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낭독을 향하여(6분 29초). 조용한 곳에서 들으시면 좋습니다.


‘식물낭독을 향하여’ 악보



    올해 초, 즙즙은 식물에게 알파벳을 읽어주는 남자의 영상과 철길 뒤에서 종이를 들고 무언가를 낭독하는 여자의 영상을 함께 보았다. 식물은 대답이 없었고 여자의 목소리는 주변의 소리에 파묻혀 들리지 않았다.

    의도와 의미가 없어져도 어엿하게 존재하는 것. 식물은 알파벳 26자를 배웠으니까 에이 비 씨 디 이 에프 쥐 에이치 아이를 언젠가 발음하겠지. 철길 뒤 여자의 목소리처럼 그 발음은 들리지 않겠지.

    식물낭독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알파벳과 한글을 조합할 줄도 해체할 줄도 섞을 줄도 아는 즙즙의 입. 우리의 입에서 발화되었던 과거의 발음들. 그리고 지금 즙즙의 입 앞에 있는 즙. 식물낭독이라는 단어가 즙이 된다. 그 즙이 묻어날 새로운 소리들을 상상한다.

    이번엔 우리의 말들이 의미 없는 순수한 소리로만 남아 있길 바랐다.
   소리에만 집중된 음절들을 발음해보자.
   소리에만 집중해 음절들을 발음해보자.

    그것들을 셋이서 화합하며 발음할 방법을 궁리하였고 계획도 세웠다. 하지만 실행을 해보니 예상과는 달랐다. 한곳에 모여 있던 음절들은 멤버 각자가 만들어낸 의도와 시간을 따라서 뿔뿔이 흩어졌다.

    흩어진 음절들은 의미를 잡아먹으며 단어가 되었고 잡아먹은 의미와 의미가 배 속에서 엉키며 문장으로 자라난 채 튀어나왔다. 세 개의 입에서 나온 문장들이 충돌하였다. 그 충돌은 때로는 어울렸고 때로는 어울리지 않았다.

    의미 없는 음절들을 바랐던 것이라면 우리의 시도는 실패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의도치 않았던 문장에까지 다다르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떤 면에선 또다른 만족을 경험하였다. 문장들의 부딪침과 어지러운 의미 속에서도 화합은 이상하게 존재했기에. 화합이 느껴졌을 때 더는 어지럽지 않았기에. 그렇게 우리는 식물낭독을 향했다.
 


식물낭독을 위한 강신우의 악보. 아무런 의미를 담지 않은 소리가,
때로는 그것이 소음일지라도, 좀더 맑은 소리로 다가올 때가 있다.

식물낭독을 위한 김인경의 악보. 우리가 발음한 단순한 음절들.
발음하기 힘들거나 한글로 표기할 수 없는 음절은 악보에 적히지 않았다.

식물낭독을 위한 김효나의 악보. 숨을 내뱉듯 소리를 내뱉으려 했지만
낭독에는 묘한 긴장이 더해졌다. 식물낭독을 ‘향하여’ 나아갈 수밖에. 





즙즙

각자의 침묵을 길게 끌고 온 세 사람이 모여, 읽는다. 소설 쓰는 김효나, 미술 하는 김인경, 소리 만들고 퍼포먼스 하는 강신우가 즙즙의 멤버다. 언어로만 이루어진 언어악보를 제작하여 읽기도 하고, 즉흥으로 읽기도 한다. 작년에는 15분 동안 ‘기역’을 읽었고, 30분 동안 ‘디귿’을 읽었다. 기역의 공간은 미끄러운 기억이었고 디귿의 공간은 마음의 불안을 지그시 눌러 주었다. 올해는 채식낭독을 꿈꾼다. soundcloud.com/zzpzzp/

2018/04/24
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