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장인물]
     남자
     여자
     소년

     [곳]
     섬


     섬의 너비보다도 키가 큰 나무 한 그루와 두 개의 낡은 해먹이 있다. 나무에는 투명하고 파란 열매가 탐스럽게 달려있다. 작은 나룻배 한 척이 나무 밑에 기대어 있다. 섬 외의 공간은 맑은 물빛으로 일렁인다.
     완전히 밝아지지 않은 채로,


소년
(누워서) 얼마큼 깊었는지는 모르겠어요. 내 기억의 시작은 온통 검은 물속. 아주, 아주 깊었던 거겠죠? (꿈을 꾸듯 일어나) 아마 나는 수심만큼이나 깊은 잠에 빠져 있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누군가가 내 오랜 잠을 깨우기 시작했어요. 나를 부르는 소리, 그 소리를 따라갔어요. 자꾸만 나를 다시 끌어내리려고 하는 물살을 가로질렀어요. 죽을힘을 다해 힘껏 지느러미를 흔들어서 몇 날 며칠을. (웃음) 다시 하라 그러면 아마 못 할 거예요. 지느러미는 점점 닳아 없어졌어요. 희미해지는 의식을 부여잡기 위해 무던 애썼지만 어느 순간 목소리는 점점 멀어지고, 눈이 자꾸 감겼어요. 이대로 영영 다시 깊은 잠에 빠질 것만 같았죠. 그런데 그 순간―


     밝아진다.


소년
(벅차게 숨을 뱉으며) 내 몸이 물 밖으로 떠올랐어요. 바다가 나를 수면 위로 끌어올려 줬나 봐요.
남자
누구냐.
소년
나는 누구인가요?


     사이.


소년
여긴 어디죠?
남자
여길 어떻게 온 거지?
소년
배가 고파요.
남자
(소년의 목에 단도를 겨누고) 대답해라.
소년
먹을 걸 좀 내어주세요.
남자
어서 말해. 여길 어떻게 왔는지.
소년
왜 나를 두려워하고 있나요?
남자
이방인이니까.
소년
이방인…… (기뻐) 그게 제 이름인가요?


     사이.


남자
아니. 이방인은 이름이 아니야. 이곳 사람이 아닌 낯선 존재를 그렇게 부르지.
소년
(천진하게) 나는 낯선 존재군요. 당신은요? 당신은 누구죠?
남자
이 섬에 사는 사람. (경계가 조금은 누그러진) 보다시피 여긴 너를 받아줄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아주 작거든.
소년
그렇지만 난 이미 이곳에 있는걸요.
남자
여긴 너에게 허락된 곳이 아니니까 다른 곳을 찾도록 해.
여자
누구야?


     남자, 단도를 거둔다.
     여자, 해먹에서 몸을 일으켜 잠기운이 역력한 모습으로 소년에게 다가간다.


여자
안녕?
소년
(따라서) 안녕.
여자
넌 누구니?
소년
모르겠어요.
남자
네가 너를 모른다? 우습군.
여자
너무 그러지 마. 떨고 있잖아.
소년
추워요.


     여자, 자신이 덮고 자던 담요를 소년에게 덮어준다.


남자
네 이름조차 모른다면 우리는 너를 이방인이라고 부르는 수밖에 없다.
여자
이름을 주자.
남자
뭐?
여자
우리가 이름을 주자고.
남자
이름을 붙여주면. 그다음은?
여자
그냥…… 여기 있는 동안만 불러주면 되잖아.
남자
이름을 붙여주고 나면 책임이라는 게 생겨. 계속 그 이름을 부르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만 해도 성가시군. (경계하며) 너, 어디서 왔지? 정체도 모르는 너를 이곳에 둘 순 없어.
소년
물밑에서요. 나를 불러서.
남자
누가?
소년
아마도 당신이요.
남자
내가? (기가 차) 난 네 이름도 모른다.
여자
이 사람이 너를 뭐라고 부르던?
소년
그건…… 생각이 잘―
남자
이거 봐.
소년
그치만 정말 당신의 목소리였다고요. 믿어줘요.
여자
그럼 여기 오기 전에는 뭘 했니?
소년
잠을 잤어요.
남자
(짜증이 올라) 잠을 자기 전에는.
소년
내 기억은 그게 전부에요. 계속 잠들어 있었거든요. 검은 물 밑 어딘가에 잠겨서요.
여자
심해야.
남자
심해?
여자
심해엔 빛이 들지 않기 때문에 검잖아. (놀라워) 혹시 인어가 아닐까?
남자
말도 안 되는 소리. 저 말을 믿어? 여기 머무르기 위해 수작 부리는 거야.
여자
이 바다에 인어가 산다는 전설이 진짜였어.
남자
다시 물속에 집어 던져 보면 되겠네. 인어라면 죽지 않을 테니까.


