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That Corona
5화 All That Corona 5
한쪽 팔만 씩씩해.
왜?
내 뇌는 반으로 나뉘어 있어서.
#
창밖
하얗게 세어간다
#
장은 하얗게 머리가 세어가는 남자다.
그렇게 쓰고 나는 웃는다
장은 마스크를 썼는데
장의 마스크는 두고
두는 장의 얼굴을 가릴 뿐만 아니라 머리를
완전히 잠식한 상태로
춤추는
탈에 가깝게
변했기 때문이다.
장은 두와 함께 씻고
장은 두와 함께 이를 닦는다
사랑 :
서로 다른 두 존재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가 되려는 지향성.
사랑 :
세계 속의 하나였던 두 존재가
세계로부터 떨어져나와
세계와 존재
라는 형태의 둘이 되는 것
나는 쓰고
나는 줄을 긋고
웃는다.
#
두는 장의 일기를 훔쳐보기로 마음먹었다.
#
언젠가 이런 식으로 쓰는 사람을 분류한 적이 있다. 일기를 쓰는 인간과 편지를 쓰는 인간. 이렇게 분류한 적도 있다. 분열증과 강박증. 너무 이분법적인가? 하지만 이분법은 편리하다. 흑과 백. 삶과 죽음. 적과 친구. 인간과 비인간. 생각과…… 생각…… 생각 이외의 다른 것이 존재하나? 모르겠다. 생각과 비생각이라고 적으려다가 비생각은 무, 라는 생각이 들어서, 아니 무, 라는 것 자체가 이미 생각 아닌가? 인간은 잘 때조차 생각하지 않나? 기억나지 않을 뿐이지. 죽으면 생각이 멈추나? “죽으면 생각이 멈추나?” 따위의 생각을 죽어서도, 그러니까 죽은 채로 계속 하게 된다면?
일기를 쓰는 인간은 자기중심적이다. 일기인간에겐 편지조차 일기에 불과하다. 자기 자신에게 보여주기 위해 편지를 쓴다. 편지를 읽는 사람을 통해 자신을 읽는다. 화자와 청자가 같고 발신인과 수신인이 같다. 들뢰즈를 빌리면 ‘후기표인간’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럼 편지인간은 어떻고? 편지인간에겐 일기조차 편지다. 타인에게 발신하기 위해 일기를 쓴다. 편지인간이 일기를 쓴다면 그것은 애초에 읽혀지기 위한 것이므로, 일기의 수신인은 불특정 다수이며, 편지인간의 비밀은, 편지인간에게 비밀이란, 어떤 식으로도 기록되지 않는 형태로 발화하는 그 무엇이다. 이를테면, 생각이라든가.
나는 어떻고? 나는 일기일기인간1이다. 그런데 나는 편지를 잘 써서 내가 편지를 썼던 사람들은 모두 내 편지를 사랑했다. 사실 그거 내 일기인데. 나한테 쓴 건데. 그래서 좋아하는 걸까? 그 사람들은 나를 좋아하는 걸까? 나를 좋아해서 편지를 사랑했던 걸까? 알 수 없는 일이다. 적어도 그 편지는 나보다 나은 인간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말해볼 수도 있겠다. 편지라는 형태의 일기를 쓰고 있던 나 자신은 적어도 쓰고 있지 않는 나 자신보다 나은 인간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까 편지는 과거의 나고, 타자를 생각하는 나고, 타자를 생각하는 나를 생각하는 내가 남긴 일기다. 그래서 좋은 걸까?
내 기준으로, 편지인간들은 다소 한심한 구석이 있다. 사실 이 글─이것이 일기인지 편지인지는 명시하지 않겠다, 그냥 글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이렇게 써도 당신은 이 글이 무엇인지 알고 있을 테니까─의 첫머리엔 내가 생각하는 일기인간과 편지인간들의 분류를 나열할까도 생각했는데, 일기일기인간인 나는 편지인간들을 다소 한심하게 생각하므로, 편지인간으로 분류되어 나열된 인간들이 기분 나빠할 수도 있으니까, 나열하지 않았다. 당신은 편지인간인가? 기분 나빠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가 아는 한 편지인간들은 나를 한심하게 생각하니까. 피차일반이다. 내게 편지를 쓰지 않는 방식으로 나를 경멸하겠지. 아마도.
