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곡/시나리오(2018~2022)
화인
때
주로 겨울이다.
등장인물
정우 가해 소년
우림 죽은 소년
예영 우림의 누나
기택 우림의 부
윤주 우림의 모
세현 담임선생
무대
중앙에 테이블이 있다. 극 상황에 맞게 식탁이었다가 책상이 되기도 한다. 과거가 재현되는 장면에서는 조명이 어두워진다.
1장
기택의 집.
기택과 정우가 식탁을 사이에 두고 앉아있다. 기택은 식사 중이고, 정우는 다리를 떨며 앉아 있을 뿐이다.
사이
사이
정우, 기택을 가만히 바라본다.
초인종이 울린다.
기택, 문을 열면 세현이 들어온다. 두 사람 인사를 나눈다.
정우, 철가방을 들고 일어나다가 세현을 보고 멈칫한다.
정우, 의연한 척 일어나지만 겁먹은 기색이 역력하다. 나가려 하는데 들어오던 윤주와 마주친다. 두 사람, 마주본 채 얼어붙는다.
윤주, 장바구니에서 장 본 것을 꺼내 정우에게 하나씩 던진다. 그저 던진다.
정우, 묵묵히 맞다가 도망치듯 자리를 떠난다.
세현, 나간다.
기택, 말없이 바닥에 나뒹구는 장거리들을 담는다.
자명종이 울리면 무대 어두워진다. 평범한 가정집의 아침 풍경이다. 윤주가 분주하게 아침상을 차리고 있고, 기택은 조간신문을 읽고 있다. 우림, 자명종을 끄며 등장한다. 각자 기도한 세 식구가 식사를 시작한다.
사이
세 사람, 웃는다. 식탁을 둘러싼 분위기는 맑다. 반찬 이야기, 바자회 애기 등 평범한 일상의 대화가 오간다. 그 속에서 우림을 둘러싼 주변이 서서히 어둠에 잠긴다. 세상에 철저하게 혼자인 것 같은 외로움 속에 우림이 있다.
우림, 교복 갈아입으러 가면 윤주, 잡지 못해 보낸다.
무대 다시 밝아진다.
윤주, 환멸을 담아 기택을 바라본다.
예영, 들어온다. 헤드폰 너머로 시끄러운 음악 소리가 새어 나온다.
윤주, 나간다. 예영, 따라 나가려 하면―
사이
사이
예영, 방으로 들어가 록 밴드 음악을 튼다.
기택, 나간다. 무대 어두워지면 우림, 예영의 방 문을 노크한다.
사이
우림, 짐짓 심각한 얼굴이 된다. 예영, 덩달아 심각한 얼굴이 되어 우림을 바라보다가 이윽고 웃음을 터트린다. 우림, 예영을 본다.
사이
우림, 불 끈다.
암전.
2장
교실.
하얀 국화가 수북이 쌓여있는 책상 위에 정우가 비스듬히 걸터앉아있다.
헌화 된 국화꽃을 만지작거리고 있으면 세현, 들어온다.
사이
사이
사이
무대 어두워지며 우림이 들어온다.
우림, 자리를 뜨지 않고 세현의 곁을 서성인다.
사이
세현, 우림을 다독이고 다시 업무에 열중한다.
우림, 무겁게 발걸음을 옮긴다. 정우와 마주친다.
무대 다시 밝아진다.
세현, 자료들을 두고 나간다.
홀로 남은 정우가 우림의 책상 위에 헌화하려 하지만 차마 꽃을 내려놓지는 못한다.
우림이 들어와 곁에 서면 정우, 얼어붙어 우림을 바라본다.
얼어붙은 정우를 우림, 보챈다.
정우, 우림을 만져보다가 불에 덴 듯 손을 뗀다.
사이
정우, 도망치려 한다. 우림, 앞을 가로막는다.
우림, 숨이 넘어가게 웃는다.
그 사이 예영, 하얀 튤립을 들고 교실로 들어온다.
사이
정우의 갈 곳 잃은 시선이 우림과 마주친다. 우림, 생긋 웃는다.
무대 어두워진다. 세현과의 면담을 마치고 돌아선 우림이 정우와 마주친 상황으로 돌아간다.
사이
정우, 가만히 듣다가 담배에 불을 붙인다.
정우, 담배를 깊이 마시고 연기를 내뱉으면 우림에게 건넨다.
우림, 정우의 손에서 담배를 빼앗아 문다. 훅 연기를 들이켜곤 토할 듯이 기침한다.
우림, 연기를 깊이 마시고 뱉는다. 보란 듯이 한번 더 마시고 내뱉는다.
정우, 우림의 몸에 담뱃불을 지져 끈다. 우림, 놀라고 고통스러워 입을 틀어막는다.
무대 어두워진다.
우림, 더는 기댈 곳 없는 위태로운 걸음으로 예영에게 다가온다.
무대 다시 밝아진다.
누구도 어떤 말도 하지 못한 채 얼마 동안의 시간이 흐른다.
사이
우림, 다가가 예영을 안는다.
예영, 나간다.
사이
정우, 우림의 멱살을 잡고 있던 손을 놓는다.
정우, 우림을 물끄러미 보다가 담배에 불을 붙인다. 초조한 모습으로 몇 번이고 연기를 마신다. 그러고는 우림에게 건넨다. 우림, 받아 든다.
우림, 정우의 몸에 담뱃불을 끈다. 정우, 이를 물고 참는다.
암전.
3장
기택의 집.
윤주는 뜨개질을 하고 있고 예영은 빨래를 개고 있다.
사이
사이
사이
무대 어두워진다. 우림, 담담하게 유서를 쓴다.
우림, 유서를 집어 봉투 안에 넣는다. 이내 약을 삼킨다.
무대 밝아진다.
초인종 울린다. 두 사람이 감정을 추스르는 사이 또 한번 울린다.
문 너머에선 대답이 없다.
예영, 문을 열면 정우가 들어선다.
윤주, 부엌으로 들어가 떨리는 손으로 따뜻한 밥을 퍼 카레를 덮는다. 정우 앞으로 내어주면 정우, 식탁 앞에 앉는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음식을 오랫동안 바라만 본다.
사이
정우, 유서를 받는다.
정우, 집 안으로 들어선다.
사이
사이
암전.
에필로그
텅 빈 교실.
정우가 하얀 튤립을 들고 들어선다. 다른 한 손엔 졸업장을 들고 있다. 비로소, 우림의 책상 위에 하얀 튤립을 헌화하고 교실을 나간다.
- 막 -
주로 겨울이다.
등장인물
정우 가해 소년
우림 죽은 소년
예영 우림의 누나
기택 우림의 부
윤주 우림의 모
세현 담임선생
무대
중앙에 테이블이 있다. 극 상황에 맞게 식탁이었다가 책상이 되기도 한다. 과거가 재현되는 장면에서는 조명이 어두워진다.
기택의 집.
기택과 정우가 식탁을 사이에 두고 앉아있다. 기택은 식사 중이고, 정우는 다리를 떨며 앉아 있을 뿐이다.
