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호에서는 ‘서울’을 주제로 시인이자 소설가 김유림과 사진가 임효진이 협업했습니다. 두 작가는 글과 사진을 주고받으며 서울의 경계를 이루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했고, 그 결과물로 글과 사진이 결합된 지면을 선보입니다.



차도가 끝나는 지점에 ‘길없음 주차장입구’라고 적힌 커다란 금속 표지판이 있다. 그 뒤에 바짝 붙어 대화를 나누는 두 행인의 얼굴, 원경으로 도심의 건물들이 보인다.

기억 격차 이론은 스즈키 이즈미, 다카하시 겐이치로, 마이조 오타로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여기에는 버지니아 울프라든가 후안 라몬 히메네스,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조르주 페렉, 안토니오 타부키 등도 영향을 미쳤다.
  안토니오 타부키의 경우, 그가 그 자신이 좋아하던 작가인 (한국에서는 『불안의 서』로 유명한) 페르난두 페소아를 놓지 못하고 책 속에서 끊임없이 재생시켰다는 이유로 마음에 든다.

ⓐ 나는 그가 페소아의 묘지 주변을 서성이는 걸 떠올릴 수 있다.
ⓑ 나는 그가 (자기 자신이 아니라) 페르난두 페소아만을 좋아하고 사랑했다는 느낌을 받는다.
ⓑ 나는 그가 좋아하는 작가를 추적하는 과정 속에서만 자신의 글쓰기를 견뎌낼 수 있었으리라고 추측한다.
ⓒ 맴을 돈다는 건 이런 것이다. 자기 이름만으로 책 쓰기를 포기하는 것. 절반의 기억―글쓰기 역사―과 절반의 자유를 인정하는 것1)은 이상적인 글쓰기 상태이긴 하지만 이 같은 (고도의 절제력이 필요한) 작업은 지속하기 어렵다. 인간이라면.
ⓓ 그는 자기 자신이 작가로서 가질 수 있는 최대한의 자유인 절반의 자유를 내려놓는다.
ⓓ 삶의 주변부를 맴을 돈다는 건, 말이지요.

최근 번역된 『언더 블루 컵』과 로버트 벤투리의 『라스베이거스의 교훈』도 도움이 되었다. 벤투리의 책에 등장하는 겉치레 앞면(false fronts)2) 개념이 이 이론의 핵심과 맞닿아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분명히 그 개념이 주는 ‘느낌’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나는 핵심이 어디인지 그리고 핵심과 맞닿아 있는 레퍼런스는 무엇인지를 (나 자신을 위해 보다 명확하게) 밝혀내는 데 관심이 없다. 중요한 건 잊지 않는 것이다.

유리창 너머로 로터리를 돌아 빠져나가는 차량 두 대와 농지, 멀리 실외 골프 연습장의 그물망이 보인다. 유리창에는 흐릿하지만 분명한 버드 스트라이크(조류 충돌) 자국이 사진 중간에 큼지막하게 자리하고 있다.

설령 “씻겨나가”3)거나 해도 무언가는 대뇌 활동의 일부로서 남는다.
  그리하여 사고나 자유 의지로 인해 기억의 상당량을 잃은 개체가 “기억 도약 치료”4)를 통해 새로운 활동―예를 들면 글쓰기―을 재개할 수 있다.
  기억 격차 이론은 서울에서 부산으로 기차를 타고 이동하는 장면을 다룬다.

ⓐ 단어 기차는 기차가 있는 사진이나 영화, 혹은 기차가 있는 실제의 풍경이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걸 기차에 대해 알려준다. 왜냐하면 단어 기차는 (절대로 실물을 보여주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버튼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절대 끝나지 않는다, 이 버튼은.
ⓐ 기억을 잃어버린 사람이 단어 카드를 보며 기억을 연습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축구선수와 지퍼를 연결 짓는 연습을 하는 이유는?
ⓐ 그저 축구선수와 지퍼라는 기호를 기억하기 위해서?
ⓑ 아니, 그렇다고 하기에는 축구선수지퍼는 내가 알고 있는 축구선수와 지퍼와 너무 많은 연관이 있다.
ⓒ 슬퍼하지 마.