분열증과 강박증의 분류는 조금 다른데, 분열증자는 강박적으로 글을 쓰고, 강박증자는 분열적으로 글을 쓴다. 그것이 그들의 생존 방식이다. 내가 분열증자인지 강박증자인지는 명시하지 않겠다. 당신이 이 글을 읽으면서 그것을 알아주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나는 그렇게 생존한다─글이 이렇게 생존하듯, 생각이 그렇게 지워지지 않는다. 비생각은 없다. 생각은 영원한 질서 속의 오점이고 단 하나의 얼룩이며 모든 것이다. 자아의 문제가 아니고. 나는 모든 것의 범주를 말한다.
나는 편지를 쓰려다가 일기를 쓸 수밖에 없는 나 자신을 생각하고 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이 글의 수신인은 단 한 명이다─그 한 명은 나일 수도 있고 타인일 수도 있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일 수도 있지만, 일기일기인간인 나는 어쩔 수 없이 그 모든 것을 생각하는 내게 이 글을 쓴다. 편지를 쓰고 싶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로하고 싶었다. 하지만 쓰려고 하는 순간 위로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한 글자도 쓸 수 없었다.
분열증자는 강박적으로 글을 쓰면서, 혼돈 속의 세계에 질서를 부여하려고 한다. 분열증자는 혼돈 속에서 불안과 사랑과 증오를 느끼며, 사실은 자기 자신이 가장 편안하게 생각하는 그것들을 제거하려는 시도 속에서 아무것도 제거하지 않는다. 오히려 체계적인 혼돈을 원한다. 분열증자의 이상적인 집은 태풍의 눈 같은 것으로, 모든 것이 휩쓸리고 날아가는 혼돈의 한가운데 안주하려는 태도와 같다─그리고 태도는 언제나 의도보다 중요하다.
강박증자는 분열적으로 글을 쓰면서, 세계 속의 질서에 균열을 내고 싶어 한다. 강박증자는 아무것도─말하자면, 모든 것이─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바로 자기 자신이 그 사실을 제일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강박증자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는 새로움이다. 강박증자에게 새로움이란 불가능이며, 절망이며 죽음이고, 모든 것의 체계에 절대적 질서를 부여하는 메타-질서다.
일기를 사랑하는 인간과 편지를 사랑하는 인간은 어떤 인간인가? 그들은 일기인간과 편지인간인가? 그것은 또다른 문제라서, 정확히 표현하면 일기인간이 쓴 일기를 사랑하는 인간과 편지인간이 쓴 일기를 사랑하는 인간, 그리고 일기인간이 쓴 편지를 사랑하는 인간과 편지인간이 쓴 편지를 사랑하는 인간, 그렇게 분류해야 하는데, 그리고 거기에 분열증과 강박증을 더하면…… 이분법의 세계도 결국 제곱으로 중첩되면 복잡계와 다를 게 없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로할 수 있는 세계와 위로할 수 없는 세계를 생각하고, 나 또한 위로받아야 할 사람이라거나 혹은 누구에게도 위로받지 못할 사람이라는 생각을,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사랑하거나 사랑하지 않는 이분법의 세계에 대해 더이상 생각하지 않는 나에 대한 생각을, 하면서 결국 생각으로 점철된 단 하나의 얼룩이며 모든 것인 이 영원들의 나열에 대해, 우울하다고 적으면 우울해지고 행복하다고 적으면 행복해지는 작고 연약한 이 세계에 대해, 일기일기인간인 내가 할 수 있는 영원한 말은 이것밖에 없다. 사랑해. 이 말과 생각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고 더이상 이분법으로도 나눌 수 없다.
