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하인드랩
1화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조연이다
프롤로그
감각적인 것의 재분배, 라는 말이 있습니다.
프랑스의 정치학자이자 미학자였던 자크 랑시에르의 『감성의 분할』에 등장하는 말이자, 2008년 《창작과비평》 겨울호에 발표된 진은영 시인의 「감각적인 것의 분배: 2000년대의 시에 대하여」에서 주요하게 차용된 말이기도 하지요. 문학은 결국, 우리가 세상에서 ‘보지 못하고’ ‘듣지 못했던’ 새로운 감각들을 다시 조명하고 새롭게 재분배함으로써 현실에 개입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는 내용이 이 말에 담겨 있습니다.
무수한 이야기에는 무수한 ‘사람’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조연은 주연이 아닌 ‘조연’이기에, 주된 대사와 문장을 부여받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때로, 그 조연이 한 명의 사람이라는 가능성조차 빼앗아버립니다. 플롯을 구성하기 위한 도구로만 사용되고 버려지는 것이죠.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가 설명되지 못한 채, 오로지 편견과 익숙함으로 재생산되어 ‘배치’되는 상황이 자꾸만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습니다. 이야기가 진행되기 위해서는 주연과 조연이 필요하고, 모든 인물에 다 초점을 맞추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입니다. 맞는 이야깁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다루고자 하는 문제는 조연이 ‘조연’이어서가 아닙니다. 이렇듯 만들어진 조연의 모습이, 현실에서도 목소리를 빼앗긴 소수자의 모습을 재현하고 있는 경우가 너무나 많으며, 그 편견의 모습이 마치 진실인 냥 다시 가공되어 현실에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조연 서사의 한계가, 곧 ‘현실 조연’의 삶의 한계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비하인드 랩’을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이야기 속 조연의 서사를 연구함으로써 새로운 문학적 ‘감각의 재분배’를 진행하고자 합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식의 관점으로 풀어내고 싶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조연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인생의 주인공인 동시에, 모든 이의 조연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인생에서도 끝까지 조연으로만 남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 문제를 당사자성을 가지고 풀어나가보려고 합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와, 모두의 이야기입니다.
이 프로젝트는 단순히 ‘스핀 오프(spin-off)’를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닙니다. 조연을 설명하는 단어와 문장을 아카이빙하고, 그것이 가지는 의미를 연구하는 것에 지향점을 둡니다. 그리고 조연이 가질 수 있는 문장과 시선, 행동 등을 글, 영상, 사진, 음악 등의 다양한 아트폼으로 재현하는 실험적인 프로젝트를 진행하려 합니다. 우리는 조연이 ‘주인공’이 되길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인공 아니면 조연이라는 이분법적인 구조에 오히려 반기를 들죠. 문학과 예술은 잃어버린 ‘사람’의 자리를 다시 발견할 수 있을까요. 이 연구가 어떻게 새로운 감각을 재분배할 수 있을까요. 창작과 관련된 일을 하는 장은진, 김수현, 김원지 세 사람이 손을 맞잡고 그 질문 속으로 걸어들어가기로 했습니다. 독자 여러분도 부디 함께해주기를. 끝으로, 프로젝트 첫 모임을 마친 후 각자가 쓴 글을 띄웁니다.
연구원 김수현
사람은 등에도 표정이 있다. 늘 이런 생각을 하고 있어서일까. 내 마음을 움직이는 건 대체로 사람의 뒷모습이었다.
등은 솔직하다. 정면 사진은 친밀한 관계가 아니고서야 자연스럽게 찍기 어렵다. 눈앞의 카메라를 인지하는 순간, 피사체의 표정은 흔들린다. 이내 진짜 감정은 어색한 미소 너머로 자취를 감추고 만다. 반면 등은 있는 그대로를 보여준다. 어깨의 높낮이로, 고개와 손의 위치로 그 사람에 대한 힌트를 주는 것이다. 여기에 주변 상황을 더하면 굳이 얼굴을 보지 않아도 표정을 읽을 수 있다. 슬픈지, 기쁜지, 외로워하는지, 긴장했는지, 평온한지.
뷰 파인더 너머 누군가의 등에서 감정을 느낄 때마다 셔터를 눌렀다. 이 사람의 삶엔 어떤 이야기가 깃들어 있을까, 가만히 상상하면서.
사람의 뒷모습을 유심히 보는 일과 꼭 닮은 프로젝트가 있었다. 비하인드 랩에선 조연들의 서사를 발굴한다고 했다. 옆에서, 혹은 한 발자국쯤 뒤에서 뒷모습마저 빛나는 주인공의 등을 바라보며 서 있을 주변 인물들. 주연의 후광에 가려 그림자로 머물러야 하는 이들. 그들의 뒷모습에 담긴 표정을 가장 먼저 읽어내는 사람이고 싶었다. 그렇게 비하인드 랩의 연구원이 되었다. 우리는 조연들이 다뤄지고 있는 방식에 주목해보기로 했다.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사례가 담긴 데이터를 차곡차곡 쌓아나갈 것이다.