기택
불겠구나. 좀 먹어.
정우
자장면은 질려서요. 저 여기서 일하는 건 어떻게 아셨어요?
기택
얼굴을 보니 기억날 것도 같구나. 우림이랑 어릴 때부터 곧 잘 어울렸지. 정우. 한정우. 여름이면 교회 풀장에서 물놀이하고 뜰에서 공도 찼지. 할머님이 계셨지? 다리가 불편하셨던 걸로 기억하는데. 맞지? 작년에 돌아가셨고. 우림이가 난생처음 외박했던 날이라 안 잊혀져. 빈소 혼자 지키는 친구 옆에 있어 줘야 된다고 했지.
정우
용건만 말하세요.
기택
졸업해. 학교로 돌아가.
정우
가봐야 해요. 배달 밀리면 욕먹어서.
기택
유서가 있었다.
사이
정우
이우림이 자살했다는 건가요?
기택
네 이름이 적혀있었지.
사이
정우
그러니 죗값 치러라?
기택
선택할 기회를 주려는 거다.
정우
선택지는요.
기택
일, 처벌을 받는 것. 이, 제대로 살아보는 것.
정우
제가 할 답을 이미 정해두셨군요. 이런 기회를 주는 속셈 아니, 이유는요?
기택
내가 믿는 신이 그 아들의 피 값으로 나를 샀다. 그래서 나도 내 아들의 피 값으로 너를 사려는 거지.
정우
목사님다운 대답이네요.
기택
넌 그냥 졸업하고 네 삶을 살아가면 된다. 필요하다면 경제적인 지원까지도 할 생각이야.
정우
나야 손해 볼 거 없지만, (사이) 아저씨가 얻는 건요?
기택
얻는 거?
정우
나 같은 쓰레기를 용서했다는 뿌듯함, 선한 사람 좋은 어른이 된 것 같은 기분…… 뭐 그런 거 있잖아요. 하긴 그걸 자기 입으로 말 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그죠?
기택
우림이 몸에 있던 담뱃불. 네가 남긴 거니?
정우
(비웃으며) 그런 것도 적혀 있던가요?
기택
시신 수습할 때 봤다. 상처가 아물지도 않은 채로 갔더구나.
정우
저런. 딱해라!
기택
(정우 보다가, 애써 담담하게) 옛날에는 큰 인두를 불에 달궈 흉악범들에게 찍었다. 그럼 죽어서도 지워지지 않는 낙인이 남지. 낙인찍힌 사람은 제대로 살아보려 해도 영영 기회가 없어져 버린다. 너랑 마주 앉아 있는 이 시간이 나라고 좋을까? 네가 처벌을 받아서 우림이가 살아 돌아온다면 그렇게 할 거야. 하지만 우림이는 이미 죽었고, 너는 계속 살아가겠지. 이게 너에게 기회를 주는 이유다.
정우, 기택을 가만히 바라본다.
초인종이 울린다.
정우
다 드셨으면 그릇 가져갈게요.
기택, 문을 열면 세현이 들어온다. 두 사람 인사를 나눈다.
정우, 철가방을 들고 일어나다가 세현을 보고 멈칫한다.
세현
가려고?
정우
저 때문에 친히 오신 건 아니죠 쌤?
세현
학폭위 소집이랑 소년보호사건 송치는 각오하고 가는 거겠지?
정우
(얼굴 찌푸리고) 알아듣기 쉽게요.
세현
재판 받아야 한다고.
정우
재판이요?
세현
이제 감이 좀 와? 네가 어떤 상황인지, 너한테 주려는 이 기회가 어떤 건지. (정우의 어깨를 눌러 다시 앉히며) 이건 단순 학교폭력 사건이 아니야. 피해자가 자살을 했으니까 살인 사건에 가까울지도 모르지. 처분이 가볍진 않을 거야. 유가족이 입은 물질적 정신적 손해까지도 배상해야 할 테니까.
정우
(떨리는 주먹을 움켜쥐고) 될 대로 돼라죠.
세현
너무 겁먹을 건 없어. 다행히 너에겐 선택의 여지가 있으니까. 우림이 아버님께 이미 들었겠지. 그러니 모쪼록 다시 학교에서 다시 만났으면 좋겠구나.
정우, 의연한 척 일어나지만 겁먹은 기색이 역력하다. 나가려 하는데 들어오던 윤주와 마주친다. 두 사람, 마주본 채 얼어붙는다.
정우
안녕하세요. (사이) 안녕히…… 계세요.
윤주, 장바구니에서 장 본 것을 꺼내 정우에게 하나씩 던진다. 그저 던진다.
정우, 묵묵히 맞다가 도망치듯 자리를 떠난다.
윤주
기어코…… 기어코 저 애를 불렀네요.
기택
선생님도 계시는데.
윤주
(세현 보고) 죄송해서 어쩌죠? 커피라도 내어 드려야 하는데 보시다시피 제가 그럴 정신이 아니어서.
기택
여보.
세현
괜찮습니다. 그날 이후로 저도 잠을 잘 못 자서 커피는. 유가족의 뜻이라 따르지만 저는 이게 맞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잘못에 따른 처벌을 받는 건 온당한 일이니까요.
기택
사람이 만든 법과 그에 따른 벌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후엔 죗값을 다 치렀다는 해방감만 안겨주겠죠. 그것보단 양심에게 받는 벌이 더 가혹할 겁니다.
윤주
양심. 그렇죠. 그게 화인 맞지 않았다면요.
세현
혹시…… 우림이에게서 달라진 점은 없었나요? 우울해했다거나, 전에 없던 행동을 했다거나. 자살 시 삼킨 약 외 다른 약을 복용하지는
윤주
선생님. 이건 우리 애의 문제가 아니에요.
세현
알고 있습니다. 오해는 마세요. 단지
기택
우림이에겐 우리가 체감할 만한 어떤 문제도 없었습니다. 이 일을 피해자 개인의 문제로 축소하시려는 건가요? 그편이 선생님과 학교에 도움이 되는 거겠죠?
세현
결례가 됐다면 죄송합니다.
기택
저흰 그런 소릴 듣자고 이런 결정을 한 게 아닙니다.
세현
압니다. 누구도 이런 결정을 하지는 못하겠죠. 신을 믿지 않지만, 두 분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그럼.
세현, 나간다.
윤주
우리가 체감할 만한 어떤 문제도 없었다? 정말 그래요?
기택, 말없이 바닥에 나뒹구는 장거리들을 담는다.
윤주
십 삼 년 전. 아무것도 없이 여기 와서 교회 개척했던 때, 기억해요? 네 식구로 시작했던 작은 교회. 가진 게 없어서 잃을 게 없던 시절. 지킬 거라곤 하나님 앞에서의 양심밖에 없었죠. 그때의 양심을 걸고 대답해주세요. 이게…… 도대체 누굴 위한 거죠?
기택
살아갈 아이. 한정우.
윤주
진짜 이유…… 내 입으로 말해볼까요? 교회잖아요. 교회 때문이잖아요. 목사 아들이 자살한 불명예한 교회는 유지될 수 없으니까.