#
두는 장의 일기를 덮고 생각한다.
#
하얗게 세어가던 창밖은
이제 창 안으로 스며드는 중이다
언젠가 창밖과 창 안은 하나가 될 테지만
어쩐지 장은 창틀에 걸터앉아
다리를 아래로 걸친 채
공포와 매혹의 차이에 대해
생각에 잠긴 채
눈을 감는다.
눈꺼풀 바깥은 하양
눈꺼풀 안은 스며든 하양
눈꺼풀은 수천 조각으로 잘려나가는
나비 날개
비대칭 잔상
#
규칙을 어기는 것은 쉽다. 규칙을 바꾸는 일이 어렵다. 새로움이란 규칙을 어겼을 때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규칙을 바꿔나갈 때 발생한다. 규칙을 바꾸는 일은 규칙의 가장 중심부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규칙 바깥에서 규칙을 어기는 일은 새로움이 아니며, 역설적으로 규칙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에 해당한다.
먼저 규칙을 파괴하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것부터 인정하자. 규칙이 없다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규칙─코스모스는 카오스의 반의어가 아니며 카오스의 동의적 표현에 해당한다. 규칙은 혼돈이며 혼돈이 곧 규칙이다. 따라서 코스모스는 본질적으로 질서가 아니라 무의 얼룩에 해당하는 혼돈으로 존재한다. 유일한 질서는 오직 순수한 무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규칙을 어기거나 파괴하려는 시도 대신 규칙을 바꾸자. 원심력의 영향을 가장 적게 받는 중심부로부터 시작하자. 규칙의 중요성을 강조하지 않으면서 은밀하고 내밀하게 바꿔버리자. 언젠가 세계는 깨닫게 될 것이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음으로부터
모든 것이 영원히 변화했다는 사실을.
왜?
내 뇌는 반으로 나뉘어 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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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밖
하얗게 세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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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은 하얗게 머리가 세어가는 남자다.
그렇게 쓰고 나는 웃는다
장은 마스크를 썼는데
장의 마스크는 두고
두는 장의 얼굴을 가릴 뿐만 아니라 머리를
완전히 잠식한 상태로
춤추는
탈에 가깝게
변했기 때문이다.
장은 두와 함께 씻고
장은 두와 함께 이를 닦는다
나는 쓰고
나는 줄을 긋고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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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는 장의 일기를 훔쳐보기로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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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이런 식으로 쓰는 사람을 분류한 적이 있다. 일기를 쓰는 인간과 편지를 쓰는 인간. 이렇게 분류한 적도 있다. 분열증과 강박증. 너무 이분법적인가? 하지만 이분법은 편리하다. 흑과 백. 삶과 죽음. 적과 친구. 인간과 비인간. 생각과…… 생각…… 생각 이외의 다른 것이 존재하나? 모르겠다. 생각과 비생각이라고 적으려다가 비생각은 무, 라는 생각이 들어서, 아니 무, 라는 것 자체가 이미 생각 아닌가? 인간은 잘 때조차 생각하지 않나? 기억나지 않을 뿐이지. 죽으면 생각이 멈추나? “죽으면 생각이 멈추나?” 따위의 생각을 죽어서도, 그러니까 죽은 채로 계속 하게 된다면?
일기를 쓰는 인간은 자기중심적이다. 일기인간에겐 편지조차 일기에 불과하다. 자기 자신에게 보여주기 위해 편지를 쓴다. 편지를 읽는 사람을 통해 자신을 읽는다. 화자와 청자가 같고 발신인과 수신인이 같다. 들뢰즈를 빌리면 ‘후기표인간’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럼 편지인간은 어떻고? 편지인간에겐 일기조차 편지다. 타인에게 발신하기 위해 일기를 쓴다. 편지인간이 일기를 쓴다면 그것은 애초에 읽혀지기 위한 것이므로, 일기의 수신인은 불특정 다수이며, 편지인간의 비밀은, 편지인간에게 비밀이란, 어떤 식으로도 기록되지 않는 형태로 발화하는 그 무엇이다. 이를테면, 생각이라든가.
