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민규의 장편소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가 등장했을 때, 수많은 미디어에서 내세운 카피 문구들을 기억한다. “못생긴 여자를 위한 단 하나의 소설”. 박민규 작가 자신도 여러 인터뷰에서 못생긴 여자를 위한 소설을 쓰고 싶었다고 이야기했듯, 이 소설은 지금까지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하고 소외되었던 ‘못생긴 여자’와 그녀의 사랑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것은 퍽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었고, 베스트셀러 반열에도 오랫동안 올라가 있었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못생긴 그녀의 이야기보다는, 속칭 ‘군만두’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한 아름다운 여성의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군만두’는 늘 멸시받고 소외당했던 ‘못생긴 그녀’와 대비를 이루기 위해 등장하는 조연이다. 그리고 못생긴 그녀를 사랑하는 남성의 사회적 위치(잘생긴 남성)와 순정을 극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철저히 도구적으로 사용되는 캐릭터이기도 하다. ‘군만두’는 아름다운 자신의 외모를 적절히 이용하여 남자들을 부리고, 그 덕분에 제대로 일을 하지 않고 농땡이를 피우는 여성으로 묘사된다. 또한 허황된 아름다움을 좇으며 그 그림자에서 살아가는 캐릭터로 그려진다. 그녀가 자신의 이름 석 자 대신, ‘군만두’라는 별명을 갖게 된 계기도 이러한 ‘예쁜 여성’에 대한 편견에서 비롯된다.

    인간은 결코 자본주의의 굴레를 빠져나가지 못한다. 군만두, 라는 단어가 떠오른 것은 세일이 끝나고 한가해진 어느 평범한 날의 오후였다. 평범했던 일상이 갑자기 특별해진 것은 당시의 톱스타였던 여배우 하나가 백화점을 찾았기 때문이다. 주임의 심부름으로 2층 매장을 들렀다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매장마다 기웃기웃 고개를 내민 직원들과, 옷을 고르는 여배우의 주변에 몰려 있던 사람들…… 배시시 몸을 꼰 채 특히나 가장 가까이 서 있던 그 아이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어쩐지 그것은 슬픈 풍경이었다. 뭐랄까, 양장피며 팔보채를 시켰을 때 서비스로 나온…… 그러나 좀처럼 눈길이 가지 않는…… 그러니까 그저 성의로 받아주세요, 하는 느낌의 군만두를 보는 기분이었다. 같은 미녀라고는 해도, 즉 전체적인 비율이며 세세한 부분에서 그 정도의 차이가 눈으로 보여지는 것이었다. 1)

