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lcome to the universe
3화 항아분월
원작 유은
연출 권기봉
작화 전수진
1.
그날 이후 떠나는 이들이 부쩍 늘었다. 떠난 이들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기록용 기보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대전 상대가 사라진 사람들끼리 서로 알아보기 위한 암묵의 룰이다. 원래 빈자리 없이 북적북적하던 대국실이 삼분의 일 정도 비어 느슨하다. 대국실 한편에서 교복 차림의 형 하나가 일어난다. 그 형이 고등학교 2학년이었던가, 나는 흑돌을 잡아야겠다고 생각하며 자리를 옮긴다.
형은 대국 태도가 불량하다. 연신 하품을 해대고, 내가 장고를 할 때면 곧바로 단어장을 꺼내 든다. 이런 상대에게는 반드시 이겨야 한다. 나는 돌이 놓인 바둑판을 쳐다본다. 중원에 돌이 성기게 모여 자미원을 이루고 있다. 오행의 법칙을 관장하는 천주가 곧게 서지 못했으니 대리의 자리를 공략한다. 대리는 형벌을 내리고 자미원의 감옥을 책임지는 관리다. 형은 당황한 듯 성급히 옥황 뒤쪽에 화려한 병풍 자리를 만든다. 하지만 병풍 뒤에는 암살자가 숨어 있기 마련, 나는 근처에 진을 치고 있던 세를 불러들여 대제를 딴다. 내시에게 암살당하는 황제의 기구한 운명이다. 황제를 잃은 백돌은 싱겁게 중원을 내어준다. 중원에서 승리하면 나머지는 사소한 집 싸움일 뿐이다. 기계적인 수풀이의 반복으로 대국이 끝난다. 형은 삼십 분도 되지 않아 돌을 던진다.
―잘 배웠습니다.
원장실에 들어가니 머리 한가운데가 쌍둥이자리처럼 빈 원장이 책상에 다리를 올리고 모바일 게임에 열중하고 있다. 그날 이후론 항상 이런 식이다. 모두가 치열함을 잃어버리고, 왕따 당하는 꼬맹이처럼 의기소침하다.
―승리 보고하러 왔습니다.
―잠깐만, 지금 마지막 한 타 중.
과도하게 귀여운 척하는 여자아이 목소리와 폭발음, 피격음 따위가 들린다. 왕자영요라고 했던가. 중국에서 한창 인기를 끌고 있는 모바일 협동 전쟁 게임이다. 아버지는 그 게임이 인민의 아편이나 다름없다고 언제나 말한다. 패배- 라는 소리가 울려퍼진다. 원장은 에이씨, 지껄이며 휴대폰을 던지고 내 기보를 받아든다.
―오늘도 꽤 압도적이구먼. 그래도 필감성이 너만은 독기가 있단 말이지, 흥흥.
원장은 필감성 1승, 하고 중얼거리며 승리 기록을 해주고 묘수풀이 오늘치를 해서 들고 오라고 말한다.
―지난번 책 다 풀었습니다.
원장은 잠깐 멍청한 표정을 지어 보이더니, 내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한다. 담배 찐 내가 훅 풍겨온다. 건강 안 좋다더니 끊을 마음은 없는가보다. 하긴 아버지도 마찬가지니 뭐……
― 필감성이, 잘 들으라. 인생은 일변도가 아니다. 가끔은 딴청도 피우고 해야지. 이거 왕자영요에도 보면 항아가 나온다. 신화에서는 달토끼나 두꺼비, 그러니까 인간 이하로 전락하는 자인데 게임에서는 그렇게 강하다 이 말이야. 알갔어?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다음 묘수풀이나 알려주시죠.
―아직 안 왔다고 새꺄. 그동안 이거나 읽고 있으라.
원장은 미생이라고 쓰인 만화책으로 내 머리를 후린다. 정수리가 뜨끔뜨끔하다. 공부방으로 들어가 책을 펼쳐드니까 바둑과 회사생활이 이리저리 얽힌 만화가 나온다. 나보고 어쩌라는 건지.
