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퀴어’의 마지막 행선지, 제주에 왔다. 서울에서 갑작스럽게 겪은 눈과 미세먼지에 걱정이 컸지만, 그것이 무색할 만큼 제주의 봄은 생명력이 넘쳤다. 덕분에 올해에는 봄의 이미지들을 좀더 일찍 눈에 담을 수 있었다. 프로젝트를 처음 계획할 때부터 제주에 대한 기대감이 컸다. 비행기를 타고, 가장 멀리, 꽃 피는 계절에 피날레를 장식하러 떠나는 곳. 그만큼 함께 읽을 작품을 정하는 것도 빨랐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종산 작가의 『커스터머』 속 주인공 ‘수니’와 ‘안’이 사는 세계에서는 자신의 신체를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커스텀’이 가능하다. 그리고 선천적인 ‘돌연변이’와 ‘커스터머’가 존재하고, 그것을 반대하고 혐오하는 ‘커스터비아’도 함께 살아간다. 작가는 그 세계에서 일어나는 혐오범죄와 등장인물간의 다양한 이야기를 발랄한 호흡으로 써내려갔다. 이 작품은 작년 무지개책갈피 행사에서 제1회 퀴어문학상으로 선정된 바 있다. 흥미로운 SF적 세계관 안에 풀어낸 다양성은 퀴어 정체성뿐만 아니라 타인의 ‘다름’에 대해 사유하게 한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됐다.
   『커스터머』와 제주는 퍽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표지의 화려한 지느러미가 푸른 바다와 어울리고, 제주라는 섬에서 느낄 수 있는 고유한 정서와도 작품은 어쩐지 닿는 데가 있달까. 제주는 바다 건너 자리한 섬이어서 그런지 어떤 독립성이 느껴진다. 그것이 소외나 갈등의 문제를 빚어왔던 것도 사실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시점인 4월, 자연스럽게 4.3 항쟁의 역사를 떠올리게 된다. 타 지역에서는 아직 제주도만큼 잘 알려지지 않아 꾸준히 재조명되어야 하는 사건이다. 오랜 세월의 아픈 역사, 소외와 차별을 겪어온 섬 제주에서 『커스터머』를 읽는다는 건 모종의 특별함을 더해주었다. 역사적인 슬픔뿐 아니라 이곳 사람들이 가진 다양성, 그리고 연대의 가능성에 이르기까지 제주는 『커스터머』를 읽고 나눈 우리의 이야기와 짝꿍처럼 느껴졌다.




   다섯번째 읽는 퀴어

    -장소 : 제주 생느행 카페
    -일자 : 2018년 3월 24일(토)
    -참여자 : 다홍(진행), 연(이상 무지개책갈피 활동가), 가을(직장인, 경기)

   나는 주변을 돌아봤다. 하늘에는 태양이 있고, 바다는 물결치고, 해변은 모래로 덮여 있다. 내가 사랑하는 것들. 나는 많은 것을 사랑한다. 이 많은 사랑은 대체 어디에서 올까? (349쪽)


    다홍 : 『커스터머』는 작년 제1회 무지개책갈피 퀴어문학상 수상작이다. SF 세계관을 통해 현실의 퀴어를 이야기하는 작품이라 소개하고 싶다. 어떻게 읽으셨는지 궁금하다.

    가을 : 귀여운 소설이다. ‘문학동네에서 재밌는 SF소설이 나왔다’는 이야기를 들었었다. 다크한 여성 서사일 거라 예상했는데 굉장히 말랑한 청소년소설이더라. 작가 인터뷰와 작가의 말까지 다 읽고 나면 더 좋아지는 소설이다. 조금 아쉬웠던 점은, 내가 SF 친화적인 인간이 아니라서 세계관에 적응하기까지 오래 걸렸고 개성 넘치는 각종 커스터머들의 비한국적 이름을 파악하기 어려웠다.

    다홍 : 발랄한 소설이다. 성장 서사이면서 SF 특유의 현실에서 한 발 떨어진 듯한 느낌이 독자 입장에서 좋을 수도 멀게 느껴질 수도 있는 듯하다. 리얼리즘적 작품만 읽다가 이 책을 읽으니 술술 읽히고 즐거웠다. 좋은 의미로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소설.