     남자, 당장이라도 소년을 집어던질 기세로 달려든다.
     소년, 저항하지만 힘에 밀려 아스라이 섬과 바다 사이에 걸쳐 눕혀진다.


여자
이럴 필요는 없어. 우릴 해치지 않잖아.


     순간, 짧은 소지진이 인다.
     남자와 여자, 섬이 다시 잠잠해질 때까지 숨죽이고 기다린다.


남자
봤지. (불안해하며) 섬이 흔들렸어.
여자
늘 흔들렸지. 지금은 다시 잠잠해졌고.
남자
전동일지도 몰라.
여자
그럼 지금 당장 뭍으로 가야지.
남자
일단 이 녀석을 내보내보자. 우리의 세계를 흩트려 놓을 거야. 야금야금 이 섬을 좀먹고 우리를 좀먹으려 들 테지.
소년
놔주세요. 아파요.
남자
우리가 애써 가꾼 열매를 이방인과 나눠 먹을 순 없어.
여자
(말리며) 지켜보자. 어쩌면 우리를 뭍으로 데려가 줄지도 몰라.
소년
뭍? 거긴 어딘가요? 여기서 먼가요?
남자
(비웃고) 뭍이 어딘지도 모르는 눈치군. (소년을 던지듯 놓아준다.)
소년
거긴 어떤 곳이죠?
여자
단단한 땅.
남자
파도를 견디지 않아도 되는 곳.
여자
바람을 두려워할 필요도 없고 침식될 염려도 없지.
남자
나무가 자라기에 부족함이 없어.
여자
밤이 오는 걸 무서워하지 않아도 되고 말이야.
남자
해일에도 견딜 수 있겠지.
소년
그런 곳이라면 왜 진작 뭍으로 가지 않았나요?
여자
말처럼 쉬운 게 아니야. 뭍에 가려면 바다를 건너야 하니까.
소년
바다야 건너면 되죠.
남자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쉽게 말하는구나. 우리 중 누구도 너처럼 헤엄칠 수 있는 사람은 없어.
여자
얘. 바다는 위험해. 쉽게 건널 수 있는 곳이 아니야. 넌 아직 물에 대한 감각이 남아 있어서 안 두렵겠지만 우린 아니거든. 될 수 있다면 이 사람 말처럼 너도 얼른 돌아가는 편이 좋을지 몰라.
소년
여기 오느라 지느러미가 다 닳아버렸는걸요. 헤엄치는 것 말고는 뭍으로 갈 방법이 없나요?
여자
배를 띄우는 방법이 있긴 해.
소년
그럼 가요. (박차고 일어나) 뭍으로.


     사이.


남자
우리는 가지 않아.
소년
그렇지만 당신들은 뭍에 가고 싶어 하는걸요.
여자
언젠가는 갈 거야.
소년
그게 언젠데요?
남자
최적의 때에.
소년
최적의 때?
남자
바람과 태양과 파도가 최고의 조화를 이루는 날. 그 날에 배를 띄울 거다.
여자
우린 그 날만을 기다리고 있어.
소년
지금은 최적의 때가 아닌 건가요?
여자
응. 파도가 얼마나 높을지 알 수가 없으니까.
소년
기다리다 보면 알 수가 있나요?


     사이.


남자
계속 조잘댔다간 정말로 바다로 던져 버릴 줄 알아.
소년
난 그저 궁금해서―
남자
우린 적기를 기다릴 거야. 호시탐탐 우릴 집어삼킬 궁리를 하는 바다가 우리에게서 눈을 돌릴 그때를.
소년
바다는 그렇게 나쁘지 않아요. 날 여기로 데려다줬는걸요.
남자
바다는 파도를 일으켜 온갖 쓰레기를 여기로 떠내려 보내곤 하지.


     사이.