2.
원래 아버지는 내가 기원에서 돌아오면 개선장군처럼 반겨주었다. 그날 이전, 나는 이 집의 중심이었다. 이제는 가끔 밥이나 챙겨주는 똥개나 다름없는 취급이다.
그날. 그날은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시청한 대국이 있었던 날이다. 아버지는 시종일관 툴툴거리면서도 TV 앞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어째서 저 한국인이 하이라이트를 받느냐, 바둑의 중원이자 종주국은 중국인데…… 하지만 그 불만은 이후 맞이한 충격적인 결과에 비하면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 한국인, 그러니까 이세돌 9단이 기계에 패배해버린 것이다. 한국에서는 4국에서의 소위 ‘신의 한 수’가 깊은 인상을 남겼으나 그건 그저 화젯거리일 뿐이고, 모두의 머리에 남은 것은 단 하나의 진실이었다. 기계의 바둑이 인간을 뛰어넘었다.
아버지가 바둑에 흥미를 잃은 것도 그날부터였다. 조훈현 이후 한국에 빼앗겨버린 세계 바둑의 주도권을 되찾아 와야 한다고 나를 다섯 살 때부터 기원에 보낸 아버지였다. 내가 승리할 때마다, 천재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나를 신처럼 숭배하던 아버지였다. 여섯 시간이 넘는 대국을 밤을 새워가며 보던 아버지였다. 그 아버지는 그날 이후 나를 이교의 신처럼 철저히 무시한다. 우리가 타국에서 무시를 당하더라도 바둑만큼은 이겨야지, 같은 말은 더이상 들을 수 없다. 이제 아버지는 이렇게 말한다.
―어차피 최고 잘해봐야 이등일 걸 뭣 하러 하냐. 너도 곧 중학생이다. 공부 따라잡으려면 한참이다.
3.
바둑 기사가 되기 쉬워졌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이세돌 9단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유치원 때부터 온갖 사교육을 받고, 수천만원을 들여 대학을 졸업하기까지 죽어라 하고 공부한 사람들이 이름 좀 있다는 기업에 들어가려면 수백 대 일의 경쟁을 뚫어야 합니다. 하지만 지금 바둑은 누구나 버티면 프로가 돼요. 조만간 ‘삼십대 초단’도 나올 겁니다. 사법고시에 비유되던 입단 경쟁이 이제는 옛말이에요.
그러거나 말거나 종래보다 쉬워졌다는 거지 아주 쉬운 일이 되어버린 건 아니다. 특히 내게는 그렇다. 내가 아무리 발버둥치며 이야기를 짜내도 점점 한 판 한 판이 어려워져간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황제 암살, 진영 대 진영으로 정면 승부를 펼치는 초한 대전, 성벽을 세워 대결하는 누벽진의 전술. 내가 갈고 닦은 이야기들이 점점 통하지 않는다. 내가 어떤 이야기를 꺼내들어도 상대는 이야기의 지평 너머에서 데우스 엑스 마키나를 불러내듯이 나를 쓰러뜨리는 일이 자꾸만 일어난다. 원래는 금기에 가깝던 일들, 이야기되지 않는 기술들이 자꾸만 등장한다. 특히 덮어놓고 애용하는 삼삼 전략은 원래 하수의 수였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것에 대응할 수가 없다.
소문을 들으니 그런 수들은 그 기계에서 온 것이라고 한다. 기계의 수를 인간이 흉내내고 있다. 원래 바둑에 있던 이야기, 별자리의 수들은 점점 힘을 잃어간다. 내가 힘에 부친다고 느낄 때마다 기원에는 사람이 준다. 주판만 남기고 사라진 설기훈처럼 불량한 형은 단어장을 남기고 떠났고, 누군가는 점심으로 먹던 햄버거 포장지를 자리에 버리고 집으로 돌아갔다. 사람이 줄어드는 건 백해무익하다. 언제나 그렇듯 약한 이들이 먼저 사라진다. 공으로 이길 수 있는 대전 상대들이 줄어들면 내신 점수가 떨어진다. 내신이 좋으면 입단 시험에서 좋은 위치에서 시작할 수 있건만, 그 자리로의 길에 얼음이라도 깔려버린 것처럼 나는 미끄러진다.