나는 어떻고? 나는 일기일기인간1이다. 그런데 나는 편지를 잘 써서 내가 편지를 썼던 사람들은 모두 내 편지를 사랑했다. 사실 그거 내 일기인데. 나한테 쓴 건데. 그래서 좋아하는 걸까? 그 사람들은 나를 좋아하는 걸까? 나를 좋아해서 편지를 사랑했던 걸까? 알 수 없는 일이다. 적어도 그 편지는 나보다 나은 인간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말해볼 수도 있겠다. 편지라는 형태의 일기를 쓰고 있던 나 자신은 적어도 쓰고 있지 않는 나 자신보다 나은 인간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까 편지는 과거의 나고, 타자를 생각하는 나고, 타자를 생각하는 나를 생각하는 내가 남긴 일기다. 그래서 좋은 걸까?
내 기준으로, 편지인간들은 다소 한심한 구석이 있다. 사실 이 글─이것이 일기인지 편지인지는 명시하지 않겠다, 그냥 글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이렇게 써도 당신은 이 글이 무엇인지 알고 있을 테니까─의 첫머리엔 내가 생각하는 일기인간과 편지인간들의 분류를 나열할까도 생각했는데, 일기일기인간인 나는 편지인간들을 다소 한심하게 생각하므로, 편지인간으로 분류되어 나열된 인간들이 기분 나빠할 수도 있으니까, 나열하지 않았다. 당신은 편지인간인가? 기분 나빠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가 아는 한 편지인간들은 나를 한심하게 생각하니까. 피차일반이다. 내게 편지를 쓰지 않는 방식으로 나를 경멸하겠지. 아마도.
분열증과 강박증의 분류는 조금 다른데, 분열증자는 강박적으로 글을 쓰고, 강박증자는 분열적으로 글을 쓴다. 그것이 그들의 생존 방식이다. 내가 분열증자인지 강박증자인지는 명시하지 않겠다. 당신이 이 글을 읽으면서 그것을 알아주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나는 그렇게 생존한다─글이 이렇게 생존하듯, 생각이 그렇게 지워지지 않는다. 비생각은 없다. 생각은 영원한 질서 속의 오점이고 단 하나의 얼룩이며 모든 것이다. 자아의 문제가 아니고. 나는 모든 것의 범주를 말한다.
나는 편지를 쓰려다가 일기를 쓸 수밖에 없는 나 자신을 생각하고 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이 글의 수신인은 단 한 명이다─그 한 명은 나일 수도 있고 타인일 수도 있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일 수도 있지만, 일기일기인간인 나는 어쩔 수 없이 그 모든 것을 생각하는 내게 이 글을 쓴다. 편지를 쓰고 싶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로하고 싶었다. 하지만 쓰려고 하는 순간 위로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한 글자도 쓸 수 없었다.
분열증자는 강박적으로 글을 쓰면서, 혼돈 속의 세계에 질서를 부여하려고 한다. 분열증자는 혼돈 속에서 불안과 사랑과 증오를 느끼며, 사실은 자기 자신이 가장 편안하게 생각하는 그것들을 제거하려는 시도 속에서 아무것도 제거하지 않는다. 오히려 체계적인 혼돈을 원한다. 분열증자의 이상적인 집은 태풍의 눈 같은 것으로, 모든 것이 휩쓸리고 날아가는 혼돈의 한가운데 안주하려는 태도와 같다─그리고 태도는 언제나 의도보다 중요하다.
강박증자는 분열적으로 글을 쓰면서, 세계 속의 질서에 균열을 내고 싶어 한다. 강박증자는 아무것도─말하자면, 모든 것이─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바로 자기 자신이 그 사실을 제일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강박증자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는 새로움이다. 강박증자에게 새로움이란 불가능이며, 절망이며 죽음이고, 모든 것의 체계에 절대적 질서를 부여하는 메타-질서다.
