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만의 방’ 프로젝트가 시작된 최초의 문제의식이 무엇이었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하고 싶다. “쓰는 사람들이 겪는 문제를 다뤄보자.” 흔히 문학은 완성된 문학작품을 그러모으기만 하면 성립되는 장르로 이해되기 쉽지만 그 작품들은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의 작가가 현실의 제한적인 조건하에서 여러 한계들과 맞부딪히며 얻어낸 결과물이다. ‘어디서 쓰는가?’라는 질문은 완성된 작품들이 저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의 산물임을 보여주기에 적합해 보였다.
   그러나 프로젝트 멤버 섭외부터 쉽지 않았다. 일반적인 문학잡지의 경우, 특정한 분량의 문학작품을 집필해줄 필자를 구해야 하지만 ‘자기만의 방’은 단지 글만 쓰면 되는 것이 아니라 10만원으로 직접 작업실을 구해야 하고 그 경험을 기반으로 대화하고 글을 써야 한다. 그 때문에 원고료가 아니라 활동비가 지급되는 시스템인데, 사실상 필자들 입장에서는 당연히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약속된 창간 날짜가 하루하루 다가오는데도 참여자들을 찾기가 어려워서 초조했다. 전화를 걸어 기획의도를 설명하고, 기획안을 보내고, 검토를 기다리고, 거절 의사를 밝힌 답변을 여러 번 받으면서 기획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닐까 고민했던 것이 사실이다.
   더이상 섭외가 지연된다면 프로젝트 자체가 무산될 시기에 이르러서야 네 명의 멤버를 모두 섭외할 수 있었다. 곽시원 극작가, 백은선 시인, 임현 소설가, 최현진 동화작가 네 분이 프로젝트 참여에 응해주지 않았다면 ‘자기만의 방’ 프로젝트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각기 다른 장르에서 글쓰기 중인 작가 네 분을 참여자로 섭외했던 이유는 ‘글쓰기’라는 공통된 행위 속에서도 장르마다 가진 특수성이 도드라지길 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프로젝트가 실행되면서 예상했던 그 특수성은 거의 드러나지 않았는데, 월 10만원으로 작업실을 구하는 일이 가진 현실의 한계가 생각보다 훨씬 더 압도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장면이 남아 있다. 유명 연예인을 협찬하는 한 호텔에서 최현진 작가가 자신이 작가임을 밝혔을 때, 호텔 관계자는 반색하며 드라마 작가인지 시나리오 작가인지를 묻는다. 드라마나 영화의 경우, 시청자와 관객 수가 어느 정도 확보되어 있어 호텔 홍보에도 도움이 될 테니 가장 먼저 떠오른 ‘유용한’ 장르였을 것이다. 그러나 동화작가라는 대답에 시큰둥해지는 표정 앞에서 ‘자기만의 방’ 프로젝트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기는 어려웠다.
   백은선 작가는 부동산 앞까지 갔다가 차마 문을 밀고 들어가지 못하기도 했다. 직접 대면하는 것에서 느끼는 부담감 때문에 전화 통화를 택했고, “안녕하세요. 저는 시인입니다. 제가 방을 구하고 있는데요.”라고 몇 번이나 연습했지만 막상 통화가 연결되었을 때엔 연습한 멘트가 무용해지기 일쑤였다. 임현 작가는 작업실로 마음에 드는 카페가 있었음에도 만일 제안을 거절당하게 된다면 이 카페에 다시 손님으로 다시 오지 못하게 되지 않을까 싶어 말을 꺼내지 못했다. ‘자기만의 방’을 제안해보는 것조차 너무 큰 용기가 필요했던 이 순간들은 당연하게도 ‘수익성’이라는 기준하에서 문학이 어떤 존재로 이해되고 있는지를 어느 누구보다 작가들이 가장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자기만의 방’ 프로젝트가 진행되는 동안, 나는 기획자로서 이 프로젝트가 ‘왜’ 존재하는지, 남은 기간 동안 어떻게 진행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여러 번 고민스러웠던 것을 고백한다. 멤버들은 프로젝트가 진행되는 동안 예술에 대한 한국사회가 갖는 여러 편견들 앞에서 홀로 부딪혀야 했고, 그건 당연히 과도한 감정노동이 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각자 작업실을 구하기보다는 작은 규모라고 하더라도 일종의 ‘단체 행동’으로서 기획을 하는 것이 옳은 방향이 아니었을까. 사회 구조 앞에서 개인이 홀로 부딪혔을 때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실패와 고통에 방점이 찍힐 수밖에 없으며, 다른 방식의 공존 가능성에 대한 상상력은 줄어들지 않을까. 이런 의문들 속에 오래 잠겨 있기도 했다. 그럼에도 이런 대화는 기획이 염두에 두고 있었던 문제의식보다 한발 더 나아간 순간이었다고 생각한다.

   최현진 : 그런데 모두가 ‘부지런한 개미’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동시에 폄하하는 의미로도 개미가 쓰이지 않나요? 주식에서 개미라는 단어를 쓸 때처럼.

   백은선 : 직장인 친구들이 “너는 그래도 네 꿈을 이뤘잖아.” 하는 말을 자주 해요. 사실 직장을 열심히 다니는 것도 꿈을 이뤄가는 방식 중 하나일 텐데, 예술을 하는 것만이 ‘꿈’의 범주에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하는 것 같아요. 삶의 방식을 ‘꿈을 포기하고 현실에 타협하는 것’과 ‘현실에 타협하지 않고 꿈을 이루는 것’으로 이분법적으로 이해하게 되면 개미와 베짱이 모두가 소외되는 것 같아요.

