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선물}
1화 백 마디 말이 하지 못하는 일
『혼자 가야 해』
‘{그림책=선물}’은 마음의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사연을 받아 그에 맞는 그림책을 선물하는 프로젝트입니다. 간판을 내걸고 보니 제 의도와 상관없이 ‘힐링의 냄새’가 나는 것 같아 조금 아쉽습니다. 힐링이란 말에선 ‘흉터를 말끔하게 없애주는 매직크림 맛’이 나거든요.
제가 전하고 싶은 위로는 ‘모든 게 다 잘 될 거야’라는 식의 매끈하고 활기찬 기운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혼자서는 감당하기 힘든 지금의 그 마음을 잠시 가만히, 애정 어린 눈길로 들여다보고자 하는 겁니다. 근데 왜 하필 그림책으로 위로를 전하고 싶냐 하면, 그 무엇도 제게 힘이 되어주지 못하던 시기, 그림책이 저에게 선물처럼 다가온 경험을 했기 때문입니다.
제 인생의 방향을 조금 바꾸어놓은 그 일은 수년 전 예고 없이 일어났습니다. 아니, 수차례 예고되었음에도 제가 알아채지 못했거나 외면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즈음 저는 따뜻한 남쪽 섬에서 지내느라 육지에서 벌어지는 일에는 일정 이상 무심해져 있었습니다. 몇 달 만에 만난 친구는 그날따라 흠뻑 취하고자 하였으나 저는 집으로 데려와 잠을 재웠습니다. 다음날 아침은 해장을 핑계 삼아 컵라면을 먹었습니다. 만약 그것이 우리가 함께한 마지막 식사일 줄 알았다면, 따뜻한 밥 한 끼 지어 먹였을 텐데 말이지요. 하지만 저는 다음에 제주도 놀러오면 흑돼지를 구워주겠노라, 천진하게 손을 흔들며 작별을 고했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마지막이었습니다.
저와 만났던 그날 밤 친구가 세상을 저버렸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 그때의 기분은 뭐라고 할 수 있을까요. 장례식장에 놓인 친구의 영정 사진도, 영안실에 누워 있는 모습도 모든 것이 비현실적이었습니다. 그건 네 탓이 아니라는 말도, 친구의 선택이니 받아들이라는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내가 느끼는 감정이 뭔지, 내가 어떤 상태인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습니다. 이해되지 않는 것이 있으면 언제나 책을 찾아 읽었는데 한 글자도 읽을 수 없었습니다. 그때 떠오른 것이 그림책이었습니다.
이전에도 그림책을 좋아하긴 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뭐랄까,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즐기는 정도였지, 내 마음에 뭐라도 집어넣고 싶은 절박함 같은 건 없었습니다. 그때의 저에게는 상황을 납득할 수 있는 구체적인 사실이나 논리가 아니라,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에 스미는 무엇이 몹시도 필요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어린이 도서관 한쪽 구석에서 수없이 많은 그림책들을 기웃거리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은 채 손에 잡히는 그림책을 넘기고 넘기던 중, 저는 한 권의 그림책을 만났습니다.
강아지 한 마리가 생을 마감합니다. 강아지는 같은 처지의 강아지들과 함께 고요한 숲을 지나 강에 다다릅니다. 강아지들은 각자의 배에 올라 되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넙니다. 이때 강을 건너던 주인공 강아지가 잠시 몸을 돌려 독자와 눈을 마주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지요.
‘여기서부터는 혼자 가야 해.’
지금도 이 장면을 떠올리면 어김없이 울컥하는 마음이 올라옵니다. 조용한 도서관에서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입술을 앙다물었던 그때로 돌아갑니다. 잠시 눈을 감고 눈물을 삼킵니다. 숨을 크게 후 내쉬고 책장을 넘기면, 연꽃이 휘휘 떠 있는 노을 진 강물 위에 이런 말이 흐르는 겁니다.
‘슬퍼하지 마. 난 그냥 강을 건너가는 거야.’
더는 참지 못하고 눈물이 터집니다. 저는 양손에 얼굴을 파묻고 울고 또 웁니다. 그만 울어야지 해도 눈물이 멈추지 않습니다. 오른손 왼손 번갈아가며 눈물을 닦아도 다시 훅 울음이 터집니다. 그 장면을 마주하고서야, 맺힌 응어리가 빠지고 눈물을 펑펑 쏟고서야, 먼저 간 친구에게서 ‘난 그냥 강을 건너가는 거야.’라는 말을 너무나 듣고 싶었다는 걸 깨달은 겁니다.
누구의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고, 어느 문장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그 시절, 백 마디 말이 무용하기만 하던 그때, 그림책이 그렇게 제 마음을 어루만져주었습니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는데 훅 들이닥친 선물처럼, 얼떨떨해서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했지만 그 안도감과 고마움을 깊이 기억합니다. 다른 무엇이 아닌, 그림책이 가진 힘에 대해 생각하게 합니다.
저에게 선물처럼 다가왔던 그림책 『혼자 가야 해』(조원희 지음, 느림보, 2011)는 반려견의 죽음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작품이지만 제가 이 책을 개인적 상황과 연결해서 받아들인 것처럼, 수많은 그림책들이 작가의 의도를 넘어서서 재해석되고 새로운 의미로 받아들여집니다. 이 또한 그림책의 묘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림책=선물} 공지를 올리고 여러 분이 사연을 보내주셨습니다. 그중 제가 함께 들여다보고 싶은 네 분의 사연을 골랐고, 매달 한 분에게 그림책 선물을 보낼 예정입니다.
첫번째로 그림책 선물을 받으실 분은 ‘레오’님입니다. 인생의 어느 지점에서 방향을 잃고 어두운 터널을 건너고 있다고 합니다. 이 분에게 어떤 그림책을 보내면 좋을지, 제가 고른 그림책이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지금은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저는 그저 이 책들을 고르기 위해서 몇날 며칠 당신의 사연을 떠올렸다고 말할 겁니다. 그림책을 좋아하고 그림책 만드는 일을 직업으로 삼고 있지만, 내가 당신의 마음에 가닿을 책을 단번에 고르기보단, 나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그림책을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했다고 말할 것입니다. 우리가 고른 선물을 당신이 어떻게 만날지 몹시도 궁금하다고 말할 겁니다.
어떤 그림책들을 골라 보냈는지, 어떤 반응이 돌아왔는지 다음 번 글에 담아보겠습니다.
위모씨
그림책을 좋아하고 그림책 만드는 일을 직업으로 삼고 있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공유하고 싶어 안달하는 경향이 있어 좋아하는 그림책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www.facebook.com/we.are.all.children
2018/05/29
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