4.
돌아보니 아버지가 꺼끌꺼끌한 표정으로 팔짱을 낀 채 서 있다. 아까부터 목덜미가 섬찟섬찟하던 것의 정체는 아버지였나. 분명 시작할 때는 안 계셨는데, 내가 모르는 틈에 슬쩍 들어온 것 같다. 나는 이를 악문다. 이번 대국은 결정적이다. 한 판 더 지면 올해 입단 시험은 이것으로 끝. 내게 다음 기회는 없다.
대국 상대는 빨간 안경을 낀 여자애다. 그녀는 자꾸만 코를 먹으며 내 얼굴을 본다. 바보 같은 얼굴. 그녀도 아니나 다를까 기계의 바둑을 둔다. 무심하게 암살을 노리던 병풍 뒤의 암살자를 잡아냈고, 대전쟁을 준비하던 항우의 다리를 부러뜨렸다. 아직 오십 수도 두지 않았지만 내 비장의 수 두 개가 모두 상처를 입은 것이다.
킁. 여자애가 다시 코를 먹는다. 내게는 져서는 안 될 이유가 있다. 지금까지 패한 적 없는 것도 아니고, 앞으로도 져나가겠지만 아버지가 보고 있을 때만은 안 된다. 나는 다시금 분기탱천하여 이번에는 누벽진의 기술을 위한 포석을 깐다. 하지만 절박하기 때문일까, 성벽에 순식간에 금이 가버린다. 당황하는 나의 흰 병사들. 그들의 눈동자에 내 얼굴이 비친다.
그때 무언가 내 뒤통수를 때린다. 정확히는 치고 지나간다. 방금 대국에서 패하고 일어난 항공점퍼를 입은 남자다. 얼핏 봐도 나이가 있어 보인다. 아마 그도 이번 입단 바둑이 마지막이었겠지…… 그때 어이없게도 원장의 말이 떠오른다.
―인생은 일변도가 아니다.
항아의 고사에서 그녀는 선녀에서 인간으로 추락하고, 인간일 적에는 불사의 약을 남편과 나눠 먹지 않은 죄로 달로 유배를 가고, 두꺼비가 된다. 그러나 축생으로 전락한 바로 그 항아가 게임에서는 최고로 강하다……
여자애는 이제 코를 먹지 않는다. 그녀는 어디에 돌을 두어야 할지 잊은 듯 손을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왕복하고 시간이 속절없이 흐른다. 더이상 내 이야기가 어떻게 진행될지 감을 잡지 못하는 것이다. 당연하다. 나도 이제 이 이야기의 진행을 모른다. 나는 궁 밖에 병풍을 치고 목책을 성벽 안에 쌓는다. 달까지 이야기를 날려보내자. 아주 완벽히 추락해버리자.
여자애는 장고 끝에 악수를 둔다. 확실한 이득을 위해 중원을 버리고 귀에서 거병을 시도한다. 내 이야기가 달로 가버리니 상대의 이야기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중원의 중요성은 언제고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중요한 건 사소한 것처럼, 사소한 것이 우주에서 가장 중요해 보이게. 아름다운 건 두꺼비, 추한 건 옥황. 나는 완전히 뒤죽박죽된 이야기로 압승을 거둔다.
여자애는 먹은 코를 토해내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운다. 그녀에게도 아마, 이번이 마지막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여자애를 울린 탓일까. 이어지는 본선 대국에서 나는 거짓말같이 휘둘리다가 패배한다. 상대는 기계처럼 표정이 없는 남자였다.
박야 너머로 달이 모습을 드러낸다.
연출 권기봉
작화 전수진
1.