   ‘베짱이’로 비유될 수 있을 작가들이 우리 사회 속에서 글쓰기를 행하는 동안 겪을 수밖에 없는 문제들이 ‘개미’로 간주되는 이들이 겪고 있는 문제들과 만나는 순간이다. 개미는 현실에 충실하고, 베짱이가 꿈에 충실한 존재로 이분법적으로 이해되는 한, 꿈과 현실 두 층위 모두가 삶을 다양하게 구성하는 가능성은 끝내 상상되기 어려울 것이다. 개미와 베짱이 모두 꿈과 현실 어느 한쪽을 희생시키기보다는 각자 꿈꾸는 것들을 현실화시켜나가는 삶을 살아갈 수는 없을까?
   데이비드 프레인은 불평등한 급여와 열악한 노동 조건에 대한 논의뿐 아니라 일 자체가 가지는 윤리적 지위에 대해 논의해야 할 때가 왔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일-생활 균형’ 담론은 지나친 일 중심 사회가 발생시키는 불안에 대해 생각해보게 만든다는 점에서 소중한 담론이지만 일을 최우선적 가치로 여기는 기존 사회의 근본적인 틀 자체를 비판적으로 살피기 어렵다는 것이다. “오늘날 노동시장이 자기를 표현하고 창조성을 발휘할 일자리를 제공하는데 처참히 실패하고 있다는”1) 사실은 개미가 처한 사회적 문제이지만, 바로 이러한 문제를 기반으로 베짱이의 삶이 ‘꿈’의 영역으로 지나치게 이상화되거나 비현실적인 것으로 폄하되면서 그 현실성을 삭제 당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술인이 겪고 있는 사회적 문제는 결국 ‘우리 사회의 노동 윤리’라는 큰 틀하에서 논의되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곽시원 작가는 프로젝트의 첫 좌담에서 글쓰기를 노동으로 보아야 하는지 아닌지에 대해 질문하면서, 사실상 글쓰기를 노동이라고 여기지 않는다면 이 프로젝트가 진행되는 동안 독자들에게 공감을 사기가 어려울 것이라고 우려한 적이 있다. 이는 ‘자기만의 방’ 프로젝트가 우리의 문제의식에 공감하는 독자들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진행되기 어렵다는 뜻이기도 했다. 미리 상정한 그 독자분들의 자리가 더욱 넓어지기 위해서는 앞으로는 어떤 기획을 해야 할까?
   ‘자기만의 방’ 프로젝트는 종료되었지만, 프로젝트의 문제의식은 이 지점에서부터 다시 시작될 예정이다. 앞선 회차에서 예고한 바대로 《비유》와 《문학3》은 9월 말의 문학·몹 행사를 공동기획 중이다. ‘자기만의 방’ 프로젝트를 기획하던 단계에서 미처 고려하지 못했던 것들을 보완하여 아이디어를 모으고 있다. 《비유》의 !(하다) 코너 중 유일하게 기획자와 참여자가 달랐던 프로젝트인 탓에 마지막 연재 회차를 기획자로서 마무리하게 되었다. 자기만의 방문은 이렇게 닫히지만, 비유는 이 프로젝트가 가졌던 여러 문제의식들을 계속 이어갈 것을 약속드린다.



   - 마지막 원고를 쓰는 동안


   이 글을 쓰기 위해 동네에 있는 작은 카페로 나갔다. 자리를 잡고 글의 전체적인 구상을 잡는 동안 다섯 명 정도의 그룹이 카페 중앙의 가장 큰 테이블에 자리 잡았고 더이상 집중이 되지 않았다. 다시 가방을 챙겨 도서관으로 갔다. 방학 기간이라 학생들로 가득차 있었고 자리는 없었다. 그다음 장소는 올해 상반기부터 꾸준히 이용해왔던 24시간 독서실이었다. 가깝고 저렴해서 처음 이곳을 발견했을 때 거의 구원이나 다름없어 보였다. 그러나 그날은 도착하고 보니 자리가 없었다. 도서관과 마찬가지로 방학을 보람차게 보내려는 학생들로 가득했고 심지어 대기 인원까지 있었다. 구원 받았던 사람은 내가 전부가 아니었던 것이다. 8월 중순의 더위 속에서 세 장소를 도는 동안 두통이 시작되었고 이미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글이고 뭐고 일단 시원한 곳에서 좀 쉬고 싶었다. 그때 불현듯 모텔이 떠올랐다. 근처 가까운 모텔을 검색해 전화를 걸어 대실 시간과 비용을 물어보았다. 평일 기준, 2만원에 일곱 시간. 곧장 찾아가 체크인을 하고 무거운 가방을 내려놓은 후 에어컨을 틀었다. 자고 일어나보니 세 시간이 지나 있었고 저녁 먹을 시간이었다. 잠시 외출해서 간단한 음식을 사와 먹고 객실에 있는 컴퓨터 책상을 끌어당겨 침대 앞에 놓았더니 등받이는 없지만 그럴싸한 작업 테이블이 되었다. 본격적으로 집중이 되기 시작한 것은 약속한 체크아웃 시간이 되기 세 시간 전이었다. 하루 종일 작업할 곳을 찾다가 대실한 모텔 방에서 ‘자기만의 방’ 프로젝트에 대한 마지막 원고를 쓰고 있다는 사실에 헛웃음이 났다. 그럼에도 이 글을 쓰는 동안 행복했다. 시원하고 조용하고,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이 비록 일곱 시간이 지나면 비워줘야 하는 자기만의 방이라고 해도.




장은정

문학평론가, 웹진 <비유> 편집위원

2018/08/28
9호

1
데이비드 프레인, 『일하지 않을 권리』, 장상미 옮김, 동녘, 2017, 1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