나는 카벨이 “매체라는 용어가 원치 않는 연관을 자아냄에도 그것을 완전히 버리는 것에 대해 모호한 이중적 입장을 취한”5) 것처럼 기억이라는 단어를 완전히 버리는 것에 대해 모호한 이중적 입장을 취하고 싶다. 원치 않는 연관을 자아내는 요소를 모조리 지운다면 우리에겐 무엇이 남을까? 우리에겐 기억이라고 할 만한 게 남지 않을 것이다. 그건 도시이론연구가가 원하는 바가 아니다.
  무엇이든 확실해야 확장(expansion)이 가능하다, 적어도 확실하다는 느낌은 확보해야 한다. 이것이 서울 도시공사의 입장이다.
  확장은 늘이는 것인데, 때때로 도시는 수축한다.
  그러니까 가령,

ⓐ 로절린드 크라우스6)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는 일은 내가 기억하던 나로 돌아가는 일이다.
ⓐ 내가 기억하던 나로 돌아가는 일은, 어불성설이지만 (기억할 수 없는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기억하던 나, 로 돌아가는 일인데. 만일 이것이 회복 불가능한 지점으로의 회귀라는 이유로 너무 어렵게 느껴진다면, 우회로를 택해도 좋다. 다음과 같이. ‘내가 기억하던 나로 돌아가는 일은 내가 기억하던 나로 돌아왔다는 확신을 느끼는 일’이다. 자신감은 자신을 믿는 감각이다.
ⓑ 괜찮아. 걱정 마.
ⓐ 내가 실제로 ‘내가 기억하던 나로 돌아갔는지’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확신을 느끼기만 해도 인간은 회복한다.

크기의 문제가 반드시 비교 우위의 문제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가령 서울의 크기가 A라면, 부산의 크기는 5다. A와 5를 비교할 방법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쉽지는 않다.
  나는 연관이 없는 두 개의 단어 카드를 꺼내어 짝을 지은 뒤(A, 5), 둘을 이어줄 방법을 모색한다.
  내가 느끼는 건 그리움이다.

ⓐ 절대 이어진 적 없는 걸 잇고 싶어.
ⓐ 그러나 절대 무지의 단어, 즉 역사가 없는 단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 한 번도 본 적 없는 대상에 대한 그리움은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도시를 연결할 방법이 존재하지 않는다. 확신하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도시 기억 격차의 범주를 0에서 10으로 규격화했을 때, 그중 10에 가까운 기억 격차를 가진 도시가 메가 도시다.
  기억 격차가 크다는 것은 ‘나 자신’이라고 부르는 것의 범위가 크다는 것을 뜻한다. (이때, ‘나 자신’이라고 부르는 것의 범위는 느낌만으로도 충분히 결정지어질 수 있다.) 격차가 심한 경우라면, 개체는 자기 자신으로 쉽게 돌아가지 못하며, 기억 도약 치료를 필요로 한다.
  이주가 치료의 한 방법이 될 수 있다. ‘기억 격차가 난다’는 사실만이 알려져 있는 도시의 경우 효과가 더욱 클 것이다.
  한쪽에선 수축이 문제라고 주장하지만, 다른 한쪽에선 수축에의 의지를 약화시키는 여타의 자극 일체가 문제라고 주장한다. 의지는 수축에 있다. (쓸데없이 도시의 기억을 자극해서 도시가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막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주장에 따르면, 온갖 변덕을 야기하는 환기(reminiscence)는 무의미하다.)
  이유는 다음과 같다. 도시(를 위시한 모든 개체)의 자기 확인은 암시를 전제로 하는데, 암시와 같은 불분명한 방식을 이용해 확신을 얻으려면 반복과 중첩이 필요하다. 수렴일까?

풀밭에서 흰색의 비둘기가 막 날갯짓을 하며 날아오르려 한다.

실외 골프 연습장으로 보이는 구조체의 철제 기둥을 중심으로 화면 가득 그물망이 펼쳐져 있다.

ⓑ 이탈 증세.
ⓑ 기차역과 가깝게.
ⓑ 유선형으로. 더욱 가깝게.
ⓑ 이런 방식의 기억 축적이 지속되다 보면 내어주는 것―방출―과 획득하는 것―강화―의 조화가 깨지기 쉽다. (혹자는 주장한다. 이런 것이 바로 기억 격차가 아닐까? 기억 격차는 매일 일어나고 있다. 단지 그것을 의식하기가 쉽지 않을 뿐이다. ‘우리’는 매일 기억이 될 만한 것을 담보 잡히는 방식으로 기억을 한다. 정말로 기억하고 싶었던 것은 기억하지 못하고 엉뚱한 것만을 기억하는 현상은 이 때문에 발생한다. (…)) 그러나 방출이 없다면 강화도 없다.