기택
그렇게 단순하게 얘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야.
윤주
괴롭힘을 당하던 아이가 끝끝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리고 죽은 아이의 부모는 그 사실을 은폐하려 한다. 이 단순한 사실에 복잡하게 보탤 게 뭐가 있죠?
기택
죽은 아이는 목사의 아들이다. 우리 신앙에서의 자살은 신에 대한 부정이다. 일이 알려지면 성도들이 실족될 것이다. 자, 원하던 대답이 됐어?
윤주
우림이가 티를 내지 않아서 막지 못했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좀 편한가요?
기택
내 탓이라는 얘길 하고 싶은 거야?
윤주
당신과 나 둘 다요. 아이가 우릴 의지하지 못했던 것도 우리 책임이니까. 최소한 우린 어른이잖아요. 한정우 그 아이를 위한 일인 척 말아야죠. 예상치 못했다는 자기 위로에 지나지 않은 최면도 관두고요.
기택
직접적으로 얘기한 적 없었어.
윤주
우린 알아차릴 수 있었어요.
자명종이 울리면 무대 어두워진다. 평범한 가정집의 아침 풍경이다. 윤주가 분주하게 아침상을 차리고 있고, 기택은 조간신문을 읽고 있다. 우림, 자명종을 끄며 등장한다. 각자 기도한 세 식구가 식사를 시작한다.
우림
잘 먹겠습니다. 누나는요?
윤주
이번 달엔 못 온다는구나. 학교 일이 바쁘다고.
우림
지난달에도 못 왔잖아요.
기택
주말에 학교 일은 무슨. 노느라 그러겠지.
윤주
대학생이잖아요. 탕자 생활도 다 한때고요.
기택
세상이 얼마나 악한데.
윤주
우리 예영이가 어디 그럴 앤가. 믿어줍시다. (우림의 교복을 가지고 와) 아들은 어제 축구했어?
우림
네.
윤주
공차는 건 좋아. 그래도 앞으론 꼭 체육복으로 갈아입고 했으면 해. 남자애니까 그러려니 하려고 해도 동복을 매일 빨기는 힘들거든. 잘 마르지도 않고. (다림질하며) 다리다 보면 마르기야 하겠지마는.
우림
골키퍼가 필요했어요.
윤주
골키퍼?
우림
굳이 포지션을 따지자면 그래요.
기택
골키퍼면 골키퍼지 그런 대답이 어디 있어.
윤주
(뜸 들이다가) 별일…… 없지?
기택
별일?
윤주
요즘 뉴스 틀면 학교폭력이니 뭐니 말들이 많으니까요. 아들 너야 성격도 유하고 밝아서 그럴 일은 없겠지만서두.
우림
말이 나와서 얘긴데요. 우리 반에 옛날부터 친했던 애 둘이 있는데 걔네가 언젠가부터 데면데면해지더니 최근엔 한 놈이 다른 놈을 때리기까지 해요.
기택
뭐 때문에?
윤주
그거야 뭐 힘 과시 아니겠어? 남자애들은 통상 그러니까. 당하는 앤 괜찮고?
우림
힘들어하는 것 같아요. 다른 애들도 걔랑 거리를 두기 시작하다 보니까.
기택
눈치 보는 걸 거다. 사람 속성이 그래. 힘 가진 사람 눈치를 보게 되지. 애들 걱정하는 마음은 알지만 반장이랍시고 네가 굳이 나서서 도울 필요는 없단다. 그건 당사자들이 해결할 문제니까. 괜히 끼어들었다가 나중 되면 중간에서 우스워질 수도 있어.
우림
그런 생각 때문에 누구도 착한 사마리아인이 되려 하지 않는 거겠죠.
윤주
건져놓고 나면 보따리 내놓으라고 하는 악한 세상이잖니. 그러니 더욱 지혜롭게 행동해야 해.
기택
가해에 동조해선 안 되고 말이다.
우림
도와주지 않는 건 침묵이고, 침묵은 암묵적 동조 아닌가요?
사이
윤주
너 정말 아무 일 없는 거 맞니?
우림
아…… 죄송해요. 아침부터 침울하게. (웃고) 그냥 엄마 아버지 생각이 궁금해서요.
윤주
그런 생각을 할 만큼 네가 깊어졌다는 건 기뻐. 하지만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구나. 이렇게 착해선.
우림
다른 얘기 해요 우리. 오늘 바자회 일손 필요하다고 하셨죠?
기택
그랬지. 커피 부스 볼 사람이 없으니까.
우림
제가 도울까요?
기택
학교를 빠지겠다고?
우림
수시도 붙었고, 최저만 맞추면 돼서 하루쯤은 괜찮아요.
기택
늘 말했잖니. 너를 보는 눈들이 많다고. 사람들은 다른 아이들보다 더 엄격한 잣대로 너를 볼 거야. 신앙인들은 본이 되는 삶을 살아야해. 작은 일을 작게 여겼다간 큰 말이 나오기 일쑤지.
윤주
당신은 얘가 학교 가기 싫어서 꾀부리는 걸로 보여요? 아들, 괜찮아. 일손 없으면 엄마가 몸이 두 개인 것처럼 일하면 돼. 걱정 말고 학교 다녀와.
세 사람, 웃는다. 식탁을 둘러싼 분위기는 맑다. 반찬 이야기, 바자회 애기 등 평범한 일상의 대화가 오간다. 그 속에서 우림을 둘러싼 주변이 서서히 어둠에 잠긴다. 세상에 철저하게 혼자인 것 같은 외로움 속에 우림이 있다.
윤주
(방백) 그때 우리가 알아줬다면.
우림
(교복을 가지고) 다 말랐네. 고마워요, 엄마. 아, 잘 먹었습니다.
우림, 교복 갈아입으러 가면 윤주, 잡지 못해 보낸다.
무대 다시 밝아진다.
기택
우리 책임이 아니야. 자책하지 마.
윤주
당신은 언제까지……!
윤주, 환멸을 담아 기택을 바라본다.
예영, 들어온다. 헤드폰 너머로 시끄러운 음악 소리가 새어 나온다.
예영
다녀왔습니다.
윤주
(나가려 하면)
예영
어디가, 엄마?
윤주
……뜨개방에.
예양
이 밤에?
윤주, 나간다. 예영, 따라 나가려 하면―
기택
어디 가니?
예영
……뜨개방에요.
기택
있어라.
예영
(한숨 쉬고) 네. (방에 들어가려 하면)
기택
예영아.
예영
(보면)
기택
저녁은 먹었니?
예영
예.
기택
예영아.
예영
예.
사이
예영
하실 말씀 없으시면 들어갈게요.
기택
이예영
예영
말씀하세요.
기택
뭐가 불만인 거니.
예영
그런 거 없어요.
기택
그럼 왜 그렇게 모나게 굴어.
예영
모나요? 제가요? 아빠 원하는 대로 다 해드리고 있는데요?
기택
뭐?
예영
우림이 그렇게 되고 나서 휴학하고 곁에 있어 드리잖아요.
