센시키-ㅌ
2화 요즘엔 밤이 너무 좋아요
첫번째 일상키트 ‘밤’
A의 시선 지도. “당신을 온전히 담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매일 밤 당신을 잘라내었다 /그리고 울었다”(곽은영, 「불한당들의 모험」 부분)
B의 시선 지도. 토픽과 관련해 떠오른 단어들을 ‘태그 클라우드(Tag Cloud)’ 방식으로 시각화해보았다. C의 시선 지도. 반짝이는 포장지 위에 은박지로 별을 만들고 은색 철사로 단어를 연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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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김이 얼어붙을 정도로 추운 밤이 지나고 여섯 명의 사람들이 연희문학창작촌에 모였다. 우리는 오늘 처음 만났고, 모임의 규칙은 이름도 나이도 직업도 묻지 않는 것이었다. 1)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수도관이 동파되었다는 이야기를 시작으로 우리는 서서히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그런데 왜 하필 ‘밤’이에요?”
누군가 물었다. 일상키트 첫번째 주제로 '밤'을 고른 건, 서로를 모르는 사람들이 모여서 쉽게 말을 꺼낼 수 있는 주제, 즉 일상과 가장 가까운 단어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밤은 하루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고,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찾아온다. 그 시간에 대해 우린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눴다. 또 그와는 무관해 보이는 가벼운 일상에서부터 사회문제를 바라보는 진지한 의견까지 대화가 흘러갔다. 그중 기억에 남는 문장들을 옮겨본다
“밤에 봐야 하는 영화가 있어요. 밤에 봐야 더 잘 몰입할 수 있는 영화들. 밤이라는 시간은 뭐랄까, ‘인텐스(intense)’하게 되잖아요. 좀더 심화된 감정으로만 받아들일 수 있는, 밤에 어울리는 영화들이 따로 있는 것 같아요.” _마늘
“밤을 잘 보낸다는 건 제게 ‘잘사는 법’에 속하는 거예요. 잘산다는 건 밤 시간을 누릴 수 있다는 것, 내일을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아닐까 해요. 밤의 여섯 시간과 낮의 여섯 시간은 너무나 다르죠. 밤엔 영화를 세 편을 연달아 볼 수 있더라고요. 그렇게 영화를 몰아보던 시기가 있었거든요. 너무너무 할 게 없었고 딱히 연락을 할 사람도 없었어요. 그렇게 살 수 있던 때가 저는 진짜 행복했던 거 같아요.” _치약
“저는 유학 갔을 때 은연중에 인종차별을 많이 겪었고 힘들었거든요. 미국에서 아시아 여자의 존재는 무해해요. 무해하면서 항상 나이스하죠. 그러다보니 유학중인 아시아인은 존재감 자체가 없어요. 미국 애들은 항상 저한테 ‘더 크게 말해봐(Speak up)!’라고 했어요. 지금까지 제가 살아온 인생은 정반대의 모습인데. 저 완전 범생이였거든요.” _마루
“나쁨을 의도하지 않더라도 예민함이나 섬세함이 떨어지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상처 입히기 쉽다는 생각이 들어요. 일부러 자극적인 광고로 타인의 상처를 소비하는 경우도 많고요. 저는 개인적으로 제가 섬세함이 부족하다고 생각을 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상처입힐까봐 항상 두려워하면서 살고 있어요.” _단아
“하여간 밤은 혼자만의 시간이잖아요. 그때는 책을 봐도 재밌고, 글도 써지고, 그 글이 너무 잘 쓴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고요. 요즘은 눈이 감기는데도 새벽 4시까지 이것저것 해요. 내가 왜 굳이 이 밤의 끝을 보려고 하는지, 내일 해도 되는데, 아니 굳이 그럴 필요가 없는데…… 하면서도 그러고 있는 제 스스로가 신기하죠. 현재의 기쁨을 위해 내일을 깎아먹고, 또 그것에 얼마만큼 책임을 질 것인가 생각하면서 밤이라는 시간을 쓰는 것 같아요.” _사랑
우리가 모인 시간이 밤은 아니었지만 밤만큼이나 사적인 이야기들이 오고 갔다. 모임 후에 키-ㅌ는 우리가 나눈 대화를 스크립트로 작성해 컴퓨터 프로그램을 통해 분석했다. 컴퓨터는 대화의 주요한 토픽으로 ‘밤’ ‘소수자’ ‘영화’ ‘자존감’을 뽑았다. 키-ㅌ의 예측과는 사뭇 다른 결과였다. 이를테면 ‘밤’과 ‘위험’을 주제로 한 대화가 꽤 이어졌는데도 토픽으로 선정되지 않았거나, 유의미하게 취급되지 않았다거나, 개개인이 가진 말버릇(‘축하하다’ ‘감사하다’ ‘신기하다’ 등)은 유의미하게 다뤄지지 않았다. 토픽을 선정할 때 빈도수만이 아니라 단어와 단어 사이의 관련성을 계산하기 때문에, 상황에 관계없이 산발적으로 쓰인 단어는 결과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다음은 선정된 토픽과 단어들을 시각화한 인포그래픽이다.
