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을 두고 ‘애들 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림책은 ‘0세부터 100세까지 보는 책’입니다. 최근 제가 한국어판으로 번역 출간한 벨기에 그림책의 뒷표지에는 ‘3세부터 103세까지 보는 책’이라고 적혀 있었는데요, 저는 그 문구를 보자마자 ‘아, 그러네?’ 하며 빙긋 웃었습니다. 0세부터 3세까지 보는 아기 그림책은 따로 분류되니 ‘3세부터 103세’라는 말이 더 ‘현실적’이라 느껴져서요.
   그림책은 그림이 중심인 장르이기 때문에 텍스트를 읽지 못해도 작품의 내용이나 의미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이부터 노인까지 모두가 그림책을 즐길 수 있는 이유가 ‘그림이 있기 때문’이라고는 생각하진 않습니다.
   그림책에는 어릴 적부터 꾸준히 기억하는 정서, 우리가 지키고 싶은 상식, 우리 삶을 꿰뚫어보는 성찰이 담겨 있습니다. 이 많은 것이 “몇 장 안 되는” 책에 담겨 있지요. 그림책은 16장면을 기본으로 하는데 (작품에 따라 장면이 더 적기도, 많기도 합니다) 누군가는 5분 만에 읽고 “끝!” 외치는 책을 50분 동안 들여다보는 사람이 있기도 합니다. 또한 같은 책을 보고 서로 다른 해석을 내놓거나 ‘꽂히는’ 지점이 서로 다른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니까 그림책은 옷으로 치자면 어디에나 쉽게 걸칠 수 있는 가운이나 편하게 입는 고무줄 바지에 해당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누군가는 ‘이걸 어떻게 밖에서 입어’ 하면서 실내복으로 입지만, 누군가는 ‘이걸 왜 밖에서 못 입어?’ 하면서 외출복으로 입기도 하는 옷. 추울 때는 이불처럼 덮어주거나 숄처럼 몸에 두를 수 있는 활용도가 높은 옷. 연령이나 체형에 꼭 맞는 옷이 아니라서 누구나 입을 수 있는 옷. 남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모습을 무심하게 가려주는 옷. 얇고 가벼운 재질이지만 때론 갑옷처럼 든든하게 나를 지켜주는 옷.

   살아가다 보면, 겉으로 티는 내지 않지만 지금의 내 자신을 감당하기 힘들어서 마냥 숨고 싶은 순간들이 있습니다. 어릴 때는 엉엉 울거나 짜증을 내거나 못 하겠다고 뻗어버릴 수라도 있지, 성인이 된 후에는 속은 썩어들어 가도 ‘아무렇지 않은 척’ 밖에 나가 ‘사람 구실’을 해야 합니다. {그림책=선물}에 사연을 보내준 초록연필님도 그런 순간을 겪었습니다.
   초록연필님은 “자신이 회사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들의 입을 통해 듣게” 되면서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잠도 잘 수 없고, 사람들이 알아보는 것이 두려워 검은색 옷을 입고 야구모자를 푹 눌러쓰고 다녔다고요. 아무것도 먹을 수 없어 체중이 줄고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초록연필님이 어둠의 시간을 건너고 있는 줄, 가까운 사람들마저 몰랐다고 합니다. 적당히 힘든 일은 투덜거리듯 말할 수 있지만 스스로 감당하기 버거울 만큼 큰일을 겪으면 주변에 말하기 힘드니까요.
   어떤 분들과 함께 초록연필님에게 전할 선물을 고르면 좋을까 고민하다가 그림책을 쓰고 그리는 김지연 작가님과 땅콩문고를 운영하는 조형희 대표님을 떠올렸어요. 두 분이 골라주신 책과 편지, 그리고 제 마음을 함께 묶어 초록연필님에게 보냈습니다.
   (다음은 초록연필님에게 보낸 편지를 발췌, 일부 수정한 내용입니다.)

{그림책=선물} 봉투를 열면……


초록연필님에게 가닿은 그림책 선물 


   안녕하세요, 초록연필님. 그림책 선물을 기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프로젝트에 사연을 보내주신 것이 지난 3월이니, 넉 달이 지난 지금은 사연을 보냈을 때와는 또다른 마음일 수 있겠다 짐작해 봅니다. 그렇지만 초록연필님이 받고 싶은 선물은 당장의 상처를 치료할 수 있는 연고가 아니라, 가슴 깊숙한 곳까지 가닿는 따뜻한 먹거리일 거란 생각을 하며 선물을 준비해 보았습니다.
   『슬픔을 치료해 주는 비밀책』(카린 케이츠 글, 웬디 앤더슨 홀퍼린 그림, 조국현 옮김, 봄봄출판사, 2005)을 권해주신 분은 그림책 작가 김지연 선생님입니다. 제가 선생님을 처음 뵈었을 즈음, 선생님께선 억울하기 이를 데 없는 소동에 휘말려 엄청나게 괴로운 일을 겪고 계셨습니다. 그 일을 겪어내는 과정을 한 발짝 옆에서 지켜보면서 저는 ‘한 그루 뿌리 깊은 나무가 가진 힘’ 같은 것을 느꼈습니다.
   고난을 겪으며 단단해진 사람들은 상대방의 여림을 쉽게 보거나, 빨리 강해지기를 독촉하는 법이 없지요. 제가 믿고 존경하는 분이자 마음의 친구인 선생님께 초록연필님의 사연을 보여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선생님은 이런 답장을 주셨습니다.