그날 이후 떠나는 이들이 부쩍 늘었다. 떠난 이들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기록용 기보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대전 상대가 사라진 사람들끼리 서로 알아보기 위한 암묵의 룰이다. 원래 빈자리 없이 북적북적하던 대국실이 삼분의 일 정도 비어 느슨하다. 대국실 한편에서 교복 차림의 형 하나가 일어난다. 그 형이 고등학교 2학년이었던가, 나는 흑돌을 잡아야겠다고 생각하며 자리를 옮긴다.
형은 대국 태도가 불량하다. 연신 하품을 해대고, 내가 장고를 할 때면 곧바로 단어장을 꺼내 든다. 이런 상대에게는 반드시 이겨야 한다. 나는 돌이 놓인 바둑판을 쳐다본다. 중원에 돌이 성기게 모여 자미원을 이루고 있다. 오행의 법칙을 관장하는 천주가 곧게 서지 못했으니 대리의 자리를 공략한다. 대리는 형벌을 내리고 자미원의 감옥을 책임지는 관리다. 형은 당황한 듯 성급히 옥황 뒤쪽에 화려한 병풍 자리를 만든다. 하지만 병풍 뒤에는 암살자가 숨어 있기 마련, 나는 근처에 진을 치고 있던 세를 불러들여 대제를 딴다. 내시에게 암살당하는 황제의 기구한 운명이다. 황제를 잃은 백돌은 싱겁게 중원을 내어준다. 중원에서 승리하면 나머지는 사소한 집 싸움일 뿐이다. 기계적인 수풀이의 반복으로 대국이 끝난다. 형은 삼십 분도 되지 않아 돌을 던진다.
―잘 배웠습니다.
원장실에 들어가니 머리 한가운데가 쌍둥이자리처럼 빈 원장이 책상에 다리를 올리고 모바일 게임에 열중하고 있다. 그날 이후론 항상 이런 식이다. 모두가 치열함을 잃어버리고, 왕따 당하는 꼬맹이처럼 의기소침하다.
―승리 보고하러 왔습니다.
―잠깐만, 지금 마지막 한 타 중.
과도하게 귀여운 척하는 여자아이 목소리와 폭발음, 피격음 따위가 들린다. 왕자영요라고 했던가. 중국에서 한창 인기를 끌고 있는 모바일 협동 전쟁 게임이다. 아버지는 그 게임이 인민의 아편이나 다름없다고 언제나 말한다. 패배- 라는 소리가 울려퍼진다. 원장은 에이씨, 지껄이며 휴대폰을 던지고 내 기보를 받아든다.
―오늘도 꽤 압도적이구먼. 그래도 필감성이 너만은 독기가 있단 말이지, 흥흥.
원장은 필감성 1승, 하고 중얼거리며 승리 기록을 해주고 묘수풀이 오늘치를 해서 들고 오라고 말한다.
―지난번 책 다 풀었습니다.
원장은 잠깐 멍청한 표정을 지어 보이더니, 내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한다. 담배 찐 내가 훅 풍겨온다. 건강 안 좋다더니 끊을 마음은 없는가보다. 하긴 아버지도 마찬가지니 뭐……
― 필감성이, 잘 들으라. 인생은 일변도가 아니다. 가끔은 딴청도 피우고 해야지. 이거 왕자영요에도 보면 항아가 나온다. 신화에서는 달토끼나 두꺼비, 그러니까 인간 이하로 전락하는 자인데 게임에서는 그렇게 강하다 이 말이야. 알갔어?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다음 묘수풀이나 알려주시죠.
―아직 안 왔다고 새꺄. 그동안 이거나 읽고 있으라.
원장은 미생이라고 쓰인 만화책으로 내 머리를 후린다. 정수리가 뜨끔뜨끔하다. 공부방으로 들어가 책을 펼쳐드니까 바둑과 회사생활이 이리저리 얽힌 만화가 나온다. 나보고 어쩌라는 건지.
2.
원래 아버지는 내가 기원에서 돌아오면 개선장군처럼 반겨주었다. 그날 이전, 나는 이 집의 중심이었다. 이제는 가끔 밥이나 챙겨주는 똥개나 다름없는 취급이다.