    연 : 퀴어문학인데 연애 서사가 핵심이 아니라는 게 좋았고 퀴어를 커스텀이라는 소재를 통해 보다 넓게 썼다는 점이 좋았다. 흔히 보이는 레즈비언의 연애, 게이의 연애가 아니라는 점이 좋았다. 개인적으로는 아주 재밌게 읽히지는 않았다. 그리고 각 배경이나 캐릭터가 살짝 단선적, 단면적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이야기를 끌어가는 방식도 조금은 예측 가능했다. 그래도 좋아하는 소설이다.

    다홍 : 커스터머라는 설정이 퀴어뿐 아니라 다른 소수자에게도 적용 가능해서, 적확하게 대입해 읽기에는 어려울지 몰라도 인류애적인 시각이 잘 드러나는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가을 : 이종산 작가가 3부작으로 이야기를 더 쓰실 예정이시라고 들었다. 세계관이 매력적이어서 충분히 이야기를 끌고 갈만하다.

    다홍 : 재밌겠다. 읽는 내내 장면, 캐릭터를 상상하기 좋았다.

    가을 : 퀴어소설이라고 읽을 수 있다면 어떤 면이 있을까? 우선 표면적인 이유로는 주인공이 중성인인 안과 사랑에 빠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커스텀과 돌연변이 세계관이 젠더 섹슈얼리티 맥락에서 읽히므로 퀴어 서사로 느껴지기도 한다. ‘돌연변이와 커스터머는 겉으로 구분되지 않는다’는 설정과 커스터비아(혐오 세력) 이야기 역시 그랬다. 여기 오기 전에 리뷰를 좀 찾아봤는데 한 리뷰어가 ‘중성인 안과 사랑에 빠지는 설정이 없더라도 이 책은 퀴어소설이다’라는 말을 남겼는데 나도 동의가 되더라. 그래서 오히려 안의 중성인 설정이 아쉬워지기도 했다. 중성인이라는 워딩도 다소 일차원적이었다.

    연 : 가을님 말에 동의한다. 커스텀 세계관만으로 굉장히 퀴어하기 때문에 연애 서사가 없더라도 괜찮았을 것 같다. 그 세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만으로 퀴어소설이었을 것.

    다홍 : 커스터비아 존재만으로도 그런 듯하다. 중성인이라는 워딩도 그렇고, SF소설인데 중성인 혼자서만 실제 현실과 맞붙은 느낌이라.

   “이건 그렇게 개인적인 일이 아니야. 신의 이름으로 징벌하는 거라고. 칼 이리 내!”
    미니가 라울의 손목을 잡고 소리를 질렀다. 둘이 다투는 모습을 보자 마음이 냉담해졌다. 지코스와 올베에게 잡혀 있는 팔이 뻐근했다. 멍이 들 것 같았다.
    라울이 미니를 세게 밀쳤다. 미니가 일어나기 전에 라울이 기회를 뺏기지 않으려는 듯 서둘러 내 이마를 칼로 그었다. 이마에 차가운 것이 닿았고 순식간에 불에 덴 것처럼 화끈거리는 통증이 번졌다. (191쪽)


    연 : 혐오범죄 이야기가 중요하게 나온다. 라울을 죽인 것이 안이 아니었고 치정 싸움 때문에 벌어진 것이었는데. 가해자 캐릭터가 평면적인 단순 악역 같아 아쉽기도 했다. 해결 부분이 촘촘하지 않고 느슨하게 밝혀진다.

    다홍 : ‘뿔 뽑기 게임’ 역시 가해자 매리가 주인공에게 가한 혐오범죄였다. 그들 패거리가 주인공과 안에게 계획적 괴롭힘을 가한다. 개인적으로 뿔 뽑기 게임 장면이 무서웠다. 애들 장난처럼 구는데 사실은 너무나 섬뜩한 괴롭힘이니까. 학교는 사회의 축소판이다.

    연 : 맞다. 학교는 권력관계가 더 확고하게 드러나는 공간이고, 심지어 그 공간을 마음대로 빠져나올 수 없다는 점에서 무섭게 느껴진다. 더욱이 주인공처럼 다른 지역의 최하위 계층으로서 낯선 도시에 온 경우는 더하겠다. 주인공도 안이라는 캐릭터와 커스터머 집단을 만나고 강단 있는 성격이라 조금 다행이지만 현실에는 그렇지 못한 이들도 많을 것이고.
    ‘읽는 퀴어’ 행사에 사람이 잘 모이지 않는 문제에 대해서도 비슷하게 생각해볼 수 있다. 어제 한 비수도권 지역 분과 사람이 왜 안 모이는지 이야기 나눈 적이 있는데, 비수도권의 경우 아웃팅이 되면 아예 이사를 가야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고 했다. 친숙한 공간을 벗어나야 하는 위험이 크기 때문에, 그럴 가능성을 최소화하는 것일지 모르겠다는 말을 들었다.