기택
힘들 때 가족이 모여 있자는 게 이렇게 무섭게 굴 일이야?
예영
저는…… 아빠가 더 무서워요.
사이
예영
방금 그 말은 제가 나빴어요. 잊어주세요.
기택
삼키지 말고 말해. 전에는 할 말 못 할 말 툭툭 다 해서 생채기내더니. 이제는 말 안 해서 사람 속 터지게 만들 참이니?
예영
말해봐야 생채기만 낼 텐데 해서 뭐해요.
예영, 방으로 들어가 록 밴드 음악을 튼다.
기택
그 음악 좀 작게 틀 수 없겠어? 집이 다 흔들릴 지경이야! (방문 열며) 이예영!
예영
엄마 올 때까지만요. 숨 막히게 조용한 것보단 낫잖아요.
기택
밖에서 사람들이 들으면 뭐라고 하겠어.
예영
우림이한테도 이러셨어요? (음악 끄고) 뭘 해도 교정부터 하려고 하고 사람들 눈이 먼저였냐고요.
기택
우리가 왜 행실을 바로 해야 하는지 몰라?
예영
이 가족의 일원이 되는 것도, 남 눈 의식하면서 사는 것도…… 아무것도 선택한 적 없어요. 우림이랑 저는.
기택
우리가 왜 이렇게까지 큰 소리를 내야 하니.
예영
화가 향할 곳이 막혀버려서요. 화가 향할 곳을 막아버린 건 아빠고. 도대체…… 내 동생이 죽은 게 왜 ‘사고’여야 하죠?
기택
그 화가 한정우를 향한다고 해서 우리가 아픈 게 나아질까?
기택, 나간다. 무대 어두워지면 우림, 예영의 방 문을 노크한다.
예영
네.
우림
(들어와) 아버지랑 또 한바탕했다며?
예영
두 달 전부터 오늘 결혼식 가야 된다고 말했는데 오늘 갑자기 오르간을 치라잖아.
우림
그래서 치긴 했고?
예영
아니.
우림
참나. 지 하고 싶은 대로 다 해놓곤 왜 울그락불그락이야?
예영
매번 그러시니까. 시위해야 다음에 안 그러실 거 아냐.
우림
밥 안 먹으면 누나 손해거든? (간식 건네며) 먹어.
예영
잘 키운 동생 하나 열 아빠 안 부럽네.
우림
(놀라서) 말을 해도! (조용히) 누나, 아버지도 늙었어. 상처 잘 받으셔.
예영
난 뭐 상처 안 받아?
우림
철 좀 들어라.
예영
넌 철 좀 들지 말고. 하고 싶은 대로 좀 하고 살아.
우림
어떻게 나까지 그러냐?
예영
말을 말자.
우림
손톱 예쁘네.
예영
이제 봤냐? 비싼 거야.
우림
왜 돈 들여 손톱에 색칠을 하는지 모르겠다.
예영
내 돈 안 들었어. 인욱이가 내줬거든.
우림
남자 좋아한다는 그 형?
예영
하고많은 특징 중에 왜 하필 그걸 콕 집어 말해?
우림
그 형이랑 누나랑 선호형 놓고 경쟁했던 게 잊혀져야 말이지.
예영
언제 적 얘기를 해. 지금은 인욱이 좋아.
우림
그렇겠지. 누나가 선호형이랑 사귀고, 인옥이 형은 다른 애인 생겼으니까.
예영
꼭 그런 것만은 아니고. 여자애들이랑 다니는 것보다 편해. 보이지 않는 미묘한 경쟁, 유치한 견제, 뭐 그런 게 없달까.
우림
누난 그 형 안 이상해? 난 그런 거 좀…… 이상할 것 같은데.
예영
뭐가 이상한데?
우림
그냥. 좀 이상하잖아.
예영
그냥이 어디 있어. 뭐가 이상한데.
우림
잘못된 거니까.
예영
잘못된 거라는 말로 당사자 상처 주는 건 괜찮은 거고?
우림
난 누나가 그런 거…… 이해 못 할 줄 알았어. 우린 늘 그렇게 배워왔으니까.
예영
이해를 하는 건 아니야. 어쨌거나 내 주변에 있으니까 존재를 인정할 뿐인 거지.
우림
그래도……
예영
우림아. 아버지도 인간이야. 인간은 누구나 불완전해. 너나 나나 인욱이나 아버지나 다 똑같아. 그러니까 내 말은 아버지 말이, 우리가 배워온 것들이 너한테 절대 기준이 될 필요는 없다는 거야. 너는 그냥 너로 살아. 아버지 아바타로 살지 말고.
우림
가끔 이예영 멋져.
예영
가끔이 아니고 항상. 너도 멋있어지고 싶으면 공부 열심히 해서 인 서울 명문대 절대 가지 말고 그냥 집에서 무조건 최대한 먼 곳으로 가.
우림
예비 수험생한테 할 소리냐? (사이) 저기, 누나.
예영
(보면)
우림
(머뭇거리고)
예영
야. 나도 돈 없어.
우림
그게 아니라.
예영
그럼 뭔데.
우림
누가 신경 쓰여 본 적 있어?
예영
나 하나 신경 쓰기도 벅찬 인생인데 그런 낭비를 왜 해? 왜. 누가 너 신경 쓰이게 해?
우림
응. 엄청.
예영
어떤데?
우림
일단 걔를 보고 있으면 여기 가슴 어딘가가 시큰거리고 그래. 손까지 욱신거리면서 저리고.
예영
그리고?
우림
어떤 땐 그게 온몸으로 번져.
예영
전엔 그런 적 없어?
우림
응. 처음이야.
예영
그거네.
우림
뭐?
예영
첫사랑.
사이
예영
엄청 좋아하는 거야. 마음이 너무 크면 물리적으로 느껴지거든. 누군데. 내가 아는 사람?
우림
아니. 누나는 절대 모르는 애.
예영
지수? 미연이?
우림
정우
예영
누구?
우림
한정우라고.
예영
언제부터?
우림
게네 할머니 돌아가시고 나서부터.
우림, 짐짓 심각한 얼굴이 된다. 예영, 덩달아 심각한 얼굴이 되어 우림을 바라보다가 이윽고 웃음을 터트린다. 우림, 예영을 본다.
예영
너…… 아니야. (낯빛이 변해) 넌 지금 그냥 헷갈리고 있는 거야. 그냥 신경 쓰이는 거야. 측은해서.
우림
나를 피하는 것 같아. 힘들 것 같아서 옆에 있어 주고 싶은데 멀어지려고 해서 너무 힘들어.
예영
나도 친구랑 멀어졌을 때 그랬어.
우림
이 정도로 마음이 아팠어? 어떨 땐 막 화도 나. 왜 나를 피할까. 왜 나를 그냥 지나칠까. 내가 뭘 잘못했나. 어떻게 해야 다시 옆에 있을 수 있을까.
예영
왜 그래 무섭게.
우림
무섭다고?
