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선물}
2화 숨 한 번 크게 내쉬고 딴청을 부리며
『딴생각 중』 『뭐 어때?』 『잘 자요, 달님』
LeO님은 “3년 전 한국에서 대학을 다니다가 진짜 내가 하고 싶은 것이 이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어 학교를 그만두고 일본으로 유학을 갔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어학 공부만 하며 지냈는데 학력이 필요할 거라는 주변의 말들 때문에 일본에서 대학을 다니기 시작했다고요.
하지만 LeO님은 학교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했고 급기야 “지하철을 타면 지하철 바닥이 낭떠러지로 보이고, 식은땀이 흐르고 손잡이나 벽을 잡지 않으면 떨어질 것 같은 공포에 휩싸였다”고 합니다. 이후에는 “집에서 학교까지 걸어다니고 사람들이 없는 시간을 골라 다니고 지인들의 연락도 받지 않았다”고요.
혼자 집에 있는 시간이 점점 많아졌는데 “어떤 날은 몸이 너무 크게 느껴져서 어딘가에 부딪힐 것 같고 어떤 날은 몸이 너무 작게 느껴져서 천장이 까마득하게 높게 보였다”고 하니, 얼마나 막막하고 불안하고 두려웠을까, 짐작만으로도 마음이 아픕니다.
LeO님이 사연을 보내주신 게 3월 초였으니, 두 달이 훌쩍 지났습니다.(이 글이 웹진에 실릴 즈음이면 시간이 더 흘러 있겠지요.) 5월 초 저는 한국에 돌아와 병원 치료를 받고 있다던 LeO님에게 “당신에게 선물할 그림책이 준비되었으니 받을 곳을 알려 달라”고 연락을 했습니다. LeO님이 알려준 곳은 어느 시골에 위치한 작은 책방이었습니다. 가족들과 함께 책방을 운영하고 있다고요. 저는 그곳으로 저와 지인들이 고른 그림책들과 편지를 보냈습니다.
안녕하세요, LeO님. 보내드리는 세 권의 그림책은 저를 포함해 세 사람이 LeO님을 생각하며 고른 책들입니다.
먼저, 제가 고른 그림책은 마리 도를레앙이 쓰고 그린 『딴생각 중』(바람숲아이 옮김, 한울림어린이, 2015)입니다. LeO님에게 어떤 그림책을 선물하면 좋을까 몇날 며칠 고민하다가 머릿속으로 한 마리 새가 날아들 듯이 이 책이 떠올랐습니다.
제가 이 작품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대목은, 어릴 때 발견한 ‘문제’가 말끔히 해결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시시때때로 공상에 빠지는 아이를 보고 어른들은 “아직 어려서 그런 거다” “한때의 일이다” 또는 “정신 똑바로 차려라” 훈수를 둡니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서도 여전히, 순식간에 이곳을 벗어나 다른 세계로 가는 것이 저만의 일이 아닌 것 같아 위로가 됩니다.
『뭐 어때?』(사토 신 글, 돌리 그림, 오지은 옮김, 길벗어린이, 2016)를 추천한 사람은 서울 상수동에서 ‘노란우산’이라는 그림책 까페를 운영하는 최재경 점장입니다. 이분에게 레오님에게 전달할 그림책을 추천 받은 이유가 있습니다.(이분은 이런 저의 속내를 모르고 있지만요.)
오는 6월 중순이 되면 이분은 1년 반 넘게 꾸려온 공간을 떠나 대전에 새로운 그림책 공간을 열게 됩니다. 이런 결심을 하기가 결코 쉽지 않았다는 걸 알기에, 새로운 시작을 앞둔 이 분에게 그림책을 추천받고 싶었습니다.(이분이 유달리 그림책을 아끼고 애정한다는 사실은 덧붙일 필요가 없겠죠.)
최재경 점장은 『뭐 어때?』와 『포에버 영』(밥 딜런 글, 폴 로저스 그림, 엄혜숙 옮김, 바우솔, 2017)을 두고 어떤 그림책을 선물하는 것이 좋을까 고민했는데요. 『포에버 영』에 담긴 의미는 좋지만 보는 사람의 마음 상태에 따라 “축복 받고 태어났으니 잘 살아야 해!”라는 말처럼 들려서 싫을 수도 있겠다 싶더래요. 그래서 남들 눈에는 나사 빠진 것처럼 보여도 남들 눈 의식하지 말고 “뭐 어때!” 하고 살아보는 게 어떨까 말해주는 듯한 이 책을 권하고 싶었다고요.