여자
때론 좋은 것이 밀려오기도 해. 저 배처럼. 쓸모가 있는.
남자
낡아 빠져서 제구실이나 할지. (소년에게) 너로서도 여기보단 물속이 나았을 거다. 해수면은 계속 요동치겠지만 물속은 고요하니까. 어쩌면 뭍보다도 안전하고, 가장 완전한 곳일지 모르지.


     남자, 말을 마치고 나무에 올라 열매 하나를 딴다. 여자가 받는다. 남자의 눈이 소년과 마주치지만 외면하고 나무에서 내려온다.


여자
당신은?
남자
난 좀 자야겠어.


     남자, 자신의 해먹에 눕는다.
     여자, 허밍으로 노래를 불러준다. 이어 파란 열매를 반으로 쪼개 소년의 곁에 앉는다.


여자
자. 이 섬에 나는 유일한 식량이야. 우린 이걸 먹고 살아. 제법 탐스럽고 맛도 좋지만 배가 부르진 않을 거야. 게다가 내 몫을 나눠 먹는 거니까.


     여자, 제 몫의 열매를 먹는다.
     소년, 망설이다가 받지 않는다.


소년
(남자의 눈치를 보며) 싫어할 거예요. (애써) 그리고 저도 배가 안 고프고요.
여자
저 사람이 너를 미워하는 것 같니?
소년
나를 이 섬에 떠내려온 쓰레기 중 하나라고 생각하는 걸요.
여자
그와 나 둘뿐이던 세계에 다른 존재가 와서 낯설 뿐이지 널 미워하는 게 아니야. 난 느낄 수 있어.
소년
어떻게요?
여자
너를 위험한 이방인이나 쓰레기로 생각했다면 네 곁에 나를 두고 잠들 리 없거든. (다시 열매를 권하면)
소년
정말 그럴까요? (열매를 받아먹고) 달콤해요. 이걸 배불리 먹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뭍에 갈 때 나무도 데려가나요?
여자
나무를 가지고선 뭍에 갈 수 없어. 배가 가라앉을 테니까. 정성껏 가꿨던 기억 때문에 아깝겠지만, 뭍에 가는 일은 이 나무와 열매를 포기할 만큼, 또 목숨을 걸 만큼 가치가 있는 일이야. 뭍은 땅이 비옥해서 나무가 자라기 더 좋을 거고. 거기서 또다시 우린 나무를 가꾸겠지. 이따금 이 섬의 나무를 떠올리면서.
소년
최적의 때는 언제쯤 올까요?
여자
글쎄.
소년
그는 정말 뭍에 가고 싶은 걸까요? 아, 그러니까 내 말은―
여자
모르겠어. 늘 미루기만 하는 사람이니까. (사이) 물론 적기를 기다리는 거겠지.
소년
내가 도움이 된다면 좋을 텐데.
여자
지금도 충분해. 넌 예전 우리를 떠오르게 하거든. 순수하게 뭍을 바라던 때를. 그게 내가 너와 함께 하고 싶은 이유야. (웃으며) 그래서 그도 너를 당장 내치지 않는 걸 테고.


     소리 없는 번개가 번쩍이고 이어 작은 천둥이 친다.


여자
놀랄 거 없어. 비가 내리려는 거야.
소년
비?
여자
하늘에서 내리는 물.


     여자, 일어나 차양을 치기 시작하고 남자가 잠에서 깬다.


여자
비가 올 모양이야. 하지만 괜찮을 테니까 계속 자. 얼마 못 잤잖아.


     천둥이 크게 친다. 놀란 소년이 귀를 틀어막고 움츠린다. 비가 내린다.


남자
나머지는 내가 칠 테니까 당신은 어서 비를 피해.
여자
(소년에게 손짓하며) 너도 이리 와.


     소년, 고개를 젓는다. 쏟아지는 빗속에서 안정을 찾는 듯한 모습이다.
     차양을 다 친 남자가 여자 옆에 앉는다. 두 사람, 차양 아래에서 소년을 바라본다.


여자
아직 물이 좋은 모양이야.
남자
다 한때지.
여자
나도 한땐 비 맞는 걸 좋아했어. 당신도 마찬가지였고. (손을 뻗어 비를 맞으며) 뭐가 그리 좋았는지 종일 같이 비를 맞아도 옷이 젖는 줄 몰랐으니까.
남자
눈을 좀 붙이도록 해.
여자
당신은?
남자
깨어있어야지. 비가 오잖아. 난 조금 잤더니 괜찮아.
여자
언제쯤이면 같이 잠들 수가 있을까.