   “이제 좀 편안해지셨다니 다행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바닥을 치는 일들은 인생에 한번 뿐은 아니겠지요. 늘 용기와 희망을 부르며 달래야 하는 것이 삶이더라구요.
   제가 권하고 싶은 책은 제 책 『꼴딱고개 꿀떡』(김지연 지음, 파랑새, 2016)과 『슬픔을 치료해 주는 비밀 책』과 『오필리아의 그림자 극장』(미하엘 엔데 글, 프리드리히 헤헬만 그림, 베틀북, 2001)인데, 이중에서 『슬픔을 치료해 주는 비밀 책』을 권해드리고 싶습니다. 저도 사용했던 비법의 책이기도 하고 제 버전도 따로 만들어 써본 적도 있답니다. 여기 나오는 처방을 따르다보면 슬픔에 너무 오래 빠져 있지 않게 되고 계속 몸과 마음을 움직이게 됩니다. 초록연필님만의 비법을 만드셔서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에게 전수해 주세요. _그림책 작가 김지연 드림”

   『슬픔을 치료해 주는 비밀책』은 저도 몰랐던 책이라, 이번 기회에 조심스럽게 펼쳐보았습니다. 처방만큼이나 좋았던 건, 주인공이 비밀책에 다가서는 과정과 ‘시간 제한’이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저는 책에 나오는 처방을 모두 따르기는 어렵던데, 초록연필님은 어떠실지 모르겠네요. 왠지 초록연필님이라면 자기만의 비법을 만들고도 남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아무도 몰랐던 곰 이야기』(오렌 라비 글, 볼프 에를브루흐 그림, 한윤진·우현옥 옮김, 아이위즈, 2017)를 권해주신 분은 땅콩문고(파주시 꽃아마길35)를 운영하는 조형희 대표님(이하 땅사장님)입니다. 땅사장님은 책방을 하기 전에 어린이책을 만드는 일을 하셨다고 하는데요. 그 사실을 모르고 있던 (저 같은) 사람도 이 말을 들으면 “아, 어쩐지!” 하고 반응하게 되는 분입니다.
   땅사장님에게서는 무어라 한마디로 정의내릴 수 없는 진중함과 단단함이 느껴지는데요. 그 느낌이 땅콩문고라는 공간에 차분히 배여 있습니다. 초록연필님에게 권하는 책을 골라달라고 부탁을 드렸더니 이런 답장이 왔습니다.

   “『누가 내 머리에 똥 쌌어』의 볼프 에를브루흐가 그림을 그리고, 오렌 라비라는 작가가 쓴 그림책 『아무도 몰랐던 곰 이야기』를 골랐습니다. 철학을 바탕으로 완성한 그림책인데, 기이하게 전개되는데도 어렵지 않고 따듯합니다. 아래에 첨부하는 두 대목만 봐도, 왜 이 책을 골랐는지 알게 되실 거예요. 이 글에 나란히 붙은 그림을 보면 더 좋아하시게 될 거고요. _땅콩문고 조형희 드림”


   숲에는 여러 가지 고요함이 있었어.
   나뭇잎들이 만들어낸 작은 고요함과
   땅이 만들어낸 깊은 고요함이 있었지.
   그리고 아주 큰 나무들이 만들어낸 오래된 고요함이 있었어.
   이 모든 고요함 중에서 가장 조용하고 찾기 힘든 것은
   바로 자신이 만들어낸 고요함이었지.
   곰은 가만히 귀를 기울여보았어.
   자신의 고요함을 듣기 위해서 말이야.

   얼마나 지났을까?
   가도 가도, 어디가 어디인지 알 수 없었어.
   곰은 조심스럽게 물었어.
   “혹시 길을 잃었니?”
   거북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어.
   “그래, 하지만 이렇게 길을 잃고 헤매는 것도
   앞으로 가기 위한 과정이야.”
   곰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작은 소리로 되뇌었어.
   “아, 그렇구나.”