일반적인 창작의 경우, 부분들을 위한 내재적 구조가 마련될 때, 시퀀스들은 하나의 전체로 이어지지만, 기억 격차 이론은 그런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내재적 구조’가 마련된다고 해도, 도시들이 영화가 되거나 소설이 되거나 하지는 않는다. 책이 되는 경우도 없다. 곧이라도 서사가 생겨날 것 같지만, 그저 인상일 뿐이다.
  그러나 금방이라도 부분들이 합쳐져 하나의 전체로 작동할 것만 같다는 인상이 도시를 만들어낸다. 인상이 도시의 전부다.
  이것이 또 다른 기억 격차 이론이다.
  혹자는 독일 출신 감독 크리스티안 페촐트의 영화 〈운디네〉에 등장하는 ‘잦은 기차 이동’ 모티프에 주목함으로써 기억 격차를 달리 설명하고자 한다. 그는 이 모티프가 없었다면 〈운디네〉는 성립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 A가 3과 △에서 B를 만난다고 하자. 3에서 만난 B와 △에서 만난 B가 동일 인물일까?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이것이 ‘잦은 기차 이동’ 모티프 이론의 핵심이다.
ⓐ 3과 △, 두 도시에서 기억이 움직이는 속도는 다르다.
ⓑ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언제나 비교적 멈춰 있는 도시들을 경유하여, 비교적 멈춰 있지 않은 도시에 도착한다. 혹은 비교적 멈춰 있지 않은 분주한 도시에서 업무를 보고, 비교적 멈춰 있는 도시로 돌아간다. 휴식을 취한다.
ⓑ 죽은 도시란 시간이 죽은 도시이며, 멈춘 도시란 시간이 멈춘 도시이다.
ⓒ 사랑에 빠진 이들이 결코 한 군데에 머물지 못하고 3과 7을, 0을, 12를 오가는 이유는 매 장소마다 기억 격차 운용법이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 나는 지인 P를 떠올리고 있다. 그가 이 이론을 읽고 위안을 받을 수 있기를 바란다. 생각해보면 글쓰기를 통해 느끼고자 하는 궁극적인 만족감이란 언제나 개인적인 것이다.) 그들은 기억 격차를 운용하는 표준적인 방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느낀다.

각 도시의 기억 격차 운용법은 전부 진실하다.
  포시에서 만난 T의 모습과 토시에서 만난 T의 모습이 전부 맞다. 사랑은 헷갈림을 동반하며, 헷갈림을 동반하지 않는다면 충분한 사랑이 아니다, 라고 생각하고 오해하는 일이 사랑이다. 오차를 포용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믿는다. 겹쳐지는 부분―축적―보다는 겹쳐지지 않는 부분―확장―이 사랑의 자기 확신에 도움이 된다. (이렇게 다른데도 사랑하다니!)
  따라서 사랑에 빠진 이들은 이동이 잦다. 그들은 기억 격차를 수집한다.

새장과 그 안의 두 마리 새, 둥근 어항이 중첩되어 있다.

모든 이동은 시간 이동이다.
  서울에서 포천으로 이동한 사람은 시간을 이동한 것이다. 서울 시간에서 포천 시간으로. 이동 시간이 길지 않다고 해서 시차(時差)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시차가 창문 풍경에 존재한다는 것이 해당 파생 이론의 흥미로운 지점이다. 즉, 〈운디네〉의 크리스토프가 다이버 일을 하는 교외 지역과 연인이 사는 도심을 오가는 와중에 보는 창문 풍경이 곧 ‘격차 풍경’이라는 뜻이다.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이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격차의 풍경을 반복적으로 겪는 것―시간의 원활한 흐름을 방해받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영화에는 그들이 트램을 타고 도심과 교외 지역을 오가는 장면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그들은 이동하는 장면을 타고 이동한다.
  트램, 전차, 기차 등과 같은 이동 수단이 격차 풍경을 경험하기 가장 좋은 이유는 그것이 길기 때문이다. 승객은 앞을 향하지 않고 옆을 향한 채로 실려 간다. 시시각각 가까워지는 목적지에 시선을 빼앗기지 않는다. 운전석과 객석의 거리가 멀면 멀수록, 탈 것이 길면 길수록, 승객은 쉽게 격차를 체감한다. 어지러움을 느낀다.
  무언가는 사라지고 있다.
  손가락 사이로 모래가 빠져나가듯이. 크리스토퍼가 느끼는 상실감―사랑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느끼는 것―은 지속된다. 그가 움직이기 때문이다.
  움직임은 기억 격차를 유발하고, 기억 격차를 동반한다.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움직여야 하지만,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자기 확신은 사라진다.
  도시도 마찬가지다. 도시가 확신을 얻으려면 ‘신화’나 ‘역사’를 경유해야 하지만 경유는 격차를 유발한다. 도시는 망설인다.

