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받기
4화 쓰레기를 보는 시간
서울, 집
박성진“아파트란 결국 허공에 떠 있는 장소잖아, 허공에 그렇게 비싼 값을 내는 게 이상하지 않아?”
K는 느닷없이 말했다. ‘이상하지 않아?’라고 의문형을 취했지만 그건 결국 ‘이상해’였다. 일단은 의문형의 형태를 띤 그 문장에 대해서,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말없이 지하철역으로 걸어갔고 각자의 집 방향으로 갈라졌다. 그것이 마지막일 줄을 그때에는 몰랐다.
19층에서 창밖을 바라볼 때면 종종 K의 그 말이 떠올랐다. K는 주택에 살았고 나는 아파트에 살았으며 우리는 서로의 집을 자주 드나들었다. 처음으로 우리집에 데려왔을 때 K는 “나는 아파트에서 살아본 적이 없어!” 하고 외쳤는데, 그 순간 너무 귀여웠다. 그래서 나도 K의 집에 갔을 때 그렇게 말했다. “보일러와 화장실이 집 바깥에 있다니, 너무 신기하다!” K의 반응은 “어, 그래?”가 전부여서 나는 조금 실망했다.
K가 연락을 해오지 않게 되면서 집 밖으로 나갈 일이 없어졌다. 나는 내 방 베란다에 앉아서 커피를 마시거나 담배를 피우며―담배 연기는 위로 올라가기 때문에 베란다에서 피워서는 안 되는데, 19층이 꼭대기이니까 개의치 않았다―멍하니 시간을 보냈다. 아무와도 대화하지 않는 날들이 이어졌다. 나의 부모는 상당히 효율적인 사람들이라서, ‘백수’가 아닌 ‘취준생’이라고 나를 정의한 후에는 두 번 고민하지 않고 멀리 떨어진 곳에서 자신들의 사업에 열중했다. 가끔 문자가 왔다.
―잘 지내고 있지? 공부하면서 필요한 거 있으면 엄마 카드로 사. 집 잘 치우고.
감사한 시절이었다. 또한 미안한 시절이기도 했다. 부모의 집에서 부모의 돈으로 쾌적하게 지내면서, 나는 미래를 설계하고 앞날을 걱정하기보다는 지난 일들을 곱씹기만 했다. 그러다보면 K에 대한 생각으로 연결되었다. K는 왜, 살아본 적도 없으면서 아파트가 이상하다고 한 걸까. 그건 내가 이상하다고 하는 말이나 다름없겠지. 그리고 내 아래에 있는 열여덟 가구를 이상하다고 하는 말이고. 또 복도 맞은편의 열아홉 가구, 그 옆의 열아홉 가구, 또 그 옆의…… 앞 동, 옆 동, 뒷 동, 그리고……
허공에 대해서 비용을 지불하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한 적도 없는 허공에 뜬 우리들을, K는 지금도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을까. 생각이 거기에 이르자 K가 덜 귀엽게 느껴졌다.
그런 식으로 멍하니 하루하루가 흘러갔다. 부족한 것 없이 평화로운, 아무런 문제가 없는 듯 하지만 실은 굉장히 문제였던 나날이었다. 나는 내년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불가능한 일이라서, 꽤나 진지하게 죽고 싶어졌다. K의 표현대로 허공에 뜬 네모 상자에 갇혀서 살다보니 사람이 이상해진 건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내가 뛰어내리지 않은 것은 쫄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외의 몇 가지 사소한 이유들이 더해졌는데, 그중 하나로는 버려진 매트리스가 있었다.
공기가 훈훈해지고 나무에는 새순이 돋고 꽃이 피기 시작했으니 죽기 좋은 계절이로구나, 19층에서 뛰어내리면 무조건 즉사겠지, 하고 여느 때처럼 스스로를 연민하며 아래를 내려다보는데 알록달록한 유아용 매트리스가 눈에 들어왔다. 기어다니는 아기가 있는 집에서 사용하는 그런 매트리스였다. 나는 문득 떠올렸다. 내 아래로 혹은 옆으로 아니면 맞은편 어딘가의 허공에 뜬 네모 상자, 그 어딘가에 이제는 그 매트리스를 내다버릴 만큼 자라난 어린애가 있겠지. 유치원에서 돌아오며 좋다고 소리를 지르고 뜀박질을 하던 그애의 시선이 어느 꽃나무로 향하고 그 아래, 머리가 깨지고 사지가 부러진 내가 있다면 그건 무척이나 염치없는 일이로구나. 염치라거나 책임이라거나 어른답지 못하다, 그런 식의 평소에는 쓰지 않던 말들이 머릿속으로 마구 밀치고 들어왔다.
그후로 여러 일들이 있었고 어쨌든 나는 지금도 19층의 아파트에 살고 있다. 내가 딛고 있는 허공은 변함없이 비싸고 나는 아직도 쫄보이며 여전히 어른답지 못하지만 적어도 하나 달라진 것이 있다면, 이제는 뛰어내릴 생각은 없다는 것이다.
오렌지와 시인
박윤선 지난 화에 이어서_
냉전이 극으로 치닫던 20세기 말. 공산 진영의 한 과학자가 오렌지 유전자 조작을 이용한 신무기를 개발하기 시작한다.