연구원 김원지
햄릿의 유명하지 않은 등장인물 가운데는 로젠크란츠와 길덴스턴이라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덴마크의 왕자인 햄릿이 외국에서 대학을 다닐 적에 사귄 친구로, 햄릿의 어머니인 거트루드의 부름을 받고 오랜만에 왕궁에 도착했다. 그들은 햄릿의 환대를 받지만, 어느새부턴가 갑자기 극중에서 사라져버린다. 그후로 그들의 소식을 알 수 있는 유일한 시점은 마지막 장면, 전령의 “로젠크란츠와 길덴스턴은 죽었고(Rosenkranz and Guildenstern are dead)……”라는 대사 한 줄에 불과하다.
그들은 왜 사라졌을까? 이 질문을 던지며 그들을 복원하는 것은 어쩌면, 사라진 또 다른 우리의 복원을 의미할 수도 있다. 우리는 어떤 면에서는 분명 햄릿이다. 우리를 해부해보면 분명 미약한 성분이나마 우리는 주연이고 영웅일 것이다. 물론 현대의 영웅은 벌써 햄릿과도 거리가 멀어져버리긴 했지만. 우리 내면을 아무리 뒤져봐도 어떤 영웅성도 발견할 수 없어 무력감에 빠지고 있지만. 로젠크란츠와 길덴스턴. 그들도 삶의 아주 짧은 순간만큼은 주연이고 우주적 천재이다. 실제로 로젠크란츠의 경우, 극중 증기기관을, 운동량 보존 법칙을, 햄버거를 발견하지만 운명이 그것을 주목하지 않아 결국 그러한 발견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우리는 어느 쪽에 가까운가?
사실, 문학에서 윤리적 차원에서 특정한 소외된 인물을 재발견, 나아가 재창조하는 일은 오래 전부터 꾸준했다. 하지만 꾸준했다고 해서 그것이 가치 없는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런 공헌이 이루어질 때마다 동시대의 누군가는 함께 구원받는다. 아마 세상에는 더 많은 로젠크란츠와 길덴스턴이 있을 것이다. 나에게 비하인드 랩이 그들을 발견할 수 있는 단초가 되기를 희망한다.
연구원 장은진
죽어가던 단역(端役)에게 보내는 편지.
입춘(立春)이 내리는 밤이다.
나는 너에게 편지 한 통 띄우기 위해 펜을 들었으나 아무리 용을 써도 너의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다. 참 애석하다. 슬픈 마음에 너의 이름을 찾아 헤매었건만 그 어디서도 너의 이름 석 자를 발견하지 못했다. 너는 그저 ‘앳된 막내’ ‘술집 여자1’ ‘피해자2’ 같은 아리송한 단어와 숫자로 묘사되어 있을 뿐이었다.
너는 나를 모르겠지만 나는 너를 안다. 나는 미련하게도, 너의 한계가 곧 나의 한계를 뜻한다는 것을 오랜 시간 동안 알지를 못했다.
너는 네가 수많은 상념(想念)과 고뇌(苦惱)의 한숨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믿고 싶겠지만 그들은 고작 담배 한 모금만큼 가벼운 상념 속에서 너를 만들어내었다. ‘그의 손이 옆에 있던 여자의 젖가슴을 주무른다’ 혹은 ‘비명을 지르는 여자의 입을 틀어막고 거칠게 머리채를 잡아챈다’ 등의 묘사로 네가 만들어졌는지는 사실 중요한 일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너는 항상 ‘그냥’ 당연히 그 자리에 존재해야하는 것으로 여겨져왔다는 것이다.
나는 너에게 말하고자, 편지를 띄운다.
실은 이 편지를 쓰는 (너처럼 두 젖가슴을 달고 있는) 나조차도 너의 드러난 가슴을 보고 침을 머금었던 것을 고백한다. 너도 나와 같은 존재라는 것을 잊고 마치 다른 종류(種類)의 인간을 보듯 너를 바라보았다. 네가 그렇게 구역구역 존재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오오랜 시간동안 너를 못 본 체 하였다. 이제 와서 이 무슨 말이냐 나를 비난하여도 좋다. 너는 너의 존재가 아예 사라지기보다는 그렇게라도 그 스크린 속에 남아 있기를 택할 것이다.
그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쓴다.
나는 네가 그 속에 결단코 존재하며, 살아가고 있음을 알고 있다.
내가 너의 이름을 알게 될 날은 앞으로도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기꺼이 너를 기억할 것이다.
비하인드랩연구소
김수현, 김원지, 장은진. 창작과 관련된 일을 하는 세 사람이 모여 이야기 속 ‘조연’을 마주한다. 조연을 표현하는 문장과 단어를 아카이빙하고, 조연에게 전사와 후사를 덧입히는 각자의 프로젝트를 진행할 예정이다. 우리는 이 프로젝트를 통해 문학이 ‘사람’을 존중하는 방법을 깊이 성찰해나갈 예정이다.
2018/06/26
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