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물 연금 실습, 산소(O). 총 6분 12초.

   나는 원래 불이었나이다. 지독한 불. 꺼지지 않는 불. 생명을 해치는 불.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영혼들이 불속에서 고통받는 모습을 보았나이다. 마루뼈만 남은 두개골을 누군가 거꾸로 뒤집어놓은 듯 아랫부분이 오목하게 휘어 있는 그곳을 나는 지옥으로 기억하나이다. 죄지은 망자들이 불타는 바다에서 허우적거리며, 자기 조상들의 머리를 짓밟고 올라서서라도 불길과 멀어지려 이리저리 떼 지어다니는 까닭에, 좌우로 기울며 저절로 달그락거리는 앙화의 항아리를 나는 똑똑히 기억하나이다. 물론 지금도 마음먹기만 하면 그곳을 들여다볼 수 있나이다. 손바닥 한 번 바르게 펴는 동작만으로도 지옥이 내 손뼈 위에 펼쳐지니, 이는 내가 그곳에서 아주 오랜 세월을 살았기 때문이오이다. 따라서 나는 지옥을 무슨 책상반에 놓인 찻잔처럼 내려다보곤 하나이다. 잉걸불처럼 타오르는 내 눈과 마음은 석탄과 같이 검고 무시로 무감할 뿐이오이다. 진실로 그러하나이다. 억겁에 가까운 무량한 시간이 시냇물처럼 졸졸 흘러가는 동안, 나는 모든 일에 따분해졌고 다만 먹는 일에만 집착했을 따름이오이다. 무엇을 먹었냐고 물으신다면, 죄와 살이 참 맛있었더라고 아뢰오이다. 먹을 것이 참 많았나이다. 먹을 것만은 부족하지 않았나이다. 먹는 일에 억지로 여흥을 느꼈나이다. 내 자신이 단지 허기진 아가리에 지나지는 않는지 의심하며. 유황불 속에서도 끊임없이 재생되는 죄인들의 육신을 깨물고, 찢어발기고, 삶거나 익혀서 먹었나이다. 언제까지고 그럴 줄 알았나이다. 그러니까, 나는 원래 이곳에 내려오면 안 되는 운명이었나이다.

   (+)O

   내 이름은 파주에서 천태종 사찰을 운영하시는 한 스님이 지어주었다. 스님은 세계만세력과 오행의 흐름을 파악하여 몇 가지 이름을 제안했는데, 할아버지가 고른 이름이 지금 내 이름이 되었다. 그래서 쇠북 종(鐘)은 불의 기운을 다스리는 한자로서 내 중간 이름 자리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때마침 이 항렬자가 우리 집안의 32세손들 앞으로 예약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나중에 알게 되었다.) 할아버지는 나를 마주 앉혀두고, 획수만 스무 개에 이르는 복잡한 문자를 넓은 종이 바닥 위에 몇 번이고 눌러쓰게 만들었다. 그러다보면 나는 나의 이름뿐 아니라 육신까지도 작은 종루처럼 감각하게 되곤 했다. 두께도 형태도 알 수 없는 종을 품기 위해 태어난 것처럼. 나는 내 이름이 매우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말하자면 쇠북 종(鐘)을 받아쓸 때마다 아주 섬뜩한 풍경 하나를 떠올려야 했기 때문이다. 이 회의문자를 만들기 위해서는 특별한 희생이 따라주어야만 했다. 그러니까 쇠 금(金)과 아이 동(童)을 조합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아이 하나를 솥단지 안으로 던져넣어야 했던 것이다. 실제로 소전체나 금문체로 같은 문자를 다시 써보면 수긍할 수밖에 없는데, 펄펄 끓는 쇳덩이를 왼쪽 부수 자리에 그려넣은 후― 손발이 묶인 상태로 천장에 매달려 있는 아이 하나를 오른쪽 모양자로 나타내야만 한다. (아이 동(童)자가 주나라 때까지만 해도 노예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은 오늘날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고대 중국에서는 노예가 함부로 저항하지 못하도록 한쪽 눈(目)을 찔러서 멀게 했다고 한다.) 솥단지 가까이 아이를 붙여야만 쇠북 종(鐘)이 마침내 완성된다는 사실은 옛날 불가에서 범종을 만들 때 갓난아기를 쇳물에 던져넣곤 했다는 전설과 맞물려 몹시 거북하게 받아들여졌다.
   종원아, 종원아. 너는 범종(梵鐘)이 되고 싶니, 벨(Bell)이 되고 싶니? 좋은 소리를 내려면 갓난아기를 구리와 함께 끓여야 한다던데. 넌 뉘집 아이를 게 녹여넣었니? 제 발로 쇳물에 들어갈 뱃심이라곤 조금도 없는 거니? 할아버지는 당신 앞에 엎드려 앉아 구역질을 참으며 자기 이름 쓰기를 연습하는 손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는 이렇게 네 이름을 쓸 때마다 종을 하나씩 만드는 것이야. 네가 타고난 불길이 해악을 끼치지 않고 좋은 쪽으로 사용되도록 스스로 애쓰는 꼴이야. 그때 나는 내 마음 속에서 타올라야 했던 수많은 아이들을 하나하나 떠올렸고, 이렇게 제작된 종들 앞으로 이름도 붙여주었다. 수백 년 전 서양의 가톨릭 사제들이 그랬듯이. 교황 전례서의 규범에 따라 주교들에게 축성받은 종들은 신체장애자들이 가져온 기름으로 일곱 차례에 걸쳐 십자가 모양으로 도유식을 치른다고 한다. 이와 같이 신성한 의식으로 종은 최후의 고통을 버티게 해주는 위안의 소리를 죽어가는 사람들 앞으로 전달하게 되는 것이다. 말년에 가톨릭 신앙에 깊이 빠져들었던 조리스카를 위스망스는 이렇게 묘사한다. “거대한 샤프하우젠의 종에 돋을새김으로 쓰인 이 문구를 들어보세요. ‘나는 산 자들을 부르고, 죽은 자들을 위해 눈물을 흘리고, 벼락 소리를 끊어놓는다.’ 또 겐트의 종루에 있는 낡은 종에 쓰여 있는 다른 문구를 들어보세요. ‘내 이름은 롤랑드이다. 내가 천천히 땡그랑거리며 울리면 불이 난 것이다. 내가 빠르게 울리면 플랑드르 지방에 폭풍우가 온다는 것이다.’”1) 그러니까 내가 이때 쇠북 종(鐘)자를 수만 번 눌러 쓰지 않았더라면, 나의 정신과 육신은 일찍이 불길에 집어삼켜졌을 것이다.