ⓐ 자기 확신이 사라진 상태, 그러니까 기억을 보증받지 못하는 상태에서 만남은 이루어진다.
ⓐ A와 B는 같은 장소에서 만났지만, 같은 시각에 만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각기 다른 장소(도시 기억)로부터 왔기 때문이다.
ⓐ 이 파생 이론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명제가 성립할 수 있다. ‘기억 격차가 어긋난 상황이 만남의 전제 조건이다.’
ⓑ “신화를 경유해 베를린을 바라보는”7) 일은 기억 격차를 증폭시키는 일이다. 신화와 지금의 만남이 성공적으로 발생한다면, 이는 기억의 이동으로 인해 오차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기억이 씻겨나가고 오차가 발생한다는 점이 기억 격차 이론의 핵심이다. 그러나 무언가는 대뇌 활동의 일부로서 영원히 남는다.
  기억의 상당량을 잃은 개체가 할 수 있는 기억 도약 치료의 한 방법으로 글쓰기가 있다. ‘남들이 보기엔 별것 아닌 일’을 겪는 사람에게도 글쓰기는 도움이 된다. ‘남들이 보기’와 ‘내가 보기’의 격차를 상당 부분 줄일 수 있다.
  소설 『메블리도의 꿈』은 기억 도약 치료 글쓰기 연습의 좋은 예이다.

모자를 쓴 중년 남성이 공원에 비치된 운동기구에서 공중 걷기를 하고 있다. 뒤편으로는 화력발전소의 철제 구조물들이 보인다.

메블리도가 꾸는 수십 개의 꿈을 기록한 엽편이 모여서 한 권의 책이 된다. 꿈과도 같은 로맨스는 일순간 존재한다. 어떤 배열(constellation)이 별자리(constellation)로 읽히는 순간처럼. 대부분의 꿈은 헛되지만, 만남은 존재하고 발생한다. 꿈처럼.

조경용 온양석과 중년 남성이 역기를 들어올리고 있는 뒷모습. 뒤편으로는 마찬가지로 화력발전소의 철제 구조물들이 보인다.

흔들의자 위에 앉아 있는 중년 남성이 카메라 쪽을 응시하고 있다. 그 뒤로 교각의 기둥 두 개가 세로로 큼직하게 자리하고 있고 교각의 그늘 아래, 한 명은 벤치에 앉아있고 한 명은 서 있다.
안녕히 가십시오 : 돌아가는 길 없음 1~8, 2023

기억 격차 이론은 연결하지 않으면서 연결하는 꿈, 그대로 두지 않으면서 그대로 두는 꿈을 꾼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의 기차 여행에 빗대어
기억 격차 이론을 심화하기


스쳐지나가다


그날 본가에 내려가다가 ‘네가 말했던 건물’을 스쳐지나갔어. 기차가 그렇게 했지.


가로지르다

그날 본가에 내려가다가 ‘네가 말했던 건물’을 가로지르지는 못했지. 기차가 철로를 이탈하지 않는 이상 건물을 가로지르는 건 불가능해. 그러나 ‘네가 말했던 건물’이 있는 도시를 가로지르는 건 충분히 해냈어.


스쳐지나가고 가로지르다

그날 본가에 내려가다가 네가 말한 그 도시를 스쳐지나갔어. 기차가 그렇게 했지.
  집으로 내려가는 길에 그 도시의 외곽을 가로질렀어.