     남자, 해먹에 몸을 누인 여자에게 담요를 덮어주곤 자신의 젖은 옷을 벗어 물기를 짠다.
     소년, 남자를 따라한다.


남자
여기 있으면 이 찬비를 숱하게 맞아야 하고 바람을 맞고 때론 굶주리게 될 거다.
소년
괜찮아요. 계속 여기 머물진 않을 테니까요. 곧 뭍으로 갈 테니까.
남자
너 같던 때가 있었지. 아무것도 몰라서 아무것도 눈에 뵈지 않을 만큼 무모했던 때가. 우리라고 뭍에 가려고 안 해 본 줄 알아? 숱하게 실패했어. 다치고. 그러면서 깨달은 건 실패는 성공의 과정이 아니라 절망과 두려움을 학습하는 과정이라는 거였지. 그러니까 늦기 전에 돌아가. 네 말대로 바다가 나쁘지 않다면, 정말 그렇다면 너를 받아줄 거다. 아직 늦지 않았어. 너라면 돌아갈 수 있을 거야. 물 위에서 살아가는 것보다는 그편이 낫겠지. 적어도 거긴 해일에 가슴 졸이지 않아도 될 테니까.
소년
아니요. 난 여기 있을래요.


     섬을 둘러싼 물빛이 점점 어두워진다.


소년
내가 여기 있고 싶은 이유는 하나에요. (사이) 당신들을 알게 됐잖아요. 돌아가게 된다 해도 다시 혼자라면 싫어요.


     섬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남자, 심상치 않음을 직감한 듯 불안한 얼굴이 된다. 여자를 깨운다.


남자
해수면이 높아진 것 같아. 섬 표면이 조금 잠겼어. 일단은 깨어있자.


     여자,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단도를 집어 든다. 묶여있는 배 앞으로 간다.


남자
무슨 생각이야?
여자
섬은 가라앉고 있는 거야.
남자
잠이 덜 깼어?
여자
(줄을 끊으며) 그동안 시간이 우릴 많이 봐줬어.
남자
(말리고) 그럼 이방인을 내 보내야 해. 이방인이 오고 나서부터잖아. 무게를 견디지 못 하는 걸 거야.
여자
당신 말대로 섬이 가라앉고 있다면 저 애를 바다로 돌려보낼 게 아니라 우리가 뭍으로 가야지.
남자
(단도를 빼앗고) 적기를 기다리기로 했잖아!
여자
모르겠어? 지금이 적기야!
남자
이방인만 사라지면 돼. (소년에게) 우릴 죽게 할 셈이야? 네가 사라져야만 우리도 이전의 삶을 지속 할 수가 있어.
소년
(겁에 질려) 내가 당신들을 죽게 하고 있는 건가요?
여자
네 탓이 아니야. (남자를 향해) 이 좁아터진 섬에서 나무는 계속해서 자라나. 뿌리가 섬을 조각내는 건 언젠가 일어날 일이라고. 당신도 알잖아. 지금 뭍으로 가야 한다는 걸.


     섬이 가라앉는다. 파도에 크게 요동치며.
     남자, 여자가 넘어지지 않도록 붙잡는다.


남자
지금 배를 띄웠다간 죽어!
여자
여기 계속 있는 것도 목숨을 걸어야 하는 건 마찬가지야.
남자
이방인 때문에 우리를, 우리로 가득한 이곳을, 나를…… 떠나?
여자
일단 줄을 끊어. 시간이 없어. 여길 떠나자.
남자
저 녀석만 돌려보내면―
여자
심해로 돌아갈 수 없어. 더 이상 지느러미가 없잖아. 봐. 두 다리를. 우리와 다를 게 없어.
남자
진짜 인어라고 믿는 거야? (사이) 둘 뿐이었을 땐 문제가 없었잖아. 이렇게 큰 소리를 내서 싸운 적도 없지. 그랬던 일상으로 돌아가자. 다시 잠잠해질 거야. 늘 그랬듯.
여자
그럼 당신은 언제 잠길지 모를 이 섬에 계속 안주하며 살아.
남자
적기를 기다리는 거잖아. 조금만 더 기다려줘. 안전하게 뭍에 갈 수 있을 때까지.
여자
당신은 날 위해 조금의 용기도 내질 않아.
남자
그러는 당신은 나를 믿지 않잖아.
여자
저 애는 당신의 목소리를 따라왔어.
남자
부른 적 없어.
여자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고 해서 기억이 없다고 해서 그 책임이 없어지진 않아.
남자
가지 마.
여자
이게 우리의 끝이어선 안 돼. (남자를 끌어안고) 가자. 제발.