   (+)O

   스님은 나에게 친구를 가려 사귀라고 말했다. 초등학교 입학을 앞둔 일곱 살 겨울의 일이었다. 그는 오행에 숲이 많은 목(木) 속성의 친구들과 가깝게 지내라고 조언했다. 특히 수풀 림(林)자를 성씨로 사용하는 평택 임씨, 조양 임씨 일가와 나주 임씨 사람들이 앞으로 큰 도움을 줄 거라고 장담했다. 스님은 내가 그들 사주의 명리학적 지층 위로 자라 있는 나무들을 남김없이 먹어치워야만 그나마 얌전해질 수 있다고 덧붙였다. 한편, 오행에 물이 많은 수(水) 속성의 친구들과는 멀어지라고 당부했는데, 자칫하면 그들과 부딪치고 싸우는 바람에 걷잡을 수 없이 커질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스님 말대로 나는 나무 같은 친구들과 주로 어울렸고, 특히 임씨 성을 가진 친구들과는 각별한 우정을 쌓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 내 주위에 대나무처럼 올곧고, 물푸레나무처럼 푸르며, 참나무처럼 마음 넓었던 친구들이 단 한 명도 남아 있지 않은 것은 단지 우연일 뿐인가? 또는 나의 소홀함 때문인가? 차라리 그렇다면 좋겠다. 내가 그들을 다 태우고 황폐하게 만들어버린 나머지 사라진 게 아니라, 그들이 어느 때인가 스스로 선택해서 내 곁을 떠났다고 믿는 편이 보다 덜 고통스럽다. 꼬맹이 시절, 어디로 고개를 돌려도 오롯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나의 임씨 친구들이 지금은 어디에선가 숲이 되어 있기를 바란다. 그러니까 그들이 오래전에 내 옆을 지켜주지 않았더라면, 나의 정신과 육신은 일찍이 불길 앞에 속절없이 무너져내렸을 것이다.

   (+)O

   뜨겁고 매운 음식을 피할 것. 혈압과 심장의 질병을 조심할 것. 그러니까 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죽고 못 사는 담배와 술 또한 마찬가지로 치명적임. 어른들은 바라지 않겠지만, 반드시 예술을 하게 될 것. 네 할아버지는 그런 미래를 막으려고 갖은 수를 다 쓰고 있지만, 결국은 모두 무위로 돌아갈 것. 너는 정화(丁火)가 아니라 병화(丙火)의 기운을, 그것도 아주 크고 맹렬한 태양불을 타고났음을 항시 기억하고, 화려한 옷차림은 피할 것. 아마도 어두운 옷이 네 화를 숨기기에 좋은 껍데기가 되어줄 것. 또한 너는 본디 너희 조상들이 천 년 전에 지은 죄를 먹고 살던 지옥불이었음을 알 것. 네가 이 집안에 태어난 것은 네 조상들 팔자에 미리 점지되어 있었으니, 때마침 불을 다스리기 좋은 항렬자를 물려받은 것이 그 증거가 될 것. 네 조상들이 앞선 조상들의 잘못을 대신 뉘우치며 지난 수백 년 간 정성으로 불공을 쌓은 결과, 청명관대하신 나무아미타불께서 중생들이 제 운명으로 쌓아 올린 불탑을 알아보시고 네 조상들을 지옥에서 꺼내주셨던 것. 너는 죄인들의 살갗에 들러붙어 꺼지지도 않고 사그라들 줄도 모르니, 나무아미타불께서 네게 가르침을 주시고자 정토로 돌아가시는 길에 너를 여기 떨어뜨리신 것. 네가 배워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언제나 가슴속에 새기고 살 것. 너는 불이었고, 죽어서도 다시 불로 돌아가겠으나, 사바세계에서 깨우침을 얻는다면 전생과는 다른 불이 될 것. 말하자면, 신성한 불. 하늘에 머무는 불. 양기를 키우는 불. 너의 삶 자체가 불을 누그러뜨리기 위한 여정으로 계획되어 있으니, 수많은 사람들에게 여독을 빚지고 있음을 잊지 말 것. 특히 너의 조부모가 네게 바친 헌신만은 죽어서도 잊지 말 것. 너는 너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불태운 빛으로 네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밝히게 될 테니.