   군만두는 소설 속 주인공 남성에게 호감을 표하지만, 그가 자신에게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자 또 이렇게 묻는다.
   “나…… 이쁘지 않아?”
   군만두는 주인공 남성에게, 그리고 독자들에게 자신에 대해 이렇게밖에 표현하지 못한다. 아름다운 여성은 오롯이 아름다움만을 생각하고, 그것만을 큰 가치로 여기며 살아갈 것이라고 생각하는 세상의 시선이 군만두의 이 한마디 말에 녹아 있다. 그리고 그러한 여성을 좀처럼 눈길이 가지 않는 ‘군만두’라 폄하하며, 그 아등바등한 노력에 동정 어린 시선을 보내는 것 또한 남성의 몫이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는 못생긴 여성의 로맨스를 통해 외모지상주의 사회를 돌려서 비난하고 있지만, 이 비판 방식은 ‘아름다운 여성’을 비난하는 것 이상으로 뻗어나가지 못하고 있다. 아름답지 못하기 때문에 절망하는 것도 여성이고, 아름답고 화려한 것을 좇는 허망한 삶을 사는 것도 여성으로 표현된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에서 아름다움은 선과 악으로 나뉜다. 여기에서 ‘선’이란, 못생겼기에 사랑받지 못하지만 자신의 세계를 단단히 구축하고 결국 남성 주인공의 사랑을 받는 여성 주인공이며, ‘악’은 아름다움을 좇고 그것을 이용하는 여성으로 표현된다. 하지만 외모지상주의를 더욱 깊이 있게 비판하고자 한다면, 이 여성들을 대립 구도로 놓고 선과 악을 갈라 보는 것이 아닌, 아름다움의 기준을 정하고 잣대를 들이대는 권력 주체자에 대한 이야기로 확장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 소설에서는 명예를 부여받은 아름다운 여성들에 대한 동정과 혐오의 감상을 넣었을 뿐, 그들을 바라보고 평가하는 이들의 실체는 영 드러나지 않는다.
   ‘군만두’가 조연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소모적 캐릭터로 쓰였던 것이 아니냐고 반문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같은 조연임에도 불구하고 뚜렷한 자신의 사상과, 심지어 이 소설에 더욱 깊은 인사이트를 선사하는 ‘요한’이라는 캐릭터를 비교해놓고 본다면, 특히 군만두라는 아름다운 여성을 바라보는 시각이 얼마나 좁은지를 깨달을 수 있게 된다. 요한은 냉철하고 철학적인 사람으로, 사회적이고 소탈한 모습 속에 가려진 깊은 우울감을 지닌 다층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심지어 다소 부정적으로 그려지는 조연 ‘주임’ 캐릭터마저 나름의 주관과 자신의 행동에 대한 뚜렷한 이유를 가지고 있는 인물로 그려진다. 그는 매일매일 사장의 차가 주차장 안으로 들어올 때마다 차 뒤꽁무니를 따라가며 끊임없이 허망한 방법으로 자기 어필을 한다. 때로 이해할 수 없는, 그래서 우스꽝스럽기까지 한 그의 행동은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으로 드러나고, 독자들은 이후 그의 행동에 나름의 해석을 할 수 있게 된다. 조연에게도 충분히 다각적이고 철학적인, 그래서 더욱 입체적이고 사회 비판적인 면모들이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군만두를 설명하는 글들을 읽다보면 1980년대에 속칭 ‘엘레베타 껄’이라고 불린 엘리베이터 걸들에 대한 시선과, 백화점이라는 화려함과 부유함의 상징인 곳에서 일하는 여성들을 바라보는 시선을 적나라하게 관찰할 수 있다. 그들은 ‘언니들’이라는 두루뭉술한 대명사로 칭해진다.

   또 얘길 들어보니 문제의 언니들 중에는 모두의 부러움을 사는 선망의 대상들도 여럿 있었다. 고가의 옷을 사는 것도 구두를 사는 것도, 주말이면 나이트를 가는 것도 언니들과 함께였다.
   (…)
   무릴 해서라도 사는 거야. 그건 투자니까…… 즉 자신을 위한 투자지. 투자……라고? 그럼, 대우가 얼마나 달라지는데. 몰라? 여자는 꾸미기 나름이란 거. 즉 어느 정도 레벨이 있어야 그 레벨의 남자들도 눈길을 주거나 하는 거라구.
   (…)
   언니들과 함께 화장실을 가야만 배울 수 있는 놀라운 지식 앞에서 나는 때로 멍한 기분이 되기 일쑤였다. 이건 비밀이니까 아무한테도 얘기하지 마 알았지? 뭐가? 엘리베이터 모는 언니 중 한 사람은 룸에 나가. 룸? 룸 몰라? 룸살롱…… 레벨을 높여 그만큼 좋은 남잘 만나는 거라구.
   그렇다면, 하고 나는 말했다. 좋은 기회네, 투자를 위해서 말이야. 좋은 기회는 무슨! 난 그런 여자 아니란 말이야. 아 증마알! 하고 눈을 흘기던 그 아이의 표정도 생각난다. 그나마…… 그래도 그런 여자는 아니라는 생각으로. 2)