     그 사이 소년은 배를 물가로 옮겨 떠날 준비를 마친다.


소년
바다가 우리를 뭍에 닿게 해 줄지도 모르잖아요.
남자
바다를 믿을 바에야 섬을 믿겠어.
여자
다 잠기고 말 거야.
남자
문제없을 거야. 가. 그리고 저 해일 속에서 나를 택하지 않은 걸 후회해.
여자
당신은 평생을 기다려도 적기를 만날 수 없을 거야.
남자
기다리지 못하고 떠나는 건 너야.
여자
마침내 그것이 와도 알아채지 못하겠지. 지금 이 순간처럼.


     섬 표면이 모두 잠기고 나무마저 잠기기 시작한다.
     남자, 여자에게 키스하고 단도를 빼앗는다. 여자가 배로 밀쳐진다.


남자
잊지 못할걸. 우리를. 여기서 함께 나무를 가꾸고, 비를 피하고, 열매를 양보하던 우리를. 서로를 위해 잠을 아끼던 우리를…… (단숨에 줄을 끊어내고) 잊지 마.


     배가 섬으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한다.
     소년과 남자의 위로 빛이 떨어진다. 파도마저 멈춰버린 시간 속에서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


소년
어째서 아직도 그 섬을 믿나요.
남자
뭐?
소년
여태껏 바다 위에서 살았으면서, 어째서 바다는 조금도 믿지를 않고. 당신도…… 물에서 왔는데.
남자
너, 누구지?


     소년, 웃는다.
     거센 파도의 검은 물빛이 섬과 배를 완전히 집어삼킨다.
     암전.
     긴 고요, 어둠 속에서 여자의 허밍만이 울린다.
     남자, 물속에서 올라온 사람처럼 숨을 들이쉬며 몸을 일으키면 동시에 밝아진다.
     다시 섬이다. 온전한 모습이다.


여자
(허밍을 멈추고) 나쁜 꿈을 꿨어?


     남자, 아직 섬에 있음을 실감한다.


남자
꿈. 그래. 모처럼의 꿈이야.
여자
여기선 긴 잠을 잔 적이 없었으니까.
남자
인어를 만났어.
여자
뭐? 인어?
남자
정말 꿈이었을까. 우리가 인어를 만났던 게.
여자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꿈이었어?
남자
우리가 인어를 만났고, 해일에…… (사이) 아니, 뭍으로 갔어.
여자
(기뻐) 정말?
남자
인어는 왜 우리에게 왔을까. (사이) 꿈에서 말이야.
여자
뭍에 닿고 싶은 당신의 마음을 들었겠지.
남자
내 목소리를 듣고.
여자
상상만으로도 벅찰 만큼 행복한 꿈이야.
남자
지금은 어디에 있을까.
여자
지금 당신 안에도 살고 있네.


     사이.


남자
우리가 뭍에 간다면 그건 지금일 거야.
여자
아직 해도 뜨지 않았는걸. 최적의 때가 온 거야?
남자
그건 알 수 없어. 아마 앞으로도.
여자
당신이 지금이라고 한다면 난 갈 거야.
남자
(불안해하는 여자의 모습에) 아침이 오면 가자. 곧 해가 뜰 테니까.
여자
그럼 당신은 마저 자. 여기서의 마지막이라니. 나는 자지 않아도 좋을 것 같아.
남자
오늘은 같이 잠들자.
여자
같이?
남자
이제 언제 올지 모를 해일을 겁내느라 지금의 우릴 미뤄두지 않을 거야. 그래서 뭍에 가려는 거고.
여자
괜찮을까?
남자
(다독이며) 잠들자. 같이.
여자
그래, 같이.
남자
편하게 말이야. 아침까지는 기다려 주겠지. 바다에게 그 정도 자비는 있지 않겠어?


     두 사람, 끌어안고 잠든다.
     암전.





윤수진

2016년 서울예술대학교 극작과를 졸업했다. 몇 번의 최종심 낙선 후 절필을 마음먹기도 했으나, 절필도 ‘작가’들이 하는 것이라는 어느 선생님의 말씀에 절필하지 못하고 쓰다 보니 오늘이 되었다.

2018/07/31
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