현숙의 사진들을 봤는데, 그건 처음 접해보는 느낌이었어요.


미선의 그림 <모르는 꽃> 스케치

미선의 그림 <모르는 꽃 1>. 이미지를 뚫고 나오는 현숙의 얼굴을 보는 일은 어려웠다. 여러 사진 중 빛 반사로 얼굴이 보이지 않는 사진을 들고 왔다. 그 자리에 활짝 핀 꽃을 놓아주고 싶었다.

정윤
본인이 좋아했던 옷을 현숙이 입은 걸 보니까 기분이 이상하다고 그랬잖아요. 왜 그런 마음이 드는 걸까요?

미선
뭔가 현실 감각을 잠시 잊은 것 같은 불편함이 있어요. 너무 생생하게 옷도 기억나고 집에 가면 현숙이 있을 거 같은 느낌이요. 거기서 오는 혼란. 그런데 그냥 상상하는 거보다 사진을 보면 볼수록 면역력이 생기는 거 같아요. 지금은 사진도 여러 차례 보고 이야기도 하고 해서 괜찮아진 것도 같네요. 그림으로 미처 그리지 못했던 현숙의 얼굴도 마저 그려봐야겠다 싶어요. 얜지 나인지 모르겠는 얼굴을 그려서 ‘내 프로필 사진을 현숙의 얼굴로 그려서 바꿔볼까?’ 그런 생각을 했는데 대신해서 뭘 해주고 싶은 마음이 언뜻언뜻 들 때가 있거든요. 현숙의 이름으로 뭘 해주고 싶다든가, 계정을 만들어준다든가, 그런 마음이요.

정윤
제가 문희의 이야기를 영상에 담은 적이 있는데, 허구가 아니라 실제 이야기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전달하고 싶어서 그애를 앗아간 테러 사건에 관한 뉴스를 넣었어요. 내 친구가 ‘실제 존재했던 사람이야.’라고, 이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은 마음이 컸어요.

미선
저도 그런 마음도 큰 거 같아요. 여전히 존재하고 활동하는 사람처럼 내가 대신이라도 해주고 싶은 마음이 순간순간 들어요. 화가 마리 로랑생이 쓴 시를 전시회에 갔다가 알게 됐는데, 그 시가 이런 우리 마음과 닿아 있어요. 잊히고 사라져가는 것에 대한 불안과 슬픔이 느껴지거든요.

정윤
어떤 화가인가요?

미선
남편이랑 일찍 이혼했고, 자식은 없었던 거 같아요. 강아지, 고양이 키우면서 그림만 그린 화가라고 해요. 전시회 오디오 가이드 낭독으로 그가 쓴 시를 접하게 됐어요. 나중에 책으로 찾아봤어요. 번역은 「잊혀진 여자」로 되었는데, 원제는 「진정제」라는 뜻이에요.

정윤
'진정제'라는 말이 마음에 들어요. 같이 읽어볼까요?


    지루하다고 하기보다 슬퍼요.
    슬프다기보다
    불행해요.
    불행하기보다
    병들었어요.
    병들었다기보다
    버림받았어요.
    버림받았다기보다
    나 홀로.
    나 홀로라기보다
    쫓겨났어요.
    쫓겨났다기보다
    죽어 있어요.
    죽었다기보다
    잊혀졌어요.4)


정윤
마리 로랑생이 자기 자신의 상태를 쓴 것 같아요.

미선
그랬을 수도 있고 당시 상황도 영향이 있을 거 같아요. 전쟁이라든가 옛 연인의 죽음이라든가. 단순하게 써내려간 시이지만 슬프고 마음에 많이 닿더라고요.

정윤
시 쓰면서 가슴이 아팠겠어요.

미선
전시회 오디오 가이드로 들은 시는 좀 다르게 번역되었던 것 같아요. 살이 더 붙어 있었어요. 기억이 정확하진 않지만 “지루한 여자가 제일 불행해요. 집 안에만 있는 여자보다 더 불행한 건 슬픈 여자. 슬프기보다 불행한 여자는 버림받은 여자. 버림받은 여자보다 더 불행한 건 병든 여자. 보다 더 불행한 건 홀로 남겨진 여자. 홀로 남겨진 여자보다 더 불행한 건 쫓겨난 여자. 쫓겨난 여자보다 더 불행한 여자는 죽은 여자. 그리고 죽은 여자보다 더 불행한 여자는 잊혀진 여자.”라는 식이었어요. 시의 마지막행이 “잊혀졌어요”인데, 무엇보다 잊혀진다는 게 제일 불행하다고 말하고 있는 거잖아요? 공감할 수 있었어요. ‘그래, 정말 끔찍한 일일 수도 있어. 누군가에게서 잊혀지고 아무에게도 기억되지 못하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죠.

정윤
우리는 죽은 사람이 잊히는 걸 슬퍼하면서 그들이 잊히지 않도록 이런 프로젝트를 하고 있는데, 마리 로랑생은 살아 있음에도 잊혀져가는 자신에 대해 이렇게 쓴다는 게…… 비참함을 많이 느꼈을 것 같아요.

미선
제가 잊혀지는 것도 썩 좋지 않은데 현숙이가 잊혀지고 있는 건 슬퍼요. 그래서 이런 마음을 잘 붙들면서 동생이 잊히지 않게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작업을 계속해나가야겠다, 그게 나의 임무이다, 시 보면서 그런 생각도 들더라고요.(웃음)


미선의 그림 <모르는 꽃 2>. 꽃이 진 자리에 서서 한참을 바라본다. 익숙한 표정이다. 어쩐지 ‘나’의 표정과 닮았다.



두 개의 목소리

안미선은 그림을 그리고, 안정윤은 영상을 만듭니다. 미선과 정윤은 죽음에 관한 주제로 대화를 나누고 기록합니다. 마치 산책길을 거니는 사람들처럼, 예쁜 돌을 주우면 보여주고 낯선 소리를 들으면 멈춰 서서 같이 귀 기울였다가 다시 이야기합니다.

2019/03/26
16호

1
롤랑 바르트, 『애도 일기』, 김진영 옮김, 이순(웅진), 2012, 123쪽.
2
미선의 동생 안현숙은 문구 디자이너를 꿈꾸던 청년이었다. 장난감 수집을 좋아했다. 특히 로봇을 좋아했고 로봇 전개도를 만들어 조립하기를 즐겼다. 1981년 10월 28일 태어나 2007년 10월 15일 스스로 생을 마쳤다.
3
정윤의 친구이자 옛 직장 동료인 강문희는 전자연구소 연구원으로 근무하다 결혼 후 남편의 전근으로 여러 나라에 체류하면서 일과 학업을 병행했다. 케냐에서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 컴퓨터공학 박사 과정을 준비하던 중 무장테러리스트의 총격으로 사망했다. 1975년 5월 14일 태어나 2013년 9월 21일 생을 마쳤다.
4
마리 로랑생, 「잊혀진 여자」, 『밤의 수첩』, 오성춘 옮김, 도서출판 한빛, 19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