[오차는] 달리는 가운데 있다 ― 객실의 창문

기차가 달리는 동안, 기억 도약 연습이 일어난다.
  기억 격차는 A와 B, 서울과 부산, 강릉, 오송, 울산, 용산, 광주, 목포에 내재적인 특성이 아니라, 움직임으로 인해 생성되는 사건이다. 달리는 가운데 있다.
  스쳐지나가는 비슷비슷한 논밭 풍경을 보는 일은 실시간으로 발생하는 격차를 끊임없이 수용하는 행위다.
  나무가 나무와 겹쳐지고, 논이 논과 겹쳐진다. 간혹 전봇대나 터널, 방음벽, 낙석 방지망 등에 의해 보기가 중단되는 경우가 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풍경은 흐르고 격차가 발생한다. 지나간 밭이 다가오는 밭과 겹치면서 발생하는 격차의 집합이 우리가 밭이라고 부르는 것의 기호이자 실재이다. 밭.
  기차의 객실 창문은 기억 격차의 집합을 안고 있는 장소 그 자체다. 누군가가 ‘그래서 기억 격차가 어디에 존재한다는 것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달리는 기차의 창문을 가리켜야 할 것이다.
  도심에서 건물 창문을 가만히 내다보고 있을 때 발생하는 겹침(과 그로 인해 확인 가능한 격차)은 상상 속에서만 존재한다. 그러나 달리는 기차의 창문이 보여주는 격차는 순간을 타고 실제로 존재한다. 현재적이다.


돌아가도 여전히 거기 있을까? ― 서서히 멈추는 경우, 가능하다.

돌아가도 여전히 거기 있을까? 시간의 종류가 바뀌는 건 아닐까? 나는 종종 걱정한다. 서울에서 부산으로, 부산에서 서울로, 혹은 대전으로, 광명으로, 김천에서 구미로 이동하는 동안 일어나는 시간 뒤바뀜 현상에 대해 아무런 걱정도 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출발지와 종착지의 시간이 동일한 종류의 것이라고 어떻게 확신하는 걸까.
  어쩌면 객실에 타고 있는 승객 모두가 나름의 방식으로 시간을 바꿔치기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스마트폰 게임에 열중하거나, 음악을 듣거나, 철도공사에서 발행한 잡지를 뒤적이면서 자연스럽게 시간을 바꿔나가는 것이다.
  사랑에 빠진 사람이라면 기차를 더욱 조심해야 한다. 기차만큼이나 영원한 작별에 적절한 이동 수단도 없으니까. 다시 만날 수 없다는 건 다시는 같은 시간에 속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다시 만난다고 해도 전혀 다른 시간에 속한다는 걸 깨닫는 순간 두 사람은 멀어질 수밖에 없다…….
  기차가 역을 벗어난다. 기차에 올라탄 사람은 남겨진 사람과는 다른 속도로 기억하고 다른 속도로 잠에 든다.
  그는 사랑하는 사람이 속한 시간대로 다시 돌아오지 못할까봐 걱정한다.
  그는 조작법이 간단한 핸드폰 게임을 하거나, 안대를 하고 잠을 청하거나, 평소라면 읽지 않을 시시껄렁한 인터넷 뉴스를 탐독하면서 기차 탑승이 안겨주는 불안과 걱정으로부터 벗어나려고 노력한다.
  열차 출입문 창문이 시간 조율(격차 완화)을 돕는다.
  하차를 위해 대기하던 사람들은 출입문의 유리 창문을 통해 출발지의 시간과 종착지의 시간이 뒤섞이는 장면을 본다. 열차가 서서히 멈춰서고, 열차 출입문이 보여주는 창문 풍경도 서서히 멈춰선다. 충격은 크지 않다. 싱크가 어느 정도 맞아떨어지면 기관사가 버튼을 누른다. 문이 자동으로 열리고, 문이 열림과 동시에 여정에서 발생한 기억 격차가 (창문과 함께) 숨겨진다.


(출발지, 종착지)

(축구공, 지퍼), (부산, 잠자리), (호텔, 오징어), (야자수, 이불).

두 단어를 나란히 두는 일은 반향을 엮는 일이다.
  실제 축구공과 실제 지퍼를 나란히 두고 관찰하는 일과는 다르다. (만약 누군가가 두 단어가 지칭하는 물건을 나란히 둔다면, 우리가 볼 수 있는 건 축구공과 지퍼가 놓여 있는 정물 풍경에 불과할 것이다.) ‘축구공’이라는 단어의 반향과 ‘지퍼’라는 단어의 반향이 서로 얽히며 만들어내는 무수한 읽기를 기대한다면, 단어 게임을 내버려둘 필요가 있다.
  기억 상실을 겪는 환자에게 중요한 것은 랜덤으로 제시된 단어 쌍을 (어떤 방식으로든) 기억하는 일이다.
  그의 목표는 기억의 능력 자체를 향상시키는 것이니까.
  출발지와 종착지를 정하는 일도 마찬가지다. 여정이 다소 길어져도 괜찮다. 자기 자신으로 돌아오는 일에 대한 확신이 커지는 방향으로 달리면 된다.