예영
심각하게 생각할 거 없어. 필요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다 보면 벌 거 아닌 일도 별일이 돼버린다? 아무것도 아니야. 알겠지? (재촉하며) 대답해.
우림
응.
예영
(안도하며) 그래.
사이
우림
나 자러 갈게. 누나도 잘 거지? 불 끈다.
예영
고마워.
우림, 불 끈다.
암전.
교실.
하얀 국화가 수북이 쌓여있는 책상 위에 정우가 비스듬히 걸터앉아있다.
헌화 된 국화꽃을 만지작거리고 있으면 세현, 들어온다.
세현
꽃이 마를 때까진 둬야겠지. 기억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위한 거니까.
정우
기억하고 싶은 사람들? 하긴. 죽은 사람에 대한 기억은 미화되니까. 내가 얠 쥐어 팰 때 흘긋거리면서 피하던 놈들도 여기 꽃 한 송이씩은 올릴 수 있겠죠. 저는 왜 남으라고 하셨나요.
세현
(자료 건네며) 받아. 공부해놓은 게 없으니까 대학은 힘들겠지만 직업학교는 갈 수 있어. 기술 배워두면 살만해. 우림이 아버님이 도와주신다고 하시니까 등록금 걱정은 말고 너한테 맞는 곳으로 찾아봐.
정우
그 녀석은 죽어서까지 나를 빚쟁이로 만드네. (받아서 대충 훑어보고)
세현
우림이는 진심으로 너를 아꼈어. 네 우윳값도 매달 내줬고, 배식할 땐 유독 네 식판에 뭐라도 더 얹어주려고 했던 게 내 눈에도 보일 정도였으니까.
정우
전 그게 싫었던 거예요. 왜 달라지냐고요. 할머니 돌아가신 후로 걘 항상 나를 가엾고 딱한 거리의 고양이 보듯이 봤어요. 그 눈빛, 못 견디게 싫었구요.
세현
못났구나. 잘난 자존심 버려. 안 그럼 넌 앞으로 누구에게도 그 어떤 것도 받지 못해.
정우
받을 생각 없어요. (세현에게 자료를 다시 넘기며) 갚지도 못할 거.
세현
네 잎 클로버 찾겠다고 풀 속 뒤적거려본 적, 있니?
정우
(보면)
세현
난 항상 애타게 찾아 헤맬 땐 못 찾다가, 포기하고 돌아서려 할 때쯤 생각지도 않게 네 잎 클로버를 발견하곤 했어. 그걸 꺾으면서 무슨 대단한 생각을 했겠어. 그냥 내거구나 하면서 운이 좋았다고 생각했지. (사이) 이건 네 잎 클로버 같은 거야. 행운.
정우
그럼 이 행운도 사실 기형적인 거겠네요. 네잎클로버처럼.
사이
정우
어떻게 죽었다던가요? 이우림이요.
세현
(뜸 들이다가) 약.
정우
그럼 고통 없이 편하게 죽는 거, 맞죠?
세현
진통제를 잔뜩 모아뒀대. 몇 백 알을. 그 많은걸 삼켰을 텐데 고통이 없었을 리가.
정우
그 많은 약을 모을 동안 아무도 몰랐다고요?
사이
세현
출석 신경 써. 이제 여차하면 졸업 못 해 너.
정우
자수할 거예요.
세현
뭐?
정우
오늘 와보니까 경찰서보다 감옥보다 이 교실이 더 무섭네요. 저 책상에 눈이 달려서 꼭 나를 쳐다보는 것 같고.
세현
견뎌.
정우
네?
세현
그렇게 괴로워하면서 가책을 느끼는 게 네 죗값이야. 자수? 그건 네가 결정할 게 아니야. 우림이 아버님이 어떤 마음으로 유서를 덮어 주셨을지를 생각해. 네가 살아갈 남은 날들을 위해서 힘든 결정을 하신 거야.
정우
나 때문에 사람이 죽었는데요? 근데 그냥 살라니. 그게 ‘제대로 사는’ 건가요?
세현
이미 어른들끼리 합의된 내용이야.
정우
당사자가 빠진 합의가 어디 있어요?
세현
낙인찍힌 채 사는 게 쉬운 줄 알아? 지금은 모르겠지만 시간이 조금만 지나도 이해할 수 있을 거다. 다 널 위해서야.
정우
날 위해서. 그 말을 듣는 게 난 왜 이렇게 외롭죠?
사이
정우
내내 외로운 기분이 들었어요. 그때 이후로 오늘 학교에 나오기까지 일주일 내내요. 그 날 두 어른 틈에서 저는 숨이 턱턱 막혔어요. 돌아가는 길엔 먹지도 않은 밥이 얹혀서 위액까지 게워냈고요. 근데 지금 이렇게 이상하기만치 자수를 막는 선생님을 보니까 알겠네요. 그 자리에 나를 위해 모인 어른은 없었던 거죠.
세현
병적인 불신이구나.
정우
합리적 의심이죠. 그날 돌아가서 생각 해봤어요. 알겠더라고요. 그 아저씨는 자기 직업 때문에 아들이 자살했다는 사실을 세상에 내놓을 수 없었던 거죠.
세현
그분 마음을 그렇게 매도하면 마음이 좀 편해?
정우
선생님은요?
세현
뭐?
정우
담임하고 있는 반 학생의 죽음이 사실 사고가 아니라 학교 폭력으로 인한 자살이라는 걸 숨기고 싶은 건가요? 아니면, 알고도 묵인했다는 걸 숨기고 싶은 건가.
세현
(비웃고) 묵인?
정우
알고 계셨잖아요. 저랑 이우림 멀어진 거.
세현
몰랐어.
정우
몰랐다…… 참 간편하고도 비겁한 말이네요. 뉴스에서 많이 들었던 말 같기도 하고.
세현
묵인이네 뭐네 하는 그런 말로 네 책임을 나랑 나눠 가질 생각 마.
정우
저 그날 거기 있었어요.
무대 어두워지며 우림이 들어온다.
세현
종례는 없고 가정 통신문 잘 나눠줘 반장. 이상.
우림, 자리를 뜨지 않고 세현의 곁을 서성인다.
세현
할 말 남았니?
우림
많이 바쁘시죠?
세현
고삼 담임이 그렇지.
우림
다음에 올까요?
세현
정우 얘기지?
우림
그걸 어떻게―
세현
모르는 게 이상하지. 왜 틀어진 거야. 사이좋던 놈들이.
우림
그게…… 작년에 게네 할머니 돌아가시고 잠깐 방황하는 걸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기다렸는데 풀고 싶어도 말을 안 해주니까 어디서부터 뭐가 어떻게 엉킨 건지도 모르겠고. 답답해 죽겠는데, 올해 들어선 내가 뭐가 그렇게 미운지 때리기까지……
세현
부모님은 아시고?
우림
속상해하실 것 같아서.
세현
직접 부딪혀본 적은?
우림
그건……
세현
피할 수 없을 것 같으면 정면으로 부딪혀 보는 것도 방법이겠지. 그래도 해결이 안 되면 내가 직접 경고를 줘도 되고.