   ‘레벨을 높여 좋은 남잘 만나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난 그런 여자 아니야.’라고 눈을 흘기는 군만두의 모습은 이 이야기를 듣는 남성의 동정과 섞여 쓸쓸하고 비릿한 뒷맛을 남길 뿐이다.
   엘리베이터 걸은 1960년대 후반, 고층 빌딩이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급증한 엘리베이터의 수만큼 빠르게 늘어난 직업 중 하나이다. 원래는 서양에서는 남녀 모두의 직업이었는데, 1920년대 이 땅에 건너와선 여성만의 직업으로 변모해버렸다. 서비스 직종을 굳이 젊은 여성으로만 채워놓고 남성 고객 시중을 들게 만든 일제 강점기 성차별적 풍조의 하나였다. 당시 한 신문은 이 새로운 일을 하려는 여성이라면 ‘단정한 용모가 반드시 갖추어야 할 요소’라고 썼다. 1990년대 초엔 TV 드라마와 소설이 ‘회장님’과 엘리베이터 걸의 야릇한 관계를 다뤘다. 3)
   수많은 ‘엘레베타 껄’들은, 자신의 일을 방해하며 심지어 성폭력을 저지르는 남성 손님들에 대한 고충을 이야기했지만, 용모가 수려하고 화려한 곳에서 일하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귀담아 듣는 매체는 극소수일 뿐이었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에서 묘사하고 있듯, ‘언니들’은 자신의 레벨을 올리기 위해 룸살롱에 나가며, 화려한 외모를 가꾸어 남자 한번 잘 만나보려는 여성들로 비춰질 뿐이었다.
   사실 이러한 시선은 1990년대 초부터 29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여전히 남아 있다. 엘리베이터가 사라지자 이제는 그 대상이 ‘스튜어디스’로, ‘비서’로, ‘명품매장 직원’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심지어 ‘여대생’과 ‘여사원’에게도 이러한 이미지를 부여한다. 아름다운 용모를 가진, 혹은 그에 신경 쓰는 여성들에 대한 비난과 동정은 지금 이 시기에도 여전하다.
   그래도 희망을 찾아보자면, 이러한 편견을 깨뜨리기 위한 시도는 다양한 문화 콘텐츠에서 발견할 수 있다. 네이버에서 연재되고 있는 웹툰 <화장 지워주는 남자>에는 이 진부한 편견을 깨뜨리는 조연 캐릭터가 등장한다. 아름답지 않은 여자 주인공 ‘예슬’의 곁에는 화려한 외모로 누구보다 주목받으며 살아가는 여자 조연 ‘주희원’이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하지만 그녀는 ‘아름다움이란 진정한 권력이 아니며, 그 권력은 부여하는 자들의 것’임을 알고 있으며, 진정한 권력을 얻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여성으로 등장한다. 그녀는 그 누구보다 자신의 아름다움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인물이다. 그녀가 원하는 것을 단 한 가지, ‘그 누구도 평가할 수 없는 독보적인 인물’이 되는 것이다.

*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는 지금까지 조연의 자리만 감당하고 소외당했던 못생긴 여성에게 목소리를 부여하는 대신, 어쩌면 또 다른 편견에 시달리고 있을 아름다운 여성들의 목소리를 빼앗아버렸다. 못생긴 여성을 사랑해야 하는 이유를 부여하기 위해, 그에 대척되는 인물을 만들어낸 것이다. 멍청하고 속물적인 ‘예쁜’ 여성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이 뻔한 편견을 이제는 걷어낼 때도 되지 않았을까.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에서 ‘군만두’를 주인공인 ‘팔보채’로 봐달라는 것이 아니다. ‘언니들’을 선망의 대상으로도, 비난의 대상으로도, 동정의 대상으로도 바라볼 필요가 없다. 그들은, 그리고 우리는 누군가의 군만두도, 팔보채도 될 필요가 없다. 평가받지 않는 주체적인 ‘한 사람’으로서의 대우를 바랄 뿐이다.


비하인드랩연구소

김수현, 김원지, 장은진. 창작과 관련된 일을 하는 세 사람이 모여 이야기 속 ‘조연’을 마주한다. 조연을 표현하는 문장과 단어를 아카이빙하고, 조연에게 전사와 후사를 덧입히는 각자의 프로젝트를 진행할 예정이다. 우리는 이 프로젝트를 통해 문학이 ‘사람’을 존중하는 방법을 깊이 성찰해나갈 예정이다.

2019/01/29
14호

1
박민규,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2009, 예담, 309쪽.
2
같은 책, 319~320쪽.
3
<김명환의 시간여행 42. 아파트에도 있던 ‘엘리베이터 걸’ “가장 큰 고충은 남자 손님들 희롱”>, 조선일보 2016년 11월 2일.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6/11/01/2016110103273.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