그림책을 쓰고 그리는 은미 작가는 LeO님에게 권하고 싶은 그림책으로, 숀 탠의 『빨간 나무』(김경연 옮김, 풀빛, 2002)와 베아트리체 알레마냐의 『조금 부족해도 괜찮아』(길미향 옮김, 현북스, 2014), 그리고 『잘 자요, 달님』(마거릿 와이즈 브라운 글, 클레먼트 허드 그림, 이연선 옮김, 시공주니어, 1996)을 골랐습니다. 이중 하나만 골라야 한다고 제가 조르자, 은미 작가는 고심 끝에 『잘 자요, 달님』을 골랐습니다. 아프고 힘들수록 더 잘 자고, 잘 먹고, 잘 쉬어야 하기 때문이라고요. 이 따뜻한 그림책을 권하며 “잘자요 불안, 잘자요 외로움, 잘자요 두려움, 잘자요, 잘자요.”라는 말을 덧붙여주었습니다.
LeO님에게 이런 마음의 위로를 전하는 은미 작가는 5년 전 첫 번째 창작그림책 『기이하고 기묘한 서커스』(느림보, 2013)를 출간한 후, 아이를 낳고 함께 자라나느라 자기만의 그림책 작업에는 집중하지 못했는데요. 최근 두번째 창작그림책을 계약하고 신나게 자기 세계를 펼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저와 함께요).
은미 작가 역시 그림책을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일 뿐 아니라 인생의 어떤 시기를 건너 새로운 시기로 진입하고 있으니, LeO님의 마음에 가닿는 그림책을 추천하리라 생각한 것이지요.
최재경 점장이 대전시 복수동에 새로운 그림책 까페를 열고, 은미 작가가 두 번째 창작그림책을 만들어가는 동안, LeO님에게도 크고 작은 변화들이 생겨나겠지요. 그림책을 권하고 함께 읽는 이 사소하고 작은 인연이 우리의 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지 그 또한 지켜볼 일입니다.
편지와 그림책 세 권을 보낸 후, LeO님의 대답을 기다렸습니다. 다행히 LeO님은 선물을 잘 받았다며 각각의 작품에 대한 짧은 감상을 전해왔습니다. 그중 어떤 책이 가장 마음에 드는지(혹은 다른 사람에게 선물하고 싶은지) 물었더니 『뭐 어때?』를 꼽았습니다. 이런 말과 함께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제가 너무 세상을 무겁게 보면서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모든 일이 힘들고 어렵다고만 믿어서 저에게 안 좋은 일이 일어난 것이 아닌가, 요즘 그런 생각을 합니다. 누군가 저에게 “뭐 어때!” 하고 쉽게 생각하는 방법을 알려줬다면 얼마나 통쾌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LeO님은 자신을 모르는 사람에게 자기 이야기를 털어놓고 싶었고 자기 이야기에 관심을 가져줘서 고맙다고 했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하나의 접점도 없는 사이였지만, LeO님의 사연에 귀 기울이고 나만의 그림책 책장을 들여다보며 ‘어떤 그림책을 선물하면 좋을까’ 고민한 시간들이 우리 사이에 쌓였습니다. 이 순간이 LeO님께 작은 위로가 되었으면 합니다.
혹시라도 LeO님과 비슷한 사연을 가지고 있거나, 주변에 이런 사람을 두고 있거나, 사연과는 상관없지만 여기에 소개된 그림책들이 궁금하다면 찾아보셔도 좋을 것 같네요. 앞이 보이지 않는 순간, 숨 한 번 크게 내쉬고 딴청을 부리면서.
위모씨
그림책을 좋아하고 그림책 만드는 일을 직업으로 삼고 있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공유하고 싶어 안달하는 경향이 있어 좋아하는 그림책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www.facebook.com/we.are.all.children
2018/06/26
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