우림
직접…… 경고요? 제가 이런 얘길 드린 걸 알면 화낼 텐데.
세현
다른 수가 있니?
사이
세현
(조금 귀찮은) 너처럼 조숙한 애들이 있는 반면 몸만 컸지 덜 자란 놈들이 있어. 정우는 결손가정 아이들이 흔히 겪는 성장통을 겪고 있는 거야. 너에 대한 열등감도 있겠고. 아무래도 괴리감을 느끼겠지.
우림
(뭔가 느끼고) 아. (혼잣말로) 그럴 수도 있었겠다.
세현
고삼 막바지에 불미스러워질 일은 없었으면 좋겠구나. 우림이답게.
세현, 우림을 다독이고 다시 업무에 열중한다.
우림, 무겁게 발걸음을 옮긴다. 정우와 마주친다.
정우
생각보다 입이 싸네.
무대 다시 밝아진다.
세현
우림이는 나를 찾아온 적 없어.
정우
배우신 분이라 그런가. 계산이 빠르시네. 그런데 제가 다른 건 몰라도 그날 일에 대한 기억은 정확해서.
세현
난 그런 기억 없어. 가령 그게 진짜라고 해도 네가 자수를 한다면 내가 부정하는 네 진술엔 힘이 실리지 않을 거야. 누가 가해자의 말을 믿지? 시간을 돌리고 싶어? 참회하고 싶어? 그럼 그 방법이 꼭 자수일 필요는 없어.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고 남에게 갚으면서 다시 제대로
정우
남? 남 누구요? 내가 죗값을 갚아야 할 사람은 한 사람뿐이고, 그 앤 죽었어요.
세현
쉽게 갈 수 있는 길을 돌아서 가지 않았으면 좋겠다. 최소한 이 말은 진심이고.
세현, 자료들을 두고 나간다.
홀로 남은 정우가 우림의 책상 위에 헌화하려 하지만 차마 꽃을 내려놓지는 못한다.
정우
타의야. 내가 자수하면 너네 집, 이 학교 다 무너져.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은 없어.
우림
정말?
우림이 들어와 곁에 서면 정우, 얼어붙어 우림을 바라본다.
우림
뭐해. 집 가자.
얼어붙은 정우를 우림, 보챈다.
우림
우리 집 가기로 했잖아. 전화도 안 받고 뭐야.
정우
너…… 너……?
우림
뭐야. 꼭 볼 거 본 사람처럼.
정우, 우림을 만져보다가 불에 덴 듯 손을 뗀다.
림
체온 재 본 거야? 내가 죽은 게 아니면 안도하려고?
사이
우림
참, 너 조금 전에 성생님한테 기세 좋게 자수하겠다고 하던데. 왜 아직 이러고 있어? 사실 그럴 마음 없던 거지? 막상 하려니까 겁나? 역시 낙인찍힌 채로 살긴 싫은 거지? 타의랬나? 네가 자수하지 않는 게 정말 타의야?
정우, 도망치려 한다. 우림, 앞을 가로막는다.
정우
비켜.
우림
내가 무서워?
정우
나…… 너한테 죄책감 같은 거 안 느껴. 내가 자수하지 않는 게 자의든 타의든 무슨 상관이야. 그깟 일도 못 견디고 죽은 주제에.
우림, 숨이 넘어가게 웃는다.
정우
왜 웃어?
우림
누구는 차라리 죽는 게 나을 만큼 힘들었는데, 너한텐 그게 그깟 일인 게 너무 웃기잖아.
정우
(우림의 멱살을 잡고) 내가 어떤 놈인지 감을 잃었구나. 그딴 소릴 하면서 웃기까지 하는 걸 보면.
우림
마음대로 해. 이제 많이 맞아줄 수 있어. 나 아픈 거 못 느끼거든.
그 사이 예영, 하얀 튤립을 들고 교실로 들어온다.
예영
일 년 새 키가 더 자랐네.
사이
예영
방금 그거 나름 인사야. 이제 오랜만에 봐도 반갑다고 인사할 수는 없는 사이니까. (우림의 자리로 가) 내 동생 좋아하는 꽃은 따로 있는데.
정우의 갈 곳 잃은 시선이 우림과 마주친다. 우림, 생긋 웃는다.
우림
무슨 생각해? 무슨 말이라도 해. 아무 말도 못 하겠어? 불편하지? 누나 얼굴 보기 무서워? 왜 도망 안 가? 아. 도망가고 싶은데 발이 말을 안 들어?
예영
튤립이야. 국화만 놓으란 법은 없으니까. 튤립 꽃말 뭔지 알아?
정우
하고 싶은 말 있으면 그냥 해. 이제 오랜만에 만났다고 해서 이런 저런 얘기 얘기하기도 뭐한 사이인데.
예영
그 날,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네 생일날.
무대 어두워진다. 세현과의 면담을 마치고 돌아선 우림이 정우와 마주친 상황으로 돌아간다.
정우
생각보다 입이 싸네.
우림
(놀라서 보면)
정우
믿었는데 영 뒤통수 맞은 기분이다.
우림
담임한테 이런 얘기 한 건 지금 이게 처음이야. 진짜야. 그냥 기다렸어. 우리끼리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해서.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믿었어. 우리가 우리였던 때로.
정우
넌 가끔 낯간지러운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더라. 우리? 우리라니!
우림
내가 잘못한 게 있으면 빌게. 아니면 그냥 나 때려. 원 없이. 풀자. 뭐 때문에 꼬였는지 말이라도 해줘.
정우
싫은데.
우림
왜. 그걸 말하면 네가 너무 비참해질 것 같아?
정우
뭐 이 새끼야?
우림
맞잖아.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는 몰라도 아주 모르진 않아. 너를 본 게 몇 년인데. 근데 한정우, 네 눈에 보이는 게 다가 아니야.
정우
내가 못 본건 뭔데.
사이
우림
내가 너한테마저 이런 얘길 못했던 이유는 아버지 때문이야. 뒷말 나올만한 얘기를 하거나 금기를 어기는 행동을 해선 안 됐으니까. 집 밖에서나 안에서나 내 몸엔 시선들이 달라붙었어. 떼어낼 수도 없고 도망칠 수도 없는. (고개 푹 숙이고) 가족들을 사랑하지 않은 건 아닌데 외로웠어. 감정까지 통제받고 늘 교정 당하고 무엇 하나 솔직해질 수가 없으니까. 난 아무한테도 이렇게 날 것 그대로의 마음을 얘기해본 적 없어. (정우를 보며) 아마도 그래서 넌 나한테는 아무 결핍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을 거야. 근데, 근데 난 정말 너보다 조금도 낫지 않아.
정우, 가만히 듣다가 담배에 불을 붙인다.
우림
우리가 멀어졌던 건 나 때문이야. 너만큼 나는 나를 내보이지 않았으니까. 우린 둘 다 외로워. 지금을 시작으로 우리는 전보다 더 많은 걸 공유할 수 있을 거야.
정우, 담배를 깊이 마시고 연기를 내뱉으면 우림에게 건넨다.