   사실 저는 이전에 이 책을 본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슥 보고 지나쳤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땅사장님이 건네주신 대목을 보는 순간, 책이 완전히 다르게 보이더라고요. 알고 보니 땅사장님도 다른 분에게서 꼭 이렇게 이 책을 소개받았고, 이 책을 다르게 보는 경험을 하셨다고 해요. 초록연필님 또한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마지막 그림책 『머나먼 여행』(에런 베커 지음, 웅진주니어, 2014)을 고른 것은 저입니다. 그건 제가 초록연필님을 아주 조금이나마 ‘알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한 번도 만난 적 없지만, sns를 통해 초록연필님이 요즘 무슨 책을 읽는지, 어떤 순간에 매료되는지 조금은 알고 있지요.
   제가 『머나먼 여행』을 고른 이유는 이 책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것이 ‘펜’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여기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힘을 가진 도구, 또다른 세계로 나를 데려가주는 펜을 보고 저는 새로운 세계를 만드는 행위, 즉 창작을 떠올렸습니다. 초록연필님은 자기만의 세계를 만들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하고 계시니, 제 이야기가 와닿을 거라 생각합니다.
   흠잡을 데 없이 유려한 흐름을 가진 아름다운 작품이지만 특히 가슴을 뛰게 하는 건, 내가 선택한 모험 속에서 나와 닮은 존재를 만난다는 사실입니다. 현실 공간에서는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던 두 존재가, 자신들이 만든 세계 속에서 서로를 알아보게 되지요 그 인연은 현실로 이어지고, 또다른 세계로 나아가는 동력이 됩니다. 이런 이야기를 보면 언제나 가슴이 뛰고, 이런 일이 저의 현실에서도 일어나길 기대하게 되지요.


초록연필님께 보내는 세 사람의 편지


   초록연필님은 아주 반갑게 그림책 선물을 맞아주셨습니다. 그림책을 많이 보는 분이라 아는 작품이 있을 수도 있겠다고 짐작했는데 “세 권 다 보지 못했던 작품이라 더욱 좋았다”고요. 그러면서 이런 감상을 전했습니다.


   가장 마음에 들었던 작품은 『머나먼 여행』이었어요. “이름도 모를 소녀가 자기 작은 방에서 환상의 공간으로 크게 확장돼 나가는 방식이 가슴 탁 트이는 느낌”이 들었어요. 어떤 주문도 마법도 없이, 손에 들고 있는 빨간 막대 하나만으로 새로운 모험이 지속되다니!


   이렇듯 초록연필님에게는 밝은 에너지가 느껴집니다. 애써 작은 상자 속에 넣어두려고 해도 작은 틈을 비집고 나와, 끝내 자신의 존재를 환하게 드러내는 에너지가 느껴집니다. 이런 사람이 어둠의 진창으로부터 한 걸음씩 걸어 나왔다고는 짐작하기 어렵지요. 하루하루를 누구보다 열심히 살고, 그늘 하나 없어 보이는 모습이더라도 그 마음속에 어떤 생채기가 있는지는 알기 어렵습니다.
   초록연필님은 “시간이 좀 지나 그때의 생채기가 좋은 아물었지만 완전히 없었던 것처럼 되진 않는다”면서 “언젠가는 완벽히 상쾌한 마음으로 웃을 수 있을까” 물어보았습니다. 그에 대해 저는 이런 말씀을 드렸어요.

  

저는 상처를 말끔하게 지우는 힐링 크림 같은 건 세상에 없다고 믿는 편이라, 생채기가 아물긴 해도 완전히 없어지긴 어렵지 않을까 싶습니다. 다만 그 생채기를 바라보는 내 마음은 달라질 수 있겠지요. 살다보면 누구나 생채기가 생길 수 있고, 우리는 저마다 다 다른 생채기를 가지고 있으니 그 흔적을 훈장처럼 드러낼 필요도, 부끄러워하며 감출 필요도 없지 않을까요?
   어느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밥도 못 먹고 잠도 못자고, 검은 모자와 옷으로 내 자신을 감추면서도, 멈추지 않고 한 발 한 발 어둠으로부터 조금씩 나아가는 그때의 초록연필님을 떠올려봅니다. 저는 그 모습이 애틋하면서도 대견하고 대단하게 느껴지는데, 초록연필님은 어떠신가요? 무엇도 확신하긴 어렵지만 지금 우리가 이렇게 마주할 수 있는 건, 스스로를 포기하지 않고 묵묵히 내딛은 그 소중한 걸음들 때문이라는 걸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아직 비어 있는 마음속 공간은 제가 좋아하는 선생님들이 권해주신 책들, 김지연 선생님이 만드신 그림책들, 땅사장님이 가꾸는 책방을 통해 채워주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초록연필님의 총총한 초록 걸음들을 응원합니다.


   이제 {그림책=선물}은 이제 하나의 사연을 남겨두고 있습니다. 무더운 여름을 건너는 동안, 어떤 분들과 함께 마지막 그림책 선물을 고를지 고민해봐야겠습니다.
   이 숨 막히는 계절 또한 한 걸음, 한 걸음 걷다보면 어느덧 뒤로 물러날 거라 애써 믿으면서요.


위모씨

그림책을 좋아하고 그림책 만드는 일을 직업으로 삼고 있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공유하고 싶어 안달하는 경향이 있어 좋아하는 그림책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www.facebook.com/we.are.all.children

2018/08/28
9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