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받기
1화 쓰레기가 우리를 찾아왔다
서울, 피아노
박성진피아노인가, 생각했다.
한창 피아노가 갖고 싶을 때였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굳이 이유를 찾자면 그 무렵 동생이 피아노 레슨을 받기 시작했다. 동생은 <라라랜드>의 테마곡을 연주하는 것이 목표라고 했다. 거기, 클럽에서 연주하는 거 있잖아, 라고 말하는 동생의 뺨에는 희미하게 홍조가 돌았다. 나는 잠자코 동생의 말을 듣기만 했다. 동생은 ost를 틀었다. 차 안에 피아노의 선율이 흘렀다. 이거야, 이거. 동생은 흐뭇하게 중얼거렸다. 더이상 침묵하다가는 오해가 깊어질 것 같았다. 난 처음 듣는걸. 최대한 무심하게 말하려고 노력했다. 동생은 무심하지 않았다. 뭐야, 설마 영화 안 봤어? 맙소사,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왜 그랬어? 이유가 뭐야? 나는 계속 무심함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특별한 이유는 없어.
특별한 이유가 있지 않아도 하루는 곧잘 지나간다. 약속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보고서 제출일이 다가오는 것을 기억하고 서류 발급 마감 시간을 챙기다보면 일주일이 지나가고 한 달도 어느새 흘러가고 마는 것이다. 그러다보면 계절이 바뀌고 정신을 차려보면 1년이 훌쩍 가버린다. 그게 서운하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어른스럽게 살려고, 조금이라도 일다운 일을 하면서 살려고 노력하다보면 그렇게 되는 게 당연한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특별한 이유는 없는 생활. 전화를 받지 않는 점심시간이 12시부터 1시까지인 것에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 납부 마감일은 왜 10일일까? 담당자는 어째서 하필 오늘 연가를 냈을까? 이런 것들은 특별한 이유가 궁금해지지 않는 일들이다. 그렇다면 견적이 생각보다 적게, 혹은 많이 나온 이유는 뭘까? 그런 건 견적서를 조금만 찬찬히 들여다보면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내 삶은 대체로 명확하고 특별한 이유 없이도 잘만 흘러가는 것이었다.
피아노는 이유도 없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걸 본 순간에 깨달았다. 아, 나는 요즘 피아노가 갖고 싶었어. 그렇지 않다면 이 바쁜 아침에 발걸음을 멈추고 피아노 주위를 서성일 리가 없다. 건반을 눌러보고 의자에 앉아보고 피아노의 뚜껑을 문질러보고 냄새를 맡아볼 리가 없잖아. 나는 어쩔 줄 몰라서 피아노 주위를 빙빙 돌았다. 이걸 집으로 가져간다면―나 혼자서 어떻게든 짊어지고 간다고 치고 말이지―최소한 30분은 지체될 텐데, 그렇게 되면 뭐라고 말을 해야 하지?
―왜 이렇게 늦으셨나요?
―피아노를 줍느라 늦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죠?
―길가에 피아노가 있어서요,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습니다.
―왜 지나칠 수가 없었죠?
―피아노를 보기 전까지는 몰랐는데, 보니까 갖고 싶더라고요. 정말 예쁜 피아노였거든요. 밤색 나무로 만들어진, 매끄럽고 윤이 나는 피아노라고요.
―피아노를 치시는 줄 몰랐네요.
―못 쳐요.
―아니 그럼 왜.
머릿속으로 대화를 시연해보며, 묵묵히 출근했다. 도착해서 커피를 한 모금 마시기도 전에 현장팀이 밀어닥쳤다. 내게 주어진 일을 해치우고, 또 현장팀이 놓치는 일들을 챙기고, 그러다가 괜한 일을 벌이고 사과를 하고, 역시 나는 일을 못한다는 것을 깨닫고, 우울해졌지만 표정을 숨기지 못하면 프로가 될 수 없으니까 웃고, 다들 저녁을 먹고 싶어해서 같이 먹고, 밤이 되어 퇴근을 했다. 너무 피곤해서 버스를 기다리지 못하고 택시를 탔다. 택시는 지하주차장까지 슈우웅 데려다주었다. 피아노 같은 것은 이미 머리에서 사라졌다. 누군가 여유로운 사람이 가져갔겠지.
그래서 다음날에도 피아노가 그 자리에 있는 걸 보고, 만화의 효과음처럼 헉! 하고 소리치고 말았다. 나는 의자에 앉아서 건반을 달각달각 눌렀다. 소리는 나지 않았다, 코드를 꽂을 데가 없으니까. 나무로 된 전자피아노라니. 와, 이거 참. 이럴 줄 알았으면 집에서 30분 일찍 나왔을 텐데…… 하지만 그런 게 가능한가? 3분 일찍 나오기도 불가능해. 아쉬워하면서 나는 또다시 피아노를 만지작거리고 문질문질해보고 냄새를 맡으며 질척거렸다. 몇동 몇호 누구니. 피아노와 마찬가지로 나무로 만들어진 서고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이렇게 예쁜 서재를 왜 버렸니, 대체 이유가 뭐니. 여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런 피아노를 어떻게 버릴 수가 있어.