신무기 개발이 완성 단계에 가까워지자 실전 테스트를 위해 스파이들이 서유럽에 잠입한다. 그들은 라디오 방송을 통해 암호화된 지령을 들으며 오렌지를 곳곳에 심는데……
허나 완벽할 줄 알았던 그들의 계략은 10여 개 언어에 능한 번역가이자 시인인 A.R.에 의해 곧 좌절된다. 방송에서 쓰인 어색한 말, 잘못된 문법, 문맥상 어울리지 않는 썰렁한 농담 등을 주욱 적어본 시인은 그것이 위험한 비밀을 담고 있는 암호라는 걸 알아챈 것이다.
A.R.은 자신이 알아낸 정보를 적어 각국 정치, 종교 지도자에게 위험을 알리는 편지를 보낸다.
A.R.로부터 믿기 힘든 내용의 편지를 받고 정치, 종교 지도자들은 고민에 빠진다. ‘오렌지가 신무기라고? 이 사람 혹시 정신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 완전히 무시하기도 그렇고 어찌 한담……’
결국 지도자들은 A.R.의 경고를 반은 수용하고 반은 흘려넘긴다. 예방 차원에서 민간에 한 가지 소문을 퍼트렸으니, 그것은 바로…… ‘감귤류 껍데기를 비료통에 넣지 마시오!’
몇 년 뒤 A.R.의 행방이 묘연해지고 구소련의 해체와 함께 오렌지 신무기의 정체는 잊혀진다.
“허나 나는 잊지 않았소!”
“거기 서라! 귤 껍데기!”
“히히히히, 난 오렌지인데?”
“하하하, 내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냉동고와 방부제의 도움을 받으며 반세기를 버텼다!”
오렌지 껍데기는 A.R.의 시야에서 점점 멀어져갔다.
대한민국 서울 □□구 □□동의 한 아파트 단지.
“에구머니, 대낮부터 저게 뭐래?”
“으하하, 드디어 미션을 수행할 시간이다!”
오렌지 껍데기는 서울의 노른자 땅에 위치한 아파트를 골라 부숴먹기 시작한다.
“돈 되는 것이라면 다 잡아먹겠다! 이것이 나의 임무!”
“아이고야…… 저 아파트 평당 가격이 얼만데!”
“여보시오. 나를 좀 도와주시오.”
“거기서 뭐 하고 계신 겁니까?”
“나는 A.R.이라고 하오. 지구 반대편에서 온 시인이지.”
“그래요? 저도 얼마 전에 지구 반대편에 갔다왔는데! 반갑네요.”
“휴, 내가 이럴 줄 알고 오래전부터 경고하였는데, 아무도 내 말을 믿지 않더니. 이제 저 오렌지 껍데기는 비싸 보이는 거라면 전부 다 파괴할 것이오. 어디까지 먹어치울는지.”
행인에게 푸념을 늘어놓던 시인은 버려진 가구에 눈길을 둔다.
“이보시오, 그런데 누가 책장을 길바닥에 이렇게 뒀답니까?”
“글쎄요, 누가 버렸나보죠.”
“세상에, 이렇게 멀쩡한 걸?”
“멀쩡하긴요, 여기 다리가 부러졌잖아요.”
“이보시오, 이 정도야 두꺼운 종이를 아래에 대면 될 텐데!”
“그렇게 아까우면 아저씨가 가져가세요. 중고 장터에 싸게 내놔도 안 팔린다고요.”
‘흠, 아무래도 이 양반이 버린 거구만?’
“잠깐, 그러니까 이 책장은 더이상 값어치가 없는 물건이란 말이죠? 이거야말로 오렌지 껍데기가 먹을 수 없는 재료로군. 이보시오, 잠시만 나를 도와주시오.”
시인과 행인은 약 30~40분에 걸쳐 함께 무언가를 만든다. 만들면서 시인은 ‘내가 꼭 이 짓을 해야 하나’ 잠깐 고민하기는 했지만.
그렇게 시인과 행인의 합동 작품, 무적의 재활용 로봇이 탄생한다.
“아파트 안에 사람이 살고 있잖아! 임무라고 해도 그러면 안 되지!”
시인을 필살기를 날린다.
시인 승.
모두가 기뻐한다. 다시 평화가 깃든 대한민국 서울. 그러나…… 지금 이 이야기를 전하는 나는 왠지 마음이 무겁다.
그래서 찾아본 오늘의 교훈. 여러분,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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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결성된 프로젝트 팀으로 우리의 일상을 호기심 어린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고자 한다. 팀 이름은 영어의 ‘comment’(코멘트)와 불어의 ‘comment’(꼬멍)의 중의적 의미를 지녔다. 멤버인 박성진과 박윤선은 대학교 때 디자인을 전공하며 만났고 졸업 후에는 디자인과 무관한 길을 가고 있다. 박성진은 서울과 성남을 오가며 소설쓰기를 비롯한 다양한 글쓰기를 하고 있으며, 박윤선은 앙굴렘에서 일러스트와 만화가로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2018/04/24
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