김유림, 임효진

시를 쓰며 글쓰기를 시작했다. 시집 『양방향』, 『세 개 이상의 모형』, 『별세계』와 소설집 『갱들의 어머니』, 다이어리 소설 『그래서 나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등을 펴냈다. (김유림)

서울에서 사진을 찍는다. 사진집으로 『모텔 꿈의 궁전』, 『서울저널』 이 있으며 주로 서울이라는 도시의 스펙터클에 관심을 가지고 사건을 염두에 둔 장면을 수집한다.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 기형적으로 접착된 것, 죽었지만 잘 보이는 것들에 관심이 있다. (임효진)

도시 격차에 대해서는 말하지만 도시 기억 격차에 대해서는 잘 말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서울의 기억과 서울이 아닌 도시의 기억은 분명히 다르다고 그리고 그 점이 도시들을 구별 짓는 데 도움을 준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와 관련한 도시 이론이 이미 존재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만. 이 주제를 조금 더 멋대로 다루고 싶어서 특정 이론을 다루는 소논문의 형식을 차용하여 「기억 격차」라는 짧은 글을 썼습니다.
격차라고 함은 무엇일까. 격차는 어디에 존재하는 것일까. 격차는 분명 단순한 차이로 환원되기 쉽습니다. A 도시의 소득이나 인구수가 B 도시보다 많거나 적다는 식으로 정리되기 쉽지요. 그러나 제가 글로 쓰고 싶었던 건 기억의 격차였기 때문에 무어라 명쾌하게 설명할 수 없는 지점이 있어야만 했습니다. 격차 자체의 함의가 최대한 불분명해지도록 만들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고민하다보니 어느새 격차의 성격은 두 도시를 오가는 ① 여객이나 그 여객을 싣고 달리는 ② 열차라는 탈 것에게 맡겨진 것이라는 식의 유동적 정의를 내리게 된 것 같습니다.
참고한 책은 많습니다. 읽다가 이런저런 도움을 받았습니다. 공동 작업한 효진 작가님이 서울과 서울 아닌 도시를 오가며 찍은 사진을 틈틈이 공유해주었습니다. 저는 이 사진들이 특정한 도시의 정체성을 드러낸다고 느끼지 않았습니다. 여정의 정체도요.
"기억 도약 훈련”은 모두에게 필요합니다. 꿈을 꾸거나 책을 읽으면서 우리는 씻겨나간 기억을 메우는 훈련을 매일 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둘러싼 도시와 사물과 단어도 매일 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어제와 오늘의 연속성이 어디에 존재할까요. 나는 누가 될까요. (김유림)

서울을 떠나 양주에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서울의 집에는 몇 가지 문제가 발생했다. 계절에 맞지 않게 벌레가 들끓었고 세면대에서 물이 새고 집주인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나는 양주에서 짬이 날 때마다 부동산 앱을 보고 집 보러가는 약속을 잡았다. 지금 집이 임시로 느껴질 땐 양주에서 서울로 오는 길이 난폭했다. 도로에서 항상 죽은 것들을 보았다. 내비게이션은 다섯 음절의 단어를 읽을 때만 비로소 기계 같았다. 하월 (띄고) 곡아이씨. (임효진)

2024/03/20
66호

1
여기서의 “기억”과 “자유”는 바르트가 언급한 것인데, 내가 이를 접한 것은 로절린드 크라우스의 『언더 블루 컵』, 최종철 역, 현실문화, 2023의 79쪽이다.
2
로버트 벤투리, 데니스 스콧 브라운, 스티븐 아이즈너 저, 『라스베이거스의 교훈』, 이상원 역, 2017, 58쪽.
3
각주 1과 같은 책, 제1장의 제목인 “씻겨나가다”에서 빌려왔다.
4
같은 책.
5
같은 책, 41쪽.
6
뇌동맥류로 인해 작가의 뇌에 출혈이 발생했고, 이로 인해 그는 부분적 기억 상실을 경험한다.
7
구글에 검색어 ‘운디네 페촐트’를 입력했을 때, 첫번째 검색 값으로 등장하는 《씨네21》 기사의 제목에서 인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