정우
의식. 다시 ‘우리’가 되기 위해선 금기를 깨는 의식 정도는 해줘야겠지.
우림, 정우의 손에서 담배를 빼앗아 문다. 훅 연기를 들이켜곤 토할 듯이 기침한다.
정우
어설프게 마시니까 식도에 걸리지. 기도를 활짝 열어. 네 폐한테 세상에 이렇게 탁하고 독한 연기도 있다는 사실을 알려줘.
우림, 연기를 깊이 마시고 뱉는다. 보란 듯이 한번 더 마시고 내뱉는다.
정우
어쭈?
우림
됐지. 이걸로 다 털자. 너 오늘 생일이잖아. 축하 못 해줄까 봐 조마조마했어. 우리 집 가자. 미역국이 있는 건 아닌데 그래도 너 우리 집밥 좋아했으니까. 전처럼 와서
정우
아직. 나름 서약인데 도장이 빠지면 아쉽지. 어디가 좋을까. 너무 눈에 띄어서 좋을 건 없으니까―
정우, 우림의 몸에 담뱃불을 지져 끈다. 우림, 놀라고 고통스러워 입을 틀어막는다.
예영
어떻게 그래.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네가 어떻게 그래!
정우
나도 이렇게까지 될 줄은 몰랐어! 나도 내가 왜 그렇게까지 했는지 모르겠단 말이야. 그게 그렇게…… 죽을 만한 일이야?
예영
원래 전혀 무관한 사람에게서 상처받는 것보다 애착 있던 상대에게 받는 상처가 더 아리고 깊은 법이야. 너를 아무 의미 없는 사람으로 생각했다면 그런 일을 겪어도 무너지지 않았겠지만 우림이는 너를……!
정우
누나는 떳떳해?
예영
무슨 뜻이야.
정우
누나도 이우림한테 의미 있는 사람이었잖아. 걔가 약을 몇 개나 삼켰는지 알아? 그 많은 약을 모으는 동안 아무것도 몰랐어?
우림
방금 그 말 되게 비겁했다. 그래, 그게 너의 본질인 거야. 밑바닥. 어디 더 밑으로 내려가 봐.
정우
그 집에서 걔가 마음 둘 사람 누나뿐이었잖아.
우림
그렇지.
예영
(애써) 너 지금 웃겨. 내가 몰라줘서 그렇게 됐다고 화내고 있는 거잖아. 괴롭힌 건 너야. 우림이가 죽은 건 전적으로 네 잘못이니까 주변 사람들한테 책임 전가 하지 마. 그거 2차 폭력이야. 그건 내 탓이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무대 어두워진다.
우림, 더는 기댈 곳 없는 위태로운 걸음으로 예영에게 다가온다.
우림
누나가 맞았어.
예영
뭐가?
우림
나는 절대…… 걔를…… 그런 애를, 그럴 수가 없어. 그러니까 이제 걱정 안 해도 돼.
예영
(우림이 하는 말의 의미를 알고) 그거 봐. 내가 뭐랬어. 아무것도 아니랬지?
우림
(울 듯이 웃으며) 응. 아무 것도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무대 다시 밝아진다.
누구도 어떤 말도 하지 못한 채 얼마 동안의 시간이 흐른다.
정우
그래. 누나 탓 아니야. 책임 전가, 2차 폭력. 틀린 말 없어.
예영
네가 미워.
정우
그렇겠지.
예영
근데 내가 더 미워.
사이
예영
너를 만나면 화내고 모진 말로 널 괴롭혀야겠다고 생각했어. 그럼 개운해지지 않을까 해서. 그런데 아니네. 내 화는 애초는 나를 향했던 거였나 봐.
정우
그런 말을 왜 해.
예영
남들한테 만큼 내 동생한테 관대할 수가 없었어. 힘들 줄 알면서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어. 사실은 아무것도 아니길 바랐던 거지. 그걸 인정하기 싫어서 너한테 모든 걸 전가하려고 했어. 그래서 나는 이 비극의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어. 아니. 전적인 책임자야.
정우
차라리 조금 전처럼 나를 탓해줘. 화를 내. 누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다 내 탓이라고 말해줘.
예영
내 말이 듣기 불편한 건 네 양심이 살아있어서야.
우림, 다가가 예영을 안는다.
우림
누나도 마찬가지야.
예영
한정우. 그래도 너한텐 위선이나 계산은 없어서 다행이다. 위선보단 위악이 낫거든.
예영, 나간다.
우림
마음이 좀 편해? 누나가 네 책임을 나눠 가져가 줬잖아.
정우
어쩌란 거야. (괴로워서) 어떡하라고. (우림의 멱살을 잡고) 도대체 이제 내가 뭘 어떻게 해야 되는 건데, 이우림!
우림
내가 왜 이우림일 거라고 생각해?
정우
그게 무슨
우림
이우림은 죽었잖아. 설마 나를 귀신쯤으로 생각한 건 아니지?
사이
정우
그럼 넌 누구야.
우림
너는 너를 참 몰라. 나는 너야.
정우, 우림의 멱살을 잡고 있던 손을 놓는다.
우림
나 잊지 마. 그게 네 의식이 나를 낳은 이유니까.
정우, 우림을 물끄러미 보다가 담배에 불을 붙인다. 초조한 모습으로 몇 번이고 연기를 마신다. 그러고는 우림에게 건넨다. 우림, 받아 든다.
우림
뭔데?
정우
서약. 그때 마무리 못 했던 거.
우림
(연기를 마시고) 진심이야? 뜨거울걸.
우림, 정우의 몸에 담뱃불을 끈다. 정우, 이를 물고 참는다.
우림
아파?
정우
괜찮아. 더 깊게 남겨. 지워지지 않게.
우림
내가 너한테서 잊히지 않게.
정우
그래. 내가 널 잊지 않게.
암전.
기택의 집.
윤주는 뜨개질을 하고 있고 예영은 빨래를 개고 있다.
예영
나도 뜨개질 배울까?
윤주
네가?
예영
엄마 방금 나 비웃은 거 맞지?
윤주
어울리는 걸 해.
예영
왜 안 어울릴 거라고 생각해?
윤주
너 어릴 때 기억 안 나? 매번 반도 안 뜨고 안 한다고 팽개쳤잖아. 그 실들 모으면 트럭 한 대야.
예영
에이, 트럭 한 대는 심했다.
윤주
오도 가도 못 하고 묶여 앉아서 뭐 하는 거 너한텐 고역이야.
예영
그래도 지금은 어른이잖아. 그 정도 참을성은 생겼어.
윤주
어른이 뭐 좋은 거라고. 되려고 하지 마. 넌 그냥 네가 되면 돼.
예영
그 말 오랜만에 듣네. 자주 했잖아, 엄마가. 나 말이 되게 멋져서 우림이한테도 한 적 있어.
윤주
그랬어?
예영
응. 그런데 있지. 정작 우림이가 우림이 일 수 없게 만든 게 나더라. 아빠의 그런 점이 싫었는데 나도 똑같았어.