키-ㅌ 팀원들은 ‘밤’ ‘소수자’ ‘영화’ ‘자존감’이라는 토픽과 함께 스크립트에서 각기 단어를 골랐다. 그리고 각자의 개성을 살려 ‘시선 지도’를 만들고, 토픽에 대한 단상을 글로 남겼다. 일상을 조각으로 나누고 그것을 다시 맞춰나가면서 하나의 새로운 글, 문학을 만들어보고 싶었다.
0. 밤이 되면 모든 게 조각났다.
1. 밤에는 모든 게 ‘인텐스(intense)’하게 변한다고 했다. 낮과는 아주 달라서 낯설고 불안한 밤이 되면 조각난 것들이 붙었다 떨어지며 이리저리 오갔다. 새벽 2시에는 좋은 일이 생길 리 없다던 말을 기억하며 이불 속에서 유투브 대신 외면 받은 이들이 나오는 켄 로치의 영화를 봤다. 숨죽여 보다보면 우리가 차마 들어갈 수 없는 세계관에 늘 무력해지곤 했다. 밤에는 모든 시선들이 날카롭게 느껴졌다. 온갖 콤플렉스로 가득찬 당신은 종이에 베인 듯한 상처를 입는다고 했다. 엊그제 늦은 저녁에 있던 소개팅에서 상대가 당신의 말에 집중하지 않더라는 말도. “자꾸 새로 개봉한 일본 애니메이션을 보러가자고 하더라니까!” 당신의 모든 걸 체념한 듯한 화법은 늘 낡고 고루하게 오마주된 자막을 읽고 또 읽는 것 같은 착각이 들게 했다. 함부로 나의 잣대를 들이대고 싶지는 않았다. 당신이 틀렸다는 말을 하려는 것도 아니다. 다만 당신과 민감함의 농도를 맞추고 싶었을 뿐이다. 내일은 함께 산책을 가자고, “비타민 B는 눈물에 좋으니까요” 하고 농담을 하고 싶었을 뿐이다.
달빛요정 노래를 무한 반복하면서 혼자 사색하던 밤들을 똑똑히 기억해요. 그렇게 절룩거리던 인생에 역전 만루홈런은 애초에 말이 안됐죠. 가끔 영화를 볼 때면 모든 것을 뒤로 한 채 선뜻 다른 세계로 떠날 수 있을 것만 같아요. 좋아하는 영화는 주성치. 재밌잖아요.<식신>이나 <무장원소걸아> 같은 거. 정치질도 검열도 없는, 꿈과 희망과 웃음으로 가득찬 세계. 외면 받는 이들이 종래에는 구원받는 세계. 그곳에서라면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지 않아도 될 것 같았죠.