   (+)O

   내 머리 안에 작은 씨앗 하나가 들어 있나이다. 불꽃이라기에는 너무 작고. 차라리 섬광, 차라리 전기 스파크라고 부르기에 알맞은. 나는 미약한 전압으로 반짝이는 이 씨앗을 좀처럼 고정시켜둘 수 없어 종일 취한 듯이 비틀거리나이다.
   나는 원래 불이었나이다. 지독한 불. 꺼지지 않는 불. 생명을 해치는 불. 지옥이 왕왕 고통스러운 공간으로 묘사되는 까닭을 이미 잘 알고 있나이다. 맹렬한 불기둥이 사방팔방 손길을 뻗치는 그곳은 그야말로 공기 자체가 말라버려, 해로운 광선에 머리가 노출된 죄인들의 두피마다 악성 흑색종이 돋아나 있나이다. 또 부실한 기압으로 바깥귀 밑의 내이들은 일찍이 터져버려, 죄인들은 스스로 비명을 들을 수가 없나이다. 유가족의 부탁으로 죽은 이를 찾아 지옥까지 다다른, 드물게 감수성 깊은 영매들만이 벼랑 위에서 두 귀를 틀어막은 채 눈물 흘리고 있을 따름이오이다. 살아 있는 모든 세포는 수소 가스에 떠밀려 공중으로 흩어지니, 되살아나는 저주에 걸린 연약한 조직체들의 입가에서 끔찍한 앓음 소리가 떠나지 아니하나이다. 그럼에도 나는 책상반에 놓인 찻잔처럼 그들을 내려다보곤 했나이다. 잉걸불처럼 타오르는 내 눈과 마음은 석탄과 같이 검고 무시로 무감했기에. 진실로 그러하나이다.
   그러나 나는 또한 배우고 있나이다. 깨우치고 있나이다. 지금 내 머리, 마루뼈 밑에서 희미하게 점멸하는 불빛의 이름을 알아가고 있나이다. 이해하고 있나이다. 스스로를 여전히 불자라고 부르시는, 자애롭고 지고하신 분께서 내 앞으로 나누어 주신 온기에서 익숙한 손길을 느끼나이다. 나는 되겠나이다. 신성한 불. 하늘에 머무는 불. 양기를 키우는 불. 나의 삶 자체가 불을 누그러뜨리기 위한 여정으로 계획되어 있음을 이제 깨우치니, 수많은 사람들에게 여독을 빚지고 있음을 잊지 않겠나이다. 여기 미천한 불이 하나 타오르니, 병화(丙火)의 불씨를 그대 앞으로도 조심스럽게 나누고자 하나이다. 언제까지고 그러기를 바라나이다. 진실로, 진실로 그러하나이다.


   

작업 노트 4. 세상은 O와 O로 결합되어 있으니


   O : 나는 원래 물이었나이다. 흐르는 물, 어디를 향하는지도 모른 채로. 하지만 나는 결국 보았나이다. 수면 위에 혹은 그 아래. 돌과 흙, 재 가루 같은 것들. 물속에서 흩어진 존재의 잔해들. 나는 그들을 싣고 계속해서 흘러갑니다.

   O : 최혜리가 물의 기운을 타고났다는 사실은 이 글을 다 쓰고 나서 알게 되었다. 지나고 보니 스님이 했던 말 중에 옳은 말들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지금 내 주위에는 물처럼 부드럽고 물처럼 깊은 친구들이 많으니까. 결국은 물도 불도 산소를 필요로 하지 않는가? 우리는 앞으로도 공유 결합 상태로 존재할 것이다.

보이스엔진

문학을 통해 자신의 선율을 써내려온 소설가 신종원과 음악을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찾아온 음악가 최혜리. 최초의 음성을 모방한다.

2021/12/14
49호

1
조리스카를 위스망스, 『저 아래』, 장진영 옮김, 워크룸프레스,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