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하는 시
5화 서울인기에서 시 선물하기 2
서울인기에 가자. 서울인기가 뭔데? 한강에서 공연 보는 거야. 언니가 좋아하는 새소년도 온대. 그리고 모임별도 온다. 오, 모임별을 볼 수 있다니! 그래 좋아. 가자. 은선의 권유로 서울인기 티켓팅을 하고 나는 내내 그날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지금껏 그런 형태의 뮤직 페스티벌에 가본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돗자리를 깔고 앉아 밴드의 공연을 볼 수 있다니. 야외에서 음악을 들으면 너무 좋겠다. 생각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근데 우리 시 선물하기 해야 하는데, 언제 하지? 지하철 순환선을 타고 돌면서 역마다 붙여볼까. 안 가본 동네에 가볼까. 아니면 서울인기 가서 나눠줄까? 그냥 놀면서 틈틈이 시도 나눠주고 그럴까. 그래, 그거 좋은 생각이야.
우리는 한 사람당 시 두 편을 프린트해서 갔다. 시집에 있는 시 한 편과 시집에 없는 시 한 편으로 하자. 이걸 몇 장을 프린트해야 할까. 백 장 정도 하면 어떨까. 지난번에 망원에서 선물할 때 열 장 선물하는 것도 너무 힘들던데, 백 장 괜찮을까? 그게 적다면 적고, 많다고 하면 또 엄청 많잖아. 그래도 거기에 백 명은 넘게 오니까, 괜찮지 않을까? 안 되면 그냥 다시 가져오지 뭐. 컬러 프린트를 했다. 은선은 「도움의 돌」과 「Scream with me」를, 나는 「여름의 발원」과 「지정석」을 가져갔다. 「여름의 발원」엔 “한여름에 강으로 가,/ 언 강을 기억해 내는 일을 매일 하고 있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 시를 선택한 이유는 철저하게 저 문장, “한여름에 강으로 가” 때문이었다. 우리가 정말로 한여름에(올 여름은 정말 너무 심하게 더웠다.) 한강에 가서 시를 선물하니까! 그리고 거기 온 사람들은 한여름에 강가에 온 사람들이니까. 우리가 함께한 ‘여름의 발원’이 어디인지 시 선물을 받은 사람들도 궁금해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각자의 여름을 생각했으면 좋겠다. 지나갔으면 좋겠는데, 지나가지 않고 머물러 있는 여름에 대해. 아니면 계속 머물러 있고 싶은데, 흘러가버리는 여름에 대해. 나는 시를 읽는 사람들이 시가 가진 질문을 함께 궁금해하고, 각자의 대답을 곰곰 생각해보는 찰나의 시간을 많이 쌓았으면 좋겠다.
서울인기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축제 분위기였고, 사람이 많았고, 다들 신나고 들떠 있었다.(그 들뜬 사람 중엔 나도 있다.) 햇볕이 너무 뜨거웠는데 그게 별로 상관이 없었다. 공연 시작하기 전에 얼른 나눠줄까? 근데 부스 구경도 하고 싶은데. 노는 걸 먼저 해야 하는지, 일을 먼저 해야 하는지 우리는 혼란스러웠다. 그래서 일하다 놀다가 일하다 놀다가 하는 걸 선택했다. 시가 프린트된 뭉치를 들고, 돗자리를 하나하나 찾아가서 말을 걸었다. 뭐든 두번째 할 땐 처음보다 쉽다고 하던데, 나처럼 낯가림 만랩 소유자는 처음이나 두번째나 별반 차이가 없었다. 은선은 거침없이 사람들에게 다가갔다. 빨리 나눠주고 놀고 싶다고 했다. 알았어, 나도 분발할게. 은선은 시를 그냥 나눠주지 않았다. 사람들과 대화하는 게 보였다. 아니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지? 할말이 있나? 궁금해서 물어봤다. 무슨 말을 그렇게 오래했어? 그냥 이게 어떤 프로젝트인지 왜 나눠주는지 이야기를 좀 해줘야 할 것 같았어. 아, 그렇구나. 나도 그래야겠다. 그렇지만 거절당하면 부끄러우니까, 시에 관심 있을 것 같은 사람들에게 나눠줘야지. 이를테면, 돗자리에 앉거나 누워서 책을 읽는 사람들.
서울인기 한쪽에선 밴드의 음악이, 다른 한쪽에선 디제잉이 한창이었다. 이렇게 음악 들으면서 책 읽으면 정말 좋겠다. 우리도 다음엔 책을 가져오자. 그리고 빨리 나눠주고 돗자리에 누워 있자. 책을 읽고 있는 사람에게 다가가서 시를 주면서, 이거 제가 쓴 시인데요, 시를 선물하는 프로젝트를 하고 있어요. 한번 읽어보세요. 하고 말했다. 마치 랩을 하듯이 속사포로 말했다. 망원에서 나눠줄 때와는 전혀 다른 반응이었다. 사람들이 감사합니다, 잘 읽을게요. 하면서 기쁘게(!) 받아주었다. 기쁘게 받아주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갑자기 용기가 막 생겼다. 시를 선물한 것은 나인데, 오히려 내가 선물을 받는 기분이었다. 주는 것과 받는 것은 연결이 되어 있고, 무엇을 잘 주는 것만큼 무엇을 잘 받는 것도 중요하다. 주는 사람의 마음을 헤아려 주는 것만으로도, 선물을 준 사람도 선물을 받은 것과 같은 마음이 된다. 그러니까 우리는 모두 선물 받은 사람이 되었다는 것.