   “주니는 자기를 보느라 앞을 못 보는 거야.”
    “그게 무슨 소린데?”
    “저애를 지날 때 이상한 느낌 들지 않았어?”
    “조금 찌릿했어. 전기가 흐르는 물건에 손이 닿았을 때처럼.”
    “자기장 거울 때문이야. 저애는 자기장 거울을 자기 앞에 띄우고 다녀. 눈에는 거울하고 연결된 렌즈를 끼고. 자기를 보면서 걷는 거야. 커스텀을 한 뒤부터 저렇게 지팡이를 가지고 다녀. 얼마 전에 전신 커스텀을 했거든. 쟨 저렇게 하루종일 자기만 보고 다녀.” (82쪽)


    연 : 커스터머가 주위에 많으면 실제로 무서울 것 같다. 혐오가 이런 데서 출발하는 걸까.

    가을 : 낯설어서다.

    연 : 커스터머와 퀴어는 비슷하지만 커스터머는 즉시 가시화된다. 반대로 퀴어는 가시화되지 않는 차이가 있지 않나. 가시화되면 오히려 받아들여지는 게 더 빨랐을까.

    가을 : 커스터머들의 과정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연민, 장애 취급, 자주성 빼앗기, 혐오범죄 가시화……

    다홍 : 작품이 완전히 현실의 퀴어와 일대일 대칭되지는 않는다. 그래서 오히려 퀴어에만 한정되지 않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가을 : 최근에 이런 방식으로 ‘다름’을 이야기하는 소설이 많이 나오는 것 같다. 강병융 소설 신작 이야기를 들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손가락에 세번째 눈이 돋아나는 소년 이야기다. 판타지적인 신체 변형을 퀴어 맥락에서 풀어가는 소설이 많아져 흥미롭다.

    연 : 웹툰 중에도 <원 뿔러스 원>이 있다. 뿔이 원래 두 개 있어야 하는 사회에서 뿔이 하나만 있는 주인공이 나온다. 장애 맥락에서 읽히는 작품. 그 주인공도 시크한 성격이다. 이런 ‘특수한’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다 시크해야 하는 걸까?
    박민정 단편 「아내들의 학교」를 읽으면서도 느낀 건데, 『커스터머』도 ‘우리도 너희랑 똑같아’를 강조하는 소설이 아니라서 좋았다. 다름에 대한 소설이다. 다름의 공포가 나에게도 있는데, 대다수의 작품에선 그걸 해결하기 위한 최선의 방식이 사랑이라는 식으로 다뤄지는 경우가 많은 듯하다.

    가을 : 『커스터머』에서도 완전한 이해는 불가능하다고 말하지만, 확실히 사랑을 최선으로 그리는 작품이 많은 것 같긴 하다. 저도 잘 모르겠다. 사랑은 대체 뭘까.

    연 : 퀴어를 다룬 대부분의 매체가 ‘현실을 초월한 애정’ 같은 식이라 늘 의구심이 들었다. 사랑, 사랑, 사랑 이야기들. ‘퀴어는 이런 사랑을 하는 사람들이다’가 아니라, 퀴어 정체성을 가진 인물이 성장하면서 어떤 고민을 안는지, 타인과 어떻게 관계를 맺고 갈등을 겪는지, 세계 안에서 어떻게 자립하고 자존하는지 등 여러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사람들이 퀴어에 접근하고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다홍 : 감정에 호소하는 건 안일하고 일시적이라는 데 동의한다. 확실히 존재에 대한 이해를 감정적인 측면으로 접근하는 건 시혜적이기 쉽다.

    연 : 호의적인 건 베푼다는 느낌이라. 더불어 뒤집히기도 너무 쉽다. 나는 이성의 힘(배우고 공부하고)을 더 믿는 편이다.