그날. 그날은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시청한 대국이 있었던 날이다. 아버지는 시종일관 툴툴거리면서도 TV 앞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어째서 저 한국인이 하이라이트를 받느냐, 바둑의 중원이자 종주국은 중국인데…… 하지만 그 불만은 이후 맞이한 충격적인 결과에 비하면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 한국인, 그러니까 이세돌 9단이 기계에 패배해버린 것이다. 한국에서는 4국에서의 소위 ‘신의 한 수’가 깊은 인상을 남겼으나 그건 그저 화젯거리일 뿐이고, 모두의 머리에 남은 것은 단 하나의 진실이었다. 기계의 바둑이 인간을 뛰어넘었다.
아버지가 바둑에 흥미를 잃은 것도 그날부터였다. 조훈현 이후 한국에 빼앗겨버린 세계 바둑의 주도권을 되찾아 와야 한다고 나를 다섯 살 때부터 기원에 보낸 아버지였다. 내가 승리할 때마다, 천재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나를 신처럼 숭배하던 아버지였다. 여섯 시간이 넘는 대국을 밤을 새워가며 보던 아버지였다. 그 아버지는 그날 이후 나를 이교의 신처럼 철저히 무시한다. 우리가 타국에서 무시를 당하더라도 바둑만큼은 이겨야지, 같은 말은 더이상 들을 수 없다. 이제 아버지는 이렇게 말한다.
―어차피 최고 잘해봐야 이등일 걸 뭣 하러 하냐. 너도 곧 중학생이다. 공부 따라잡으려면 한참이다.
3.
바둑 기사가 되기 쉬워졌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이세돌 9단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유치원 때부터 온갖 사교육을 받고, 수천만원을 들여 대학을 졸업하기까지 죽어라 하고 공부한 사람들이 이름 좀 있다는 기업에 들어가려면 수백 대 일의 경쟁을 뚫어야 합니다. 하지만 지금 바둑은 누구나 버티면 프로가 돼요. 조만간 ‘삼십대 초단’도 나올 겁니다. 사법고시에 비유되던 입단 경쟁이 이제는 옛말이에요.
그러거나 말거나 종래보다 쉬워졌다는 거지 아주 쉬운 일이 되어버린 건 아니다. 특히 내게는 그렇다. 내가 아무리 발버둥치며 이야기를 짜내도 점점 한 판 한 판이 어려워져간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황제 암살, 진영 대 진영으로 정면 승부를 펼치는 초한 대전, 성벽을 세워 대결하는 누벽진의 전술. 내가 갈고 닦은 이야기들이 점점 통하지 않는다. 내가 어떤 이야기를 꺼내들어도 상대는 이야기의 지평 너머에서 데우스 엑스 마키나를 불러내듯이 나를 쓰러뜨리는 일이 자꾸만 일어난다. 원래는 금기에 가깝던 일들, 이야기되지 않는 기술들이 자꾸만 등장한다. 특히 덮어놓고 애용하는 삼삼 전략은 원래 하수의 수였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것에 대응할 수가 없다.
소문을 들으니 그런 수들은 그 기계에서 온 것이라고 한다. 기계의 수를 인간이 흉내내고 있다. 원래 바둑에 있던 이야기, 별자리의 수들은 점점 힘을 잃어간다. 내가 힘에 부친다고 느낄 때마다 기원에는 사람이 준다. 주판만 남기고 사라진 설기훈처럼 불량한 형은 단어장을 남기고 떠났고, 누군가는 점심으로 먹던 햄버거 포장지를 자리에 버리고 집으로 돌아갔다. 사람이 줄어드는 건 백해무익하다. 언제나 그렇듯 약한 이들이 먼저 사라진다. 공으로 이길 수 있는 대전 상대들이 줄어들면 내신 점수가 떨어진다. 내신이 좋으면 입단 시험에서 좋은 위치에서 시작할 수 있건만, 그 자리로의 길에 얼음이라도 깔려버린 것처럼 나는 미끄러진다.
4.