피아노가 버려진 풍경을 사진으로 찍고, 나는 종종 생각했다. 몇동 몇호 누구일까, 무슨 이유였을까. 저렇게 예쁜 피아노와 서재를 가진 사람은 특별한 사람일 것이다. 저렇게 예쁜 걸 버려야만 했던 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지금도 122동 앞을 지나칠 때마다 나는 그 멋진 취향을 지닌 누군가를 생각한다. 사진으로 남겨두지 않았더라면 꿈이라고 생각했을, 그 예쁜 피아노를 가끔 들춰본다. 저런 걸 어떻게 쓰레기라고 불러요. 어떻게든 써야죠, 내 집에 가져다놓고 쓰든지 아니면 글로 쓰든지.
그렇게 해서 나는 쓰레기 프로젝트를 생각하게 되었다.
쓰레기에서 시작된 대화
앙굴렘, 뿌벨
박윤선대학 선배인 성진이 쓰레기를 가지고 프로젝트를 같이 하자고 나에게 제안을 한 것은 《비유》 프로젝트 공모 마감일 하루 전날이었다. 당시 이 프로젝트에는 구체적으로 정해진 것이 없었는데, 친구끼리 무언가를 한다는 것에 끌려 ‘오케이’ 했고, 그날 우리는 오랜만에 이런 저런 수다를 떨었다.
현재 나는 약 10년째 프랑스에 거주 중이다. 스마트폰을 사용하지 않고, 집에 인터넷이 없으며, 개인용 컴퓨터도 없다. 한국을 떠날 때 친언니가 사준 노트북이 집에 있긴 하다만, 가끔 DVD를 틀어볼 때에나 쓰지 다른 용도로는 쓰지 못한다. 내가 지금 사용 중인 컴퓨터는 어딘가의 공용 컴퓨터이다.
여하간 불어로 쓰레기와 관련된 단어는 ‘폐기물’에 가까운 ‘dechet’, ‘오물’에 가까운 ‘ordure’ 등이 있는데, 흔히 버려지는 쓰레기, 쓰레기차가 와서 수거해가는 가정용 쓰레기, 길거리에 놓인 쓰레기통 자체를 가리킬 때에는 ‘poubelle’(뿌벨)이란 단어를 쓴다. 그런데 뿌벨은 안타깝게도 누군가의 성이었다. 뿌벨의 창시자, 뿌벨 씨.
외젠 뿌벨(Eugene Poubelle, 1831~1907)은 1880년대 파리 시의 고위 공무원으로, 쓰레기 수거 시스템을 만든 분이다. 집 앞에 쓰레기를 갖다놓으면 누군가 와서 수거해가는, 지금은 일상적인 일이 이 분 덕에 시작됐다. 수거용 쓰레기 용기에는 뚜껑과 손잡이가 달려 있어야 한다거나, 그 용량은 얼마간을 넘지 말아야 한다는 등의 규칙도 정해졌다. (당시에는 이미 분리수거 개념도 있었다. 일반 쓰레기, 유리병, 굴이나 조개껍데기 이렇게 세 가지로.) 그밖에도 뿌벨 씨는 당시 하수도 시스템 정비에도 기여하는 등 시의 위생 상태 개선에 많은 공을 남겼다.
이 분의 성함은 본인이 지정한 그 쓰레기 용기에 붙어 있다가, 점점 그 안으로 스며들어 쓰레기 전반에 아주 철퍼덕 붙어서 더이상 떨어지지 않게 되었으니…… 이제 모두가 일상생활에서 그의 이름을 부른다. “이거 저기 뿌벨에 갖다버려라.” “아이고, 이런 건 뿌벨이니 버려야지!” 하고.
인터넷을 찾아보니 많은 유명인들처럼 뿌벨 씨도 본인의 이름을 딴 도로를 가지고 있다. ‘ Rue Eugene Poubelle’이라는 이름의 거리다.(Rue는 거리, 도로란 뜻이다. 뿌벨 거리는 매우 짧다.) 에펠탑에서 멀지 않으니, 파리 여행 중에 궁금하신 분들은 한번 찾아가보시길. 아직까지 나는 이 ‘뿌벨’이란 성을 가진 사람을 실제로 본 적이 없다. 그나저나 이름이나 성을 바꾸는 일을 이 나라에선 어떻게 하나? 가능한가? 잘 모르겠다.
이렇게 쓰레받기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이제 우리는 각자가 살고 있는 도시에서 뿌벨, 그러니까 쓰레기에 주목할 것이다. 서울을 걷는 누군가의 시선을 끌고 상상력을 자극할 뿐만 아니라 8시간의 시차가 있는 또다른 도시 앙굴렘에 있는 누군가에게도 영감을 줄 수 있는 쓰레기는 대체 어떤 것일까. 열심히 찾아낸 쓰레기를 상대방에게 보내고, 우리는 서로가 어떤 생각을 했을지 두근두근 기다린다.
comment
2017년 결성된 프로젝트 팀으로 우리의 일상을 호기심 어린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고자 한다. 팀 이름은 영어의 ‘comment’(코멘트)와 불어의 ‘comment’(꼬멍)의 중의적 의미를 지녔다. 멤버인 박성진과 박윤선은 대학교 때 디자인을 전공하며 만났고 졸업 후에는 디자인과 무관한 길을 가고 있다. 박성진은 서울과 성남을 오가며 소설쓰기를 비롯한 다양한 글쓰기를 하고 있으며, 박윤선은 앙굴렘에서 일러스트와 만화가로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2018/01/30
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