일기를 사랑하는 인간과 편지를 사랑하는 인간은 어떤 인간인가? 그들은 일기인간과 편지인간인가? 그것은 또다른 문제라서, 정확히 표현하면 일기인간이 쓴 일기를 사랑하는 인간과 편지인간이 쓴 일기를 사랑하는 인간, 그리고 일기인간이 쓴 편지를 사랑하는 인간과 편지인간이 쓴 편지를 사랑하는 인간, 그렇게 분류해야 하는데, 그리고 거기에 분열증과 강박증을 더하면…… 이분법의 세계도 결국 제곱으로 중첩되면 복잡계와 다를 게 없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로할 수 있는 세계와 위로할 수 없는 세계를 생각하고, 나 또한 위로받아야 할 사람이라거나 혹은 누구에게도 위로받지 못할 사람이라는 생각을,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사랑하거나 사랑하지 않는 이분법의 세계에 대해 더이상 생각하지 않는 나에 대한 생각을, 하면서 결국 생각으로 점철된 단 하나의 얼룩이며 모든 것인 이 영원들의 나열에 대해, 우울하다고 적으면 우울해지고 행복하다고 적으면 행복해지는 작고 연약한 이 세계에 대해, 일기일기인간인 내가 할 수 있는 영원한 말은 이것밖에 없다. 사랑해. 이 말과 생각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고 더이상 이분법으로도 나눌 수 없다.
#
두는 장의 일기를 덮고 생각한다.
#
하얗게 세어가던 창밖은
이제 창 안으로 스며드는 중이다
언젠가 창밖과 창 안은 하나가 될 테지만
어쩐지 장은 창틀에 걸터앉아
다리를 아래로 걸친 채
공포와 매혹의 차이에 대해
생각에 잠긴 채
눈을 감는다.
눈꺼풀 바깥은 하양
눈꺼풀 안은 스며든 하양
눈꺼풀은 수천 조각으로 잘려나가는
나비 날개
비대칭 잔상
#
규칙을 어기는 것은 쉽다. 규칙을 바꾸는 일이 어렵다. 새로움이란 규칙을 어겼을 때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규칙을 바꿔나갈 때 발생한다. 규칙을 바꾸는 일은 규칙의 가장 중심부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규칙 바깥에서 규칙을 어기는 일은 새로움이 아니며, 역설적으로 규칙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에 해당한다.
먼저 규칙을 파괴하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것부터 인정하자. 규칙이 없다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규칙─코스모스는 카오스의 반의어가 아니며 카오스의 동의적 표현에 해당한다. 규칙은 혼돈이며 혼돈이 곧 규칙이다. 따라서 코스모스는 본질적으로 질서가 아니라 무의 얼룩에 해당하는 혼돈으로 존재한다. 유일한 질서는 오직 순수한 무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규칙을 어기거나 파괴하려는 시도 대신 규칙을 바꾸자. 원심력의 영향을 가장 적게 받는 중심부로부터 시작하자. 규칙의 중요성을 강조하지 않으면서 은밀하고 내밀하게 바꿔버리자. 언젠가 세계는 깨닫게 될 것이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음으로부터
모든 것이 영원히 변화했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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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디자이너 송제원, 세라믹 아티스트 정서일, 시인 정사민은 2020년 아트북 『텍스티미지 Textimage』 제작으로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텍스트와 이미지, 조형과 디자인 등의 유기적이며 종합적인 협업을 지향합니다.
2022/02/08
5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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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것은 단순히 ‘일기x2’인간의 의미는 아니고, 클리셰에 대한 메타로서의 메타-클리셰, 메타 클리셰에 대한 메타로서의 메타-메타-클리셰라는 맥락과 맞닿아 있다. 말하자면 나는 일기인간인 나 자신에 대해 일기를 쓰는 일기일기인간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