    다홍 : 맞다. 개개인간의 관계, 이를테면 ‘커스터머와 친구가 된다’ ‘퀴어와 애인이 된다’ 같은 계기로 이해하는 건 언제든 뒤집힐 수 있는 것 같다. 우리에겐 교육과 제도, 법이 필요하다.

    가을 : 하지만 인간은 컴퓨터가 아닌지라…… 교육, 제도, 법, 모두 감정에서 출발하는 것이고. 소설은 결국 그 감정을 조망하는 장르가 아닐까.

   희망과 유대.
   나는 그 단어들이 좋았다. 그 단어들은 따뜻했다. (129쪽)


    다홍 : 미래에 대해 비관적인 생각이 많다. 나아질 거라는 기대감이 크지 않다.

    가을 : 나는 전체적으로는 나아질 거라 생각하지만 단기간에 크게 희망하진 않는다. 그럼 지치니까.

    연 : 나는 낙관적인 편이다. 인류 발전설이랄까.

    가을 : 사실 퀴어는 굉장히 희망적인 이슈라 생각한다. 이외에 너무나 희망이 안 보이는 이슈가 많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전쟁은 영원히 있을 것 같고, 인간 종에 대한 희망은 별로 없지만, 퀴어 이슈는 인간이 이기적이기 때문에 오히려 가장 희망과 가까운 이슈라고 본다.

    연 : 큰 사건이야말로 ‘어라, 어라’ 하면서 예고 없이 일어날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세상은 언제나 시궁창이었는데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리려는 사람들은 그 진창 속에서 투쟁하고, 그 덕분에 세상은 조금씩 나아가고 있다’는 말을 어느 책에서 봤다. 헤세였던 것 같다.


    발랄한 소설을 읽고 발랄한 이야기를 나눴다. 각 지역에서 세미나를 진행하는 프로젝트인 만큼 제주라는 지역에 대해서도 듣고 싶었지만, 인원이 잘 모이지 않아 조금 아쉬웠다. ‘지역성’과 ‘당사자성’을 동시에 살려 진행하기엔 아웃팅의 우려가 큰 점과, 홍보가 그리 잘 닿지 않은 점이 프로젝트 내내 어려움으로 자리했다. 하지만 이번 세미나도 한 작품을 통해 충분히 의미 있는 주제들로 깊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이었다. 앞에 말했다시피 개인적으로는 퀴어 이슈에 있어 다소 비관적이었던 태도에 어떤 전환점을 찍을 수 있는 계기도 되었다.
   세미나를 마치고 바다를 거니는 시간을 가졌다. 푸른 정경과 파도소리에는 묘한 힘이 있었다. 술렁이는 마음을 다잡고, 다시 일상 속에서 살아나갈 수 있게 만드는 힘. 제주는 『커스터머』에서 느낄 수 있는 희망적 메시지를 새기기에 더없이 좋은 곳이었다. 세상은 앞으로도 변화할 것이다. 어떤 과정이 얼마나 더 필요할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낙관적으로 생각해보기로 했다. 이번 ‘읽는 퀴어: 우리는 어디서든’ 프로젝트가 어떤 발돋움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었으면 좋겠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여정이 끝났다. 각기 다른 색채를 가진 퀴어문학과 함께 여러 지역의 사람들을 만났다. ‘퀴어’라는 키워드로 묶여 있지만, 각자의 삶을 다르게 살아가는 만큼 한 작품을 다룰 때도 다양한 생각들이 드러났다. 그중에는 미처 생각해보지 않았던 세계도 존재했다. 세미나를 할 때마다 느꼈던 점이다. 스스로 퀴어임을 드러내고 퀴어와 문학에 대해 이야기하는 자리는 많은 의미와 가능성을 담고 있다. 앞으로도 새로운 퀴어문학과 독자들을 만나고 싶다는 바람과 함께 글을 마친다.

무지개책갈피 홈페이지(www.rainbowbookmark.com)에서 전체 대담을 보실 수 있습니다.

무지개책갈피, 다홍

"한국에도 퀴어문학이 있나요?”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 시작된 한국퀴어문학종합플랫폼. 퀴어문학이라는 장르조차 생소한 한국에서 퀴어를 다루는 소설을 모으고 읽고 씁니다. 읽고 쓰는 당사자 작가와 독자를 응원합니다. 그리하여 대답하려 합니다. "네. 한국에도 퀴어문학은 있습니다.”

2018/04/24
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