뭐가 그리 초조하냐고요? 뭐 먹고사나 하는 원초적 불안이 제일 크죠. 낮엔 별 생각 없다가 밤에 팍 하고 떠오르데요. 그럼 그날 밤은 잠은 다 잔 거예요. 나보다 잘난 애들 페이스북, 인스타를 염탐하면서 날을 꼬박 새거든요. 아, 제가 자존감이 무지하게 낮아요. 고등학교 졸업앨범 찍던 날 친구라고 생각했던 애가 뒤에서 제 외모를 까던 걸 들었던 게 계기였죠. 그러고 나서 한동안 달빛요정만 주구장창 듣게 된 거예요. “세상도 나를 원치 않아/ 세상이 왜 날 원하겠어/ 미친 게 아니라면”2)이라는 가사가 딱 제 얘기더라고요. 그렇게 가만히 노래를 듣고 있으면 어느새 밤이 다가와 저를 삼켜버려요. 밤은 사람을 동정하지는 않잖아요. 그렇다고 외면하는 것도 아니고요. 있는 그대로 징징거려도 마치 모든 게 자신의 책임이라는 듯 가만히 들어주니까 좋더라고요. 그래서 밤은 현실로부터 도피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에요. 숨 가쁘게 빈둥대며 보내버린 밤 역시 현실인데도.
온가족이 모여 사는 집에서는 비밀이 없었다. 나는 매일 밤 산책을 핑계로 추운 놀이터를 배회하며 오랫동안 통화를 했다. 그곳에는 반짝이는 불빛 아래서 차가운 공기를 마시며 오고갔던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이 있었다. 우리는 팔꿈치를 맞대고 나란히 앉은 것처럼 다정하게 속삭였다. 문자로는 전하지 못하는 것들이 있었다. 우리는 영화와 사회와 문학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애의 풍부한 어휘력은 나를 항상 즐겁게 했다. “상상력은 감상자의 수용기에서 시작 돼.” 나는 그날 수용기라는 단어를 배웠다. 우리는 학교생활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았다. 각자의 머릿속에 든 것이 너무 많아 그것을 꺼내놓기 바빴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너무나 사랑했다. 누구나 그렇듯 나는 자기애와 자기혐오가 범벅된 사춘기를 지났다. 타인 속의 나를 사랑하는 것은 미움으로 끝났고, 나를 발견하지 못하는 것은 열등감으로 끝났다. 그것이 나의 관계를 파탄 냈다. 더이상 전화는 울리지 않는다. 수년이 지난 지금, 목소리 없는 밤이 지나고 있다. 지나간 시절의 편린들이 얼어붙은 겨울밤 속을 파고든다.
“시간이 되었으니 이야기는 여기까지 할까요?”
이야기가 끝이 났다. 우리는 어느새 어둑어둑해진 연희동 언덕을 걸어 내려갔다. 서로의 이름도 나이도 모른 채, 각자 자신의 일상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저는 ‘밤은 가장 사적인 시간’이라는 말이 밤을 가장 잘 표현하는 것 같아요. 아무와도 연락을 할 수 없는 시간이고 조용하니까요. 인간관계라는 게 사라지고 업무도 의무도 사라지고 나 혼자만 덩그러니 남는 거잖아요.” _우유
당신의 가장 사적인 시간이 듣고 싶어졌다.
키-ㅌ
‘키-ㅌ’는 문학에 관심이 많은 세 사람이 기술을 도구로 문학을 재해석하기 위해 모인 팀이다. 무언가를 조립해서 만들 수 있도록 부품을 모아놓은 세트인 ‘kit’에서 착안하여, ‘키-ㅌ’는 이야기와 이야기, 사람과 사람을 잇는 다리(-) 역할을 하고자 한다.
2018/03/27
4호
- 1
- 일상키트는 각기 다른 주제로 총 여섯 번의 모임을 가질 예정이다. 1~3회차는 sns 홍보를 통해 참여자를 모집하고, 4~6회차는 키-ㅌ 팀원들이 각자의 지인을 초정해 모임을 진행한다. 일상키트 참여자는 키-ㅌ 팀원을 합해 여섯 명 내외로, 모두 닉네임을 쓴다.
- 2
-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의 노래 <절룩거리네>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