돗자리를 유심히 살펴보며 가고 있는데, 어느 돗자리에서 강성은 시인의 시집 『Lo-Fi』를 발견했다. 오! 로파이다! 시집 읽는 사람인가 봐. 이런 데서 시집 읽는 사람을 만나다니! 신기하고 반갑다. 생각하면서 그 돗자리 주인들에게 시 선물을 나눠주었다. 그런데 어디서 왠지 본 것 같은 기분, 낯설지 않은 이 느낌은 뭐지? 분명 아는 사람이 아닌데 아는 사람인 것 같다. 처음 보는 사람인데 이상하다, 하며 뒤돌아서서 다른 곳으로 갔다. 잠시 후에 친구에게서 카톡이 왔다. 누군가 서울인기에서 시 선물을 받았다고 올린 트윗을 캡처해서 보내준 거였다. 그 순간 알게 되었다. 아까 우리가 시를 선물했던 사람들이 시인이었다는 것을. 그들은 유수연, 조찬연 시인이었다! 살다보니 시인에게 시 선물을 하는 날도 오는구나. 지면에서 혹은 기사에서 본 사진 때문에 얼굴이 낯이 익었나봐. 이런 데서 만나다니 너무 반갑다. 이따가 다시 가서 인사하고 올까? 그러자고 했지만, 왠지 다시 가서 인사하기가 부끄러워서 그냥 우리 자리로 돌아왔다.(유수연, 조찬연 시인 반가웠어요. 다음에 만나면 반갑게 인사할게요.) 나는 생각지도 못하게 시를 선물 받게 된 시인들의 마음이 궁금했다. 그리고 부끄러웠다. 누군가 내 시를 읽어준다는 건 고맙고 감사한 일이지만, 몹시 부끄러워지는 일이기도 하니까.
우리가 디제잉 음악에 이끌려 그 앞에 당도했을 때, 춤을 추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신나 보였다. 나는 용기가 없어서 춤추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아직 날이 밝았고,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재미있었다. 은선이 흥이 나서 춤을 추면서 스테이지(?) 앞으로 나갔다. 은선의 손에는 시 뭉치가 들려 있었다. 은선이 리듬에 맞춰, 춤을 추면서 뱅글뱅글 돌면서, 팔과 다리를 흔들면서, 춤을 추고 있는 사람들에게 시를 한 장씩 나눠줬다. 춤을 추던 사람들이 은선이 준 시를 자연스럽게 받아서 읽으면서 계속 춤을 췄다. 그 자연스러움이 너무 놀라워서 대박, 대박이다! 하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플래시몹 같기도 하고, 어떤 짜여진 퍼포머 같기도 했다. 어쨌든 놀라운, 리듬 앤 포엠!
서울인기에서 많은 사람을 만났다. 직접 만나지는 않고 인스타그램을 통해 만났다. 내 인친(인스타그램 친구)들이 이렇게 많이 서울인기에 있다니! 그런데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각자의 돗자리에서 열심히 이 밤을 즐기고 있구나, 생각했다. 사진과 동영상들이 실시간으로 피드에 무수히 많이 올라왔다. 그래서 어쩐지 다 함께 축제를 즐기는 기분도 들었다. 그들을 찾아가 시 선물을 주고 싶었지만 부끄러웠고, 백 장이나(?) 준비한 시 선물이 이미 동이 난 상태였다. 이렇게 다들 받아주는 분위기인 거 알았으면 더 많이 프린트해 올 걸 그랬다. 조금 아쉬웠다.
망원에서 시를 나눠줄 때와 서울인기에서 시를 나눠줄 때. 사람들이 달라진 것일까. 우리가 달라졌던 것일까. 선물이라는 것은 그게 무엇이든 상관이 없지만, 누가 주는가 하는 점에서는 상관이 있는 것 같다. 안전한 사람. 잘은 모르겠지만 해가 되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이 주는 무언가는 그게 무엇이든 선물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경계해야 할 것 같은 사람, 나에게 무언가 바라는 것이 있는 것 같은 사람, 안전하지 않아 보이는 사람이 주는 것은 그게 무엇이든, 크든 작든, 받고 싶지 않은 것이 될 수 있다. 선물은 받고 싶지 않은 것이 되는 순간 선물이 아니게 된다. 시가 받고 싶지 않은 선물이 되는 것은 슬픈 일이다.
기쁜 마음으로, 기꺼이 받고 싶은 선물이 될 수 있도록 다음엔 어디에서 누구에게 어떻게 시를 나눠줄 것인지 조금 더 고민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했던 방식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조금 더 재미난 방식으로.
만나서 시 쓰기, 안미옥
안미옥, 백은선, 김승일. 우리는 세 사람이다. 우리는 시인이고 친구들이다. 종종 만나서 밥을 먹었다. 그러다 누가 만나서 밥만 먹지 말고 시도 쓰면 어떻겠냐고 했다. 그래서 우리들은 ‘만나서 시 쓰기’가 되었다. 밥 먹는 거랑 시 쓰는 거 말고 재밌는 거 뭐 없나. 고민하다가 이걸 하게 되었다. 이건 ‘선물하는 시’다. 시를 선물하는 프로젝트다.
2018/10/30
11호