돌아보니 아버지가 꺼끌꺼끌한 표정으로 팔짱을 낀 채 서 있다. 아까부터 목덜미가 섬찟섬찟하던 것의 정체는 아버지였나. 분명 시작할 때는 안 계셨는데, 내가 모르는 틈에 슬쩍 들어온 것 같다. 나는 이를 악문다. 이번 대국은 결정적이다. 한 판 더 지면 올해 입단 시험은 이것으로 끝. 내게 다음 기회는 없다.
대국 상대는 빨간 안경을 낀 여자애다. 그녀는 자꾸만 코를 먹으며 내 얼굴을 본다. 바보 같은 얼굴. 그녀도 아니나 다를까 기계의 바둑을 둔다. 무심하게 암살을 노리던 병풍 뒤의 암살자를 잡아냈고, 대전쟁을 준비하던 항우의 다리를 부러뜨렸다. 아직 오십 수도 두지 않았지만 내 비장의 수 두 개가 모두 상처를 입은 것이다.
킁. 여자애가 다시 코를 먹는다. 내게는 져서는 안 될 이유가 있다. 지금까지 패한 적 없는 것도 아니고, 앞으로도 져나가겠지만 아버지가 보고 있을 때만은 안 된다. 나는 다시금 분기탱천하여 이번에는 누벽진의 기술을 위한 포석을 깐다. 하지만 절박하기 때문일까, 성벽에 순식간에 금이 가버린다. 당황하는 나의 흰 병사들. 그들의 눈동자에 내 얼굴이 비친다.
그때 무언가 내 뒤통수를 때린다. 정확히는 치고 지나간다. 방금 대국에서 패하고 일어난 항공점퍼를 입은 남자다. 얼핏 봐도 나이가 있어 보인다. 아마 그도 이번 입단 바둑이 마지막이었겠지…… 그때 어이없게도 원장의 말이 떠오른다.
―인생은 일변도가 아니다.
항아의 고사에서 그녀는 선녀에서 인간으로 추락하고, 인간일 적에는 불사의 약을 남편과 나눠 먹지 않은 죄로 달로 유배를 가고, 두꺼비가 된다. 그러나 축생으로 전락한 바로 그 항아가 게임에서는 최고로 강하다……
여자애는 이제 코를 먹지 않는다. 그녀는 어디에 돌을 두어야 할지 잊은 듯 손을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왕복하고 시간이 속절없이 흐른다. 더이상 내 이야기가 어떻게 진행될지 감을 잡지 못하는 것이다. 당연하다. 나도 이제 이 이야기의 진행을 모른다. 나는 궁 밖에 병풍을 치고 목책을 성벽 안에 쌓는다. 달까지 이야기를 날려보내자. 아주 완벽히 추락해버리자.
여자애는 장고 끝에 악수를 둔다. 확실한 이득을 위해 중원을 버리고 귀에서 거병을 시도한다. 내 이야기가 달로 가버리니 상대의 이야기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중원의 중요성은 언제고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중요한 건 사소한 것처럼, 사소한 것이 우주에서 가장 중요해 보이게. 아름다운 건 두꺼비, 추한 건 옥황. 나는 완전히 뒤죽박죽된 이야기로 압승을 거둔다.
여자애는 먹은 코를 토해내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운다. 그녀에게도 아마, 이번이 마지막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여자애를 울린 탓일까. 이어지는 본선 대국에서 나는 거짓말같이 휘둘리다가 패배한다. 상대는 기계처럼 표정이 없는 남자였다.
박야 너머로 달이 모습을 드러낸다.
선뜻
선뜻은 문학을 ‘먼저’ ‘뜻깊게’ 알리고자 하는 집단입니다.
서로 다른 배경에서 모인 다섯 명이 한국문학의 미디어 트렌지션을 고민하며 현재의 형식보다 문학을 친근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방안은 없을까 고민합니다.
작가, 배우, 성우, 감독, 연주가, 작곡가, 디자이너, 아트디렉터, 경영가, 개발자, 설계사 등 다른 이름을 가진 5인 안의 끝없는 가능성을 기대해주세요.
2021/11/09
4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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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작 유은, 연출 권기봉, 작화 전수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