사이
예영
엄마. 우리가 우리로, 내가 나로 사는 게 왜 이렇게 힘들어?
윤주
다음 학기에 복학해.
예영
엄마.
윤주
그래도 돼 예영아. 복학 안 하더라도, 할 수만 있으면 지금이라도 떠나. 떠나서…… 집에 오지 마.
사이
윤주
여기 있으면 우린 터지지도 못한 채로 곪고 곪아서 부풀 거야. 우리가 한데 모여 있다고 해서 슬픔을 나눠 가질 수 있는 게 아니잖아. 슬픈 사람이 셋이 될 뿐이지.
예영
아빠도 그러래?
윤주
그건 중요하지 않아.
예영
엄마는 괜찮고?
윤주
그것도 안 중요해.
예영
아니, 중요해. 엄마한텐 내가 필요해.
윤주
내 필요완 상관없이 우리가 너를 아프게 한다면 주저하지 말고 떠나야 해. 그래야 해. 너를 잃는 게 너를 잃지 않는 길이니까.
예영
여태껏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았어 나는. 그래서 내 몫까지 우림이가 옥죄여져서 질식해버린 거야. 그래서 나 이제 못 떠나.
윤주
나 때문이야. 이 엄마가 갖고 있던 기대가 환상이 우림이를 제대로 못 봤어.
예영
그런 말 하지 마.
윤주
약을 봤었어. 청소하다가 침대 밑에서.
사이
윤주
그 많은 약을 보고도 내 아들이 설마 그럴까, 설마 나쁜 생각을 할까, 내 아들이, 누구보다도 착한 내 새끼가…… 다른 사람도 아닌 내 아들이! (가슴 미어지는) 말도 안 되는 건데 다른 이유가 있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한번만 물어봤으면 되는데 그게 뭐가 무서워서. 속으로 알아달라고 얼마나 소리쳤을까. 얼마나 비명을 질렀을까.
무대 어두워진다. 우림, 담담하게 유서를 쓴다.
윤주
정우를 향한 원망으로 얼룩진 언어들. 그리고 그 끝엔 이렇게 적혀있었지.
우림
내가 사랑한 모두가 나를 아프게 해요.
우림, 유서를 집어 봉투 안에 넣는다. 이내 약을 삼킨다.
무대 밝아진다.
윤주
모두의 범주에 내가 있겠지.
예영
나도 있고.
초인종 울린다. 두 사람이 감정을 추스르는 사이 또 한번 울린다.
예영
누구세요?
문 너머에선 대답이 없다.
예영, 문을 열면 정우가 들어선다.
예영
무슨 생각으로 여길 왔어.
윤주
밥은. 먹었니?
예영
엄마.
윤주
안 먹었으면 앉아. 카레 좋아했잖아. 마침 데우고 있었거든. 우리도 밥때라.
윤주, 부엌으로 들어가 떨리는 손으로 따뜻한 밥을 퍼 카레를 덮는다. 정우 앞으로 내어주면 정우, 식탁 앞에 앉는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음식을 오랫동안 바라만 본다.
정우
여기 오면 좋았어요. 이 집의 온기가요. 바닥도 따뜻했고 공기도 따뜻했고 아줌마가 해주는 이런 밥도. 엄마가 있어 본 적이 없어서 ‘있었으면 좋겠다’라던지 ‘어떤 사람이었을까’라던지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요. 근데 아줌마를 보면서 그런 것들을 많이 상상했어요. 할머니 돌아가시고 혼자 지내면서는 더 많이 했고요. 우림이가 반찬들 가져와서 냉장고에 채워줄 때마다, 나를 혼자 두고 집으로 돌아갈 때마다요.
윤주
먹고서 말해. 따뜻할 때 먹어야 맛있지.
정우
제가 자수하겠다면 어쩌시겠어요?
사이
정우
자수…… 하고 싶은데 그것도 이기적인 선택일까 봐요. 이미 한 사람을 앗아간 제가, 나머지 것들까지 앗아갈 수는 없잖아요.
윤주
네가 자수를 하든 안 하든 삶은 이미 무너졌어. 가정을 말할 것도 없고 어렵게 일군 교회도 사실상…… 죽은 거나 다름없지. 물론 네가 자수해서 우림이의 자살이 공론화되면 공식적으로 죽겠지만. 그래도…… 차라리 그편이 나아.
정우
내 죄가 다른 사람의 인생까지 바꿀 거라곤 생각도 못 했어요.
윤주
그 변화도 마땅히 닥칠 일이기 때문에 일어나는 거야.
예영
야. 한정우.
정우
(보면)
예영
어떤 결정이든 네가 해. 너를 대신해서 살아줄 수 있는 사람은 없어.
윤주
일이 일어난 내외부에서 책임을 회피하고 위신을 유지하려고 할 거야. 그러기 위해선 우림이의 죽음을 축소하거나 은폐하려 하겠지. (유서를 정우에게 건네며) 자수하려거든 증거로 내. 아니면 태우던가. 그럼 우림이는 사고로 죽은 게 되겠지. 뭐든 네가 선택해라.
정우
내가 제일 무서운 게 그거에요. 내 기억이 날 미화해서 언젠가 정말 그 애가 사고로 죽었다고 믿어버리는 거요.
정우, 유서를 받는다.
정우, 집 안으로 들어선다.
기택
내가 조금 늦었구나.
윤주
이 애를 부른 게, 당신이었어요?
기택
그래.
윤주
또 이 애한테 책임을 물을 셈인가요?
기택
자수를 하겠다더군.
예영
아빠가 말린다고 될 일 아니에요.
기택
말리려는 게 아니다.
사이
기택
후회 안 할 자신 있어?
정우
어차피 후회는 평생 해요.
기택
네가 이전에 만났던 모두가 너한테서 등 돌릴 거야. 시간이 지나서 이 일을 모르는 누군가가 너에게 좋은 마음을 갖고 다가왔을 때, 이 일을 알게 된다면 너를 떠날 수도 있다.
정우
어쩌겠어요. 그게 나였는데.
기택
자수. 원한다면 해야지. 단, 조건이 있다.
사이
기택
졸업은 하도록 해.
예영
아빠?
기택
두 달은 그리 길지 않아. 견뎌봐라. 그 사이에 우리도 정리하고 떠나볼 테니까.
윤주
여보.
기택
처벌을 받는다고 해서 네 삶이 끝나는 게 아니야. 죗값을 치르는 게 목적이면 쓰나. 고등학교는 마쳐야 할 수 있는 선택들이 많아진다. 혼자 세상에 던져질 너한테 이건 선택이 아니야.
암전.
에필로그
텅 빈 교실.
정우가 하얀 튤립을 들고 들어선다. 다른 한 손엔 졸업장을 들고 있다. 비로소, 우림의 책상 위에 하얀 튤립을 헌화하고 교실을 나간다.
윤수진
주의! 잎이 마르기 전에는 이 식물에게 물을 주지 마시오.
말라버린 건 물을 주어 살릴 수 있지만, 물을 많이 주어 썩어버리면 소생이 불가함.
2018/08/28
9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